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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천주교사와 심스테파노의 순교 글쓴이/장정룡(세례자 요한)

(1) 강릉천주교사에 있어서 순교자 심스테파노는 기억해야 할 중요한 인물이다. 1819년생으로 추정되는 심스테파노의 고향인 강릉시 사천면 석교리 구라미 마을은 옛날부터 청송 심씨 문중이 살았던 전형적인 사족의 고향이다. 이곳의 심스테파노는 한학에 능통한 선비로서 일찍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문중의 반대를 무릅쓰고 홀로 열심히 수계하였다고 한다. 그는 1868년(무진년) 5월 5일 마을 친구들과 함께 동구 밖 정자에서 봄놀이를 겸한 시회(詩 會)를 갔다가 다른 사람의 밀고로 포도청 포졸에게 잡혀 강릉감영으로 끌려가 옥에 갇혔다 가 목숨을 잃었다고 전한다. 바우길을 만든 강릉 출신 이순원 소설가는 명주군왕릉에서 송 양초등학교까지 약 11km의 이 길을 ‘심스테파노의 길’이라 명명하여 순교자를 추모하는 길 벗 나그네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순원 소설가는 "바우길 코스를 탐사하며 어느 산속에서 한 순간 시간이 멎은 듯 너무도 깊고 너무도 아늑한, 신비한 느낌의 마을을 발견했다"며 " 여러 사람에게 묻고 자료를 뒤지던 중 심스테파노가 살았던 골아우라는 사실을 알고 길 이 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심스테파노의 길은 고래바위 즉 경암(鯨巖)을 중심으로 펼쳐지는데 이것은 ‘고래암’이 줄어 ‘골암’이 된 것이다. 사실상 골아위와 굴아위 는 다른 지역이다. ‘굴아위’라 표기한 곳은 굴바위의 ‘ㅂ'이 탈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한 이 지역이 예로부터 ‘굴암리’로 불렸는데 이것이 연철되어 굴아미또는 굴아위 등으로 발 음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현재 강릉시 사천면 석교2리로 마을 전체를 ‘구라미’라 부르는 데, 필자가 확인한 바 있는 마을의 옛 성황당축문 등의 기록에도 ‘굴암(窟巖)’이라 적혀 있 다. 이곳의 심스테파노는 기록상 강릉에서 유일하게 순교한 인물로 나타난다. 1866년 병인교 난 때 천주교 대탄압과 관련하여 치명한 877명을 기록한 『치명일기』(뮈델, 민효식 주교 지 음, 1895년 발간)의 심스테파노 기록을 현대어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강릉 심스테파노> 본데 강릉 굴아위에 살더니 무진 오월에 경포에게 잡혀 지금 풍수원 사는 최바오로와 함께 갇히였다가 치명하니 나이는 이십구 세 된 줄을 알되 치명한 곳은 자세히 모르노 라. 이보다 앞서 1888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백 주교가 프와넬(박도행)신부에게 조선 순 교자의 행적을 조사하라고 지시함으로써 작성된『박순집 증언집』이 나왔다. 이 증언집에도 심스테파노에 대한 기록이 좀 더 자세하게 기술되었다. 치명될 당시의 나이 등이 치명일기 와 다르나 전체 내용은 심스테파노의 아들 바오로의 증언으로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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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沈)스테파노는 강원도 강릉 굴아위에 살더니, 무진(戊辰, 1868)년 오월 초오일 에 본동 외인 친구들이 정자에 모여 청좌(請坐)함에, 이 안토니오와 더불어 노는 가운 데에 참여하였더니, 뜻밖에 경교(京校) 앞잡이로 다니는 놈이 여러 교졸(校卒)을 데리 고 와서, “저 사람이 안토니오라.” 한즉 포교가 묻되 “안토니 주인이 누구냐?”하니, 스테파노가 나서며 “내가 주인이라.”하니 교졸이 일시에 달려들어 결박(結縛)하려 한 즉 스테파노가 말하되 “우리는 결박하지 아니하여도 도망할 사람이 아니니, 내 집으로 들어가야 남에게 진 빚과 상관되는 일을 처결한 후 적몰(籍沒)하라.”하고 집에 돌아와 채주(債主)에게 진 빚은 보환(報還)한 후, 가산을 다 적몰하고 스테파노를 잡아 데리 고 포청에 가서 갇히였더니, 하루는 유직(有職)의 말이 “스테파노는 오늘 밤에 죽을 것이니, 옷을 바꾸어 달라.”하니 또한 희희낙락(喜喜樂樂)하며, 웃음으로 지내니, 활 달한 거동(擧動)이 옥중에 뛰어나니, 과연 그 날 치사(致死)하니 나이 사십구세더라. 이 사정은 그때 옥중에 같이 있던 최바오로가 알고, 살기는 원주 풍수원이요, 스테파 노의 아들 바오로는 충돌람이 사니, 이런 사정을 자세히 말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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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권의 책자를 통해서 심스테파노의 순교는 명확한 사실이며 그에 따른 가경자, 성인 등의 조처도 뒤따라야 하겠다. 다만 심스테파노의 실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두 기록에 달리 나타나는 치명 시기가 29세 또는 49세로 다른 바, 이안토니오의 대부였고, 감옥에 갇혀서 도 흔들림 없었던 모습을 상기할 때 50세 지천명(知天命: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박순집 증언록이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되어 49세로 추정한다. 특히 『박순집 증언록』에 나타난 심스테파노의 행적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 긴 참되고 정직한 천주교도였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로 자신이 이 안토니오의 주인이라고 밝힌 것이다. 천주교 신앙으로 맺어진 이 안토니오의 대부였음을 교졸들의 추 궁에 스스로 주저없이 그리고 두려움없이 떳떳하게 밝힌 것이다. 그것은 곧 죽음을 불사한 순교자의 자세임을 일러 무엇하겠는가? “내가 주인이다.”라고 밝힌 것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두 번째는 자신이 진 빚을 갚고 나서야 스스로 감옥에 갇혔다는 것이다. 더욱이 불가항력 의 상황에서, 단지 서학 즉 천주학을 믿는 신자라는 사실 때문에 죽음을 직면하고 더 나아 가 자신의 재산까지 몰수당할 것이 명백하기에 심스테파노는 이웃에게 진 빚을 철저하게 갚았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 안토니오와 함께 “우리는 결박하지 않아도 도망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 신앙인의 정 직하고 의연한 자세는 타의 귀감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리고 채주에게 빚을 다 갚고 난 다음에 스스로 붙잡혀간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심스테파노가 참된 순교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학을 믿어 하느님 나라로 불려 올라감을 기뻐한 것이다. 심스테파노는 강릉관아인 임영관 칠사당 감옥에 갇혀 있었어도 그리고 당 일날 심문도 없이 참수형을 당할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있음에도 괴로워하거나 위축되고 신세를 한탄하기보다 오히려 웃음으로 지내고 활달한 거동을 보임으로써 하느님 말씀에 순 종한 순교자의 길을 따라나섰다는 점이다. 병인박해 때 칠사당 감옥에서는 심문도 없이 목이 잘리는 참수형으로 많은 교우들이 순교 했다고 전한다. 기록은 없으나 심스테파노와 함께 대자 이안토니오, 아들 심바오로, 그리고 최바오로가 함께 갇혔으므로 이들도 죽음을 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잔혹한 박해의 죽음 앞에서,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하느님과 타인을 탓하지 않으면서 즐겁게 받아들인 순교자의 삶을 우리는 눈앞에서 목도하고 있다. 이러한 심스테파노의 행적은 함께 갇혔던 최바오로 가 목도하고 증언을 남겼으며, 그의 아들 심바오로가 이런 사정을 말한 것이기에 조금도 거짓없는 일이라 하겠다. 강릉 순교자 심스테파노는 잔혹한 칼날 앞에서 그리고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떳떳하게 받아들인 용기는 신앙인이라 하여도 누구나 닮긴 힘든 일이다. 또한 힘든 선교활 동으로 발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채무를 죽음에 앞서 가산을 다 팔아서 갚았다. 그는 자신이 결코 다시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을 인식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바르게 산 신앙인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즐겁게 죽음의 길을,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 라 나섰다. 자신을 가두고 채찍과 칼날로 죽음으로 몰아간 그들을 오히려 예수님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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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받아 그들을 진정으로 용서하였다. 죽음 앞에서도 나보다 남을 생각하고 이웃을 사랑했 으며, 하느님의 품 안에서 기쁨으로 죽음을 받아들여 우리나라 천주학이 중단되지 않고, 자 신의 고향 강릉지역에서도 더욱 굳세게 전파될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이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은 이러한 심스테파노의 삶을 따르고 그러한 순교열정을 본받아 주님의 말씀을 전하 고, 선교의 사명과 의무를 다하고 있다.

(2) 1868년 음력 5월 초5일 단옷날 강릉의 순교자 심스테파노(1819~1868)는 그렇게 49 세의 목숨을 버렸다. 그는 갖은 박해와 굶주림의 칼날아래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말 씀을 실천한 복음의 사도였다. 심스테파노의 고향인 강릉 임당동 성당에서는 ‘복음의 사도 가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을 미사 때마다 낭송한다. 만민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신 주님, 말씀의 빛으로 이 땅을 비추시고, 순교자의 신앙위에 한국 교회를 세워주셨으니 감사드립니다. 주님, 간구하오니, 굶주림과 박해의 칼날아래서도, 복음을 전파하신 순교 선열들의 열정을 본받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불타오르게 하시어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게 하소서. 그러나 저희는 기도와 희생과 열정이 부족하여 우리 이웃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의 사명과 의무를 소홀히 하였사오니 예비교우 입교와 냉담교우 모심 선교로 거듭나게 하소서 살겠나이다/짝짓겠나이다/전하겠나이다/함께하겠나이다 기도하겠나이다/준비하겠나이다/대화방문하겠나이다/모시겠나이다 그리하여 강릉시내에는 주님의 말씀이 메아리치게 하소서 ○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한국의 모든 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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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당 주보 성 골롬바노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바우길 홈페이지에 소개된 내용에 의하면 “심스테파노는 청송 심씨 심희경의 아들이며 다 산 정약용의 손자로서 삼척부사를 역임한 정대무(丁大懋)의 사위였다는 설이 있다.” 하였 다. 또한 “증언에는 굴아위로 나와 있고 실제 마을 이름은 골아우여서 혹시 다른 동네가 아닐까…그의 증언록에 심스테파노는 굴아위로 몸을 피해 오기 전엔 먼저 ‘주무’라는 마을에 살았다고 하는데…”라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심스테파노길로 비정(比 定)한 ‘골아우’와 옛 문헌에 나오는 ‘굴아위’가 다르게 표기되어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들 두 동네가 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필자의 관견(管見)으로 ‘골아위’와 ‘굴아위’는 다른 지명으 로 판단된다. ‘굴아위’는 ‘굴바위’이며 한자로 쓰면 ‘굴암(窟巖)’이다. ‘굴암’의 바위 암(巖)자는 우리말 ‘바위’로서 순경음 비읍(ㅸ)으로 표기되어 ‘굴위→굴바위→굴아위’로 음운 약화와 탈락현 상에 의해 ‘굴아위’로 바뀐 것이다. 즉 ‘ㅸ’→‘오/우’로 약화되어져 결국 ‘ㅸ’ 탈락 현상을 보 인 것이다. 예컨대 지리산 ‘피밭골’이 ‘피앗골’로 발음되는 현상이라든가 ‘추석’의 옛말인 ‘가 배(嘉俳)’가 ‘’→‘위’→‘가위’로 바뀌어 ‘ㅸ’탈락을 보인 것과 같은 현상이다. 따라서 ‘굴아위’는 ‘굴바위’가 음운탈락현상을 보인 것이다. 요컨대 ‘굴아위’는 ‘골바위’[경암(鯨巖): 고래바위]가 아니다.

‘주무’는 현재의 구라미 바로 위의 ‘점상’마을로서 위를 칭하는 상

(上)이므로 일반적으로 지역민들은 ‘점우’라고 불렀다. 이것이 ‘저무’→‘주무’ 또는 ‘즈므’로 바뀌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곳에 거주하던 사람이 쓴『점상일기(店上日記)』라는 것처럼 이곳은 대전점(大田店) 한밭마을 위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렇게 불리던 ‘즈므’는 일제에 한자어로 바뀌면서 도울 조(助)와 묏산(山)자로 바꾸어 ‘조산(助山)’ 즉 ‘조뫼’가 되었다. ‘즈므’ 또는 ‘주무’가 유사발음인 ‘저무는 마을’에서 ‘즈므’가 된 것으로 보기 어렵 다. 한편으로 ‘즈므’의 옆마을 ‘구라미’는 ‘굴암’ 끝에 마을 리(里)자가 붙어서 ‘굴암리(窟巖 里)’가 되었는데 이것이 발음상 연철되어 ‘굴아미’→‘구라미’가 되었을 것으로도 추정해볼 수 있다. 일설에는 구라미를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신라가 경계를 이루었는데, 서로 원수처럼 싸웠다고 하여 ‘원수 구(仇)’자를 써서 ‘구라미(仇羅味)’라 불렀다고도 구전된다. 현지조사 결과와 문헌을 분석한 결과 마치 일본어처럼 불리는 구라미 지명유래는 다음 세 가지로 분석된다. 첫째는 지형지물설이다. 이 마을에는 병자년 포락인 1936년 이전까지 큰 바위굴이 있었으나 폭우로 바위가 무너지고 굴도 없어졌다고 한다. 바우굴이 있는 동네 이므로 ‘굴암리’라고 명명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우므로 이것을 ‘구 라미’라 불렀다는 것이다. 현재의 구라미 지명은 ‘굴바위’가 변한 것으로 분석된다. 즉 『치 명일기』 등 옛 조선시대 문헌에 이곳 지명을 ‘굴아위’로 기록했는데 이는 ‘굴바위’가 음운탈 락현상으로서 변한 것이며, 이것이 발음상 연철되어 ‘구라미’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는 풍수지리설이다. 이 마을의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면 마을이 마치 둥글게 파진 굴 안에 있는 듯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옛 노인들은 ‘굴안이’라 부른 것이 ‘구라미’가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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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것이다. 또한 마을 남서쪽으로 뻗은 줄기가 구라미내를 막게 되자 산줄기 밑으로 물 이 흐를 수 있도록 굴이 뚫렸는데 그 모습이 굴 안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되어 ‘굴 안이’라 했으며, ‘구라미’는 ‘굴안이’가 변형되어 생긴 말로 ‘구라’는 굴의 변형이고, ‘미’는 ‘이’의 변형이라 한다. 세 번째, 성씨유래설로서 예전에 이 마을에 나씨 두 집안이 살았는데, 처음에는 사이좋게 지냈으나 나중에는 서로 원수처럼 지냈다고 하여 원수 구(仇)자를 써서 ‘구라미’라고 불렀 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현지 주민들은 마을정서상 수긍하기 어려운 견해라고 하였다. 네 번째는 역사구전설로 이 지역이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이므로 두 나라가 서로 원수처럼 싸웠던 ‘미’(내)라 하여 ‘구라미’라 부르던 것이 지금까지 같은 발음으로 전승되었다고 전한 다. 이에 대하여 더 부연하면, 다산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연곡천 상류에 위치한 진고 개 일대의 ‘니하(泥河)’를 신라와 발해의 경계로도 보았다. 조선시대 실학자 유득공은 『발 해고』에서 니하(泥河)를 평양의 패수로 보고 대동강이 발해와 신라의 국경선으로 언급하였 으나, 구전으로 전승되는 지명유래로 강릉의 대관령에 쌓은 대공산성(大公山城)은 대씨들 이 축조했다는 설과 함께 양양과 인접한 소금강 연곡천이 발해와 신라의 경계였다는 이야 기도 전한다. 동해안의 속초, 양양, 강릉지역은 발해가 남하하여 남쪽 한계권역을 차지한 영토였다고도 보는데 서병국 교수는 신라와 경계를 니하를 동해안 연곡천 진고개, 즉 ‘진 내’로 보기도 하였다. ‘니하-강릉니천수설’의 대표적인 주장자는 정약용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아방강역고』권2 발해고에서 발해남변에 위치한 니하를 강릉북쪽의 니천수 라고 하면서 오늘의 강릉북쪽 3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연곡천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발해 가 양양이북의 땅을 차지한 시기는 713년부터 748년 사이에 해당한다. 정약용이 713년 부터 이 지역이 발해에 속하였다고 본 것은 이때부터 이 지역에 대한 발해의 지배통치가 더욱 강화된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본다. 강릉일대는 삼국시대에 있어서 신라와 고구려, 발 해의 국경선이 있었다. 따라서 지역명을 통해서 역사적 사실을 상고해 볼 수 있는바, ‘구라 미’는 상징적인 역사지명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골아위는 강릉시 성산면 위촌2리에 있는데 고래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경암(鯨 巖)이므로 ‘굴암’과는 다른 지명이 확인된다. 고래바위가 구라미로 바뀌어서 불릴 가능성은 음운상 불가능하다. 골바위와 굴바위는 어근(語根) 자체가 다른 것이며 음운변화가 있다고 해도 ‘골’과 ‘굴’은 전혀 다른 발음전이가 이루어진다. 강릉 임당동 성당(율리오 김현준 주임신부)에서는 심스테파노의 길을 걷는 행사를 가지고 있다. 강릉임당동 성당소식지『헌소매, 사람들의 이야기 -변함없는 헌신, 생각과 말이 통하 는 소통, 존경하고 존경받을 수 있는 매력』제2011-21호, 2011년 5월 29일자에 의하면 “심스테파노의 길 걷기(제2회) 일시:2011년 6월 11일 오전 9시~오후 4시, 출발:성당에 서

9시(버스)출발→명주군왕릉(도보)→골(솔)바위→송양초등학교→성당(버스)

작년

1회

2010년 10월 16일(토)~올해 2회로 합니다. 심스테파노는 병인박해(1866년)때 순교하 신 분으로 『치명일기』에 나오는 강릉 유일의 순교자이며, 강릉바우길의 제10구간이 심스테 파노의 길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임당동 성당 김현준 신부님은 강릉순교자 심스테파노의 행적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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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면 백년되는 강릉임당동 성당 백년사를 널리 알리고 임당동 성당이 그 중심이 되 도록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바라건대 순교자 심스테파노의 삶을 우리 모두 가슴 깊 이 새겨 모든 신자에게 귀감이 되게 하고, 순교자의 신앙위에 세워진 강릉 천주교성당과 순교선열의 열정을 모두가 본받도록 했으면 한다.

(3) 심스테파노(1819~1868)는 병인교난(1866~1878) 초기 때 치명한 것으로 기록에는 나타나므로 성씨는 분명하나 본명이 ‘재식’인지 확실치 않다. 심스테파노가 치명한 때의 연 세가 『치명일기』에 29세이나 여러 상황을 종합하여『박순집 증언록』을 따라서 49세로 확정 할 경우 생몰연대를 역으로 환산하면 그는 1819년생일 것이다. 정대무는〈농가월령가〉를 지은 운포 정학유(1786~1855)의 아들로서 삼척부사를 재임할 당시에 흥학비를 세운 인 물이며, 장지연의 『대한강역고』(1903)에 발문을 썼다. 이 책은 정대무의 할아버지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쓴 『아방강역고』(1811)를 증보한 것으로 정대무가 발문을 쓴 것으 로 그러한 이유였다고 생각된다. 부친 정재원 모친 해남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다산 정약용은 큰 형 정약전, 둘째 형 정약 종에 이어 넷째로 태어났다. 주지하듯이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삼형제에 의해 천주교 신 봉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정약용의 손자이자 심스테파노와 연관된 정대무(丁大懋)의 자는 자원(子園)으로 1824년생이며, 천주교도였으며 박해를 받아 1890년 이후에 치명한 것으 로 추정된다. 그는 1867년 북청현감, 1888년 신천군수를 역임하고 1888년 8월에 삼척 부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10월 부임할 때까지 약 14개월 동안 삼척부사직을 지냈다.『삼척시 지』에 의하면 “정대무는 1888년 8월에 신천(信川)군수에서 부임하고, 1890년 10월에 순안(順安)현령으로 전출. 사직단 중수, 객사중수, 향교중수, 지진이 있었다. 정대무 부사 의 흥학비와 선정비를 세웠다.”고 하였다. 정대무(1824~?)와 심스테파노(1819~1868) 는 태어난 해로 보면 불과 5세밖에 차이나지 않고 심스테파노가 연상이므로 정대무의 사위 를 심스테파노로 보기 어렵다. 다만 심스테파노의 본명이 심재식이며, 그의 부친이 심희경 일 것으로 바위길 홈페이지에서 추정한 것에 대해서는 청송 심씨 가승을 더 찾아보아야 확 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의 관견은 심희경의 사위가 정대무 삼척부사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정대무와 심스테파노로 추정되는 인물인 심재식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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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차이가 크게 나지 않으므로 비슷한 연령으로 신앙적 교류가 가능했을 것이다. 추정컨대 ‘정약용→정학유→정대무’로 이어지는 천주교 집안과 '심희경→심재식'으로 이어 지는 두 사돈지간의 신앙적 만남이 그려진다. 삼척부사 정대무와 강릉 굴암에 살았던 순교 자 심스테파노는 원산에서 양양, 강릉, 삼척지역 동해안으로 이어지는 천주교 유입의 신앙 적 루트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을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 있으며, 심스테파노와 함께 정대 무도 병인교난 때 박해당하여 치명(致命)한 인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에 따라 강릉천주교 전파사나 이를 확대하여 한국천주교사에 있어서 강릉지역이 갖는 의미를 하느님의 깨달음을 몸소 실천한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도 허균과 순교자 심스테파 노를 통해 더욱 강조할 수 있으며 동해안을 통해서 전파된 천주교의 길을 다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강릉지역 천주교 전파를 중심으로 강원도 백두대간과 동해안루 트를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관동대 방동인 교수는 심스테파노에 대하여 역 사적 측면에서 일찍이 조명하고 그 순교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역사적인 사실이 시대가 바뀌면 그 해석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것은 역사이 론이다. 그러므로 1866년에 있었던 병인교난은 ‘국가가 금하는 천주교’를 믿었기 때문 에 생긴 사건이었다.…저 옛날 진실한 신앙을 위해 치명까지 서슴지 않았던 그들은 그 교단으로부터 순교자라는 명칭을 부여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순 교자가 강릉 굴아위에 있었다는 것이 오늘에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성이 강한 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신앙의 필요와 또 그 신앙 속에 빠져들 수 있었던 요인 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이해가 오히려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리하여 의미 를 부여한다면 “깨끗한 신앙, 절신한 나의 신심은 목숨과 같다”라고 하는 절대신에게 의지하는 그 마음이 가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신실한 신앙 인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추하게, 그리고 욕되게 행동한 것이 아니고, 모범되게 순교했 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주평국의 〈푸른 동해에 실린 순교의 넋〉에는 강릉출신 심스테파노의 순교와 연관하여 강 릉동헌(칠사당․객사문)의 옛 관아 칠사당에서 행해졌던 박해사를 소개하고 있다. 문화재청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강릉 임당동 성당은 강릉 천주교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고구려 시대부터 도시가 형성돼 '하시랑' '하슬라(何瑟羅)'로 불려 왔던 고도 강릉에 도 어김없이 순교의 보혈(寶血)이 서려 있다. 바로 강릉 시청 옆에 있는 '칠사당(七事 堂)'과 시청 뒤편의 '임영관 객사문(臨瀛館客舍門)'이 그곳이다. 또한 객사문 길 건너 편에는 고전미와 현대미가 절묘하게 조화된 임당동 성당이 자리하고 있어 유서 깊은 교회의 건축 양식을 감상할 수 있다. 강원도 지방, 특히 춘천 교구내 영동 지역의 순교 기록을 찾기란 문헌상 애로점이 많 다. 강릉 지역의 순교자로 교회 공식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 분은 『치명일기』에 기록돼 있는 심 스테파노 한 분뿐이다.…교회 전통 사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지금까지 구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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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 오는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병인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강릉 칠사당과 임영관에 서 심문을 받고 순교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칠사당과 객사문은 강릉 시청 바로 옆 과 뒤편에 있기 때문에 찾기 쉽다. 영동 고속 국도를 타고 강릉에 진입해 곧장 들어오 면 왼편에 강릉 시청과 함께 칠사당이 보인다.…교회 사학자들은 여러 순교자 증언록을 인용, 이곳 칠사당에서 병인박해 때 심문도 없이 목이 잘리는 참수형으로 많은 교우들 이 순교했다고 말하고 있다. 칠사당 동헌 마당 한가운데에는 체포된 천주교인들을 묶 어 갖은 고문을 가하며 심문했던 것으로 전하는 고목이 아직도 푸르름을 간직한 채 남 아 있다.… 칠사당과 객사문 인근에 위치한 임당동 성당은 고전미와 현대미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수려한 교회 건축물로 정평이 나 있는 성당이어서 강릉을 찾으면 꼭 한번 방문, 전례에 참례할 것을 권한다. 중국인 건축가 가 요셉이 설계해 1954년 에 착공, 1955년에 완공된 현재의 임당동 성당은 고딕 양식을 변형한 장방형 건물로 정면 중앙부 종탑과 성당 외곽이 원형 그대로 완벽하게 보존돼 있어 1950년대 성당 건축의 전형을 감상할 수 있다. 〈금광리 공소와 강릉부관아〉라는 글에서는 영동지역 신자들의 증언을 수록하고 있다. 이 가운데 영동지역 순교자로 심스테파노를 언급하고 있다. 조선시대 강릉부의 관아인 칠사당 은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춘천교구 내 영동지역의 순교기록을 찾기란 문헌상 애로점이 많다. 강릉지역의 순교 자로 교화 공식문헌에 나타나고 있는 분은 『치명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심스테파노 한 분이다.…당시에는 관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심문했으므로, 교회 전통사학자들의 연구 결과 지금까지 구전으로 전해오는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병인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강릉부 관아인 칠사당과 임영관에서 심문을 받고 순교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교회 사학자들은 여러 순교자 증언록을 인용, 이곳 칠사당에서 병인박해 때 심문도 없이 목 이 잘리는 참수형으로 많은 교우들이 순교했다고 말하고 있다. 강릉부 관아 마당 한 가운데에는 체포된 천주교인들을 묶어 갖은 고문을 가하며 심문했던 것으로 전하는 고 목이 아직도 푸르름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장익 주교,『우리 선조 우리 터전』춘천교구 사목국, 강원교회사 춘천연구소, 2010, 60~61쪽) 심스테파노의 순교당시를 유추할 수 있는 기록으로 병인교난의 참혹함은 박제경(朴齊絅) 의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에 다음과 같이 보여준다. 이때에 이르러 나라 안을 크게 수색하니, 포승에 묶여 끌려가는 모습이 길가에서 보 이는 정도였고, 포도청 감옥이 만원이 되어 재결(裁決)할 수도 없었다. 그 중에는 아 낙네, 어린아이들과 같이 철없는 사람이 많았다. 포장(捕將)이 민망하게 여겨 배교(背 敎)를 하도록 타일러도 신자들은 듣지 않았다. 이에 형장(刑杖)으로 때려서 기어코 회 개시키고자 하니, 피부가 낭자하게 터지고 피가 포도청 마루 위에까지 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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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일 때마다 “교(敎) 배반하겠는가?”하고 물으면, 어린아이들조차도 그 부모를 따라서 천당에 오르기를 원하였다. 대원군이 듣고서 다 죽이도록 명하고, 어린아이들만은 용서 하였다. 시체를 수구문(水口門)밖에 산더미처럼 쌓아버리니 백성들이 벌벌떨며 더욱더 위령(威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 서적을 중국에서 수입하고 생애의 마지막 무렵 천주교도의 삶을 살았던 허균(1569~1618)과 병인박해의 순교자 강릉출신 심스테파노를 중심으로 본다면 강릉은 우리나라 천주교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깨어있는 자’라는 뜻으 로 ‘성옹(惺翁)’이라는 호를 사용한 허균은 강릉고향으로 돌아와 천공(天公) 즉 하느님을 믿으며 살고 싶다고 고백하였다. 특히 그가 경포호수 옆의 옛집에 만권 책을 열람할 수 있 는 도서관을 짓고 쓴〈호서장서각기〉에 따르면 “하슬라 옛터에 무지개빛이 일어 하늘에 빛 나고 달을 찌르니, 틀림없이 기이한 책이 그 아래 있을 것이다.”라고 언급한 것에서도 하 늘에 빛나는 ‘기이한 책’ 이서(異書)는 바로 하느님 말씀을 담은 천주학 서적으로 추정된 다. 성옹이 중국을 다녀오면서 쓴〈을병조천록〉에서 나그네와 같은 인생에서, 모든 것을 접고, 고향 강릉으로 돌아가 하느님을 믿고 살겠다고 결심하였다. 이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 는 신앙인의 참된 삶을 살고자 했음을 표현한 바로 해석된다. 다음은 사회적 약자나 소외 된 자를 위한 삶을 살고자, 홍길동전을 쓰고 스스로 깨우친 자로서 처신하였다. 허균의 애 민사상은 명나라 사신 오명제에게 준 자신의 시에 한글토를 달았음에서도 파악되듯이 배운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배우지 못한 자들 그리고 여성이나 기생, 불우한 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사랑을 베푼 것이다. 그는 백성들이 손쉽게 배우고 익히게 하려는 소리글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한 세종의 애민관을 반영한 한글소설〈홍길동전〉을 썼다. 이러한 허균의 민본사상이 도착한 종착점은 조선시대 중세적 왕권주의에서 벗어나 누구나 꿈꾸었 던 자유로운 율도국과 같은 유토피아 세상이었다. 홍길동전의 율도국과 같이 남녀가 평등 하고, 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으며, 개별적 성정(性情)을 존중받는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었 으며, 그러한 세상은 하느님의 성서적 가르침에 기초한 것이라 믿는다. 이와 같이 깨어서 하느님을 맞이하고 싶어 했던 허균과 연관 짓는다면 강릉천주교 역사는 4백년을 거슬러 올라가며,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던 순교자 심스테파노를 고찰하면 약 150 년의 천주교 전래역사가 이어져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역사학자의 평가와 같이 심스테파노는 이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신실한 신앙인이었으며, 죽음 앞에서도 추하지 않게, 그리고 모범되게 순교한 성인이다. 따라서 순교자 심스테파노를 마땅히 성인의 반열 에 올려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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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스테파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