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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윤

새로운 교회 연대 세상 속에 흩어진 그 가정들이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연대하여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새로운 교회 연대 SS 66 99 P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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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darity series 1

need new church 새로운 교회 연대

이근윤

SS 66 99 P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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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2012년 목표의 한 축으로 중국어 성경 1독을 잡은 후 시간 나는 대로 짬짬 이 중국어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성경을 다른 언어로 읽는 유익 중 하나는 모국어로 읽을 때 느끼기 힘든 신선함과 새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어 로 성경을 읽을 때는 한국어로 읽을 때와 달리 좀 더 서구적인 느낌으로 성 경을 읽게 됩니다. 아무래도 번역하신 분의 관점이 반영되지 않을 수 없어 그렇겠죠. 그런데 중국어로 성경을 읽다 보면 이스라엘 역사가 마치 삼국 지나, 초한지의 한 장면처럼 익숙한 동양 정치 속으로 들어 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은 지역 구분상 분명 아시아의 한 끄트머리에 속해 있고, 서양보 다 동양적인 요소가 조금 더 강한데도, 우리가 접한 복음 자체가 서구적이 다 보니 그런 고정관점 속에 성경을 읽기가 쉬운 것 같습니다.

아무튼 최근 사무엘부터 열왕기서까지 이스라엘 왕조의 흥망 과정을 읽고 있다 보니 성경의 정치적 관점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성 경의 관점이 최근 우리나라의 정치 및 교회 상황과 많은 부분 맞닿아 있는 것 같아 진작 글을 쓰고 싶었는데 여유가 없어 미뤄오다가, 한번 짬짬히 써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2012년 이. 근윤.


need new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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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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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건국이념

자유, 독립, 평등, 정의, 예배,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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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실패

독립지파체제-사사체제-왕정체제의 연이은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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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의 인물 솔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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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교회, 힘있는 기독교’ 비전의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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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사를 그만 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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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회복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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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지향 전략: 디아스포라 전략’

7

대형교회 시스템의 문제

성도의 유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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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의 역할

초기: 양육과 보호,

후기: 권한과 생산 수단의 위임 후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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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system에의 적용

Home school Vision

10 국가, 기업 system에의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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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church Vision

12 Home centered system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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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business Vision

11 교회 system에의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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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ministry, Home mission Vision

13 참여/공유/개방/연대의 힘과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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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지는 대화,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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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스라엘의 건국이념

'자유, 독립, 평등, 정의, 예배, 선교'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의 ‘국가관’은 그 근본이 ‘출애굽’에서 시작합

니다. 당시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가장 전제적인 정권이 존재했던 이집 트의 ‘종살이’가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이 출범하게 된 배경이 되는 샘이 죠. 물론 ‘이스라엘의 종살이’가 처음부터 그렇게 비참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상 최초로 이집트의 종살이를 했던 요셉은 후세들과 비교해 매우 luxury한 종살이를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도 처음에는 불과 은 20 개에 노예로 팔려 비참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성실 함과 신실한 성품은 ‘종살이’ 속에서도 다른 노예들과 ‘차별화’된 삶을 살 게 했고, 그 결과 우여곡절 끝에 밑바닥 노예에서부터 파라오에 이은 제2 인자의 자리까지 치고 올라가는 저력을 보여줍니다. 사실상 파라오의 거의 모든 권력을 이양 받아 당시 문명 세계의 대부분을 주무를 수 있는 절대권 력을 휘두르면서도 요셉이 죽을 때 보여준 모습은 ‘이집트’가 그들의 본향 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반드시 이곳에서 나가 독립을 해야 하며 언 젠가 그 날이 오면 꼭 자신의 유골을 가져다가 가나안 땅에 매장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깁니다. 요셉의 이런 정신은 이스라엘의 건국 이념이 어떤 것 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와 명예, 권력을 쥐었다 할 지라도, ‘자유’가 없는 부, 명예, 권력은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아 니라는 것이죠. 어쩌면 요셉이 자손들에게 물려준 이 건국정신의 불씨로


1. 이스라엘의 건국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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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해 후대의 이스라엘은 이집트인들과 동화되지 못하고, 급기야는 미움을 사서 엄청난 고초를 겪게 되는 건지도 모릅니다. 요셉을 통해 전해진 이스 라엘의 건국이념이 다시 싹을 틔우게 되는 것은 그의 먼 후손 모세를 맞아 서 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집트 권력의 가장 달콤한 경험을 했던 요셉 이 가장 강력한 ‘독립’과 ‘자유’에의 의지를 보였던 것처럼, 모세 역시 이 집트 권력의 보호 아래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철든 이후 권력 에 타협해서 안락한 삶을 살아가는 편을 택하기 보다, ‘자유’를 얻기 위해 어쩌면 끝도 없을지 모르는 무모한 ‘독립투쟁’에 자신의 삶을 던지게 됩니 다. 모세의 이런 시도는 심지어 동족들에게조차 이해 받지 못했기에, 분위 기가 무르익기까지 무려 40년이 넘는 시간을 광야에서 보내게 됩니다.

그런 모세를 다시 지도자의 자리로 불러 내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 법이 정말 의미심장합니다.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광야 한가운데 홀로 선 떨기나무’, 그리고 그것을 통해 모세에게 말하고 싶었던 의미는 ‘스스 로 있는 자(I AM WHO I AM)’ 즉 그 누구에게도 의존해 있지 않고, 자 기 안에 존재의 근원이 있는 그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의 독립 이유이며,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 이집트의 압제에 맞서 저항해서라 도 성취해야 할 자유의 근거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당대 최고의 문명국에 서 화려한 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산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삶의 근원을 다 른 존재에게 의존해 있는 삶은 ‘종살이’에 불과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취해야 할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하나님이 누구에게도 창조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과 같이, 당장은 이집트의 문명 혜택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독립해서 스스로의 자유를 가지고 주 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이스라엘의 ‘건국이념’을 위해 모세와 300만 이스라엘 백 성은 역사상 유래가 없는 대규모 탈출을 시도하게 됩니다. 아마도 전성 기를 구가하던 세계 최고 제국의 지배로부터 스스로의 결정으로 탈출하 여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사례는 ‘이스라엘’이 유일할 것입니다. 대부분 의 민족과 국가는 ‘독립’보다는 ‘동화’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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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건국한 이스라엘이 처음 맞닥뜨린 과제는 자신들 이 들어가서 살아야 할 가나안 땅에 이미 5백년 이상 정착해서 살고 있 던 7족속들을 전멸시켜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구약성경의 여호와가 잔 인하고 야만적인 목축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는 장면이죠.

그러나 성경은 일관되게 가나안의 주민들이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를 설 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성경은 수많은 민족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죄악 의 관영’과 결부하여 설명합니다. 즉 하나님은 한 민족과 국가의 ‘죄악의 총량’을 규제하고 계시며, 객관적인 죄의 총량이 차기를 기다렸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있는 상황을 넘어서면 그 민족과 국가를 다양한 방식으로 멸망시킨 후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같은 방식 으로 ‘노아의 홍수’가 일어났고,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했으며, ‘바벨 론’, ‘메디아’, ‘페르시아’, ‘이집트’, ‘앗시리아’같은 세계제국도 마찬가 지며, 심지어 하나님이 직접 시작한 ‘이스라엘’과 ‘유다’도 같은 기준으 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판단하는 ‘죄악의 총량’을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요?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를 위한 구약윤리(IVP)’를 쓴 크 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의 견해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 니다. 너무나 많은 교회와 복음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죄의 기준’을 지극 히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으로 축소해서 오늘날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가해자 중심의 기독교’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이트가 말하는 구약성경의 윤리적 기준은 ‘하나님–백성–땅’이라고 하는 세 개의 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세종의 한글 창제 이념인 ‘천–지–인’의 원리와도 상통한다고 할 수 있는데, 아무튼 보편적인 윤 리학의 이념의 뿌리를 찾아가다 보면 결국은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 이 듭니다. 즉 구약성경이 제시하는 죄와 윤리의 기준 = ‘하나님: 종교적 인 축”+‘땅: 경제적인 축’+‘백성: 윤리적인 축’의 융합으로 이뤄져 있다


1. 이스라엘의 건국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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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입니다. 한 국가나 민족이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 하기 위해서는 ‘종교’, ‘경제’, ‘윤리’ 세 가지 차원에서 얼마나 균형 잡힌 정의를 실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풀어보면, 한 사람의 성도가 종교적으로 하나님을 잘 섬긴 다(흔히 말하는 기준으로, 교회 잘 나가고, 십일조 잘 내면)하더라도, 경 제적인 불의(부의 불평등한 분배, 착취 등)에 대해 눈감고 있거나 동조 하고 있다면 하나님 편에서는 그 삶이 전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윤리적인 불의(성적 타락, 거짓, 억압 등)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겠죠.

그런 차원에서 역사적으로 사라져간 수많은 국가와 민족들을 평가해 본 다면 ‘경제적 정의’와 ‘윤리적 정의’가 바로선 국가들은(물론 종교적 정 의 없이 두 가지가 바로 서기는 매우 어렵긴 합니다.) 예외 없이 번영을 누리고, 그것들이 붕괴되는 순간 예외 없이 무너져 내린다는 ‘국가 흥망 불변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 부흥’ 없이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간 ‘일본, 싱가폴, 홍콩 등의 사례’를 해석할 수 있는 key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나라들이 비록 ‘기독교적 가치’를 기본으로 하는 나라 가 아니지만, 분명 ‘경제정의’와 ‘윤리정의’를 바로 세웠을 때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고, 번영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다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전쟁으로 돌아가면 이 기준에 의해 가나안

7족속은 이미 ‘죄악의 총량’이 관영하여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다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지배계급의 경제적 착취 속에 피지배계급은 정상 적인 경제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기생 라합’과 같이 정상적인 양심 을 갖고도 ‘윤리적 죄의 굴레’ 속에 살수 밖에 없는 벗어나기 힘든 ‘경제 적 불평등과 양극화의 고착’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어느 나라든 극심 한 성적 타락, 거짓의 횡행 등의 윤리적 몰락의 배후에는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 느 정도의 균형을 이룬 사회에서는 심각한 비윤리적 죄악들이 어느 정도 억제되기 마련입니다. 그런 죄악을 저지를 근원적인 동기가 많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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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죠. 그러나 경제적인 특권이 한 부류에 쏠리기 시작하고, 경제적 생산 수단(당시의 땅)을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이 특권층에 빌붙어 살아야 하 는 상황이 가속화되기 시작하면서 특권층의 윤리성은 급속히 타락하고 그런 타락한 특권층의 윤리 수준에 맞춰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비윤리적 인 삶의 굴레를 형성하게 되는 거죠.

그런 ‘죄악의 수레바퀴’가 회복 불가능한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하면, 다 시 그 사회의 시스템을 복구하는 비용보다 아예 시스템을 포기하고 재구 축하는 비용이 더 싸지게 됩니다. 그러면 새로운 세력들에 의해 기존 세 력의 대대적인 학살(어쩌면 이것은 죄악의 수레바퀴를 빠르게 돌린 이 전의 기득권층이 자초한 시스템 폐기 작업인지도 모르죠.)이 일어나고 전사회적인 재부팅 작업이 이뤄지게 됩니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가나안 정복전쟁을 설명한다면, 어쩌면 그것이 프랑스 대혁명, 러시아의 볼셰비 키 혁명, 중국의 문화대혁명 등으로 이어지는 전사회적 재부팅 작업의 원형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혁명 이후 세력들이 이전 세력에 비해 더 정의로우냐 하는 부분은 또 다시 역사적 평가를 거칠 필요가 있는 부 분이지만, 이전 세력의 몰락은 대부분 그들이 과도한 욕심을 부림으로써 자초한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건국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반드시 몰아내야 할 ‘반이스라엘적 정치세력’과의 전쟁을 16년동안 수행하고 나서야 이스라 엘은 겨우 자신들만의 국가를 설립하게 됩니다. 처음 설립한 이스라엘의 정치 체제는 ‘민주정’도, ‘참주정’도 ‘군주정’도 아닌 ‘지파독립체제’였 습니다. 철저한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분산을 그 근원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때로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거대한 외부 세력에 맞서 ‘사사’를 중심으로 연합군을 형성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스 라엘은 그들의 존재를 지탱해 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각 가문’이 독립적인 경제기반과 정치권력, 그리고 종교의 자유와 자율권을 갖고 주체적으로 삶을 결정하며 살 수 있는 다원주의 사회였습니다. 흔 히 폐쇄적일 것이라 생각하는 이스라엘 체제와는 달리 이런 기본적인 사


1. 이스라엘의 건국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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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질서에 동의한다면 혈통이 달라도,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도 얼 마든지 이스라엘 민족에 복속될 수 있는(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의 족보 에 포함된 ‘여리고의 기생 라합’, ‘모압 여인 룻’, ‘헷 족속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방형 다문화 사회였던 샘이죠.

그런 면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집단체제, 거시 공동체에 무게를 싣는 방식보다는 ‘가정’, ‘���문’이라고 하는 개별 구성자, 즉 미시 공동체의 존재를 훨씬 더 중시하는 사회 시스템을 설계하셨던 샘입니다. 통제하기 힘든 집단이 개별 구성원 위에 군림하게 될 때 갖게 되는 폐단 을 경계하신 것이죠. 그래서 항시적인 집단권력의 존재를 기본으로 하 기보다 집단을 위한 시스템은 비상시(전쟁, 기근 등의 국가적 재앙)에만 작동하고, 비상상황이 끝나면 권력을 해체하고 다시 분산 시스템으로 돌 아가는, 그런 철저한 권한 분산 시스템을 의도하셨던 거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정치, 경제, 종교적 권력의 균형을 잡고 돌아갈 수 있는 분 산 시스템을 통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하며 다른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하며 살아갈 수 있는 ‘독립지파체제’를 꿈꿨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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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스라엘의 실패

'독립지파체제-사사체제-왕정체제'의 연이은 실패

그러나 이런 부푼 ‘건국이념’을 안고 시작한 이스라엘 체제는 불과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정상적인 작동을 멈추고 맙니다. ‘사사기’는 이스 라엘의 독특한 시도가 어떻게 실패하고 마는지, 그리고 ‘독립지파체제’라 는 최선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차선이라 할 수 있는 ‘왕정’을 도입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도가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이뤄져야 했던 전제조건 은 바로 ‘철저한 기존 부패 세력의 척결’이었습니다. 즉 ‘과거 시스템의 망 령’을 몰아내고, 완전히 새로운 부대에 술을 담지 않으면 부대가 터져서, 부대도 버리고 술도 버리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 입니다. 이스라엘의 비극은 바로 그렇게도 간곡히 명령했던 하나님의 ‘기 존 부패세력 척결’의 명령을 어기고, 조금 쉽고 안락한 길을 택하기 위해 기존 부패세력과 타협하여 공존하기로 결정한 이스라엘의 잘못된 판단에 서 시작됩니다. 분명 전멸하라고 명령했는데, 긴 전쟁에 지치고 새로운 땅 에서의 완전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한 이스라엘이 그나마 가나안 땅의 생 존 법을 잘 알고 있는 기존 족속들을 살려주고, 그들을 종으로 부리기로 결 정한 것입니다. 바로 ‘현실적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대의’를 저버린 것이죠. 이것은 훗날에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아말렉 족속의 가축을 탐하여


2. 이스라엘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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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전멸 명령을 불순종함으로써 결국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고 다윗 을 택하게 되는 결정을 내리게 만든 사건과 정확히 같은 성격의 비극입니다.

한국 근대사에서 1945년 민족의 해방 이후 ‘기존부패세력’인 ‘친일파’를 척결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그나마 막연하기 그지없던 독립정부 건립 을 위해 ‘친일파’를 용인했던 ‘이승만 정부’의 실책과도 이어지는 비극이 라 할 수 있죠.

아무튼 건국초기에 싹을 잘랐어야 했던 부패세력의 존재는 두고두고 이스 라엘의 역사의 가시가 되고 맙니다. 그들이 퍼뜨린 부패 정신은 순식간에 건강했던 이스라엘 공동체를 병들게 만들었고, ‘가나안의 이스라엘화’를 명령 받았던 그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화’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사사’로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 같이 초심을 지키지 못한 체 특권층으로 변해갔고, 결국 그들에 의해 이스라엘 의 부패가 확산되는 효과가 발생합니다. 부패의 확산 속도가 얼마나 빠른 지, 사사기 17장 이후 베냐민 지파의 상황을 보면 동성애, 윤간, 토막살해, 사체유기, 지파학살, 납치, 인신매매 등 당시 가나안 지파들이 멸망해야만 했던 죄악들이 그 죄악을 척결하라는 사명을 받은 이스라엘에 의해 버젓 이 행해지는 이스라엘의 암흑기를 보게 됩니다. 당시 비느하스가 아직 살 아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 정복전쟁 후 불과 몇 세대 만에 이스라엘 은 완전히 가나안화 되고 만 것입니다.

건강한 세포가 모여 건강한 신체를 이루듯, 건강한 가정들이 모여 건강한 국가를 이룰 수 있죠. 그런 면에서 사사 시대가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실패 는 국가의 뿌리인 가정의 실패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사기 17장에 등 장하는 암흑기의 시작이 한 작은 가정의 잘못된 자녀양육에서 시작되는 것이 정말 의미심장합니다. 가정의 부패가 번지고 번져서 지파의 타락, 그 리고 지파간의 전쟁, 급기야 민족적 비극으로 치닫는 거죠.

아무튼 이런 이스라엘의 실패를 수습하기 위해 이스라엘 공동체가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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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은 ‘왕’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독립지파체제’의 근간인 가정이 부 패한 상황(당시 이스라엘의 제사장이자 사사였던 엘리 가정의 두 아들 ‘홉 니와 비느하스’의 부패상과 이 가정의 대안으로 길러져 성공을 거둔 사무 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가 뇌물을 수수한 사건은 이스라엘의 지도 층 가정이 얼마나 철저히 붕괴되고 가망이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 죠.)에서 더 이상 중앙집권형 권력기관 없이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 어렵 다는 판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정말 실망스러워 하십니 다. 아무리 세워지는 사사들마다 문제가 많다고 하더라도, 영속적으로 권 력과 부가 대물림 되어 양극화가 고착되기 쉬운 왕정보다는 훨씬 나은 시 스템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 사회의 근간이 되는 가정의 근본적 개혁 없는 정치체계의 변화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왕정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 적 비용이 어마어마하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성경에는 이것을 가 장 중요한 이유로 제시합니다. 상비군, 왕정 소유 재산, 노역/군역, 세금 등,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피지배계층을 피폐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죠. 그런 특권층의 등장은 평등사회였던 이스라엘을 양극화하게 되는 결과 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는 ‘왕정’이란 차선을 허락하셨고, 하나님 편에서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인물들을 왕으로 세워 나가십니다. 사울, 다윗, 솔로 몬, 르호보암(여로보암)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초기 왕위 계승 역사를 살 펴보면 왕정의 장점과 극명한 한계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왕정’의 가장 큰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은 ‘중앙집권화’되어 있다 보니, 지도자의 지도력이 매우 효과적으로 전체 공동체에 전파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 서 다윗과 같은 성군이 이끌어 갈 때 이스라엘은 매우 강성한 나라가 될 수 있었죠. 그것은 솔로몬 때까지 이어져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도자의 결점 역시 강력한 영향을 끼치 게 됩니다. 최고의 성군이라 평가 받는 다윗 시대에도 그가 개인적인 욕심


2. 이스라엘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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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벌였던 인구조사의 결과 이스라엘 전체가 3일간 온역을 앓은 결과 7만명이라는 아까운 목숨을 잃게 됩니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뿌 리 깊은 나무’에서 ‘밀본’의 수장 ‘가리온’이 왕 본위 체제가 아닌 재상 본 위 체제를 지지했던 핵심적인 이유와 통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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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수께끼의 인물 솔로몬

그리고 사실 오늘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이유를 제공한 인

물은 다름 아닌 솔로몬 왕입니다. 그는 왕정의 climax를 찍고, dramatic 한 몰락까지 보여준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불가사의한 인물 중 한 명입니 다. 겸손한 등장, 영어로 humble beginning이라고 하죠. 아버지의 불륜 의 결과로 태어난 형의 죽음 이후 밧세바를 위로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 이복 형 압살롬과 아도니야의 연이은 쿠데타로 인해 권력을 물려 받 을 기회조차 갖지 못할 뻔 했지만, 극적으로 왕위에 등극, 다윗의 배려로 이스라엘 건국 이후 최대의 공사로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무려 1천 번제를 드린 후, 무엇이든 주겠다는 하나님의 질문에 백성을 재판하기 위 한 지혜를 구함으로써 재물과 장수 등 사람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소유했던 자, 엄청난 지혜와 권력으로 전세계 모든 왕들이 사신을 보내 그 의 지혜를 monitoring하고 딸을 시집 보내 그와 친분을 쌓으려 했을 정 도로 global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당대 최고의 권력자, 그러나 권력의 최 고 정점에서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크고 화려한 왕궁을 짓기 위해 백성들 을 노역에 동원함으로써 민심을 잃게 되고, 세력 확장을 위한 외교적 목적 과 동시에 그의 개인적 성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엄청나게 벌린 global 결혼 사업(1천명의 왕비와 후궁, 그것도 전세계 다양한 국적의)으로 인해 수많은 이방 종교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들어와 이스라엘을 점령하게 된...


3. 수수께끼의 인물 솔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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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 정말 복잡한 인물이죠. 사실 우리 아들이 요즘 한참 성경의 인물 중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갔는지를 물어보는데, 제일 대답하기 어 려운 인물 중 한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물론 화려한 등장과 비참한 몰락으 로 치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도 솔로몬에 못지 않게 불가사의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비관적으로 서술된 사울의 삶에 비해, 우호적으로 서술되다가 갑자기 부정적으로 돌변하는 솔로몬에 대한 성경 의 관점은 정말 당황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과연 성경은, 그리고 하나님은 솔로몬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셨던 걸까요? 제 생각에는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셨던 ‘왕정’이 가진 허상과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 주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스 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했을 때 그들이 가진 의도와 목적은 단순했습니 다. 우리도 강력한 왕을 내세워서 세계를 한번 정복해 보고 싶다는 것이었 습니다. 늘 침략을 당하며 불안하게 살아야 하는 약소국을 벗어나 세계를 호령하는 강대국이 되어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울-다윗-솔로몬을 거치면서 그들의 비전은 성취되었습니다. 늘 약탈만 당하던 약소 부족국가에서 강력한 중앙집중형 권력기관을 가진 세계제국 으로 등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이스라엘 민초들이 얻게 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더 많 은 자유? 더 많은 권한? 기회의 평등? 부요한 삶? 하하 안타깝게도 세계제 국의 그 모든 열매들은 민중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요구에 의해 세워진 왕을 중심으로 한 특권층에게만 돌아갔고, 결국 민중들에게 남은 것은 그들의 사치스런 시스템을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돌아가야 할 노동력과 막중한 세금, 그리고 그들의 아들과 딸을 그들의 종과 첩으로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그들이 ‘성군’이라 칭송해 마지 않았던 위 대한 왕 다윗의 현명한 아들 ‘솔로몬’ 왕에게 그리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꿈꿨던 최고의 임금 밑에서 가장 신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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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때까지는 억울하고 힘들어도 참았던 그들은 결국 그의 아들 르호 보암 때 폭발하고 맙니다. 아버지 솔로몬이 했던 폭압정치를 중단하고, 노 역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조금 쉬게 해달라는 민중들의 요구에 르호보암은 ‘내 새끼손가락이 아버지 허리보다 굵다.’고 하며 ‘아버지는 채찍으로 다 스렸지만, 나는 전갈로 다스리겠다.’며 더 강력한 폭정을 선언합니다. 급기 야 이스라엘은 북쪽 10개 지파가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독립함으로써 분단 의 아픔을 겪게 되고 맙니다. 그 후로도 북이스라엘은 무려 9차례(가물가 물하지만 아마도)의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늘 왕정은 피바다였고, 남유다 도 간혹 선한 임금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기는 왕으로 인해 고통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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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한 교회, 힘있는 기독교' 비전의 허상

이쯤 오면 ‘강한 이스라엘’을 꿈꿨던 ‘이스라엘 왕국’의 비전이 얼마

나 허황되고 불가능한 것인지를 깨달아야겠죠. 사실 이 지점에서 한국교 회와 보수 기독교가 꿈꿨던 ‘강한 교회’, ‘힘있는 기독교’의 비전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목표인지 되짚어 봐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런 비전 하에서 이 뤄졌던 지난 4년간의 ‘장로 대통령’의 시도가 얼마나 교회를 욕되게 하고 말았는지, 그렇게 권력을 얻고 주류세력이 되기 위해 수많은 타협(솔로몬 이 무차별적인 이방여인과의 결혼을 추진했던 것처럼)을 한 결과 세상보 다 훨씬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갖고 죄에 대해 단호하게 꾸짖었어야 할 교회 는 사실상 ‘범죄집단’ 수준의 윤리의식과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선보이며 ‘개독교’, ‘기득교’, ‘괴독교’ 소리를 듣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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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도사를 그만 둔 이유

여기서 정말 조심스럽게 제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데, 사실 많은 분들이 여전히 제가 왜 전도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직장생활 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 합니다. 거기에는 정말 헤아리기 힘든 많은 일들 이 있지만(제 개인적인 연약함과 제가 속한 공동체의 사정이 가장 직접적 인 원인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신학교를 가고 전도사를 하기 전에는 경험 하기 힘들었던 ‘교회 내의 권력에의 의지’가 보이지 않게 저를 짓눌렀던 큰 이유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제가 신학교를 가서 전도사를 하기로 한 건 정말 단순한 이유였습니다. 그것이 ‘제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가 장 큰 기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가 장 강력한 대안이라고 생각했기에, 교회를 잘 세우고, 교회를 잘 섬기는 것 이 가장 보람되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대단히 순진한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현 재 한국교회는 ‘교회성장’과 ‘목회성공’이라는 ‘신화’에 포로가 되어 있다 는 생각이 듭니다. 한 해에 수천 명씩 신학교로 몰려 드는 많은 목회 지망 생들이 처음에는 대부분 순수한 동기와 헌신적인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다른 이들을 섬기고 돕는 일에 바치기로 하는 어려운 결정을 합니다. 그리 고 실재로 사역 초기에 경제적으로 고단한 삶을 견디며 헌신적인 삶을 살


5. 전도사를 그만 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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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갑니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 신학교와 지역교회에서 끊임없이 받게 되는 무언의 메시지는 ‘이왕 사역의 세계에 들어온 이상 여기에서라도 성 공해야 하지 않겠어?’, ‘최소한 너도 한번은 남부럽지 않은 대형교회 목회 를 해봐야 하지 않겠니?’, ‘좀 열심히 해서 소위 뜨는 목사가 되어 많은 성 도들을 모으고, 큰 교회를 짓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 아니겠어?’, ‘목회는 결국 숫자로 판가름 나는 거야,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는 게 하나님의 뜻 아니겠어?’, ‘힘들게 목회하는데 사례나 대접은 좀 넉넉하 게 받아야지.’ 이런 류의 것들입니다. 신학교를 방문해서 자신들의 화려한 목회성공담을 전하며 후배들을 격려하고 도전하는 많은 선배 목사님들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결국 후배들의 마음에 남기고 가는 부담은 ‘최소한 나도 저분들처럼 성공해서 존경 받는 목회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것입니다.

이런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한국 교회의 성공 신화’가 미래 목사님들의 마음을 물들여 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라는 구호 는 정말 이용 당하기 딱 좋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교회 시스템 자체가 세상을 정화하고 변화시키는 역할보다 세상의 단물을 가장 손쉽게 누리기 위해 이합집산하는 구조로 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순 진한 생각을 가진 한 사람의 전도사는 너무나 쉽게 구조적 권력에 타협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너무 비관적으로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처음 의도하셨 던 ‘이스라엘의 건국이념’은 분명 ‘각성하고 변화되어 도덕적으로 성숙하 고, 경제적으로 정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한 개인과 가정’이 자율적인 권 한과 능력으로 ‘독립지파체계’를 이루어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들어서 하 나님이 소개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new paradigm of living)’을 이웃 들에게 모범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세상을 조금 더 정의롭고, 따뜻하며, 모 든 구성원들이 인간적인 존중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라 생각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new paradigm of living을 폐기하고 결국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미워하셨던 old paradigm으로 회귀했을 뿐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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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방인들보다 더한 방식으로 그들의 탐욕을 채워가기 시작했습니 다. 정직하고 선하게 살기 때문에 늘 손해보기 쉬운 상태를 거부하고, 우리 도 강한 권력을 이루어 세상을 마음대로 한번 주물러 보고 싶다는 ‘성공지 상주의’, ‘성장지상주의’의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지금의 한국교회가 빠진 함정도 이스라엘이 빠진 함정과 정확히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회의 권력화와 기득권층화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지속적으로 교회의 축복을 나누고 분산시키는 것이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창조적 파괴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나누고 베푸는 쪽보다 철저하게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쪽을 택했습니다. 신학대학원에서 보낸 1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제가 가장 많이 애써야만 했던 것은 소 래교회의 차가운 마룻바닥에 앉아 끊임없이 솟구쳐 오는 ‘성공에의 열망’ 을 누르는 것이었습니다. 미친 듯이 금식하고, 오랫동안 목소리 높여 기도 해야만 겨우 잠잠해 지는 욕망 앞에 저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목회 비전은 풍전등화와 같은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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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나님의 회복전략

'소수지향 전략: 디아스포라 전략'

결국 최초의 ‘건국이념’을 상실한 이스라엘, 권력화하고 기득권층화

한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내린 처방은 그들을 철저하게 분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헬라어로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하죠. 이스라엘은 어 쩌면 그들보다 훨씬 낮은 도덕적, 경제적, 종교적 기준을 가진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당한 후 전세계에 흩어집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의 가슴 아픈 실패라고 볼 수도 있지만, 조금만 시 각을 틀어서 보면 ‘하나님의 전략적 판단’일 수도 있습니다. ‘덩치 큰 권력, 이기적인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전세계에 분산시켜 소형 화함으로써 그 본연의 사명을 각성시키고, 제 역할을 하도록 독려하시는 거죠. 그 증거로 그렇게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 가운데 ‘다니엘과 세 친 구’라고 하는 걸출한 영웅들이 등장합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 물들 중 유일하게 거의 결점을 발견할 수 없는 인물들이 바로 이들이죠.

다시 소수자(minority)로 돌아간 이들은 다수(majority)일 때는 상상도 못한 믿음의 결단과 패기로 당시 잔인하고 살벌하기로 유명했던 아시아 거대 제국의 심장부를 변화시켜 나갑니다. 그것도 한 왕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 메디아,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세 왕조를 거치면서도 변함 없이 권력 최상부에 위치한 이들의 신뢰를 얻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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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대 세계 최강대국의 최고 권력층에 오르고, 또 수 차례에 걸친 왕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언제든지 자신 이 가진 권력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췄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진 신앙의 양심과 도덕성에 꺼림이 되는 일이면 아무리 그것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위협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단호 히 거부합니다. 그래서 풀무불에도 들어가고, 사자굴에도 들어갔던 거죠. 이스라엘 왕정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세상의 모든 기득권을 다 가지려고 했던 탐욕스런 이스라엘과는 정말 대조되는 것이죠. 이들을 통해 하나님께 서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 나라가 결코 ‘숫자’나 ‘규모’에 있지 않다는 것입 니다. 단지 네 사람에 불과한 소수 디아스포라 교회였지만, 어떤 대규모의 교회보다 훨씬 강력하게 세상에 impact를 줄 수 있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대형화’ 기피 성향은 신약에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초대교회가 하루에 수 천명씩 불어나는 대대적인 부흥기에 접어들었을 때 그 기세대로 계속 자랐다면 예루살렘의 주류권력을 형성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대적인 박해를 통해 초대교회를 분산시 킨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모여서 커다란 권력을 형성하는 것보다 소수 디아스포라 교회가 되는 것이 훨씬 효과적으로 세상에 침투 하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전략적인 판단이었음이 분명합니 다. 흩어져 핍박 받는 소수 교회는 부패하거나 기득권을 형성할 여지가 없 었고, 훨씬 유동적이고,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지 역으로 과감하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도 체 되지 않았던 소수의 초대 기독교인들이 불과 200년만에 로마 전역은 물론 로마를 넘어서 인도, 중국 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대형화’를 피해 ‘소수 디아스포라 교회’로 남아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된다고 그렇게 역동적이었던 초대교회는 콘스탄틴 황 제의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가 로마의 공식종교로 지정된 이후 또 다시 ‘대형화’와 ‘중앙집중형권력’이라는 폐쇄적이고 기득권층화한 형태로 복 귀합니다. 그 이후 천년이 기독교가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음에도 불


6. 하나님의 회복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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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고, 가장 지저분한 도덕적 타락을 경험했다는 것은 중세 역사가 잘 보 여줍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은 다시 종교개혁을 통해 ‘소수 디아스 포라 교회 전략’을 사용하셨고, 그 후 500년간 교회는 소수의 역동성을 회 복하여 전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 기독교 세계의 중심을 형 성하고 있는 북미 지역의 교회가 대부분 종교개혁 시기에 핍박을 피해 도 망친 몇몇 가정에 의해 형성된 것은 반복되는 역사가 보여주는 절묘한 하 나님의 소수 지향 전략이죠.

지금도 기독교가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지역들의 공통점은 ‘대형교회’가 아닌 ‘가정교회’가 중심인 곳이라는 겁니다. 교회가 ‘대형화’하기 시작하 면 기독교의 성장률은 둔화하거나 정체되고, 교회권력이 정점에 다다른 순 간부터 기독교는 내리막 길, 즉 마이너스 성장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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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형교회 시스템의 문제

성도의 유아화

길지 않은 기간이나마 사역을 경험하면서 깨달은 ‘대형교회 시스템’

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도의 유아화’라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라면 ‘각성한 개인과 가정’ 모두가 최전방 공격수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야 경 기에서 승리할 수 있는데, ‘대형교회 시스템’은 소수의 엘리트 사역자들에 게 최전방을 모두 맡기고, 대다수의 평신도들은 ‘돌봄을 받아야 할 유아적 성도’로 벤치에 앉혀 두거나, 겨우 후방 수비수 또는 직접 경기를 뛰지 않 고 돈만 내고 관람하는 관중, 조금 더 적극적이면 엄청난 자금을 대고 축구 팀을 인수해서 마음대로 선수들을 주무르는 구단주가 되도록 만들죠. 즉 성경의 높은 기준들을 ‘소수 엘리트 사역자’들에게만 적용시켜 사역을 ‘그 들만의 프리미어 리그’로 만들고, 나머지 성도들은 그들과는 절대 같을 수 도 없고, 같아 서도 안 되는 2부리그로 분리시켜 저질 성도를 만들어 내는 거죠. 지극히 비겁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이라 생각합니다.

회중 교회 속에서 어느 정도 복음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고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으면 이제 독립적인 신앙인으로 단단한 식물도 먹고 다 른 이들도 돌보며 세상 속으로 적극적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공격수가 되 어야 하는데, 현재의 교회 시스템은 어느 정도 성장한 성도들을 끊임없이 유아화합니다. 충분히 성숙한 성도로써 역할을 할 수 있는 초중고교 학생


7. 대형교회 시스템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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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완전히 애 취급해서 철저히 돌봄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대학부에서 도 훈련, 청년부에서도 훈련, 성년부에서도 훈련 늘상 도움을 받아야 하는 아기로 대부분의 시기를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수많은 사역자들의 존재 이유가 유지되고 성도들도 편하게 일생의 대부분을 전투를 관람만 하며 보낼 수 있습니다. 더 화려하고, 더 알찬 프로그램으로 성도들의 돌봄 받을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교회는 계속해서 대형화하고 그 대형 시 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또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가는 거죠. 그리고 격무 속 에 어린 성도들을 무제한 돌봐야하는 성공한 사역자들은 대가로 많은 특 권을 누리게 됩니다.(물론 이렇게 성공한 대형교회는 정말 소수에 불과함 으로 이런 특권을 누리는 분들도 정말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런 면에서 하 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정을 반대하면서 왕정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비 용, 즉 상비군, 왕정 소유 재산, 노역/군역, 세금 등의 막대한 비용이 들고 너희의 자녀를 종과 후궁으로 바치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셨던 것은 비단 정치 지도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인 일부 특권층 대 형교회 목사님들이나 경제 지도자인 재벌들에게도 해당되는 샘이죠.

물론 그런 특권층들이 놀고 먹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 올라가기까지 남다른 노력과 눈물을 흘려야 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 랑하는 성취는 절대로 그들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권이든, 대기업이든, 대형교회든 하나의 거대 권력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지도자도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작업은 평범한 국민, 사원, 평신도들의 수고와 헌신 에 의해 이뤄집니다. 그런데 그런 대형 시스템의 필연적인 결과는 특권층 이 파이의 대부분을 가져가고, 나머지 떡고물을 가지고 처절한 경쟁을 해 야 하는 양극화로 치닫게 됩니다. 요즘 한국의 특권층이 보여주는 정치, 경 제, 교회 권력의 세습시도는 이러한 양극화를 영구적으로 고착화하려는 시 도인 샘이죠. 정말 저같이 점잖은 사람에게서도 욕이 나오게 합니다.

이런 양극화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대형화 기피 전략’을 취해 야 합니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말과 같이 ‘대형 시스템’ 지향은 부 패할 기회를 대놓고 허용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철저하게 권력을 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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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가능한 국민, 사원, 평신도들이 자신의 자율성을 지도자에게 위임하 여 비겁한 안정을 취하는 방향보다 스스로의 주권을 갖고 잘 분산된 권한 을 행사할 수 있도록 ‘소수 지향 전략’을 취해야 하는 거죠. 대형화하여 관 료주의가 지배하는 국가, 기업, 교회는 반드시 경쟁력을 잃고 맙니다. 끊임 없는 쇄신과 변화를 통해 가능한 권한을 분산하여 건강한 소수 단위의 공 동체가 자율권을 갖고 살아 움직이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 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저비용이면서 강한 성장이 가능한 구조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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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시스템의 역할

초기: 양육과 보호 후기: 권한과 생산 수단의 위임 후 독립

그러나 이런 ‘소수 지향 전략’이 시스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정부주의나 무교회주의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소수의 구 성자가 할 수 없는 부분이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에 국가, 기업, 교회 등이 개별 구성자인 가정들이 소속해서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해야 합니 다. 개별 구성자들이 건강한 성체로 자랄 수 있도록 보호하고 양육하는 역 할을 할 필요가 있죠. 그러나 어느 정도 스스로의 능력으로 독립할 수 있는 시기가 되면 적극적으로 자율과 자유를 부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 기 업, 교회가 양육 시기에 갖고 있던 권한과 기본적인 생산 수단 등을 나눠줘 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는 거죠. 만약 그러지 않 고 계속 개별 구성자를 유아화하여 국가, 기업, 교회의 책임으로 남겨둔 체 국가, 기업, 교회만 대형화하게 되면 어마어마한 비효율과 부패, 양극화된 권력 불균형이 발생할 뿐 아니라,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덩치가 커 져 붕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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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교육 system에의 적용

Home school Vision

현재 한국사회의 심각한 고민거리가 되고 있는 교육 문제도 마찬가

지라 생각합니다. 공교육 제도는 국가가 개별 구성자들을 어느 정도의 소 양을 가진 건강한 주체로 양육하기 위해 만든 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공교 육 이외��� 다른 교육 대안이 없는 자들에게 최소한의 기회를 제공하고, 사 회구성원 모두에게 어느 정도 평등한 출발점을 만들어 주기 위한 ‘지적 재 산 분배 시스템’이라 할 수 있죠. 그러나 공교육은 처음부터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설계된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특권층과 같이 고급스러운 사교육 을 받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그나마 대중화되고 보편화된 중저가의 교육을 효율적으로 분배하기 위해 설계된 제도라 할 수 있죠. 개발도상국 시절에 는 국민 대다수가 자체적인 교육 제도를 갖기 힘들만큼 경제적으로 빈곤 하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절대 다수의 국민이 공교육 제도에 의존할 수밖 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환경이 갖춰지기 시작하면, 중 저가에 맞춰진 공교육에 너 나 할 것 없이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되죠.

그럴 때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 공교육 예산을 늘려 교육의 질을 높 이든지, 아니면 국가의 교육 기능을 구성원들에게 떼어 주어 교육 독립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의 절대 다수가 공교육에 기대있 는 상황에서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중고가 교육으로 옮겨가기 위해 예산


9. 교육 system에의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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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늘리게 되면 막대한 예산 확보를 위한 과정에서 엄청난 사회적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재력이 받쳐주면서 공교육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은 사교육에 엄청난 사재를 털어 넣으면서 공교육을 자신의 자녀가

winner로서 돋보일 수 있게 looser들을 제공하는 무대로 활용하게 되죠. 그리고 비대해진 시스템 속에 권력, 부패, 비효율이 발생하면서 돈을 부으 면 부을수록 문제가 커지는 풍선효과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지적 재산 재분배 시스템’이 붕괴되지 않고 정상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중저가의 공교육에 만족이 안 되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사교육을 통해 공교육을 winning을 위한 무대로 활용하는 이들을 과감하게 분리시키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들은 이제 자체 적으로 ‘지적 재산’을 재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성장했으니 더 이 상 전체 시스템에 ‘유아’인 것처럼 남아서 시스템에 무리를 주지 말고 빨 리 독립해서 자체적으로 더 효율적이고 수준 높은 ‘지적 재산 재생산 작 업’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교육 대상자들의 수를 제한한 후에 공교 육의 질을 대대적으로 개선하는 작업을 하는 거죠. 공교육에서는 한 사람 의 winner를 생산하기 위해 모두가 looser가 될 수밖에 없는 상향 중심 경쟁 체제를 추방하고, 누구도 looser가 되지 않도록 가장 발달이 느린 자 의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핀란드식 하한 중심 보완 체계를 구축하는 겁니다. 물론 이렇게 이원화된 교육 체제가 하한 중심 보 완 체계의 대상이 되는 사람 입장에서는 위화감을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 합니다. 또 자신은 독립이 가능할 거라고 판단해서 독립을 했지만 실제로 는 감당이 안 되서 실패하는 경우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것이 억지로 유지 불가능하고 이용당하기 쉬운 대형 시스템을 유지하는 비용보다는 훨씬 해결하는 비용이 적으리라 생각합니다. 공교육을 언제든 활용 가능한 매우 수준 높은 시스템으로 남겨두면 사회적 안전망이 되는 샘이고, 그 안전망을 바탕으로 개별 구성자들은 고효율의 시스템으로의 진 보적 도전을 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제가 네 명의 자녀를 데리고 homeschool을 시도하는 이유이고, 또 homeschool의 활성화를 통해 공교육의 수준 향상에 이바지 함으로써 win-win할 수 있는 전략이라 생 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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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국가, 기업, 교회 system에의 적용

Home business Vision

정확하게 같은 전략을 국가, 기업,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사실 자원의 효율적인 활용을 위해서는 규모의 경제가 필요한 대 량 생산을 제외하고 모든 자원은 가능한 작은 단위로 나눠 관리하는 것이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중앙정부, 모기업, 모교회 등 을 안전망으로 하여 좀 더 자세한 monitoring이 가능한 지방정부, 벤처 기업, 가정교회 등이 독립하여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 하면 훨씬 작은 자원으로도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거대한 대기업 에서는 몇 달 동안 진행해도 진척이 안 되는 프로젝트가 소수의 열정을 가 진 벤처기업에서는 단 몇 주 만에 마무리가 되는 사례가 부지기수라는 것 을 보면 대형 시스템 유지를 위한 사회적 비용이 만만찮다는 것을 알 수 있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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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교회 system에의 적용

Home church Vision

여기서 가장 논란이 될만한 부분이 가정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홈스

쿨과 벤처기업의 사례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정 교회는 아닌 것 같다.’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매우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3년 가까이 가정교회를 시도하면서 시도해 보지 않고서는 경험하기 힘든 유익을 너무나 많이 얻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전도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결정적 원인 하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네요. 사역을 하며 저를 몹시도 괴롭혔던 다른 한 가지 는 ‘주를 섬겨 기쁘시게 하려거든 결혼하지 않는 편이 낫다.’라고 했던 고 린도전서 7장의 사도 바울의 조언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결혼 제도를 거부 하거나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결혼하게 되면 주를 섬기는 일에 집 중하기 힘들다는 그의 의견을 제시한 것일 뿐입니다. 돌려 생각하면 결혼 한 자가 결혼하지 않은 자처럼 주님의 일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혼한 자는 남편과 아내로서, 그리고 부모로서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마치 독신처럼 사역을 하게 된다면 가정은 심각한 문제를 겪게 될 것입니다.

당시 기숙사에서 신학공부를 하며 주말에는 교회에서 청년들을 섬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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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던 나로서는 가족들에게 기껏 줄 수 있는 최선이 주일저녁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와 화요일 새벽 다시 기숙사로 가기까지 잠자는 시간을 제외 하면 체 15시간이 안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나마 월요일 오후 전도사 수 입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가계를 책임지기 위해 파트타임 강사로 출근해야 했던 아내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은 늘 다투며 보낸 기억밖에 없는 월요일 오전의 5시간 정도가 전부였죠.

그런 상황 속에서 가정이 메마르지 않고, 문제가 없다면 그건 분명 거짓말 일 겁니다. 그 때로부터 결국 못 견디고 학교를 휴학하기까지의 1년 반 정 도가 이제 10년이 된 우리 부부 관계에서 가장 메마른 기간이었던 것 같 습니다. 나중에 영어를 공부하며 정말 가슴 아프게 다가왔던 표현이 ‘you

deserve better than that.’ 이었습니다. ‘당신은 그것보다 나은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거죠. 다른 이들의 영혼을 살찌우기 위해 정작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 시절 나름 즐겁게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목회를 하면서 줄곧 고 민했던 것은, 건강한 가정을 세우는 것과 철저하게 대립되고 있는 교회 사 역 시스템이었습니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라도 가 정을 잘 다스리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디모데전서 4 장에 나오는 감독을 세우는 자격에서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라는 자격은 어떻게 되는 거죠? 만약 그 기준으로 교회의 감독, 즉 목회자를 세운다면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이 자격 미달이 될지 모릅니다. 제 솔직한 생각은 지 금의 교회 시스템은 분명 함량 미달의 목회자 가정을 생산하기 쉬운 매우 반가정적이며, 그러기에 성경의 권고를 상당부분 거슬려 대형교회를 유지 하려고 하는 목회적 욕망이 너무 강하게 녹아있는 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 예수님이라면, 바울이라면, 자신의 가정을 잘 돌보지 못하면서 목회 적 성공을 위해 무한질주하는 젊은 목회자에게, “그럴 생각이었으면 왜 결 혼을 했느냐? 차라리 독신으로 살지. 만약 결혼이 불가피한 것이었다면, 속 도를 좀 늦춰서 충분히 가정을 잘 다스리고, 아이들을 잘 길러 이웃의 증거


11. 교회 system의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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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얻은 후에 목회를 하는 편이 사탄에게 송사의 기회를 주지 않는 길이 아 니겠니?” 라고 말씀하실 것 같았습니다.

결국 저의 결론은 일단은 여기서 결승점이 보이지 않는 무한질주를 중단 하고, 다시 내가 가야 할 지점을 짚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5 년이 흐른 지금에는, 최소한 제 가정을 돌아보면서는 잘 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신뢰가 무너져 가던 부부관계는 더 욱 탄탄해졌고, 그 결과 2명의 자녀에 그칠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저희 가 정이 2배의 부흥을 하여 4명의 자녀로 불어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여러 가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홈스쿨과 가정교회를 하게 됐습니다. 가정을 먼저 세우고 회복시키기 위한 이러한 노력이 겉으 로는 보이지 않는 많은 질적인 성장으로 이어졌음은 물론입니다. 여러모 로 소위 PK(pastor kids 또는 조금 cynical 하게는 problematic kids) 라 불리는 문제 많은 목회자 자녀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던 아이들이 조금 씩 안정을 찾으면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고, 다양한 방면에서 매우 소망 있 게 자라고 있습니다.

제 생각과 경험을 통해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은 원래 성경이 지지하는 교회의 형태는 가정 또는 두, 세 사람의 소그룹이 하나의 단위 가 되는 점조직이라는 것입니다. 때로 성경에 대규모 회중이 모이는 장면 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매우 특수한 상황에 한정됩니다. 출애굽 때 광야에 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배우는 장면이나, 느헤미야, 에스라 시대 포로 귀 환 후 모여 말씀을 듣는 장면, 그리고 신약에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구름 같은 회중들과 바울이 정기적으로 성경을 강론했던 두란노 서원 등의 사 례는 한결같이 오랜 말씀의 침묵으로 백성들이 말씀에 대해 너무나 무지 한 상황에서 이뤄졌거나 이전의 성경 해석에 심각한 오류가 있어 새로운

paradigm의 성경해석이 필요한 경우에 이뤄진 것입니다. 그마저도 정기 적, 지속적이었다기 보다 단기 수련회에 가까운 1회성 집회의 성격이 강했 습니다. 그 이외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분명한 신앙교육의 원칙은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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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자녀에게 성경을 강론하고 가르치라는 것이고, 이것은 지금도 유대인 아버지가 자녀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전통으로 남아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집회 위주의 모임은 오래 지속됐다기 보다는 일정 기간 이뤄 지고 해산했고, 대부분의 모임은 가정집을 중심으로 점조직 형태로 지속된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서신도 지금과 같이 거대한 건물에 모인 회 중들에게 공개적으로 읽도록 쓰여진 것이 아니라, 에베소 지역,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가정교회들이죠)이 회람할 수 있는 형태로 쓰여졌고, 집집 마다 모여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읽어주면 다른 사람들이 듣고 외우 는 형태로 이뤄졌습니다.

즉 대규모 회중 집회는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을 중심으로 교회가 유지된 것이 아니라 가정교회 형태의 점조직들이 존재하고, 그것을 양육하고 지원 하기 위한 방편으로 간헐적인 집회가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양육이 마무리되면 성숙한 가정교회들은 더 이상 젖을 먹기보다 흩 어져서 복음을 전파하고 이웃을 구제하는 일에 집중하는 철저히 분권화된 복음센터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우 친밀하고 개인적인 형태로 말씀이 전파되고 신앙고백이 이뤄지고, 세례가 베풀어졌기에 최근 ‘고문 기술자 이근안 씨의 목사 안수’와 같이 검증된 회개 없이 성도가 되거나 사 역자가 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가족과 이웃 앞에서 모 두 공개된 삶으로써 자신의 신앙고백을 증명하지 않는 한 성도로 인정 받 을 수 없는 구조였죠. 이것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회중 속에 숨어서 자 신의 양심을 속이고 신앙인인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현대 대형교회 체제 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물론 신앙의 시작점이 회중 예배에 참여 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지만, 반드시 소그룹을 통해 검증되고 삶이 드러 나야만 교회의 한 몸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이 당연한 절차인 거죠.

이렇게 긴밀하게 한 몸과 같이 엮인 점조직 속에서 파문이나 출교와 같은 죄에 대한 징계는 대단한 영향력을 줄 수 있습니다. 가족들이 죄에 빠진 아 들을 징계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리는 것과 같은 것이죠. 그러나 지금


11. 교회 system의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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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교회나 심지어 가정 조차 인격적으로 깊은 연대가 이뤄지지 않은 체 계에서 교회의 징계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다른 교회로 옮 겨 다른 회중 속에 숨으면 아무런 티도 나지 않는 거죠. 이렇게 죄를 다룰 수 없는 교회는 윤리적으로 대단히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회중 속에 묻 혀 있으면 그가 종교적으로, 경제적으로, 윤리적으로 정말 회개하여 의로 운 삶을 살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가정도 아버지는 직 장에서, 어머니는 집에서, 아이들은 학교에서 일주일 내내 각자 분리된 삶 을 살다가 주일마저도 각각 나눠진 부서에서 예배를 드리고 주일 저녁에 모여 TV만 보고 있다면 도대체 내 자녀의 영혼에, 내 남편의 삶에 무슨 일 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가 어떤 죄와 씨름하고 있는지를 알 길이 없는 거죠.

가정 교회는 이런 파편화된 현대 교회와 매우 다른 형태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구성원의 삶이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예배 속에 위선이 자리 잡 을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회중 속에서는 ‘예배 드리다 형제와 다툰 일 이 있거든 화목한 후에 다시 와서 예배 드리라.’는 명령은 아무런 의미도 구속력도 없지만, 가정예배 속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 입니다. 아니 구성원 중 한 사람이라도 안색이 좋지 않거나 다툼이 있거나, 죄에 빠 져 있다면 예배 자체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몰라도 가 족들 앞에서 위선을 떨기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건강한 긴장은 가정교���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직 장생활에도 매우 건강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한 가정의 영적 생명력이 자신에게 걸려 있음을 알고 있는 영적 가장이 세상 속에서 죄악과 벗삼아 사는 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성도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도 있겠지만, 자신의 위상이 단순히 예배에 참석하는 회중으로서가 아 니라 가정예배를 이끌고 자녀와 가족들, 그리고 이웃들에게 말씀을 전해야 하는 영적 리더의 역할을 해야 한다면 절대로 자신을 더럽히는 죄와 타협 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설사 실수 하더라도 금방 그것이 드 러나고 회개하는 과정을 밟을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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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Home centered system의 확장

Home ministry, Home mission Vision, 세상침투 전략

여기서 또 다시 제 얘기로 잠깐 돌아가면, 직장을 떠나 전도사가 된

지 5년만에 다시 직장으로 복귀한 저는 이제 만 4년을 불과 3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평사원의 계급을 떼고 어느 정도 비중 있는 중간관리자라 할 수 있는 전략기획파트장의 이름표를 달게 됐습니다. 직장에서의 저의 싸움은 상당한 부분 ‘성공에 대한 집착’과의 대결이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조금 포장되어 이뤄지는 성공을 위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투쟁이 직 장에서는 정말 노골적이고 가차없이 진행되더군요. 직장에서 성공하고 인 정받기 위해서 사람들은 정말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영혼 없 는 직장인'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하기엔 참으로 부끄러운 직장인의 모습을 잘 묘사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상사의 눈 치를 보고, 술/담배/성적방종 등 자신과 가족에게 심각한 해악을 끼칠 수 있는 행동도 서슴지 않고 해야 하고, 성공을 위해 숱하게 자신의 자존심과 양심을 팔아야만 하는... 정말 참 비참한 직장인의 현실이 제 앞에 놓여 있 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저항의 깃발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내 가족을 위한 시간을 지키기 위해 상사의 눈총을 받으며 칼퇴근하 고, 폭탄주를 돌리는 자리에서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거부하고, 상


12. Home centered system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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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미움을 받을 줄 알면서도 2차 3차를 거부하고, 그런 와중에 인사상의 불이익도 당하고, 약간의 왕따도 당하는 등 여러 가지 견제를 많이 당하기 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 부분에서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을 포기 했기 때문에 죽을 각오를 하고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어떻게든 업무의 영역에서는 다른 이들보다 낫기 위해 가장 먼저 출근하고, 때로는 가장 나 중에 퇴근하는 상황을 불사했습니다. 다른 분들이 하지 않는 언어 공부를 잠을 줄여가며 열심히 하고, 다른 분들이 술을 먹으며 노는 동안 혼자 야근 할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몸부림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신 건지, 결국은 4차례 회사 경영진이 바뀌는 와중에 많은 분들께서 그만 두시기도 하고, 보직이 변경되기도 하 고, 좌천되기도 했지만, 저는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아니라 또래의 다른 분들보다 빠르게 승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성공을 위해 양심에 꺼려 도 남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가지 않고, 내 양심이 지시하는 정도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작은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우리 가정이 고민하고 있는 것은 우리 가정이 고민하며 만들어 가 고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new paradigm of living)’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분들과 나누며 좀 더 저변을 넓히는 것입니다. Homeschool-

homechurch-homebusiness-homeministry-homemission 으로 이 어지는 home series 5종 세트를 좀 더 견고한 체계로 만들고, 그런 삶의 방 식을 만들고 싶어하는 가능한 많은 분들과 연대를 통해 좀 더 포괄적인 형 태의 ‘독립지파체제’를 만들어 보고 싶은 것이 제 바램입니다. 각 가정이 교육, 신앙, 직업, 사역, 선교 등 모든 면에서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 독립체제를 구축한다면 얼마나 자율적이고, 자유롭게 하나님의 명령 에 순종하여 어떤 제도나 상황에도 얽매이지 않고 온 세계를 누비며 다닐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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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ministry와 home mission이 이뤄지면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고 강력한 복음전도가 가능했던 ‘초대교회’, ‘위대한 선교의 세기’, ‘중국 가 정교회의 부흥’ 시기에 교회가 가질 수 있었던 mobile diaspora church 를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지역으로 부르시든, 무슨 일을 시키시든 즉각적 으로 순종할 수 있는 가장 능동적이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교회. 이미 선 교사님들 사이에서는 현재 마지막으로 남은 frontier 선교지로 갈 수 있 는 유일한 대안이 이것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회중교회 형태의 교회 자체가 불가능하고, 목사라는 직업을 갖고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대 부분이기에, 소수의 헌신된 가정들이 비밀리에 들어가 연대하여 복음을 전 파하는 지하교회 운동을 벌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선교의 마지막 시대에 중국과 북한의 ‘가정교회’가 중요한 선교 자원으로 주목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선진국 교회들이 중국교회의 부흥을 부러운 시각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시스템이 갖고 있는 장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죽어가고 있는 교회 시스템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꼭 큰 건물과 막대한 예산, 수많은 봉사인력이 필요한 회중교회 형태가 아 니라, 살아 움직이며 영적으로 독립한 건강한 가정들이 각각 미션센터로서 강력한 전진배치를 통한 전방 공격수 역할을 하고,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참여, 공유, 개방을 통해 영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전도와 세상 불의에 항 거하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격려하는, 세계 어느 지역의 필요를 보든지 지체하지 않고 순종하여 움직이며 뭉치고 협력하여 문제들을 해결하고, 이 웃들을 섬길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죠. 그 리고 그것이 확대되어 그런 건강한 가정교회들 영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독립/연대 하여 선교의 동력으로 움직이게 되면 대형교회의 재정적, 영적 지원에 기대서 사역하는 것보다 훨씬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사역이 가능 하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월급 받는 사역자’의 한계는 ‘월급 주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월급 주는 사람’이 하나님 께 철저히 헌신되고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이라면 이 구조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교회에서 ‘월급 주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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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 이기에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쫓기보다는 ‘그들 자신의 이익’을 쫓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의 사역이 하나님의 뜻만을 따라 진행 되지 못할 가능성이 너무나 많아 지게 되는거죠.

전도사를 그만 둔 이후 먼 발치에서 교회 소식을 들으며 안타까울 때가 너 무 많았습니다. 저도 존경하며 좋아했던 많은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돈, 섹 스, 권력 앞에서 믿기지 않을 정도로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며 제 마음도 무너졌습니다. 거의 모든 교회가 암묵적으로 불법 선거 운동을 펼치며 총 력을 다해 밀어 당선시킨 장로 대통령 정권 5년의 끝에서 들려오는 고소영 출신 고위 공직자들의 탐욕스런 비리 행렬은 암담하다 못해 수십 년 욕을 입 밖으로 추방했던 저 같은 사람도 욕을 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합니다. 제 생각에 2012년은 기독교인의 탈을 쓰고 자신의 탐욕을 더 탐욕스럽게 충족시키려 했던 기득권 세력이 붕괴되는 해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이 듭니다. 가나안보다 더 가나안스러웠던 이스라엘이 처참하게 붕괴된 것 처럼 한국교회도 자신의 탐욕을 위해 타협했던 수많은 가나안인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이미 온라인에서는 수십 번 갈아 뭉게 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 관련 비리 소식이 전해질 때마 다 득달같이 들러붙는 개독교 비난의 목소리는 골방에 처박혀 지독히 비 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악플러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하루 종일 둘 러싸여 일하고 있는 직장 동료, 바로 앞집에 살고 있는 이웃, 사촌, 친척들 의 목소리입니다.

한 때 전도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일들이 터질 때마다 저에게 이유 를 묻는 많은 분들에게 저는 정말 고개를 들기 힘들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미안하다. 이건 정말 교회가 잘 못하는 게 맞다. 부끄럽 다.’ 이런 사과의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조금이라도 여 지가 있다면, 교회가 조금이라도 개독교, 기득교, 괴독교의 탈을 벗을 수 있도록 힘을 다하고 싶다. 최소한 우리 자녀 세대에게는 조금 나은 국가, 기업, 교회를 물려 줘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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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전 전도사를 그만둘 때 많은 분들이 우려하고 만류하시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분들이 적잖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냥 유난 좀 적당히 떨고 대충 살지, 왜 저렇게 피곤하게 살까?’ 하는 얘기도 많이 들 었습니다. 그러나 ‘사명은 각자, 각자’라고 최춘선 할아버지가 한 겨울에 도 맨발로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민족통일과 온전한 복음을 외치고 다닐 때 사실 그를 이해한 분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분에게 주어 졌던 사명이 너무 말도 안 된다고 하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수 많은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한 사람 정도는 다른 시각에서 고민하고, 다른 시도를 해보는 것이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까지 후배들을 양육하는 일은 나름 누구보다 열심히 했으니 이제는 남들 이 하지 않는 색다른 시도로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가는 일을 하는 것이 낫 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씩 찾아오는 회의 와 고독에도 불구하고 약간은 고집스럽게 처음 부르심 받은 그 자리를 지 키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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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참여/공유/개방/연대의 힘과 필요성

2012년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며 많은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 중 제 몫으로 적은 것 중 하나가 ‘새로운 교회 연대’입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적었는데, 적고 나니 그게 대단히 무겁고 쉽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부담이 거의 2년의 침묵을 깨고 이렇 게 편지를 쓰게 한 것 같습니다. 올 해는 더 이상 잠잠히 있기보다 좀 더 적 극적으로 움직이고 싶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참여하 고, 공유하고, 개방하는 영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통해 비록 개독교는 무너져 흩어지더라도, 세상 속에 흩어진 그 가정들이 다니 엘과 세 친구들처럼 연대하여 ‘소수 디아스포라 교회’가 되어 위대한 솔로 몬 왕국도 이루지 못했던 세계의 심장부를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그런 일 들이 일으킬 것이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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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x communication

이어지는 대화. 페이스북


2012.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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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윤 형제, 오늘 우연히 형제의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우선은 글의 내용, 그리고 그 고민의 깊이, 그리고 대안을 정리해 가는 과정들이 정말 경이로왔습니다. 가벼운 글들이 난 무하는 요즘에 역시 글이란 것이 오랜 고민과 함께 숙성되어야 함을 절감했습니다. 그리고, 여 러 곳에서 그리고 다양한 모습으로, 이처럼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를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면서, 우리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당신의 교회를 이끌어 가실지 기대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교회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음을 고민하다가 떠나온 유학의 시간이었지만,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유학생들로 구성된 한인교회를 섬기면서 이제야 한국 교회의 미래가 어 때야 하는 지를 조금씩 정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의 한계도 잘 압니다. 저는 아무래도 형제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겁니다. 이 복 잡한 퍼즐의 시작과 끝은 오직 우리 하나님만이 아시겠지요! 그러나 형제의 결정에 깊은 마음으 로부터 우러나는 격려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올리신 글은, 가능하다면 제가 섬기는 교회 의 성경공부 그룹에서 읽히려고 합니다. 그래도 될른지요?

우리를 한 이름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샬롬!

안녕하세요. 제가 홍목사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올리신 글을 보고 진작 답변을 드리고 싶었 는데, 지난 한 주간이 정말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간혹 페친들의 글을 읽어 볼 여유는 있었지만, 차분히 앉아 글을 쓸만한 시간적 여유가 나지 않더라구요.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쉽게 쉽게 글을 쓸수 있는 체질은 아닌 것 같아요. 충분히 생각하고 숙고 할 여유가 없으면 글을 잘 못쓰겠더라구요. 목사님께서 올리신 몇몇 글들을 보며 정말 원숙하 고 아름다운 영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어 정말 감사했습니다. 예전 유진 피터슨의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란 책을 보며, 피터슨이 정말 아름답고 성숙 한 영혼은 젊은이에게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어르신들에게서 볼 수 있다는 글 을 보며, 제 주변에는 그렇게 흠모하고 모실만한 어르신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 참 안타까왔거든요. 그렇지만 최근에는 정말 성숙하고 아름다운 어른들을 계속 뵙게 되는 것 같아 너무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제 소망은 젊어서 큰 일을 하는 것보다, 나이들어서 존경받고 사랑받 는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나름 잘 나가던 청년 사역자의 길을 중 단하고, 평범한 직장생활과 가정을 잘 돌보는 방향으로 전환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제가 여러번 다른 분들에게 드리는 글에서도 많이 언급했지만, 디아스포라 전략은 전세 계에 흩어져 있는 한인 교회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즘처럼 한국교회의 본원 이 혼란과 부패로 신음하고 있을 때는 더욱 변방. 즉 frontier가 중요한 것 같아요. '혁신은 변방 에서부터'라는 격언도 있듯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변방에 있는 이들이 진정한 본질에 더 깊 이 헌신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게 본질에 깊이 뿌리내린 이들이 다시 본토에 회귀할 때 그들을 통해서 부패하고 무능한 중앙 세력들의 개혁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먼 곳에서 보내주신 격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계속된 교제를 통해 더 성숙한 생각 을 키워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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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윤 형제, 제 글에 다신 댓글을 읽었습니다... 늦어서 죄송해요. 행복했습니다. 제가 철이 없는 건지, 아직 한국을 떠나 있는 바람에 세상 무서운 지를 모르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믿음의 궁극이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지만, 동심을 누구나 그리워 하면서도 어른이 동심을 갖고 살 수 는 없다고 생각하는 그 모순 같은...? 하하하. 아무튼, 요즘 제 주변에서 한인 디아스포라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어떤 포럼에 참석해서, 해외에 있는 한인교회를 한인 디아스포라라고 말하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분명 한인교회들이 한국 교회의 영적 긴장의 모티브를 제공할 수 있다고는 믿지 만, 사유를 길게 하지 않고 이렇게 성급하게 한인교회를 디아스포라 개념으로 끌고 가는 것이 못내 아쉬움이 있군요. 이에 대해 생각을 좀더 알려줄 수 있겠습니까? 너무 질문이 막연한가요?

안녕하세요. 답이 좀 늦었습니다. 깊은 숙고 없이 '한인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에 대 한 약간의 반성으로 조금 고민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실 '디아스포라'라는 단어에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부정적인 의미도 담겨 있어서 이것을 사용할 때는 조심스럽게 어떤 의미에서 사용해야 하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는데 동의합니다. 일단 제가 '해외의 한인교회'가 '디아스포라 전략'에 적합한 환경이라고 언급할 때 제 머리속에 있던 '디아스포라'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역사적: 고난에 의한 이민 2. 지리적: 글로벌화 3. 문화적: 개방성과 동질성

우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 이후에 흩어진 약 400만명 가량의 히브리인들이 각 지역마 다 회당을 중심으로 정기적으로 모여 공동체를 이뤄 서로 격려하며 이스라엘의 고유한 신앙적, 문화적 유산을 이어갔던 것처럼 일제시대와 분단에 이어 몹시 가난했던 20세기 후반을 거치며 전세계로 흩어진 약 400만명의 한인들이 각 지역마다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정기적으로 모여 서로 격려하며 한인 고유의 신앙적, 문화적 유산을 이어가는 것이 마치 데쟈뷰를 보는 것과 같 이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세계로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본토에 남아 있던 동족들에 비해 글로벌한 문화 환경에 훨씬 강한 적응력을 보였고, 히브리어를 보존하는데도 열정적이었지만, 대부분 당 대의 공용어였던 헬라어에 능통했고, 토라뿐만 아니라 이방학문에도 능해서 필로나 요세푸스 와 같은 걸출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전세계의 한인교회가 가진 문화적 강점과도 일맥상통하는데, 제가 만나본 많은 한인 2 세들이 한인들 고유의 동질성을 가지면서도, 영어나 외국어에 능통하고, 또 열심히 공부해서 대부분의 지역에서 명문대에 진학하는 등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세운 회당과 그 회당의 예배 형태가 예수님 부활 이후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하는데 귀중한 통로로 사용됐고, 본토 유대인 중심의 12제자들의 영향력 은 이스라엘 근방에만 미쳤던 것에 반해(물론 후기에는 많이 확장되지만), 바울과 같은 디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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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라 출신은 특유의 강력한 글로벌 문화 적응력과 언어 구사력을 바탕으로 로마제국 전역으로 복음을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헬라어로 기록된 소중한 신약성경을 완성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죠. 이것은 현재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형성되면서 영어가 만국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한국 본토인들에 비해 글로벌한 문화적 적응력이 강하고, 언어 구사가 뛰어 난 해외의 한인 네트워크가 중요한 선교적 자원으로 부각되는 것과 매우 유사한 상황으로 보입 니다. 실제로 한국 본토의 교회의 선교적 영향력이 중국 및 동남아 등의 근접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것에 비해 해외의 한인 네트워크는 훨씬 다양한 지역에서 좀 더 지역에 밀착된 형태의 선 교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좀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규모가 커서 부패한 구조의 희생양이 되기 쉬운 본토에 비해서 조금 slim한 한인교회들이 훨씬 건강한 공동체적 특징들을 보존하고 있고, 또 지역에서의 영향력 면에서도 훨씬 강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한인교회가 문제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분명 힘들고 고달픈 이민자들의 삶에서 약간의 피난처, 또는 도피처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고, 비자문제나 실제적인 삶의 문제를 뒤치닥거 리 해야하는 경우도 많이 생기고, 한인 사이의 분쟁이나 이권 문제 때문에 골치아플 때도 많다 는 얘기를 전해 들은바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한계와 한인교회만이 가진 독특한 아픔과 한을 감안하더라도, 현재의 한인 네 트워크가 21세기 세계 선교에 다양한 기여를 하고 있고, 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큰 잠재력 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인 바램으로는 한인교회들이 본토교회를 흉내내어 큰 규모와 권력을 형성하여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기보다, 독특한 공동체적 역량을 극대화 하여 제가 기도편지에서 언급 했던, 다니엘과 세 친구들 또는 바울 선교단 등의 강력하고 전투적인 모바일 디아스포라 교회 를 형성한다면 신약시대 회당 못지않은 복음의 전진기지로써의 역할을 할 수 있을거라는 확신 이 듭니다. 끝으로 하나만 덧붙이자면 한인 디아스포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신 목사님의 생각이 어떤 것 인지 조금만 더 들려주시면 제가 생각을 키워가는데 훨씬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근윤형님 형님의 긴 글 속에서 제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성경적인 특정 시스템을 만들려 하셨는데 사람들이 자신들의 악한 성향을 반영한 시스템을 도 입해서 하나님께서 최초 그리고자 한 하나님의 백성이 갖추었어야 할 시스템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형님의 글은 비본질적인 부분을 마치 본질적인 부분인 것처럼 확대적용하였고, 마치 현재 한국교회의 폐단이 시스템을 변화적용하는 것으로 바뀌게 될 것 같 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소소한 부분에서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예를 들면 이스라엘 왕정이 차선책이었다는 내용은 어떤 구절들을 토대로 내려진 결론인지 의문이 갑니 다. 저는 가장 본질적인 것은 단순히 시스템의 형태에 있지 않고 인간은에 내재되어 있는 죄악 으로 기울여진 성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복음으로 사람이 변하지 않고는 어떤 형태의 시 스템을 도입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시스템 자체가 아무런 의 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시스템은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적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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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형태를 취하면 되는거지 반드시 한 형태를 고집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형님의 말씀 대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다면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현재의 시스템이 잘유되어야 한 다는 구절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형님이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초대교회에서 거듭해서 일어나고 있는 부패에 관한 사도 바울의 외침이며 그 해결책 역시 복음이라는 바울의 가르침뿐입다. 따라서 우리가 집중해야 될 것은 성경이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침묵하고 있는 부분들을 마치 성경의 구절들을 통해 해석할 수 있다는 그릇된 자신감을 버리고 성경이 관심을 기울이고 또 거듭 강조하는 일에 겸 손히 우리의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형님의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전파 하고 감탄하고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마음이 아프며,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결국 변화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본질을 놓치게 될까 두렵습니다.

W아 답변이 늦었지? 진작 글을 보고 답변이 하고 싶었는데, 요즘 아침에는 중국어 수업 시작하 고, 낮에는 업무로 바쁘고, 저녁에는 아이들과 함께 검도를 하다보니 평일에는 글을 쓸만한 시 간적 여유가 정말 안 나더라구. 그러다 보니 한 주가 후쩍 지나가고 말았네. 일단 W이가 어떤 것을 염려해서 글을 올렸는지 이해할 것 같아. 아무래도 목회자의 입장에서, 그것도 N교회 출신 목회자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염려라는 생각이 들고, 진정한 목회자라면 분명 개인의 영혼의 문제를 가장 우선시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시스템이 과연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라는 문제제기는 이미 박상빈 집사님께서 올리셔서 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했고, 결론은 W이가 내린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W가 글을 쓴 시점과 내가 답변을 쓴 시점이 거의 비슷해서 이 부분에 대해 사전에 교감 이 없었던듯. 그리고 "왕정이 차선"이라는 견해는 사무엘상 8장 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라는 구절을 근거로 갖게 된 것이고, 전후 사정은 8장 전체를 보면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생각은 일단 우리 가정이 시도하고 있는 이 시험적인 시스 템은 당연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할 보편적인 것이라 생각하진 않아. 일종의 '대안교회'라 고 할까? 공교육에서 다 담아낼 수 없는 다양한 상황을 담기 위해 '대안학교'가 필요하듯, '기존 교회'에서 다 담아낼 수 없는 다양한 필요를 일종의 '대안교회'를 통해 담아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 해. 그리고 W처럼 목회의 길을 가는 분들이 네가 언급한 것처럼 시대와 상황에 조금 더 유연한 시스템에 대해 열려 있다면 충분히 다양한 '대안교회'들이 기존의 교회 체계와 잘 어우러져 훨 씬 더 발전적으로 성장해 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어쩌면 아직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생각으로 가득한 내 글들이 내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까지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은 분명 현재 교회의 상황이 다양한 성도들의 형편과 처지를 잘 담아 내지 못하는 것 같고, 그런 상황에 대해 답답해 한 사람들이 희미한 빛을 보고도 기대를 갖는 것 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부분에 대해 많은 목회자들이 좀 더 관심을 갖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훨씬 더 성숙한 교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앞으로도 계속 좋은 의견들 많이 공유해 주면 좋겠고, 이제 졸업한 만큼 정말 세상 모든 이들에 게 희망이 될만한 좋은 교회를 많이 세워주길 바래. 그럼 이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졸업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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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을 공유하고 고민해보고싶은데 어떻게 해야하나요 아 컴맹 ㅠㅠ 저 역시 같은 고민을 하며 소래교회에서 기도하는 일개 전도사입니다.

소래교회의 차가운 마룻바닥은 C신대원의 마지막 보루라 생각합니다. 전도사님과 같은 분들이 H교단의 미래라 생각합니다. 함께 생각에 동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공유방법은 제 글 끝에 보면 '좋아요·댓글 달기·게시물 받아보기·공유하기' 라고 표시된 파란 색 글자들이 보일 겁니다. 각 단어에 마우스 커서를 갖다대면 손 모양으로 커서가 바뀔텐데, 공 유하기에 갖다 대시고, 클릭하면 공유하기 화면이 뜹니다. 거기에 간략한 인용문을 쓰시고 공 유하면 회원님의 친구들 또는 전체에게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글 우측 상단의 공유 옵션에서 선택하면 됩니다.)

일단 저희 가정이 영적독립을 이루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 이 부분에서 구체적으 로 어떤 방법을 취하시는지 기회가 되면 나눠주세요~

제가 생각하는 '영적독립'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히브리서 5장 12절에 나오는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단단한 식물'을 14절에서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라고 언급하고 있 는데, 스스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는지 아닌지가 젖을 먹는 어린 아이의 단계가 아닌 장성하여 독립할 수 있는 단계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라 생각합니다. 즉 스스로 성경을 해석하고, 성령의 음성을 분별하여, 성도의 삶에 찾아오는 다양한 삶의 문제 에 답을 얻고, 또 그 기준대로 실행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성숙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봐야 한 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독립'에도 중요한 기준이 되지만, '홈스쿨'에도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 같아요. 언제까지 '홈스쿨'을 할 것이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저희가 주로 대답하는 것이 '스스 로 선악을 분별할 수 있을 때까지'라는 답을 가장 선호합니다. 그런면에서 교회가 성도들을 유아화하여 계속 교회에 의존된 신앙으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 해야할 가장 중요한 훈련을 세가지만 꼽으라면 1.성경해석, 2.성령의 음성 듣기, 3.기독교세계 관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교회가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었고, 초대형 교회가 됐던 중세시대에는 평신도에 의한 1,2,3의 활동이 모두 금지되었죠. 세가지 영역을 모두 오직 성직자들에게만 국한함으로써 성도 들이 사제들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구원받지 못하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로 넘어오면서 이런 부분들이 상당히 많이 해소됐음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500 년이 넘어가면서 개신교회 역시 대형화하면서 같은 종류의 오류에 빠지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 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시 교회가 생명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자신 의 삶의 문제를 스스로 성경과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해석하고, 가치판단을 하여 스스로의 실천 적 삶으로 이어가도록 장려하고, 더 나아가서는 어느 곳에서든 선교사 가정과 같은 삶을 살도 록 파송할 필요가 있다는 ���각이 듭니다. 마태복음 28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파송 메시지는 분명 소수의 헌신된 사역자들에게만 주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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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아니라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지리적 경계가 '타문화권'이냐 '동일문화권'이냐에 따라 선교와 전도가 나눠질 수 있겠지만, 그 삶의 본 질적 무게와 헌신의 정도는 절대 달라선 안된다고 생각해요. 집사님의 짧은 질문이 제게도 '영적독립'의 개념을 정립해 가는데 도움이 많이 되네요. 많은 분 들이 좀 더 많은 생각의 공유를 원하시는 것 같아, 앞으로 '홈스쿨', '가정교회', '직장생활' 등의 주제에 대해 차례로 글을 써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계속 관심 같고 의견을 나눠주세요. 제 게도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글을 읽고 진작부터 뭔가를 답변해야 한다는 부담감ㅡ좋은 의미에서ㅡ이 떠나질 않았는데, 내 가 댓글에 너무 많은 걸 담으려고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욕심'을 버리면서 글 남김니다. 무 엇보다도 머리로만 쓴 글이 아니라 몸으로 가슴으로 쓴 글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정말 크 게 응원해 주고 싶어요. 한 번에 다 소화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한 주제들인데, 긴 시간 동안 깊이 고민하면서 생각들을 잘 정리해 주어서 나에게도 도움이 많이 되는 글이예요. 부분 부분 궁금 하거나 좀 더 논의해 보고 싶은 것들도 있지만, 글에 대해서나 나 스스로에 대해 생기는 큰 질문 중 하나가, "시스템ㅡ예를 들면 대형,중형,소형 또는 Homeㅡ이 정말 중요한가? 중요하다면 얼 만큼 중요한 것인가"예요. 물론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스템 설 계에 나의 시간과 열정을 얼마만큼 투자해야 하는 건가 하는 질문도 동시에 생겨나요. 물론 조 금은 피상적인 어리석인 질문인 것 같가도 해요. 글에서 힌트를 찾는다면 바람직한 시스템이라 는 "객관적인 상태나 조건"을 창안 또는 발견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기 보다는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 특정한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 삶의 시공안으로 들어오신 예수님의 부르심ㅡ소명? ㅡ에 반응하고 순종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고 해야할 일인것 같다는 생각이예요.

안녕하세요. 집사님. 어쩌면 집사님과는 페북을 통해 한국에 계실 때보다 더 가까이 교제하는 것 같아요. 이것이 페북을 통해 전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교회에 주는 하나님의 위로와 축 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치 불신자였던 고레스 왕을 통해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하고, 성전을 재건했던 것처럼, 저 커버그(느낌에 신앙을 가진 분은 아닌 듯)나 스티브 잡스(불교 신자였죠.)를 통해 생각지도 않 게 복음의 통로들이 열리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이 글은 어쩌면 집사님처럼 N교회에 함께 있었던 저의 삶에 대해 많이들 궁금해 하고, 관심 있 는 분들에게 제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생각으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지를 설명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그러나 쓰고 나서 보니 생각보다 제가 가진 생각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졌고, 또 많은 부분에서 제가 정말 큰 은혜를 입고 도움을 받았던 기존 교회/학교 시스템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많아, 오히려 저를 아끼는 많은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N교회를 함께 다녔거나 지금도 다니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는 그곳을 떠나 다른 길을 찾아 가고 있는 저의 삶이 한켠에서는 부담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그 러나 제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은 하나의 틀로 담을 수 없을 만큼 크신 분이고, 그 분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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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의 길은 우리의 생각, 우리의 길과 달라서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공부하며 왜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개혁이 있어야만 할까 하는 의문을 가졌는데, 결국 학기말에 제가 내린 결론은 '점점 분화되어 가고 복잡해 져가 는 근대사회를 카톨릭 교회라는 하나의 틀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었기에, 하나님이 선택한 다원주의 전략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공회, 루터파, 장로교, 감리교, 메노나이트, 그리고 근래의 성결교, 오순절파까지 종교개혁의 결과 정말 다양한 종파들이 나왔는데, 이것을 분열이라고 안타까와 하는 분들도 많지만, 제 생 각에는 그렇게 다양한 종파가 생겨났기에 오늘날처럼 복잡한 현대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다양한 교회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만큼 N교회 출신의 많은 분들이 좀 더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고민을 하며 서로를 인정하 고, 세워나갈 때 더 풍성하고 강력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시도가 그렇게 많은 노력과 열정을 들일만큼 가치로운 일인가?'하는 문제는 저도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부분에서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줬던 것은 사도바울이 '종들은 그 신분을 벗어나려 하 지말고, 그 자리에서 주인을 잘 섬기라.'고 했던 것과, '위의 권세에 순종하라.'고 했던 부분입니 다. 개인의 신앙은 어떤 시스템에서도 성장하고, 적용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죠. 심 지어 거의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던 노예 신분에서도 그것은 적용가능했던 것 같구요. 요셉 의 예가 가장 좋은 사례인 것 같아요.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구조적 악'의 문제 또는 '시스템'의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다거나 침묵한 다는 뜻은 아닌 것 같아요. 분명 하나님이 제시하신 '율법'은 하나의 '시스템'을 제안하신 것이었고, 그 기준이 잘 지켜지지 않을 경우 '심각한 악'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숙청을 하시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야,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세례요한으로 이어지는 선 지자 전통에서는 '개인의 죄'에 대해 비판하고, 경고의 메시지를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동체 의 죄' 또는 '구조적 죄'에 대해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 역할이었던 것 같습 니다. 그리고 그런 요구가 받아들여 지지 않을 때 결국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앗시리아', '로마' 등의 강대국을 사용해서 시스템을 갈아 엎었던 것 같구요. 어떤 경우에는 불의를 보고 침묵하면 불의의 대상자에게 돌아갈 피가, 침묵한 자에게도 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은 동참하지 않았더라도 명확한 불의에 대 해 최소한의 경고를 하지 않는다면 공동체적, 또는 구조적 죄의 연대에 동참하는 샘이고, 그 공 동체 전체가 심판 받을 때 연대 책임을 지게 되는 샘이죠. 그런 면에서는 시스템 내에 끊임없이 견제와 균형, 성찰을 위한 기능이 필요하고, 더 건강한 대 안을 고민하고, 제시하고, 시도하는 노력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함께 고민에 동참해 주셔서 감사 드리구요. 계속 좋은 의견 부탁 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겠다고 하니 기대 되네요. 하나님은 하나의 하나의 틀속에 갖히지 않고 다양한 통로와 방식을 통해 그 분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라는 것에 전적으로 공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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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그 동안 수많이 인재를 배출한 N교회가 개인적인 선택으로 디아스 포라의 삶을 살게 하지 않고, 전략적인 파송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얘기를 가끔 하곤 합 니다. 그렇지만 두 가지 모두 흩어지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ㅡ좀 거창하게ㅡ나라를 만들어 왔 다고 생각해요. "율법"을 "시스템"과 같은 것으로 본 생각은 사실 제가 요즘 많이 생각하는 부분 인데, 구체적으로 표현해 주었네요. 사실 율법 혹은 시스템은 분명 가치중립적인 것은 아니예 요. 그리고 동일한 율법 혹은 시스템이라도 시대와 공간에 따라 구체적으로 담아내는 가치와 의미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율법"을 대하면서 나에게, 그리고ㅡ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하다고 가정한다면ㅡ인간에게 정말 어려운 부분이 "율법주의"로 넘어가는 경 향성이 너무도 농후하다는 것이예요. 이건 평생 계속될 과제이고, 이러한 경향성 때문에 율법 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고 평가절하 한다면 그것은 더 어리석은 짓이겠지요. 아뭏튼 현재의 고민과 삶이 더 깊어지고, 새로운 대안과 삶의 방식을 계속해서 창조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율법과 율법주의의 문제는 저도 상당히 오랫동안 그리고 꽤 깊이 고민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전 도사를 하면서 아무래도 시스템 유지에 많은 신경을 써야하다보니, 저 자신이 대단히 깊은 율법 주의에 빠져 있었고, 제자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율법주의를 강요해야만 하는 상황이 많았던게 사 실이죠. 이 부분에 대해서 제 생각은 system과 그 system이 담고 있는 spirit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율법' 자체라기보다는 그 '율법의 정신'이라 고 생각합니다. system의 외양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에 관심을 쏟다보면 system의 정신, 즉 spririt은 잊어 버린체 system 자체에만 함몰되는 위험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이 S/W보다 H/W가 강한 그룹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현상이고, 그리 멀리가지 않더라도, N교회 대학부만 봐도 다양한 형식에 대한 강조가 이뤄지면서 그런 형식 을 잘 지키지 못하는 많은 지체들 사이에 광범위한 율법주의의 폐단이 나타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대학부의 사역자는 그런 율법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수혜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학부의 경건의 모양에 대한 높은 기준으로 대학부 사역자들이 또래에 비해 빠르게 성장한다는 면에서는 수혜자일 수 있지만, 급격한 성장에는 항상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인데, 그 결과 자유롭 고 독립적인 영성이 강한 형식에 갇혀 대단히 억눌리고 자유롭지 못한 영성에 빠질 가능성이 많 죠.(이것은 그런 과도한 부담을 잘 극복하지 못한 저 같은 경우에 한정되는 CASE입니다. 그것을 잘 극복하신 선배님들은 성장 속에 자유도 함께 누리셨던 것 같아요. 저로선 참 부러운 CASE였 죠.) 암튼 결론적으로 바리새인들을 향한 메시지에서 늘 강조한 예수님의 진의는 분명 율법의 형 식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이 중요하며, spirit이 살아 있다면 그 spirit을 담고 있는 틀은 얼마든지 시 대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부분이 대학부에서 청년부, 성년부로 넘어 오면서 많이 훈련되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 니다. 20대 초반과, 후반, 그리고 30대, 40대로 넘어가면, 신앙이 처한 상황이 많이 달라지게 마 련인데, 그런 상황에서 율법의 정신이 아닌, 율법의 껍데기에 매여 있으면 율법주의의 망령으로 인한 죄책감과 피해의식에 시달려 아무것도 못하게 되기 쉽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치 S/W가 강한 APPLE, GOOGLE 같은 회사는 시대적 변화에 쉽게 적응해 가지만, H/W가 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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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ROLA, NOKIA, HP, LG 같은 회사들은 시대적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해 쉽게 경쟁에 뒤쳐 지는 것과 같은 논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훈련에서 강조해야 할부분이 H/W도 중요 하지만, S/W를 강조해서 어떤 환경에서든 유연하게 율법의 정신을 살려 살아갈 수 있는 길을 터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파송에 의한 디아스포라 전략은 예전 영국에서 전용호 목사님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셨 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많은 지방교회로부터 좋은 자원들을 공급받아 성장해 온 N교회가 다른 지 역 교회들을 섬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제 생각에도 그런 방식으로 대형교회들이 창조적 파괴를 통해 좀 더 효율적이고 창의적인 자원의 재배분이 가능한데, 교회로서는 SYSTEM 유지와 확장에 의 욕심, 그리고 성도로서는 조금 편하게 지내고 싶은 욕망이 어우러져 그냥 대형교회의 성장으로 결론이 나고 만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사님께서 나눠주시는 생각이 제 생각을 정리해 나가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됩니다. 계속적인 의견 부탁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N교회에 다니는 한지체입니다. 오늘 선배들과의 교제에서 , 제 고민거리들을 다들은 한선배의 추천으로 이렇게전도사님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새벽 3시가 넘은 가운데. 읽고 다시읽 으며, 그동안의 고민들이 정리가 되어감에 기쁨으로 댓글을 남깁니다. 특히. '도덕적으로 성숙하 고, 경제적으로 정의롭고 , 종교적으로 경건한 개인과 가정'이 자율적인 권한과 능력으로 '독립지 파체계'를 이루어 사회구석구석으로 스며 들어야 하는점. 그리고 현 전도사님이 세워가시고 있는 가정 교회의 중요성부분에 대해 도전을 받고 갑니다. 무엇보다 전도사님의 글에서 보이는 영적전 쟁의흔적들을 보고. 더. 제마음에. 도전이 되네요. 먼저가시는 믿음의 선배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 함이 드는 날입니다..앞으로 전도사님이 걷는 그길이 하나님의 기쁨 되시길, 응원하고 기도할게 요. 좋은글 감사하고, 앞으로도 기대합니다.^^

안녕하세요. 자매님과 같이 진지한 고민을 하고, 또 그 답을 찾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 오는 지체들 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기도 하면서, 또 한편 제게는 좋은 의미에서 부담이 되기도 하네요. 아마도 N교회 청년부에 있는 것 같은데, 이름, 얼굴 모두 낯선걸로 봐서는 제가 사임한 이후에 N교회를 나오신 것 맞나요? 어떤 고민을 나누다가 여기까지 오시게 됐는지 몹시 궁금하네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번 나눠주시면, 저와 또 여기서 함께 생각을 키워가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 도움 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해요. 정말 삶으로 이끌어낸 글이라 내용의 유익과 감동이 공존하는군요. '영혼없는 직장인'의 1일인 저에게 강한 도전과 깊은 고민을 이끌어 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나도 아직 직장생활에 대해서는 고민이 여전히 많은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더 자주 만나 대화하고, 대안을 찾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고. 그러나 어쩌면 우리가 struggling하는 모든 문제들이 죽을 때까지 정답없이 대안을 시도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고민없이 끌려 가다가는 어디로 끌려가는 지도 모른체 막 가다가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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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는 소중한 많은 것을 잃어 버린 자신을 발견을 한다는 거지. 그래도 최근 연말인사에서 승진하면서 경험한 것 하나는 '세상에서의 성공'을 내려 놓을 때, '하나 님이 주시는 성공'의 일부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 마치 다니엘이 자신이 가진 지위를 얼마든지 포기할 준비가 됐을 때 더 높은 지위가 주어지고, 더 견고한 위치를 갖게 되었던 것과 같이, 세상의 방식을 기꺼이 거부하려 할 때 하나님이 보여 주시 는 길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암튼 계속 그리스도인의 직장생활에 대한 좋은 대안을 찾아 가면 좋겠다. 다음에 이 주제에 대해 서 좀 더 focused 된 글을 한번 써볼까해. 그 때 더 많은 생각을 나눠보도록 하자. 응원과 격려에 다시 한번 감사해^^

K교단에 소속된 전도사입니다. 공유를 통해서 글을 읽다가 울컥울컥했습니다. 지금 제가 무슨 일 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 힘을 쏟아야하는지, 어떻게 주어진 시간을 사용해야할지 반성하게 되는 글이였습니다. 좋은 글, 진솔한 글 너무 공감했고,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 글을 통해 제가 생각지 못했던 많은 분들과 공감하고 교류할 수 있어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전도사님들이 처한 현실은 정말 겪어 보지 않은 분들은 이해 하기 쉽지 않은 매우 고달프고 힘든 과정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본인과 주변의 많은 눈물과 헌신 없이는 그 힘든 시기를 지나가기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기에 더욱 많은 응원과 격려 돌봄과 배려가 필요하다는 생각 들구요. 불합리하고, 애초에 문제가 많은 시스템은 적극적인 저항과 대안 제시를 통해 함께 바꿔 나갈 필 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 기회 있는대로 좀 더 많은 얘기 들려 주시면 저의 생각이 자라가 는대도 많은 도움 될 것 같습니다. 찾아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안녕하세요. K형님 공유로 이 글을 읽게 된 J교회 S입니다. 좋은 글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는 신앙이 생긴 후 한동안은 개인만의 구원과 예배에 몰두했고, J교회에 오면서는 교회 공동체 전 체의 구원과 예배에 몰두했는데, 이 글을 읽고 나니 중소규모의 공동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 네요. 그 중요성이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말씀하신 대로 개인, 중소규모, 교회 전체의 역할이 존재하겠는데, 현대 기독교에서는 쏠림 현상 이 심한 것 같습니다. 저부터 가정 예배, 개인 예배로 돌아가야겠네요.

안녕하세요. J교회를 이끌어 오셨던 김서택, 화종부 목사님과 그분들의 영적 멘토였던 로이드존 스 목사님은 제가 사역을 하게 되기까지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셨던 분들이라 형제님께서 하시는 말씀 정말 잘 이해합니다. 전도사 시절 제 소망도 앞에 언급한 신실한 목사님들처럼 양떼들을 깊고 예리한 말씀으로 잘 섬기 는 것이었죠. 그러나 제가 사역을 하면서 깨달은 많은 한계는 좋은 예배, 강력한 말씀의 증거는 신 앙의 좋은 출발점일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성도들의 삶 구석구석을 치유하고, 회복하고, 훈련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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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정말 안타까왔던 것은 성경이 성도들의 삶의 중요한 기반으로 제시하는 '가정'이 제 역할 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어요. 저와 제 아내도 불신자 부모님 아래서 broken family로 자라 왔기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기반은 언제나 교회 공동체였고, 그런면에서 어쩌면 가정보다 교회를 훨씬 더 삶의 중요한 우선순위로 삼 아서 살아왔죠. 저와 비슷한 성장배경을 가졌거나, 가정보다 교회에서 더 큰 영적 영향을 받은 분 들은 대부분 비슷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건강한 가정이 회복되지 않은 체로 건강한 성도, 건강한 교회를 세우려는 노력은 마치 밑빠진 독에 물붙는 작업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을 아껴주고 잘 돌봐주는 교회 공동체 속에서는 잘 지내는 것 같다가도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 면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것은 가정 뿐 아니라 학교, 직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의 영향력은 단지 교회 내에서만 의미가 있고, 그곳을 벗어나는 순간 무기력해지는 거죠. 바로 그 깨달음이 교회 사역에 제 인생을 걸어야 겠다고 결심했던 저를, 다시 가정/학교/직장에서 의 성도들의 삶을 깊숙히 고민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했고, 결국 사역을 그만두고, 좀 더 현실적 인 삶의 영역에 복귀해 대안을 찾아가게 했던 것 같습니다. 암튼 고민과 깨달음 나눠주어 정말 감사드리구요. 계속 교제하면 좋겠습니다.

글을 시간을 가지고 읽다보니 현재 지금 제가 고민하는 부문과 많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네요. 예 를 들어 가정에 대한 부분, 직장에서의 삶이 대표적인 것 같고 나머지 부분들도 공감이 되어 유심 히 읽었습니다 현재 가장 큰 고민은 가짜로 살고 싶니 않다인데 쉽지 않은 것 같고 많은 싸움들을 헤체나가야하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주님을 믿는 삶으로서의 직장인 그리고 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치열할 수 밖에 없음을 느끼 며 인정하고 있고 한걸음 한걸음 내딛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근윤이형! 제가 더 치열해져야 하겠습니다.

직장과 가정에 대한 고민은 20대를 넘어 30대로 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어쩌면 내가 지금 새로운 대안을 찾아 가고 있는 것도 그 부분에서 번번히 넘어지는 청년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를 함께 넘어 보고 싶어서 인지도 모르지. 이제 막 직장과 가정에서의 본격적인 삶을 시작하는 성만이에게도 앞으로 수많은 도전의 순간들 이 올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은 정말 하고 싶은 조언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집중적인 관심과 에너지의 투입이 필요하다는 거야.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열정을 쏟아서 네가 처한 상황에 서의 최선의 대안을 찾아가지 않으면, 어느새 약간은 느슨하게 별로 만족스럽지 않은 상태에 익숙 해져서 살아가는 너를 발견하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삶의 역동성은 많이 잃어 버리게 되지. 암튼 함께 고민 나눌 수 있어 너무 반갑다. 계속 소식 전하도록 하자. 이런 글 써주어서 고맙습니다. 어딘가에 뼈저리게 고민하는 목회자가 꼭 있을거라고 막연히 기대만 했는데, 그 아픈 고민의 흔적 을 고스란히 발견한 것 같아 기쁩니다. 글 내용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공감이 되구요. 후반의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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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홈비즈니스-홈교회로 이어지는 사유가 쉽사리 기존의 사유체계로 흡수되지 않도록 잘 발 전시켜주기를 기대합니다. 예를 들면, 미국 같은 경우 사회사상으로서 보수주의나 자유주의가 유 사한 주장을 하는 셈인데, 그것이 작은 정부, 홈스쿨 옹호 등 여러 모양으로 겹치는 지점이 있어 보 이지만 그 근거에서는 다른 지점이 엿보입니다. 좀더 다양한 전문가들의 식견을 통해 다듬어가는 일이 이후로 이어지면 좋겠다 싶군요. 저도 이 글을 공유해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우선 글에 대한 의견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실 이 글은 저와 개인이고 인격적 인 친분이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저를 아끼고, 제 삶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에게 어떻게든 내가 살아가는 삶의 이유와 방향을 나 누는 것이 맞다는 생각 때문에 이글을 쓰게 됐습니다. 그래서 약간은 개방된 페이스북에 올리는 것이 괜찮을지에 대해 꽤 오래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제 생각이 개인적인 것이긴 하지만, 제가 다루고 있는 삶의 주제가 이미 개인적이지 않은 영 역들을 다루고 있고, 생각과 대안이 구체적으로 정립되었다기 보다는 성장해 가는 과정에 있기에 좀 더 많은 분들의 집단지성을 통해 다듬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일단 공개 적으로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선배님의 친구분들 중에 워낙 다양하고 많은 분들이 계셔서 처음에는 약간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글이 제가 처음 생각한 것과는 약간 다르게, 이미 제 품을 떠나 계속해서 어딘가 로 흘러가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도 이것이 SNS의 가장 강력한 특징이 아닌가 생각해 요. 이미 이렇게 개방된 이상 할수 있다면 더 많은 분들과 생각을 나누고 소통하고 싶습니다. 꼭 공 유해 주시구요. 이 글에 대한 좀 더 많은 비판 글을 올릴 수 있는 분위기도 만들어 주시면 감사하겠 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보수주의 또는 자유주의 우파 기독교의 지향점과 제가 생각하는 차이점에 대해서 는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해서 한번 더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좋은 의견 감사드리고, 응 원 정말 큰 힘이 됩니다.

오늘 가까운 언니가 20페이지 가량의 글을 메일로 보내 주었습니다. 오랜 시간 고민했던 우리의 이야기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습니다. 반갑기도하고 분하기도하고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제 주 변에서도 시간이 갈수록 변해가는 목사님들을 봅니다. 그리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영의 일로 합 리화 시킵니다. 그리고 합리적인 이성으로 사고하거나 비판하지 못하고 맹신하는 성도들을 지켜 보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기도하는 자만 말하라는 논리에 맞서기엔 약함이 많으니까요. 도전을 받았어요. 이런 연대가 많아져야한다고 봅니다. 응원합니다.

반갑고, 고맙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글을 쓰면서 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많은 목회자 분들 께 누가되지 않을지 노심초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목소리를 내지 않더라도, 단지 같은 길을 가다 중단하고 다른 길을 가는 것만으로도 순수한 마음과 열정으로 목회를 하시는 많은 분들 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나 언제나 희망은 '창조적 파괴'와 함께 시작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뭔가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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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가는 것을 느낄 때 그것을 부인하고, 회피하고, 덮고 지나가려고 할 때는 오히려 문제가 더 커 지고, 솔직히 인정하고 돌이키면 처음에는 그것으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지만 결국은 더 큰 성공 의 발판이 되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회가 가장 많은 공격과 비판을 받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어쩌면 교회가 '창조 적 파괴'를 통해 자기를 쇄신하고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많은 사람이 등을 돌림으로 교회의 숫자가 줄 때가 적극적으로 개혁을 추진 해 볼 수 있는 변화의 적기라는 거죠. 아무튼 최근 목회자와 기독교인 고위 공직자들의 비리와 권위적인 행태로 많은 평신도들이 마음 이 상하고 힘들어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대안이 없어 답답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계속 새로운 생각을 제안하고, 그런 생각들을 많은 이들의 참여를 통해 성숙시켜 나가면 반드시 좋은 대안들을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격려하고 지지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스크롤 내리며 읽다가 출력해서 소장하고 있어야겠다는 마음이 드네요. 제가 정말 좋아하고 아끼 는 책 중의 하나가 '뒤틀려진 기독교'인데 한국판 뒤틀려진 기독교를 만난 느낌이예요.

자크엘룰은 제가 사역하며 대학부 아이들과 스터디를 많이 했던 작가 중 한분입니다. 그의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과 '뒤틀려진 기독교' 그리고 프란시스 쉐퍼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로널드 웰즈의 '신앙의 눈으로 본 역사' 이렇게 4권으로 기독교 가치관의 틀을 잡는 작업을 하곤 했죠. 분명 제가 생각을 정리해 가는 데 이분들의 노고가 녹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제 삶에 녹아 들어 있어 직접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는 딱 집어 내긴 어려워요. 자매가 무언가 생각이 깊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역시 엘룰의 팬이었군요. 응원합니다!

좋은 글입니다. 같은 방향의 길을 가는 순례자로 이 가정에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 깃들기를 소망 합니다. 글의 취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한가지 홈이나 가정, 혹은 가족이 갖는 "혈통주의"적 한계에 대한 고민이 더 있어으면 좋겠습니다. 평화!

'혈통주의'와 '민족주의'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분권/분산에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임에는 틀 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제가 가진 확신은 성경은 분명 모든 정치/경제/종교 시스템의 가장 기본 단 위로 가정을 두고 있고, 그 확장 형태로 '민족' 또는 '종족'을 기본 선교단위로 인정한다는 것입니 다. 법정에서 husdband-wife previlege 즉 부부간 비밀은 그것이 위법을 덮어주는 행위라도 범 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성경 역시 '사유재산'과 '법적지위'의 기본 단위인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구약에서 모든 하나님의 가시적 축복이 '가문'과 '후손'을 대상으로 베풀어 지는 것과, 반대로 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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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처벌과 저주 역시 '가정'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죠.(ex:언약궤를 잘 섬긴 아 비나답 가정의 축복, 가증한 재물을 탐한 아간 가족의 몰살 등) 그렇지만 가족 내에서만 허용되어야할 '축재'와 '권력에의 의지'가 정치/경제/종교적인 확장을 통 해 다른 가족의 권리를 침해하고, 사회적 불평등과 불의를 조장하는 방향으로 흐를 때는 철저하게 응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기본적으로 성경의 '안식년법'과 '희년' 제도, '토지제도'를 통해 지향했던 것 같아요. 열왕기 상 21장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보여주고 싶은 것도 최고의 정치 지도자인 '왕' 조차 자신의 가문의 경계를 넘어 다른 가문의 재물을 탐하고, 전횡을 일삼는다면 가차없는 하나님 심판의 대상이 된다 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을 통해서도 '가정' 또는 '개인'이 넘어가서는 안되는 욕망의 수위를 ' 이웃의 소유'를 탐하지 않는 것으로 분명히 하고 있죠. 그래서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경제적 부가가치의 대부분이 자본을 댄 주주에게 귀속되는 현재 의 '주식회사' 제도보다는 '수고의 열매'가 가족의 기업으로 축적되는 '가족기업'의 형태가 조금 더 성경적인 체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혈통주의'의 과도한 욕망은 분명 법적 시스템으로 견제가 되는 것이 옳구요. 이것을 위해 성 경의 '희년제도'처럼 한 세대의 부가 다음 세대의 부로 전이되는 ��� 어느 정도 한계를 정하기 위해 ' 상속세'나 '토지 공유제' 등의 제도 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도 마땅히 자발적으로 이런 '부와 권력의 고착화'를 막기 위한 제도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하구요. 암튼 현재로서는 불의하고 부패하기 쉬운 사회 구조의 가장 건강한 대안으로는, '말씀을 가르치는 경건한 아버지에 의해 세워진 정의롭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가정'과 그의 연대 정도가 아닌가 조 심스럽게 생각합니다.

출근길에 다 읽고 답변을 쓴다. 근윤이 글에 날카로운 비판은 불가능하다. 이유는 근윤이 이상으 로 그렇게 믿음대로 사는 사람이어야만 이 글에 뭔가 제시할 만한 의견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 훌 륭하다. 요즘 밤늦게 퇴근하다가 차 창밖을 보면 미니 축구장에서 야간 축구 경기를 하는 동호인 들을 볼 수 있지. 그 야간 경기를 비추는 조명등 중에 작은 하나가 깨지더라도 그들이 경기를 하는 데 아무 지장도 받지 않을 거야. 하지만 캄캄한 터널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작은 손 전등 하나는 모든 이를 살리는 귀한 불빛이 되지. 그래서 형도 가끔 생각한다. 내가 왜 일반 직장에서 기독교 직장으로 오고 말았는지.. 야간 축구 경기의 조명등 하나쯤 되는 이곳보다는 캄캄한 터널 같은 일반직장에서 부대끼며 빛과 소금의 역 할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퇴마록 같은 책을 만드는 곳에 들어가 선한 기독교 정신이 들어 있는 책을 기획하여 회사를 변화시켜가는 역할을 하지 않고 지금 뭐 하고 있나 하는 회의를 자주 하게 되지. 근윤이 글을 읽으니 아이 넷의 가장도 젊은 대학생 그리스도인처럼 패기와 열정으로 진리대로 살 고자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데 큰 도전을 받고, 대형 교회와 대기업을 경험해 본 바로 적극 공감하 게 된다. 부디 경희와 네 자녀들과 꼭 너의 가정이 길을 트는 모델을 만들어 생각이 닫힌 많은 그리 스도인에게 트인 생각을 불어 넣어주길 응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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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께서 홍성사에서 하고 계신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 하고 있어요. 제 소견으로는 앞으로 계속 기독교 영역과 세속 영역의 경계가 흐려질거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즉 세속 기업도 기독교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고, 기독교 기업도 세속 시장에 좀 더 가까이 갈거라 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우리 회사에도 신학교 출신이 저 포함 2명이 됩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 회사에서 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렌탈사업을 진행중에 있어요. 계속 이렇게 서로의 벽을 허물어 가게 되면 사실 나중에는 소속이나 주력 시장의 구분없이, 기독 교인들의 역할이 중요해 지리라 생각해요. 암튼 형님이 가진 독특한 경험이 기독교 문화권에 국한되지 않고 더 많은 영역으로 확장해 나갈 것으로 확신합니다.

근윤아. 개인적으로 앞부분의 글 보다 뒷부분의 글들이 구미가 땡겨 차분히 읽었단다(우리 가정 도 홈스쿨을 하고 있어) 기회가 되면 얼굴 보면서 얘기 나누면 좋겠다. 긴~~ 글 많이 공감하고 또 많이 생각하게 하는 아침이다.

엇... 이렇게 홈스쿨 가정을 발견하게 될줄 몰랐네요. 저희 가정도 이제는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 과의 연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혹시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교제하며 생각 을 나눌 기회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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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글이 아마도 home series 5종 세트 vision 글과 관련해서는 마지막 덧글이 되지 않 을까 생각합니다. 덧글 중반부에 보면 미국 보수주의 우파 기독교 진영에서 주장하는 작은 정부, 홈스쿨 운동 지지 등에 대한 우려의 말씀을 해주셨는데, 즉각적으로 답변하기보다는 충분한 숙고 가 필요한 주제라 생각해 답변을 좀 미뤘습니다.

일단 미국 보수주의 우파 기독교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략한 도식을 만들 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역사적: 독립선언서 < 헌법 2. 지리적: 북부 < 남부 3. 신앙적: 자유주의 < 근본주의 / 복음주의 4. 정치적: 민주당 < 공화당 5. 경제적: 수정자본주의 < 신자유주의 / 시장주의 6. 행정적: 큰 정부 < 작은 정부 7. 조세정책: 증세 < 감세(특히 부자 감세) 8. 외교정책: 온건 < 강경(전쟁지지) 9. 이민정책: 친이민 < 반이민 10. 교육정책: 공립학교 기도 / 성경교육 반대 < 찬성 11. 보건정책: 보편적 건강보험 찬성< 반대 12. 생명윤리: 낙태 찬성 < 반대 13. 인종문제: 차별 반대 < 찬성 14. 여성문제: 여성평등 찬성 < 반대 15. 동성결혼문제: 찬성 < 반대 16. 성경해석문제: 문맥적 해석 < 문자적 해석 17. 교회와 사회의 관계: 적극적 참여 < 소극적 분리주의

이 외에도 대립각을 세우며 뚜렷한 자기 주장을 하는 많은 영역들이 있지만 현재 그들의 에너지가 가장 많이 쏠리는 영역들은 위와 같은 주제들인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런 성향은 한국의 보수 우파 기독교에도 매우 영향을 많이 주었기 때문에 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한국 교회 개혁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대립적인 견해는 불과 250년밖에 되지 않은 미국의 건국초기부터 남북전쟁, 대공황, 세계 대전, 월남전, 911테러에 이르기까지 미국 역사의 고비고비 마다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했죠. 그러면 이 진영이 왜 적극적으로 홈스쿨 운동을 일으키게 됐느냐 하면 60년대 민주당의 영웅이었 던 케네디 대통령이 대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공립학교에서의 기도와 성경교육을 금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창조 진화 논쟁이 가열되면서 급기야 미국 공립학교 교육이 창조론의 전면적 배제가 이뤄지면서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의 탈공립학교 운동이 시작되고, 그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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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인기를 얻게 된 것 중 하나가 홈스쿨이었습니다. 그렇게 80년대부터 시작된 홈스쿨 운동이 지금은 미국 전역에 400만 가정에 이른다고 하니...평 균 자녀수를 3명으로 계산하면(실제 미국 홈스쿨 가정의 평균 자녀수는 5명, 한국은 3명이랍니 다.) 1천만명이 넘는 홈스쿨 학생들이 존재하는 샘이죠. 30년만에 비약적인 발전을 한 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홈스쿨을 하고 있는 그룹 중에 우파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이 많고, 아무 래도 이분들이 작은 정부, 감세 등의 주장을 하다 보니 홈스쿨 그룹이 상대적으로 제도개혁, 사회 참여 등으로 세상에 영향을 주려하는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에게는 조금 이기적으로 비춰질 수 있 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만들어 가고 싶은 홈시리즈 5종 세트 비전과는 차이점을 생각 해 보자면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세상에 대한 인식, 즉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 설정 부분입니다. 분명 미국 우파 기독교는 자유주의적인 사회의 움직임을 보편적인 기독교적 가치를 해치는 적대 적인 시도로 보고, 그들과의 대결구도를 형성하며 교회와 세상 사이에 높은 담을 쌓는 방식으로 대응해 왔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한국의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죠. 그리고 그들이 홈스쿨을 추진 하는 이유도 그런 분리주의적이고 이원론적인 이유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홈시리즈 5종 세트를 추진하고 싶은 이유는 교회가 그런 담을 허물고 조금 더 깊이 세상 속에 파고들어서 기독교의 고유한 가치를 보존하면서도 더 적극적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그 들 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은 동기가 강합니다. 그래서 홈스쿨을 하는 목적과 기한은 분명 자녀들이 스스로 선악을 분별할 수 있을만큼 분별력이 자랐을 때 그들을 세상 속으로 파송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missional church 즉 보냄받은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죠.

이에 대한 더 깊은 논의는 나중에 쓰게될 홈스쿨에 관한 글에서 더 자세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일단 홈시리즈 5종 세트에 대한 서론으로서의 논의는 여기서 마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근윤 페이스북 페이지 http://www.facebook.com/musc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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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壬辰年 새해를 맞으며 근윤, 경희, 성하, 수하, 준하, 슬하 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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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darity ser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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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ed new church 새로운 교회 연대 Ⓒ 이근윤, 2011

기획. 6699 PRESS 도움. 박혜미 디자인. 이재영 전화. 010-9878-8690 메일. jaeyoung1214@gmail.com -

6699 PRESS는 사람과 세대 사이의 소통과 이해를 말하고 듣는, 독립적이면서 집합적인, 소규모 출판사입니다. 당신의 자유로운 생각과 다양한 세계관을 존중합니다. 당신의 젊은 감성과 지성을 책이라는 소재에 담는 것은

6699PRESS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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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교회 연대

참여, 공유, 개방, 연대의 힘과 필요성

비록 개독교는 무너져 흩어지더라도, 세상 속에 흩어진 그 가정들이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연대하여 ‘소수 디아스포라 교회’가 되어 위대한 솔로몬 왕국도 이루지 못했던 세계의 심장부를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그런 일들이 일으킬 것이라 소망해 봅니다. /본문 중에서

이근윤

SS 66 99 PRE


need new 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