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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섬 1 호텔로 돌아가게 되면 어쨌든 데릭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을 수 없다. 인기척도 없는 이른 아침에, 클로이는 해변가에서 아름다운 얼굴을 불안한 듯 찌푸리고 있었다. 이 섬에서 틀림없이 한가롭고 느긋하게 휴가를 보낼 수 있으리라는 말을 데릭한테서 들었을 때는 설마 그가 자기를 침대로 유혹할 것이라고는 상상해 보지도 않았다. 물론 영원히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하자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서로 사랑을 느껴 데릭과 함께 여행을 떠난 것도 아니다. 클로이는 그런 기색이나 태도를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매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을 때는 서로의 속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느껴 왔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뜻밖에도 사람의 마음이란 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릭과는 지난 일 년 반 동안 같은 광고회사에서 근무해 왔지만 그는 단 한번도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또한 클로이는 항상 그를 의지할 수 있는 좋은 남자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휴가를 함께 보내자고 했을 때에도 클로이는 불안해하거나 조금도 경계심을 갖지는 않았다. 다만 행선지가 괴로운 추억이 깃들여 있는 그리스라는 말을 듣고 조금 주저했을 뿐이다. 하지만 아름다운에게 해의 풍광에 매력을 느낀 나머지 결국은 승낙하고 말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이 잘못이었다. 클로이는 고개를 들었다. 흰 짧은 바지와 얇은 면으로 된 티셔츠를 입고 해변에 앉아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녀는 이따금 가냘픈 팔을 들어 눈빛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와 같이 대수롭지 않은 동작에도 우아한 기품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어젯밤 데럭이 돌발적인 행동을 한 것은 어쩌면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 머리 탓인지도 모른다고 클로이는 생각했다. 쓴웃음을 지으며 클로이는 호텔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과거에 파리에서 모델로 일한 적이 있는 클로이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몸매로는 무슈 르네의 모델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리와 허리둘레는 모델 시절과 조금도 다름없이 날씬했지만, l8 살 무렵에는 별로 살이 없었던 가슴과 히프가 풍만하게 도드라져 무척 매혹적으로 보였다. 로비의 천장에는 30 년대의 영화에 나옴직한 예스러운 커다란 선풍기가 천천히 돌고 있었다. 클로이가 지금까지 본 호텔 중에서 가장 오래 된 듯했다. 토스 섬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이 호텔은 아담하고 깨끗했다. 요즘과 같이 단순한 콘크리트 덩이처럼 생긴 호텔과는 달리 멋과 품위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휴가를 즐기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온갖 설비가 다 갖춰져 있었다.


이처럼 근사한 호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틀림없이 어마어마한 부자일 것이다. 프런트에 맡겨 둔 열쇠를 받으면서 클로이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데릭에게 전화를 거는 편이 좋을까, 아니면 직접 그의 방으로 가보는 편이 좋을까?…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클로이는 결심이 서지 않았다. 정직한 클로이는 남들도 자기 마음과 똑같은 줄 믿고 있다가 곤경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어젯밤 데릭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일도 그런 경우의 하나였다. 성실하고 진지한 그에게 설마 음흉한 속셈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어젯밤 그의 유혹을 뿌리친 클로이에게 데릭은 아주 심한 욕설을 남긴 채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나에게 반하는 남성들은 어째서 한결같이 침대로 함께 갈 것을 요구하는지 모르겠다. 이 호텔 프런트에서 마치 얼굴 표정을 감추려는 듯한 자세로 쳐다보고 있는 그리스 소년만 해도 그렇다. 황홀해서 넋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클로이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클로이의 머리카락은 해변의 아름다운 흰 모래처럼 반짝거렸고 눈동자는 일몰 직전의 바다색과 똑같은 진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클로이는 자기의 앞가슴에 쏠려 있는 그리스 소년의 시선을 의식하자 험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마주 쏘아보았다. 정말이지 데릭이나 이 그리스 소년뿐만 아니라 남자들이란 모두 똑같은 표정을 짓는다. "클로이, 데릭하고는 여행을 같이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틀림없이 나중에 후회하게 될걸." 프런트에서 데릭에게 전화하기로 마음먹고 카운터 위에 있는 전화에 손을 뻗치는 순간 문득 클로이의 귀에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힐러리의 말이 들리는 듯했다. 나는 왜 그녀의 충고에 순순히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까 후회스럽기 짝이 없다. 그때 클로이는 바쁜 업무를 처리하느라 몸과 마음이 다 같이 지쳐 있었다. 어쨌든 휴가를 가자,

여행을

떠나자는

생각밖에는

아무런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만약 혼자 여행을 떠나는 줄 알면 남자들이 접근해 올까 겁이 났고, 데릭과 함께 간다고 하면 그런 번잡스러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리라는 생각이 마음속 한구석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데릭과는 단순한 친구 사이였으므로 힐러리의 충고를 일소에 붙이고 말았다. 그렇지만, 만일 힐러리에게 결혼문제만 없었더라면 그녀하고 둘이서 여행을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23 살이 되면서부터 클로이는 친구들 대부분이 결혼하는 것을 보고 자기 혼자만이 아직도 미혼으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남들은 다 결혼하는데, 나만은…' 문득 괴로운 과거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가까스로 억제했다. 그리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데릭이 묵고 있는 방에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을 불러도 응답이 없다. 이상한데… 어쩌면 아침식사를 하러 벌써 아래층에 내려와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프런트에 앉아 있는 그리스 소년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리스 인만이 유별나게 지니고 있는 단정한 용모, 게다가 햇볕에 그을은 얼굴에 새하얀 이가 산뜻하게 드러나 매우 인상적이다. "미스터 심프슨은 방에 없는 모양인데, 혼자서 식사하러 갔을까요?" 그리스 소년은 눈썹을 지그시 모으더니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심프슨 씨는 오늘 아침 일찍 떠나셨는데요. 이거 보세요, 이렇게…" 캐비닛에서 열쇠를 꺼내는 걸 보면서도 클로이는 믿어지지 않았다. 틀림없이 데릭이 묵고 있던 방의 열쇠였으나 아마도 산책하러 나간 걸 떠난 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떠나지 않았을 거예요. 우린 어제 도착했는걸요. 혹시 착각한 게 아닐까요?" "아닙니다.

틀림없이

떠나셨어요.

귀중품들을

내달라고

하셨죠.

물으시더군요.

오늘

아침

피레에프스로

그래서 시간을 가르쳐

여기 가는

드렸더니

오셔서 배가

저더러

저희들에게

방에

시에 가서

맡기셨던

출발하느냐고 짐을

가져오라

하시더군요." 그리스 소년은 클로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어젯밤 말다툼을 했다고 이렇게까지 할 건 없을 텐데. 아무리 호되게 거절당해서 모욕감을 느꼈다 하더라도 하는 짓이 너무나도 어린애 같지 않은가.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니 데릭이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날 리가 없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의 귀중품 가방 속에는 그의 것과 함께 클로이의 여권수첩과 여행자용 카드도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역시 프런트 직원이 잘못 생각했을 것이다. 클로이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조금 침착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금세 겁이 덜컥 났다. 설마 내 여권수첩과 카드까지 몽땅 갖고 가진 않았겠지. 클로이는 갑자기 긴장되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지는

심상찮은

모습을

그리스

소년이

급히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곧 뚱뚱한 중년 남자와 함께 돌아왔다. "저는 이 호텔의 지배인입니다. 같이 오신 손님이 급히 떠나셔서 곤란하게 되셨다는 말을 방금 이 스테파노스에게 들었습니다만…" "그 사람이 정말 여길 떠났나요?" 지배인의 안내를 받으며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로비를 빠져나가면서 클로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안 됐습니다만, 심프슨 씨는 분명히 떠나셨습니다." 지배인의 시선에는 어쩐지 남의 비밀을 캐내고 싶어하는 듯한 표정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엄숙한 분위기가 감도는 깨끗하고 아담한 사무실로 들어섰다. "자아, 자리에 앉으시죠. 뭘 좀 마시겠습니까? 아침 일찍부터 햇볕을 쐬셔서 갈증이 나시겠죠?

기분이

언짢지는

않으십니까?

강한

햇살은

익숙해지지

않은

분에게는

해롭답니다." "아뇨, 그보다 그 사람에게서 뭔가 맡아 두신 건 없나요? 수첩이나 메모 같은 것 말예요." "없는데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프런트에 가서 확인해 보고 오겠습니다." 지배인은 공손하게 말하고 나갔다. 클로이는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우아하고 호화롭게 꾸며진 방이었다. 왠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이 방에는 클로이를 압도하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이윽고 도어가 열리더니 또다시 지배인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을 쳐다본 순간 클로이는 그의 대답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데릭은 여권수첩과 여행자용 카드를 가지고 떠나 버린 것이다. 데릭의 것과 따로 맡겨 두었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어째서 그가 하자는 대로 그에게 맡겼는지 클로이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클로이는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느 틈엔지 오른손으로 왼손 손가락을 더듬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짓을 하게 된 것은 그 손가락에서 결혼반지를 빼낸 후부터인데, 그 뒤로 곤경에 빠질 때면 으레 나타나곤 하는 버릇이었다. 그 반지를 낌으로써 몸과 마음이 영원히 결합된 줄로 클로이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그때 남자들이란 신용할 수 없는 족속들이란 걸 알고 있었더라면 그토록 깊은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 텐데… 뿐만 아니라, 이처럼 데릭에게 여권까지 빼앗기고, 가지고 있는 현금이라곤 핸드백 속에 겨우 10 파운드밖에 남지 않은 한심스런 꼴이 되어 그리스의 작은 외딴 섬에 혼자 남아 있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분이 약혼자가 아니었습니까?" 클로이가 별로 지장이 없을 정도로 전후 사정을 설명하자, 지배인은 의아한 듯이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뒤룩거렸다. "네, 단순한 친구관계예요. 그 이상의 사이는 아니죠. 참 기가 막히군요. 어처구니없는 친구를 가진 꼴이 되었으니…" "나쁜 친구 하나가 천 명의 적보다도 더 위험하니까요." 지배인은 남녀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도통했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이 섬에서 나갈 때는 여권이 필요없습니다만, 출국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즉시 저희 아테네 본사에 연락해서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지 알아보죠. 우선 이 서류에 기입해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지배인은 자리를 떠났다. 넘겨받은 서류에는 기입해야 할 자질구레한 항목이 많이 있었다. 지배인의 말로는 관광객이 소지품을 분실했을 때 제출하는 서류라고 했다. 재빨리 써나가다가 이윽고 혼인이라는

항목에 이르러

클로이는

한순간

망설였다.

그러나

<별거중>이라고

기입하고 조심스럽게 종이를 접었다. 되돌아온 지배인이 아침식사를 권했으나 클로이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거절했다. 사무실에서 나온 그녀는 다시 해변으로 나갔다. 수많은 관광객들을 피해 백사장 끝까지 걸어가자 호텔 건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클로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 위에 턱을 괴고는 눈앞에 펼쳐지는 짙푸른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스엔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지난 2 년간 마음속에 갇혀 있던 괴로운 추억이 파도와 함께 밀어닥쳤다. 여기는 토스이지 로도스가 아니다. 데릭도 역시 레온은 아니야. 하지만 어젯밤 데릭에게 강제로 키스당할 뻔한 순간, 지난날 레온과 함께 보냈던 나날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었다. 클로이가 레온 스테파니데스를 만난 것은 20 살 때였다. 화려한 파리에서 3 년간 모델노릇을 했지만 고용주인 무슈 르네의 친척집에서 클로이는 마치 수녀와도 같은 엄격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구두를 벗어던지고 편안히 쉬어 봤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루에 l0 시간이나 모델노릇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늘어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녀의 생활 속에 레온이 뛰어들게 되자 갑자기 싹 바뀌고 말았다. 마치 어린 묘목이 태양을 향해 곧게 자라나듯이 클로이는 레온에게 강하게 이끌려 갔다. 드디어 사랑을 고백하기까지 이르렀고, 클로이의 마음은 하늘에라도 오를 듯 한없이 기쁘기만 했다. 그리스의 젊은 선박왕 레온 스테파니데스와의 결혼식은 그의 신분에 걸맞게 호화롭고 성대했다. 파리로 달려온 부모님은 결혼이 너무나도 빨리 진행된다고 염려했지만 클로이는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진심으로 레온을 사랑하고 있었고 레온 역시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얼빠진 짓이었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왜 냉정한 마음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재산과 명예를 함께 갖춘 레온이 무슨 이유로 그리스의 관습대로 중매결혼을 안했을까? 그리스에서 제일 가는 명문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영국인인 자기를 선택했을까?


클로이는 이와 같은 의문점을 한번도 주의깊게 따져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레온의 남자다운 모습에 완전히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 당시 레온은 나이가 30 살이었고 연애 경험도 풍부했다. 그래서였는지 20 살 천진난만한 순정파였던 클로이는 레온의 남달리 능숙한 사랑의 기교에 당장 넋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리비에라에서 지낸 한 달 동안의 신혼여행은 클로이가 꿈꾸고 있던 것보다 더 달콤했다. 뿐만 아니라 뜨거운 정열을 마음껏 발산시킨 나날이었다. 그 동안 단 한순간도 남편의 애정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고, 또한 자기가 남편에게 가장 뜨겁게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클로이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부질없는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게 되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손님!" 클로이를 찾으러 나온 그리스 소년의 갑작스런 목소리에 클로이의 머릿속은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죄송합니다만, 호텔로 돌아가셔야겠습니다. 지배인께서 드릴 말씀이 있다는군요." 공손한 그리스 소년의 전갈을 받고 클로이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는 또다시 옛날 일을 회상했다. 당신은 '바다의 요정'이야. 투명할이만큼 하얀 피부는 더할나위없이 좋은 진주고, 반짝반짝 빛나는 머리카락은 달빛에 씻긴 모래 같군… 이와 같이 속삭이는 레온의 말을 듣고 클로이의 마음은 황홀하게 녹아 버렸다. 그 달콤한 말이 어떤 꺼림칙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어떤 꺼림칙한 사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몹시 역겨운 비밀이었다. 그것은 클로이에게는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고 마음속 깊이 상처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스 소년의 뒤를 따라 호텔로 돌아온 클로이를 지배인은 웃는 얼굴로 맞아들이며 또다시 사무실로 데려갔다. "아테네에 있는 본사에 전화를 걸어보았더니, 다행히도 중역하고 얘기가 됐습니다. 상황을 설명해 줬더니 최선을 다해 처리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더군요." 지배인은 자기가 클로이를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클로이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으로서는 지배인의 말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 나가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아, 이젠 아무쪼록 마음 푹 놓으시고 휴가를 즐기시기 바랍니다. 아테네에서 연락이 들어오는 대로 전해 드릴 테니까요." 일단 마음은 놓였지만 방에 돌아와 곰곰 생각해 봐도 상황은 별로 변한 게 없다. 호텔비는 영국을 떠나기 전에 미리 불입해 놓았고, 이렇게 작은 섬에서는 큰 돈을 쓸 곳도 없지만, 역시 l0 파운드밖에 가지지 않는 채 외국에 홀로 남아 있다는 건 너무나 불안하고 허전한 일이었다.


저녁때 클로이는 좀 느지막이 식당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만난 중년의 영국인 부부와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호텔 지배인이 클로이 앞에 나타났다. "무슨 연락이라도 있나요?" 어쩌면 데릭이 마음을 돌려 공항이나 다른 어딘가에 여권을 맡겨 두고 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클로이의 마음속에는 한가닥 희미한 희망의 빛이 솟았다. "이제부터 아테네에 가셔야겠습니다. 준비는 다 돼 있습니다. 이곳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아테네로 가셔야 합니다. 거기서…" "지금요? 아테네로 가라구요?" 어제 피레에프스 항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그 기나긴 여정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클로이는 무심코 이맛살을 찌푸렸다. "예,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밤 안으로 아테네까지 가주셔야만 하겠습니다. 여권의 분실은 중대한 일인데다가 그 외에도 제출하셔야 할 서류가 있답니다." 지배인은 클로이를 깨우쳐 주듯이 정중히 말했다. 확실히 그의 말이 옳았다. 더구나 그녀의 여권은 분실한 게 아니고 도난당한 것이다. 클로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데 아테네에는 얼마나 머물러 있어야 할까?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할까? 갈아입을 옷은 한 벌만 있어도 될까? 클로이는 재빨리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오늘 밤 아테네에 있는 우리 자매 호텔에서 묵으시면, 거기서 내일 아침에 그런 문제를 춰급하는 당국에 안내해 드릴 겁니다." "이렇게 힘을 써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클로이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15 분 후, 클로이는 지배인과 함께 호텔 뒤쪽에 있는 헬리포트에 있었다. "헬리콥터를 타시면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시간이 절약되죠. 우리 회사의 중역들도 섬에서 섬으로 호텔을 둘러볼 때면 항상 헬리콥터를 이용합니다." 이런 말을 지껄이며 지배인은 긴장하고 있는 클로이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확실히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잘만 되면 여권 문제를 해결하고 내일 안으로 이 섬에 되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클로이가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뒤 비행사는 즉시 헬리콥터를 이륙시켰다. 얘기를 하려고 해도 프로펠러 소리가 커서 자신의 말소리조차 들릴 것 같지 않았다. 이윽고 눈 아래로 어선의 등불이 해변에 쏟아진 무수한 별들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클로이는 아테네까지 가는 데 걸리는 소요시간을 물어보지도 않았고 듣지도 못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이젠 거의 아테네에 도착할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여러 개의 섬 위를 지나왔는데도 아직까지 육지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헬리콥터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이제야 겨우 아테네 공항에 도착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클로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국제공항의 조명등이 눈부시게 밤하늘을 비춰 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클로이의 눈에 보인 것은 검붉은 하늘을 향해 뻗쳐오르는 한 줄기의 서치라이트 빛뿐이었다. 이윽고 헬리콥터는 둔한 소리를 내면서 착륙했다. 여긴 아테네가 아니다… 그럼 도대체 어딜까? 클로이는 불안에 사로잡혀 비행사의 옆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말 한마디 없이 문을 열고 총총히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반쯤 열린 문으로 유럽 원산의 백리향의 향기를 머금은 산들바람이 조용히 불어왔다. 멀리서는 그리스 어로 얘기하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로이는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겁이 났다. 문을 확 열고는 무작정 뛰어내렸다. 만약 억센 팔에 떠받쳐지지 않았더라면 바닥에 넘어져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오." 매정하게 그 사나이는 말했다. 클로이는 좁은 언덕길을 올라가야 했다. '여긴 어디예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잠시 동안 그대로 걸어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다본 클로이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프로펠러가 돌고 있다. 멎어 있어야 할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힘차게 회전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클로이는 억지로 침착을 가장하며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사나이는 클로이의 팔을 붙잡은 손에 좀더 힘을 줄 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기만 했다. 갑자기 길이 끊어지더니 스페인 풍의 저택이 눈앞에 나타났다. 유리창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뜰과 그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풀장을 비추고 있었다. 저택은 좀 낡은 느낌은 들지만, 아무리 봐도 가난한 사람의 집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집 저쪽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이더니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클로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어깨 폭이 넓은 키가 큰 남자의 그림자. 그걸 바라보는 클로이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고, 가장했던 침착성은 한순간에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여긴 어디예요?"


클로이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묻자 그의 억센 손이 잡고 있던 그녀의 팔을 놓아 주었지만, 그녀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다. "여기 말야? 여긴 에오스 섬이야. 별칭은 '새벽의 섬'이지. 왜 당신이 여기 있는지 그건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쌀쌀맞은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퍼져나갔다. 아아, 레온이었구나! 정말 레온이 저지를 만한 짓이다. 클로이는 비로소 어슴푸레하나마 어떻게 된 사정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미 결혼초의 클로이와는 전혀 다르다. 이젠 절대로 속아넘어가진 않을 테다. 이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클로이는 몸을 약간 움직였다. 레온도 클로이의 동작을 따라 몸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자 창에서 비치는 불빛에 레온의 얼굴이 뚜렷이 드러났다. 좀더 험상궂게 변하긴 했지만 헤어질 때와 거의 다름이 없었다. 선이 뚜렷한 얼굴 생김새, 몇 대 전에 섞인 영국인의 피를 이어받은 푸른 눈동자, 긴 속눈썹, 그리고 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입 언저리. 잘생긴 가면 밑에는 추악한 모습이 감춰져 있다. 절대로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대답을 알고 있을 거라구요?" 클로이는 천천히 이맛살을 찌푸려 보였다. 이런 짓을 하다니, 도대체 레온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가 또다시 무슨 흉계를 꾸미든 무슨 짓을 저지르든 이번에는 절대로 마음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 과거 자신의 교활한 목적 때문에 순진했던 클로이를 속여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힌 냉혈한이므로― "나와의 이혼 수속을 밟으시려고요? 좋아요. 언제까지나 시시한 연극을 같이 하는 건 아주 질색이에요." 자기 스스로도 뜻밖이라 할 정도로 클로이는 태연하게 말했다. "암, 나도 역시 동감이야. 하지만 클로이, 이혼하기 위해서라면 일부러 이런 귀찮은 짓을 할 필요가 어디 있었겠어?" 클로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어렵지 않게 이 곤경에서 벗어날 줄 알았던 자신감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당신은 도대체 뭘 원하세요?" "당신이야, 클로이. 당신을 갖고 싶어. 당연하잖아? 당신은 내 아내니까." 레온은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클로이는 한순간 귀를 의심했지만 잘못 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 인은 결코 아내의 방자스러운 행동을 용서하지 않아. 이렇게 당신을 강제로 끌어온 것은 내 체면은 아랑곳하지 않고 멋대로 집을 뛰쳐나간 데 대한 벌이야. 도중에 내동댕이친 아내의 역할을 다시 한번 해줘."


푸른 눈동자가 기분 나쁘게 번쩍거렸다. 클로이는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렸으나, 레온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클로이의 손목을 잡아 자기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분노가 치밀어오른 탓인지 그의 가슴 속 고동은 세차게 맥박치고 있었다. "당신은 영리하게도 날 어떻게 괴롭히고 상처받게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지. 하지만 틀림없이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아무래도 당신은 자기 남편이 그리스 인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었던 것 같아. 그리스 인은 자기가 받은 모욕을 절대 잊지도 않고 용서하지도 않는 법이야. 알겠어, 클로이? 단단히 명심해 두라구." "나는 당신 같은 사람에겐 절대로 돌아가지 않아요!" "아니야, 돌아오고 말지. 그리고 당신은 내 아들을 낳는 거야. 일부러 유산시켜 죽여 버릴 아이 대신에 말야." 클로이 앞에 버티고 서 있는 레온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뭣이라구… 클로이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리고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몇 번이나 자기가 부르짖는 외마디 소리를 들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이윽고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2 "마님께서는 피곤하실 테니까 푹 쉬게 해 드려야 해." 가까이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는 바람에 클로이는 잠에서 깨어났다. 희미하게 프랑스 사투리를 들은 듯했다. 클로이는 한순간 청춘시절을 보낸 파리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으나, 금세 자기가 어디 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어째서 여기에 와 있는지도… 클로이는 얻어맞기라도 한 듯 벌떡 일어났다. 엄청난 크기의 침대도 눈에 두드러지지 않을 만큼 널찍한 방이었다. 클로이가 살던 런던의 아파트 한 층보다도 넉넉히 두 배는 될 듯싶었다. 실내는 연한 녹색과 은빛으로 통일되어 있었고 '인어의 색깔'이란 정다운 말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신혼여행 중 샌트로페에서 사준 잠옷 색깔을 레온은 그렇게 불렀다. 레온… 클로이는 갑자기 설레는 가슴을 진정하기 위해 눈을 꼭 감았다. 이윽고 퍼뜩 눈을 뜨자 뚱뚱하게 살찐 여자가 침대 옆에서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지나, 넌 사장님께서 이르신 말씀을 잊었니? 마님을 조용히 주무시게 해드리라고 그만큼 단단히 일렀건만, 쯧쯧쯧… 비가 바스락거리는 소릴 내니까 마님께서 잠을 깨셨잖니!" 그녀는 아침식사를 얹은 쟁반을 들고 서 있는 소녀를 호되게 꾸짖었다. "괜찮아, 네가 잘못한 건 아니야. 어서 그 쟁반을 놓고 나가렴."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소녀에게 클로이는 다정하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혼자 남아 있게 된 클로이의 머릿속에 어젯밤의 일이 되살아났다. 자기를 쏘아보던 레온의 그 표정이 눈앞에 떠오르자 클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이번 일이 남편의 체면을 깎은 행위에 대한 처벌이라고 레온은 분명히 말했다. 뿐만 아니라 클로이로 하여금 대를 이을 자식을 낳게 하겠다고도… 클로이는 떨리는 손끝으로 쟁반을 밀어 놓고 침대에서 내려서서 창가로 다가갔다. 커다란 창에는 아직도 커튼이 그대로 쳐져 있었다. 클로이는 갑자기 히스테릭한 기분이 되었다. 나를 이런 곳으로 데려오다니! 레온은 아직도 나를 속일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바로 그때였다. "클로이?" 뜻밖에 레온의 목소리를 듣고 클로이는 금세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언제 들어왔는지 클로이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얇은 잠옷만 걸친 자신의 몸. 이런 상태로는 몸뿐만 아니라 불안으로 가득 찬 마음속까지 들여다보일 것만 같았다. 레온은 단정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검은 머리가 물에 젖어 있는 것을 보면 방금 샤워를 하고 나온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니 레온과 함께 샤워했을 때의 일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순간 클로이의 등줄기를 달콤한 충격이 스치고 지나갔다. 클로이는 착잡한 기분을 꾹 누르면서 레온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애원했다. "레온, 나를 여기서 내보내 줘요. 계속 가둬 놓을 작정이에요? 그런 무의미한 짓을 왜 하려는지 나는 도대체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구?

어젯밤 그토록

부드럽게

설명했는데도

의도를

모르다니,

기막힌

멍청이로군." 흘끗 침대를 바라보는 클로이의 시선을 쫓으며 레온은 불쾌해진 목소리로 웃었다. "클로이, 몰라도 상관없어. 어젯밤은 집행유예였으니까 말야. 곧 이 팔 안에서 지겨울 정도로

알게

해주지.

좀더

확실히

다짐해

두지만,

어젯밤처럼

빅토리아

시대의

귀부인같이 기절해 봤자 두번 다시는 통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정말로 나에게…"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서 클로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섬에 있는 사람은 레온과 그의 하인들뿐이라는 것은 클로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 노골적으로 험악한 태도로 나올 줄은 몰랐다. "그런 짓은 절대로 못해요. 법률에 위배돼요." 클로이는 정신없이 항의했다. "뭐라구, 남편이 아내를 껴안는 게 법률위반이란 말인가? 클로이, 적어도 그리스엔 그런 엉터리 법률은 없어. 그렇지 않아도 우리 친구들은 내 행동이 미온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당신은 나를 버리고 도망침으로써 내 얼굴에 먹칠을 했어. 그 통에 자기 아내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쩔쩔매는 녀석이 용케도 큰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고 실컷 놀림을 당했지. 클로이, 말해 두지만 이곳 에오스 섬에선 내 말이 곧 법률이야. 토스에 온 것으로 당신의 도피행각은 끝장을 고하는 거지. 꽤 오랫동안 당신을 그리스에 데려올 묘안을 여러 모로 궁리해 왔지. 하지만 설마 이렇게 쉽게 당신이 제발로 되돌아오기라도 한 듯 끌려올 줄은 정말 예상 밖이야." "그렇다면 당신은 결국…" "결국 내가 당신의 남자친구에게 당신을 속이라고 부탁했느냐 이 말인가? 당신은 여전히 사람을 보는 눈이 없군 그래. 가엾게도 애당초부터 그 사나이는 당신에게는 얄팍한 우정밖에 없었던 거야. 하지만 뭐 잘됐잖아, 그 정도의 남자였다는 걸 분명히 알게 돼서. 그렇지 않다면 그 남자는 당신의 하나뿐인 애인이었나?" 이렇게 말한 후 레온은 클로이를 경멸하듯이 껄껄대며 웃었다. 클로이는 레온의 곁을 떠난 후로 애인을 가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말을 하려다가 얼른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데릭이 레온의 협조자였다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영국 안에서도 당신을 데려올 수 있었지.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게 훨씬 더 쉬웠어." 레온은 클로이의 마음속을 더듬듯이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간단히 생각하고 집을 뛰쳐나갔겠지만, 그리스에서는 아내가 남편 곁을 떠난다는 건 대단히 중대한 사건이야. 남편으로서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이니까 말야." "어떻게 해야만 속이 시원하시겠어요? 당산의 친구 한사람 한사람을 찾아다니면서 당신은 훌륭한 남편이라고 떠들고 다니면 되겠어요? 하지만 레온, 미안하지만 나는 당장 이곳을 나가겠어요. 설령 세상 사람들에게 체면을 세우기 위해 나를 억지로 당신 곁에 잡아 둔다 하더라도 누구의 눈에도 우리가 화해한 것처럼 보이진 않을 거예요. 더군다나 내가 당신의 아이를 갖는다는 건… 그래요, 억지로 폭행당하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나에겐 당신 이 필요없어요. 하물며 당신의 아이 같은 건 절대로 갖고 싶지 않아요." "너 같은 여자는…" 레온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클로이는 얻어맞을 각오를 하고 몸을 긴장시켰으나 레온은 올리던 손을 그대로 내렸다. 클로이는 가슴속에서 불덩이 같은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걸 느꼈다. 이제껏 참고 참았던 분노가 단번에 복받쳐오른 것이다. 레온이 다가왔다. 그리고 느닷없이 팔을 붙들더니 밝은 데로 질질 끌듯이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얇은 잠옷을 통해서 환히 비치는 미끈한 맨살에 시선을 던졌다.


"어젯밤에는 하녀들이 당신의 옷을 갈아입히고 여기에 뉘어 놓았어. 그녀들은 단순히 별거하고 있던 당신이 되돌아온 줄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오늘 밤부터 당신이 내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계속 여기 있어야 해. 이게 우리 두 사람의 침대야. 클로이, 당신의 여권수첩은 내가 맡아 가지고 있어. 결국 이 섬에 있든 아테네 한복판에 있든 당신은 붙잡혀 있는 신세지." 레온의 말은 사실이었다. 클로이는 분해 눈물이 나왔다. "마리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당신이

아버지가

계획을

그녀가

그대로

내버려

두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혹시 당신은 내가 유산한 것이 그녀 때문이라는 걸 잊어버렸던가요?" 이번에는 레온의 손이 클로이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클로이는 비틀거렸다. "두번 다시 그 따위 소릴 했다간 가만 놔두지 않을 테야. 알겠어?" 레온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레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홱 열리더니 마리사가 들어왔다. "레온, 저 여자는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죠?" 마리사는 매서운 눈초리로 클로이를 쏘아보았다. 길게 기른 손 톱에는 새빨간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었고, 같은 색깔의 루즈를 바른 입술은 반들거렸다. 배다른 동생이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누이동생이니까 잘 부탁해. 3 년 전에 레온이 클로이에게 소개해 주며 이렇게 말했을 때, 마리사는 몸만 다 큰 어른이지 아직도 어린 티가 남아 있는 내성적인 처녀로 보였다. 클로이는 이 시누이와 사이좋게 지내기를 원했고, 또한 기꺼이 올케로서의 사랑을 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처구니없는 처녀였다. 클로이는 무의식적으로 양손을 아랫배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금세 거기에는 보호해야 할 작은 생명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레온, 말해 봐요. 이 여자는 여기서 뭘 하고 있어요?" 클로이의 표정을 심술궂은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던 마리사가 물었다. 레온은 클로이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머리에 레온의 훈훈한 입김이 다가왔다. 클로이는 으스스한 느낌이 들어 얼굴을 모로 돌렸다. 마리사는 내가 에오스에 끌려온 참된 까닭을 아직 모르고 있을 것이다. 클로이와 결혼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것은 틀림없이 마리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밖엔 듣지 못했을 것이다. 마리사는 남의 말에 신경을 쓰거나 걱정하는 여자는 아니다. 하지만 설사 누가 등뒤에서 무슨 말을 하든지 태연히 레온과의 관계를 지속해 나갈 것이다.


그렇지만 레온은 어디까지나 세상 사람들에 대한 체면을 존중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아내를

맞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남편에게

비밀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의심하지 않았던 순진하고 유순한 클로이는 레온이 바라던 바에 딱 들어맞는 아내였다. "왜냐구? 마리사, 그건 물론 필요하기 때문이지." 그 이상의 질문은 하지 말라는 투였다. 그러자 마리사는 발끈 화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검은 눈동자에 분노의 빛이 번득였다. "그렇지, 클로이?" 금세라도 레온과 입술이 닿을락말락한 상태가 되자 클로이는 무의식중에 몸을 움츠렸다. 순간 레온의 눈이 번쩍 빛났다. 클로이의 감정이 동요를 일으키고 있음을 간파했음에 틀림없다. 레온은 재빨리 클로이를 확 끌어안았다… 이윽고 얇은 네글리제를 통해 레온의 화끈거리는 살갗이 몸에 닿는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랫동안 별거하고 있어서 마음은 이미 오래 전에 식어 버렸을 텐데도 육체만은 아직도 반응을 보이다니… 등을 쓸어내리는 레온의 손가락을 의식하면서 클로이는 새삼스러이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았다. 클로이는 눈을 감고 잠시 동안 괴로운 추억을 되씹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레온이 뚫어지게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러다가 키스를 하게 되고 말지 … 클로이는 한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레온은 그녀의 머리를 살그머니 귀 뒤로 쓸어넘겼다. 클로이의 마음에 신혼여행을 갔던 날 아침이 되살아났다. 레온의 키스를 받으면서 잠이 깼던 다정한 아침의 키스는 맨먼저 귀의 뒤 쪽으로부터 시작하여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서 앞가슴으로 옮겨졌었다. 환희에 넘친 나머지 클로이는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레온의 검은 머리카락을 정신없이 움켜잡던 행복한 아침이었다. 문이 쾅 하고 난폭하게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클로이는 깜짝 놀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레온과 마리사 사이의 비밀을 알았을 때의 쇼크를 회상하고는 달콤한 기분에 빠져들어가고 있던 자기자신을 채찍질하려 했을 때였다. 마리사가 나가고 단둘이 있게 되자 레온은 갑자기 손을 떼고는 조롱하듯이 클로이의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클로이, 당신은 아직도 내 아내야. 그리고 그리스에서는 아직까지도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므로 아내한테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남편의 자유야." "당신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알고 있어요. 내가 아이를 낳아 주기를 원하는 거죠? 하지만 레온, 왜 그런 걸 원하는 거예요?" 레온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남자라면 누구나 다 자기의 대를 이을 자식을 갖고 싶어하지 않겠어? 자손을 늘린다는 것, 그것은 자연의 섭리야. 게다가 나에겐 내 재산을 물려받을 후손이 절대로 필요해. 그러니까 아내인 당신에게…" "그만둬요. 그런 얘긴 듣기 싫어요! 왜 당신이 나를 아내로 삼았는지 그 이유는 서로가 잘 알고 있잖아요?" 그때, 어젯밤 클로이를 헬리콥터에서 안내해 온 남자가 문을 두드렸다. 때마침 레온이 문을 막 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레온은 재빨리 자기 몸으로 잠옷 차림의 클로이를 가렸다. 언뜻 보기에도 충실해 뵈는 그 남자는 뉴욕에서 전화가 걸려왔다는 보고를 하고는 물러갔다. "도망치려고 해봤자 소용없어. 당신이 이 섬을 빠져나가려면 헤엄쳐서 달아나는 수밖에 없을 테고, 무엇보다도 여권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명심해 두라고." 레온은 침착하고 여유있는 태도로 말하고는 방을 나갔다. l0 분 후 클로이는 샤워를 하고 있었다. 욕실은 침실과 똑같은 색깔로 꾸며져 있었고, 바닥에 묻힌 커다란 원형욕조의 주위는 연한 녹색의 대리석으로 돼 있었다. 클로이는 은백색 타월에 손을 뻗으며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팔에 아주 희미하게 레온의 손자국이 남아 있다. 그걸 보면서도 자기가 에오스에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틀림없이 붙잡혀 있는 몸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며 클로이는 열려 있는 문 건너편으로 보이는 커다란 침대를 바라보았다. 레온과 같이 쓰는 침대 … 이제 방금 레온의 품안에서 느낀 감미로운 설렘을 생각하니 아주 손쉽게 육체가 자기 마음을 배반해 버릴 것만 같아 두려워졌다. <여자는 결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 이런 구절을 어떤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지만, 확실히 그 말이 옳은 것 같았다. 레온이 조금만 몸을 건드려도 마치 비밀번호를 눌리기라도 한 듯 몸이 즉각적으로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다. 클로이는 그러한 자신이 안타까왔다. 클로이는 아테네에 가서 입으려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육체의 유혹에 지면 안 된다. 지난 2 년간 나는 훌륭히 여러 번의 유혹을 이겨냈다. 게다가 전에 레온에 대해서 품고 있었던 사랑은 이미 사라졌다. 지금은 그가 갑작스럽게 뒤흔들어 대는 데 대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레온은 티끌만큼의 애정도 없으면서 나로 하여금 아이를 낳게 하려고 한다. 그것은 배다른 누이동생과의 정사를 숨기기 위한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애당초 나하고 결혼한 것도 그러기 위한 수단이었다. 인간의 도리에서 벗어난 얼마나 교활한 남자인가. 오히려 마리사가 몹시 가엾게 여겨진다.


레온은 내가 아이를 유산한 것이 마리사 때문임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레온만큼 냉철한 남자가 매우 이상하게 여겨질 만큼 마리사의 거짓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리사의 거짓말에는 나에 대한 엄청난 악의가 담겨 있다. 마리사는 그렇게 함으로써 서서히 나를 못된 여자로 몰아갔다. 레온과 마리사와의 관계를 모르고 있던 내가 마리사의 이상한 질투를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레온의 배다른 누이동생이며 애인인 마리사에게 맞서 싸울 수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리스에서는 누이동생에 대한 오빠의 책임은 무겁다. 22 살이나 된 마리사를 아직도 결혼시키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도 레온에게는 큰 잘못이 된다. 그런데도 하필이면 배다른 누이동생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니… 인간이 아니다… "클로이!" 언제 방에 들어왔을까. 레온은 다시 청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고 나타났다. 얇은 면 셔츠 속에 있는 늠름한 어깨가 눈부셨다. 게다가 이것은 신혼여행 기간 동안 레온이 줄곧 입고 있었던 복장이다. 아아, 그때의 나는 아직도 그의 애정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는데… "레온, 무슨 일예요?" 무의식중에 나온 오만한 태도에 레온의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클로이는 금세 후회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겠지. 내 아들이야. 당신이 죽인 아이 대신에 말야, 클로이. 꼭 당신이 낳아 줘야겠어." "마리사도 동의하고 있어요? 레온, 나는 당신들 두 사람의 심정은 충분히 알고 있어요. 당신은 도대체 뭘 계획하고 있죠? 자식을 낳아 주면 당장에 나하고 이혼할 작정인가요?" "오늘 아침은 아테네에 갈 예정이었지." 레온은 화제를 바꾸었다. "하지만 그 약속이 취소됐으니까 당신에게 집안을 구경시켜 주지. 중대한 사업 얘기가 있을 예정이었지만, 남의 사정을 잘 알아 주는 사람이더군. 오랜만에 다시 돌아온 당신을 놓아 두고 차마 아테네로 날아올 수는 없을 거라면서 연기해 준 거야." 레온의 말은 아무래도 은근한 협박처럼 들렸다. 클로이는 모르는 체하며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앞으로 당신은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해 줘야겠어. 손님 접대도 해줘야겠고. 그러기 위해서는 빨리 집안 내부를 익혀 둘 필요가 있지. 안 그래?" 손님 접대라구! 클로이는 레온의 햇볕에 그을은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표정은 엄숙하고 눈빛은 날카로왔다. "그런 모험을 해도 괜찮은가요? 나는 이젠 옛날과 같은 어린애가 아녜요. 더구나 당신의 노예도 아녜요. 이 섬에 가둬 둘 수는 있어도 내 입을 막을 수는 없어요. 당신의 친구가


오면 당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조리 얘기할 거예요. 두번 다시 당신에게 이용당하기는 싫어요!" 말을 마친 그 순간 클로이는 레온의 가슴을 푹 찌른 듯한 확실한 반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레온은 금세 침착성을 되찾은 듯 이렇게 말했다. "아 좋아, 얼마든지 말해 봐.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을 테니까. 그리스에서는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라고 말해 줬을 텐데? 자기의 아내에게 무슨 짓을 하든 그건 남편의 자유야, 클로이. 불평을 늘어놓는다면 당신이야말로 좋은 웃음거리가 될 거야. 사실, 대부분의 우리 친구들은 당신에 대한 나의 처사가 너무 관대하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그리스의 남자들은 아내를 때리는 걸 예사로 알고 있지. 걱정할 건 없어. 난 때리진 않을 테니까." 클로이가 뒷걸음질치는 걸 보고 레온은 억지로 어색하게 웃었다. "우격다짐으로 순종하게 하는 건 내 취미에 맞지 않는 일이지." 클로이는 분한 나머지 주먹을 꽉 쥐었다. "말을 기막히게 잘하시는군요. 강제로 자식을 낳게 만들겠다고 말한 지 아직 5 분도 안 됐는데." "강제로라구?" 레온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아까부터 그 말을 잘 쓰는데, 우리에겐 전혀 관계없는 얘기야. 안 그래, 클로이?" 레온은 클로이의 하얀 손을 잡더니 손목 안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클로이는 따끔하게 쏘아 주고 싶었지만 왜 그런지 입 안이 말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온은

능글맞게

스커트의

벨트

안에서

블라우스

자락을

끄집어내고는

손을

집어넣더니 브래지어에 달린 레이스를 만졌다. 무슨 소중한 보물이라도 더듬어 찾듯이. "레온, 그러지 말아요!" 클로이는 몸을 버티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레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의 앞쪽 끝에 손을 댔다. "클로이, 당신은 이걸 강제로 한다고 생각하나?" 능숙하게 살그머니 손가락을 움직이며 레온은 클로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만둬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클로이는 레온의 손을 뿌리치려고 양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클로이는 차가운 시선을 피하려고 고개를 숙였다. 레온은 마리사를 사랑하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나를 껴안으려 한다. 어떻게 그런 불성실한 짓을 태연히 저지를 수 있을까… 클로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또한 심한 분노를 느꼈다. "레온,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난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대를 이을 자식을 원한다는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억지로 희생당하기는 싫어요. 내 몸에 불을 지를 수는 있어도 절대로 내 마음까지는…" "클로이, 결혼했을 당시의 당신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지? 당신은 기꺼이 나에게 모든 걸 바쳤었잖아?" "그 무렵의 나는 이젠 아무 곳에도 없어요." 클로이는 띄엄띄엄 분명히 말했다. "없다고?" 곧 레온은 자기의 힘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우악스럽게 클로이의 입술을 덮쳤다. 키스는 달콤한 것이어야 하는데도 레온의 키스는 고통스러움을 줄 뿐이었다. "당신이 힘을 원한다면 이렇게 힘으로 응해 주지. 자, 이제 집안을 안내해 줄까?" 레온은 갑자기 클로이를 놓아 주었다. "아니면, 여기 있을 테야? 원한다면 내 계획을 실행으로 옮겨도 좋지. 한시라도 빨리 당신이 죽인 아이를 대신할 자식을 갖고 싶으니까." 내가 죽였다고? 레온은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걸까? 아직도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연극을 계속할 속셈이란 말인가 …

클로이는 복도 쪽으로 걸어가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입술이 얼얼했다. 하지만 레온이 눈치챌 것 같아 클로이는 입술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레온이 뒤따라왔다. 분명히 화를 내고 있다. 클로이는 한순간 움찔했으나 레온은 즉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점잔을 빼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클로이로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곡예였다. "복도에선 얌전히 굴 테니까 마음놓으라구." 레온은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고는 클로이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클로이는 소스라치며 밖으로 나와 있는 블라우스 자락을 스커트 안으로 밀어넣었다. 레온의 시선은 불룩하게 솟아오른 가슴에 쏠려 있다. 클로이는 냉정하게 행동함으로써 레온의 유혹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레온이 클로이의 의사 같은 걸 문제삼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레온은 저택의 안팎을 안내하고 돌아다녔다. 집은 상상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넓었으며, 여기저기에 현대적인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특히 섬 전체를 뒤덮고 있는 최신예 경비 시스템을 보고 클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래졌다.


건물 안으로 들어와 방을 차례차례 둘러보면서 클로이는 이곳이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는 널찍한 거실에서 이탈리아 제의 우아하고 고상한 가구들을 본 순간 그 까닭을 알았다. 신혼여행을 갔었던 레온의 친구 저택과 이곳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곳이 그 저택보다 좀더 컸지만, 그 외에는 클로이의 마음에 들었던 이탈리아 제 가구로부터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정말 똑같아서 마치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클로이는 옅은 크림 빛 소파를 만져 보았다. 매끄러운 실크의 감촉, 그리고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쿠션의 산뜻한 색깔. 한쪽 벽은 크롬과 유리로 된 장식장이 차지하고 있고, 다른 쪽 벽은 소파와 똑같은 색깔의 대리석으로 된 현대적인 난로가 꾸며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쿠션의 색깔은 장식장 속에 놓인 비취 클렉션과 조화가 잘되었다. "이젠 알겠어? 안티브의 저택을 지은 건축가에게 부탁해서 만든 거야. 사실은 첫 번째 결혼기념일에 당신에게 선사할 목적으로 지은 것인데…" 클로이는 무의식중에 경계하는 마음을 누그러뜨릴 뻔했으나, 레온이 연극을 잘한다는 걸 상기하고는 금세 정신을 바짝 차렸다. "어머나, 그러셨어요? 난 이제 신혼여행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데 당신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뜻밖이군요." "클로이, 복수에 관한 이런 말을 알고 있나? '복수를 하려면 항상 처음 먹은 마음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 살면서 당신에 대한 복수를 날마다 마음속으로 맹세해 온 셈이지." 과연 결혼생활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는가는 접어두고라도 파국을 맞이한 이유가 마치 클로이 한 사람에게만 책임이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레온, 연극은 그만 해요!" 클로이의 매서운 어조에 레온이 돌아다보고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 때 마리사가 험악한 얼굴을 하고 들어왔다. "레온, 지나한테 크리티코스 집안 사람들을 위해 방을 치워 놓으라고 하셨나요? 니코스도 함께 온다면서요? 당치도 않은 얘기예요. 레온, 내 말 듣고 있어요? 나를 내쫓고 대를 이을 자식을 갖고 싶은 모양이지만, 그렇게 쉽게 쫓겨날 줄 아세요? 그걸 위해 니코스하고 결혼할 바엔 차라리 죽어 버리겠어요!" 단숨에 떠들어대고 나더니 마리사는 왁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마리사, 정신 차려. 나중에 차분히 얘기하자. 하지만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레온은 침착하게 말했다 "저 여자와의 아이를 낳기 위해 나를 쫓아내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마리사는 힐끗 클로이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레온, 그렇게는 못해요. 난 절대로 그렇게 못하게 할 거예요! 난…"


레온은 울부짖는 마리사를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클로이가 외면하고 있는 사이에 그대로 방에서 끌고 나갔다. 마리사가 저렇게 날뛰는 것으로 보아 레온은 진정으로 대를 이을 자식을 원하는 모양이다. 사실이라면 마리사에 대해 승리감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옛날에 클로이가 맛보았던

고통과

실망을

이번에는

마리사가

느끼리라고

생각하니

그녀가

가엾게

여겨진다. 그리스에서는 결혼 상대자를 신중히 골라야 하는 가문이 좋은 가정일수록 가장이 그가 보호하는 처녀의 신랑 될 사람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클로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온이 특별한 관계에 있는 마리사에게도 설마 그렇게 하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클로이는 레온을 기다리지 않고 침실로 돌아갔다. 커다란 침대로 저절로 눈길이 갔다. 레온과 이 침대를 같이 써야만 할까… 클로이는 침실 문을 잠글 수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다시 한번 레온에게 애원해 본댔자, 조금 전의 그 말투로 보아 도저히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다. 또한 그렇게 애원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담? 문을 잠글 수가 없으니 체념하는 수밖에 없단 말인가… 아니다, 이 섬에서 달아날 방법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반드시. 3 저녁식사를 하러 내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침실에 들어박혀 있으면 레온은 그녀를 보러 올 것이고, 결국 그가 원하는 걸 승낙한 것으로 해석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클로이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하지만 내려가려 해도 입고 나갈 드레스가 없다. 있는 것이라곤 아침부터 입고 있는 면 블라우스와 스커트 청바지뿐이다. 클로이가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침실에 누가 있는 듯한 인기척이 나서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그러나 활짝 열린 출입구에 나타난 것은 레온이 아니라 오늘 아침식사를 가져온 어린 하녀 지나였다. "마님, 어떤 드레스를 가져다 드릴까요?" 지나는 멈칫멈칫 조심스럽게 물었다. 클로이는 무의식중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만 서투른 그리스 어로 입을 것이라곤 스커트와 블라우스, 그리고 청바지와 티셔츠밖에 없다는 뜻을 전할 수 있을까. "저어 말이야, 드레스가 없어…" 클로이는 천천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나는 들은둥 만둥 자랑스러운 듯한 표정까지 지으며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옷장 문을 열어 보였다. "이것 보세요. 이렇게 많이 있잖아요. 마님을 위해 사장님께서 아테네에서 사오셨어요."


클로이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득 차 있는 옷들을 휘둥그래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레온다운 짓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빈틈이 없다. 클로이는 무심코 라일락 빛 드레스를 만져 보았다. 고급 실크의 감촉, 그리고 이 옷의 디자인은 틀림없이 최신형 스타일이다. 그러고 보면 레온은 꽤 오래 전부터 나를 다시 데려올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슈 르네에게 주문했었지. 이보라구. 영락없는 혼수감이야. 르네는 아직도 당신의 몸 치수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더군."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등뒤에서 레온이 말했다. 모델 생활을 했던 l8 살 때와는 몸매가 변했는데도 어느 드레스를 보거나 지금의 사이즈에 딱 맞을 듯했다. 아마도 무슈 르네나 레온 중의 한 사람이 23 살 된 여자는 l8 살 된 처녀와는 몸매나 취향이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 이토록 우아한 드레스는 입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어느 드레스나 한 벌의 옷값이 클로이의 몇 개월분의 월급을 훨씬 웃돌 것만 같았다. "상복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어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클로이에게 레온은 태연히 말했다. "글쎄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하고 클로이는 쌀쌀맞게 받아넘기고는 옷장문을 닫았다. "레온, 분명히 당신은 나를 여기에 데려왔고, 또 억지로 임신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 드레스를 입힐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럴까?" 레온은 비웃는 듯한 엷은 웃음을 띠었다. 레온이 들어왔을 때 지나는 방에서 물러갔다. 아무리 넓다고는 하지만 단둘이 침실에 남아 있게 되자 레온의 늠름한 몸이 새삼스럽게 위압적으로 느껴져서 클로이는 가슴이 답답했다.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목욕 타월 한 장뿐. 어깨에서부터 가슴, 그리고 다시 그 아래쪽으로 레온의 시선이 서서히 내려가고 있었다. 차츰차츰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바람에 클로이의 살갗은 저절로 발갛게 물들었다. "보지 말아요, 레온!" 클로이는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레온의 욕망은 이성의 육체에 대한 본능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방이 누가 됐든지 다 한가지다. 그러나 그런 줄을 뻔히 알면서도 만일 레온이 팔을 벌린다면 당장에라도 그 늠름한 품안으로 뛰어들 것만 같았다.


클로이는 자신의 의지가 나약함을 한탄하며 가져다 놓은 드레스를 안 입겠다고 다시 한번 의연한 태도로 거절했다. 그러나 그러고 있는 사이에도 별거하고 있는 동안 잊어버렸던 관능적인 충동이 클로이의 마음을 달뜨게 했다. 안 돼! 클로이는 얼른 위험한 추억을 뿌리쳤다. 레온이 나를 포옹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복수의 첫걸음이기 때문임을 절대로 잊으면 안 돼― "클로이, 선택할 길은 두 가지밖에 없어. 하나는 클로이가 자진해서 드레스를 입는 거고, 또 한 가지는 내가 당신에게 드레스를 입혀 주는 거야. 클로이, 충고해 두지만 두 번째 것을 선택할 경우 내가 당신의 몸을 만져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 해석할 거야. 알겠지?" 제발 좀 나가 달라고 애원하는 클로이의 말을 무시하고 레온은 비웃듯이 말했다. "그런 꼴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클로이는 무심코 소리쳤다. 새빨개진 뺨은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거짓말이야! 클로이, 당신은 마음속으로는 나를 증오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당신의 몸은 틀림없이 나를 원하고 있어. 원한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그걸 깨닫게 해줄 수 있지." "어디 해봐요!" "해보라구? 그건 거짓말이라는 걸 증명해 달라는 건가? 아니면 넌지시 포옹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유감이야. 지금은 차분히 기대에 응해 주고 있을 시간이 없어. 요리사가 우리들이 다시 만난 걸 축하하기 위해 솜씨를 한껏 발휘해서 요리를 장만해 놓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클로이, 그후에 해도 아마…" "아아뇨, 천만에 말씀을 …

이후에도 당신에게 안기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을

거예요!"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레온의 등에 대고 클로이는 악을 쓰듯 소리쳤다. 한마디 한마디가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었다. 확실히 그렇다. 그런데도 가슴이 아픈 것은 무슨 까닭일까? 레온의 곁을 떠난 후로 단 한번도 남자에게 마음이 끌린 적이 없었는데, 다시 만난 후부터는 레온의 애무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 클로이의 심신을 줄곧 괴롭히고 있었다. 레온이 가버리자, 클로이는 입술을 깨물면서 잠시 동안 옷장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저녁식사를 하러 내려가 볼까. 그런다면 레온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한순간 그런 생각이 마음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클로이는 생각을 바꾸고 옷장문을 열었다. 그리고 옅은 라일락 빛 모슬린 드레스에 손을 뻗쳤다. 모슬린은 매우 얇고 매끄러운, 보풀이 짧은 고급 비단이다.


클로이를 위해 주문해 온 것이라고는 하지만, 입어보니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몸에 딱 맞았다. 섬세하게 주름이 잡힌 긴 소매를 꽉 죈 소매 끝이나 등에도 조그만 진주 단추가 달려 있었다. 또한 허리둘레의 치수나 스커트의 길이도 딱 맞았다. 등에 있는 단추는 나중에 하녀더러 채워 달라고 하기로 하고, 우선 드레스를 입고 난 후 클로이는 같은 색깔의 공단으로 만든 샌들을 신었다. 그리고 욕실의 서랍 속에 있던 라일락 빛 아이섀도와 마스카라로 눈가를 곱게 칠했다. 클로이는 복도로 나갔다. 하녀를 찾으려는데 오른쪽 문이 열리며 레온이 나왔다. 실크 셔츠에 늘씬한 잿빛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드레스를 입었군. 어때, 기분이 좋지? 8 시에 저녁식사니까 그때까지는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어. 먼저 술이라도 한잔 할까?" 레온은 뜻밖에 아주 차분하고 태연하게 물었다. "아아뇨, 괜찮아요. 지금 하녀를 찾고 있는 중이에요. 등에 단추를 채워야 해서…" 클로이는 그만 무심코 얘기하고 말았다. "그건 내가 해주지." 엷은 웃음을 띤 레온에게 클로이는 할 수 없이 등을 돌렸다. 능숙한 솜씨로 재빨리 조그만 단추를 차례차례 끼우고 있는 동안 클로이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쪽 문이 열리더니 타일 바닥에 하이힐 소리를 내며 마리사가 다가왔다. "레온!" 마리사가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갈라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마리사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결코 보기 드문 일은 아니다. 클로이 자신도 몇 번이나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레온 앞에서는 조심스럽게 짐짓 얌전을 빼왔다. 그러던 마리사가 노골적으로 이런 야비한 행동을 보여 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절대로 승낙하지 않을 거야. 듣고 있어요, 레온? 나는 아무하고도 결혼하지 않을 테야. 강제로 시킨다면 난 모든 사람들에게 사실을 있는 그대로 폭로해 버리고 말 테야. 난…" "네가 승낙하고 않고는 문제가 안 돼. 충분히 의논을 해서 이미 오래 전에 결정이 난 것 아니니? 난 계획을 변경할 의도는 없으니까 그런 줄 알아." 레온은 단호하게 말했다. 마리사에게 이처럼 냉혹하게 말한 것도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레온, 나를 쫓아내려고 그러는 거죠!" 마리사의 눈에 눈물이 괴어 있었다. "내가 방해가 되는 거죠? 이 여자를 곁에 두기 위해… 당신에게도 말해 두지만, 레온이 바라는 건 당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를 이을 아들이야." 마리사는 클로이에게 대들었다.


"자기 아들을 낳아 줄 사람으로 아내였던 당신을 선택했을 뿐이야." "마리사!" 레온은 냉정하게 마리사를 가로막았다. 엄숙한 목소리에는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서려 있었다. "마리사, 다시 한번 말해 두마. 내일 손님이 오거든 얌전히 행동해야 한다. 알겠지, 마리사? 클로이, 당신도 마찬가지야." 레온은 클로이를 힐끗 돌아봤다. "만약 싫다면 어떡하시겠어요? 그리고 왜 이 여자를 데리고 왔는지 그 이유를 여러 사람에게 얘기한다면 도대체 어떡할 작정이세요?" 마리사는 기세등등하게 물었다. "그때는 널 감당할 수 없는 방자스러운 애라고 하면 그뿐이야." 레온이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이윽고 마리사가 방으로 들어가자 클로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레온, 그렇게 모질게 말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아냐, 마리사가 어른의 분별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로 엄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돼. 언제까지나 어린애 같은 버릇없는 행동을 용서해 줘선 도움이 안 돼. 그런데 클로이, 이건 우리들 오누이 사이의 일이니까 당신은 걱정할 것 없어. 그건 그렇고, 그토록 심한 말을 듣고서도 당신은 마리사에 대해서 꽤나 동정적이군." "그렇게 보여요?" 클로이는 짐짓 시치미를 뗐다. 자기와 똑같은 고통을 받게 된 마리사. 하지만 그녀를 동정하는 심정을 두 여인을 상처입힌 장본인인 레온에겐 알리고 싶지 않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레온과 클로이는 이따금 하인들이 드나들 때 외에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클로이는 그들이 있을 때는 맛있게 먹는 체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별로 손을 대지 못했다. "아까 마리사에게 한 말은 모두가 진심에서 한 말이었어." 식후에 커피를 마시며 레온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클로이, 나한테 다시 돌아온 이상, 아내로서의 임무를 다 해줘야겠어." "만일 그 임무가 너무 어려운 것이라면 어떡하죠?" "괜찮아. 친절히 개인지도를 해줄 테니까. 클로이, 당신의 눈은 정직해. 서로 사랑을 나누고 난 이튿날 아침이라면 그 눈이 빛나는 것을 보기만 해도 손님들은 이해할 거야. 우리가 금실이 좋은 부부라는 것을." 레온은 능글맞게 미소지어 보였다.


클로이는 응접실에서 침실로 돌아와 버렸다. 레온의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다. 혼자 있고 싶어 돌아오긴 했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자기의 시간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클로이는 재빨리 드레스를 벗고 지나가 침대 위에 놓고 간 크림 빛 실크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순간 문이 홱 열리더니 마리사가 들어왔다. "어머, 레온을 위해서 모양을 내는군요?" 심술궂은 눈으로 잠옷을 바라본다. "그가 원하는 건 당신이 아니고 아들인데 뭐 … 당신은 그 아들을 얻기 위한 단순한 도구일 뿐이에요." "그 얘기라면 나도 이미 들었어요." 클로이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이전의 자기 같으면 도저히 이렇게는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발끈 화를 냈다가 나중에 후회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마리사가 무슨 말을 하든 냉정해질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도리어 뺨에 눈물 자국을 남기고 머리를 흐트러뜨린 마리사에 대해 진심으로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온이 어째서 나를 강제로 결혼시키려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겠죠?" 마리사는 당장 클로이에게 대들 것만 같은 기세였다. "레온은 지금 아들 문제로 머릿속이 꽉 차 있어서 딴 일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나나 사업이나 더구나 당신 같은 건 아랑곳없죠 … 하지만 이건 일시적일 뿐이에요. 아들을 얻기만 하면 아마 틀림없이 싹 변하고 말 테니까." 마리사는 자기자신에게 타이르는 듯한 투로 말했다. "마리사, 그렇게 오랫동안 참을 건 없어요." 클로이는 갑자기 기막힌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마리사, 나 좀 도와 주지 않겠어요? 난 이 섬에서 나가고 싶어요. 마리사도 내가 없는 게 차라리 낫지 않겠어요?" "그야 물론이죠." 마리사는 시원스럽게 인정했다. "그렇긴 하지만 레온에게 들키지 않고 이 섬을 빠져나가기는 아 주 어려운 일이에요.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절대로 이 섬에서 나갈 수 없어요." "그때 유산한 아이를 보상해 줄 때까지는 못 나간단 말이군… 마리사는 레온하곤 달라서 내가 일부러 유산시킨 것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있겠죠? 나를 층계에서 떠밀어 그 아이의 생명을 빼앗은 건 당신이었으니까…" 클로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또다시 문을 쾅 닫고 마리사는 나가 버렸다. 마리사는 그녀가 클로이를 떠민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간단히 자기의 잘못을 인정할 사람이 아니었다.


클로이는 한숨을 내쉬고 화장대 앞에 앉아 긴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율동적인 손놀림을 따라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 되살아났다. 파리에서

아테네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의

일이었다.

신부인

클로이는

이제부터

처음으로 대면하게 될 시누이인 마리사 때문에 상당히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었다. 남편인 레온은 아내의 입에서 연달아 튀어나오는 마리사에 대한 질문으로 무척 난처해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입이 무거워진 남편. 하지만 클로이는 피곤한 탓이라고밖엔 생각지 않았다. 실제로 레온은 파리를 떠나기 직전까지 사업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게 뛰어다녔으니까. 레온의 얘기에 의하면 마리사는 레온의 계모가 들어와 낳은 딸인데 레온보다는 13 살이나 아래였다. 양친이 다 세상을 떠난 후에는 오로지 레온 혼자서 돌봐 주었다고 했다. 그리스의 다른 부호들의 딸에 비하면 상당히 현대적으로 길러졌는데, 교육은 영국과 스위스에서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본인의 의사에 따라 대학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클로이가 그녀에 관해 알게 된 것은 기껏해야 이런 정도였다. 마리사는 새로 마련된 보금자리인 아테네의 아파트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클로이는 홀에 들어선 순간 수많은 값비싼 장식품들을 보고 넋을 잃은 나머지 마리사의 쌀쌀맞은 태도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마리사의 태도는 냉담해지기만 했다. 레온이 집에 없을 때는 더욱더 불쾌하고 괘씸한 태도를 취했다. 클로이도 더 이상 무관심할 수만은 없었다. 그럴 무렵에 클로이는 몸이 전과는 달라지는 것을 깨달았다. 레온은 일주일 전부터 파리에 가 있어서 부재중이었다. 돌아와서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면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틀림없이 기뻐할 거야. 클로이는 의사한테서 받은, 임신기간 중에 지켜야 할 유의사항을 읽고 또 읽으면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마리사는 하루하루 건방지고 버릇없는 행동이 더해 갔다. 마리사가 돈이나 물건을 마구 낭비하는 걸 보다 못한 클로이가 그러지 말라고 충고했을 때 마리사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욕설을 내뱉었고, 그 뒤로 더욱더 심한 적개심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마리사의 방자스러운 행동을 짐짓 눈감아 줄 수는 있었지만 도저히 그녀의 호감을 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마리사가 오빠인

레온을

쳐다볼

때의

시선 ―

어쩐지

이상야릇하고 수상쩍은 시선 때문에 클로이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클로이는 레온에게 넌지시 자기가 느끼고 있는 불안한 심정을 털어놓아 보았다. 하지만 레온은

지나친

생각이라며

웃어넘기고는

클로이를

정답게

껴안아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레온은 마리사 얘기만 나오면 갑자기 말이 없어진다. 하지만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던 클로이는 그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 날이 왔다. 나중에 짐작한 일이지만 아마도 마리사는 클로이가 의사한테서 받은 작은 책자를 우연히 발견했던 모양이다. 그 책자를 보고는 라이벌인 클로이가 레온의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날 클로이는 오전중에 장을 보고 돌아와 막 샤워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때 하녀의 얘기로는 틀림없이 친구들과의 점심 약속으로 외출하고 없어야 할 마리사가 느닷없이 들어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실을 통고했다. 레온과 자기는 2 년 가까이나 특별한 관계를 지속해 오고 있다고 … 마리사의 검은 눈동자는 증오와 질투로 검푸르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믿고 싶지 않겠죠? 하지만 거짓말은 아녜요. 사실이 아니라면 이런 중대한 비밀을 누가 일부러 얘기하겠어요? 레온의 아내가 되어 그와 함께 살고 싶어. 그러나 허락해 주지 않는 거야 …

이런 쓸쓸하고 허전한 심정을 당신이 이해할 수 있겠어요? 언제나

누이동생으로서 그늘에 가려진 존재가 돼야만 하다니, 이런 안타깝고 슬픈 일이 어디 있겠어요. 당신 같은 여자는 알 턱이 없지! 클로이, 레온이 무슨 이유로 당신 같은 여자와 결혼한 줄 알아요?" 마리사는 덤벼들 것 같은 눈초리로 클로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가르쳐 줄까? 당신에겐 뭐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절대로 당신이 자랑하는 그 몸매나 금발머리에 반했기 때문은 아니야. 사실은 나를 세상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에서 보호하기 위해서였어요! 나는 벌써 결혼할 나이가 지났으니 세상 사람들은 내가 왜 시집을 안 가는지 그 이유를 이러쿵저러쿵 수군댈 거고, 레온은 그 결과를 대단히 두려워하고 있었죠. 그래서 추잡스런 소문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우선 레온 자신이 당신하고 결혼하기로 했던 거죠. 그와 나와의 관계를 속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어요. 당신은 거기에 이용당했을 뿐예요." 마리사는 가엾다는 듯이 말했다. 레온과 마리사가 … 설마 그런 사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마리사의 얘길 듣고 보니, 뭔가 짚이는 바가 있었다. 더구나 나와의 결혼이 그들의 그런 추악한 관계를 감추기 위한 음모였다니… 클로이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레온이 결혼을 급히 서두른 것도, 마리사 얘기만 나오면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리는 까닭도, 레온을 쳐다보는 마리사의 눈에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느낌을 받은 이유도 이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 지낼 무렵에는 레온과 함께 길을 거닐다 지나치는 여자들의 뜨거운 시선이 그에게 쏠리는 걸 느낄 때마다 클로이의 마음은 자랑스러움과 함께 근심걱정으로 미묘하게 흔들리곤 했었다. 레온 같은 남자라면 주위에 얼마든지 걸맞은 결혼 상대가


있었을 텐데, 어째서 나 같은 평범한 집안의 처녀를 택했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지 않은 바도 아니다. 그러나 조용히 레온을 지켜보았을 뿐 그 이상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그 단정한 용모의 이면에 추악한 본모습이 숨어 있으리라곤 천진난만한 클로이로서는 전혀 간파할 수 없었다. 클로이의 마음이 크게 동요된 것을 알아채자 마리사는 잔인하게 말을 이었다. "레온이 기뻐하리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에요.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여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낳게 할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당신이 임신했다고 해서 레온이 기뻐할 것 같아요? 레온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예요. 당신이 낳은 아이를 보고 레온이 좋아할 리 없지 않겠어요?" "그만…!" 클로이는

참다못해

침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곳은

레온과

단둘만의

사랑의

보금자리였다. 밤마다 레온과의 정열을 불태우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 방은 클로이에겐 증오와 원한으로 가득 찬 곳이 되고 말았다. 마리사가 뒤쫓아왔다. 그녀가 따라왔을 때 클로이는 층계 입구에 우두커니 멈춰서서 어떻게 해서든지 냉정을 되찾으려 하던 참이었다. 클로이는 지금도 그후에 일어난 일들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가 없다.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층계 위에서 갑자기 마리사에게 떠밀린 일뿐이다. 클로이의 비명소리를 듣고 맨먼저 달려나온 사람은 하녀였다. 아랫배를 움켜잡고 쓰러져 있는 클로이를 본 순간 그녀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며 굳어졌다. 이윽고 냉정을 되찾고는 얼른 다가와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마리사는 뭐라고 큰소리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 소리는 지금도 클로이의 귓가에 남아 있다. 모두 다 최선을 다해 주었고, 병원에서도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하지만 클로이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레온을 파리로부터 불러들인 것과 그가 달려올 때까지 마리사가 침대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달갑게 여겨지지 않았다. "왜 그랬나? 왜 내 아이를 죽였지?" 밖에서 마리사로부터 얘기를 듣고 병실로 들어온 레온은 클로이를 책망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분노하는 레온의 그 험악한 모습을 클로이는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조금 후 레온은 슬픔을 참아내고 있는 클로이에게 아무런 위로의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돌아갔다. 간호원들은 남편의 냉담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클로이는 알고 있었다. 레온의 머릿속에는 마리사 외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을 테니까. 면회를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입원한 지 3 일 후 레온이 불쑥 찾아왔다. 사업관계로 파리로 돌아가야 한다며, 아테네에 돌아가는 대로 다시 얘기하자면서 허둥지둥 그녀 곁을 떠나 버렸다.


그러나 그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눈 일은 끝내 없었다. 클로이가 영국으로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클로이는 레온이 파리로 간 것을 확인하곤 즉시 병원을 빠져나와 아파트로 달려갔다. 그리고 레온에게서 받은 많은 보석들과 큼직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빼어 화장대 위에 나란히 올려놓은 후 여권과 비행기 요금만을 챙겨 그대로 집을 나왔다. 영국에 돌아온 클로이는 즉시 결혼반지를 뺐다. 그렇게 함으로써 레온과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몇 달 동안이나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됐고, 마음이 정리되기까지는 일 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클로이는 브러시를 내려놓고 침실 문이 닫혀 있는지 다시 확인했다. 이 방에는 열쇠가 없다. 레온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아무리 교묘하게 사랑을 애걸해 오더라도 절대로 용납하지는 않겠다. 유산했을 때는 별로 아이를 원하는 것 같지 않았던 레온이 이제 와서 갑자기 대를 이을 자식이 필요하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다. 더구나 아직까지도 내가 일부러 유산시켰다고 굳게 믿고 있다는 건 너무나도 뜻밖이다. 병원에서 그토록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레온은 마리사를 감싸기만 할 뿐, 내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레온은 겉으로는 훌륭한 체하지만, 실제로는 비열한 짓을 태연히 저지르는 인간이다.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절대로 유혹에 져서는 안 된다. 클로이는 이렇게 마음을 굳게 다졌다. 4 어느 틈에 잠들어 버린 것일까. 클로이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키며 캄캄한 어둠 속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레온?" "아, 기다리다 지쳐 잠들었었나? 이제 당신은 어엿한 내 아내니 내가 오기를 몹시 기다린 것도 당연하지." "당치도 않은 소리예요. 누가 당신 같은 사람을…" 클로이는 발끈 화를 내면서 말했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어요?" "뭘 하고 있느냐구? 옷을 벗고 있지." 비꼬는 듯이 말한 후 레온은 갑자기 거칠게 목소리를 높였다. "클로이, 내가 왜 여기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겠지?" "조금이라도 빨리 아이를 낳게 해서 임무가 끝나는 대로 즉시 이혼하려는 것이겠죠." 문득 잃어버린 작은 생명이 생각나 클로이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레온의 힘에 못 이겨 그의 아이를 낳고, 또다시 그에게 빼앗길 처지에 놓이게 될 자신이 견딜 수 없이


서글펐다. 레온이 옷을 벗는 자극적인 소리, 그쪽에만 신경이 쓰여 클로이는 문 밖의 인기척을 깨닫지 못했다. 이윽고 욕실 문이 확 열렸다 다시 닫히더니, 레온이 샤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머릿속을 휙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클로이는 손으로 더듬더듬 옷을 찾았다. 지금 당장 이 방에서 빠져나가자. 남보다 몇 배나 자존심이 강한 레온이 하인들의 귀에 들리는 곳에서 말다툼을 하면서까지 싫다는 아내를 강제로 침실로 끌고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만일 그런 짓을 하다가 그 사실이 친구 들에게 알려진다면 그야말로 좋은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클로이는 응접실로 도망쳐 와 방안의 불을 모조리 켰다. 그리고는 유리로 된 커피 탁자 위에 있는 패션 잡지를 집어들었다. 바로 옆이 하인들의 거처니까 여기라면 레온이 쫓아오더라도 안전하겠지. 클로이는 천천히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채로 l5 분이 지났다. 이쯤 되면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쉽게 넘어간 것 같다. 그 다음에는 오직 레온과의 신경전만이 남았다. 아마도 레온은 옛날 일을 생각하고는 내가 먼저 굴복할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과거에 레온을 맹목적으로 사랑했던 그 클로이가 아니다. 이젠 성숙한 한 사람의 여자다. 레온을 적으로 간주하고 당당히 승부를 겨룰 자신이 있다. 만일 크리티코스 가족들이 도착할 때까지 이대로 그가 접근해 오지 못하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이겨낼 수 있다. 그들이 돌아갈 때 같이 섬을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아테네까지 쇼핑을 하러 가겠다고 하면 레온도 손님들 앞에서니 반대하지는 못하겠지. 그런데 단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여권수첩이었다. 데릭이 가져간 이후로 레온이 계속 보관하고 있다. 클로이는 암담한 심정으로 소파에 몸을 기댔다. 몇 분 후, 레온은 클로이의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잡지를 주워들고는 클로이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잠에서 깨어난 클로이는 깜짝 놀라 몸을 웅크렸다. "클로이, 당신은 아주 영리한 사람이군. 하지만 아무래도 당신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은 현명하지 못한 것 같아." 레온은 미소를 지었다. 클로이의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커다란 그의 몸에서 비누 냄새와 함께 남자의 체취가 풍겨 왔다. 클로이는 가슴이 답답해져서 무의식중에 침을 삼켰다. 시원스럽게 앞섶이 벌어진 헐렁한 가운을 통해 탄탄한 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잊고 있었던 뜨거운 충동이

클로이의 몸 속을

원망스러웠다. "왜 그러지?"

전류처럼

빠르게

스쳐갔다.

클로이는

자신의

나약함이


레온은 클로이의 얼굴을 치켜들고는 조롱하듯 말했다. "여전히 아름답군. 바다의 요정, 아니 지금의 당신은 바다의 마녀라고나 할까?" 레온은 그녀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슬쩍 건드렸다. "이러지 말아요!" 클로이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지난 2 년간 잠들어 있었던 관능적인 감각이 단숨에 깨어나 그녀의 몸은 이상하게도 무겁고 나른해졌다. 안 돼! 클로이는 벌떡 일어나며 레온의 가슴을 힘껏 떠밀었다. 레온은 소리내어 웃었다. 클로이는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레온의 가슴에 댄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정다운 온기와 체취, 그리고 애무 … 클로이는 레온의 매력에 끌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나로부터 도망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나?" 레온은 클로이의 희고 보드라운 목덜미에 가만히 입술을 댔다. "어지간히 따분한 남자들하고만 사귀었던 모양이군. 오로지 침대 위에서만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건 아니야.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던가?" "레온, 이러지 말아요!" 가볍게 귓불을 물리자 클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바르르 떨었다. 레온은 능숙하게 실크 가운 위로 아름다운 육체의 선을 더듬어 내려갔다. 그러자 조금씩 클로이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토록 레온을 경멸하고 자신의 나약함을 혐오하고 있었건만, 이렇게도 그를 원하고 있다니 …

얄궂은 진실 앞에서 클로이는 허탈감을

느꼈다. 쾌감과 굴욕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클로이는 마침내 항거할 기력을 잃고 말았다. 레온은 재빨리 키스했다. 순식간에 감정을 무너뜨리며 클로이를 껴안고는 소파에 쓰러졌다. 레온의 몸무게와 따스함이 온몸에 느껴지자 클로이는 참을 수 없이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이러면 안 돼요!" 레온은 얼른 몸을 젖혔다. "나도 모르게 기분이 조급해지고 말았지만, 지난 2 년간 나는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아왔어. 키스 한 번이라도 소홀히 할 수는 없지. 기다리고 또 기다린 거야. 클로이,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야. 지난 2 년간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내 아이를 갖는다는 건 당신에겐 뜻깊은 일일 거야." 레온은 클로이의 뺨에 살짝 입술을 대고는 얇은 옷자락을 헤치고 젖가슴을 만졌다. 어째서 나는 레온을 거절하겠다고 생각했을까? 레온의 손에 의해 꽃핀 육체가 그 손을


거역할 리는 없는데… 입술이 목에서 어깨로 서서히 옮아감에 따라 클로이의 머릿속에는 신혼여행 때의 뜨거웠던 순간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느 틈엔지 레온의 뜨거운 입술은 가슴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었다. 클로이는 자기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레온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온몸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클로이, 나를 갖고 싶지? 이것 봐, 당신의 몸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레온은 고개를 들고 클로이의 진보랏빛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클로이는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 안타까움 때문에 클로이의 숨결은 헐떡이는 듯한 흐느낌으로 변했다. 그러자 레온은 클로이의 입술에 뜨거운 입술을 겹쳐 왔다. 그 순간 클로이의 몸 속으로 짜릿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클로이는 정신없이 레온의 검은 머리를 어루만졌다. "레온…" 달콤한 목소리에 레온은 문득 애무하던 손길을 멈추었다. 도취한 클로이가 자기자신의 목소리라고 착각했던 소리는 사실은 마리사의 목소리였다. "자 빨리, 이걸 입어!" 클로이에게 옷을 내주고 레온은 자기의 옷에 손을 뻗쳤다. 클로이는 자기자신에 대한 분노와 후회로 손이 떨려 제대로 가운의 끈을 맬 수가 없었다. 레온이 곧 눈치채고는 재빨리 클로이의 옷끈을 매어 주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문이 열리며 환히 내비치는 잠옷 차림의 마리사가 모습을 나타냈다. "레온!"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리고 클로이를 바라보는 눈도 순식간에 한층 더 험악해졌다. "레온, 무서운 꿈을 꾸었어요. 깜짝 놀라 레온을 찾으러 갔었어요." 갑자기 어린애가 응석을 부리는 듯한 목소리로 변했다. "그런데 방이 텅 비었잖아요. 그래서 아래층을 기웃거리는데 불빛이 보이기에 틀림없이 아직까지 일하는 중일 거라 생각하며 내려온 거예요. 그랬는데…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진 줄은 몰랐어요." "마리사!" 레온은 얼른 달려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마리사를 애처롭다는 듯이 부둥켜안았다. "레온, 정말로 굉장히 무서웠어요 … 그래서 방에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지 뭐예요. 난 혼자선 잠을 못 자겠어요. 곁에 있어 주어요, 네?" 마리사는 흐느껴 울면서 호소했다.


클로이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2 층으로 달려올라가 욕실로 들어갔다. 이처럼 불쾌한 경우는 생전 처음이다. 클로이는 잠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오랫동안 샤워를 한 후 침실로 돌아왔다. 레온이 없는 침실이 이토록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레온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마리사는 내가 레온과 같이 있다는 걸 알고는 그곳에 들어온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우연이었을까? 아무튼 냉정히 생각해 보면, 오히려 마리사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만일 마리사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레온에게 굴복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자진해서 그를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자기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싸여 침대에 누운 클로이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내일 아침 레온에게 까칠한 얼굴을 보인다면 고민으로 잠을 설쳤다고 그에게 고백하는 거나 다름없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레온은 지금쯤 마리사와 ― 이러한 생각이 몇 차례나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크리티코스 가족들이 찾아온 것은 이튿날 오후였다. 그들은 클로이의 예상과는 달리, 헬리콥터를 타고 온 것이 아니라 눈부시게 하얀 요트를 타고 나타났다. 그 요트는 에오스 섬의 작은 선창에 정박했다. 오전 내내 클로이는 레온과 마리사를 피해 있었다. 레온의 눈을 보면 결심이 무너질 것만 같았고, 마리사에 대해서는 억제하기 힘든 질투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온을 사랑하지 않는데도 왜 나는 질투를 하는 걸까? 레온을 진심으로 경멸하고 있으면서도 … 어쩌면 이 질투는 옛날 레온을 사랑했을 무렵의 잔흔일지도 모른다. 클로이는 질투의 불꽃을 온힘을 다해 끄려고 노력했다. 손님들을 담담하게 맞이하자고 마음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틈엔지 클로이는 열심히 옷을 고르고 있었다. 망설임 끝에 옅은 핑크 빛과 라일락 빛의 투피스를 입기로 했다. 가슴을 우아하게 감싸는 듯한 블라우스와 스커트의 섬세한 주름 등, 어느 옷에나 무슈 르네의 개성인 우아함이 가득 차 있었다. 살롱으로 내려가니 때마침 레온이 크리티코스 가족들을 맞이하며 들어왔다. 클로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본 레온의 눈은 휘둥그래졌다. 크리티코스 부인은 거무스레한 피부의 호리호리한 여성이었는데, 머리를 뒤로 묶어 고상하게 땋아 올리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와 얼굴 윤곽을 뚜렷하게 강조한, 얄미울 정도로 세련된 화장은 분명 파리에서 유행하고 있는 스타일이었다. 그리스에서는 흔한 검정 드레스도 훌륭하게 디자인된 것이었다.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내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순간 문이 열리며 청바지와 노브라의 새빨간 티셔츠 차림의 마리사가 나타났다. 낯이 뜨거워질 정도로 몸의 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차림이었다. 레온은 못 본 척하고는 클로이를 니코스 크리티코스에게 소개했다. 그러나 클로이는 레온이 순간 마리사를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니코스의 아버지 알렉산드로스는 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땅딸막한 키에 전형적인 그리스 인의 체격을 갖추고 있었다. 클로이는 알렉산드로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천천히 니코스에게 미소를 던졌다. 모델 시절 여러 차례 패션 쇼의 무대에서 보여 준 그 화사한 미소였다. "마담 스테파니데스…" 니코스는 그렇게만 말했을 뿐, 넋을 잃은 듯 클로이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소년 티가 가시지 않은 니코스와 저 마리사를 레온은 진정으로 결혼시킬 생각인가? 순진한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클로이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런 클로이의 마음을 알아챈 것일까? 그녀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에 무슨 암시라도 주듯 꾹 힘을 주며 레온은 클로이를 크리티코스 부인에게 데리고 갔다. "레온, 우리 주인 양반하고 할 사업 얘기가 많죠? 우리들은 염려 말고 어서 가보세요. 마리사하고도 오랜만에 얘길 나누고 싶고…" 크리티코스 부인은 조심스럽게 신중한 시선을 클로이에게 던졌다. "그건 그렇고, 부인께선 정말 때를 잘 맞춰 그리스에 돌아오셨군요. 마침 마리사에겐 좋은 의논 상대가 필요한 때니까요." 크리티코스 부인은 상냥하게 얘기하면서 이따금 니코스 옆에 있는 마리사를 훔쳐보았다. 마리사는 니코스를 편안하게 해주려고 하기는커녕 니코스가 한창 신나서 얘기하고 있는데도 딴전을 부리고 있다. "레온, 미안하지만 마리사의 저 옷은 품위가 너무 없는 것 같군요. 유럽의 말괄량이들이 즐겨 입는 옷처럼 보이는데요. 저래 가지고는 혼삿길이 막히고 말죠." 크리티코스 부인은 솔직하게 말했다. 레온이 대답하려는 순간 알렉산드로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즉시 레온하고 사업 얘기를 시작했다. "실례합니다만, 저쪽으로 가실까요?" 이윽고 레온은 알렉산드로스를 재촉하여 같이 밖으로 나갔다. "니코스, 마리사더러 정원이나 구경시켜 달라고 하는 게 어떻겠니?" 니코스를 곁으로 부르더니 크리티코스 부인은 자상하게 권했다.


"젊은 남녀가 단둘이 있게 되면 흔히 처녀 쪽 집안 사람들이 염려하는 법인데, 지금은 그 반대인 것 같군요. 마리사보다 니코스 쪽이 더 염려스럽군요." 두 사람 다 마음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정원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크리티코스 부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로이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얼른 생각나지 않아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크리티코스 부인이 자기를 그냥 크리스티나라고 불러 달라고 말하게 되었을 즈음에는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하여 진심으로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레온의 의사와는 달리 나는 이 혼담을 반대하는 편이에요. 니코스는 결혼하기에는 아직 나이가 어린데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 눈치가 빠르지 못해 마리사 같은 응석받이 처녀는 도저히 감당해 내지 못할 거예요. 그렇지만 우리 집 양반이 레온에게 사업상 여러 가지로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 제대로 거절할 수도 없어요." 크리티코스 부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물론 표면상으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리지요. 하지만 사실 아테네에선 말예요. 지난 반 년 동안 마리사에 대한 별로 향기롭지 못한 소문이 나돌고 있어요." 크리티코스 부인은 클로이의 의아해하는 표정을 보고는 다시 얘기를 계속했다. "클로이, 레온한테서 얘기 들었겠지. 아테네의 사교계는 고리타분할 정도로 폐쇄적인데도 남의 얘기하는 건 좋아하죠. 사교계에서 인기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심해요. 레온이 파리에서 당신을 데리고 돌아왔을 때도 정말이지 이만저만 시끄럽지 않았어요. 당신은 그리스의 처녀들과 그 어머니들이 선망해 마지않는 대상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집을 뛰쳐나갔을 땐 외국인을 아내로 삼으니까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레온이 얼마나 공격을 당했는지 몰라요. 내가 얘기하지 않더라도 당신도 대강은 상상할 수 있겠죠? 그때는 누구나 다 은근히 레온이 당신과 이혼해 주길 바라고 있었을 거예요. 그중에서도 특히 마리사가 그랬을 거예요. 어머, 죄송해요. 이런 말까지 해서. 부디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마세요." 침묵을 지키고 있는 클로이에게 크리티코스 부인은 얘기를 계속했다. "외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까닭없이 마리사를 싫어해서는 안 되지만, 만일 당신이 앞으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원한다면 저 마리사를 단단히 주의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나는 당신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창백해진 클로이에게 크리티코스 부인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레온은 마리사를 아직도 어린애 취급하고 재멋대로 행동하게 내버려 두나 보더군요." 혹시 크리티코스 부인이 레온과 마리사와의 관계를 눈치채고 있는 게 아닐까? 한순간 클로이의 가슴에 불안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침착하게 생각해 보니 만약 그렇다면 자신에게는 도리어 더욱 유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말이라도 해서 레온을


감싸줄 생각이었으나 클로이는 즉시 마음을 돌렸다. 만일 크리티코스 부인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면 얘기는 간단하다. 이 섬에서 탈출하고 싶다고 털어놓기만 하면 틀림없이 선뜻 협조해 줄 것이다. 클로이는 갑자기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크리티코스 부인은 얘기를 중단하고 클로이가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기다리는 듯한 눈치였다. "실례했어요. 어쩐지 머릿속이 멍해져서…" "괜찮아요, 클로이. 염려하지 말아요. 레온과 당신은 여기서 두 번째 신혼여행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아요. 우리 집 양반 얘기로는 당신들은 꽤나 열렬한 모양이더군요. 방해가 되기 전에 우린 어서 돌아가야지…" 크리티코스 부인은 놀리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클로이도 덩달아 미소를 짓긴 했지만, 레온이 친구에게 얘기하고 있는 내용을 상상하면 마음이 편안치 않았다. 레온 특유의 방식으로 모든 걸 자기에게 유리하게 조작해 내어 얘기했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아내가 몹시 자식을 낳고 싶어한다고 허풍을 쳤을 테고. "클로이, 마리사가 항상 같이 산다는 건 정말이지 딱한 노릇이에요. 레온도 조금만 머리를 써서 잠시 동안만이라도 마리사를 엘레나 아주머니 댁에 맡기면 좋을 텐데. 그분은 마리사의 버릇없는 행동을 용서해 줄 분이 아니예요. 아주 좋은 약이 될 텐데 말예요. 한데 마리사의 저 옷차림이란…" 크리티코스 부인은 눈살을 찌푸리곤 다시 얘기를 계속하려 했다. 그러나 그때 마침 정원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니코스와 마리사가 들어오는 기척이 났기 때문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곧 살롱으로 들어왔다. 니코스는 햇볕에 그을은 얼굴을 붉히고 있었고, 마리사는 언뜻 보기에는 지루하고 따분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레온에게

부탁해서

아테네로

데려가

달라고

해야겠어요.

에오스는

따분하고

지루해서… 이러다간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고 말 것 같아요." 마리사는 검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올리더니, 예의 없음을 비난하는 듯한 클로이의 눈을 쏘아보았다. 니코스가 난처한 듯 다시 얼굴을 붉혔다. 클로이는 버릇없는 어린아이를 혼내 주듯이 마리사의 엉덩이를 힘껏 때려 주고 싶었다. 10 대의 반항기라면 또 몰라도 22 살이나 돼가지고 이같이 방자스런 행동을 하다니… 크리티코스 부인의 말처럼 어떻게 할 수 없는 표독스런 말괄량이다. 그런가 하면 또 마리사에겐 이상스레 경험이 많은 듯이 보이는 면도 있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사물을 심술궂게 바라보는 면도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여자라고 생각한 클로이는 문득 지금까지와는 달리 자신이 줄곧 마리사를 관찰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마리사는 레온이 비호해 주는 품안을 떠나기가 두려워 오빠를 의지하는 감정을 특별한 애정으로 바꿔 버린 것은 아닐까? 클로이의 머릿속에 자기의 마음속을 털어놓았을 때 보여 준 무서울이만큼 심각한 마리사의 표정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어려서 부모를 여윈 마리사가 오빠 레온을 진심으로 사모하고 누구보다도 믿고 의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따뜻이 돌봐 주던 오빠 곁을 떠나야 하는 나이가 됨에 따라 불안이 쌓인 끝에 어느 새 오빠에 대한 사랑의 망상에 매달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저렇게까지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이 불안의 반동이라고 생각한다면 마리사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클로이는 마리사가 약간 애처롭게 여겨졌다. 하지만 레온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도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리사의 기분은 모르는 바 아니지만, 레온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아무리 재산이나 권력이 있다 하더라도 배다른 누이동생과 불륜을 저지르다니… 어느 틈엔지 클로이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마리사, 이젠 저녁식사를 하게 옷을 갈아입고 오는 게 좋지 않겠어요?" 이윽고 정신을 차린 클로이는 마리사를 재촉했다. "어머나, 날 내보내고 험담하려구? 자, 얼마든지 할 테면 해봐요. 나는 아무 상관없어요. 설사 니코스의 아버님이 반대하시더라도 레온이 하라고 하면 니코스와 결혼할 테니까." 마리사는 토라진 듯 내뱉고는 휭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크리티코스 부인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마리사가 실례되는 말을 해서…" 클로이는 재빨리 사과했다. "틀림없이 레온한테 야단을 맞고 우리한테 화풀이를 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저런 태도를 취하다니… 나중에 꼭 사과드리게 할게요." "아아뇨, 마리사는 결코 사과하려 하진 않을 거예요." 크리티코스 부인은 쌀쌀하게 말했다. "그보다 클로이, 난 당신이 더 딱해요… 정신차리지 않으면 한평생 저 아이의 방자스러운 행동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될 거예요. 빨리 아이를 낳으세요. 그러면 레온도 오로지 자기 아들에게만 애정을 쏟게 될 거예요." 크리티코스 부인은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는 못해요 … 클로이가 마음속으로 이렇게 씁쓸하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레온이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들어왔다. 그리고 똑바로 클로이에게 다가와서 소파의 팔걸이 쪽에 앉더니 사랑스럽다는 듯 어깨를 감싸안았다. "마리사는 어디 있지?" "옷 갈아입으러 갔어요."


클로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레온은 클로이의 자연스럽지 못한 태도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클로이를 바라보는 눈이 갑자기 매서워졌다. "화해하시길 정말 잘하셨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클로이에게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놓치지 않겠어요. 아이가 생기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질 테니까요." 레온이 능글맞게 껴들었다. "좋아요, 레온. 그거야말로 그리스 사나이다운 행동이지!" 알랙산드로스는 쾌활하게 웃었다. 클로이는 간신히 침실로 돌아왔다.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그곳도 이미 자기 혼자만의 방은 아니었다. 욕실에는 레온의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놓여 있고, 침대 위에는 검푸른 실크 가운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손님을 접대하고 있는 동안에 하녀 중 누군가가 두고 간 모양이다.

클로이는

심호흡을

하려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갑자기

눈물이

복받쳐올랐다. 왜 눈물이 나오는 걸까…? 레온에게 상처받아 오랫동안 울면서 살아왔는데, 눈물은 이미 오래 전에 말라 버린 줄 알았는데. 자기자신도 뜻밖에 나오는 눈물로 당황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려 클로이는 온몸이 굳어졌다. 이윽고 화장대의 거울 속으로 클로이의 눈과 레온의 눈이 마주쳤다. "레온, 나는 당신과 함께 이 방을 쓸 수 없어요. 만약 당신이 강요한다면 나는 크리티코스 부인에게 모조리 얘기하겠어요." 클로이는 조용히 말했다. "아니야,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지 이곳은 우리 두 사람의 방이야." 레온은 클로이 곁에 꼼짝 않고 서서 단호하게 말했다. "클로이, 나는 그런 쓸데없는 얘길 하러 올라온 게 아니야. 빨리 샤워를 하고 싶어." 레온은 그렇게 말한 후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클로이는 당황하며 얼굴을 돌렸다. 레온의 가슴이 자기 살갗에 닿았던 감촉이 되살아날까 두려웠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클로이!" 레온의 매우 거친 목소리가 조용한 방안에 울려퍼지자 클로이는 무의식중에 몸을 움츠렸다. "클로이, 두번 다시 그런 식으로 외면하지 말아. 지금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반드시 나를 원하게 될 거야. 클로이, 알겠어?" "왜 이래요!"


레온이 힘껏 끌어안자 클로이는 있는 힘을 다해 커다란 몸을 밀어내려 했다. 빨리 피하지 않으면 레온의 따뜻한 체온에 압도당해 몸과 마음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필요도 없이 레온은 가볍게 몸을 떼고는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클로이, 당신은 거짓말쟁인데다 겁쟁이야. 우리들 사이의 일을 조금도 바로 보려고 하지 않아. 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단 말야. 당신은 일생 동안에 몇 번이나 경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중대한 일을 허사로 돌리려 하고 있어. 클로이, 당신은 과거로부터 도피하려고 하지만,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인생에는 절대로 잊히지 않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 법이야." 레온은 출입구에 셔츠를 벗어던지더니 욕실로 사라졌다. 클로이는 몹시 마음이 동요되어 잠시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기운을 되찾았다. 레온은 그렇게 말해 나를 위협하려고 했을 뿐이다. 아무래도 이 방을 같이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그것도 잠시 동안만 참고 견디면 되는 일인 듯했다. 마리사와 니코스와의 결혼을 찬성하지 않는 크리티코스 부인이 그렇게 오랫동안 머물 리는 없다. 적어도 2, 3 일 안에 그들과 함께 이 섬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다! 클로이는 레온이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5 그날 밤의 저녁식사는 클로이에겐 결코 즐거운 것은 못되었다. 마리사는 남의 이목도 꺼리지 않고 레온에게 응석을 부리고 있었고, 그런 모습을 크리티코스 부인은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차리리 손님들 앞에서 레온의 가면을 벗겨 버릴까? 클로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직 테이블 끝에 있는 자기 자리에서 불유쾌한 감정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마리사의

행동은

레온의 시선을 혼자

독차지하려

우쭐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니코스와의 혼담을 깨려고 하는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 되었든 마리사의 태도는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너무했다. 레온 이외엔 누가 얘기를 걸어도 그냥 건성으로 흘려들었고, 대답을 해도 아주 무뚝뚝한 말투를 썼다. 게다가 마리사가 입고 있는 진홍색 실크 드레스는 몹시 대담한 디자인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좀더 나이 든 여자가 입어야 할 옷이었다. 레온은 흥이 깨진 식탁의 분위기를 정말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아까부터 자기 혼자서만 니코스에게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것이 재미있느냐며 상냥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온화한 웃음을 띤 얼굴 뒤에 교활한 마음을 숨겨 두고서 …

가엾은 니코스. 레온이

니코스를 마리사의 결혼 상대로 고른 것은 그의 점잖고 조심스러우며 소극적인 성격에 착안했을 것이다.


이윽고 식사가 끝나자 모두들 응접실로 갔다. 활짝 열어놓은 안뜰 쪽의 문을 통해 따뜻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레온,

정말

멋진

곳이어서

부럽군요.

클로이,

이곳은

신혼여행

장소로는

아주

안성맞춤이에요." 크리티코스 부인이 기분 좋은 듯이 심호흡을 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순간 마리사의 눈이 약간 우울해졌다. "레온, 정원을 산책해요, 네?" 마리사는 아양을 떨며 몸을 기대듯이 하여 팔짱을 끼고는 레온의 얼굴을 뜨거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손님들 앞인데도 태연히 …

크리티코스 집안의 세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클로이는 온몸이 오싹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손을 꼭 움켜쥐었다. "수영하지 않겠어요? 난 밤에 수영하는 게 아주 좋아요. 차가운 물의 감촉이 못 견디게 기분 좋거든요. 깜깜한 어둠 속에서 수영하는 게…" 그러자 다음 순간 마리사와 레온이 함께 헤엄치고 있는 광경이 클로이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레온이 마리사와 키스하고 있다. 마치 신혼시절 클로이에게 했던 것처럼 아주 열렬하게… 레온이 불쾌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클로이는 몸서리를 쳤다. "마리사, 손님들이 와 계신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자아, 니코스하고 같이 산책이나 해라. 니코스도 틀림없이 산책을 하고 싶을 테니." 레온이 차분한 태도로 타일렀다. 대단한 연기력이다. 레온의 빈틈없는 태도에 새삼스러이 놀랐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마리사와 레온의 모습을 보고 있는 크리티코스 가족들조차도 두 사람의 관계를 전혀 의심해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마리사는 오히려 정직하다. 니코스와 함께 산책하라는 말을 듣자마자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마리사는 뭔가를 꾀하고 있음이 분명했지만 클로이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클로이는 마리사의 태도에 대해 어쩐지 두려움을 느끼며 숨을 죽이고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리사는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나 보다만, 나는 산책을 하고 싶구나. 니코스, 나하고 같이 나가자꾸나. 아버님은 아테네에서 걸려올 전화를 기다리시는 모양이니까." 뜻밖에도 크리티코스 부인이 도와 주어 서먹서먹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아참, 그렇지. 미안하네만, 그 전화 내용의 여하에 따라서 예정보다 일찍 아테네로 돌아가야 할지도 몰라. 중대한 일이거든." 알렉산드로스는 레온에게 사과했다.


사업관계라는 건 단순한 핑계고, 사실은 크리티코스 부인이 그렇게 둘러대라고 일러 주었을지도 모른다. 클로이는 이런 전후 상황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있었다. 남편의 의견이야 어떻든, 그녀는 니코스와 마리사의 혼담을 백지로 돌리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어머니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클로이로서는 그녀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만약 크리티코스 가족이 돌아갈 예정을 앞당겼다면 클로이도 급히 탈출준비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첫째는 여권수첩을 되찾는 일이다. 놓여 있는 곳은 짐작하고 있다. 별채에 있는 레온의 서재다. 레온과 침실을 쓴다면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살그머니 서재에 숨어 들어갈 수 있겠지만… 아무튼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고 있다가는 너무 늦는다. 어떻게 해야 하지? 클로이는 어느 틈에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클로이, 당신도 같이 가겠어요?" 크리티코스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함께 나가기로 합시다. 알렉산드로스도 전화가 오거든 연락하라고 이르면 되죠." 레온이 끼어들었다. "에오스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밤에라야 제대로 볼 수 있어요. 어둠의 베일 밑에는 괴로운 유혹이 숨어 있으니까요. 달콤한 향기에 이끌려 어둠 속을 걸어가면 이윽고 이상야릇한 마력이 온몸 가득히 넘쳐흐르고 신비로운 감각이 눈뜨게 되죠. 눈에 보이는 것 이외의 다른 감각, 예를 들면 촉각 같은…" 레온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듣고는 전에 어둠 속에서 자신의 살갗 위로 미끄러지던 레온의 미묘한 손가락의 놀림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나는 왜 그렇게도 쉽사리 금단의 열매를 이 이교도의 손에 맡겨 버렸던 것일까? 클로이는 쓴디쓴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지금 레온과 내가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원하고 있다면 이곳 에오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는 모두 방해가 될 것이다. 단둘이 밤의 고요 속을 헤매다니다가 이따금 멈춰서서 따뜻한 키스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어쩌면 나무 그늘 속에서 숱한 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원한 사랑을 서로 확인했을지도 모른다. "클로이, 괜찮아?" 레온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모두들 도어 앞에서 걱정스러운 듯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참, 그렇지! 클로이의 머릿속에 서재를 뒤지러 갈 좋은 구실이 떠올랐다. "네에, 머리가 아파요. 실례지만 나는 좀 쉬었으면 좋겠군요." 클로이는 그럴 듯하게 거짓말을 했다. "어머,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맑은 바깥 공기를 쐬면 가벼운 두통쯤은 금세 나을 거예요. 이봐요 레온, 당신이 권해 봐요…"


"레온,

어서

가요.

밤새도록

이렇게

기다릴

거예요?

골치가

아프다는

뻔한

꾀병이에요." 잔뜩 화가 난 마리사가 큰소리로 외치며 재촉했다. "골치가 아프다는 건 영국 여자들이 침대를 같이 쓰고 싶지 않을 때 쓰는 상투어가 아닐까요?" 마리사의 너무나도 대담하고 노골적인 말에 또다시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저런저런, 마리사에겐 좀더 엄한 가정교육이 있어야겠어요." 크리티코스 부인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레온은 태연하게 손님들을 이끌고 안뜰로 나갔다. 마리사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걸까? 혼자 남은 클로이는 마리사의 마음속을 헤아려 보았다. 마리사가 하는 짓으로 보아 어떻게 해서든 레온을 설득하여 그들의 재결합을 취소시키려는지도 모른다. 레온의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마리사로서는 자기 이외의 여자가 그의 아이를 낳는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가엾는 마리사… 하지만 그 같은 슬픈 걱정도 내가 여권을 다시 찾아 크리티코스 가족들과 함께 이 섬을 떠날 때까지의 일이다. 클로이는 마리사를 불쌍하게 생각하면서 탈출할 결의를 새로이 했다. l0 분쯤 기다렸다가 클로이는 응접실을 빠져나가 곧바로 서재로 갔다. 처음으로 들어가 본 서재 안은 놀랄 만큼 휑하니 비어 있었다. 불을 켤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보름달의 환한 빛이 비쳐들어 여권수첩을 찾는 데는 별로 지장이 없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하얀 벽 한쪽에 책장과 작은 정리장이 놓여 있었다. 상당히 고급스런 것임에도 레온은 서류함으로 쓰고 있는 모양이다. 산뜻한 색상의 페르시아 융단이 깔려 있는 마룻바닥, 그 대부분을 커다란 책상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자기 것을 되찾기 위한 짓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남의 물건에 몰래 손을 댄다는 것에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클로이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책상의 오른쪽 맨 위 서랍을 열었다. 꼼꼼하게 차곡차곡 쌓아놓은 파일의 겉을 얼른 훑어보았지만, 어느 것이나 다 여권수첩과는 관계가 없었다. 두 번째 서랍을 열어보았지만 일기장과 주소록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돌아올 때까지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았을까? 클로이는 초조해하면서 반대쪽 서랍에 손을 댔다. 잠겨 있다! 클로이는 힘껏 잡아당겼지만 서랍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실망한 나머지 클로이는 인기척이 난 것을 알지 못했다. "내 짐작이 맞았군. 하지만 당신의 꾀병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나도 역시 바보였어." 팔짱을 끼고 출입구에 서 있는 레온은 냉랭하게 웃고 있었다.


"클로이, 그런데 당신이 찾고 있는 건 이건가?" 레온은 열쇠를 웃옷 호주머니 속에서 천천히 꺼내 서랍을 열더니 검푸른 수첩을 클로이에게 내 보였다. "제발 그걸 돌려줘요." 클로이는 간절히 애원했다. "아들을 낳아 주면 돌려주지. 나는 대를 이를 아들을 얻고, 당신은 자유를 되찾게 되는 거지. 어때, 공정한 교환이지?" "레온, 당신 지금 진정으로 하는 말예요? 내가 당신을 위해 아이를 낳아 주고 그대로 혼자 떠날 것 같아요? 나는 절대로…" "절대로 뭐야? 옳지, 당신은 자유로와지는 것만으로는 불만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도대체 뭘 원하는 거지? 돈인가, 아니면 보석인가?" 레온은 경멸하듯이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말이 막힌 클로이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고 싶은 말을 해주니까 속이 후련하지?" 레온은 클로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천만에요. 당신하고 이 섬에 있는 한은 결코 속이 후련할 리가 없겠어요!" "그렇다면 빨리 아들을 낳아 주고 여기서 떠나면 그만 아냐." 레온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 따위 짓을…" 클로이는 바짝 긴장된 자세로 버티고 서 있었다. 크게 뜬 눈이 마음의 동요를 솔직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다른 남자라면 이 정도로 불안해하는 표정을 보게 된다면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온은 엷은 미소를 띠면서 느닷없이 클로이를 끌어안더니 몹시도 거칠게 입을 빨았다. 클로이의 분노를 막아 버리려는 듯한 기나긴 입맞춤 … 저항하려고 해도 숨막힐 정도로 꽉 안겨 있어 클로이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클로이, 당신은 날 몹시 원하지? 숨겨 봤자 소용없어." 레온은 분명치 않은 흐릿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쓸데없는 짓일랑 집어치워. 욕망을 느끼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야. 클로이, 우리는 두 사람 다…" 갑자기 꿈꾸는 듯한 황홀한 기분에 빠져들었던 클로이는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레온을 힘껏 떼밀었다.


"레온, 그 따위 속임수는 통하지 않아요. 당신은 당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만 나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환히 알고 있어요." 나가려고 하는 클로이를 레온의 손이 몹시 거칠게 제지했다. "다들 돌아왔군. 아무래도 마리사는 니코스하곤 마음이 안 맞는 모양이야." 창밖을 내다보면서 레온은 몹시 불쾌한 듯이 중얼거렸다. "실망했나요? 크리티코스 부인은 이번 혼담에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눈치던데…" "당신이 크리티코스를 설득했나?" 레온은 슬쩍 입을 삐쭉거렸다. "하기야 당신하고 마리사는 처음부터 사이가 안 좋았으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중대한 사건에 여자들이 방해를 하다니…" "방해를 하다뇨? 그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어요. 마리사에 대한 감정과는 아무 상관없어요. 그보다 레온, 당신이야말로 아주 태연하게 마리사를 시집보내려는군요. 언제나… 언제나…" 레온과 마리사와의 특별한 관계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적당한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아시겠죠,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난 말예요, 니코스가 너무나 가엾어요." 클로이는 서투르게 매듭을 지었다. "어머나 클로이, 여기 있었군요." 크리티코스 부인의 목소리가 명랑하게 울려퍼졌다. "같이 갔었더라면 좋았을걸. 모처럼 즐기는 달밤이었는데… 레온은 당신이 없으니까 얼른 먼저 돌아가 버리고…" 클로이는 장단을 맞춰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목덜미에 놓인 레온의 뜨거운 손 때문에 웃을 수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먼저 가서 쉬어야겠어요." 클로이는 레온의 팔을 빠져나와 그 자리를 떴다. 조금 후에 복도에서 마주친 마리사의 눈에는 적개심이 가득 차 있었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클로이는 후유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부터는 이 방과 침대를 레온과 함께 써야 한다. 클로이는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레온에게 허점을 보여 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들떠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 2 시가 지나 문밖에서 말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레온이 들어왔다. 그는 성급하게 재킷을 벗고 침대 위에 몸을 던지고 나서야 비로소 클로이가 침대에 있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클로이, 제발 부탁이야. 오늘 밤은 더 이상 성가신 얘긴 하지 말아." 클로이에게 레온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방금 전 알렉산드로스한테 이번 얘기는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말을 들었어. 확실히는 모르지만, 부인이 마리사가 니코스의 아내로 걸맞지 않는다고 반대한 모양이야. 서로가 뒷맛이 좋지 않은 결과가 되어 유감스럽기 짝이 없어." 그래선지 레온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클로이는 자기 신세는 접어두고라도 어쨌든 레온이 불쌍해졌다. "도리어 잘됐지 않아요? 설마 크리티코스 집안에서 결혼시키자고 했다 하더라도 아마 당신은 마리사를 설득할 수 없었을 거예요." "마리사는 아직 어린애야. 내 보호 아래 있는 동안에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레온은 몹시 불쾌한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결혼도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반드시 결혼해야만 하나요?" "클로이, 그 대답은 당신이 알고 있는 바와 같아. 우리가 맛본 것과 똑같은 괴로운 경험을 남에게도 맛보게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못돼." 벽에 기대어 있던 레온이 몸을 일으키자 술 냄새가 풍겨 왔다. "당신 취하셨군요?" "아냐, 안 취했어. 계속 마시기는 했지만 그렇게 취한 건 아냐." 레온은 단추를 잡아 떼듯이 실크 셔츠의 앞가슴을 열었다. "클로이, 제발 부탁이니까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 마치 악마라도 보는 듯한 시선이잖아!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야. 품고 있는 욕망이나 욕구도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게 없어. 먹는 거나 마시는 거나 여성을 사랑하는 거나… 그리고 이 손으로 내 아이를 안아보고 싶어하는 것도…" 클로이는 하마터면 레온에게 손을 내밀 뻔했으나 정신을 가다듬어 얼른 자신의 욕망을 억제했다. 방이 갑자기 답답하게 느껴졌다. "저어… 잠시만 바람 좀 쐬고 오겠어요.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어요. 난…"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레온은 갑자기 클로이의 팔을 붙잡았다. 뺨은 굳어지고, 검은 눈 속에는 분노가 어렸다. "그래? 나하고는 같은 공기를 들이쉴 수 없단 말인가? 하지만 당신은 내 아내야. 나는 기필코 당신에게 내 아이를 낳게 할 테니까. 그리스 인의 긍지를 걸고서라도." "그렇다면 왜 빨리 그렇게 안하시죠?" 클로이는 감정적인 태도로 돌변했다.


"날 납치해 온 짓은 태연히 저지르고도 이제 와서 뭘 주저하는 거죠? 혹시 내가 먼저 당신의 품안으로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요? 그런가요, 레온?" "전의 당신은 그렇지가 않았어… 클로이, 다시 한번 그때로 되돌아가지 않겠어?" 레온은 클로이의 팔을 어루만졌다. "건드리지 말아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자기자신을 경계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줄

모르는 레온은 얼굴빛이

변했다. 클로이는

즉시 조심성없이 내뱉은

말을

뉘우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런

앙큼한

위선자!

그토록

나를

원하고

있으면서.

좋아!

손으로

기어코

굴복시키고야 말겠어." "몸만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클로이는 자기 스스로도 놀랄 만큼 침착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의 참다운 결합이 육체적인 것만은 아닐 거예요 … 레온… 뭘 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이번에는 내가 맑은 공기를 쐬러 나가야 할 차례인 것 같아." 레온은 셔츠의 단추를 다시 채우더니 빈정거리듯 웃어 보였다. "이상하게도 감상적인 기분이 되고 말았어. 클로이, 먼저 자고 있어." 레온은 고개를 떨군 채 방을 나갔다. 도대체 어디에 가 있었을까? 레온은 아침 일찍 돌아왔다가 클로이가 잠을 깨기 전에 다시 나간 듯했다. 창에서 비쳐드는 햇살을 받고 잠을 깬 클로이의 눈에 한쪽이 움푹 팬 베개가 허전하게 보였다. 점차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지만 이런 기분이 들 때 레온이 곁에 없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또다시 나약한 모습을 보이게 될지 모른다. 클로이는 한숨을 쉬며 욕실로 가서 찬물로 몸을 씻었다. 조금 후에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는 안뜰로 나갔다. 여러 잔째의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을 때, 크리티코스 부부가 나란히 모습을 나타냈다. "바다 공기가 몸에 좋아서인지, 차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인지 기분 좋게 잠을 푹 자다가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군요." 크리티코스 부인이 명랑하게 웃었다. "클로이, 이렇게 아름다운 섬에서 살다니, 당신은 얼마나 행복할까?"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대부호와 결혼해서 얼마나 행복하냐구, 크리스티나 당신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지?" 알렉산드로스는 아내를 슬쩍 비꼬았다.


아무래도 그들은 오늘 하루는 느긋이 이 섬에 머물러 있을 모양이다. 아마도 오늘 돌아가 버리면 레온의 기분이 상하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니코스는 마리사가 식탁에 없는 것을 알고는 마음이 푹 놓이는 눈치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이 여기를 떠나기 전까지는 여권을 다시 찾아 감쪽같이 요트 속으로 끼어들어가야 한다. "제일 좋은 바닷가는 어디죠?" 아침식사를 끝낸 후 니코스가 수줍은 듯이 클로이에게 물었다. 풀장보다는 바다에서 수영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크리티코스 부인은 도저히 헤엄칠 것같이 보이지 않았고, 알렉산드로스는 레온과 사업상의 얘기가 있는 눈치였다. 클로이가 니코스와 함께 가기로 했다. 하녀인 카티나에게 가는 길을 물어본 다음 자동차에 먹을 것을 가득 넣은 바구니를 싣고, 두 사람은 섬의 쑥 내민 후미를 향해 떠났다. "니코스, 늦지 않게 돌아와야 한다." 크리티코스 부인은 그들을 보내면서 다짐을 주었다. 아침에 일어난 후 한번도 레온과 마리사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이 혼담이 백지로 돌아갔다는 얘기를 마리사에게 전한 것일까. 클로이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후미의 양쪽은 벼랑이었다. 해변에 가려면 차를 세워 두고 바위를 깎아 만든 좁은 층계를 내려가야만 했다. 니코스는 양손에 바구니와 타월을 들고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따금 걱정스럽게 뒤를 돌아다보았다. 클로이의 마음에 따뜻이 보살펴 주려고 애쓰는 니코스의 심정이 어렴풋이 전해져 왔다. "염려 말아요, 걸음을 잘못 걸을 정도의 늙은이는 아니니까." 클로이가 니코스를 놀려댔다. "죄송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이윽고 해변에 내려선 클로이에게 니코스는 진지하게 사과했다. "부인께선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정말로 아름다와요… 레온은 참으로 행복한 분입니다." 어깨에 등이 드러난 끈이 달린 면 셔츠와 반바지 차림을 한 클로이를 눈이 부신 듯 쳐다보면서 니코스는 한숨을 쉬었다. "괜한 칭찬은 하지 말아요. 여긴 수영하러 왔다는 걸 잊지 말도록!" 클로이는 멋쩍음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명령조로 말했다. 클로이는 셔츠와 반바지를 벗고 속에 입고 있던 비키니 차림으로 혼자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화끈히 달아오른 피부에 비단결처럼 싸늘하게 감겨 오는 바닷물이 몹시 상쾌했다. "니코스, 여기 오길 잘했어요. 봐요, 풀장보다 훨씬 더 기분이 좋아!" 흰 수영 팬티 차림으로 뒤따라온 니코스에게 클로이는 신나는 듯 떠들었다.


니코스는 보기 좋은 크롤 수영법으로 후미 한가운데 불쑥 튀어나온 바위를 향해서 헤엄치기 시작했다. 클로이는 눈을 감고 똑바로 누운 자세로 물에 뜬 채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듣다가 그만 깜빡 졸았다. 갑자기 얼굴에 물보라가 튀어오는 바람에 클로이는 퍼뜩 눈을 떴다. 그러자 바로 옆에서 새하얀 이를 드러내고 장난꾸러기같이 웃는 니코스가 보였다. "이젠 슬슬 점심이나 먹으러 가요. 니코스, 저 해변까지 누가 먼저 가나 내기를 할까요?" 클로이도 생긋 웃어 보였다. 먼저 출발했는데도 클로이는 니코스를 따라잡기 어려웠다. 멋진 수영 솜씨, 영락없는 레온 같다. 레온… 그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린 순간 클로이는 자신이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깨달았다. 점심을 먹는 동안 클로이는 니코스에게 요트 내부에 관해 상세하게 물어보았다. 요트가 바다 위로 나갈 때까지 숨어 있을 만한 곳을 미리 정해 두어야 한다. 클로이는 여권수첩을 다시 찾는 즉시 요트 안으로 숨어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애당초 계획했던 대로 쇼핑을 핑계삼아 크리티코스 가족들과 함께 아테네로 가는 방법은 레온에게 꼬리를 잡힐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수리중이라는 선실에 숨은 채 아테네까지 갈 수 있다면 크리티코스 가족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도 된다. 점심을 먹은 후 니코스는 해안을 산책하고, 클로이는 그 동안 일광욕을 했다. 두 사람은 다시 수영을 잠시 동안 즐긴 후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자리를 비켜 드릴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요. 내 수영복은 이미 말랐으니까 이 위에 옷을 입으면 돼요." 클로이는 일어나서 몸에 묻은 모래를 털었다. "좀더 천천히 쉬면서 수영하지 못해 유감이에요." 클로이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순간 뾰족한 조가비에 발을 베었다. 너무나 아파서 비틀거렸으나 니코스가 재빨리 부축해 주었다. 니코스는 클로이의 발에 난 상처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그런 모습을 벼랑 위에서 키 큰 남자가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니코스나 클로이는 전연 알지 못했다. "상처가 깊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조심했어야 하는데…" 클로이는 니코스의 뒤를 따라 차를 둔 데로 올라갔다. 집으로 돌아오니 안뜰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없었다. 홀에서 마주친 마리사의 얘기로는 모두 살롱에 모여 음료수를 마시고 있다는 것이다. 클로이는 곧장 욕실로 샤워를 하러 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그녀는 얼른 타월로 몸을 가렸다. 들어온 사람은 레온이었다.


"뭘 하고 있지?" 레온은 험악한 표정으로 클로이를 노려보았다. "키스 자국을 지우려고 해도 소용없어. 조금 전에 내 눈으로 다 보았지. 이제야 당신이 마리사와 니코스의 혼담을 달가와하지 않은 까닭을 알았어." 레온은 조금도 변명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레온, 당신은…" 클로이의 손에서 타월이 미끄러져 내렸다. 클로이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그 타월을 주워 올리는 동안 레온은 뚫어지게 클로이의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님들에게 감사해야겠어. 그들만 없다면 가만 두지 않았을 거야. 유부녀가 그런 짓을 하다니. 클로이, 잊지 말라구. 오늘 밤 손님들이 돌아간 후에는 나하고 단둘이 있게 될 테니까." 레온은 엷은 웃음을 남기고 나가 버렸다. 샤워를 한 후 옷을 입고 아이섀도를 바르고 있을 때, 마리사가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왔다. "레온은 어딨죠? 할 얘기가 있는데…" "여긴 없어요." 빨리 나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클로이는 쌀쌀맞게 대꾸했다. "용케도 아직 이곳에 있군요. 레온이 바라는 건 아이뿐이에요. 당신은 자식을 낳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아요. 그런데도 그렇게 태연히 있을 수 있어요?" "마리사의 눈엔 내가 태연하게 보여요?" 클로이는 아이섀도를 놓고 마리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가려 해도 여권이 없어요. 레온이 감춰 두고 있어요." "그것만 찾으면 이곳을 떠날 건가요?" 마리사는 성급히 클로이의 말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어떻게 이 섬에서 나가죠?"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녜요." 마리사는 클로이가 어서 이 섬에서 나가 주기를 바라고 있다. "정말로 떠날 거죠?" "그래요, 찾는 즉시." 클로이는 마리사가 문 쪽으로 걸어가는 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당신의 여권수첩을 가지러 가는 거예요. 레온의 서랍 속에 들어 있죠. 나한테 맡겨요. 여분의 키가 어디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여권을 찾아 주면 틀림없이 떠나야 해요.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클로이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가엾은 마리사. 클로이는 마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이상하게 어른스러운 데가 있는 반면, 마치 어린아이 같은 면도 함께 갖고 있다. 오빠 레온을 존경하는 감정을 이성간의 애정으로 착각하여 청춘을 망치고 있는 불쌍한 아가씨… "여권수첩은 저녁식사 후 정원에서 건네주겠어요." 마리사는 약속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마리사는 어젯밤과는 달리 기분이 아주 좋았다. 레온이 무엇에 홀린 듯 마리사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레온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슨 속셈으로 마리사를 억지로 결혼시키려 하는 것일까? 특별한 관계가 있는 누이동생을 시집보내는 게 아내인 클로이와의 사이에 아이를 얻기 위한 오직 그 이유만일까… "클로이, 아테네에 오거든 우리 집에 꼭 들러요. 같이 쇼핑하러 다닙시다, 레온. 다음에 아테네에 출장을 오실 때 클로이와 꼭 함께 오세요." 크리티코스 부인은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앞으로 3 개월 이내엔 아테네에 갈 일이 없을 겁니다. 내가 거기에 갈 무렵이면 아마 이 사람은 헬기나 요트를 탈 수 없는 상태가 될 겁니다." "어머나, 해마다 가을엔 아테네에 가시잖아요?" 마리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니, 금년은 예외야. 하지만 너는 가도 상관없다. 내가 필요한 준비는 다 해줄 테니까." 순식간에 마리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레온에겐 피도 눈물도 없을까 … 마리사가 어떤 심정이 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태연히 이런 말을 하다니. 클로이는 깜짝 놀라 마리사의 표정을 얼른 살펴보았다. "클로이,

쓸데없는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마리사는

레온

얘기만

나오면

신경이

예민해지는군요. 2, 3 개월만이라도 누군가 엄격한 사람에게 맡기는 게 어떨까요? 언짢았다면 용서하세요. 그렇지만 꼭 제 말을 귀담아 들으세요." 클로이와 단둘이 있게 되자 크리티코스 부인은 정말 걱정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크리티코스 가족의 출발시간은 10 시였다. 클로이는 9 시에 정원에서 마리사와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한참 기다리고 있으니 어디선가 불쑥 마리사가 나타났다.


"여기 있어요." 마리사는 클로이 앞에 여권수첩을 내밀었다. "이걸로 내 임무는 다 끝난 셈이에요. 다음에는 당신이 약속을 지킬 차례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어요. 레온이 사랑하고 있는 건 나, 마리사뿐이라는 걸 잊지 말아요." 클로이가 대답할

새도 없이 마리사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클로이는

손에

여권수첩을 소중한 보물이라도 찾은 듯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젠 쥐도 새도 모르게 요트 안으로 숨어들어가면 그만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섬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6 일은 예상 외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여러 사람이 나와 요란하게 전송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크리티코스 부인이 우겨댔기 때문에 선창에는 레온 혼자 따라가게 되었다. 클로이는 레온이 운전하는 차가 보이지 않게 되자 즉시 지름길로 빠져나가 선창으로 앞질러 갔다. 출항 직전의 요트에 아무도 없을 리가 없다. 클로이는 숨을 죽이고 트랩을 올라갔다. 다행히도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갑판에 오를 수 있었다. 클로이는 다시 어둠 속을 더듬으며 나아갔다. 선실로 통한 가파른 층계를 간신히 내려가니 이번에는 깜깜한 복도가 나왔다. 클로이는 바짝 긴장한 채 신중히 한 발짝을 내디뎠다. 그 순간 갑자기 머리 위에서 무슨 소리가 난 듯했다. 클로이는 얼른 맨 앞에 있는 선실로 몸을 숨겼다. 선실 안도 깜깜한 어둠이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배의 옆구리에 낸 현창(舷窓)이 잠겨 있는 모양이었다. 발에 전해져 오는 엔진의 진동이 더욱 무서운 공포감을 느끼게 했다. 클로이는 모든 신경을 오직 귀에 집중시켜 발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 분, 2 분 … 시간이 지나는 게 몹시 더디게 느껴졌다. 그러나 결국 아무도 내려오지 않았다. 크리티코스 가족은 요트가 섬을 뜬 후에 선실로 내려올 예정인지도 모른다. 이윽고 기분이 가라앉으며 클로이의 머릿속에 레온의 모습이 떠올랐다. 늠름한 모습, 부드러운 몸놀림, 정열을 담은 검은 눈동자, 레온의 모든 것이 클로이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 설렘 때문에 클로이는 몇 번이나 모든 걸 잊고 몸과 마음을 허락할 뻔했다. 엔진 소리가 바뀌더니 이윽고 뱃머리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클로이는 새하얀 선체가 어두운 해면을 미끄러지듯이 나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후유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둠 속에서 간신히 침대를 찾아내어 클로이는 가장자리 쪽에 걸터앉았다. 차츰차츰 만족감이

복받쳐오른다.

마침내

해냈다.

드디어

에오스의

레온으로부터

도망쳤다.

클로이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클로이가 짜릿짜릿한 공포와 감격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강렬한 불빛이 비쳐들었다. '죄송해요. 허락없이 들어와서… 사실은 부부싸움을 한 끝에 살그머니 도망쳐 나왔어요.' 만약 발각될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생각해 둔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키가 큰 사나이의 모습이 눈앞에 드러났다. "레온…!" "놀랐나?" 레온은 문을 닫더니 전등 스위치에 태연스레 손을 뻗쳤다. 램프에 불이 켜지자 깜깜하던 어둠 속은 호화로운 침실로 바뀌었다. 커튼은 분홍빛 실크로 되어 있고, 같은 색깔의 침대 커버에는 아름답게 수가 놓여져 있었다. 현대풍의 가구는 붙박이로 되어 있다. 이런 가구는 격조 높은 잡지에서밖엔 본 일이 없었다. 두툼한 분홍빛 카펫 저쪽에 보이는 문은 아마도 욕실 입구겠지. "여긴 1 등 선실이야. 어때, 마음에 드나?" 레온의 나직한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어떻게 여기에 당신이? 도대체 뭘 하고 있어요?" 클로이는 이렇게 물으면서 마음속으로는 크리티코스 부인이나 알렉산드로스가 나타나 주기를 기다리며 이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생각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야. 하지만 새삼스레 물을 필요는 없어. 당신이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서로 잘 알고 있으니까, 클로이. 당신이 나한테서 도망치려고 했지? 크리티코스 가족이 돌아갈 때를 이용해서 에오스를 빠져나갈 작정이었나?" "그래요, 정말로 멋지게 빠져나왔어요. 안 그래요?" 클로이는 태연히 대답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기와 선실 문까지의 거리를 눈어림으로 재고 있었다. 크리티코스 가족이 있는 곳까지 가기만 하면 레온도 그들 앞에서 차마 추태를 부리지는 못하겠지. "허허, 빠져나왔단 말이지?" "네에, 빠져나왔고 말고요!" 클로이는 자신있게 외쳤다. "만일 당신이 나를 아테네에 내려 주지 않겠다고 한다면 난 크리티코스 가족들에게 모든 사실을 모조리 털어놓겠어요."


"모든 사실이라구? 그건 마리사를 꾀어 잠겨 있는 내 서랍에서 여권수첩을 꺼내 오게 한 데서부터 얘길 해야겠지?" 클로이가 정정할 새도 없이 레온은 얘기를 계속했다. "그런 얘길 해서 당신에게 도움이 될까? 그보다는 과연 그들이 당신의 얘길 곧이들을까?" 레온의 입가에 의미가 있는 듯한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 "클로이, 당신은 확실히 잘 해냈지만 완벽하지는 못했어. 사실은 클로이, 저녁식사 전에 알렉산드로스가 중요한 서류를 서재에 놓아 둔 채 깜박 잊고 나왔거든…" 그 순간 클로이의 몸에 전율이 흘렀다. "내가 대신 그걸 가지러 갔던 거야. 그랬더니 닫아 놓았던 서랍이 열려 있지 않겠어. 순간 나는 당신이 한 짓이라고 생각했지. 내가 여기 오기 직전에 마리사가 달려와 당신의 부탁을 받고 서랍 속을 뒤졌다고 자백했지만, 이미 그전에 당신의 의도와 계획을 눈치채고 있었어. 그래서 미리 크리티코스 가족의 요트와 내 요트의 위치를 서로 바꾸어 놨지. 요트를 바꾸어 놓는 것쯤은 아주 쉬운 일이었어." "아니, 그럼… 이건 당신의 요트란 말예요?" 클로이는 깜짝 놀라 레온을 응시했다. "에오스에서 탈출한 줄 알았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야. 결국 감옥이 이곳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당신은 붙잡혀 있는 몸이라는 점에서 변함이 없어, 클로이. 이 네메시스 호의 승객은 당신과 나 둘뿐이야. 로맨틱한 운항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지?" "내보내 줘요!" 클로이는 레온의 옆을 빠져나가더니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레온의 억센 팔에 붙잡히고 말았다. "간다구? 도대체 어디로 갈 작정이야? 설마 연극에서처럼 뱃전에서 투신자살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 된 바엔 차라리 자살하는 편이 훨씬 나아요! 누가 당신 같은 사람과 단둘이 있겠어요. 나는…" "그만둬, 제발!" 히스테릭하게 울부짖기 시작한 클로이를 레온은 마구잡이로 끌어안고 침대로 갔다. "클로이, 말해 두지만 나는 남편으로서

당연한

일을

할 뿐이야.

전의

순진하고

사랑스럽던 당신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지? 이런 어리석은 짓을 언제까지 계속할 작정이야?" "내가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고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건 당신이에요. 마리사한테 떠밀려서, 아니 내가 층계에서 떨어져 아이를 잃었기 때문에 지금 이런 꼴을 당하는 건가요? 확실히 당신은 그렇게 말했어요.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이치에 닿지 않는다는 걸 당신은 모르세요? 게다가 나를 마치 자식을 낳기 위한 도구처럼 다루다니, 당신이 얼마나 냉혹한 인간인지 알기나 해요? 그런 취급을 당하면 어떤 심정이 되는지 당신은 생각이나 해보셨나요?" "아니, 전혀…" 레온은 매정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클로이, 당신이야말로 재산을 탐낸 여자와 결혼하게 된 남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어? 어째서 당신은 나와 이혼하지 않았지? 좋아, 대답하지 않아도 당신이 아직까지도 이혼신청을 안하고 있는 건 시간을 벌기 위해서야. 결혼한 후의 기간이 길면 길수록 위자료를 많이 청구할 수 있기 때문이지. 내 말이 틀렸어?" 레온은 몹시 불쾌한 듯이 말했다. 분한 눈물이 펑펑 쏟아져 클로이는 재빨리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어째서 이혼하지 않고 있는가…? 그건… 어리석게도 레온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틀림없이 진심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안타까운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과 결혼한 게 돈 때문이었다고 억지를 부리고 싶은 거죠?" "아암 그렇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작정인가?" 레온은 빈정거리듯 입을 삐쭉거렸다. "클로이, 싸움은

그만두고 실속

있는

얘기를 하지

않겠어?

나는

알다시피

돈은

유효적절히 쓰고 싶어. 그리고 당신에 대해서 말한다면, 지금까지는 투자만 했을 뿐 그 투자에 대한 보상은 없었어. 그래서 나는 이 같은 상황에서 경영자로서의 판단을 내리기로 한 거야." "나와 이혼하기로 했나요?" 클로이는 몹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럴 시기가 오면 … 하지만 그전에 해놓아야 할 일이 있어. 그 동안 투자한 것을 조금이라도 회수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 조금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도 당신은 여자로서의 가치가 있지. 앗!" 클로이가 무의식중에 들어올린 주먹을 레온은 재빨리 붙잡았다. "당신의 말은 잘 알아들었어요." 클로이는 순순히 대답했다. "말해 두지만, 이 문제에 대해 당신은 아무런 발언권도 없어." 온화한 목소리가 도리어 기분이 나빴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요트에 레온과 단둘이 있다. 승무원이 있긴 하지만 고용주인 레온 이외의 어떤 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리는 없다. 지금 놓여 있는 상황을 클로이에게 다시 한번 깨닫게 하려는 듯 레온은 말을 이었다.


"반대 의사는 없나? 설사 있다 하더라고 지금의 상황으로는 어렵겠지. 그건 그렇고 클로이, 서로 가슴을 활짝 열고 얘기하지 않겠어? 당신도 그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할 거야. 마리사한테 들은 얘기로는…" 클로이는 레온을 뚫어지게 지켜보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리사는 몹시 바빴을 것이다. 서랍을 열고 여권을 꺼내 달라는 클로이의 꾐에 빠졌다고 그럴 듯하게 둘러댔을 것이고, 그런 다음 …

마리사는 레온에게 무슨 얘길 했을까? 클로이는 이런 상상을 하면서

마리사의 얼굴을 아주 불쾌하게 떠올렸다. "당신은 재산을 탐내 나하고 결혼했어. 그렇기 때문에 애초부터 임신을 한다는 건 당신 계획에는 포함돼 있지 않았지. 그래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또 하나의 엉뚱한 짓을 저지른 거야. 마리사는 이렇게 말하던데, 사실과 다른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고 있겠지만…" 부드러운 음성이었지만 틀림없는 위협이다. 클로이는 소름이 쭉 끼치는 듯한 기분이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크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이 굳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레온이 다가와도 얼어붙은 조각상처럼 그저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우리들 사이를 청산한다고 하면 손해를 볼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 드레스만 해도 내가 사준 거지?" 레온은 우악스럽게 연록색 실크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다음 순간, 클로이가 비명을 질렀을 때는 이미 얇은 실크 드레스는 갈가리 찢겨졌고, 하얗게 드러난 아름다운 가슴을 레온은 차가운 눈으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클로이, 난 도대체 당신의 어디를 미워하고 있을까?" 레온은 흐릿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클로이의 몸을 아주 가볍게 안아 침대에 옮겨 놓았다. "나는 당신을 수줍음 잘 타는 순진한 처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좀더 일찍 당신의 본심을 알았어야 했어. 일류 모델인 당신이 순결을 간직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당신의 청순함에 감 동을 받았었지. 그러나 당신이 순결을 지키고 있었던 목적은 조금이라도 자신을 비싸게 팔기 위해, 좀더 높은 신분의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였던 거야. 나는 그런 덫에 감쪽같이 걸려든 셈이지." "그렇지 않아요!" 클로이는 말이 막혔다. 갑자기 날카로운 칼날로 가슴을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것은 레온과 마리사의 관계를 알았을 때 받았던 충격보다도 더 컸다. "아니야, 틀림없어." 핏기를 잃은 클로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검은 눈은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굳어진 얼굴에는 고뇌의 빛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클로이, 깨끗이 그렇다고 자백하는 게 어때?" 클로이는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나 레온에게 턱을 잡혀 금세 제자리로 되돌려지고 말았다. "말해 봐, 빨리! 난 이 귀로 분명히 당신의 본심을 듣고 싶어." "정말로 그렇진 않아요!"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더니 그 뺨을 감싸고 있는 레온의 손가락을 적셨다. "클로이, 당신은 거짓말쟁이야! 거짓말하면 하느님의 벌을 받지. 어린시절에 그렇게 배우지 않았나?" 레온은 그렇게 말하고는 클로이의 입술을 훔쳤다. 마치 하느님을 대신해서 클로이에게 벌을 주기라도 하듯이… "난 거짓말은 절대로 안해요!" 클로이는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젠 됐어. 서투른 연극은 집어치워." 레온은 입술을 천천히 가슴 속으로 가져갔다. "좀더 일찍 진실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당신에 대해 적당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다행히도 아직 늦지는 않았어. 오늘 밤은 가능한 한 즐겁게 보내게 해줘." "레온…" "이제 와서 변명하려고 해도 시간낭비야, 클로이." 레온은 몹시 거칠게 클로이의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빨며, 양손은 베개 옆을 짚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나머지 클로이는 있는 힘을 다해 벗어나려고 바둥거렸지만 레온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늠름한 몸에는 벌써부터 욕망이 넘치고 있었다. 클로이는 몸을 바짝 오그려 붙였다. 가능한 한 저항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레온의 따뜻한 체온, 감미로운 체취, 이런 모든 것들이 클로이의 정열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레온은 한쪽 손을 빼어 레이스가 달린 브래지어를 풀고는 능숙한 애무로 클로이를 황홀한 도취의 세계로 이끌어갔다. 클로이는 숨을 헐떡거리며 자신도 모르게 레온의 뜨거운 키스를 받아들였다. 오랫동안 억제해 온 정열이 지금 클로이로 하여금 괴로운 추억을 잊게 하고, 그녀의 마음을 신혼여행 때의 뜨거운 시절로 되돌아가게 했다. "레온!" 어쩔 수 없이 터져나오는 달콤한 한숨. 클로이의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증오라는 검은 베일로 덮여 있었던 레온에 대한 사랑이 안타까울 만큼 찬연히 빛나기 시작했다. 레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로지 목덜미에서 가슴까지 뜨거운 키스를 계속 퍼부었다. 클로이는 정신없이 레온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검은 머리를 더듬기 시작했을 때, 레온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서 옷장의 거울에 클로이의 얼굴을 비치게 했다. "클로이, 자 당신을 잘 보라구. 당신은 재산을 탐내 나하고 결혼했어. 확실히 마리사에게 그렇게 말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이 몸은? 어째서 이렇게 되었지? 내가 당신에게 무슨 보물이라도 줬기 때문인가? 그런 일은 없었지? 나는 아무 것도 물질적인 걸 준 기억은 없어… 클로이, 당신은 자신을 속이고 있어. 만일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거든 그전에 마리사에게 한 말을 다시 한번 나에게 해주지 않겠어?" 클로이는 쾌락에 굴복하고 만 자신의 모습이 저주스러웠다. "아, 제발…" 가냘픈 목소리는 굴욕감에 떨리고 있었고, 그것이 도리어 레온의 복수심에 더욱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제발이라구? 어쩌라는 거야. 혼자 내버려 두길 바라는가, 아니면 오늘 밤 밤새도록 당신의 몸에 진실을 알려 달라는 건가?" 클로이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레온의 험악한 모습이나 마리사가 한 짓에 대한 분노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레온은 마리사의 말을 무조건 받아들여 재산만을 탐내 결혼했다고 윽박지르며 클로이를 증오하고 있다. 한데 자기가 한 짓에 대해서는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클로이를 아내로 맞이한 참다운 이유를 레온은 정정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레온은 애정을 요구하지만, 결코 상대방에게 자기의 사랑을 주려고는 않는다. 어쩌면 자존심 강한 그리스 남성의 피가 레온으로 하여금 그같이 방자하고 염치없는 짓을 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클로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처음부터 오늘 밤은 당신하고 같이 지내려고 했으니까. 다만 다시 한번 일깨워 주려는 뜻에서 말했을 뿐이야. 마음속은 어찌됐든 당신의 몸은 나를 원하고 있는 걸." 레온은 빈정거리는 듯한 미소를 떠올리더니 클로이의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아픔을 참으면서 클로이는 있는 힘을 다해 대답했다. "나도 마찬가지지… 지금 내가 당신을 원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레온은 흐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클로이의 살에 뜨거운 입김이 닿았다. 그러자 금세 호응하기라도 하듯이 그녀의 살갗은 다시금 달콤하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클로이!"


레온의 외마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뜨겁게 포옹했다. 이윽고 클로이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레온이 입고 있는 바지의 버클을 풀었고, 레온은 답답하다는 듯이 스스로 옷을 벗어던졌다. 이젠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늠름한 몸에 부드러운 살갗이 따뜻이 풀리고 황홀하게 녹아간다 …

어느 틈엔지 증오도 분 노도

어디론지 밀려가고 두 사람은 활활 타오르는 아름다운 불꽃이 되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다만 현재라는 시간을 불태워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클로이는 꿈속 같은 세계에 황홀하게 도취된 채 레온과 함께 연주하는 감미로운 하모니를 듣고 있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자, 수면에 반사하는 아침 햇살이 천장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침대 옆에는 홍차가 든 컵이 놓아 둔 채 그대로 있었다. 클로이는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레온 … ! 거기에는 엎드린 채 아직도 잠들어 있는 레온이 있었다. 갑자기 후회스러운 감정이 클로이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나는 왜 레온에게 몸을 허락하고 말았을까. 허락했다고 하기보다 자진해서 대담하게 레온을 요구했다. 클로이는 맥빠진 표정을 지으면서 살그머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옷은 옷장 안에 들어 있어." 얼굴을 찡그리며 찢어진 드레스를 보고 있던 클로이에게 잠을 깬 레온이 중얼거렸다. 클로이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으나, 레온의 눈과 마주치자 부끄러워서 금세 눈을 돌렸다. 레온은 한쪽 팔꿈치를 짚고 가로누운 채 클로이의 나체를 찬찬히 감상하고 있었다. "당신의 계획을 미리 알아채고 옷을 가져다 놓았지." 레온은 클로이의 살갗에 남아 있는 희미한 키스 자국을 눈여겨 보았다. 그리곤 침대에서 내려와 옆의 의자에 걸쳐 놓은 가운을 입고 클로이에게 다가왔다. 클로이는 등을 돌렸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떠나가고 싶었다.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떨구는 수밖에 없었다. "울고 있나? 왜, 후회하고 있어?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러나?" 클로이를 감싸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클로이, 어쩌면 당신의 몸 속에서 이미 내 아이가 자라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군." 레온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능청스레 말했다. "난, 사랑이 없는 아이는…" 클로이는 쌀쌀하게 대꾸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이제부터 며칠 동안은 다시 출발한 셈치고 둘이서 사이좋게 지내자구, 클로이. 할 수 있겠지? 그렇게 해야 해. 앞으로 태어날 우리 두 사람의 아이를 위해서… 클로이, 그렇지 않아?" 클로이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레온을 지독하게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마리사와의 관계를 묵인하고, 표면상으로만 아내의 역할을 하면서 아이를 기르는 일을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클로이?" "레온…" "클로이, 이 상처는 어떻게 된 거야?" 입술에 난 상처를 보고 레온은 갑자기 물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부어오른 입술을 어루만졌다. "내가 이래 놨나? 미안해, 아팠지? 앞으로는 좀더 능숙하게 키스해 줄게. 상처가 낫도록 키스해 줄까?" 클로이는 질문에 담겨 있는 또 하나의 의미를 민감하게 알아챘다. 그것은 아마도 두 사람의 재출발을 위한 프로포즈임이 틀림없었다. "우리에겐 아직도 서로 노력해야 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 레온이 조용히 말했다. "네." 입에서 저절로 나온 말에 클로이는 당황했다. 다시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하지만 마리사의 존재를 떠올리면 도저히 장래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없다. 솔직히 그렇게 대답하려고 했던 것인데… 레온은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이윽고 가볍게 키스하며 말했다. "잘됐어. 이젠 우리들의 아이는 한쪽 부모만 있는 처지가 되지는 않겠군. 자아 클로이, 모든 걸 깨끗이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구." 레온은 클로이를 가볍게 안아올리더니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침대로 옮겨갔다. 7 한낮이 다 되어 클로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에 레온의 모습은 이미 없었다. 천천히 기지개를 켜고 나서 침대에서 빠져나와 클로이는 나른해진 몸에 가운을 걸쳤다. 온몸에 사랑을 나누고 난 후의 달콤한 여운이 남아 있다. 클로이는 무의식중에 거울 속에 비치는 자기자신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제의 자기와는 전혀 달라져 있다. 서로 사랑을 주고받았다고 해서 얼굴 모습이 이토록 변하다니 … 겨우 24 시간 전에는 불행하기 짝이 없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 사랑을 주고받았다고? 일방적으로 네가 레온에게 사랑을 바쳤지 않나? 마음속에서


질책하는 소리가 클로이를 괴롭혔다. 레온은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했을 뿐 그가 사랑하고 있는 것은… 클로이는 불끈 주먹을 쥐었다. 안 돼, 마리사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오늘 아침 레온이 내 귀에 속삭여 준 말을 잊으면 안 돼. 이것은 레온과 나와의 두 번째 신혼여행이야. 둘이서 새출발을 하기로 맹세하고 난 후가 아닌가. 클로이는 애써서 마음을 돌리려 했다. 생각해 보니 레온의 마음이 영원히 마리사의 것이라고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희망을 가슴에 품고 참고 견디면 멀지 않아 내 사람이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실제로 레온은 날 원하고, 그리고 착실한 가정을 이루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레온과 나, 그리고 아이들. 그 가족의 긴밀한 관계가 언젠가는 레온으로 하여금 마리사와의 관계를 매듭짓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마리사는 아마 그렇게 쉽사리 결말을 짓지 못할 것이다. 원래 순순히 물러날 성격도 아니고, 자칫 잘못했다가나는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클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아랫배에 손을 가져갔다. 유산하게 된 것은 클로이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 바로 마리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가능한 한 빨리 레온에게 깨닫게 해야 한다. 또다시 똑같은 비극이 벌어진다면 그땐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클로이는 우두커니 서서 어제부터 일어난 마음의 동요를 되새겨 보았다. 어제까지는 레온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갑자기 바뀌어 결혼생활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을 뿐 아니라, 레온의 아이를 낳아도 좋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자기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오늘 아침, 레온과 처음으로 만났을 당시와 똑같은 그의 정답고 부드러운 태도 때문에 요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마음이 바뀐 것인지도 모른다. "잠꾸러기, 이제 그만 일어나서 나하고 점심을 먹으러 가지 않겠어?" 레온이 신이 나서 들어옴과 거의 동시에 클로이는 욕실로 뛰어들어가 문을 잠갔다. 클로이는 레온을 사랑하고 있고, 같이 살았던 부부였는데 이런 짓을 한다는 것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어쩐지 몹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방금 옷을 입던 참이에요. 조금만 기다려요. 얼른 입을게요." "아, 그래그래. 오늘 점심은 로브스터 샐러드야. 그리고 디저트는 초콜릿 수플레야. 당신이 아주 좋아하는 거지? 아까부터 산토스가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기다리고 있어." 문밖에서 레온은 참으로 다정스런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었다. 공연히 마음이 들떠, 옷을 입는 데 시간이 걸리는 자신이 안타까왔다. 만일 누가 듣고 있다면 어린 소녀가 아주 좋아하는 아저씨를 따라 외식을 하러 가는 길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나이 많은 오빠를 따라… 여기까지 생각하던 클로이는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괜찮나?"


마치 클로이의 마음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채기라도 한 듯한 질문이었다. "네에, 괜찮아요…" 명랑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지만, 속옷을 입는 손이 자꾸만 떨리고 있었다. 큼직한 옷장에는 내의로부터 몇 벌의 이브닝드레스에 이르기까지 클로이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다 갖추어져 있었다. 고마와요, 레온. 마리사에 대해선 이젠 생각하지 않기로 하겠어요. 클로이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갑자기 떠오른 마리사의 모습을 지워 버리려고 애썼다. 그런 일 때문에 중대한 문제를 눈감아 버려도 좋을까? 마음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확실히 그 말이 맞다.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정면에서 당당히 레온과 맞서 마리사와의 관계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를 어떻게든 해명시켜야 한다. 자신이 해결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지만 실행할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진실을 직시하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마리사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말을 레온으로부터 듣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 받게 될 깊은 상처는 생각하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마리사의 존재에 대해 계속 무관심을 가장하며 살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레온은 마리사를 결혼시키려 하고 있지 않은가. 한순간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긍정적인 목소리에 클로이는 희망을 품었었다. 하지만 금세 또다른 상상이 마음을 울적하게 했다. 레온이 마리사를 결혼시킬 결심을 한 것은 자기들의 관계를 더 이상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성깔이 거칠고, 독점욕이 강한 마리사. 그녀의 방약무인한 언동에 신경이 쓰인 나머지 마지못해 내린 결단임에 틀림없다.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아내를 맞이한 레온이 자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짜낸 제 2 의 계책이리라. 니코스 크리티코스와의 혼담은 실패했지만 이번만으로 단념해 버릴 레온은 아니다. 반드시 딴 신랑감을 찾아내어 억지로 마리사에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마리사가 순순히 말을 듣지는 않을 것이다. 엉뚱한 행동이나 말로 몹시 저항할 것이다. 몇 번이고 그런 짓을 되풀이하는 동안 레온이 먼저 지쳐 버리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다른 남자에게 사실은 마리사를 넘겨 주고 싶지 않을 테니까. 레온의 강한 소유욕을 클로이는 오늘 아침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레온의 정다운 애무 속에는 클로이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으려 하는 무서울 정도로 강한 뜨거움이 감추어져 있었다. l5 분쯤 지나 갑판 위로 올라가니까 레온은 화려한 줄무늬 차양 아래서 클로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테이블 위에는 이미 요리가 차려져 있었다. "야, 이제야 왔군."


레온이 천천히 일어났다. 새하얀 바지와 얇은 니트의 면 셔츠. 편안한 복장이다. 좀더 단순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 왔더라면 좋았을걸. 핑크와 흰빛의 스커트에 캐미솔, 그 위에 반소매 재킷을 입고 나온 클로이는 후회했다. 레온은 뚫어지게 클로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디가 좀 이상해요…?" 하고 클로이는 불안해져서 물었다. "천만에, 그 반대야. 좀 두꺼운 옷 때문에 아름다운 피부가 안 보여 유감이지만, 그밖엔 완벽해." 클로이를 테이블이 있는 데까지 에스코트하며 레온은 기분 좋게 말했다. 그리고 클로이가 부끄러워 볼을 붉히자 큰소리로 웃었다. "그렇게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어. 산토스라면 염려 없지. 그는 영어를 모르거든. 그보다 클로이, 피로는 풀렸어?" 레온은 클로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의미있는 미소를 지었다. 클로이가 잠시 동안 대꾸를 하지 않자 표정을 바꿔 말을 이었다. "미안해, 이젠 놀리지 않을게, 클로이. 기분을 돌리고 점심을 먹자구. 그리고 식후에 잠깐 쉬고 난 다음 요트를 세워 놓고 수영하지 않겠어? 넓고넓은 바다에서 헤엄치면 정말 기막힌 기분이지. 당신도 틀림없이 수영에 빠지게 될 거야." 레온은 클로이를 살그머니 감싸안고 가만히 입술을 댔다. 따스한 온기가 스며들어 클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클로이, 오늘 밤은 별이 뜬 하늘 아래서 단둘이만 식사를 할까? 당신의 눈동자 색깔과 같은 짙은 진보랏빛 바다 위를 떠돌면서…" 레온은 귓가에 대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너무 로맨틱해서 어쩐지 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클로이는 멍하니 레온을 쳐다보았다. "클로이, 그런 고뇌에 찬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 안 돼. 모처럼의 식사를 할 수 없게 되잖아. 그러면 산토스가 좋아하지 않을 거야. 틀림없이." "어머, 그렇군요. 그럼 우리 산토스가 토라지기 전에 자리에 가서 앉기로 해요." 클로이도 명랑하게 대답하며 방긋 웃었다. "자, 앉으실까요, 부인?" 레온은 점잖게 의자를 뽑아 주었다. 산뜻한 초록색과 흰색 쿠션이 달린 철제 의자에 앉자 클로이는 차츰차츰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없이 명랑한 레온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신혼여행 때도 이토록 들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로브스터 샐러드는 신선하고 맛이 있었다. 갑자기 식욕이 생긴 것도 바다의 상쾌한 공기 탓일까. 과거와 미래를 모두 잊어버리고 오늘 하루를 유쾌하게 즐기도록 하자. 상쾌한 바닷바람을 쐬고 있는 사이에 클로이는 어느 틈엔지 그런 기분이 되어 있었다. "축배! 우리 두 사람의 새출발과 새로운 생활을 위해서!" 레온의 결혼반지가 햇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 마리사는 빼놓고 말인가요? 무심코 이렇게 물어보려다가 클로이는 당황하면서 차가운 백포도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와인의 씁쓰레한 맛이 가슴속에 확 퍼져나갔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맛인지도 모른다. 클로이는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짓고는 다시 한번 가볍게 잔을 쳐들어 보였다. 점심식사가 끝나자 두 사람은 나란히 갑판 의자에 누웠다. 요트는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엔진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그러나 레온이 느긋해진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레온의

친구가

소유하고

있는

요트와

똑같은

외양

항해용

요트가

해상에서

납치당했다는 것이다. 레이다를 비롯하여 최신예 기지를 갖추고 있고 속력도 상당히 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년 여름 버뮤다 근해에서 어이없이 약탈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타고 있던 친구 일행은 작은 구명 보트로 l2 시간이나 표류한 끝에 다행히 지나가던 배에 구조되었다 한다. 꽤나 으스스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런 종류의 사건이 너무나 빈번히 일어나기 때문에 당국에서도 손을 쓸 수 없는 모양이다. 실제로 그 친구도 생명을 건진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경우, 승무원은 그 자리에서 몰살을 당하거나 굶어죽도록 그대로 방치되며, 빼앗은 요트는 마약 밀수에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염려 마, 클로이. 우린 그런 꼴은 안 당할 거야. 따라와, 요트 안을 구경시켜 주지." 떨고 있는 클로이에게 레온은 정답게 말한 후 양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요트 안에는 레온의 개인용 방이 둘 있고, 그밖에 선실이 4 개였다. 클로이와 함께 쓰는 선실 바로 옆이 레온의 서재 겸 도서실이다. 그곳은 물론 식당이나 살롱, 모든 것이 우아하게 장식되어 있어서 도저히 요트 안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호화로왔다. "이 요트는 회의할 때 사용하려고 산 거야. 도중에 회의를 할 수 있어서 시간을 꽤 절약할 수 있지. 자가용 제트기를 이용하는 게 어떠냐고 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에게 해에서 자라난 나에겐 역시 바다 위를 가는 편이 성격에 맞아 요트를 정한 거야. 자, 이젠 선장에게 닻을 내리라고 하고서 수영을 할까?" 요트 안을 대충 안내하고 난 후 레온은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재촉했다. "네, 좋아요. 얼른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올게요." 바닷물의 싸늘한 감촉을 상상하자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수영복은 필요없을 거야. 염려하지 않아도 돼. 아무도 안 보니까. 클로이,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다에 안겨 보라구. 어느 틈에 바다에 융화되어 몸과 마음이 자유로와지는 걸 느끼게 될 테니까." 클로이가 아직도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고 망설이고 있는 걸 보자 레온은 일부러 크게 숨을 쉬어 보였다. "좋아,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빨리 가서 갈아입고 와." 클로이는

나는

듯이

방으로

돌아가

수영복을

찾았다.

그러나

있는

것이라곤

비키니뿐이었다. 게다가 모든 것이 상당히 대담한 디자인이었다. 클로이는 잠시 동안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가 결국은 레몬 빛 비키니를 선택했다. 몸에 걸쳐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작은데다 체면상 눈가림할 정도밖에는 몸이 가려지지 않았다. 할 수 없지. 클로이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면 셔츠를 입고 레온이 기다리는 갑판으로 올라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새파란 해변 위를 물보라를 일으키며 나아가고 있던 요트가 닻을 내리고서 밀어닥치는 파도에 편안하게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뱃전에는 줄사다리가 놓여 있고, 뛰어들 판자도 장치되어 있었다. 점심식사를 한 테이블 위에는 과일 주스가 든 키가 큰 물병이 놓여 있었다. 준비는 다 되어 있는 셈이다. 레온은 심심한 듯이 주스를 마시고 있다가 클로이가 곁으로 걸어가자 날씬하게 쭉 뻗은 다리를 눈부신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일어나 익숙한 손놀림으로 셔츠를 벗겼다. "당신은 이제 어린애가 아니잖아." 부풀어오른 젖가슴을 퉁기면서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었다. "하지만 앞으로 몇 센티만 더 몸이 불면 이 비키니도 못 입게 될 거야. 그런데 어느 쪽이 더 에로틱할까, 비키니 차림과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당신을 보는 것하고…" "어머, 수영은 안할 거예요?" 클로이는 짐짓 딴청을 하며 멀리서 가물거리는 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봐요, 저기 보이는 섬은 무슨 섬이에요?" 지금 클로이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경치야말로 소녀시절부터 동경해 왔던 에게 해의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아, 저거 말야? 이오스, 파로스, 그리고 낙소스 섬이야. 이오스에는 유명한 호머의 무덤이 있지. 우리는 이오스와 산토리니 사이를 지나갈 예정이니까 만일 흥미가 있다면 들러 봐도 좋아. 그렇지, 내일 저녁식사는 이오스에서 하기로 할까?" "네, 그렇게 해요."


클로이는 갈매빛 아지랑이에 감싸인 섬들에 대해 벌써부터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이 아름다운 경관… 그리스가 위대한 시인이나 작가들을 많이 낳은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로이, 요트에서 너무 멀리까지 헤엄쳐 가면 안 돼. 무심코 눈어림을 잘못하면 어처구니없는 꼴을 당하게 돼." 레온은 다정한 목소리로 주의시켰다. "괜찮아요, 수영을 좋아하긴 하지만 올림픽에 나갈 생각은 없으니까요." 클로이가 웃으며 얘기하는 동안 레온은 벌써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불필요한 동작이 전혀 없는 레온의 수영 솜씨― 아주 멋진 모습에 클로이는 멍하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리스 사람은 누구나 다 바다를 좋아한다고 레온 자신이 말했었지만, 그의 헤엄치는 모습은 물을 만난 물고기나 다름없었다. "괜찮으니까 뛰어들어 봐!" 조심조심 줄사다리를 밟고 내려오는 클로이를 레온은 드러누운 자세로 물 위에 떠서 지켜보고 있었다. 비웃음을 받든 바보 취급을 당하든 도저히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원래 당신과 달라 바다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니까요… 뛰어들면 그대로 바다 밑바닥까지 끌려들어갈 것 같아 클로이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변명했다. 심호흡을 하며 간신히 줄사다리에서 내려섰다. 레온이 클로이의 주위를 한 바퀴 도는가 싶었는데, 눈 깜빡할 사이에 클로이를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너무해요!" 클로이는 물 위로 얼굴을 내놓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공정하지 못해요. 당신은 수영을 너무 잘하잖아요." "여자한테 칭찬을 듣는 건 이번이 처음인걸." 레온은

빙글빙글 웃으며 클로이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물결에

흔들거리는

탐스런

머리카락은 마치 금빛으로 빛나는 해초 같았다. 레온은 손을 어깨에 얹더니 살그머니 클로이의

몸을

껴안았다.

놀랍게도

레온은

자신이

말한

대로

태어난

그대로의

알몸이었다. "클로이!" 진지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레온은 클로이의 입술을 탐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포옹. 클로이는 충족된 기분으로 몸을 맡긴 채 레온이 가슴을 더듬을 때까지 브래지어가 풀리는 줄도 몰랐다.


"이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게 훨씬 더 기분이 좋지? 이제야 겨우 당신은 바다의 요정이 됐어." 레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확실히 레온이 말한 대로다. 맨살에 느끼는 바닷물의 감촉은 뭐라고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상쾌했다. 난생 처음으로 맛보는 멋진 해방감에 도취되면서 클로이는 레온과 어린애처럼 장난쳤다. 파도에 흔들리며 두 사람의 몸이 부딪쳤다 떨어지곤 했다. 그렇게 되풀이되는 동안 두 사람의 몸 속에는 이상스런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클로이, 피곤해 보이는군. 이제 그만 배로 올라갈까?" 레온은 그녀를 다정스레 줄사다리 쪽으로 인도해 갔다. "아 그래, 기다리고 있어. 내가 먼저 올라가 타월을 내려 줄 테니." 바다에서 나오기를 주저하고 있는 클로이에게 레온은 쾌활하게 말하고는 발가벗은 채 태연히 갑판으로 올라갔다. 갑판으로 오르고 있는 레온의 미끈하게 쭉 뻗은 늠름한 몸통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보였다. 곁에 있던 타월 감으로 된 짧은 가운을 집어들고는 뱃전에 꿇어앉아 그걸 클로이에게 내려 주고 있는 레온의 부드럽고 강한 근육의 움직임이 클로이에겐 숨이 막힐 정도로 관능적으로 느껴졌다. 갑판 위로 올라온 클로이에게 레온은 가만히 주스를 내밀었다. 짠 물 속에서 얼얼해진 목을 단맛이 나는 주스가 알맞게 풀어 주었다. 클로이는 갑판 의자에 드러눕자, 별로 오래 헤엄을 친 것도 아닌데도 피곤함을 느꼈다. 바로 4, 5 일 전까지만 해도 직장 일에 쫓겨 정신없이 바빴던 내가 수영하거나 일광욕을 했다고 해서 피곤함을 느끼다니… 클로이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주스 더 들겠어?" 클로이는 옆에 드러누운 레온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 마침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내일 오후엔 이오스 항에 닿을 거야. 닻을 내리면 섬에 올라가서 저녁을 먹기로 하지. 아아, 돌아가신 아버지께도 이런 구경을 시켜 드리고 싶었는데…" 레온은 갑자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 근방의 섬을 일주하는 게 아버지 평생의 꿈이었지. 하지만 정신없이 일만 하셨을 뿐, 끝내 꿈을 실현시키지도 못하고 돌아가셨어. 나를 학교에 보내고 고모님들을 시집보내는 등, 아버지에겐 해야 할 일이 끝이 없었지. 정말 좋은 분이셨어. 만일 뵈었더라면 당신은 틀림없이 아버지를 좋아하게 되었을 거야." 레온은 이렇게 말하고는 쓸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버지는 아주 순진하고 정직한 분이었지. 그리고 열심히 노력을 하면 반드시 길이 열린다고 굳게 믿고 계셨어. 결국 그런 신념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평생의 꿈이었던 여행도 한번 해보지 못하시고 일만을 하시다가 돌아가셨지만…" 레온이 자기 부모에 대해서 얘기해 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진지하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레온을 지켜보고 있는 사이 클로이의 마음은 따스한 온정으로 가득 찼다. 클로이는 레온의 구릿빛으로 그을은 팔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건 모두 아버지의 덕분이야. 아버지가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적으로 나를 길러 주신 덕택이지." 클로이의 감정이 전해지기라도 한 듯 레온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맨 처음 사업 자금을 마련해 주신 분도 아버지였어. 나도 아버지 같은 훌륭한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야. 하다못해 절반만이라도 아버지처럼 할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만족하겠어. 클로이, 그 아버지께서 마리사를 나에게 부탁하고 돌아가신 거야. 마리사의 생모인 리디아는 나에게 친어머니와 똑같은 분이셨지. 나의 친어머니는 나를 낳고는 곧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내가 8 살 되던 해 리디아와 재혼했어. 두 분은 나를 퍽 아껴 주셨어. 지나칠 정도로 … 그러니까 나는 두 분을 대신해서 마리사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으면 안 돼." 레온의 말에는 마리사를 소중히 여기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레온은 진심으로 마리사를 사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러한 레온의 마음속으로 도저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클로이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레온은 장차 마리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또 마리사는 레온과의 관계를 언제까지 끌고갈 것인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마리사에겐 이상한 데도 있지만, 그러나…" "레온, 그 이상은 아무 말도 마세요. 나도 나름대로 알고 있으니까요." 클로이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레온의 말을 제지했다. 마리사를 어느 정도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얘기는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았다. 오늘 레온은 나만의 사람이다. "이봐요 레온, 어린시절의 얘기를 더 해주지 않겠어요?" 클로이는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특별히 얘기할 것은 별로 없어. 굳이 말한다면 나는 말썽꾸러기였는지도 모르지.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엉뚱한 이유만 잔뜩 늘어놓곤 해서 부모님을 곧잘 골탕먹였었지. 원하시던 대로 성장한 지금의 내 모습을 그분들에게 보여 드리지 못하는 것은 그때의 버릇없던 행동에 대한 벌인지도 몰라… 계모인 리디아는 마리사가 두 살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그 뒤를 따르듯 반 년도 채 안 되어 세상을 떠나셨지."


잠시 답답한 침묵이 계속되는 동안, 클로이는 레온의 마리사에 대한 애정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클로이의 마음속에 마리사에 대한 질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클로이, 당신은 피부가 약하니까 뭔가 다른 것을 입는 게 좋겠어." 레온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너무 타서 물집이 잡히면 큰일이야. 바닷바람이 시원하다고 안심하고 있으면 나중에 무척 고생하게 돼.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뭔가 적당한 걸 가져올 테니." 레온은

일어나

바지를 입더니 선실

쪽으로

걸어갔다.

믿음직스러운

뒷모습을

바라다보는 클로이의 가슴속은 레온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넘치고 있었다. 어째서 레온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을까? 사랑은 불멸이다… 그에 대한 사랑은 꺼지지 않고 줄곧 타오르고 있었는데도… 레온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클로이는 엎드리면서 문득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태양이 지면 어쩐지 어둠을 타고 불행이 닥쳐올 것만 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태양을 붙잡아 두고 싶었다. 진실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는 불안이 클로이로 하여금 어린애 같은 상상을 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등에 선탠 크림을 발라 줄게." 레온이 돌아온 줄 몰랐던 클로이는 갑작스런 목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레온은 등에 크림을 찍어 옆으로 좍좍 바르기 시작했다. 크림의 차가운 감촉과 손가락의 율동적인 움직임… 클로이는 어느 틈엔지 황홀한 기분에 빠져들고 있었다. 정신없이 돌아누워 미친 듯이 레온의 목에 매달렸다. "레온!" 그녀는 자기의 몸이 괴롭게 숨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레온은 클로이의 손을 떼어 그녀의 머리 곁에 누른 채 바르르 떨리는 몸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랏빛 눈에는 욕망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스의 태양이 이토록 대담해지게 만든 것일까. 이상하게도 클로이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두 사람의 몸은 각각 금세라도 타오를 듯 뜨거워졌다. 그런데도 레온은 꼼짝 않고 바라보고만 있다. "레온!" 클로이는 온몸이 바작바작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그만 참을 수가 없어 크게 소리쳤다. 레온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클로이의 손을 놓고 입술을 몹시 거칠게 빨았다. 클로이는 정신없이 레온의 검은 머리를 더듬었다. 레온의 불 같은 입맞춤은 목덜미에서 가슴으로 미친 듯이 옮아갔다.


"레온… 레온…" 클로이의 입술에서 몇 번이고 달콤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레온은 점점 더 뜨겁게 클로이를 요구했고 클로이도 뜨겁게 응했다. "클로이, 이제야 겨우 바다의 요정에서 인간 세상의 여자가 되었군!" 레온의 속삭이는 소리가 클로이에겐 멀게 느껴졌다. 능숙한 애무가 파도처럼 되풀이됨에 따라 클로이는 금세라도 레온의 늠름한 몸 속으로 녹아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에 빠져들었다. 바로 그때 아찔한 쾌감이 클로이의 몸 속에 퍼져나갔다. "아아 클로이, 이제야 완전히 내 사람이 되었어…" 얼굴이 상기된 채 레온은 만족스러워 중얼거리며 몹시 사랑스러운 듯이 클로이의 떨리고 있는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곤 잠시 동안 클로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거친 숨결을 가라앉히더니 그녀를 가볍게 안아올려 선실의 침대로 데려갔다. 8 "클로이, 오늘은 이오스를 안내해 주지. 저녁을 내가 아는 집에서 하기로 했어. 내 친구가 경영하고 있는 나이트클럽이야." 욕실에서 나와 청바지를 입더니 레온은 침대 속에 누워 있는 클로이에게 가볍게 키스했다. "그건 그렇고, 전화를 하고 올게. 어제 몇 번인가 사업상의 전화가 걸려왔던 모양이야." 클로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레온을 쳐다보았다. "으응, 무선 전화야. 어제는 전화가 와도 일절 알리지 말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방해를 받지 않았던 거야." 레온의 의미있는 미소에 클로이는 수영을 하고 난 후의 일을 생각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런 얼굴을 보니까 점점 더 어제의 관능적인 모습이 떠오르는군." 레온은 클로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클로이, 옷을 갈아입거든 위로 올라와. 나는 먼저 가서 전화를 걸고 위에 있는 승무원들에게 이오스에 닻을 내리라고 지시해 놓을 테니까. 배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상륙이야. 그때부터 우린 탐험을 시작하는 거지!" 레온은 쾌활하게 말하고는 침실에서 나갔다. 이오스에는 햇볕을 피할 만한 곳이 거의 없을 것이다. 시원하게 보이는 핑크 색 면 드레스를 입고, 같은 색의 샌들을 신은 후 클로이는 얼굴에 선탠 크림을 발랐다. 그리고 옷장 안에 있는 멋진 밀집모자를 한쪽 손에 들고는 발걸음도 가볍게 갑판 위로 올라갔다. 바닷바람이 섬세하게 주름잡힌 스커트 자락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항구의 주변에는 선술집과 바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좁은 길을 관광객들이 꽉 메우고 있었다. 조금 후 레온이 나타났을 때 클로이는 활기찬 이오스 항구의 경치에 완전히 도취해 있었다.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에게 즉시 버섯 요리와 샐러드를 곁들인 닭고기 튀김이 나왔다. 미묘한 맛을 즐기면서 다 먹고 나자, 클로이는 너무 배가 불러 디저트로 나온 과일 샐러드에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레온 역시 단 음식은 먹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과일 샐러드는 그대로 통과시키고 크래커에 치즈를 얹어 먹기 시작했다. 무심히 보고 있으려니 뜻밖에도 그것은 영국의 스틸턴치즈였다. "사업 관계로 몇 달 동안 런던의 친구 집에 묵고 있을 때 완전히 이 맛에 빠지고 말았지. 클로이, 당신은 어때?" 놀란 표정을 짓는 클로이에게 레온은 영국제 치즈를 맛보게 된 내력을 설명했다. "고마와요. 하지만 이 이상 먹으면 거북해서 꼼짝도 못할 거예요." 클로이의 목소리에는 레온과 함께 이오스를 관광하며 돌아다닌다는 데 대한 기대와 기쁨이 넘쳐 있었다. 레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클로이의 손을 잡아 소중한 듯 입술을 댔다. 요트에서 내리자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옆에서 걸어가는 레온의 늘씬한 모습에 클로이는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은 항구 변두리의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골목길을 돌아다녔다. 레온은 섬의 구석구석까지 환히 알고 있는 듯했다. 어느 집이나 다 똑같이 하얗게 칠해진 건물들 사이를 지나 어느 가게 앞에 이르렀다. 레온이 노크를 하자 금세 도어 틈새로 구릿빛으로 그을은 얼굴이 나타났다. "아리! 나요, 레온 스테파니데스요. 벌써 잊어버렸소? 하기야 꽤 오랫동안 못 만났으니… " 레온은 노인의 손을 잡으며 반가운 듯이 말했다. 노인은 몹시 기쁜 듯 그리스 어로 한마디 외치더니 쭈글쭈글한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며 두 사람을 작은 가게 안으로 맞아들였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길을 걸어온 클로이에게 실내는 아주 시원하고 쾌적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컴컴한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예상했던 대로 바닥이 돌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들은 계속 얘기를 하고 있다. 아니, 얘기를 하는 사람은 노인 쪽이고 레온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클로이는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어부들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를 파는 가게인 듯했다. 처음 보는 도구들이 자리가 비좁을 정도로 쌓여 있었는데, 그곳에는 타르와 바닷물이 뒤섞인 듯한 코를 톡 쏘는 듯한 냄새가 났다.


"하하, 정말 그렇소." 노인은 돌아앉더니 클로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분인가요, 선생님께서 고르신 분이? 결국 좋은 분을 만나 이렇게 우리 집에 모시고 오셨군요. 정말이지 훌륭한 아내를 고르셨군요." 노인은 레온을 향해서 대단히 감개가 깊은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얼른 가서 그걸 가지고 나오겠소. 그건 정말 이렇게 아름다운 피부를 가진 사람을 위한 것이죠. 그 반짝거리는 광채는 유감스럽게도 그리스 여자의 검은 피부에는 어울리지 않아요." 노인은 삐쩍 마른 어깨를 세워 보였다. 클로이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노인은 클로이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눈치채더니,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확한 영어로 다시 얘기를 계속했다.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 폭풍우가 몹시 몰아치고 난 후 주인께서 이 섬에 오셨죠… 그 폭풍우에 아들을 잃고 난 직후여서 내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어요. 부인의 주인께선 처음 보는 나에게 따뜻한 말로 격려하시고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해주셨죠. '아드님을 잃으셨지만 당신에겐 아직도 따님이 있지 않습니까. 얼마 안 가서 틀림없이 귀여운 외손자가 생길 겁니다. 그러니 제발 용기를 잃지 말고 힘을 내십시오.' 이렇게 말하며 나의 침울한 마음을 구원해 주셨어요. 따뜻한 격려가 얼마나 뼈에 사무치게 고마왔던지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이 가게를 시작할 자금까지 대주셨지요. 물론 아들을 잃은 슬픔이 쉽사리 사라지진 않았지만, 세월이 감에 따라 차츰차츰 살아야겠다는 의욕이 생겼습니다. 덕택에 지금은 주인께서 예언하신 대로 두 명의 외손자도 얻었고, 이젠 행복하게 살게 되었지요." 노인은 길게 사연을 늘어놓더니 깊이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실은 그때 변변찮은 물건이긴 하지만 감사의 표시로, 우리 아버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진주 목걸이를 드리려고 했어요. 그건 우리 아버님이 손수 생명을 걸고 바닷속에 들어가 모은 진주인데, 이 늙은이의 유일한 보물이죠. 그래서 꼭 받아 주시길 바랐습니다만 주인께선 받지 않았어요. 그렇게 귀중한 거라면 그 목걸이에 걸맞은 아내를 맞을 때까지 꼭 좀 보관해 두라고 하면서 그냥 놓고 가셨죠. 그때부터 나는 이 진주 목걸이를 가지러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마침내 기다리던 날이 왔군요! 부인을 만나보니 주인께서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게 하신 까닭을 알겠습니다." 노인은 온화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클로이는 레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감격으로 가슴이 벅찬 나머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리가 한 말은 사실이야. 지금까지 내가 만난 여자 중에는 저 진주 목걸이를 걸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리가 당신에겐 얘기하지 않았지만, 저 목걸이를 완성하기 위해서 그의 아버지와 세 사람의 숙부가 생명을 바쳤지. 아리 자신도 나머지 4 개를 캐기 위해서 여러 번이나 깊은 바닷속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고. 그래서 언뜻 봐서는 건강해 보이지만 아리의 폐는 엉망진창이 돼버렸다는 거야 …

가엾게도 가난한 이 섬의

사나이들은 그렇게 위험한 모험을 해서 바다의 밑바닥에 들어가 진주를 캐는 일 외에는 재산을 모을 방법이 없는 거야." 레온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클로이가 막 말을 꺼내려고 할 때 가죽을 씌운 작은 상자를 소중하게 든 아리 노인이 돌아왔다. 작은 상자는 주름투성이의 손에서 레온의 손으로 넘어왔다. 레온은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고 그녀에게 그 속을 보여 주었다. 근사하고 멋진 진주 목걸이― 한 알 한 알이 고요히 숨쉬고 있는 듯 보였다. 클로이는 그 맑고 깨끗한 광채에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클로이, 자아 뒤로 돌아앉아 봐." 레온은 클로이의 가느다란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아리 영감, 자아 어때요?" 노인은 감개 어린 미소를 머금고, 레온의 물음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좋은 분을 고르셨습니다. 이젠 나도 오랫동안의 빚을 갚게 되어 마음이 놓입니다." 깊은 주름이 새겨진 얼굴에 서서히 안도의 빛이 퍼져나갔다. 잠시 동안 진한 터키 커피를 마시며 레온과 아리는 옛이야기로 꽃을 피웠고, 클로이는 그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3 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레온과 클로이는 헤어지기 서운해하는 아리에게 작별을 고했다. 광장의 택시 승차장에는 호머의 무덤을 찾아가는 관광객의 긴 행렬이 늘어서 있었다. 강렬한 햇살이 내리비치는 가운데 그 행렬을 따라 줄을 서면서 클로이는 아까부터 이상하게 생각하던 것을 레온에게 물어보았다. "왜 이 목걸이를 받았어요? 틀림없이 좋긴 하지만, 아리에게는 유일한 보물일 텐데…" "클로이, 당신은 아직도 그리스 사나이의 기분을 모르는 모양이군. 아리는 내가 은혜를 베풀어 준 사실을 진정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자기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었을 때 따듯한 온정을 받고 굉장히 기뻤을 거야. 하지만 아리는 호의를 받는 데 만족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나에게 은혜를 갚고 싶었던 거야. 그것이 바로 이 목걸이야. 아리가 가진 것 중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물건이라면 저 가게 외에는 이 목걸이밖에 없어. 그 둘도 없이 소중한 것을 나에게 준 거지. 만일 내가 사양하며 이걸 받지


않았다면 아리는 틀림없이 슬퍼했을 거야. 아리의 깊은 배려를 무시하는 결과가 될 테니까. 생각해 봐, 만일 목걸이를 당신에게 주고 싶다면 특별히 아리한테 받을 필요는 없지 않겠어? 보석상에 가면 얼마든지 살 수 있으니까. 내가 이걸 받은 건 그의 호의를 진심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야. 자신이나 그의 아버지와 숙부가 생명을 내걸고 모은, 그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을 깨끗이 내주면서까지 내 은혜에 보답하고 싶어하는 아리의 한결같은 심정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았어… 클로이, 이젠 이해할 수 있겠어?" 레온은 눈물이 글썽거리는 진보랏빛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클로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이렇게까지 남의 기분을 소중히 여기면서, 한편으로는… 그때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자 이상하게 가슴이 설렌 클로이는 부르는 몸을 떨고는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한 괴로운 생각을 털어 버리려고 노력했다. 사실 이렇게 뒤로 미루기만 할 것이 아니라 언젠가 태어날 아기를 위해 마리사와의 관계를 레온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만은 이 목걸이를 생각해서 역겨운 일을 모조리 잊어버리자. 오직 레온과의 즐거운 시간을 한껏 누리고 싶다. 클로이는 레온의 윤곽이 뚜렷한 옆모습을 슬쩍 훔쳐보았다. 겨우 차례가 와서 두 사람은 낡은 택시에 올라탔다. 찬바람이 불어와 갑자기 기온이 떨어진 사실을 레온은 느끼지 못하는 눈치였다. 택시는 몇 군데의 풍차 앞을 지나 좁은 길을 쉬지 않고 달려, 그 웅대한 서사시 <일리어드>와 <오디세이>를 남긴 호머의 무덤을 향하고 있었다. 클로이는 아킬레스나 카산드라, 그리고 아폴로의 이야기를 열심히 탐독했던 소녀시절을 회상하고 있었다. 위대한 시인의 무덤도 실제로 보니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별로 인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정적과 평화가 있었다. 클로이는 잠시 동안 말없이 서 있다가 이윽고 레온의 재촉을 받고서야 택시에 올랐다. 두 사람이 요트에 돌아온 것은 막 해가 질 무렵이었으나 저녁놀을 볼 수는 없었다. 클로이가 그리스에 온 후 아름다운 저녁놀을 보지 못하고 밤을 맞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클로이는 산뜻하고 짙은 핑크 색 이브닝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가슴이 넓게 팬, 몸에 딱 맞게 흘러내린 디자인에 가슴 양쪽에는 수없이 많은 핑크 색 구슬이 촘촘히 수놓아져 있었다. 클로이는 온몸을 거울에 비추며 진주목걸이를 살짝 만져 보았다. 아름다운 목걸이에 어울리는 분이라며 몹시 기뻐했던 아리… 이 목걸이에 담긴 마음처럼 용기를 내어 레온을


사랑하며 살아가리라. 클로이는 아리 노인이 이 목걸이에 담은 진정을 평생토록 배반하지 않겠다고 마 음속으로 맹세했다. 머리를 뒤로 땋아 올리고 입술에 옅은 핑크 색 루즈를 바르고 있을 때 레온이 들어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클로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지나치게 화장을 하고 옷을 입었나 보죠…?" 클로이는 불안해하며 이렇게 물었다. "아냐, 좋아. 그 근방의 선술집이나 바에 간다면 간편한 것이 좋지만, 오늘 밤에 가는 나이트클럽은 특급 호텔 안에 있어 정말 딱 어울리는 옷차림이야. 클로이, 그 진주 목걸이도 당신에겐 아주 잘 어울리는군. 걸어 줘서 고마 와." 레온은 아름답게 드러난 목덜미에 살짝 입술을 댔다. 다시 요트에서 내린 두 사람은 해안을 따라 뻗어 있는 거리에서 택시를 탔다. 차는 꽤 낡았는데도 그 안은 깨끗하고 쾌적했다. 하지만 몹시 난폭하게 운전하는 바람에 레온이 몸을 안아 줄 때까지 클로이는 몇 번이나 문 손잡이에 매달려야만 했다. 크게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택시는 어느 호화스런 호텔의 현관 앞에서 멈추었다. 레온은 운전사에게 요금을 지불하며 뭐라고 얘기하곤 클로이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 주었다. "나중에 마중을 나와 달라고 일러 두었지. 밤새도록 춤을 출 여력이 없어. 우리에겐 댄스 말고도 더 근사하고 멋진 일이 있으니까. 안 그래, 클로이?" 레온은 수줍어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클로이의 어깨를 귀여운 듯이 꼭 껴안았다. 화려한 로비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다가와 레온에게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그는 곧 <출입금지>라고 씌어 있는 문 안으로 사라졌는데, 금세 그 문이 다시 열리더니 안에서 다른 사나이가 빠른 걸음으로 나왔다. "레온! 오랜만이군. 와줘서 고맙네. 하지만 오려거든 미리 연락을 할 것이지, 이렇게 불쑥 나타나다니…" "아냐, 문득 생각난 김에 와보고 싶었던 거야." 레온은 클로이에게 윙크해 보이며 쾌활하게 대답했다. "크리스토스, 소개하지. 내 아내 클로이야." 크리스토스 칼리미데스는 정중히 머리를 숙이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니, 마리사는 같이 오지 않았나?" "아, 그앤 에오스에 있지." 클로이는 이런 대화를 듣자 가슴속에 뭔가 뭉클한 것이 치밀어오름을 느꼈다. "아

그래,

이렇게

부부가

동반해

와줘서

정말

반갑네.

접대해야겠군. 레온, 우리 일단 룰렛이나 한 판 하는 게 어때?"

오늘

밤은

최대한으로


회전하는 원반 위에 공을 굴리는 게임인 룰렛을 하자는 청을 듣자 레온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 그렇지. 자네 같은 대실업가에겐 룰렛 같은 건 시시하겠지." 크리스토스는 짐짓 토라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야, 그런 말이 아니라 오늘 밤은 가능하다면 클로이한테 그리스 민속무용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야… 지금도 여기서 하고 있겠지?" "아 하구말구. 내가 하라고 지시를 하지." 크리스토스는 레온에게 선뜻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알다시피 그들은 관광객을 상대로는 절대로 춤을 안 추지. 그들에게 있어서 춤은 신성한 행위야. 하지만 자네에겐 특별이지. 그런데 레온, 오늘 밤은 여기서 식사를 하고 가겠지? 캐비어는 어때? 마침…" 레온은 크리스토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토스, 모처럼 권해 줘서 고맙지만 오늘만은 그런 것을 그만두고 순수한 그리스 요리를 부탁하네. 클로이에게 사주고 싶네. 어린시절의 자네 어머니가 곧잘 만들어 주시던 수프와 피타, 바다에서 갓 잡은 작은 조개류, 그 다음엔 커배브, 그리고 마지막 마무리로 아몬드 페스트리… 이런 메뉴를 부탁해도 될까?" "암 되구말구. 나한테 맡기게." 크리스토스는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자기의 가슴을 두드려 보였다. 마치 자기의 존재를 인정해 달라는 듯이… "그럼 이쪽으로 오게. 안토니더러 자리까지 안내하라고 하지. 그리고 스피로한테 말해서 즉시 무용수들을 보내라고 하겠네. 레온, 스피로라는 친구 기억하고 있겠지? 전에는 고기잡이를 하고 살았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형님이 만에서 관광선을 부리기 시작했지. 그 바람에 형편이 좋아져서 고기잡이 따위는 하찮게 생각하게 된 모양이야. 옛날 그의 아버지가 수십 번씩 배를 타고 나가야 벌어오던 돈을 이젠 잠깐 사이에 벌 수 있게 되었으니… 관광 붐 덕분에 이 섬 사람들의 생활도 옛날과 달라졌네." "무슨 소리야. 마치 남의 얘길 하듯 하는군. 관광객이 안 오면 곤란을 겪는 건 누군데? 이런 훌륭한 호텔이 도대체 누구 덕분에 유지된다고 생각하나?" 레온은 일부러 얼굴을 찌푸려 보였다. 크리스토스는 레온의 등을 두드리며 큰소리로 웃고는 번쩍 손을 쳐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그럼, 천천히 쉬었다 가게. 나는 나중에 올 테니. 혹시 내가 있으면 방해가 되지 않을까?" 크리스토스는 옆에 공손히 서서 기다리고 있는 웨이터에게 두 사람을 좌석까지 안내해 주라고 명령했다.


안내된 곳은 원형으로 된 댄스플로어의 정면에 있는 자리였는데, 다른 손님들로부터는 보이지 않게 멋진 가리개가 세워져 있었다. 파리 이외의 곳에서 이토록 화사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기는 처음이었다. 실내장식은 물론이고, 웨이터의 세심한 서비스까지 클로이가 가본 어느 곳보다 최상급이었다. 그뿐 아니라 조금 후 최고급 와인과 함께 나온, 언뜻 보아서는 소박해 뵈는 그리스 요리들도 모두 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맛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자 홀의 손님 모두가 쇼가 시작되길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조용한 중에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이윽고 한 무리의 무용수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클로이, 저 사람들은 여러 번 상을 탄 그리스에서 제일 가는 무용수들이야. 이런 곳에서는 좀처럼 춤을 추지 않지만 오늘 밤은 크리스토스가 특별히 초대한 덕분에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야." 클로이의 가냘픈 손을 잡고 있던 레온은 앉음새를 바르게 고쳤다.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답고 멋진 춤.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재빨리 움직이는 동작에 클로이는 어느 틈엔가 몸을 쑥 내밀고는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마침 클로이의 눈앞에 기묘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로 웨이터들이 수십 장씩 겹겹으로 포갠 접시를 들고 다니며 손님들이 원하는 대로 몇 장씩 나누어 주고 있었다. "레온, 저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하는 거죠?" 클로이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응, 조용히 기다려 봐. 곧 알게 될 테니. 클로이, 그보다 술을 더 시킬까?" 레온은 의미있게 미소를 짓더니, 때마침 곁으로 다가온 웨이터에게 대여섯 장의 접시를 받아들어 클로이 앞에 놓았다. 클로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적당히 취한 기분이었다. 이 이상 더 마시면 오늘 밤에 물어보려던 마리사에 관한 문제를 얘기할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갑자기

음악의

템포가 빨라졌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선

관객들이

댄스플로어를 향해 일제히 접시를 내던졌다. 무용수들은 모른 체하며 계속해서 스텝을 밟고 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클로이는 깜짝 놀라 레온에게 물었다. "저렇게 접시를 던지는 건 무용수에 대한 칭찬의 표시야. 감동을 받으면 받을수록 많은 접시를 던지게 되지. 다만 무용수의 몸에 부딪치지 않게 해야 돼. 스페인에서는 투우사에게 꽃을 던지고, 영국에서도 럭비 경기가 끝나면 그라운드를 향해 닥치는 대로 여러 가지 물건을 내던지지? 그것과 똑같은 행동이야. 그리스에서는 접시를 던지는 거지. 자, 이렇게."


레온은 힘차게 접시를 던졌다. 처음에는 망설이고 있었으나, 클로이도 레온의 흉내를 내어 몇 장의 접시를 던졌다. 무용수들은 재치있게 접시의 깨진 조각을 피하며 태연하게 춤을 추었다. 클로이는 그들의 정확한 발놀림에 감탄하고 말았다. 오랫동안 멋진 춤을 추어 보인 후 무용수들이 퇴장하자, 크리스토스가 두 사람의 테이블로 찾아왔다. 크리스토스와 레온은 아테네의 선박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무렵의 얘기를 꽤 오랫동안 했다. 그러나 레온은 줄곧 클로이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그녀가 지루해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이따금 얼굴을 들여다보며 설명해 주기를 잊지 않았다. "돌아가기 전에 무용수들을 만나보게." 크리스토스가 레온에게 당부했다. 그의 안내를 받아 무대 뒤에 있는 분장실로 들어가자 레온과 클로이는 젊은 무용수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레온, 자네가 이름을 지어 준 우리 아이의 얼굴도 보고 가게." 크리스토스가 간절히 권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호텔 위층에 있는 그의 거처로 올라갔다. 마음씨가 고와 보이는 아내와 졸리는 눈을 비비면서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온 아이들. 행복해 보이는 가정이었다. "레온, 하늘에 별이 하나도 안 보이는군.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기온도 갑자기 내려간 듯하고…" 항구까지 직접 차를 운전하여 바래다 준 크리스토스가 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하늘을 가리키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태풍의 징조야." 레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으면 일찌감치 멜테미가 불지도 모르지. 어쨌든 조심해서 가게." 크리스토스와 헤어지자 레온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몇 번 얘기를 걸어도 듣는둥 마는둥한 표정으로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요트까지 가는 거리가 클로이에겐 무척이나 멀게 느껴졌다. 고요한 적막에 싸인 요트로 돌아오자 두 사람은 바로 선실로 내려갔다. 클로이는 우선 소중한 목걸이를 끄르려고 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끌러지지 않았다. 레온은 디너재킷을 벗고 셔츠의 단추를 풀고 있는 중이었다. 클로이를 껴안듯 하며 목걸이를 벗겨 주는 레온. 그의 따뜻한 온기가 클로이를 살그머니 감쌌다. "자, 클로이 오늘 밤은 어땠어? 즐거웠나?" 목걸이를 다정하게 건네주며 레온은 클로이 눈을 들여다보았다. "네,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이상야릇한 광채가 깃든 깊은 눈동자를 클로이는 슬쩍 쳐다보았다. 폭풍이 밖에서 일어났는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났는지 클로이는 분간할 수가 없었다. 주위에는 뜨거운 열기가 감싸이는 듯했고, 그 순간 레온의 손이 재빨리 클로이의 실크 드레스를 벗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정열이 들끓는 대로 미친 듯 키스와 애무를 주고받으며 이윽고 엉켜진 채 침대 위에 쓰러졌다. 레온이 지르는 욕망의 볼꽃은 점점 더 활활 타올라 클로이의 몸을 뜨겁게 달구었다. "클로이!" "레온…" 달콤한 속삭임이 수없이 되풀이되고 두 사람의 몸은 금세라도 하나로 녹아 버릴 듯했다. 클로이는 꿈속 같은 황홀한 쾌감 속에서 낯익은 목소리를 듣고서 문득 눈을 떴다. 그러나 곧 쾌락의 물결에 휩쓸려 다시금 눈을 감고는 레온의 뜨겁게 달아오른 몸에 매달렸다. "전화야!" 레온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내버려 두어요." 클로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레온은 이미 일어나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요?" 굳어진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는 레온에게 클로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리사가 행방불명됐어. 오후에 산책하러 나간 후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야 … 모두들 나가서 섬 전체를 뒤지고 있는 모양인데… 이러고 있을 순 없어… 우리도 즉시 에오스에 돌아가야 해." 레온은 다시 수화기를 들고 조급하게 버튼을 눌렀다. "선장인가? 지금부터 즉시 에오스로 돌아가야겠네. 급히 준비를 서둘러 주게. 날씨가 좀 이상한데, 최신 기상예보는 뭐라고 했나?" 선장의 보고를 듣는 레온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사랑을 함께 나누고 있던 바로 몇 분 전까지와는 전혀 달리 클로이는 안중에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오늘 밤에는 꼭 마리사와의 관계에 대해서 분명히 물어보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젠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레온의 심정을 이것으로 충분히 알았다. 조금 전까지 그토록 나에게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겨우 전화 한 통화로 인해 내 존재를 잊어버리고 말다니 …

그 정도까지

마리사를…? 클로이는 몹시 불쾌한 기분으로 옷장에 손을 뻗쳤다. "기상 상태가 좋지 않으니까 클로이, 당신이 도와 주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어. 크리스토스의 말대로 금년에는 멜테미가 여느 해보다도 상당히 일찍 불기 시작했어." 레온은 수화기를 놓더니 걱정스럽게 말했다.


"위험은 없어요?" 클로이는 불안해져서 이렇게 물었다. 문득 어릴 때 읽은 소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고대의 그리스 인들은 바다가 사납게 날뛰는 것을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노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처녀가 제물로 바쳐졌다고 한다. 어쩌면 나는 그와 똑같은 제물이 아닐까? 레온과 마리사의 금지된 사랑 때문에 이교의 신에게 바쳐진 가엾은 제물… 클로이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구역질이 났다.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면 안 돼요? 모두들 찾고 있는 중이죠? 마리사도 어린애는 아니니까 그렇게 위험한 곳에는 안 갔을 거예요." "당신이 뭘 알아! 돌아간다면 돌아가는 거야!" 한시라도 빨리 에오스로 돌아가 사랑스러운 마리사의 안부를 확인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인 모양이다. 암울하게 빛나는 초록빛 눈에 초조해하는 심정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클로이는 옷을 주워 올리며 천천히 일어났다. "클로이… 미안해, 용서해 줘.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레온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클로이는 왜 그런지 자기의 의사와는 반대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레온은 뭘 용서해 달라는 것일까? 마리사에 대한 정열을 끊지 못하는 자신을 용서해 달라는 것일까 … 금지된 사랑의 재물이 되어 있는 처지에 오로지 참고 있으라는 뜻일까…? 클로이는 견딜 수 없이 분한 마음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오빠가 행방불명이 된 누이동생의 안부에 대해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레온의 행동을 모조리 나쁜 쪽으로만 해석하여 어느 틈엔지 아무 것도 아닌 일에까지 의혹을 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레온을 믿자. 그토록 뜨겁게 나를 찾은 레온의 정열이 거짓일 리는 만무하다. "옷을 입고 오겠어요." 마음을 돌린 클로이는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그럼 나는 갑판으로 올라갈게. 클로이, 단단히 각오하고 있어. 오늘 밤은 아주 기나긴 밤이 될 테니까." 긴장한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를 띠우고 그는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레온, 나는 당신을 믿고 있어요… 클로이는 기도하듯이 눈을 감았다. 9 이 요트가 에오스에 상륙할 때까지 제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 나가기를.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고 하면서 지금까지의 고민이나 걱정을 모조리 웃어넘길 수 있게 되기를 …


클로이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기원하면서 재빨리 청바지와 활동하기 편한 티셔츠를 입고는 갑판으로 올라갔다. 찬바람이 머리를 흐트려 놓았다. 클로이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레온에게 다가갔다. 레온은 손을 뻗쳐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신경은 옆에 있는 선장의 얘기에 집중되어 있는 듯했다. "천기도( 天 氣 圖 )와 해도( 海 圖 )를 대조해 보았습니다만, 다행히도 가장 위험한 곳은 지나지 않아도 되는…" 선장의 목소리를 돌풍이 지워 버렸다. "클로이, 당신은 일반 선실에 내려가 있어. 작긴 하지만 여기보다는 따뜻하고 물도 안 젖으니까. 자, 얼른 내려가요. 나는 선장과 함께 여기 있겠어." 무조건 내려가라는 말투였다. 같이 있고 싶어요. 클로이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이 말을 꿀꺽 삼켜야만 했다. 그리곤 벌써 사나운 파도에 씻기기 시작한 갑판을 조심조심 걸어서 선실로 물러갔다. 처음에는 실내를 서성이고 있었으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클로이는 서가에 꽂혀 있는 그리스 신화를 집어들었다. 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 놓았던 레온과 마리사와의 일이 눈앞에 어른거려 도저히 정신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갑판으로 다시 달려가저 마리사와의 문제를 따져 볼까 … 클로이는 몇 번이나 이 같은 충동에 사로잡혔지만, 그럴 때마다 자기자신을 타일렀다. 갑자기 문 손잡이가 움직이는 바람에 클로이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온이다!

침울했던

마음이

금세

들떴다.

하지만

들어온

사람은

커피를

가져온

승무원이었다. 클로이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다시 자리에 앉았다. 레온도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클로이는 이런 생각이 들자 문득 갑판 위로 올라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우연히 눈에 들어온, 현창을 파도가 무서운 기세로 부딪치고 물러가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바꾸었다. 이오스를 떠난 지 4 시간 만에 요트는 간신히 에오스의 선창에 닿았다. "스피로가 지프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당신을 저택에 내려놓고 나서…" 선창에 내려오자마자 레온이 말했다. "마리사는 아직도 못 찾았군요?" 클로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레온이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 제발 나도 같이 데려가 줘요." 클로이는 진지하게 부탁했다. 마리사보다도 레온의 서먹서먹한 태도가 더 마음에 걸렸다.


"안 돼. 당신은 이 섬에 대해 잘 몰라서 그렇게 간단히 말하지만, 위험해서 도저히 당신과 함께 갈 순 없어. 가면 크게 고생할지도 몰라." 레온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클로이는 얼굴을 돌렸다. 나를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은 아마 마리사의 기분을 생각해서 그럴 것이다. 그 정도로까지 마리사를…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자 질투심이 불같이 솟아났다. 클로이는 마음을 겉잡을 수가 없었고, 분한 눈물이 복받쳐 올랐다. 그러나 간신히 눈물을 꾹 참고 레온에게 웃는 얼굴을 돌렸다. 마리사의 상사에 대해 염려하고 있는 이 절박한 상황에서 눈물을 보일 만큼 어린애 같은 짓을 하면 안 된다. "그래, 착한 소녀야." 레온은 클로이의 입술에 재빨리 키스를 하고는 승무원들이 있는 쪽으로 사라졌다. "즉시 피레우스 항에 피난하라고 이르고 왔어. 태풍이 불면 이 선창에는 있을 수 없게 돼." 해안에 닿은 요트의 트랩을 앞장서 내리면서 레온이 클로이에게 말했다. 레온은 클로이를 지프의 뒷자리에 앉히고 자기는 조수석에 앉았다. 그러자 스피로가 핸들을 잡으면서 마리사의 수색상황을 상세히 보고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레온. 심각한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져 간다. 클로이는 덮개 없는 딱딱한 좌석에서 비를 맞으며 차가와진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페트로스가 목격했을 때는 벼랑 쪽으로 가고 있었단 말이지?" 레온은 스피로에게 재차 확인했다. "예,

하지만

근처에

마리사

아가씨는

없었어요.

벼랑이나

해변을

샅샅이

찾아보았습니다만…" 스피로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지프가 저택 앞에 닿자 클로이는 급히 서두는 레온을 위해서 조금라도 빨리 내리려고 자기가 직접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손이 곱아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은 레온의 도움을 받아 지프에서 내렸다. 클로이는 추워서 꼼짝달싹도 할 수 없다는 말을 감히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혼자서 방으로 돌아가려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레온이 뒤따라와 결국 그에게 팔을 붙잡힌 채 질질 끌려가듯 방으로 들어갔다. 레온은 발로 밀어 문을 닫더니 클로이를 침대에 앉혀 놓고는 그대로 욕실로 사라졌다. 나에 대해선 염려 말고 빨리… 큰소리로 이런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레온이 돌아와서 흠뻑 젖은 블라우스를 잡아당겼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클로이, 가엾게도… 굉장히 추웠지? 미안해, 당신이 얇은 옷만 입고 있는 걸 몰랐어… 그러고 보니, 요트에 두꺼운 옷을 한 가지도 안 가져갔었군…"


욕실에서 가져온 커다란 타월로 클로이의 몸을 감싸더니 레온은 그 위를 힘껏 문지르기 시작했다. 얼음같이 차가와졌던 피부에 점차로 훈훈한 온기가 돌아옴에 따라 요트에서 뜨겁게 애무하던 감촉이 되살아났다. 꿈틀하고 저절로 클로이의 몸이 떨렸다. 레온의 손이 멈춰지자 타월이 툭 떨어졌다. "클로이…" 두 사람은 갑자기 와락 껴안으며 서로의 입술을 격하게 탐했다. "클로이, 미안해." 레온은 쉰 목소리로 말하더니 목을 끌어안고 있는 클로이의 팔을 가만히 내렸다. "당신하고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가봐야 해." 말없이 돌아앉은 클로이를 남겨 놓은 채 레온은 허둥지둥 방을 나갔다. 얼마 후 천천히 목욕을 하고 난 클로이는 욕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나는 것을 느끼고는 가운만 걸친 채로 침실을 들여다보았다. 지나가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있었다. "주인님의 분부로 뜨거운 수프와 빵을 가져왔어요." 지나는 창밖의 어둠을 잠시 응시하더니 커튼을 홱 잡아당겼다. "멜테미가 이렇게 여느 때보다도 일찍 불어올 때는 반드시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대요." 지나는 조그만 몸을 떨고 있었다. "그래서 마리사 아가씨한테도 오늘은 밖에 나가지 마시라고 말씀드렸는데 …

마리사

아가씨는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마치 뭔가에 홀린 듯이 나가 버렸어요. 틀림없이 멜테미가 마리사 아가씨를 불러낸 것이에요. 멜테미는 원한을 품고 죽은 사람의 넋이 사람을 불러내는 소리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요. 결국 그 소리에 끌려나갔다간 생명을 잃고…" "바보 같으니라구! 그 따위 소린 하지 마." 클로이는 무의식중에 호되게 꾸짖고 나서 문득 지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직도 어린 티가 남아 있는 이 순박한 섬 아가씨는 이러한 이야기를 항상 들으면서 자랐을 것이다. "미안해, 지나. 어쩐지 나도 그 멜테미라는 바람 때문에 이상해진 모양이야." 클로이는 상냥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송해요. 쓸데없는 소릴 해서요 … 아무쪼록 마음놓으시고 푹 주무세요. 주인님이나 마리사 아가씨도 틀림없이 무사히 돌아오실 테니까요." 지나는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을 남겨 놓곤 물러갔다. 거의 새벽이 다 됐을 때, 문밖에서 갑자기 떠들썩한 소리가 나서 클로이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한순간 혹시나 하는 기대가 가슴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옆에 있는


베개를 돌아다보았지만 레온이 돌아와서 자고 나간 흔적은 아무 데도 없었다. 갑자기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클로이는 정신없이 슬리퍼를 신고 문 쪽으로 달려갔다. 복도에서 얘기하고 있는 사람들은 스피로와 지나였다. 두 사람의 표정으로 보아서 불길한 소식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레온에게 무슨 일 있었어요?" "아뇨, 주인님께선 아무 일도 없습니다만, 마리사 아가씨가…" 스피로는 말을 하다 말고 얼버무렸다. "아직도 못 찾았어?" "아아뇨, 찾긴 찾았습니다만, 용태가 너무나 … 벼랑 밑 바닷물이 많이 괴어 있는 동굴 속에서 발견되었어요. 주인님께서 손수 밧줄을 타고 내려가셨고, 잠시 후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 두 사람을 끌어올렸어요. 오랫동안 물에 잠긴 동굴 속에 혼자 있었으니까, 마리사 아가씨는 틀림없이 정신을 잃었을 거예요. 병이 난 것도 무리가 아니죠." 스피로는 애처롭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레온은 지금 어디 있죠?"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홀에서 레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클로이는 정신없이 달려내려가서 층계참에서 홀을 내려다보았다. 레온의 지친 얼굴에는 피로의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지만, 억센 양팔은 마리사의 몸을 힘껏 끌어안고 있었다. 저 팔로 아까는 나를… 클로이의 가슴은 질투로 인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자기를 쳐다본 레온의 눈 속에 한순간이나마 애정과 다정함을 느끼게 되자 다시금 마음이 가라앉아 클로이는 가슴이 설레었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순간적인 기쁨에 지나지 않았다. "클로이…" "안 돼! 안 돼요, 레온! 내 곁을 떠나지 말아요!" 레온이 클로이에게 얘기를 하려는 순간 마리사는 날카로운 소리로 외치고는 레온의 어깨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마리사의 스커트는 더러워져 있었고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핏기를 잃은 얼굴에는 여러 군데 상처가 나 있었다. "그래그래, 마리사, 안심해라. 나는 아무 데도 안 갈 테니까." 레온은 조그만 어린애를 어르듯이 마리사를 달랬다. "클로이, 얼른 가방 속에 입을 옷을 챙겨 줘. 당신하고 마리사 두 사람의 옷을. 지금 곧 마리사를 아테네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겠어. 헬리콥터를 대기시켜 놓았는데, 당신은 준비하는 데 몇 분이나 걸리지?" "5 분 정도요."


마리사의 몹시 밉살스러운 시선을 무시하고 클로이는 딱 잘라 대답했다. 아무튼 빨리 마리사를 의사의 손에 넘겨야 한다. 그러고 나면 레온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와 함께 있을 수 있겠지. 정확히 5 분 후에 클로이는 말했던 대로 준비를 다 갖춘 후 청바지와 두꺼운 스웨터 차림으로 홀에 내려왔다. 스피로가 기다리고 있다가 레온과 마리사는 이미 헬기 안에 들어가 있다고 일러 주었다. 클로이는 급히 달려갔다. 레온의 옆자리에 올라타니 뒤쪽 좌석에서 마리사의 잠자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다보니 초췌한 모습으로 누워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마리사를 지켜봐 줘. 닥터 리바노스한테 전화로 물어보고 방금 진정제를 놓아 주었어.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는 효력이 있을 거야, 클로이. 잘 부탁해." 조종석에 앉아 있는 레온이 다급하게 말했다. "스피로한테 들었는데, 벼랑 아래의 동굴 속에 있었다면서요?" l0 분 후에 헬리콥터가 넓고넓은 바다 위로 나서자 클로이는 조심조심 얘기를 꺼냈다. 하늘에는 아직도 검은 조각구름이 남아 있었지만, 어젯밤 그토록 미친 듯이 사납게 날뛰던 해면은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 "으응." 레온은 비행기 조종에만 정신이 집중되어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억지로 대답하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도대체 뭘 하러 그런 델 갔을까요?"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온의 얼굴을 모른 체하고 클로이는 계속해서 말을 꺼냈다. "벼랑을 자기 혼자서 내려갔는지, 아니면 벼랑 가를 가다가 그만 발이 미끄러진 것인지… " "글쎄, 나는 어떻게 된 건지 몰라. 어쨌든 빨리 구출하는 데만 몰두했으니까.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 레온은 쌀쌀하게 대답했다. "내가 갔을 땐 동굴 입구는 이미 바닷물이 차서 보이지 않았어. 아마도 모르는 사이에 바닷물이 차올라 마리사는 나올 수가 없었을 거야. 다행히도 바위턱을 발견하고는 거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었어. 하지만 만일 스피로가 벼랑 중간의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재킷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마리사는 구해내지 못했을 거야. 클로이, 앞으로 1 시간쯤 지나면 아테네야. 먼저 당신을 아파트에 내려놓고 마리사를 병원으로 데리고 갈 거야." 클로이를 피하고 싶어하는 말투였다. 클로이는 불안한 감정이 서서히 맺힘을 느꼈다. 아테네 공항에 도착하자 레온이 경영하는 회사의 사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세 사람을 차에 태우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공항을 떠났다. 이렇게 순조로이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되는


것은 레온에게 막대한 재산과 아주 큰 권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윽고 레온의 지시대로 클로이를 아파트 앞에 내려 주더니 차는 무서운 속도로 달려갔다. 신혼시절 몇 달 동안을 지낸 적이 있었던 아파트였다. 클로이는 천천히 방 하나하나를 돌아보면서 되살아나는 갖가지 추억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운명이 판가름났던, 마리사가 레온과의 꺼림칙한 관계를 고백하던 날의 일만은 결코 회상하고 싶지 않았다. 마리사… 그녀 때문에 나는 얼마나 많은 고민과 괴로움을 겪어야 했던가. 그렇다, 모두 마리사와 관계가 되는 일 때문이었다. 헬리콥터 안에서 레온이 말을 많이 하지 않은 것도, 이렇게 일부러 나를 혼자 떼어 놓고 병원으로 급히 달려간 것도 틀림없이 마리사와 관계있는 일이어서 나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 클로이는 잠시 동안 여러 가지 상상을 하고 있다고 문득 자기자신을 꾸짖고 망상을 뿌리쳐 버렸다. 레온은 저녁 무렵 혼자서 돌아왔다. 닥터 리바노스의 권유에 따라 상태를 관찰하기 위해서 마리사를 하룻밤 입원시켰다고 했다. "마리사가 폭풍우 속을 왜 혼자 산책하러 나갔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아요." 응접실에서 편안히 쉬면서 클로이는 천천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레온은 한쪽 손에 위스키 잔을 들고 맞은쪽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있었다. 피로가 쏟아진 것이리라. 아까부터 줄곧 눈을 딱 감고 있다. "마리사는 산책을 좋아했던가요…?" "그게 어쨌다는 거야?" 레온은 갑자기 눈을 뜨더니 가시 돋친 말투로 되물었다. "아아뇨, 별로. 다만 좋아했는지 어떤지를 잠시 생각해 봤을 뿐예요." 클로이는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런데, 레온,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한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클로이는 용기를 내어 말을 계속했다. "레온, 당신은 나와 둘이서 우리 아이들을 위해 진정한 가정을 이뤄 나가기를 바라고 있죠? 그렇다면 아무래도 당신에게 확인해 두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요." 레온은 침묵을 지키며 다시금 눈을 감고 소파에 등을 기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런 상황에 그런 얘길 꺼내서는 안 될는지 모르지만, 나는 꼭 물어보고 싶었어요… 레온, 당신은 마리사를 어떻게 하실 작정이에요?" 클로이는 조용히 말하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레온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서먹서먹한 침묵을 깨려고 클로이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쳐들었다. 바로 그때, 레온의 손에서 잔이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레온!" 벌떡 일어나 레온에게 달려간 클로이는 곧 침묵의 까닭을 깨닫고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클로이는 발소리를 죽여 침실로 가서 얇은 누비이불을 갖다가 가만히 레온의 몸에 덮어 주었다. 기분 좋게 잠들어 있는 레온이 견딜 수 없도록 사랑스러웠다. 한참 동안 자는 모습을 지켜보던 클로이는 살그머니 문을 닫고 홀로 나갔다. 몇 군데서 전화가 왔다. 처음에는 에오스에서 온 것이었는데, 클로이는 모든 일이 순조로이 진행된다고 하면서 걱정하는 스피로를 안심시켰다. 그 다음의 전화는 레온의 사업

관계로

알게

사람들에게서

것인데,

모두들

마리사의

입원에

대한

문병전화였다. "여보세요, 클로이?" 9 시 가까이 되었을 때 크리티코스 부인에게 전화가 왔다. "당신은 아직도 내 충고를 듣지 않은 모양이군요. 어물어물하지 말고 빨리 마리사를 내쫓아 버려요. 그대로 두었다간 얼마 안 가서 정말 큰일이 벌어지고 말 거예요." 동화에서처럼 어디선가 마음씨 고운 할머니가 나타나 나를 도와 주면 좋을 텐데 … 수화기를 놓자 마리사를 어찌할 수도 없는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클로이는

크리티코스

부인과

동화

속에

나오는

할머니를

왠지

모르게

결부시켜

생각하다가 그만 슬그머니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10

시가

되었다.

클로이는

거실로

가서

소파

쪽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레온을

들여다보다가 살그머니 이불 자락을 들추었다. "클로이? 이불을 덮어 줘서 고마와. 하지만 남편을 소파에서 자게 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당신을 여기에 재운 게 아녜요. 당신이 그냥 잠들어 버렸잖아요!" 어처구니없는 말을 듣고 클로이는 무의식중에 난폭하게 대답했다. "허참, 그랬었나. 그건 그렇고 꽤나 씩씩하게 말을 하는군." "나는 말예요 …

그저 당신이 몹시 피곤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고 싶었던

것뿐예요." "응, 정말 녹초가 되도록 지쳐서 2 층까지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었어. 클로이, 미안하지만 수고해 주는 김에 옷도

벗겨 주지

않겠어?

단추를

귀찮으니까." 갑자기 말투가 조용하게 변하는가 싶었는데, 레온이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어때, 클로이, 그렇게 해줄 테야?" "별수 없군요."

푸는

것조차


클로이는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셔츠의 단추를 차례차례 풀어가는 손길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아, 나의 클로이!" 레온은 꽉 껴안고는 입술을 마구 부볐다. "레온, 이러지 마세요. 하녀한테 들키면 창피해요." 레온은 클로이가 항의하는 것도 듣지 않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옷을 벗겼다. "클로이, 난 당신을 원해. 괜찮지?"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소곤거리는 레온 … 클로이는 대답할 틈도 없이 온몸에 레온의 체중을 느끼고는 정신없이 레온에게 매달렸다. 그 순간… "레온!" 등뒤에서 난 소리에 레온은 재빨리 클로이에게서 떨어지더니 바닥에 미끄러져 떨어져 있던 이불로 클로이의 몸을 덮었다. 즉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클로이의 눈에 비친 것은 병원에 있어야 할 마리사의 모습이었다. "레온, 참으로…" 마리사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실룩거렸다. "나를 내팽개쳐 두고 이런 여자와… 그토록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했잖아요!" "닥쳐! 마리사, 그 이상은 말하면 안 돼." 레온이 엄하게 꾸짖자마자 마리사는 발길을 돌려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기다려라 마리사, 기다리라니까!" 레온은 허둥지둥 옷을 주워 입더니, 마리사의 뒤를 따라 2 층으로 올라갔다. 혼자 남아 남게 된 클로이는 무거운 발을 질질 끌듯이 하면서 침실로 돌아갔다. 나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리사에게 갑자기 습격당한 쇼크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아내를 돌보려고도 않고 마리사만을 염려하면서 레온은 허둥지둥 뛰쳐나갔다.

날카롭게

갈라진

마음의

고통을

따뜻한

품안에서

남몰래

치유하고

싶었는데… 지금쯤 레온은 어떻게 마리사를 달래고 있을까? 차디찬 침대에 드러누운 채 클로이는 혼자서 괴로운 상념을 되씹고 있었다. "마리사는 괜찮아요?" l 시간쯤 지나서 되돌아온 레온에게 클로이는 애써 태연한 체하며 물었다. "간신히 진정시켰어. 마리사는 허락도 없이 병원을 빠져나온 거야. 하지만 저런 히스테리 상태로 병원에 돌려보낼 수는 없어서 닥터 리바노스에게 전화를 걸고 오늘 밤은 이대로 여기서 재우기로 했어. 아아, 피곤해. 정말 지독한 꼴을 당했어." 레온은 나도 모르겠다는 듯이 머리를 몇 번 흔들었다. "레온, 확실히 들려주지 않겠어요? 당신과 마리사와의 관계를…"


무의식중에 이 말이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클로이, 부탁이야. 그 얘긴 내일 하기로 해. 이젠 안 되겠어. 잠 좀 자게 해줘." 레온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순식간에 잠이 들고 말았다. 나는 도대체 뭘 믿어야 한담. 레온의 품속에 있을 때는 다른 일은 모두 시시하고 하찮게만 여겨진다. 지금까지는 레온과 포옹을 할 때마다 불안이나 분노를 속여 왔지만 평생토록 그렇게 자신을 속이면서 살 수는 없는 일이다 … 게다가 그런 허망한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다. 레온의 깊이 잠든 숨소리를 들으면서 클로이는 오랫동안 심각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문득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옆에 있어야 할 레온이 없다. 클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두컴컴한 방안을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역시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3 시.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바람에 클로이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걷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어두운 복도로 나섰다. 마리사의 방이 있는 문 틈새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클로이는 숨을 죽이고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안에서 소곤소곤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순간, 악몽에 홀리기라도 한 듯 클로이는 난폭하게 문을 열고 있었다. 클로이의 눈에 잠옷 차림을 한 마리사를 껴안고 있는 레온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침대 옆에

있는 램프의 어렴풋한

불빛에

마리사의 몸의

선이 비쳐

보였다.

클로이는

무의식중에 도어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레온, 약속해요. 언제까지나 나만을 사랑해 주겠다고. 한시라도 빨리 클로이를 쫓아내요. 그래서 다시 우리끼리 단둘이 살아요…" 마리사는 달콤하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하소연하더니, 레온의 뺨에 새빨간 입술을 꼭꼭 눌러댔다. 레온이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으나, 클로이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자기 방으로 줄달음쳐 되돌아왔다. 아아, 나는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 로맨틱한 꿈을 너무 오래 꾸고 있었어 … 레온이 나를 다시 데리고 온 것은 대를 이를 아이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레온 자신뿐만 아니라 마리사한테서도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로맨틱한 환상을 품고 그 속으로 도피해 있었던 거다… 욕실에 틀어박혀 클로이는 하염없이 울었다. 어느 틈엔지 클로이의 눈물도 말랐고, 날은 밝아오기 시작했지만 레온은 돌아오지 않았다. 레온이 사랑하고 있는 건 마리사다. 레온은 클로이의 몸을 요구하는 일은 있어도 그의 마음은 결코 마리사로부터 멀어지지 않는다… 클로이는 조용히 자기의 패배를 인정했다.


과연 나는 이대로 두 사람의 관계를 눈감아 둔 채 레온의 아이를 낳아 기를 수가 있을까? 이전에 내게 유산하게 한 마리사와 함께 아이들을 제대로 기를 수 있을까 … 클로이는 이미 그 대답을 알고 있었다. 클로이가 식당으로 내려가자 평상복을 입은 레온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금방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검은 머리가 젖어 있었다. "오늘은 사업 관계로 하룻동안 꼬박 집에 없을 거야. 어젯밤 얘기는 내가 돌아온 후에 해도 좋겠지." 클로이가 정면에 자리잡고 앉자 레온은 컵을 내려놓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얘기라구요…? 클로이는 하마터면 히스테릭한 웃음이 터져나올 뻔했지만, 얼른 꾹 참고 견뎠다. 그 사실을 그만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는 더 이상 들을 얘기도 없다. "아아뇨, 걱정하실 것 없어요. 이젠 아무려면 어때요." 클로이는 차갑게 대꾸했다. "레온, 역시 당신하고 같이 살 수는 없어요. 나 자신을 속이는 게 정말 싫어졌어요. 눈꼽만한 애정도 없이 같이 산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워요. 정열이나 욕망만이 아닌 참다운 애정,

그것이

없으면

아기를

키울

자격도

없다고

생각해요.

레온,

나는

이미

결심했어요." 클로이는 레온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레온은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이윽고 클로이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네에 그래요. 이젠 어떤 일이 있든지 이 결심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클로이는 레온의 말을 가로막았다. "알았어. 더 이상 얘기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군. 즉시 런던까지 가는 비행기를 예약하지. 이혼수속에는 약간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이쪽에서 모든 수속을 밟아 당신을 자유로운 몸이 되게 해주지." 레온은 무표정하게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클로이는 방으로 돌아가 필요한 것만을 골라 슈트케이스 속에 챙겨 넣기 시작했다. "어머나, 떠나는 거예요?" 마리사가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왔다. 승리한 기쁨에 젖은 표정으로 슈트케이스 속을 들여다보았다. "틀림없이 억울하겠죠? 하지만 할 수 없어요. 레온이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나니까. 빨리 단념하는 게 좋아요. 어젯밤만 하더라도 레온은 당신의 침대에서 나에게로 도망쳐 온


거죠. 당신에게는 없는 오직 나만이 갖고 있는 것을 레온은 구하고 있거든요. 나는 레온의 모든 것을 이해해 줄 수 있어요. 레온과 나에게는 같은 피가 흐르고 있잖아요?" 마리사는 미친 듯이 웃었다. "우리들의 관계를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겠지만, 레온은 조금도 그런 생각은 안해요. 부럽지 않아요? 멋진 레온과 내가 사이가 좋아서." 마리사의 눈은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클로이는 고개를 떨군 채 입술을 깨물었다. 클로이는 드디어 떠날 준비가 끝나자 레온과의 생활을 결말지을 양으로 진주목걸이를 풀어 화장대 서랍 속에 넣었다. 레온이 처음으로 목에 걸어 주던 때의 감격과 기쁨이 되살아나 뜨거운 눈물이 클로이의 뺨을 적셨다. 뜻밖에 레온이 공항까지 전송해 주겠다고 하면서 말리는 것도 듣지 않았다. 내가 떠나는 걸 자기의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선지도 모른다. 그런 짓을 안해도 나는 런던으로 돌아갈 텐데… 입을 꼭 다문 채 핸들을 잡고 있는 레온의 단정한 옆모습을 보는 클로이의 마음은 무척 쓰라렸다. "잘 가요, 클로이!" 이윽고 공항의 정면 현관 앞에 차를 세우고 슈트케이스와 항공권을 내주더니 레온이 불쑥 한마디 했다. "잘 가. 언젠가 틀림없이 내 마음을 이해할 날이 올 거야." 그는 노여움이 어린 키스를 남기고 차에 올라타더니 무서운 속력으로 차를 몰고 떠나갔다. 안녕, 레온 …

영원히 안녕. 상처받은 마음을 안고 클로이는 이윽고 비행기 트랩을

올라갔다. 10 가을도 거의 다 지난 어느 날의 일이었다. 클로이는 고용주인 루이스 시먼즈의 부탁을 받고 해로즈 백화점에 물건을 사러 나갔다. 프랑스 제 실크 스타킹을 사기 위해서였으나, 공교롭게도 루이스가 지정해 준 상표는 다 팔리고 없었다.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려는 성급한 손님들로 혼잡을 이룬 출입구를 빠져나왔을 때 클로이는 후유 하고 한숨을 쉬고는 팔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돌아갈 예정시간보다 꽤 많이 늦어 있었다. 사무실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클로이는 밍크 코트로 몸을 감싼 어떤 부인과 딱 부딪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아니, 내가 도리어… 어머! 이게 누구야, 클로이잖아!"


크리티코스 부인이 반가운 듯이 클로이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깜짝 놀랐어요. 이런 데서 우연히 당신을 만나다니, 원! 나는 지금 포트넘에 가서 차라도 마시면서 페스트리를 먹을까 하는 참이어요. 클로이, 괜찮다면 당신도 같이 가지 않겠어요? 아니면,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요?" "죄송해요. 모처럼 만났습니다만, 나는 급히 직장으로 돌아가야 해요." "네? 직장이라구요? 아니 그럼, 당신이 직장에 나가 일한단 말예요?" 크리티코스 부인은 갑자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네에, 작가인 루이스 시먼즈를 아세요? 그녀의 비서로 일하고 있어요. 아주 재미있는 직업이고, 더구나 좋은 분이어서 만족스럽게 일하고 있어요." "그랬었군요.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네요. 하지만 이대로 헤어지는 건 너무 섭섭해요. 참 그렇지, 클로이, 퇴근을 하거든 사보이 호텔로 와주지 않겠어요? 같이 저녁이나 먹어요. 주인 양반은 오늘 밤 사업상 볼일이 있어서 나 혼자 식사해야 하는 처지예요. 당신이 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클로이, 퇴근 후엔 괜찮겠죠?" "네, 그렇게 하죠. 그럼 8 시까지 사보이 호텔로 찾아가 뵙죠." 클로이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두 번이나 거절할 수는 없었다. 택시를

타고 벨그레비아에

있는 루이스의

아파트에

돌아가니,

그녀는

작업실에서

최신작을 다시 읽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봐요 클로이, 잠깐 이걸 들어봐요." 신경질적인 표정을 갑자기 누그러뜨리더니 루이스는 곁에 있는 문예잡지를 집어들었다. "괜찮지? 자, 읽겠어요. <루이스 시먼즈가 또다시 걸작을 내놓았다. 다듬고 또 다듬어진 사건의

전개.

작자

자신처럼

미끈하게

세련되어

있다.

그리고

어딘가

독자를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이상한 매력이 여기저기서 반짝인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미스테리다.> 다듬고 또 다듬어졌다구! 정말이지 마음대로 말하는군. 내가 온갖 고통을 다 겪은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조롱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식으로 썼어요!" 루이스는 크게 소리쳤다. 그 어깨 너머로 페이지를 들여다보고 비평가의 이름을 알게 되자, 클로이는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맥스웰 고든이었다. 그와 루이스는 서로 속속들이 잘 아는 친구사이다. "독자를 조마조마하게 하는 이상한 매력이라구요? 혹시 그로부터의 사랑의 메시지가 아닐까요?" "무슨 소릴 그렇게 해요, 클로이. 농담이 아니예요, 그런 사나이는…" 루이스는 요란스럽게 눈살을 찌푸려 보이더니 잡지를 책상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당신이 내 일을 거들어 준 지 2 개월 정도밖에 안 됐지만, 나는 이렇게 개방적인 성격이어서 당신은 이미 나에 대해 모든 걸 다 알았을 거예요. 하지만 클로이, 그에 비하면 나는 당신에 대해서 아직 아무 것도 몰라요. 이상한 것은, 예를 들면 그 결혼반지 말예요. 그 결혼반지를 소중하게 항상 끼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단 한번도 당신에게서 남편 얘길 들어보지 못했어요. 아무리 별거중이라고는 하지만 뭔가 조금은 얘기할 게 있을 것 아녜요?" "아녜요. 들려 드릴 만한 얘기는 아무 것도 없어요." 클로이는 은근히 당황하면서도 딱 잘라 대답했다. "정말?" 루이스는 의아한 듯이 클로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당신의 사생활에 참견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이따금 일을 하다 말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뭔가 깊은 수심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면 그저 노파심이 생겨서 그러는 거예요." 루이스는 정답게 말했다. "죄송해요, 심려를 끼쳐 드려서. 참, 잊었군요. 사실은 스타킹이 다 팔리고 없어서 못 샀어요." "어머나, 그거 참 곤란하게 됐군요. 오늘 밤 제프리 루이스와 중대한 식사약속이 있는데. <거짓말은 죽음을 부른다>를 영화화하기 위한 원작권을 사주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걸려 있어요. 사실 나에겐 지금 목돈이 필요해요." 루이스는 솔직하게 말했다. 아마도 쌍동이 아들의 학비나 다른 곳에 쓰일 돈일 것이다. 인기작가라 하더라도 미망인 혼자 두 아들을 돈이 많이 드는 명문학교에 보내기는 힘겨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겉모양이라도 멋지게 차리고 나가 좋은 인상을 주고 싶은 거예요. 이해할 수 있겠죠, 클로이?" 루이스는 그렇게 덧붙였다. "네에, 그렇다면 다른 걸 입고 가시면 어떻겠어요? 겉으로 봐서는 잘 몰라요." 클로이는 장난꾸러기처럼 말했다. "그런데 안 계시는 동안에 해야 할 일은 없나요? 제가 물건을 사러 나간 사이에 혹시 수정하신 부분이 있으면 지금 타이핑를 해놓을까 하는데요." 크리티코스 부인과의 약속을 거절할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라도 생겼으면 하고 클로이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아니예요, 오늘은 일찍 돌아가요.

금주에

벌써

번이나

늦게까지

해주었는데… 그렇잖아도 당신은 요즘 꽤 여윈 것 같아요. 게다가…"

같이

일을


루이스는 뭔가 깊이 생각하더니 하려던 말을 그만두었다. "클로이, 당신하고 같이 일을 한 지 얼마 안 됐지만, 난 당신을 아주 좋아해요. 만일 뭔가 곤란한 일이 생기거든 언제든지 의논을 해요, 나 같은 사람도 괜찮다면." "언제나 그렇게 무서운 소설을 쓰고 계신 분이 인생상담을 해주실 수 있어요?" 클로이는 일부러 딴청을 피웠다. 루이스의 따뜻한 마음이 가슴속에 사무친다. 그러나 클로이에겐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이다. 괴로운 과거를 잊기 위해서는 이젠 아무 생각도 해선 안 된다. 퇴근을 해서 집에 돌아오니 7 시 반이었다. 약속 시간이 가까와 오자 클로이는 옷장을 열고 크림 빛 털실로 짠 재킷을 꺼내 입었다. 지금의 클로이에겐 밍크코트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파리에서 살 무렵 레온이 손수 골라서 사준 근사한 코트는 처음에 아테네를 떠날 때 그대로 놓아 두고 왔다. 사보이 호텔에 도착한 것은 정각 8 시였다. 클로이는 프런트로 가서 크리티코스 부인을 불러 달라고 했다. "클로이! 오셨군요. 정말 고마워요." 크리티코스 부인은 다정하게 클로이를 레스토랑의 구석진 자리로 데리고 갔다. 절반이 개인용 방처럼 꾸며겨 있었는데, 화려하게 꾸며진 레스토랑 전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런, 깜박 잊었네. 음… 영어로는 그 말을 뭐라고 하죠? 왜 주저한다는 뜻인데…" "네, 망설인다는 말이오?" "아참 그래요, 바로 그 말. 망설이느라고 안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네 그래요,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뵈니 반갑군요." 클로이는 솔직하게 말했다. "고마와요, 정말." 크리티코스 부인은 손을 뻗어 클로이의 손을 가만히 감싸쥐었다. "클로이, 당신 아직도 결혼 반지를 끼고 있군요 … 당신이 레온의 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요. 아니, 클로이, 아무 말 안해도 좋아요." 말을 꺼내려는 클로이를 조용히 제지하더니 크리티코스 부인은 얘기를 계속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오늘 밤은 당신하고 오랜만에 식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나는 당신의 사생활에 관여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자아 그럼, 식사 주문이나 해요. 아참, 최근에 니코스가 약혼을 했어요. 신부감은 정말 마음씨가 아주 고운 아가씬데 니코스는 소개를 받자마자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에요. 이번에 런던에 온 것도 그 신부감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서죠. 물론 나 자신도 포함해서죠. 그건 그렇고, 과연


런던은 대단하군요. 아름답고 멋진 상점이 수두룩해요. 어딜 가거나 갖고 싶은 것뿐예요. 하지만 이 추위만은 마땅찮군요." 크리티코스 부인은 요리가 나올 때까지 혼자서 명랑하게 쇼핑 얘기를 하고 있었다. "마리사는 아직도 시집을 안 갔어요." 무심코 나온 말이었지만, 그 순간 레몬을 친 생선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클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멈추었다. "레온에겐 마리사를 시집보낼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어요. 마리사는 점점 더 방자해져서 레온을 무척 애먹이는 모양이에요. 애당초 레온이 그렇게 버릇없이 길렀으니 하는 수 없죠. 아니, 클로이 왜 그래요? 조금도 안 먹었잖아요?" 크리티코스 부인은 클로이의 얼굴을 걱정스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어디가 좋지 않은 모양이군요. 에오스에서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많이 여윈 것 같아요… " 우연히도 루이스와 똑같은 말을 했다.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 같지만 당신에게나 레온에게나 별거하고 있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요. 오히려 큰 손실이 아니겠어요? 얼마 전에 레온을 만났지만 상당히 초췌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활기가 없는 레온을 본 건 처음이에요. 당신들 부부가 이렇게 된 것도 모두 마리사가 나빴기 때문이에요." 크리티코스 부인은 딱 잘라 말했다. 클로이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접시를 밀어놓고는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깨물었다. 쏟아지는 눈물이 창백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머나 클로이 … 미안해요. 당신을 슬프게 했군요. 오늘 밤은 레온의 얘긴 안하려고 했는데 그만 …

내가 잘못했어요. 당신은 아직도 레온을 사랑하고 있군요. 그렇죠,

클로이?" 크리티코스 부인은 레이스로 가장자리를 두른 손수건을 클로이에게 내밀며 이렇게 물었다. 그 사람은 이미 잊었어요.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눈물이 쏟아져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클로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마리사가 잘못한 탓이에요. 클로이, 레온에게 돌아가요. 레온은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아아뇨, 기다리고 있지 않아요!"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치고 나서 다른 손님들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클로이는 꺼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절대로 기다리지 않아요…"


갑자기 구역질과 현기증이 났다. "어쩐지 기분이…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도 몰라요." 눈앞에 있는 크리티코스 부인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인다. "괜찮아요? 만일을 위해서 호텔 의사한테 진찰을 받는 게 좋겠어요." 크리티코스 부인은 열심히 권했다. 그러나 기분이 나빠진 것은 레온 얘기로 마음이 동요된데다 자극적인 요리를 먹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부터 크리티코스 부인은 두번 다시 레온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얘기를 하고 있어도 레온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떠올라 클로이는 아무런 흥미도 느낄 수 없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면 할수록 어째서 그 상처가 더욱 커지기만 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 상처는 영원히 지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밤이 깊어 잠자리를 준비하면서 클로이는 이와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튿날 직장에 출근하자 루이스로부터 요크에 같이 가자는 말을 들은 클로이는 구원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말에도 일을 시켜 미안해요. 친구 리차드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 분수도 없이 강연을 하기로 승낙했지 뭐예요. 오랫동안 사귀어 온 처지여서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어요. 그가 강사로 나가고 있는 요크 대학에서 <현대문학의 공죄>라는 테마로 강연한 후에 학생들과 토론을 해야 돼요. 클로이, 당신이 그 원고 작성을 도와 줘야겠어요. 나보다도 훨씬 더 잘하니까. 광고회사에서 훈련을 받은 결과일 거예요. 언제나 귀찮은 일만 부탁해서 미안해요. 자꾸 부담을 줘서 전의 광고회사로 되돌아갈 마음이 든 건 아니겠죠? 작가의 비서, 아주 멋진 직업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잡무가 많고, 아무튼 피곤한 직업인 것만은 사실이에요. 마음속으로는 이런 업무에 실망한 건 아니예요?" 루이스는 솔직하게 물었다. "아뇨, 그렇진 않아요. 확실히 먼저 하던 일과는 다르지만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니예요." 클로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먼저 다니던 회사의 얘기가 나오자 문득 데릭이 떠올랐다. 데릭… 레온의 부탁을 받고는 자기와의 우정을 배반하고 태연히 그녀를 올가미에 걸리게 한 사나이. 그러나 클로이의 마음속에는 데릭을 증오하는 감정은 이제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주말이 되자 클로이는 루이스를 따라 요크로 갔다. 리차드 데비드슨과 메어리는 40 대 중반에 접어든 부부인데 다같이 서글서글한 성격을 가진, 인상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요크에서 몇 킬로 떨어진 조용한 곳의 해묵은 목사관에서 5 명의 아이들과 몇 마리의 개, 조랑말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따뜻한 가정이다. 콜로이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훈훈하고 활기찬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식욕도 없는 분에게 이런 일을 거들게 해서 죄송하네요." 일요일 점심식사를 같이 만들면서 메어리는 옆에서 양배추를 볶고 있는 클로이에게 말했다. "하지만 식욕이 없는 것도 잠시 동안만 참으면 괜찮아져요. 얼마 지나면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져서 견딜 수 없게 되죠. 아, 클로이, 그만 해요. 수고했어요! 자아, 거기 앉아서 잠시 쉬세요." 메어리는 프라이팬을 빼앗듯이 받아들고는 클로이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클로이, 당신 좋은 일이 있지요? 요즈음 많이 야위었다고 루이스가 몹시 걱정하더군요. 내 눈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때요, 그렇지 않아요?" 메어리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좋은 일이 있다고? 그러고 보니, 그리스에서 돌아온 후로는 한 번도… 클로이는 눈앞이 아찔해져서 눈을 딱 감았다. 이상하게도 피로가 쉽게 오고 식욕도 없고 … 현기증도, 그리고 사보이 호텔에서 갑자기 일어난 구역질 등 모든 것이 임신의 징후인데도 그걸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 자기자신이 이토록 멍청했던가, 클로이는 소스라치게 놀랄 뿐이었다. "그런 것 같아요." "그러면 그렇지. 다섯 명이나 아이를 낳아 봤는데 그걸 모를 리가 있겠어요? 그런데, 루이스한테서 들은 얘기지만 당신은 남편과 별거중이라면서요?" 메어리는 갑자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네에, 이혼하기로 돼 있어요." "그래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볼 여지는 없나요? 임신했다는 걸 몰랐죠?" "네, 하지만 내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클로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요크에서 런던으로 돌아오자 클로이는 즉시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결과는 역시 임신이었다. 레온에게 임신한 사실을 알려야 할지 말지 며칠 동안 줄곧 고민했다. 레온에겐 알 권리가 있다. 하지만 레온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온갖 수단을 다 써서 아이를 빼앗아가려 할 것이다. 클로이가 그런 행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법정에서 레온과 마리사와의 관계를 모조리 폭로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추잡스런 싸움은 될 수 있는 한 피하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결론을 얻지 못한 채 며칠 밤을 지새우던 어느 날 아침, 클로이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하얀 봉투 뒤쪽에는 법률 사무소의 이름과 주소가 위엄 있는 활자로 인쇄되어 있었다. 클로이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의자에 앉아 급히 봉함을 뜯었다.


<내일 리츠 호텔 l04 호실로 나와 이혼수속을 밟아 주십시오.> 온갖 생각이 다 떠올라 클로이의 마음을 괴롭히는 통에 그날은 하루내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클로이는 여느 때보다도 더욱 신경을 써서 옷을 고르고는 정성껏 몸치장을 했다. 약속시간까지는 아직도 충분한 여유가 있다. 클로이는 택시를

타려다가 그만두고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했다.

하이드

공원 안을

천천히

걸어가더라도 약속시간까지는 충분히 갈 수 있다. 인기척이 없는 공원. 클로이는 서리가 내린 낙엽을 밟으면서 리츠 호텔로 향했다. 결혼생활에 드디어 종지부가 찍힌다고 생각하니 클로이의 발걸음도 자연히 무거워졌다. 약속시간보다 약간 일렀지만, 화려한 로비에서 기다리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클로이는 용기를 내어 변호사를 찾아가기로 했다. "예, 말씀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안내해 드릴 테니 이쪽으로 가시죠." 프런트에서 클로이가 이름을 대자 포터가 변호사 사무실로 안내했다. 포터가 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하더니 클로이에게 붙임성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그대로 내려가 버렸다. 포터가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곧이어서 사무실 문이 열렸다. 클로이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크림 빛 두툼한 카펫, 검정 가죽을 씌운 소파, 벨벳 커튼이 쳐진 커다란 유리창 … 내부를 재빨리 살펴보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문이 닫히며 거칠게 팔을 붙잡혔다. "레온…!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클로이는 돌아서자마자 문 손잡이에 손을 뻗쳤다. 하지만 도어 앞에는 레온이 가로막고 서 있다. "왜 이런 짓을…?" 클로이는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이젠 충분하잖아요? 그만큼 나를 괴롭혔으면 됐지, 더 이상 할 말이 남았나요?" "나는 하고 싶은 얘기를 절반도 못했어." 레온은 중얼거리듯 말하더니 클로이의 몸을 끌어당겼다. "클로이, 말해 봐. 나 같은 건 필요없다고, 나 같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 귀로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소릴 듣는다면 나는 즉시 이 방에서 나가겠어. 그리고 다시는 당신에게 연락을 하지 않을 거야." 레온은 뚫어지게 클로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샤워를 한 지 얼마 안 되는지 검은 머리는 아직도 젖어 있었다. 그리고 실크 셔츠에 감싸인 늠름한 몸에서는 향긋한 비누 냄새가 났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귓가에 전해 오는 레온의 뜨거운 숨결을 의식하면서 클로이는 조용히 말했다. "거짓말!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 크리티코스 부인한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 클로이는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당신의 말이 진실인지 어떤지, 이렇게 하면 금세 알 수 있어." 레온은 와락 달려들어 사랑에 굶주린 사람처럼 클로이의 입술을 덮었다. 불과 같이 뜨거운 입맞춤 … 클로이는 저항하려고 했으나 온 전신이 어느 새 뜨겁게 호응하고 있었다. "클로이, 다시 한번 말해 봐,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눈물로 범벅이 된 클로이의 뺨을 레온은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레온,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죠? 당신의 자존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선가요? 아니면 나를 골탕먹이려고 그러는가요?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제발 나를 이대로 자유롭게 내버려 두세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클로이? 당신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키스한 거야. 아아, 클로이? 크리티코스 부인한테서 당신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듣게 되었을 때 내가 얼마나 감격한 줄 알아? 당신이 떠나 버린 후로 나는 절망과 슬픔으로 암담해졌어. 당신을 잊으려고 고통스러워할 때 갑자기 희망의 빛이 보였던 거야.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크리티코스 부인의 말 한마디가 절망 속에 빠져 있는 나를 구원해 주었지." 레온은 클로이의 이마에 자신의 땀이 밴 이마를 살짝 가져다 댔다. "클로이, 사랑해! 당신을 죽도록 사랑해!"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구요? 정말예요?" 클로이는 레온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레온, 기뻐요! 행복해요!… 하지만 당신은 마리사를 사랑하잖아요…" "클로이, 그 이상은 말하지 말아. 마리사에 대해선 이제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돼. 이리 와서 나와 얘기하지." 레온은 클로이의 손을 잡고 소파로 갔다. 클로이는 가죽을 댄 소파에 레온과 나란히 앉아 무릎 위에 얌전히 두 손을 포개어 놓았다. "사실은 어제 마리사가 숨을 거뒀어." 레온은 고뇌로 가득 찬 목소리로 불쑥 말했다. 클로이는 한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슬픈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강렬한 충격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아, 마리사가 죽었구나! 클로이는 어느 틈엔가 레온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고마와, 클로이… 당신은 정말 착한 여자군.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레온은 클로이의 두 어깨를 힘있게 잡더니 격정 어린 눈으로 클로이의 눈을 내려다봤다. "당신에게 언젠가 마리사의 어머니 얘길 해준 적이 있었지? 마리사가 두 살 때 세상을 떠났다는…" 레온의 따뜻한 품안에 살그머니 안기면서 클로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의 힘찬 심장의 고동이 뺨을 타고 전해졌다. "그때 당신에게 다 하지 못한 말이 있었어. 차라리 모든 걸 얘기해 주었더라면 좋았을걸… 사실은 마리사의 어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거야. 원래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였지만 마리사를 낳은 후엔 갑자기 그런 증세가 심해졌어. 아버지께선 신경이 약간 흥분되어 있을 뿐이라고 하며 그분을 감싸주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가벼운 상태가 아니었어. 훨씬 더 좋지 않았었지." 레온의 목소리는 더욱 침울해졌다. "끝내 두 살 된 마리사를 남겨 둔 채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만 거야… 얼마 안 가 그 뒤를 따르기라도 하듯이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말았지만, 아버지는 임종하실 때까지도 마리사가 어머니의 나쁜 피를 이어받지나 않았을까 하고 오직 그 점만을 걱정하고 계셨지. 그리고 자기를 대신해서 마리사를 잘 보살펴 주라고 신신당부하셨 어…" 레온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다행히 마리사는 그 나쁜 피를 이어받지 않은 줄 알고 나는 안심하고 있었지. 이따금 짜증을

내거나

뾰로통해지는 일은 있었지만, 그런

정도는

마리사뿐 아니라

젊은

아가씨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니까… 차라리 방심하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는지도 모르지. 당신과 결혼한 후에도 그랬었고, 유산한 것이 마리사에게 떠다밀렸기 때문이라고 당신이 호소했을 때에도 나는 마리사의 정신상태에 주의하려고 하지 않았어. 어쩌면 무서운 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르지… 당신과 마리사 사이가 나쁜 것은 경쟁심 때문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내가 잘못이었지. 클로이, 그 당시 당신은 나이가 어렸으니까. 하지만 말야, 당신을 본 순간, 완전히 빠져 버린 나는 당신이 아직 어리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혼신청을 했던 거야. 그리고 채어가기라도 하듯 결혼을 한 것은 사랑스러운 당신을 딴 남자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어. 무리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 반드시 내 사랑을 이해해 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 레온은 클로이의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클로이에겐 레온의 고백이 뜻밖이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게 보이던 레온에게 이처럼 나약한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나 홀로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레온도 역시 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했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당신이 병원에서 빠져나와 영국으로 돌아가 버렸을 때, 나는 당신의 냉혹한 처사가 원망스러웠지. 그러나 나 자신이 몹시 한심스러웠어. 당장 당신의 뒤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어 … 그러나 오랫동안 당신을 그리워한 나머지 결국은 체면이나 자존심도 버린 채 당신을 데려오기로 결심했던 거야. 데릭이라는 청년에게는 차마 못할 짓을 시키고 말았지만,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어. 나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당신을 다시 데려오고 싶었어. 당신이 꼭 필요했던 거야." 클로이의 어깨를 껴안고 있던 레온의 팔에 힘이 주어졌다. "클로이는 내 아이의 생명을 빼앗은 여자다. 그러니까 나에겐 그 보상을 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다. 강제로 당신을 데리고 오는 행위가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해 항상 그런 말을 되뇌이곤 했지. 하지만 결국 당신과 함께 있고 싶었던 것뿐이야. 당신이 나하고 결혼한 것이 재산을 탐냈기 때문이라는 말을 마리사한테 들었을 때의 충격은 몹시 컸어. 한동안은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지. 나나 당신이나 마리사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갔지만 서로의 마음속을 털어놓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라…" 레온은 차근차근 얘기를 계속해 나갔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는 마리사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었던 것 같아. 당신이 처음으로 영국으로 돌아갔을 때, 마리사는 한동안 이상하게 마음이 들떠 있었지만, 차츰차츰

얌전해지기 시작했지.

차분하게

생활하는

태도를

보곤

나는

마리사에게

어울리는 착실한 신랑감을 찾아 결혼시키려고 마음먹었지. 마리사는 당신에 대한 질투 때문에 흥분해 있을 뿐이라고 내 멋대로 해석하고는 니코스를 마리사와 만나보게 했던 거야. 니코스는 마음씨가 곱고 아주 성실한 청년이니까 말야. 하지만 마리사는 조금도 결혼을 원하고 있지 않았어. 나는 결국 마리사가 싫어하는 짓을 하고 만 셈이지. 에오스에서 마리사의 정상을 벗어난 행동을 당신도 기억하고 있겠지? 그때부터 나는 마리사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하기 시작했지. 그래서 그애가 산책하러 나간 후 행방불명이 됐다는 보고를 받자 즉시 에오스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던 거야… 그때 나는 이미 마리사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냉정히 인정하고 있었어. 하지만 설마 나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당신에게 그럴 듯하게 꾸며댔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 당신하고 요트를 타고 에오스를 떠나기 전에 나는 마리사에게 당신하고 다시 시작해 볼 작정이라는 얘기를 했었지. 그애는 이러쿵저러쿵 온갖 트집을 잡았지만, 그때 내 눈에는 약간 흥분해 있는 정도로밖엔 보이지 않았어. 그래서 일단 안심을 하고 나갔던 거야. 행방불명이 됐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도 단순한 사고인 줄만 알았어. 그러나 벼랑 중간 바위에 걸려 있는 그애의 재킷을 본 순간, 나는 문득 마리사가 일부러 몸을 숨겼다는 걸 깨달았지. 누구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에 걸려 있었으니까. 그 사건은 나의 관심과


주의를 당신으로부터 자기에게 돌리도록 하기 위해 마리사가 꾸며낸 연극이었어. 하지만 클로이, 그런 줄 알면서도 그애가 왜 그런 짓까지 하게 됐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어." 레온은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또다시 영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나는 마리사의 광기에 실컷 휘둘리고 난 직후여서 그애의 병적인 정신상태를 당신에게 설명해 줄 기력이 없었어. 게다가 당신의 외곬으로만 생각하는 표정을 보니까 억지로 만류해서는 안 될 것 같았지. 그래서 조용히 당신을

떠내보냈지만,

그후의

나의

생활은

암울하기만

했어.

그러나

크리티코스

부인에게서 당신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더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정말 감격했지. 한데 즉시 런던으로 가서 당신을 데리고 돌아오겠다고 마리사한테 말한 순간, 마리사는 갑자기 광란상태가 돼버렸어. 그런 짓을 하면 자살해 버리겠다고 큰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어. 너무도 심하게 발작하는 통에 나는 닥터 리바노스에게 전화를 걸어 그와 의논을 했지. 닥터 리바노스는 상당히 심한 정신장애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고는 지금 당장에라도 입원시켜 검사를 받도록 하라고 진지하게 권하는 것이었어. 나는 마리사를 구슬러 거의 속이다시피 해서 병원으로 데리고 갔지. 그러나 그때 급한 일 때문에 아테네를 잠시 비운 사이에 마리사는 간호원도 모르게 살짝 병원을 빠져나갔던 거야. 그리고는 병원 문 앞에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던 차에 치여 그만… 어쩌면 내게 말한 대로 자살하려고 했는지도 모르지 …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는 이미 위독한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가엾게도 소생할 가망이 없었어. 아마 그애도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때 마리사는 내 손을 꼭 잡으면서 모든 걸 솔직하게 고백하더군. 당신을 층계에서 떼밀어 유산시킨 일이며 마치 자기와 내가 특별한 관계가 있는 듯이 당신에게 얘기한 것까지… 나에게는 당신이 나와 결혼한 것을 재산이 목적이었다고 말했고, 당신에겐 내가 당신과 결혼한 이유가 오빠와 배다른 누이동생 사이의 금지된 사랑을 감추기 위한 짓이었다고 말한 모양이더군. 대단한 지능범이야. 하지만 그런 말에 감쪽같이 걸려들다니, 자존심만 내세워 당신에게 마음속을 털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지경까지 이른 거야. 더구나 아이를 가진 당신을 질투한 나머지 층계에서 떠밀었다는 고백은 큰 충격이었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한

짓이었다고

마리사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하소연했지만,

사랑이라니… 엄청난 착각이야. 확실히 나는 마리사를 사랑하고 있었지. 그러나 그것은 오빠의 입장에서 누이동생을 사랑했을 뿐이야. 마리사는 사랑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야. 무서운 병이 그렇게 하도록 만든 거지." 레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이 나를 다시 데리고 온 것은 대를 이을 아들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마리사는 내게 몇 번이나 말했죠. 당신한테서도 그런 말을 들었고 …

오히려 나는 당신이

마리사와의 관계를 청산하겠다고 맹세해 주길 바랐어요. 하지만 용기가 없어서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클로이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클로이, 물론 아이는 갖고 싶었어.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의 결정(結晶)을…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오직 클로이 당신이야. 아이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아이만 낳는다면 당신이 내 곁을 떠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레온은 양손으로 살그머니 클로이의 뺨을 감쌌다. "당신을 아테네 공항에 내보냈을 때의 내 괴로운 심정을 당신은 짐작이나 했겠어? 아무 말도 없이 당신을 떠나보내는 게 얼마나 괴로왔는지… 클로이, 이젠 이해해 줄 수 있겠지?" 클로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 마리사는 절대로 자살한 게 아녜요. 불행히도 사고를 당한 거예요. 가엾게도… 우리 함께 마리사의 명복을 빌어 줘요. 당신에 대한 사랑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던 마리사가 아니라 당신이 진심으로 사랑한, 우리들의 누이동생 마리사를 언제까지나 잊지 않기로 해요." "클로이, 나와 함께 그리스에 돌아가 주겠어?" "가고말고요. 안 된다고 해도 따라갈 거예요. 사실은 그 동안 줄곧 당신이 데리러 와주길 기다리고 있었어요." 클로이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고마와, 클로이. 당신은 정말 사랑스런 여자야.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우리를 괴롭혔던 오해와 불안도 이젠 모두 과거의 일이야. 내일은 당신과 나를 위해 틀림없이 빛나는 새벽이 찾아올 거야. 클로이, 우리들의 영원한 사랑을 비춰 줄 새벽이…!" 레온과 클로이는 힘차게 포옹한 채, 뜨거운 사랑이 어린 키스를 하고 있었다. < 끝 >

c101  

아침에, 클로이는 해변가에서 아름다운 얼굴을 불안한 듯 찌푸리고 있었다. 이 섬에서 데릭과는 지난 일 년 반 동안 같은 광고회사에서 근무해 왔지만 그는 단 한번도 예의에 매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을 때는 서로의 속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느껴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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