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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동 29

향동 마을자원조사보고서 역사문화자원과 그 활용을 중심으로 박난봉장군, 순천향교, 옥천서원, 임청대비, 팔마비 순천읍영주택, 게스트하우스

조사자 : 이원기, 생활공동체지원센터


향동 31 01

02 01. 옥천 02. 문화의 거리

향동 마을자원조사의 대해 향교가 있는 동네를 일반적으로 ‘교동’으로 부르는데 순천의 경우에는 ‘향동’으로 부른다. 주민 자치위원회에서는 향(鄕)이라는 한자어를 같은 소리 글자인 향(香)으로도 해석해 ‘역사와 문화 의 향기가 멀리 퍼지는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하여 그동안 다양한 주민자치사업 을 추진해왔다. 향동 주민들은 무엇보다 마을산인 난봉산에서 정화되는 맑은 공기와 옥천의 깨끗함을 큰 자랑 으로 생각한다. 영동과 행동의 주민들은 부자동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반면 시간이 흐 르면서 원도심의 쇠락과 함께 거주 인구의 감소, 주민들의 고령화에 대한 걱정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향동은 여느 마을에 비해 더 많은 마을재생의 기회를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2006년 순천지도

순천시 향동

이는 중앙동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향동, 중앙동 두 동네는 순천의 역사와 문화가 한번 활짝 꽃피웠던 곳으로 그 향기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상권이 발달했던 중앙동과는

1. 기본현황

달리 주거밀집지역이었던 향동은 오늘날에도 살기 좋은 주거 환경을 잘 갖추고 있다.

인 구 수 : 총 5,502명 (남 2,754/여 2,748)

2009년부터는 순천시가 영동과 행동, 금곡동 일부를 문화의 거리로 지정하면서 지역의 문화예

가 구 수 : 2,299세대

술인들이 모여들고 정원박람회를 전후로 공연, 축제가 일상화되었다. 많은 예산과 사람들이 문

면 적 : 18.68㎢ (시 전체의 2.06%)

화의 거리에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옥천이 생태하천으로 재정비 되기도 했다.

행정구역 : 6개 법정동(금곡동, 영동, 행동, 옥천동, 와룡동, 삼거동)

이번 마을자원조사에서는 자체 활성화가 어느정도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되는 문화의 거리에

14통, 69반, 8자연마을

집중하기 보다는 순천향교나 옥천서원과 같은 문화의 거리 인근의 역사문화자원에 다시금 주 목하고 주민자치위원회에 새롭게 유입되는 문화자원보다는 기성의 전통역사문화자원을 어떻

향동주민센터

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화두를 던지고자 했다. 일테면 신/구의 문화의 융합을 기대할 수 있는

주소 : 전라남도 순천시 임청대길 1(옥천동)

마을, 역사자원에 대한 가치를 재인식하고 이를 후대에게도 유용한 자원으로서 어떻게 물려줄

전화 : 061-749-3613 | 팩스 061-749-3173

수 있는가를 함께 고민해보았으면 좋겠다. 문화의 거리에 대해서는 순천시 문화예술과에서 발 행한 문화의 거리 가이드북을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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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월 17일 순천시의 33개동을 16개동(행정운영동)으로 조정(시조례 제174호, 1963.12.18)하면서 용수동(龍水洞), 영옥동(榮玉洞), 행금동(幸金洞)이라 하였으며,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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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2일 행정구역조정에 따라 용수동(와룡동, 삼거동), 영옥동(영동, 옥천동), 행금동(행동, 금곡동)을 통폐합 향동이 되었고, 2005년 1월 1일 행정구역조정에 따른 통반조정에 따라 16개 통을 14개통으로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 삼거동(三巨洞)은 본래 순천군 소안면지역으로서 세 갈래 길이 있으므로 삼거리로 하였는

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2 송학리를 병합하여 삼거리라 해서 순천면에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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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1949년 동제 실시에 따라 용수동(龍水洞) 관할이 되었다.

3 7 8 6 5

3 와룡동(臥龍洞)은 본래 순천군 소안면 지역으로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4

범죽리와 장내리 일부를 병합하여 와룡리라 해서 순천군에 편입되고 동제 실시에 따라 용수동 (龍水洞) 관할이 되었다. 5 옥천동(玉川洞)은 본래 순천군 소안면 지역인데, 1914년 일제의 행정개편으로 장내리 일

1918년 순천지도(위), 2013년 위성사진(아래) 중에서 향동부분

부를 분할해서 옥천이라하여 순천면에 편입되고, 1949년 동제 실시에 따라 영옥동(榮玉洞)의 관활이 되었다. 6 영동(榮洞)은 본래 순천군 소안면 지역인데, 1914년 일제의 행정개편에 따라 서내리, 청수

리, 장내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일본식인 영정(榮町)으로 개칭하고 순천면에 편입시켰다. 그 후 1949년 동명 변경으로 정(町)을 동(洞)으로 고치고 영옥동(榮玉洞)의 관할이 되었다. 7 금곡동(金谷洞)은 본래 순천군 소안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일제의 행정개편으로 청수리

와 장내리의 각 일부를 합하여 금곡리라 해서 순천면에 편입되고 1949년 동제 실시에 따라서 행금동(幸金洞)의 관할이 되었다. 8 행동(幸洞)은 본래 순천군 소안면 지역인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북내리,

청수리, 서내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왜식으로 행정(幸町)이라 하다가 1949년 동명 변경으로 정(町)을 동(洞)으로 고치고 동제 실시에 따라 금곡동(金谷洞)과 합쳐 행금동(幸金洞)의 관할 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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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명유래 및 변천닟


자원명 : 박난봉(朴蘭鳳)전설, 박난봉 장군묘 자원소재 : 금곡동 소재 자원유형 : 마을전설, 역사인물

박난봉은 특출한 영웅의 자태로서 이곳의 군장이 되어서 인제산에서 마을 뒤편 진산에 이르기 까지 성을 축조하고 그곳에 웅거하였다. 죽어서는 인제산의 산신이 되었다.(『강남악부』, 조현 범, 1784)

박난봉전설은 순천지역 인물과 관련된 전설인 김총전설, 박영규전설과 마찬가지로 신화적 성 격을 지니고 있다. 이 전설들은 신격의 유래를 설명하고, 또한 제의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으 로 보아 신화로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이어 『강남악부』에는 인제산성에 대한 이야기와 박난봉 이 아전 이환생의 꿈에 나타나 신당을 짓게 되는 이야기들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신당을 짓게 금곡동 소재에 있는 박영규 장군묘

되기까지의 내력이 길게 기술되어 있다. 인제산성 안에는 정령이 있어 구름 끼고 비오는 날에 는 병사와 말의 행진 소리가 마을 골짜기를 진동하여 마을사람들이 무서워했다고 하며, 이환생 을 통해 짓게 한 신당에 무당이나 승려가 머물지 못하고 떠나는 이유도 정령의 진동에 겁이 나 서였다고 한다. 박난봉이 신비스러운 존재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박난봉에 대한 구전은 지금도 몇 가지가 전한다. “인제산에 용마발터가 있는데, 박장군이 탔던 말의 발자국이다.”라든가, “박장군이 죽도봉에서 인제산까지 말을 타고 휘휘 날아다녔다” 등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그리고 다음에서는 박난봉을 보다 전설적 면모를 지닌 장수로 형상화하 고 있다.

난리 때 장군이 지나갔는디, 장군이 탄 말이 상사면 저쪽으로 넘어오는디, 이 마을에 들어와 갖고 그 말발떼죽이 여기 큰골 가 면 하나 있었고, 이 회관 지은 지가 오륙 년 되었는디, 회관 짓기 전에 바로 화장실 곁에가 하나 있고, 그리고 거기 지내서 죽 두봉 가면 하나가 시방도 있어요. 그런디 말이 죽도봉 건너가는디, 어린애들이 장난침스러 말을 건드러부러서 말이 인자 떨어 져 죽었다. 그래갖고 장군님은 저리 박난봉이라고 금곡동 가면 있습니다, 거리 글로 들어가고. 그런디 감스로 벚꽃나무를 한 가지 끊어갖고 짝 꼽아놈서“요 나무가 살면 내가 산 줄 알고 죽으면 죽은지 알아라.”그랬는디, 살아갔고 시방도 살아 있다는 고려사 열전에 기록된 박영규전

그런 유래가 있는디, 또 그래 가지고 계란을 놔둠시로“요 계란이 며칠 지낸 뒤 닭이 돼가지고 울 것이다. 울었으면 내가 살고 닭이 안 되면 내가 죽을 것이다.”그랬다는디, 지금도 말발떼죽 같은 것을 발견할 수가 있어. (임성래, 「순천시의 구비문학」, 『순천시의 문화유적』, 1992, 298~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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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자원 1


자원명 : 순천향교 자원소재 : 금곡동 182번지 자원유형 : 마을지명유래, 교육기관, 문화재(전라남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27호)

순천향교는 봉화산이 바라보이는 난봉산 자락의 금곡동에 정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읍성과 가까운 야트막한 야산의 가장 높은 곳에 대성전을 두고 그 앞에 명륜당을 둔 전형적인 전학후묘 (前學後廟)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동쪽의 정문을 들어서면 양재를 뒤편에 거느린 명륜당이 있 고, 그 위쪽에는 양무를 앞 편에 둔 대성전이 독립된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문묘와 강학 구역 의 남쪽에는 서재를 경계로 교직사, 풍화루, 문서고 등 부속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명륜당 왼 쪽에는 16개의 비석이 있고, 은행나무 고목 2그루가 있다.

순천향교가 다섯 차례의 이건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세워진 때는 1801년(순조 원년)이다. 이 처럼 읍성 서편에 자리하면서도 다른 곳으로 자주 옮겨 세웠던 주 원인은 옥천의 범람으로 인한 1910년대 순천향교와 옥천동 일대 풍경, 향교 대성전 뒷편의 공터가 공마당이다.

수해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648년(인조 26) 부사 김종일이 향교의 이건을 요청하면서 “서변의 물에 할켜 담장이 헐리고 성전(聖殿)도 그 태반이 기울어지고 있는데 기둥이 나무인지 라 조만간에 무너질 것 같다”고 한 것으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조 때 도사동(홍내 동)으로 옮겨갈 때도 역시 침수로 인한 사태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여건에서도 순천향교는 남원향교와 함께 전라좌도지역에서는 최대 규모의 향교로 발전하였을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강한 유림세력 기반을 갖고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조 선시대 순천지역의 저성(著姓)으로 알려진 옥천 조씨, 경주 정씨, 제주 양씨, 목천 장씨, 양천 허씨, 광산 이씨, 양성 이씨, 상주 박씨 7성(姓) 8문(門)의 유림세력에게 순천의 향권(鄕權)이 좌우되고 있었다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순천향교_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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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자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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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향교 내 건축물 양사재 : 지방교육기관으로 육성했던 곳이다. 정조 때 향교가 도사 홍내동으로 옮겨간 뒤 향중사 림이 구교지(舊校址)에 양사재를 복설(復設)하였다. 그 후 양사재는 사실상 향교조직 속에 포함되 어 순천향교와 더불어 성쇠를 같이하면서 일제 초기까지 그 기능을 유지해온 것으로 보인다.

대성전 : 문묘 구역의 가장 중심 건물로서 중국의 4성과 옛 성현의 위폐를 모시고 있다. 그 앞의 동무와 서무에는 우리나라 18현과 중국의 현철을 모시는데 지금은 대성전 안에 함께 모시고 있 다. 대성전의 건축 면적은 약 37.5평으로서 전남지역에서 정면 5칸을 가진 웅장한 대성전 중 나

순천향교_대성전

순천향교_양사재

순천향교_풍화루

순천향교_정문에서 바라본 명륜당

순천향교_대성전 동문에서 바라본 명륜당

순천향교_명륜당 현판

순천향교_홍살문

순천향교_와삼문

주(43.8평), 화순(36.8평)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문묘 구역에 출입할 때는 정문 옆에 있는 협문 을 이용하는데 동문으로 들어가 서문으로 나와야 한다.

명륜당 : 향교 교육의 중심 시설이며, 강학 구역의 중심이다. 학문을 배우고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에서 명륜당이라고 했다. 명륜당은 강론장일 뿐 아니라 교관의 처소이기에 강학을 위한 넓은 대청과 생활을 위한 온돌방을 두고 있다. 순천 향교 명륜당의 면적은 약 42평으로, 이것은 성균관 명륜당(80평), 나주향교(68평), 경주향교(60평), 청주향교(44평) 다음이다.

풍화루(風化樓) : 향교의 부속건물로 명륜당과 함께 강학공간이다. 이 누각이 어느 시기에 최초 로 건립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1923년에 간행된 『승평속지』에 풍화루에 관한 시 한 수가 전한다. 이로 보아 1900년대 초반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의 건물은 향림사 옆 옛 양사재 안에 있었는데 1957년 순천향교가 중수된 뒤, 1961년에 향교 내로 이전/복원하 였다. 건물구조는 1층 사면의 벽을 막돌과 흙으로 막아버린 2층의 팔작기와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청형 건물이다.

홍살문 : 외삼문으로부터 80여 미터 떨어진 곳에 하마비(下馬碑)와 함께 있다. 신성한 구역임 을 알리는 표지로서 왕도 향교 앞을 행차할 때는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야 했으며, 감사가 군현 을 순방할 때나 수령이 부임할 때는 문묘에 참배했다.

순천향교 내 공적비군 : 금곡동 향교 내에는 근래에 세운 공적비 1기를 제외한 총 14기의 비석이 있다. 이들 14기의 현황을 보면 선정비 3기, 불망비 3기, 흥학비 2기, 기타 2기, 나머지는 비명 판독이 전혀 불가능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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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명 : 옥천서원 자원소재 : 옥천동 139-1번지 자원유형 : 마을지명유래, 교육기관, 문화재(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

옥천서원은 조선초의 5현으로 추앙받으며 사림들에 의해 문묘에 종사되기도 하였던 한훤당 김 굉필을 추모하고자 세운 서원이다. 순천부사 이정이 1564년(명종 19)에 처음 창건하였는데 이 름은 경현당(景賢堂)이라 하였다. 그 후 1568년 사액(임금이 이름을 내린 현판)을 받았는데 전 라도에서 처음이었다. 이 옥천서원의 건립과 사액의 경위는 기대승(1527~1572)이 지은 『경현 당기』와 『천서원기』에 자세히 전한다. 이에 의거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563년 순천부사로 부임한 이정이 김굉필의 유배사적을 탐문하다가 임청대(臨淸臺)에 이르렀 는데, 이 임청대는 김굉필보다 1년여 먼저 순천에 유배되어 왔던 매계(梅溪) 조위가 이름 짓고 그 기문도 지은 것이다. 뒤에 김굉필이 순천에 유배되어 동문이었던 조위와 어울려 이곳에서 함께 교유하며 지냈다. 이에 이정은 김굉필을 추모하는 뜻으로 임청대의 구지에 대를 쌓고 대 의 북쪽에 3칸의 당을 이루어 이를 경현당이라 이름 지었고, 기대승은 퇴계 이황에게 청하여 그 액(額)의 글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향내 유림들이 다시 이정에게 정사를 세워 당을 오래도록 보호할 방도를 마련해달 라고 요청하자 경현당의 우측에 새 터를 마련하고 관전 약간을 주어 민가를 사게 하여 5개월 만 에 완성하게 하였다. 가운데를 당으로 하여 옥천정사라 짓고 좌우로는 동서의 재실을 마련하고 이름을 지도재(志道齋), 의인재(依仁齋)라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이황이 이름 짓고 글을 쓴 것 이다. 이정의 뒤를 이어 1566년 순천부사로 부임한 김계식은 김굉필의 위패가 당내의 좌측 한 편에 치우쳐 있음이 적당치 않다 하여 중앙으로 옮겼고, 1568년에 사림들이 발론하여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옥천’이라는 액호를 받았다. 이후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인해 서원 건물이 소실되자 1604년 순천읍내 유림인 허건, 정지추 등이 주동하여 재화를 모아 중건하였고, 1653 년(효종 4)에는 다시 조시일, 이율 등이 중수하였다. 1669년에는 원규를 엄히 하는 한편 사림들 의 공론으로 우암 송시열을 원장으로 초빙하였다. 그 후 1717년에 다시 한 차례 중건하였다. 1760년(영조 36)에는 호남지역 사림정신의 발원지로서 이 서원의 의미를 강조하는 비를 서원 옥천서원 정면_경현문

의 뜰에 세웠다. 그 후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8년 복설 되었으며 현재는 신실(神室) 3칸과 묘정비가 남아 있다. 1984년 2월 9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 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옥천서원의 관리는 순천향교에서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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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자원 3


자원명 : 임청대비, 김굉필, 임청정원 자원소재 : 옥천동 139번지 자원유형 : 명승지, 문화재(전라남도 지방유형문화재 제77호)

1565년(명종 20)에 세워진 이 비석 전면의 ‘임청대’ 글씨는 퇴계 이황의 필적이며, 후면에 음각 된 글씨는 청사 정소(鄭沼)가 썼다. 비석 세운 일을 맡은 사람은 배숙(裵璹, 호는 매곡)이었다. 이 비의 건립 동기는 비의 뒷면에 새겨 있다. 조위가 순천에 유배되어 이곳 임청대 부근에서 현 지의 사류들과 강론하였는데, 1년 후 김굉필이 다시 순천에 유배되어 오자 동문수학이었던 두 인물이 유배지에서 다시 만나 옛정을 나누며 교유했던 곳에서 비롯된다. 그 뒤 순천부사 이정 (1512~1571)이 이를 알고 두 현자를 추모하기 위해 「임청대기」를 짓고, 이를 비석에 새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석질이 좋지 않아 새기지 못하고 간단하게 그 내용만을 현 비석의 뒷면에 음각 하게 되었다고 쓰여 있다. 이 비는 원래 현 위치로부터 동쪽으로 약 30m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최근에 현 위치로 이전하고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을 세웠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33㎝, 너비 99㎝, 두께 20㎝이다. 대석의 크기는 높이 30㎝, 너비 135㎝, 두께 50㎝이다. 당시 순천의 명필로 알려진 정소는 정철의 동생으로 18세 때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 을 포기하였다. 순천에 청사정사(저전동 소재)를 짓고 소위 승평사은(昇平四隱)으로 불리는 배 숙 허엄, 정사익과 더불어 산수를 벗 삼고 서화를 즐기면서 유유자적하였는데 글씨는 왕희지 필법에 충실하였다. 김굉필은 자가 대유, 호는 한훤당 또는 사옹. 김종직의 문인으로 1480년(성종 11)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척불의 소를 올린 바 있으며, 1494년 유일로 천거 받아 참봉의 벼슬을 받았으며 여 러 벼슬을 거쳐 1497년에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연루되 어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 어머니가 가까운 곳으로 옮겨달라는 상소를 올려 1500년 순천에 이배되었다. 순천에 이배되어 와서는 그보다 먼저 유배와 있었던 조위와 어울려 임청대 등을 찾아다니며 소요하며 지냈다. 그 후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 51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 하였다. 그는 경전의 연구 등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으며 실천궁행의 정신으로 행동하여 조선 시대 5현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문하생으로는 조광조, 이장곤, 김안국 등이 있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해군 때 전국 유생들의 상소에 의해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고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전국 여러 곳의 서원에 제향 되었는 데 옥천서원을 비롯하여 아산의 인산서원(仁山-), 현풍의 도동서원(道東-), 서흥의 화곡서원 (花谷-), 희천의 상현서원(象賢-) 등이다. 저서로는 『한훤당집』, 『경현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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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자원 4


자원명 : 팔마비(八馬碑) 자원소재 : 영동 1번지 자원유형 : 명승지, 문화재(전라남도 지방유형문화재 제76호)

현재 영동 교보생명빌딩(구 승주군청) 앞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의 건립배경에 대해서 는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자세히 나와 있다. 팔마비는 고려 충렬왕 때 승평부사 최 석(崔碩)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것인데, 1597년 정유재란 때 훼손된 것을 1616년 순천 부사로 부임한 이수광이 1617년에 중건한 것이다. 팔마비의 제(題)는 대자(大字)로 필명을 떨 친 장육당(藏六堂) 원진해(元振海)가 쓰고, 비음을 당시 사자관(寫字官)으로 있던 남창(南窓) 이현성(李玄成)이 썼다. 이수광은 실학의 선구자로 『승평지』를 편찬하는 등 커다란 업적을 남 겼는데, 글씨 또한 명필로 전아한 조맹부의 필의를 익혔다.

승평부에서는 태수가 바뀌어 돌아가면 태수에게는 말 8필을 주고 부사에게는 7필을, 그리고 법 조에게는 6필을 주되 마음대로 고르게 하였다. 석(碩)이 갈려감에 미쳐서도 읍인들이 말을 바 치고 좋은 것 고르기를 청하니 석이 웃으며 말하기를 “능히 서울에만 이르면 족할 것이어늘 말 을 골라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하며 서울에 돌아간 뒤 그 말들을 되돌려 보내니, 고을 사람들이 받지 않으므로 석이 말하기를 “내가 그대들 고을에 수령으로 가서 말이 망아지를 낳은 것을 데 리고 온 것도 이는 나의 탐욕이 된다. 그대들이 지금 받지 않는 것은 아마 내가 탐을 내서 겉으 로만 사양하는 줄로 알고 그러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그 망아지까지 (모두 9필을) 아울러 돌려주니 이로부터 증마(贈馬)의 폐단이 마침내 끊어졌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우고 팔마비라 이름 하였다.

이것이 곧 오늘날까지 순천지역에 널리 알려진 팔마비의 유래이며, 이 비는 한국의 역사상 지 방관의 선정 겸 청덕비의 효시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비석은 본래 연 자교 남쪽 도로변에 ‘최석팔마비’라 하여 세워져 있었다. 현재의 팔마비는 이수광이 중건하여 전해오다가 일제 강점기 때 시가지 정비계획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비석의 규 모는 높이 160㎝, 너비 77.5㎝이며 재질은 해석(海石)이다. 대석은 가로 140㎝, 세로 85㎝, 높 이 40㎝이다. 비석의 전면에는 팔마비라 양각되어 있으며, 뒷면은 팔마비중건기를 음각한 것 인데, 현재 마멸이 심하여 해독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 비문은 『승평지』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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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자원 7

자원명 : 용강서원(龍岡書院)

자원명 : 청수서원(淸水書院) 지봉사(芝峰祠)

자원소재 : 금곡동 256번지

자원소재 : 소재미상(금곡동)

자원유형 : 역사문화, 전통교육시설

자원유형 : 역사문화, 전통교육시설, 재생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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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자원 6

자원키워드 : 유교문화, 이수광, 이응기 용강서원은 옥천 임청대에서 난봉산 기슭으로 올라가다 보면 주택가가 끝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1821년에 해룡면 중흥리에 처음 건립되었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훼철되

청수서원은 광해군 때에 순천부사로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푼 이수광을 추모하는 서원이었다.

었다가 1971년 복설하면서 현재의 금곡동으로 이건하였다. 양팽손(梁彭孫)과 양신용(梁信容)

1692년 도내의 사림들이 발론하여 건립을 추진하였는데, 특히 순천의 사림인 허서, 정백령, 정

을 봉안하고 있는데 건립 당시의 사정은 잘 알 수 없다.

송령, 조필문 등의 주도로 1693년 성의 서문 밖 난봉산 아래(청수리)에 서원을 세우고 이수광 의 호를 따 지봉사라 하였다. 그 후 언제인가 ‘청수서원’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고(1729년 이

양팽손(1488~1545)의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이며, 본관은 제주이다. 송흠에게서

후) 배향인도 이수광 1명이던 것이 이응기(李應耆)를 추배하여 향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1868

수학하였고 1510년(중종 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516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조광조 등과

년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고 그 후 별다른 복설의 움직임 없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

더불어 공부하였다. 1519년에 홍문관교리가 되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관직을 삭탈당하여

러므로 현재는 원지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 단지 금곡동 소재의 향교 뒤편 어디쯤에 있었을 것

고향인 능주로 내려왔다. 이때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되어오자 조석으로 대면하면서 교유를 하

으로 추측할 뿐이다. 참고로 고지도인 <광여도>에 지봉서원이 그려져 있다.

였으나 유배 1개월 만에 조광조가 사사되자 양팽손이 홀로 그 죽음을 지키고 친히 염습을 하여 장사 지냈다고 한다. 1537년에 복직이 허락되어 이후 용담현감 등을 지냈다. 인조 때 판서로 추

이수광(1563∼1628)의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 본관은 전주이며 판서 희검(希儉)의 아들

증되었고 조광조를 배향한 능주의 죽수서원에 배향되었으며 혜강(惠康)의 시호를 받았다.

로 경기도 장단에서 출생하였다. 1582년 진사시를 거쳐 1586년 23세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

양신용은 양팽손의 증손으로 자는 경중(景仲), 호는 장춘(長春)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

러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16년(광해군 8)에 순천부사로 부임하여 학교의 장려 및 공물

슬을 거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자신이 노쇠하여 참전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아들을

의 감액 등 민정 전반에 걸쳐 뚜렷한 치적을 남겼다. 특히 그가 이때 직접 편찬한 순천의 읍지인

의병으로 보내고 자신은 해룡면 앵무산에 망성암(望聖庵)이라는 암자를 짓고 국권회복을 기원

『승평지』는 조선시대 지방지 편찬사에 있어 한 전범을 이루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순천부사

하였다.

이후 이조판서까지 올랐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실학자의 선구자로 평가되기도 하며 저술로서 『지봉유설』이 유명하다.

광여도 부분_ 지도에 지봉서원이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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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명 : 공마당, 청수골 지명의 유래와 역사 자원소재 : 금곡동 자원유형 : 마을유래, 마을만들기 자원키워드 : 순천향교, 근대체육(운동장), 축구, 청수리(고지도)

순천향교 뒤편 공마당 일대의 마을은 조선시대까지 청수리(淸水里)로 불렸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금곡리(金谷里)로 바뀌었다. 즉 금곡동은 일제시대의 명칭이며, 본래 지 명은 청수마을로 마을 뒷산인 난봉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맑은 물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고 할 수 있다.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난봉산(鸞鳳山)이라고 불렀다는 마을 뒷 산은 고려시대 대장군이었던 박난봉 장군과도 인연이 있다.

공마당(묵정밭)은 선교사들이 세운 매산학교 운동장과 함께 순천에 근대체육이 시작된 장소라 고 할 수 있다. 1922년 순천청년회가 체육을 장려하기 위해 운동장을 만들고자 했는데, 국유 일제시대 공마당 기록사진_당시 순천고등학교가 순천향교를 임시 교사로 사용하고 있었다.

지를 대부받는 방식이 여의치 않자 순천유학생대회와 협력하여 향교 유림과 끈질긴 교섭 끝에 1923년 8월 향교 후원 2,300평을 제공받게 되어 축구를 비롯해 정구, 야구경기 등 체육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진 곳으로 특히 축구와 정구로 순천을 전국에 알릴 수 있었던 근거지이기도 했 다. 따라서 ‘공마당’이라는 이름은 ① 순천 향교의 소유지로 언제부터인가 오래 동안 내버려 둔 빈 마당(묵정밭)이었던 것이 ② 근대기에 공을 차는 마당(축구장)으로 인식되어 널리 불리게 된 지명이라 할 수 있다.

* 순천시는 2013년 4월 창조마을만들기로 <청수골달빛마을>을 조성했다.

2013년 청수골 달빛마을 프로젝트에서 공마당슈퍼 벽면에 제작된 마을그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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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동 49

마을자원 8


마을자원명 : 순천읍영주택 조사자:

이원기

조사방법 :

현장답사, 주민면담

자원유형 :

경관자원, 역사문화자원(주택), 기타활용자원

자원키워드 :

적산가옥, 일본식 연립주택

자원소개(요약) : 옥천 현대아파트 뒤쪽에는 적산가옥이 줄지어 있다. 이곳은 1930년대 후반에 지어진 (순천)읍영주택으로 현재는 개인소유의 건물이다. 작은 규모이지만 갑작스레 일제시대 극의 영화세트장이 눈 앞에 펼쳐지는 느낌을 준다. 자원소재(위치) : 순천시 옥천동 232번지 일대(옥천 현대아파트 뒷편)

이곳은 1935년 경에 건립된 일본식 주택으로 연립주택이라 할 수 있는데, 마치 영화세트장을 보는듯한 느낌을 준다. 건물의 외관에서 볼 땐 하나의 집으로 보이지만 안에는 2개의 집이 붙어 있는 구조이다. 1개 의 집은 현재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의 집은 빈집인 상황이다. 빈집으로 시간이 흐르다보니 기와도 내려앉아 외관이 점점 무너져가고 있다. 이곳에 살았던 사람이 2명이나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터 가 좋지 않다고 하여 집주인도 팔기를 꺼려한다고 한다. 신기한 점은 대부분의 적산가옥의 나무외벽은 가로인데 반해 이곳의 적산가옥은 세로로 지어졌다는 점. 그리고 외벽이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는 점이다. 마을주민의 인터뷰를 통해 지금의 현대아파트 자리가 일제강점기에는 한천공장이 있는 곳이어서 이곳에 일본식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고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주민은 옛 승주군청 위치에 일본에서 관리하던 법원 이 있어 이러한 적산가옥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편집자 주) 읍영주택이란 읍이 주택을 지어서 공급한 주택을 말하는 것이다. 순천에서 처음 읍영주택이 추진 된 것은 1940년에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1940년 5월 순천읍장은 읍영주택 건 축비에 충당하기 위한 기채 인가를 조선총독에게 신청했다. 그 내용을 보면 매년 10동씩 20호를 3개년에 걸쳐 60호를 건설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읍은 5만4000원을 금융기관 등으로부터 빌렸다. 위치는 순천 읍 옥천리(현 옥천동)로, 부지는 1000평, 1평당 매입비가 5원이었다. 매년 갑호 12채, 을호 8채씩 신축했

현재 일본식 연립주택의 적산가옥은 사진으로 보이는 곳이 유일하게 그 외관을 유지하고 있으며 주변에 있는 적산가옥은 원형을 변형하거나 재건축 등을 하여 외관만 가까스로 남아있는 상황이다. 또 이 건물이 마주하고 있는 건물(전라남도 순천시 옥천1길 7) 또한 일본식 연립주택인데 이 건물은 현재 개인소유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외관은 리모델링을 통해 현대식 주택으로 탈바꿈하였다.

는데 갑호의 1호당 부지면적은 32평, 을호는 8평이었고, 모두 일본식 주택이었다.

자원활용안 :일본식주택 게스트하우스

현재 옥천동 232번지 일대에 남아있는 읍영주택은 해방 이후 일반에 불하됐다. 그러나 연립주택 형식으

집주인이 말하길, 의외로 많은 분들이 이곳에서 사진을 촬영해간다고 한다. 지어진지 80년의 오래된 집이

로 지어졌기 때문에 재건축이 되지 못하고,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원형이 유지되고 있다.

지만 외관상태도 좋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 반대편 집이 비었다고 하는데 이를 활용한 일 본 여관 컨셉의 숙박시설(게스트하우스)을 운영한다면 호응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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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동_마을자원조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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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옥천1길 7 주택 2. 옥천1길 23 주택 3. 주택이 연이어 지어져 있으며 앞의 동과 뒷 편의 동 사 이에 골목길이 형성되어 있다. 4. 주택의 뒷편 모습. 집주인의 말로는 처음 지을 땐 마당 이 없었을 것. 개인에 불하되면서 마당과 대문을 새로 만 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함. 그 사이 크고 작은 집수선이 진 행되었음. 수선의 정도가 다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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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의 내부 모습


집주인 인터뷰 내용 : 이곳을 지은 집주인은 벌교에서 나무공장을 하던 분(나주 임씨)이 었다고 한다. 집을 지을 당시에 이곳으

마을자원명 : 공마당2길 117 건물 조사자 : 이원기 조사방법 : 현장답사, 주민면담 자원유형 : 경관자원, 역사문화자원, 기타활용자원 자원키워드 : 고택, 한옥 연계자원 : 청수골달빛마을, 우부자집 자원소개(요약) : 공마당2길 117건물은 마당포함 188평의 큰 면적을 지니고 있다. 벌교의 나주 임씨성을

로 올라오는 길은 양쪽으로 사철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한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길이 었다고 한다. 집을 지을 때 지게를 지고 나무를 힘겹게 날랐다고... 후에 매산고등학교 서무과에서 이곳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관리상태가 좋지 못했고 후에 빈집으로 있다가 노부부가 30년 전 쯤에 이 집 으로 이사를 와서 살게 되었다. 집의 평수는 188평으로 200평이 조금되지 않는다. 4개의 방과 3개의 부 엌. 거실로 되어 있으며 좌측 측면을 제외한 나머지 측면은 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등산을 하던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다보면 고풍스러운 큰 기와건물을 보고 종종 물어보던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올해 오랜 세월 탓에 비가 새는 등의 이유로 시의 보조를 받아 기와를 새로 하였다고 한다. 그 후로 집을 찾아와 묻는 등 산객이 없어졌다고 한다.

가진 나무공장에서 일하셨던 분이 지은 이집은 대형한옥으로 많은 방과 부엌으로 나누어져 있다. 올해 6 월 세월이 오래 흐른 탓에 지붕보수를 새로 하게 되었는데 기와를 새로 대처하면서 옛 고풍스러움이 사라 졌다고 아쉬움을 표현하셨다. 노부부 2명이 살기엔 이 집구조가 정말 크다. 게스트하우스같은 숙박시설과 같은 용도로의 활용을 생각해보아야할 것 같다. 자원소재(위치) : 전남 순천시 공마당기2길 117(금곡동 13)

자원의 활용안 : 한옥게스트하우스 건물이 크기도 크고, 방의 수도 많다. 노부부가 두 분이서 살고 계셔서 남는 방이 많고 화장실2개에 부엌 도 3개나 된다. 어느 정도 보수를 하여 게스트하우스나 민박 같은 숙박시설을 운영하게 된다면 수익도 주 민이 가져갈 수 있을 것이고 손님에게도 좋은 추억을 남겨줄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이 든다. 집 이름이 딱히 없다고 하시는데 이름을 하나 지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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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동_마을자원조사보고서(게스트하우스 리모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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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입구에는 나무로 된 양문이 되어 있고 문 옆으로 건물이 있는데 이곳은 2개의 화장실과 창고1칸으로 되어 있다.

상량문(上樑文)이란 용과 거북이 좌우에서 액을 막고 대들보를 올린 날짜 를 기록하고 하늘의 순리에 따르고 인간세상의 복을 비는 기원문을 말하 는 것으로 본 건물 처마에 있는 오복(五福)을 염원하기 위해 새집을 지을 때 지으면 서 상량을 할 때 대들보 밑에다가 ‘하늘의 3가지 빛(해, 달, 별)에 응하여 인간 세계인 5복을 갖춘다’는 뜻의 응천상지삼광(應天上之三光) 비인간 지오복(備人間之五福)이라는 글귀가 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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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동_마을자원조사보고서 (게스트하우스) 마을자원명 : 은행나무 게스트하우스 조사자 : 이원기 조사방법 : 현장답사, 주민면담 자원유형 : 마을경제자원, 기타활용자원 자원키워드 : 게스트하우스, 숙박 연계자원 : 문화의거리, 옥천, 하루 게스트하우스 자원소개(요약) : 옥천동에 위치한 은행나무게스트하우스는 집안에 큰 은행나무가 있기 때문에 은행나무 게스트하우스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딸과 두아주머니께서 운영하시는 게스트하우스는 40명의 동시숙 박인원과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게스트하우스이다. 자원소재(위치) : 전남 순천시 옥천동 41-8

▸ 이용요금 : 20,000원 ▸ 동시숙박이용인원 : 40명 ▸ 체크인/아웃 : 오후3시/아침10시 ▸ 식사제공 : 아침 토스트, 수제잼, 커피, 두유 제공 ▸ 홈페이지 : blog.naver.com/ginkgohouse

집주인 인터뷰 : 게스트하우스는 2012년 7월에 두 달을 운영하였고 작년 2012년 12월부터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미 술을 전공한 딸이 전화 및 고객관리를 담당하고 어머니와 아주머니 한 분 이렇게 총 세 분이서 운영을 하 고 있다. 안집 외에 별채로 2개의 건물 옥상에 건물을 지었으며 데크 및 정원, 벽화 등으로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아침에는 직접 담근 제철 과일 잼과 토스트, 커피, 두유를 제공해준다. 약 40명 인원이 동시숙박이 가능하다. 체크인은 오후 3시, 체크아웃은 다음날 아침10시이다. 하루게스트하우스가 운영자 중심이라면 이곳 은행나무게스트하우스는 시설이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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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안채. 2층은 게스트하우스, 우측 작은 건물도 게스 트하우스고 데크로 만들어진 작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벽면에는 따님이 직접 그린 순천만 벽화가 순천여행의 분 위기를 더한다. 2층 거실에는 작은 만화책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고 방마 다 벽지색을 달리해 차이를 주웠다.

샤워실과 화장실의 모습 2개의 화장실과 2개의 샤워실 그리고 머리를 말리는 곳까지 따로 만들어 두었다. 집주인분께서 슬리퍼를 신고 화장실을 들어 가는 번거로움을 줄이고자 바닥에 나무판을 깔아두셨다고 한다.

조사자 후기 : 향동에는 하루게스트하우스와 은행나무 게스트하우스 2곳이 운영되고 있는데 은행나무게스트하우스는 하드웨어적인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40명이라는 많은 인원이 동시에 숙박이 가능하므로 단체손님을 맞이하기에 좋은 것 같다. 집안 벽에 그려진 순천만 벽화작품을 보면 미술을 전공한 딸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또 한 향동의 중요한 인적자원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숙박을 하는 인원 분들이 주변 식당, 슈퍼, 주점 등을 이용하게 되므로 주변 상권에 기여 한다고 한다. 이 러한 관점에서 볼 때 순천 원도심에 특색을 갖춘 숙박시설이 더 생겨 원도심 상권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 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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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이 직접 만들고 있는 수제 과일잼 봄에는 딸기, 가을엔 복숭아, 겨울엔 사과로 잼을 만들어 아침에 손님에게 커피, 두유, 빵을 함께 제공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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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동_마을자원조사보고서 (게스트하우스) 마을자원명 : 하루 게스트하우스 조사자 : 이원기 조사방법 : 현장답사, 주민면담 자원유형 : 마을경제자원, 기타활용자원 자원키워드 : 게스트하우스,숙박 연계자원 : 문화의거리, 옥천, 은행나무게스트하우스 자원소개(요약) : 영동에 위치한 순천하루게스트하우스는 철도여행 내일로 상품을 이용하는 전국의 젊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가장 각광을 받는 순천 소재의 게스트하우스 중 하나다. 올해 나이 31살인 두 명의 남 자다 운영을 하고 있다. 평들에 의하면 두 운영자의 외모가 출중하다고 한다. 찾아오는 주 이용자가 20대 초반이므로 이에 맞춰 운영을 하기 때문에 매니아층도 많이 확보한 상태라고. 인근 은행나무게스트하우스 가 하드웨어 중심이라면 이곳은 소프트웨어가 잘 갖추어진 게스트하우스라고 할 수 있다. 자원소재(위치) : 전라남도 순천시 옥천1길 7

▸ 이용요금 : 20,000원 ▸ 동시숙박이용인원 : 20명+@ ▸ 체크인/아웃 : 없음 ▸ 식사제공 : 아침 토스트 ▸ 홈페이지 : blog.naver.com/harugh

집주인 인터뷰 : 순천하루게스트하우스는 현재 젊은 두 남자가 운영을 하고 있다. 두분은 동창이라고 한다. 게스트하우스 의 이용요금은 20,000원, 1층과 2층으로 나누어져 아래층은 남자(8인), 위층은 여자 손님(12인)이 숙박을 할 수 있다. 2013년 2월 26일 오픈한 게스트하우스인데 네트워크 형성중심의 운영을 하기 때문에 이미 내일러에게는 유명한 게스트하우스로 입소문이 퍼져 있다. 단순히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공간만이 아니라 이들이 서로 공유할 수 있도록 이어주는 역할도 한다. 또 주인이 직접 전국을 돌며 게스트하우스에 오는 손님들을 모아 그 곳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어 매니아층도 많이 확보했다고 한다. 전국에서 이곳 게 스트하우스 운영을 배우기 위해 연수도 오기도 할 정도. 체크인과 체크아웃이 없어 자유로운 편이다. 밤이 되면 2층 거실에 모든 숙박 손님들이 모여 여행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면서 자연스럽게 사교를 맺는 다. 주인이 직접 자리를 만들어줌으로써 분위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그리고 이곳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고 간 손님 중 주인에게 책, 그림, 엽서, 도장 등의 선물을 보내주는 경우가 자주 있다고 한 다. 그 만큼 고객관리를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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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번개모임 사진인데 하루게스트하우스 운영방식 중에 가장 독특한 점 중 하나 가 바로 이러한 이벤트를 통한 네트워크 형성이다. 한 명의 주인이 서울, 대전, 부산, 전국을 돌며 순천하루게스트하우스를 찾아왔던 손님들을 만나는 모임을 가진다. 모 임에 참석한 손님 중에는 같은 날 숙박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이 서로 모르는 사이. 모이는 이들은 단순히 순천하루게스트하우스에서 숙박했다는 공통점 때문에 모임을 찾아온다고 한다. 이런 다시 만나는 이벤트를 통해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 같았 다. 찾아오는 손님에게 주요 관광지를 소개하고 색다른 여행장소, 맛집 등을 추천해준다 고 한다. 특히 게스트하우스 주변 원도심에 대해 적극 추천을 해주고 있으며 정원박 람회 기간에는 대신해서 팔아준 티켓이 몇 백장이 된다고 한다. 마을만들기 사업이나 커뮤니티비지니스 사업 아이템 중에서 만약 게스트하우스와 같 은 민박을 운영하고자 한다면 벤치마킹할 곳으로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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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마을자원 소통이 필요한 잠재적인 마을자원 :우부자집, 고산병원원장 주택 일찍이 향동 금곡동에 소재하고 있는 우부자집이나 고산병원장 주택의 정원(특히 4월 봄이 되면 철쭉이 만개하는 정원으로 유명하다)은 훌륭한 마을자원으로 알려져 있었다. 시에서도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여러 방안들이 제시되기도 했으나 잘 실행되지 않고 있다. 이 자원이 유용한 마을자원으로 활용되지 못하는 이 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주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마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무엇보다 이 자원을 이용하여 수익을 발생시킨다는 관점보다는 이 자원을 마원의 자산(보물)으로 삼아 이것이 가지 고 있는 매력, 가치를 공감하고 함께 누리고 공유한다는 관점으로 천천히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쉽게 이 자원을 활용하는 방법은 마을주민이 마을을 해설하는 <금곡동 골목투어>와 같은 마을해설프 로그램을 통해 이 자원이 가진 매력을 공유하는 것이다. 공유를 한다는 것은 집의 소유자나 거주자가 외 지인에 때때로 사적 공간을 개방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연다는 것이므로 쉽게 접근할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본다. 주민자치위원회가 정기적으로 이곳을 방문하고 이 자원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찾아가는 일부터 시 작한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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