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u on Google+


초판 발행 2011년 12월 22일 재판 발행 2012년 1월 6일 최인기 펴낸이 최 영 신 펴낸곳 창 아 트 지은이

등 록 주 소

485-2007-00001호 광주광역시 광산구

ISBN 12345678 잘못된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 값 15,000원


책을 내면서

“나는 일을 해야 살맛이 난다.”

여수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1999년 가을에 ‘일과 삶을 사랑한 작은 거인’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었다. 그 후로 12년이 흘렀다. 그 사이 내 삶에도 변화가 있었다. 다시 두 대학에서 총장 을 지냈고, DJ 정부에서 행정자치부장관으로 일했으며, 17대와 18대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도 했다. 그 동안 나는 어느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던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 일에 대한 성과는 남들이 해주겠지만, 내 능력껏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한다. 유대인의 경전 탈무드에 ‘나무는 열매로 평가되고, 사람은 일로 평가된다’는 격언 이 있다. 스스로를 생각해 봐도 나는 일을 즐기는 사람이고, 일을 해야 살맛을 느끼는 사람이다.

4


책을 내고 나서 어느새 12년이 흘렀다. 그 동안 몇 번이나 책 한 권 내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서도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 한 것은 글을 쓴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우선 코앞에 산적 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했기 때문에 뒤로 미루었 던 까닭도 있다. 그런데 2011년은 넘기지 않아야겠다고 작심을 하 고 나서 틈나는 대로 그 동안의 일들을 정리하였다.

책의 내용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정리했다. 첫 번째 부분은 졸저 ‘일과 삶을 사랑한 작은 거인’ 속에 들어 있 는 내용을 보태고 빼서 다시 실었다. 12년 전 책을 통해 밝힌 이야 기들이지만 처음 내 책을 읽게 되는 사람들을 위해 다시 들려드리 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는 유년시절부터 청장년시절까지 내 삶의 편린들을 정리하였다. 유년시절, 중고등학교 학창시절, 대 학시절, 공직자로서의 첫걸음, 결혼 등의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두 번째 부분은 그야말로 일벌레처럼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 부분에는 행정관료, 대학 총장 시절 등을 지내면서 보고 느꼈던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세 번째 부분은 정치인으로 살아가면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정리 했다. 정치 입문 과정에서 있었던 일화, 17대와 18대 국회의원을

5


지내면서 내 나름으로 보람을 느꼈던 이야기를 엮었다. 네 번째 부분에는 자연인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내 생각들을 담 담하게 적어 놓은 글들을 모아놓았다. 굳이 제목을 붙여 보자면 ‘살며 생각하며’ 정도로 하면 무난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책 끝부분에 8년간의 다양한 의정활동과 원내대

표 시절 연설, 밝히고 싶었던 상임위원회 활동 내용 같은 것도 실 었다. 책의 제목을 다시 “일과 삶을 사랑하는 작은 거인”으로 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 삶이 한결 같은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었다.

12년 전, 처음 책을 낼 때 내 기분은 설레면서 뿌듯한 성취감도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책을 내도 괜찮을까 하는 조심스러 운 마음도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런 마음이다.

나는 늘 감사한다.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사람, 사회, 국 가에 대해 감사한다. 2011년 12월 저자 씀

6


차례

책을 내면서 4

part 1

기억의 저편

개구쟁이 철부지 시절 15 문전식객(門前食客) 20 우물 안의 개구리 23 새로운 도전 29 강원도 원성의 백련사 34 아련한 첫사랑의 그림자 40 천생연분으로 만난 아내 46

part 2

일을 해야 살맛이 난다

나의 별명 ‘작은 거인’의 유래 57 내가 행정고시를 선택한 까닭 60


사나이는 일로써 승부를 걸어야 한다 63 공직에서 성공하기 위한 필수조건 67 일은 사람이 한다 72 호남선에는 왜 비가 내릴까 76 5.18의 아픈 상처 치유 79 “뜻밖의 탈락” 87 예견(豫見)한 패배 93 직선제 대학 총장이 되다 99 ‘국민의 정부’ 행정자치부 장관이 되다 102 DJ와 YS 105 일이란 무엇인가? 113


part 3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정치적 인간

인간은 정치적 동물 123 드라마틱한 정치 입문 127 긴박했던 역전 드라마 132 국회 건교위 상임위원회를 자원한 까닭 136 늦깎이 초선 의원 139 국회의원의 꽃 ‘상임위원장’ 143 한미 FTA는 상위 1%를 위한 협정 148 영의정 자리도 사양한 최판서(崔判書) 154 4.27 화순군수 재선거는 선거혁명 163 내가 바라본 안철수 교수 168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 172 시련은 있어도 좌절은 없다 179 성명(聲明)-검찰 기소에 대한 입장 190 ‘1심 선고문’ 발췌 193 8년 연속 우수 국회의원에 선정된 보람 197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 나주 유치 전말(顚末) 202 영산강뱃길 복원(復元)하여 영산강 살리기 214 영산강 고대문화권의 중심 나주 221 살기 좋은 고장 1위, 주민이 행복한 화순 226 생물의약산업과 의학(醫學)의 중심 화순 230 보건안보의 든든한 지킴이 녹십자 화순공장 233 통합은 시대적 요구 237 최인기 수임위원장 산파 ‘민주통합당’ 출범 241

part 4

단상(斷想)-살며 생각하며

콤플렉스는 또 다른 힘 247 경부고속철도와 지율 스님 251 작고 알뜰한 정부 254 콩(菽)과 보리(麥) 257 K리그와 우리의 도덕불감증 261 때로는 조금은 어리석게 265 경쟁과 서열(序列)의 교육 269


승자독식(勝者獨食)과 패자부활(敗者復活) 273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 선생 277 사마천(司馬遷)을 생각하며 281 대학수학능력시험과 학교 교육 285 낙태(落胎), 혹은 인공임신중절(人工姙娠中絶) 289 보편적 복지 293 물대포 296

part 5

발언록 / 연설문

제268회 국회(임시회)비교섭단체 대표 연설문 307 제271회 국회(임시회)민주당 원내대표 연설문 320 대정부 질문 속기록 333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 위원장 발언 발췌 350

part

2012년,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에필로그

2012년,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367


1장

기억의 저편


개구쟁이 철부지 시절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나주 ‘솔개마을’이다. 오늘날에는 나주시 송월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내가 유년시절을 보내던 당시 근동(近洞) 사람들은 우리 집을 ‘최 참봉네’, ‘최부잣집’으로 불렀다. 증조부께서 참봉 벼슬을 지내셨 고, 할아버지 때는 삼천석지기 부농이어서 그렇게 불렀던 모양이 다. 이런 환경이었기 때문에 나는 별로 부족함이 없이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철이 들기도 전에 세상을 뜨셨다. 그래서 우리 육

15


남매는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무척 자 상하신 분이었는데 근동에서는 여장부로 소문난 분이었다. 할아버지는 육남매 가운데서 공부를 잘 하는 나에게 많은 기대를 거셨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늘 어린 나에게 “나라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어린 나이라서 ‘어떤 사람을 나라가 필요로 하는가’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러면서도 막연하게 나마 ‘나라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 다. 그런데 초등학교 시절, 나는 무척 개구쟁이였다. 어른들은 <뽀시 락장난>이 심하고 <부잡하다>고 했다. 공부도 잘 하고 심부름도 잘 하는데, 장난기가 심했던 것이다.

5학년 때 어느 가을 날이었다. 나는 우리 집에 세 들어 사는 형과 함께 마을 뒷산 밤나무 밭으로 갔다. 그 형이 나무에 올라가 밤을 따면 나는 아래서 줍기로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 형은 밤을 따는 족족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나에게는 한 톨도 주지 않았 다. 나는 기다리다 못해 직접 올라가 따기로 했다. 나무에 오르려면 손바닥에 침을 묻혀야 한다. 그래야 나무 등걸 을 잡을 때 미끄러지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어렵사리 나무 위로

16


올라갔는데 그만 사고가 나고 말았다. 썩은 가지를 밟았던 것이다. 이내 그 가지가 부러지고 나는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 바람에 팔이 부러졌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이 있다. 그날의 사고는 그야말로 불행 중 다행한 일이었다. 곤두박질친 곳은 아카시나무를 베어 낸 자리였 다. 아카시아 그루터기가 날카로운 창끝처럼 솟아 있었다. 만약에 그 그루터기에 찔렸다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어쩌면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창끝 같은 그루터기를 피해 떨어지는 바람에 기절한 상태에서 왼쪽 팔만 부러졌던 것이 다. 정신이 깬 후 어린 마음에도 하늘이 도와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고로 여러 날 입원을 했고, 깁스를 한 채로 거의 한 달간이 나 결석을 했다. 오랜 동안 결석을 하다가 학교에 갔는데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험은 나주 관내 전체 초등학교가 동시에 시 험을 치루는 <일제고사>였다. 그런데 나는 관내 일등을 했다.

또 이런 사고를 당한 적도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학교에서 우리 솔개마 을로 오는 중간에 작은 방죽이 하나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우리들은 으레 그 방죽에서 멱을 감았다. 요즘 같으면

17


환경오염 때문에 들 가운데 방죽에서 멱을 감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그때는 환경이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방죽에서 멱 을 감아도 괜찮았다. 그 시절의 방죽은 여름철 우리들의 무공해 놀 이터였던 것이다. 천혜의 풀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방죽에는 거머 리가 많았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설령 거머리 가 몸에 달라붙는다고 해도 떼어 던져 버리며 놀았다. 그날 우리들은 멱을 감으며 오래 잠수하는 내기를 했다. 물에 잠 겨 숨을 멈추고 오래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였다. 그때 손재근 이라고 하는 친구랑 동행을 했는데, 그 친구가 “잠수는 최인기를 따를 사람이 없다”며 은근히 부추겼다. 평소에 누구에게 지는 것을 싫어한 나라서 그 말을 듣고 승부욕이 생겼다. 나는 속으로 잠수 신기록을 세우겠다는 생각을 했다. 숨을 한껏 들이마신 다음 손가락으로 코를 잡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데 내 욕심이 지나쳤던 것이다. 숨을 멈추고 참는 데까지 참았다. 고통스러웠지만 신기록을 세우기 위해 조금만 더 버티자 하면서 참았다. 그리고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물 밖으로 올라왔는데 그 순간 졸도를 해 버린 것이다. 그 다음 일은 알 수 없었다. 어린 친구들이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데 때마침 나의 둘째형인 웅기형과 옆집의 임한득형이 그곳을 지나가

18


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는데 만약에 그 두 형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나는 저 세상 사람이 되어 있을 지도 모른 다. 참으로 오랜 세월 저쪽의 이야기이다. 가끔씩 그때 개구쟁이시절 을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마음으로는 철부지가 되 어 버린다. 어느 시인은 ‘지나가 버린 시간은 무조건 아름답다’고 노래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조금은 부끄럽기도 한 그 시절의 작은 실수까지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여 겨진다. 그것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19


문전식객(門前食客)

문전식객이란 글자 그대로 대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문 밖에서 밥을 먹는 손님이라는 뜻이다. 대개 손님이라고 하면 평소에 그 집 주인과 각별한 친분이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렇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손님이라는 말이 역설 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 의학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천연두라고 하는 전염병이 유행했다. 그 병에 걸려 치료 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얼굴이 곰보가 되는 불행을 당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 병에 걸리면 <손님>이 찾아왔다고 했다. 또, 밤에 도

20


둑이 들면 도둑놈이라고 하지 않고 <밤손님>이 들었다고 했다. 이렇듯 손님이라는 말이 특별하게 쓰이기도 했는데, 식객은 그야 말로 별다른 용무 없이 밥 한 그릇 얻어먹고 가는 손님이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문전식객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 집은 아 주 컸다. 안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깥대문을 지나 다시 안대문 과 사랑채를 거쳐야 했다. 그 집은 지금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인데 전라남도 문화재로 등록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할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우리 집 바깥대문 앞에는 커다란 가마솥 이 걸렸고, 그 솥에다 매일 밥을 했다. 그 소문이 퍼져서 우리 집 바깥대문 앞에는 매일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걸인은 물 론이고 지나가는 길손들도 찾아와 한 끼 식사를 해결했다. 어렸을 때라서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요즘처럼 선거가 많은 때라면 주위 사람들이 색안경을 쓰고 보았 을 지도 모른다. 다음 선거에 나오기 위해 시쳇말로 밑밥을 뿌린다 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시절이 아니 었고, 설령 그런다고 해도 할아버지의 연세로 봐서 어떤 목적을 가 질 상황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오로지 농사에만 전념하시는 분 이었다.

21


어느 날 나는 할아버지에게 “왜 우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 들에게 매일같이 공짜로 주십니까?”라고 물었다. “베풀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란다.”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그때 나는 그 말뜻을 이해하 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비로소 베풀 수 있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이라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성경에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도다’라고 했다. 아무 조건 없이 남에게 베푼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우면서 고귀한 일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 다. 그런데 깨달았다고 해서 그걸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각박한 세태 속에서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의 문이 닫혀져 버린 것은 아닌지 가끔씩 나를 돌아보기도 한다.

22


우물 안의 개구리

좌정관천(坐井觀天)이라는 한자 성어(成語)가 있다. 우물 안에 앉아서 하늘을 보면 하늘의 넓이가 우물 안에서 바라보 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좁은 사람을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한다. 나 역시 나주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늘 1등만 하니까 내가 최고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로 하여금 우물 밖에 아주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 분은 초등학교 때 문병로 은사님이다. 문병로 선생님은 우리 할아버지처럼 늘 나라

23


가 필요로 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면서 광주 서중학 교로 진학하라고 하셨다. 그때는 평준화라든가 학구제 같은 제도가 없었다. 누구든 실력만 되면 광주든 서울이든 이른바 일류 중학교에 진학 할 수 있었다. 그때는 시골에서도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은 서중학교를 목표로 했다. 그리고 서중학교에 합격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렇게 모두들 서중학교를 생각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하늘의 별 따기라고도 했다. 문병로 선생님은 “인기야, 너 정도 실력이면 서중학교 합격은 문 제없으니까 도전해 봐라”라고 하시면서 용기를 북돋워 주셨다. 할 아버지나 어머니도 서중학교에 합격하는 것을 바랐고, 할아버지께 서는 당연히 합격한다고 믿고 계셨다. 초등학교시절 내 꿈은 공무원이나 정치가였다. 그렇지만 집안 식 구들은 법관이 되기를 원했다. 실제로 초등학교 때의 내 별명은 변 호사였다. 말을 조리 있게 잘 한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드디어 서중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그때 나주의 여러 초등학 교 학생들도 서중학교에 응시했는데 합격자는 나 한 사람이었다. 서중학교 1학년 초에는 나주에서 광주까지 기차통학을 했다. 그

24


런데 할아버지께서 공부하는데 지장이 있다고, 2학기 때부터는 광 주에서 하숙하라고 하셨다. 말이 하숙이었지 고모네 집이었으므로 내 집 같이 편했다. 그런데 서중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싸움을 꽤나 많이 했다. 내가 호전적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광주가 집인 급우들이 일종의 텃세를 부리며 자꾸 싸움을 걸어왔던 것이 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싸우는 것을 <뛴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기고 지 는 것을 <해 본다, 못 해 본다>라고 했다. 조용히 있는 나에게 와서 ‘아무개가 한번 뛰자고 하는데 해볼 수 있느냐’고 부추겼다. 어린 마음에도 자존심은 있었던지 나는 상대가 누구이든 거부하지 않고 당당하게 응했다. 그렇게 해서 분위기가 조성되면 우리는 학교가 파하고 사직공원으로 향했다. 우리의 싸움터는 언제나 사직공원이 었다. 사직공원 후미진 곳에 대나무가 우거져 있었는데, 사람들의 왕래도 별로 많지 않아 한바탕 ‘뛰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나는 지금도 키가 작은 편인데 중학교 때 역시 키가 작아서 항상 앞줄에 섰었다. 그래서 싸움 상대는 대개가 나보다 덩치가 컸다. 그런데 체격적인 열세보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으레 불공정한 게 임(싸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광주 토박이고 나는 나주 촌

25


놈이었다. 응원이나 도움 같은 것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이를 악 물고 싸워 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싸우는 도중에 그들은 편파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내가 유리한 상황이면 뜯어 말리고, 내가 불리하면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는 법은 없었 다. 열세에 몰리더라도 기가 죽지는 않았다. 이렇듯 불공정한 싸움터에 수시로 불려 나갔다. 그들은 내가 머 지않아 백기를 들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회가 거듭할 수록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오기가 생겼다. 도시 아이들에게 질 수 는 없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고모네 집 마당 한쪽에 샌드백을 매달 아 놓고 틈나는 대로 주먹 단련을 했다. 샌드백만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스피드 훈련을 위해 고무주머니로 된 스피드볼도 두드렸다. 샌드백과 스피드볼을 열심히 두드리다 보니 싸움에 대한 자신감 이 생겼다. 누구든지 붙기만 하면 본때를 보여 주겠다고 벼르고 있 는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그리고 그날의 싸움은 나의 일방적인 우 세로 결판이 났다. 그날의 싸움은 금방 소문이 났고, 그 뒤부터는 아무도 나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급우들도 나를 달리 봤다. 그 랬는지 2학년 때는 반장으로 뽑아 주었다. 성적도 많이 향상되어 상위 그룹에 속했다.

26


서중학교에 다닐 때 참으로 많은 책을 읽었다. ‘서음(書飮)’이라 는 말이 있다. 글을 읽는 것[讀書]이 아니라 글을 마시듯[書飮] 아 주 많이 읽는다는 뜻이다. 특히 소설책을 많이 읽었다. 고모네 집은 학동이었다. 학동에서 학교까지 올 때는 버스를 탔 지만 하교해서 귀가할 때는 버스 보다 걸을 때가 많았다. 버스를 타지 않고 걸었던 까닭은 서점이 많이 있는 충장로를 경유하기 위 해서였다. 충장로에는 서점이 여러 곳이 있었는데 학교에서 나오 면 제일 가까운 첫번째 서점으로 들어가 소설책을 골라 읽었다. 그 런데 사지 않고 공짜로 읽기만 했기 때문에 서점 주인의 눈치가 보 였다. 그래서 다음 서점으로 자리를 옮겨 방금 전에 읽었던 책을 뽑아들고 연결해서 읽었다. 그런 식으로 몇 군데 서점을 거치다 보 면 꽤 많은 양의 독서를 할 수 있었다. 그때는 그런 식으로 1주일 에 소설책 한 권씩을 독파했다. 그 시절에 내가 읽었던 소설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이광수의 <젊은 그들>, 번역소설 <괴도 루팡> 전집 등이다. 괴도 루팡은 나 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게 했었다. 그리고 내 심금(心 琴)을 울렸던 책은 <나폴레옹>, <히틀러> 등의 전기였다. 어린 마 음에도 사나이라면 한 번쯤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와 같은 포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27


2학년 2학기가 되었을 때 공부에 더욱 매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서점 출입을 자제했다. 이 무렵 주위에서 서울의 경기고등학 교에 진학하라는 권유가 있었다. 그런 권유를 받았을 때 망설임보 다는 까짓것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3학년 진급을 앞둔 겨울, 나는 경기고등학교 합격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이것은 엄청난 도전이었다. 나주에 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내가 서중학교에 합격한 것이 우물 안의 개 구리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면, 경기고로 진학하는 것은 그야말로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이었다.

28


새로운 도전

나에게 경기고 진학을 권유한 분은 중3때 담임 은종규 선생님이다. 은종규 선생님은 국어를 가르치셨는데 무서울 정도로 엄격한 분이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만나면 아주 다정 다감하게 대해 주셨다. 경기고 진학을 권유한 또 한 분은 영어를 가르치셨던 김규현 선생님이다. 두 분 선생님은 가능한 실력이라 며 격려를 해 주셨다. 집안 식구들도 기대를 걸었다. 나의 정신적 지주였던 할아버지께 서는 내가 중2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큰형님이 아버지 역할을 대

29


신 하셨다. 큰형님은 은행원이었다. 큰형님 역시도 내 실력을 믿고 합격은 따 놓은 당상이라며 용기를 북돋워 주셨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경기고 진학을 결심하게 한 분은 외삼촌이다. 우리 어머니의 큰오빠인 외삼촌은 당시 한국은행 부 총재였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리고 맨 먼저 가 져야 할 것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다. 지금까지 너를 지켜 본 결 과 이번에도 너는 분명히 해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경기고로 목표를 정하고 정진해라.” 외삼촌의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내 가슴 속에서는 용기가 솟았고 의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나는 마침내 경기고 진학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목표 달성을 위해 촌음(寸陰)을 아끼며 준비해 나갔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외삼촌의 딸인 내 사촌누이는 나의 결정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제 아무리 공부를 잘 한다고 해도 지방 학생인데 감히 경기고를 넘보느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당시 경기고는 신입생 8학급 을 뽑았는데 이중 7학급은 경기중 학생들이 차지했고, 나머지 1학 급만 지방 학생들이었다. 전국에서 60명만 뽑히는 것이었다. 각처

30


에서 내로라하는 일류 중학교, 그 가운데서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 이 몰려 들었다. 조금 과장을 하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 서중학교에서는 12명이 응시했다. 그런데 절반인 6명이 합 격을 했다. 참으로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60명 중 에서 6명이니까 한 학급의 10%를 차지한 셈이다.

경기고 입시가 끝나고 나서 나는 속으로 무척 조마조마하고 있었 다. 나주의 초등학교 촌놈이 서중학교에 응시할 때나, 그리고 서중 학교에 다니면서 각종 시험을 볼 때나, 나는 늘 스스로에 대한 믿 음을 갖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그런데 경기고 입시가 끝나고서는 조바심을 떨쳐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경기고 는 역시 경기고구나’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통신이 발달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합격 여부를 알아볼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직접 학교에 가서 알아 봐야 했다. 합격자 발표일 나는 은행에 다니는 큰형님, 그리고 큰형님 친구와 함께 학 교로 갔다. 지금도 그때의 내 수험번호 <308번>을 기억하고 있다. 학교의 높지막한 벽에는 합격자 번호를 적은 두루마리가 길게 붙어 있었

31


다. 큰형님과 친구 분이 내 번호를 찾고 있었다. 나도 내 번호를 찾 고 있었는데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 봐도 내 번호 는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다 끝나는 것 같았다. 큰형님은 아무 말 이 없었고, 나는 큰형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낙방한 처 지에 광주는 무슨 면목으로 내려가나 마음을 갈피를 잡을 수가 없 었다. 그런데 큰형님 친구 분이 큰 소리로 외쳤다. “붙었다! 붙었어!” 그분이 합격자 발표 벽보 한 곳을 가리키며 또 한 번 큰 소리를 쳤다. 가리키는 곳을 보니 내 수험번호 <308번>이 적혀 있었다. 번 호를 얼른 발견하지 못한 것은 까닭이 있었다. 내 수험번호가 돌출 된 벽면 뒤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정면에서는 보이지 않았 다. 떨어진 줄 알았다가 합격된 것을 알았을 때 그 기쁨이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었다. 그때 나와 함께 경기고에 합격한 서중학교 동기 중에는 ADB 부 총재를 지낸 신명호, 한국신용정보 사장을 지낸 유혁근, 화공학 박 사 고윤석 등이 있다.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동기들이었기 때문에 이들과 지금도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이 가운데서 강선대, 신명 호, 유혁근 등 세 친구들은 참으로 깊은 인연이 있다. 서중학교 3년, 경기고 3년, 서울법대 4년, 도합 10년을 동문수학한 친구들

32


이기 때문이다. 경기고에 다니면서 나는 지방 출신이기 때문에 서울 출신 동기생 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한눈팔지 않고 책과 씨름했다. 1학 년과 2학년 때는 유도 도장에 다니면서 운동도 열심히 했다. 당시 경기고에서 내 성적은 반에서 상위권에 들었다.

33


강원도 원성의 백련사

백련사는 강원도 원성에 있는 작은 절이다. 대학시절에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이 절에 넉 달간이나 기거한 적이 있다. 경기고를 졸업한 뒤 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했다. 서중 학교 동창들인 박종열, 신명호, 유혁근도 함께 서울대학교 법과대 학에 진학했다. 서울대에 다니면서는 전 국회의원인 정대철, 재경 부 장관을 지낸 이헌재와도 친하게 지냈다.

34


강원도 원성의 백련사로 들어간 것은 대학 3학년 때 일이다. 그 해는 1964년으로 대학가에서는 연일 <한일협정비준> 반대 데모가 벌어지고 있었다. 사회 분위기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1951년 시작된 한국과 일본의 수교를 위한 조약의 교섭은 한국 의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비밀 회담을 통해 추진되었다. 14년 동안의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최종단계에서는 양국에서 모두 야당과 학생 등의 반대운동이 전개 되었다. 1964년 3월 정부가 한일외교정상화 방침을 밝히자 이에 반발하 여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으며 학생데모대가 중앙청 에 몰려가고 파출소를 파괴하는 등 시위가 격화되었다. 이때 나는 삭발을 하고 법대생들과 함께 단식에 들어갔다. 사태가 악화되자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학교에 휴교령 을 내리는 이른바 '6.3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때 우리 학교를 담당한 동대문 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있었는데 광주사람이었다. 당시는 정보과 형사들이 공공연히 학내에 들어와 서 학생들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요즘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 다. 광주사람인 그 형사는 나와 동향이라고 해서 평소 각별하게 대

35


해 주었다. 나 역시도 고향 선배라는 생각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해 별로 나쁜 감정은 없었다. 위수령이 내려지기 바로 전날, 그 형사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고 향 선배로서 인간적으로 충고한다면서 단식을 그만 두는 것이 좋 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고시도 패스해야 하고, 졸업 후 사회에 나 가 큰일도 할 사람이 장래를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우리 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져 있으니 빨리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단식을 계속하며 투쟁할 것인가, 해산하고 잠시 피신할 것인가를 놓고 토론을 했다. 결론은 해산이었다. 그리고 각자 피신 처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 나는 강원도 원성으로 가기로 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곳이었다. 우리 하숙집 아주머니의 친정 여동생이 살고 있는데, 찾아가면 도와 줄 것이라고 했다. 그 래서 나는 그야말로 낯선 원성으로 향했다. 하숙집 주인 여동생은 나를 백련사로 안내했다. 백련사로 가기 위해서는 큰길에서 두 시 간 넘게 산길을 걸어야 했다. 백련사의 주지스님은 28살이었고, 나는 21살이었다. 나이 차이 는 좀 있었지만 주지와 나는 이야기가 잘 통했다. 주지는 애주가였 는데 나는 가끔 그와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주지의 주량은 엄

36


청났다. 시쳇말로 말술을 마셨다. 제아무리 많이 마셔도 자세나 말 투가 흐트러지는 법이 없고 말의 논리가 정연했다. 나 역시 술을 잘 마시는 편에 든다. 아무리 많이 마셔도 실수를 한 적은 없다. 아마도 그 지주스님에게서 은연중 술 마시는 태도를 배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주지는 대금을 아주 잘 불었다. 그는 가끔씩 절 뒤 숲 속에 들 어가 대금을 불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쓸쓸해졌다. 당장이라도 서울로 달려가고 싶었다.

내가 백련사에 머물고 있을 때, 그 절에는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29살인 그 남자는 서울의 모 대학 법대를 졸 업했는��� 고시에 도전했다가 다섯 번이나 실패했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그의 실력은 아주 뛰어났다. 예를 들어, 특정 법률에 대해 논하라고 하면 의의, 목적, 내용 등을 한 글자도 빼먹지 않고 줄줄 이 외웠다. 심지어는 문제집의 몇째 쪽 몇째 줄에 어떤 문장이 있 다는 것 까지 외고 있었다. 그야말로 모르는 것이 없었다. 걸어 다 니는 육법전서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고시에 응하는 요령도 훤했다. 그는 실패 경험 을 통해 터득한 고시 준비생의 유의점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알려

37


주었다. 그런데도 그는 다섯 차례나 낙방을 한 것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고시에 대해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저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도 번번이 떨어지는데 어떻게 단 번에 합격하기를 바라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고시에 대해 내 나름 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첫째 고시의 재수(再修)는 없다는 것이었 다. 한 번 도전해서 안 되면 재도전은 안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힘 든 일에 젊음을 저당 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기 때문에 고시가 아니어도 할 일은 얼마든지 많다고 생 각했다.

내가 잠시 백련사에 지내고 있을 때도 학생데모와 야당의 격렬한 반대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꾸준히 한일회담을 추 진했고, 그 결과 1965년 6월 22일 한·일 양국정부는 14년 동안 끌어온 국교정상화 교섭을 마무리 짓고, 한국의 외무장관 이동원, 한일회담 수석대표 김동조와 일본 외무장관 시이나 에쓰사부로, 수석대표 다카스기 신이치 사이에 '한일 기본조약'이 조인되었다. 그해 7월 14일 민주공화당의원들이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조 약과 제 협정 및 그 부속문서의 비준동의안'을 단독으로 국회에 상 정하자 민중당 소속 국회의원 61명은 의원직사퇴서를 제출하며 맞

38


서는 등 여야의 대립이 극에 달했다. 결국 8월 14일 야당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한일협정비준동의안이 의결되었다. 당시 우리가 한일협정에 대해 반대했던 것은 <일본의 침략 사실 인정과 가해 사실에 대한 진정한 사죄가 선행되지 않았고, 청구권 문제, 어업문제, 문화재반환문제 등에서 한국 측이 지나친 양보>를 했기 때문이다. 특히 부속협정인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 제협력에 관한 협정’은 후에 일제 강점하 피해자 보상과 위안부 보 상 문제 등의 원인이 되었다. 1966년, 나는 대학 졸업반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제4회 고등고 시 행정과에 응시하여 수석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당시에 내가 받 았던 점수는 아직까지 그 기록이 깨지지 않았다고 한다. 행정고시 사상 최고의 점수가 내 공직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 다. 늘 점수가 높은 만큼 투철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공직생활을 했 던 것이다. 그런데 강원도 원성의 백련사에서 만났던 그 고시 준비생은 또 낙방을 했다. 내 경험으로 봤을 때 고시란 많은 것을 암기한다고 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정된 시간 에, 그리고 한정된 지면에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집약해서 잘 정리하는 능력이 바로 고시 합격의 관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39


아련한 첫사랑의 그림자

첫 저서 ‘일과 삶을 사랑한 작은 거인’ 을 냈을 때 책을 읽고 난 고향 후배가 <사모님한테 혼나지 않았습 니까?>라고 물었다. 이 ‘아련한 첫사랑의 그림자’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이 이야기에 대해 별다른 반응이 없 었다. 이번에 책을 내면서는 실을까, 뺄까를 놓고 아주 잠깐 생각 을 했다. 그리고 싣기로 했다. 지나가 버린 시간은 무조건 아름답 기 때문이다. 권력자도, 재벌도, 이름 없는 민초도,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다. 그래서 무조건 아름다운 것이다.

40


대학시절 여대생과 사귄 적이 있다. 그녀는 내가 솔개마을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다. 그런데 우리 반이 아니었기 때문에 친하게 지낼 수도 없었고,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 니었다. 그러면서도 초등학교 시절 그녀는 단정하고 귀여우면서 발랄했던 것 같았다는 기억을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녀는 광주의 여중학교로 진학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에 대한 기억도 차츰 희미해져 버렸다. 그랬다가 대 학시절 여름방학 때 고향 집에 내려와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서울에 있는 모 간호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여름방학이 라고 집에 내려와 있었다. 우리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공통점 때문에 서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방학이 끝나고 서 울에 가서도 가끔씩 만났다. 우리가 만남의 장소로 자주 이용했던 곳은 용산에 있는 ‘별다방’이었다. 기억은 확실하지 않은데 아마 디스크쟈키가 있던 음악다방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다방에 갈 때마다 ‘귀여운 꽃’이라는 제목의 클라리넷 연주곡을 신청해 들었 다. 우리는 그 음악을 들으면서 인생과 세상을 이야기하고, 미래의 청사진도 그려보았다. 그녀는 센스가 있었고, 의지도 강했다. 그렇게 자주 만나다 보니 더욱 친해졌고, 서로를 걱정해 주는 각 별한 마음도 생겼다. 이 각별한 마음이 ‘정(情)’이 아닐까 싶다. 그

41


리고 마음에서 늘 잊혀지지 않고 생각을 되뇌이게 하는 ‘사랑’이라 할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떻게 데이트를 즐기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때 는 이른바 ‘재건데이트’라는 것이 유행했다. 돈이 안 드는 데이트 를 말한다. 다방에 들어가면 찻값이 들기 때문에 걸으면서 데이트 를 하는 것을 ‘재건데이트’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는 주로 한강대 교 옆 둑길을 걸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의 만남은 대학 3학년 말까지 이어졌다. 나는 4학년이 되었 고 그녀는 3년제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지방의 어느 병원에 취직이 되어 서울을 떠났다. 서울에 취직할 수도 있는데 지방 병원을 택한 것은 그녀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였다. 가까이 있으면 내가 고시 준 비하는데 방해가 될까 봐 일부러 지방을 택한 것이다. 당면한 목표 가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그녀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고시가 끝났다. 신문에서는 내 수석 합격에 대해 지금까 지의 기록을 깨는 점수라고 크게 보도했다. 나는 고향에 가는 길에 그녀를 찾아가 만났다. 그녀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면서, 그동안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그걸 받아주신 주님 께 감사한다는 말도 했다. 그러고 나서는 자기를 잊어 달라고 했다.

42


큰 소망 하나를 얻었으니 자기를 잊고 내 갈 길을 가라는 것이었 다. 너무도 당황스러워 말문이 막혔다. 헤어진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큰 소망(고시 합격)을 얻었으니 자기를 잊어 달라니, 얼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지방 병원으로 가면서 이 미 나와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었노라고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에게 큰 실수를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봐도 그럴 만한 일이 없었다. 그녀가 차분하게 그 까닭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딸 다섯 중 막내 딸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네 언니들이 사업가, 의사, 군인 장 교 등을 만나 결혼했는데 모두가 미망인이 아니면 이혼녀로 살아 가고 있었다. “언니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우리 자매들의 팔자라고 생각했어요. 피할 수 없는 타고난 운명인데 저라고 다를 수는 없겠 지요. 저는 인기 씨가 앞으로 큰일을 할 사람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런데 저를 만나거나 인연을 맺게 되면 저로 인해 잘못이 생길 수 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게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미 오래 전 에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시골에서 직장을 구한 겁니다. 못 만난다 고 해도 인기 씨를 위해 평생 기도하겠습니다.” 나의 앞날을 위해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하는 그녀의 마음에 감동

43


했다. 그렇게 되니 번민과 갈등이 더욱 심했다. 그녀의 마음을 돌 이킨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판단되었다. 여러 날을 힘들게 보 내다가 결국 그녀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헤어지기로 마음먹었지만 감정이 무 자르듯 싹둑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녀에 대하 애틋한 감정이 여진처럼 마음에 남아 있는데 그녀는 서둘러 결혼을 해 버렸다. 결혼 상대는 내 학교 선배였다. 그 선배는 광주에서 많은 활동을 한 저명인사이셨고 나의 큰 성원 자이시기도 하였다. 세월이 한참 흐른 최근에 두 아들은 서울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 을 들었다. 얼마 전에는 두 내외가 득량만 바다가 보이는 한적한 시골에서 동네 분들과 농사도 지으며 여유롭게 살아간다는 소식을 전화를 통해 들었다.

그녀는 젊은 날 애틋한 감정을 갖게 했던 첫사랑이었다. 그녀는 헤어질 때 나를 위해 평생 기도하겠다고 했다. 지금도 그 말을 기 억하고 있다. 그 약속에 대한 기대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에 넘치는 나만의 욕심일까? 고등학교 때 피천득 님의 ‘인연(因緣)’이라는 제목의 수필을 공부 한 적이 있다. 글쓴이와 일본 소녀 ‘아사코(朝子)’와의 만남과 헤어

44


짐의 사연을 이야기한 수필인데 국어시간에 공부하면서 가슴이 뭉 클해지는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가끔씩 그 아름다 운 글을 떠올리면서 인간의 노정(路程)이 인연에 의해 맺어지고 또 헤어지기도 한다는 점에 수긍을 하기도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아련한 옛 추억 한두 개는 갖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 이다. 그래서 그 시절은 정녕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45


천생연분으로 만난 아내

사람들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인연을 맺게 된다. 불가(佛家)에서는 부모와 자식도 인연에 의해서 맺어지 는 것이고, 육신의 수명이 다 해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도 인연이 라고 말한다.

아내는 나와 함께 40여 년을 살아왔다. 오늘의 내가 있도록 조용 히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주위사람들은 그런 아내를 현모양처라 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팔불출이라는 말을 들을지는 모르지만

46


내가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좋은 아내였다고 생각한다. 인연 중에서 부부의 인연처럼 각별한 인연은 없을 것이다. 흔히 들 부부의 인연을 천생연분(天生緣分), 또는 천정배필(天定配 匹)이라고 한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누구와 연분을 맺어 살아야 한다고 정해지기 때문에 천생연분이라고 하고, 하늘이 정 해 주는 짝이기 때문에 천정배필이라고 하는 것이다.

경기도에서 사무관 수습을 마친 뒤, 청와대 사무관으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맞선이 들어왔다. 결혼하기 전 까지 맞선을 서른대여섯 번은 보았던 것 같다. 내 친척 중에 고모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내 결혼에 대해서 누 구보다도 열성적이었다. 그분은 항상 내 사주를 갖고 다니셨다. 그 런데 그 사주가 어떻게 해서 전주에 있는 어느 절의 스님 손에 들 어가게 되었다. 그 스님은 내 사주를 전주에 사는 중매장이에게 보 여 주었고, 그 스님은 지역의 내로라하는 한 사업가에게 그걸 보여 주게 되었다. 그 사업가는 전주에서 양조장, 학교, 정유대리점, 염 전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차 나의 장인장모가 될 그 분들은 사주나 관상 같은 것 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스님에게 받은 사

47


주를 용하다는 동양철학가에게 보여 주었는데, 사주 풀이가 아주 좋게 나왔다는 것이다. 관복과 재복은 물론이고, 능력이 뛰어나고 인정이 많아 사람들이 많이 따르며,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뛰어 난 리더가 될 거라는 것이었다. 사주 풀이로 봐서는 일단 합격이 된 셈이었다. 그래서 장차 장인이 될 그 사업가는 당시 교육부 국장으로 있는 친척을 통해 내 뒷조사까지 하였다. 그 국장 역시 나에 대해서 좋 게 말해 주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맞선이 이루어졌다. 서울에서 맞선을 보았다. 요즘에는 소개팅이라고 해서 처녀총각 당사자끼리 먼저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일이 진척이 되었을 때 양가 부모들이 만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는데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대개는 양가 가족들도 함께 참석하고 나서 나중에 따로 이 야기할 시간을 주었다.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 큰누님이 참석했고, 처녀 쪽에서는 부모님과 외삼촌이 참석했다. 처녀는 나보다 키가 컸다. 눈매도 서글서글하고 교양도 있어 보였다. 나는 그녀가 동양 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지금까지 맞선을 보았던 처녀들 가운데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 자리 에서 속으로 저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전주에서 관상장이로 유명한 동양철학가가

48


바로 그녀의 외삼촌으로 가장했다고 한다. 요즘도 대기업에서 신 입사원을 면접할 때 동양철학가를 입회시킨다고 하는데, 그 분은 외삼촌으로 위장하여 내 관상을 직접 보기 위해 참석했던 것이다. 맞선 후 처가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외삼촌으로 가장한 관상장이는 “체구는 작으나 똑똑하여 큰일을 할 인물일 뿐만 아니 라 재복도 타고 났다”고 했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 사랑인데 시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흠이 고, 총각의 키가 너무 작다”며 부정적인 의견이었다고 한다. 그리 고 아버지는 아주 좋은 점수를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처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신부수업을 하고 있 던 중이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서 그저 부 모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 이른바 순종형이었던 것이다.

맞선을 보고 나서 며칠 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 그녀도 별 말이 없이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다시 전화를 했다.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까닭을 물었더니 어머니에게 만나 도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만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언짢기보다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태도가 더 좋게 보 였다. 그러자 마음이 더욱 쏠렸다.

49


나는 주말이 되자 그녀에게 전화도 하지 않고 무작정 전주로 향 했다. 그리고 평화여객자동차회사로 찾아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큰 절을 하고 딸과 결혼하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 그 분은 망설이지도 않고 흔쾌히 허락을 해 주셨다. 용기가 맘에 들었 다며 사위로 삼겠다고 하셨다. 그런 다음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나 와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고 통고를 했다. 가장의 결정이라서 따 르기는 하면서도 장모될 분은 끝까지 내가 맘에 들지 않는 눈치였 다. 그런데 그날, 장인될 분이 대뜸 결혼을 허락해 준 것은 또 다른 까닭이 있었다. 내 용기를 높이 사서 그런다고 했지만 그분은 아무 도 몰래 자가용을 몰고 나주 솔개마을을 다녀가셨다. 어떻게 보면 뒷조사를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분은 그만큼 매사에 치밀하고 신중했다. 그분은 동네 주막과 읍내 노인당을 찾아다니며 눈치 채지 않게 우리 집 내력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읍내 노인당은 우리 할아버지 께서 땅을 희사하고 공사비를 대 지은 것이어서 당연히 좋은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분은 주막과 노인당에서 우리 집 내력을 소 상히 듣고 결심을 확실하게 굳히셨다고 한다.

50


결혼해서 슬하에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딸만 연이어 낳았 는데 더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잠시 고민했다. 집사람과 맞선 볼 때, 외삼촌을 가장하여 나왔던 유명한 관상쟁이가 ‘내 나이 35살 이후에는 반드시 아들을 낳는다’는 예언을 믿어보기로 하고, 집사람이 고구마를 많이 먹되 고기는 안 먹는 식이요법에 따라 몇 년을 고생해 준비한 끝에 7년 만에 드디어 아들을 낳는데 성공하 였다. “여보, 고생이 많았소!” 그 뒤로 집사람의 발언권이 좀 쎄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우리 집의 가훈은 ‘정직 성실 최선’이다. 아이들은 이 가훈을 잘 따라 주었다. 그렇게 성장하여 아이들은 지금 제 각각 사회 일선에 서 제몫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큰 딸정은이는 교양 있는 미인형 얼굴과 체구를 갖고 있으며, 서 울대학교 미학과 박사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시댁이 있는 김해시 에서 자기의 전공을 살려 크레이아크[Clay Arch : 도자(陶瓷)예 술] 미술관 관장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만 41세의 나이에 4급 상당 별정직으로서 직원 29명을 거느리고, 부지 3,000평에 미술 관, 전시관, 체험관, 연수관 등 건물로 지어진 미술관 운영책임을 맡아 일하는 것을 큰 보람으로 생각하면서, 김해시민들에 대한 미 술 등 예술분야에 봉사하는 일에 남다른 열정을 기울이고 있고, 창

51


원 MBC TV에서 '금요문화 해설가'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재능이 다양한 딸이긴 하지만 아버지로서는 무척 기특하게 생각 하고 있다. 큰 사위는 서울상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근무 중인데, 184cm의 훤칠한 키에 영화배 우 못지않은 미남이면서 착실하고 성실하며 겸손한 생활자세 때문 에 장모로부터 언제나 칭찬을 듣는 모범생이기도 하다. 둘째딸 보윤이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여 전문의 과정까지 마치 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계속 공부하여 미국의사 전문의 과정을 또 다시 마친 엄청난 노력파이자, 제 아버지를 닮은 딸과 외할아버 지인 나를 닮은 말 잘하는 아들을 키우며 현재 세계적으로도 유명 한 스탠포드 의과대학 의사로 근무하고 있다. 둘째 사위는 샌프란 시스코의 전 세계에서 널리 활용되는 기업용 소프트웨어 전문기업 ‘오라클’에서 가장 젊은 동양인 임원으로 근무 중이다. 얼굴이 가장 예쁜 셋째딸 은진이는 중대대학원을 졸업한 뒤 제일 모직 패션디자이너로 근무하다가 결혼하여 직장을 마다하고 딸아 이를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아가고 있다. 사위는 영국에서 석사과 정을 마친 엔지니어인데 지금은 삼성전자에서 퇴직하고 개인 사업 을 하고 있다.

52


외아들 막내 재혁이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신랑감으로 제일 인기가 있다는 펀드매니저로서 한국투자증권에서 일하고 있 다. 얼굴 모습은 나를 닮은듯하면서도 제 엄마의 덕성스러움을 닮 아 요즘 인기남형인데도, 서른한 살 나이에 장가갈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어 아빠 엄마로부터 결혼독촉을 받고 있다. 아이들 네 명 모두가 건강하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 어, 우리 부부는 늘 고마워한다. 주변에서 다복한 가정이라며 부러 워하는데 이 또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다행스러운 것은 네 아이들 모두가 나를 닮았다고 생각하는데도 다른 사람들은 아내를 더 많이 닮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저 정도로 잘난 인물이 나온 것이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보면, 아이들이 머리는 나를 닮고, 외모는 제 엄마를 닮은 것이 분명하다. 이 또한 아내에 게 감사해야 할 분명한 이유라 하겠다. 아이들이 제 직분을 다 하면서 건전한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 도록 교육에 신경을 쓴 것도 매사에 성실한 아내 덕분이다. 사실 나는 일에 파묻혀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서 세세히 신경을 쓰지 못 했다. 아내가 아이들 교육과 남편 뒷바라지, 시어머니고 모시고 살 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지금도 미모와 교양을 겸비한 동양적 현모 양처인 아내에게 늘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

53


내가 정치를 시작한 뒤로 아내는 고생을 더욱 많이 하고 있다. 내 가 공직에 있을 때 아내는 오로지 남편과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 면서 가정만 지키고 살았었다. 그런데 내가 정치를 하고 나서는 내 조의 역할이 더욱 많아졌다. 선거철이면 표 달라는 부탁도 해야 하 고, 기분이 언짢아도 감정을 숨기고 늘 자신을 낮추며 살아가야 한 다. 처음 정치에 입문할 때 아내는 온전히 찬성하지는 않았다. 그 런 아내였는데 지금은 내가 바빠서 하지 못하는 여성당원 관리도 잘 하고 있다. 그런 아내를 보면서 늘 고맙고, 더 잘 해주지 못하는 마음에 미안함을 느낄 때가 많다. 여보, 고마워!

54


2장

일을 해야 살맛이 난다


나의 별명 ‘작은 거인’의 유래

공직생활을 하면서 나는 ‘작은 거인’과 ‘두목’ 이라는 두 개의 별명을 얻었다. 나는 그 별명을 좋아한다. 나를 아 주 적절하게 잘 비유한 것이고, 부하직원들이 애정의 표시로 붙여 준 것이기 때문이다.

‘두목’과 ‘작은 거인’의 유래가 궁금하실 것 같아 밝히고자 한다. 내가 내무부에서 과장, 국장, 차관보로 근무하던 시절에 부하직원 들이 키는 작지만, 목소리가 크고 다부진 외모에 밤을 새우면서까

57


지 일에 열중하면서도 술자리에서는 술을 마다하지 않았고, 일하 는 과정에서 부하직원들뿐만 아니라 상사에게도 통 큰 결단을 촉 구하고 건의하는 배짱을 가졌다고 해서 부하들이 ‘두목’ 또는 ‘작은 거인’이라고 붙여준 애칭이다. 나는 주변에서 불러주는 별명이 좋다. 1996년, ‘일과 삶을 사랑 한 작은 거인1’ 출간 이후, 12년 만에 집필한 이번 책에도 ‘작은 거인’이라는 제호를 그대로 사용했다. 나는 업무를 추진할 때는 화장실에 가는 시간마저 아꼈고, 쉴 때 는 세상만사를 모두 잊고 쉬었다. 그런 내 스타일을 과원들에게도 요구했던 것인데 누구 하나 불평을 털어놓는 사람은 없었다. 시쳇 말로 조일 때는 조이지만 풀어줄 때는 확실하게 풀어주었던 것이 다. 과원들은 공(公)과 사(私)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내 스타일을 좋아 했다. 그래서인지 내 지시가 떨어지면 그야말로 일사불란(一絲不 亂)하게 움직였다. 그러면서 과원 중 누군가가 ‘두목의 명령이니 거역할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는데 그게 별명이 되었다.

처음에는 두목이라고 했는데 얼마 후 ‘작은 거인’이라는 별명이 하나 더 붙었다. 아마도 나의 주량(酒量)과 관련이 있는 듯싶다.

58


나는 키가 작은 편이다. 굳이 평균치를 따지자면 그에 못 미친다 고 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를 평가해 봤을 때 나는 업무추진에 있어서는 누구에게 지 고 싶지 않은 성격을 갖고 있다. 일뿐만 아니라 술을 마시는 데도 누구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나의 주량은 <말술(斗酒)>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몸을 주체하지도 못하면서 많이 마시기만 한다면 진짜 <말술(斗酒)>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제아무리 마셔도 심신(心身)이 흐트러지지 않아야 진짜 <말술(斗酒)>이라고 할 수 있다. 젊었을 때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대작(對酌)을 해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내가 덩치가 큰 거인으로 보였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의 또 하나 별명은 작은 거인이었다. 공직생활 초년에 얻었던 ‘두목’과 ‘작은 거인’이라는 별명은 시장, 도지사, 차관, 장관의 업무를 수행할 때도 늘 따라다녔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두목이고 싶고, 작은 거인이고 싶다.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고 싶다는 뜻이 아니다. 상대를 제압하고 싶어서 그 러는 것도 아니다. 무슨 일에든 당당히 앞장서고 싶고, 그 어떤 어 려움 앞에서도 결코 좌절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59


내가 행정고시를 선택한 까닭

그동안 나는 주위사람들로부터 ‘왜 사법고시를 선택하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거꾸로 뒤집으면 이 말은 ‘왜 행정고시를 선택했는가?’라는 질문이 된다. 결과적으 로 같은 질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두 질문에는 뉘앙스의 차이가 있 다. ‘왜 행정고시를 선택했는가?’라는 질문은 그냥 평범한 질문이라 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왜 사법고시를 선택하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에는 선택이 잘못된 것 아니냐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60


고시를 앞둔 시점에서 내 스스로 사법고시 합격도 가능하다고 생 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애시당초 사법고시는 생각하지 않았 다. 오로지 목표는 행정고시 하나였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은연중 아버지의 영향을 받 았던 것 같다. 우리 아버지는 일본 중앙대학교 법학부에 유학했었 다. 당시 상황에서 봤을 때 아버지는 지식층에 들었다. 해방 직후 아버지는 정부 요직에서 일하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 런데 아버지는 그 요청을 거절하고 농업에 전념하셨다. 당시에도 우리 집의 전답은 꽤나 많았다고 한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제 각각의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 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 사람 몫의 일이 있는 것이다. 자기의 할 몫 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일에 열중한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태도 인 것이다. 현재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탈피하여 좀 더 그럴 듯 한 일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남이야 어떻든 내 일에 열중하겠다 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정 부 요직에서 일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시골 농부로서 열심히 사셨다. 우리는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흔들림 없이 그 일에 매진하는 사람을 신념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61


내가 행정고시를 택했던 것은 내 나름의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 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나는 행정 관료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법관은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매력이 없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법관이 되게 되면 매일같이 고소, 고발, 소 송 등의 일을 처리해야 한다. 이때 대면하게 되는 사람들의 삶은 정상적이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앞서 법관이 되는 것이 싫었 다. 대신 행정관료가 되면 직접적으로 사회나 국가에 대해 봉사할 수 있고, 때로는 조정자의 역할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 론 법관이 되느냐, 행정관료가 되느냐는 가치관의 차이이지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비교하여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사회나 국가에 봉사하는 사 람이 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행정직 공무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행정 고시를 선택했던 것이다.

62


사나이는 일로써 승부를 걸어야 한다

나는 공직을 출발하면서 가슴에 ‘사나이는 일 로써 승부를 걸어야 한다’라는 좌우명(座右銘)을 새겼다. 그리고 그야말로 열심히 일했다. 스스로를 평가해 봤을 때, 나는 관직(官職)에서 성공했다고 생각 한다. 스물세 살부터 시작하여 40여 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그 40여 년 동안 장차관급(長次官級)을 23년 동안 했다. 아마 우리나 라 공무원 역사 속에서 나만한 이력을 가진 사람도 흔치는 않을 것 이다.

63


또 하나 특이하다면 특이한 공직 이력도 갖고 있다. 역대 여러 대 통령 시절에 주요 임무를 맡아 공직생활을 했다는 이력이다. 관점 에 따라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평소에 국가, 사회, 주변, 가족에 대해 늘 감사하는 마음으 로 살아가고 있다. 나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준 국가와 사회에 감사하고, 내가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준 주위사람 들에게 감사하고, 내가 걱정 없이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조력해 준 집사람과 아들, 딸, 사위 그리고 모든 가족들에게도 감사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나는 관직에서 성 공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운도 따랐지만, 나만의 원칙을 세워 일관(一貫)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 한다. 나는 조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흔히들 조 직원의 부류는 있으나마나 한 사람, 있어서는 안 될 사람, 꼭 필요 한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상사는 부하를 보면서 저 사 람이 일을 통해서 목표를 달성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는가를 따 져보고 일을 시키게 된다. 선거에서도 유권자들은 후보자가, 지역

64


사회나 국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인가를 따져보고 투표한다. 조직에서 일을 잘한다고 인정을 받게 되면 중책을 맡긴다. 이 세 상에 공짜는 없다. 일을 열심히 하면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 논공 행상(論功行賞)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조직 속에서 특별한 일 없 이 시간이나 보내고 있는 것처럼 괴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요즘 청소년 사이에서는 ‘왕따’라는 좋지 않은 문화가 만연해 있다. 왕 따를 견디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괴로움을 참 다못해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조직에서 가장 큰 왕따는 일감을 주지 않는 것이다. 상사는 원활 한 업무추진을 위해 가능한 능력 있는 사람에게 많은 일을 시킨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못 미더워 중요한 일감은 주지 않는다. 이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조직 속에서 일감을 주지 않는 왕따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잘 알 것���다. 나는 관직에 있을 때, 한때는 승진을 천천히 하고 싶을 때도 있었 다. 젊은 나이에 요직을 거치고 나면 나이가 들어 일찍 퇴직하여 곤란한 처지에 놓일 수도 있기 때문에 승진을 미루기 위해 청와대 비서관을 자원한 적도 있었다.

사나이는 일로써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은 내 ‘인생관’이라고

65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무사태평하게 앉아 있지를 못하는 성격이다. 집에 있을 때도 신문을 본다거나, 독서를 한다거나, 화분을 들여다 본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운동을 하거나 한 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를 못한다. 우리 보좌관들은 나를 가리켜 1등으로 출근하고, 맨 꼴찌로 퇴근 하는 국회의원이라고 말한다. 아마 나와 함께 일하는 보좌관들은 상대적으로 힘이 들 것이다. 보좌관들에게도 일하는데 있어서는 다른 국회의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일을 시키고 야단치지만 늘 고맙고 나에 대한 충신들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일 해 나가고 있다.

66


공직에서 성공하기 위한 필수조건

공직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두 개를 꼽으라면 ‘능력’과 ‘청렴’ 이라고 생각한다. 조직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 는 것은 누차에 걸쳐 피력했으므로 이 글에서는 ‘청렴’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말해 볼까 한다.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반인들은 고위 공직에 오르면 자동적으로 재화(財貨)가 따르게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일반

67


인들이 공직자들을 그렇게 보는 데는 일차적으로 공직자들의 책임 이 크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사회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고위 공직자들이 직위를 이용하여 개인적인 치부를 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었다. 물론 현재에도 그런 비리가 완전히 근절되 었다고 볼 수는 없다. 현재에도 ‘공직은 돈’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요즘도 종종 비리 공직자들의 범법행위가 밝혀지고 있다.

공직자들에게 주는 돈의 유형을 몇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먼저 대가성이 있는 돈이다. 이 돈은 인사(人事)나 공사(工事)에 서 편법으로 이익을 취하기 위해 청탁으로 주는 것이다. 반드시 이 권이 개입된다. 공직 내부에서도 상하 간에 금품거래가 이루어진다. 좋은 보직 (補職)을 받기 위해서도 금품이 오간다. 특히, 승진 때는 시쳇말로 공정가(公正價)가 오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자기가 승진해 가는 시군(市郡)의 규모에 따라 액수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체면치레로 오가는 돈도 있다. 예컨대 장도금(壯途金)이라는 것 이 있는데 이 돈은 상사가 출장을 가거나 여행을 할 때 주는 돈이 다. 공직자는 출장을 갈 때 정해진 여비를 받아서 간다. 그런데도 장도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건넨다. 또, 명절 때 ‘떡값’이라고 해

68


서 상사에게 돈을 주기도 한다. 장도금이나 떡값은 인지상정(人之 常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인지상정이라는데 돈의 액수가 너무 많다. 이 돈에는 분명 저의(底意)가 있다.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대가성이든, 내부 거래든, 체면치레든 공직자에게 ‘돈(뇌물)’은 독약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돈을 받게 되면 리더십이 생길 수 없다. 영(令)이 서지 않고, 리더의 약점이 되고 만다. 부하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도 없다. 그리고 돈을 받은 행위는 절대로 그 비밀이 지켜 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부모덕에 경제적으로 별 어려움 없이 공부했 고, 공직에 들어와서도 돈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았다. 공직에 들어 와서 나는 최영 장군의 ‘황금 보기를 돌같이 보라’는 말씀을 가슴 에 새기고 살았다. 그것이 내가 공직에서 성공할 수 있는 필수조건 이었기 때문이다.

1988년, 마흔네 살 때 비교적 빨리 광주광역시장(당시는 직할 시)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오래 전부터 호형호제하고 지내던 지역 의 선배 한 분이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 선배는 호남굴지의

69


기업을 창업한 창업주의 자제였다. 하루는 그 선배가 시장실을 찾아와서 판공비에 보태 쓰라면서 거 액의 돈봉투를 내놓았다. 그 선배는 나에게 이권청탁을 할 일도 없 었다. 그야말로 인사치레로 준 돈이었는데 당시로써는 거액인 천 만 원을 건넸다. 면전에서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 만약 내가 그 렇게 하면 의절(義絶)할 선배였다. 그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배웅한 뒤 그 돈을 선배의 이름으로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기탁 을 했다. 나중에 알고 그 선배가 몹시 섭섭해 했다.

광주시장으로 있을 때, 이런 일도 있었다. 구청장으로 발령을 받 고 고맙다며 부인을 시켜 관사로 과일상자를 보내왔는데 그 안에 이른바 ‘행운의 열쇠’라고 하는 금붙이가 들어 있었다. 돈을 안 받 는다고 소문이 나니까 그런 편법을 쓴 것이다. 그때마다 비서실장을 시켜 보내온 과일상자보다 더 큰 것을 사서 그 안에 행운의 열쇠를 보냈다. 당시 비서실장이 나보다 나이가 많 았는데 과일상자 배달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다. 1년쯤 지나니까 그런 일이 근절되었다.

70


전라남도 지사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내무부 차관으로 발령이 났다. 흔히들 영전(榮轉)이라고 한다. 이 때 도청 공무원들이 이른바 전별금(餞別金)을 모아 가지고 왔다. 무려 2천만 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나는 이 돈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기로 했다. 평소 도 경찰국 전의 경들이 무척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에게 뭔가 고맙다는 표시 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때마침 생긴 돈을 전의경 들을 위해 쓰고 싶었다. 경찰국장을 찾아가 고생하는 전의경들의 격려금으로 사용하도록 주고 떠난 적도 있었다.

사실 공무원은 외롭고 힘든 직업이다. 그러나 공무원은 박봉에 시달리기는 하지만 명예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권력과 명예와 돈을 모두 가질 수는 없다. 공무원은 돈 대신 명예 를 얻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나는 평소 우스갯소리로 공직자는 ‘일가이사(一可二事)’를 조심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가는 ‘인허가’이고, 이사는 ‘인사와 공사’를 말한다.

오늘도 공복(公僕)으로서 직분을 다 하고 있는 양심적인 공직자 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71


일은 사람이 한다

어느 글에서 ‘역사의 골격은 사람이다’라는 구절을 읽었다. 내가 늘 강조하는 ‘사람이 재산이다’, ‘일은 사람이 한다’라 는 말과 의미가 상통한다. 그런데 ‘사람이 재산이다’라는 말과 ‘일 은 사람이 한다’라는 말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지역에서 쓸 만 한 인재를 길러내면 그 사람이 지역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닭이 천 마리면 그 가운데 봉(鳳)이 한 마리 있다’고 했 다. 한 명의 인재가 여러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지자체마다 이른바 ‘인재육성 장학금’이라

72


는 것을 마련하여 교육에 투자하는 것도 ‘사람이 재산’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전라도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전반에 걸쳐 늘 변방(邊方)에 놓여 있었다. 그런 까 닭에 인재 등용에 있어서도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인재등용의 배 제는 지역의 낙후로 이어졌다. 이런 악순환이 되다보니까 전라도 사람에 대한 이유 없는 멸시까지 생기게 되었다. 실제로 전라도출 신이라는 것을 숨기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고흥출신으로 5공의 핵심이었던 모인(某人)은 아예 본적을 서울로 옮겼던 일이 있는데, 전라도출신이라는 걸 숨기려 했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중앙부처에 있으면서 인사(人事)에 있어서 지역차별을 피부 로 느꼈다. 이러한 불균형과 모순을 개선하기 위해 나름으로 노력 도 했다. 그러나 나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나와 같은 전라도 출신의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 야말로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내무부 차관 시절에는 전라도 사람만 봐준다는 모함을 받기도 했다.

73


나는 1988년부터 1991년까지 광주직할시장과 전라남도 지사를 지냈다. 이때 ‘애향자조운동(愛鄕自助運動)’을 전개했다. 글자 그 대로 고향을 사랑하고 스스로를 돕는 마음을 갖자는 운동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이 운동 속에는 인재 육 성, 지역 개발, 남도문화 창달, 전라도 출신 청년들의 취업 알선, 타 지역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전라도 사람들의 부정적 이미지 쇄 신 등이 들어 있었다. 이런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구체적인 시책 을 추진했다. 특히, 대기업에 우리 고장 졸업생들의 취직을 간절히 호소하는 편지를 대대적으로 보내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애향자조운동을 통해 얻어진 가장 큰 성과는 ‘남도학숙’의 건립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라도출신 학생들이 서울에 서 대학을 다니면서 집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었다. 자취방 이나 하숙을 구할 때 전라도출신이라고 하면 꺼렸던 것이다. 대부 분의 서울 토박이들은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전라도 사람들이 성격이 과격하고 거짓말을 잘 한다 는 것이었다. 물론 사람이 많다 보니 과격한 사람도 있고, 거짓말 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전라도 사람 전체가 그러 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었다. 충청도 사람이나 경상도 사람 중에

74


도 과격하고 거짓말 잘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전라도 사람만 지목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을 당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선입견 때문에 그러는 것이었 다. 부정적인 이미지도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하숙비 부담도 큰 문제 였다. 그래서 나는 서울로 유학한 대학생들의 하숙비 부담을 덜어 주고, 안정적인 면학분위기 조성을 위해 남도학숙 건립을 구상했 다.

이 사업은 내가 광주직할시장으로 재직할 때 발의를 했다가, 전 라남도 지사로 부임해서 부지를 확보했다. 서울 대방동에 자리 잡 은 이 남도학숙은 지상 11층, 지하 3층으로 총건평 9,800여 평으 로 지어졌다. 입사는 1993년부터 시작했는데 매년 광주와 전남지 역 출신 대학생 810명이 생활하고 있다. 남도학숙에서 생활하고 있는 학생들은 장차 우리 지역의 큰 재산이 될 것이며, 우리 지역 을 위해 많은 일을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75


호남선에는 왜 비가 내릴까

전라도를 배경으로 한 유행가에는 유달리 서글픈 내용이 많다. 국민 애창곡 ‘목포의 눈물’을 보면 ‘목이 메인 이별가 를 불러야’하고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한다고 노래한다. ‘남행 열차’라는 노래도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라고 시작된다. 호남 선에는 왜 우울하게 비가 내려야 하는 것일까. 3공, 5공, 6공 그리고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호남 푸대접’이라 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공직사회에서도 중앙부처 요 직에는 전라도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이 점에 대해서 개인적인 능

76


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결코 지역차별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지역차별에서 온 부당함이었다고 생각 한다. 중앙부처에서 일하면서 피부로 느낀 것이다.

나는 전라도 사람들이 타 지역 사람들과 비교해서 성품이 온화하 고, 두뇌가 명석하여 업무추진 능력도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전라도 사람이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나하고 친하게 지내는 경상도 사람 중에도 그걸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것은 객관적인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전라도 사람들은 정의로운 마음이 강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의롭게 일어나 앞장을 선 것도 전라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전라도 사람들의 이미지는 부정적으로 고착되어 왔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전라도 사람이라면 하숙도 받아주지 않았 다. 특별한 까닭도 없이 꺼렸고, 그런 감정이 발전하여 푸대접으로 이어진 것이다. 전라도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뒷전에 밀려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사회적 여건이 타 지역에 비해 열악한 탓도 있다. 이런 이유 때문 에 인재양성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끌어 주는 선배가 없으니까 후배들은 소외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77


1991년, 내가 내무부 차관으로 부임했을 때, 내무부에는 국장이 11명이었다. 그 중에서 호남출신은 단 1명이었다. 나는 출신지역 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호남출신의 숫자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국민총화(國民總和)’를 부르짖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명분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능력이 없는 사람을 배분하듯이 발탁할 수는 없었다. 일단 능력을 우선으로 발탁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는데 발탁 승진을 시켜놓고 보니까 대부분 호남출신이었다. 뒷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런 수군거림에 개 의치 않았다. 그 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답 변할 자신이 있었다. 관리자는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능력 있는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1995년, 내가 내무부 차관 직을 떠나 농림수산부 장관이 되었을 무렵, 내무부 국장 11명 가운데 호남출신이 5명이나 되었다. 내가 제아무리 공평성과 객관성을 갖고 발탁한다고 해도, 나도 모르게 은연 중 애향(愛鄕)이라는 감정이 작용했을 지도 모른다. 팔은 안 으로 굽는다고 했으니까.

78


5.18의 아픈 상처 치유

‘나무는 열매로 평가되고, 사람은 일에 의해 평가된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 격언은 내가 자주 인용하여 쓰는 말이다. 그 리고 이 교훈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다. 40여년 간의 공직생활 중에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일은 무엇일 까? 누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주저 없이 광주광역시장(당 시에는 직할시였음)으로 재직하면서 추진했던 ‘광주민주화운동 보 상’에 관한 업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업무를 추진했던 기간이 나

79


의 공직생활 중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때였으며, 또한 가장 큰 보 람을 느꼈던 때이기도 하다.

1988년, 나는 광주광역시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부임길에 오르 면서 나는 속으로 다짐한 것이 하나 있었다. 임기 내에 반드시 5.18에 대한 매듭을 ���겠다는 것이었다. 5.18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로 기록되어야 할 역사 적인 사건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고, 우리 모두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내가 부임하던 그 시점에도 정부와 5.18 당사자 간에는 전혀 대화가 없었다. 정부 당국은 피해자들과 만나 대화를 하겠다는 의지가 별로 없었다. 그저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하려고만 했다. 한 예로 대통령이 광주에 내려올 때면 5.18 피해자들의 주장은 들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사전에 불씨를 없애겠다는 생각으로 그 들을 광주 밖 지역으로 소개(疏開)시키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소 란을 피울 소지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강제로 버스에 태워 장 성이나 나주 등 멀찍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내려놓기도 했다. 이미 <민화위(민주화합추진위원회)>에서 5.18은 정당한 민주화운동이 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었는데도 정부는 별다른 후속 조치를 취

80


하지 않고 있었다. 가해자인 신군부세력이 집권하고 있었기 때문 에 후속 조치를 취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 했다. 매듭은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 5.18이라는 매듭을 묶은 사람들은 분명 신군부세력들이다. 자신들 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이 5.18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논한 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광주시장인 내가 실마리를 풀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 었던 것이다. 덮어 둔다고 어물쩍 넘어갈 문제는 아니었다. 어떤 문제부터 손을 대 실마리를 풀어갈 것인가? 하겠다고 마음은 먹었 지만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마치 깊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 매는 심정이었다. 혼자서 정말 많은 고민을 했고, 시청 주요 간부 들과 밤늦게까지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했다.

우선 5.18로 인한 사망자, 부상자, 실종자 등의 신고를 받기로 했 다. 그때 나는 관련자들의 집을 직접 방문하여 피해자들과 면담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른 지역에서는 5.18 관련자들을 극좌세 력으로 치부하는 여론이 많았었다. 어떤 피해자는 피해망상으로

81


숨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들의 비참한 현실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어려운 상황을 보면서 보상부터 해서 그들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어야겠 다는 구상을 했다. 민주화운동의 규정도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그 렇지만 당장 형편들이 너무 어려워 보상부터 하고 난 다음 순차적 으로 매듭을 풀어나갈 생각이었다. 나는 이미 1988년 광주광역시 국정감사에서 ‘5.18을 광주민주화 운동이라고 개념을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사실 그런 발언을 한다는 것이 여러 가지로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이었다. 하 지만 내 고향의 일이었기 때문에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당시 의 분위기에서 내 주장은 ‘폭탄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중앙이나 지 방의 공직자들 사이에는 일대 파문이 일었다. 언론에서는 내 발언 을 대서특필하면서 용기 있는 일로 평가해 주었다. 공직자들과 여론이 나를 응원해 주었으므로 더욱 용기가 솟았다. 즉각 5.18과 관련한 특별 부서를 신설하고 피해자 신고 접수에 들 어갔다. 그리고 의사, 변호사, 교수 등으로 심사판정위원회를 구성 했다. 심사판정위원회도 사안에 따라 5.18 관련 당사자 심사판정 위원회, 5.18 관련 실종자 심사판정위원회, 5.18 관련 부상자 심

82


사판정위원회 등으로 세분화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하였다. 심사판정위원 들은 해당 당사자들로부터 밤낮없이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시장 인 나도 악을 써가며 그들과 대립하고, 한편으로는 설득하면서 그 야말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혼란 속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참고 또 참았다. 물론 금전적인 보상이 그들의 아픈 상처를 완전히 치유해 줄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적인 어려움이라 도 우선 해결해 주는 것이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1차적인 예우라 고 생각했다. 그러나 광주광역시의 이러한 노력과는 달리 보상의 실마리는 쉽 게 풀리지 않았다. 국회에도 5.18의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신군부 세력들이 득세하고 있었으므로 보상에 대한 특별법 제정이 난항을 계속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 냈다. 먼저 보상해 주고 난 다음에 특별법을 제정하자는 것이었다. 이른 바 <선보상(先補償)> 방안이었다. 이 방안을 가지고 당장 중앙부처로 올라갔다. 당시 이현재 총리 와 이춘구 내무부 장관을 만나서 내 의견을 피력했다. 그런데 관련 부처 간 회의에서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특별법 제정이 안 되

83


었고, 심사판정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으며, 예산도 확보되지 않았 다는 것이었다. 나는 발끈해서 당장 사표를 쓰겠다고 했다. 그야말로 배수진(背 水陣)이었다. 사표를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정부 당국의 처사가 무성의하다고 강경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정 말 사표를 쓰고 싶었다.

강경한 입장을 밝히고 내려왔는데 얼마 후, 이춘구 내무부 장관 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시 올라와서 5.18 선보상 문제에 대해서 진지한 논의를 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가까스로 보상의 실마리가 풀리게 되었다. 5.18 관련자들과의 대화 통로도 열렸다. 그리고 얼마 후에 특별법도 제정되었다. 돌이켜 보면 공직생활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때는 1988년부터 1990년까지 광주시장으로 재직할 때이다. 그리고 가 장 보람이 있었던 때도 바로 이때다. 1988년, 시장으로 부임하면 서 발의한 광주민주화운동의 보상과 치유책은 장장 8년 만에 착수 가 가능하게 되었다. 광주시장으로 재직하면서 나는 5.18 문제의 해결과 첨단과학단 지 조성이라는 두 가지만 생각하면서 살았다. 5.18 문제의 원만한

84


해결을 통해 국민통합의 초석을 놓고 싶었고, 첨단과학단지를 조 성하여 광주를 미국의 실리콘밸리처럼 만들고 싶었다. 연기가 나 는 굴뚝을 세우기보다는 두뇌와 과학과 정보로 지역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21세기 지식정보화 시대 광주 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5.18 보상에 관련한 일을 추진하고 있을 때, 언론에서는 나 를 <5.18 해결사>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내가 배수진을 치는 마음으로 그 일에 매달렸던 것은 매듭은 만 든 사람들이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직자로 서 내 고향 사람들이 입은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데 조그마한 보탬 이라도 되고 싶었다. 5.18 민주화운동이 어언 30년이 지났다. 그 사이 피해자들에 대 한 국가 유공자 대우, 5.18 묘역의 국립묘지 승격 등 많은 진전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5.18 문제가 완전히 매듭지어졌다고 할 수 는 없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5.18의 숭고한 정신을 잊지 않 고 계승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일일 것이다. 최근, 중고 교과서에 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내용이 삭제되어 논란을 불러 일으켰

85


다. 교육과학부 장관이 교과서에 반드시 기술되어야 한다는 의견 을 피력하여 논란은 잠시 주춤해졌다. 수구세력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과거에 저지른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는 데 급급한다면 결코 역사의 발전 은 없을 것이다.

86


“뜻밖의 탈락”

광주시장과 전남지사를 마치고 다시 내 무부 차관으로 중앙부처에 복귀했다. 이때는 김영삼 대통령의 문 민정부가 출범하던 시기이다. 1992년 12월 28일, 세모(歲暮)를 불과 사흘 앞두고 있었다. 이때 가 되면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착잡해지기 마련이다. 나 역시도 그 어느 해보다 착잡한 심정으로 세모를 보내고 있었다. 내 심정이 그러했던 것은 연말의 전면적인 개각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87


이야기가 좀 거슬러 올라가는데 6공 후반기 때부터 개각이 있을 때마다 내 이름이 거명되었다. 그런데 1992년 말의 개각을 앞두고 는 부쩍 내 이름이 많이 거명되었다. YS 문민정부의 내무부 장관 영순위는 최인기라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전라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YS 정부와는 전혀 인 맥도 없었다. 그때의 정황으로 봤을 때, 입각은 고사하고 차관 직 도 그만 두어야 할 분위기였다.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당시 YS도 내부적으로 나를 그만 두게 할 방침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경찰청장을 지냈고, 안성출신 국회의원인 이해구 씨가 내 무부 장관으로 오면서 내 문제를 거론했다고 한다. 나와 이해구 장 관은 오래 전부터 형제처럼 지내는 막역(莫逆)한 사이였다. 이해구 장관은 당시 박관용 대통령 비서실장을 만나 “최인기는 지금까지 의 경력이나 능력으로 봐서 당연히 입각해야 할 사람이다. 장관이 못된 것도 안타까운데 차관 직까지 그만 두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황인성 총리도 YS를 직접 만나 “내무부에 최인기만큼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인재를 버린다는 것은 이 정부의 손해다” 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1993년 2월 25일,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모든 부처의 장관이 다 바뀌었고 유일하게 내무부 차관인 나 혼자

88


만 유임되었다. 그 후 황인성 총리가 쌀 개방문제로 책임을 지고 사퇴하면서 연말에 전면적인 개각이 단행되었다.

연말 전면 개각이 단행되자 나는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음 을 정리하고 나니까 지난 30여 년간의 공직생활에 대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1966년, 서울대 법과대학 재학 중 제4회 행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이후 나는 30대 초반에 내무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비 교적 남보다 빠른 성장을 했다. 충남과 전북 부지사를 지낸 것도 30대의 일이다. 특히 내무부 차관보 시절에는 ‘지방자치기획단’을 이끌며 한국의 지방자치에 대해서 애정과 집념을 갖고 그 방안과 대책수립에 주 력했다. 그 인연으로 DJ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에서 국무총리실 지방자치제도 연구위원으로 위촉받게 되었다. 40대에는 대통령 사정비서관, 내무부 차관보를 거쳐 고향에서 광 주광역시장과 전남도지사를 지냈고, 40대 후반에는 내무부 차관을 3년이나 지냈으니 내 스스로 생각해 봐도 이제는 좀 쉬는 것도 좋 겠다 싶었다.

89


나는 새로 임명된 최형우 장관에게 차관 인사를 자유롭게 하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측근들은 최형우 장관에게, 내무부를 너 무나 잘 알고 있는 최인기를 놔두고서는 최형우 장관 스타일대로 일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조언도 했다고 한다. 결국 나는 30여 년 공직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 퇴직을 하고 나니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홀가분했다. 당분간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 보면서 나름의 정리를 할 시간을 갖게 되었 으니 이 시간도 보람 있게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언론에서 <뜻밖 의 탈락>이었다며 내 문제를 거론했던 것이다.

당시 12월 28일자 조선일보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최인기 내무부 차관의 아무런 사후 보장 없는 퇴진은 이번 차관 급 인사에서 가장 큰 뉴스로 꼽힐 만하다. 전남 나주 출신으로 66년 서울대 법대 재학 중 행정고시 4회에 수석으로 합격한 이후 30대에 전북과 충남 두 곳의 부지사에 오르 고, 40대에 또 다시 광주시장, 전남도지사 등 두 군데 도백을 지내 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온 인물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를 바라보 며 뛰는 내무부관료들의 충격은 더욱 크다. 단구의 다부진 외모, 온화한 인상, 넓은 교우관계, 무엇보다도 뛰

90


어난 분석력과 자타가 공인하는 관료사회의 선두그룹을 형성했던 최 차관은 한편으론 호남출신 관료들의 희망이자 ‘선봉장’이기도 했다. 91년 이후 3년 가까이 장수 차관을 지낸 그가 마지막 기회로 여 겨졌던 최근의 개각에서 발탁되지 못하자, 주변에서 예민한 촉각 으로 그의 거취를 바라본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인사에서 그의 탈락은 능력을 위주로 하는 일상적인 인사와는 달리 다분히 내무공무원의 기를 꺾어 기선을 제압하겠다 는 ‘정치적 시위작전’의 희생양이 아니냐는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 게 됐다. 물론 앞으로도 기회가 있다는 원칙론적인 전망은 여전히 가능하 지만, 현시점에서는 그의 재기가 언제가 될지 불투명한 게 사실이 다.>

이렇듯 여론에서는 내가 내무부 차관 직을 그만 두게 된 것을 ‘뜻 밖의 탈락’이라고 표현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모처럼만에 여유 를 갖고 나를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공직에서 물러난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고향 나주로 내려왔고, 아내와 함께 여행도 다녔으며, 틈틈이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 보며

91


글도 썼다. 그리고 100여 일 후, UR 농산물협상 후유증으로 나라 안이 소란 스러울 때, 나는 다시 농림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공직에 복귀 하게 되었다.

92


예견(豫見)한 패배

어떤 사람이나 무엇인가 겨루기를 해서 패하고 나면 좌절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승리할 거라고 자신했는 데 패배하게 되면 그 충격은 무척 클 것이다. 반대로 이미 예견하 고 있었던 패배의 충격은 어떨까? 예견했으니까 별로 충격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미 예견한 패배라고 해도 패배는 패배였던 것이다.

1996년 4월 11일, 나는 제15대 총선 때 나주에서 출마하여 낙선

93


했다.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실패라는 경험을 해보지 못했었 다. 내 입으로 말한다는 것이 멋쩍기는 하지만, 내 인생은 그야말 로 승승장구(乘勝長驅)였다. 패자의 백 마디 변명은 승자의 침묵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다. 나 역시 그때의 패배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변명하고 싶지 않다. 다 만 패자의 눈물은 승자의 미소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 보고 싶은 것이다.

15대 국회의원을 뽑는 정치의 계절이 왔는데 YS로부터 총선에 출마하라고 했다. 나주에서 출마하면 당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당선이 되면 호남의 교두보(橋頭堡)를 확보할 수 있으니까 출마해 서 꼭 당선되라고 했다. 그때는 97년 대선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 에 호남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노란깃발 일색이었다. 그 당시 우스 갯소리로 초등학생에게도 노란 옷만 입혀놓으면 당선이 된���고 했 다. 갑작스러운 제의를 받고 나는 한동안 고민을 했다. 만에 하나 당 선만 된다면 엄청난 고향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 불가능한 지역 에서 당선이 되었으니 인센티브가 따를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지역 정서상 당선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의지가 약

94


해져 불출마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런데 나는 YS 정부에서 내 무부 차관과 농수산부 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YS에 대한 신의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출마를 결심했다. 그렇지만 이 선 거의 결과는 보나마나 ‘예견(豫見)한 패배’가 될 것이 빤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역민들이 나를 지지해 줄지도 모른다 는 은근한 기대감도 있었다. 나는 그동안 공직생활을 해 오면서 예 산이 한 푼이라도 더 나주 쪽으로 돌아가도록 노력했었다. 팔은 안 으로 굽기 때문이다. 물론 누구라도 자기 고향을 위해 지원하고 싶 을 것이다. 중앙부처에 있을 때는 나주를 위해 지방교부금 등 재원을 끌어다 가 많은 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실내체육관, 종합문예 회관, 향토문화회관, 나주향교 보수, 농산물 가공처리장, 봉황 배 술공장, 나주대교, 마을단위 경로당, 마을회관, 마을 안길 확포장 등 사업을 위해 2,000억 원이 넘는 예산이 나주로 돌아갈 수 있도 록 노력했다. 농림수산부 장관으로 있을 때는 나주시 다시면의 신풍 양수장을 비롯한 전남 시군의 크고 작은 농업용수시설의 신설과 보수, 경지 정리, 배수개선, 유통구조 개선 등 농업경쟁력 강화를 위해 중앙의

95


농업 투자를 고향 쪽에 확대하여 농업생산기반 확충에 신경을 썼 다. 이 정도 일을 했으면 고향 사람들이 나를 밀어 주지 않겠느냐 는 은근한 기대를 했던 것이다.

언론에서는 나의 당선 가능성을 점쳤고, ‘국민회의’도 1석을 뺏길 지 모른다는 정세분석을 했다.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이례 적으로 나주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두 차례나 국민회의 후보 지지 를 호소했다. 그때의 선거 양상은 나 최인기와 국민회의 정호선 후 보의 대결이 아니었다. 최인기와 DJ를 대통령으로 만들고자 하는 전라도 사람들의 열망과의 대결 구도였다. 결과는 예견했던 대로 나의 패배로 끝났다. 나의 득표율은 35%였다. 호남에서 신한국당 후보들의 평균 득표율은 2~3% 수 준이었다. 그런 수치로 봤을 때 나는 상상을 초월한 득표를 했던 것이다. 국민회의에서 질 수 있다는 정세분석을 낼 만도 했다. 어 쨌든 나로서는 평생에 걸쳐 처음으로 2등 경험을 했던 것이다. 선거 다음 날 아침 일찍 유세차량을 타고 나주와 영산포를 돌며 낙선 인사를 했다. 지지해 준 나주 지역민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 사를 했다. 그러면서 나는 앞으로 기회가 다시 허락한다면 고향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다니는데 걷

96


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내 낙선 인사를 들으면서 멀찍이서 눈물을 흘리던 아주머니, 안 타깝게 손을 흔들어 주던 한약방 어르신, 들에서 일을 하다 말고 달려와 흙 묻은 손으로 내 손을 으스러져라 잡아 주던 농민, 그리 고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도 울고 나도 울었다. 차를 운전 해 주던 김정일 부장, 그 당시 나주시 조병문 의원(현재 보좌관)과 나의 오랜 고향 친구 양봉현 전 의원은 우느라 제대로 운전을 못했 다. 나는 울면서 속으로 백 번 천 번 다짐을 했다. 이 고마운 고향 분들과 내가 태어난 고향을 위해 꼭 한 번 혼신을 다 해 봉사하겠 다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그런데 비록 낙선은 했지만 나는 그 선거를 통해 얻은 것도 많다. 선거 과정을 통해 내 고향을 위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고향 분들의 애로가 무엇인가를 세세히 알게 되었으며, 더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날 내가 흘렸던 눈물을 기억하고 있다. 함께 눈물 흘려주던 고향 분들의 아름다운 마음도 기억하고 있다.

1996년 선거가 끝나고 나는 곧바로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그리 고 정치와는 결별하기로 결심했다.

97


잠시 집을 떠나 설악산, 속리산, 지리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여 행을 했다. 마음도 달래고, 제2의 인생을 보람 있게 사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는 여행이었다. 그러던 차에 목포 대불대학 교로부터 교수 초빙을 받게 되었다. 교수 초빙을 받은지 얼마 안 되어 여수수산대학교 교수들로부터 총장선거 출마 권유를 받고, 선거에 뛰어들어 1996년말 전체교수 투표를 통해 여수수산대학교 제2대 직선제 대학 총장에 선출되었다. 이로써 1996년 한 해에 나는 국회의원선거에 낙선하고 대학총장 에 당선되어 상반된 변화를 겪었다.

98


직선제 대학 총장이 되다

어느 날 여수수대 교수 몇 사람이 찾아 와 총장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했다. 나는 거절을 했다. 전체 교수 들이 합의해 영입하는 조건이라면 몰라도 선거를 치를 수는 없었 다. 사실 15대 총선에서 패배한 지 채 반 년도 안 되었는데 또 다 시 선거를 치른다는 것이 걱정스럽기도 했다. 또 떨어지면 어떠나 하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고 나서 한 달여가 되었는데 그 교수들이 또 찾아왔다. 지방

99


대학의 육성을 위해서는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며 경선에 임해 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했다. 나에게 대학 총장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공직생활을 통해 맺어진 인맥을 활용하면 여수수대의 발전 을 모색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생을 국가의 백년지대 계(百年之大計)인 교육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 큰 보람이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경선이 문제였다. 경선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나를 찾아온 교수들은 얼마든지 승산이 있으니까 믿고 등 록만 해 달라고 했다. 참으로 난감했다. 여수수대 교수들과는 일면 식(一面識)도 없었다. 그런 나를 뽑아줄리 만무했다. 그런데 삼고 초려(三顧草廬)는 아니어도, 그 교수들이 하도 간곡히 요청했기 때문에 단호하게 거절할 수도 없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등록을 결심했다. 선거운동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루 전날 여수로 내려가 교수 실을 돌면서 인사 겸 지지를 부탁했다. 선거를 제대로 하려면 캠프 도 만들고, 조직을 가동해 득표전도 벌여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 지 못했다. 선거 전날 내려가 교수들에게 인사를 했고, 선거 당일 후보 연설을 한 것이 선거운동의 전부였다. 후보는 나를 포함해 7명이었다. 1차 투표에서 내가 1위를 했다.

100


그리고 2차 투표에서도 1위를 했고, 마지막 경선에서 당선이 되었 다.

나는 총장으로 취임한 이후 여수수대 교수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나는 낙후된 지방대학이 발전하기 위해서 는 대학의 위상이 제고되어야 하고 경쟁력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 교명(校名)을 여수수산대학에서 여수대학 교로 바꾸면서 학과도 증설하는 등 종합대학으로 만들었다. 그리 고 1,500억 원이 투자되는 캠퍼스 이전을 빠른 시간 안에 마무리 하기 위해 중앙부처를 열심히 쫓아다녔다. 내실을 기하기 위해 교 수 업적평가제를 도입하는 한편 60억 원의 대학 발전기금을 조성 하여 특별장학제도도 실시했다. 장관 시절에 나는 산하 공무원들에게 발로 뛰는 현장행정을 강조 했었다. 그래서 총장이 된 다음 대학 홍보를 위해 3년간을 발로 뛰 었다. 총장은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위치이다. 내가 만약 15대 총선 에서 당선되었다면 총장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인생만사 새옹지 마(塞翁之馬)라고 했는데 내 삶이 그랬던 것이다.

101


‘국민의 정부’ 행정자치부 장관이 되다

2000년, 다시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4월이면 16대 총선이 치러진다. 여수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나는 ‘국민의 정부’에서 경찰개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여수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1999년 후반부터 나는 16대 총 선 출마를 고려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반드시 출마를 하겠다고 목 표를 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DJ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할 수만 있다면 국민회의와 함께 하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만 궁리 를 하고 있는데 2000년 1월 초에 한광옥 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

102


가 왔다. 곧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입각할 것이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요지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고 장관이냐, 출마냐를 놓고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금 방 장관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나는 YS 때도 장관을 했다. 그런데 그때는 농수산부 장관이었다. 수산부 장관도 큰 보람을 느낀 자리였지만 내무부에서 대부분의 공직생활을 보낸 나로서는 행정자치부(구 내무부) 장관을 하는 것 은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나는 내무부에서 사무관, 계장, 과장, 부국장, 국장, 감사관, 부지 사, 차관보 등 차근차근 단계를 밟은 사람이다. 만약 행자부 장관 이 된다면 내무부에서 계장부터 모든 단계의 직급과 보직을 빠짐 없이 역임한 최초의 장관이 될 것이다. 그런데 한광옥 비서실장으 로부터 전화를 받고 나서 1주일 정도 공백이 있었다. 아마도 개각 을 하는데 조율이 안 되었던 모양이다. 아내는 통화내용을 듣고 무슨 일을 하게 되었느냐고 궁금해 했다. 인사는 만사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보안을 철저히 해 야 하는 것이 공직자의 자세이다. 아내가 묻자, 정부에서 무슨 일 인가 하게 될 것 같다고 적당히 둘러댔다. 그리고 확정이 되고나서 야 사실을 말해 주었다. 아내는 가족에게까지도 보안을 지키는 지

103


독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2000년 1월 13일, 대통령으로부터 행정자치부 장관 임명장을 받 았다. 1971년 내무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지 30년 만에 장관에 오른 것이다. 대통령은 다가오는 선거를 공명정대하게 치를 것, 지 방자치 업무를 차질 없이 추진할 것 등을 지시했다.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서 나는 대통령에게 한 가지 건의를 했다. 매주 금요일 국무회의가 있기는 하지만 행정자치부 장관은 일이 많기 때문에 수시로 전화 보고를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건의였다.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허락해 주었다. 대통령과의 핫라인을 가진 장관은 나뿐이었다. DJ는 나를 신임했다. 국무회의 시 칭찬도 자주 하셨다. 여자는 사랑에 목숨을 걸고,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건다고 했다. 대통령이 신임해 주니까 더욱 열심히 일을 했다. DJ는 가끔 타 부처 소관업무를 행자부 장관인 나에게 지시하기 도 했다. 나를 믿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천공항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점검해 보라는 지시도 했고, 감사원에서 해야 할 공직자 부정부패 일소에 대한 업무도 지시했다.

나는 DJ와 YS 정부에서 장관을 지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대통 령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게 되었다.

104


DJ와 YS

DJ와 YS는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거목이다. 두 분은 줄기차게 반독재 투쟁을 했고, 대통령에 올랐다 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업무를 처리하는 스타일을 보면 차이가 있는데, DJ는 아 주 꼼꼼하고 치밀한 반면 YS는 대략적인 감(感)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DJ는 독서량이 아주 많아 박식(博識)하다. 특히 세계사에 대해서

105


는 전문가들도 DJ 앞에서는 주눅이 들 것이다. 많이 알기 때문에 업무를 지시할 때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배경부터 설 명한다. 청와대에 보고를 하러 들어가면 DJ는 노트를 가지고 나온 다. 그 노트에는 지시한 날짜, 내용 등이 상세히 적혀 있는데 DJ는 그 기록을 보면서 보고를 받는다. 보고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공부 를 철저히 해야 한다. YS는 복잡한 수치를 예로 들며 보고하는 것을 싫어한다. 간명한 말로 보고해도 넘어간다. 그러니까 보고를 하러 갈 때 어떤 쉬운 말로 관심을 끌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나 는 YS 문 민 정 부 에 서 농 수 산 부 장 관 을 지 냈 다 . 그 때 가 94~95년이었는데 처음으로 북쪽에 쌀을 보낼 때였다. 처음이라서 대단한 뉴스거리였다. 국제적으로도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런데 YS가 추가로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주무 장관 입장에서 보면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재고량이 부족하게 된다. 더군다나 그 해는 기상이변과 가뭄 그리고 병충해 등의 원인으로 흉년을 예 측하고 있었다. 나는 추가 지원은 불가하다는 것을 보고하기 위해 청와대로 향했 다. YS에게 수치를 들어가며 보고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므로 간단하면서도 적절한 말을 궁리해 내야 한다.

106


청와대로 들어가는데 먼저 와서 보고를 마친 나웅배 통일부 장관 이 나오고 있었다. 대북 쌀 문제를 보고하고 나오는 것 같다는 감 이 잡혔다. 나는 대통령에게 추가로 쌀을 보내게 되면 수입을 해야 될 상황이 되는데 ‘최초로 쌀을 수입한 대통령이 됩니다’라고 말했 다. 그랬더니 빨리 나 장관을 불러 발표를 막으라고 했다. 내가 보 고를 하러 오기 직전에 나 장관에게 대북 쌀 추가 지원을 발표하라 고 지시했던 것이다.

YS가 큰 봉우리만 본다면, DJ는 큰 봉우리도 보고 작은 나무도 본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즐겨 쓰는 휘호(揮毫)도 특색이 있다. YS는 ‘대도무문(大道無門)’, DJ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는 휘 호를 즐겨 썼다. 즐겨 쓰는 휘호와 호(號)도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다. YS는 호(號)가 거산(巨山)이라서 큰 봉우리만 보는 것 같다. 그 래서 대도무문을 즐겨 썼던 것 같다. DJ의 호(號)는 후광(後廣)이다. 물론 태어난 마을의 이름을 따서 호로 쓴 것이지만, 앞만 보는 것이 아니라 뒤도 두루 본다는 의미 로 해석해 보고 싶다. 뒤를 본다는 것은 어두운 곳, 소외계층도 본 다고 해석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기본권을 갖고 대접을 받아야

107


한다는 애인(愛人), 즉 인본사상(人本思想)에 입각하여 경천애인 이라는 휘호를 즐겨 쓴 것 같다.

대도무문이라는 휘호를 즐겨 쓴 YS는, 평소에는 장관 또는 전문 가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맡기지만, 결단이 필요할 때는 전광석화 처럼 소신대로 밀어붙인다. 그야말로 문이 없는 큰 길로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금융실명제’ 실시와 ‘하나회’ 척결이다. 금융 실명제는 그야말로 철통같은 보안 속에서 실시된 일이다. 물론 갑 작스러운 일이어서 충격도 있었지만 경제질서를 바로 세우는 일이 ���다고 할 수 있다. 하나회는 3공 이후 6공에 이르기까지 우리나 라 군대를 실질적으로 장악해 왔던 육군사관학교 출신 중에서 이 른바 파워엘리트라고 하는 군인들의 모임이었다. 그 누구도 손을 대기가 쉽지 않은 막강한 세력집단이었던 하나회를 YS는 척결해 냈던 것이다. 큰 봉우리만 보지만 결단이 필요할 때는 소신대로 밀 어붙이는 YS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휘호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DJ가 즐겨 쓴 휘호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이다. 이 휘호 속에는

108


큰 봉우리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숲 속의 나무도 바라보는 세심한 리더십이 담겨 있다. 경천(敬天)은 글자 그대로 하늘을 공경한다는 뜻이다. 하늘을 공 경한다는 것은 순리(順理)를 따른다는 것이고, 정의(正義)를 존중 한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된다. DJ가 인동초(忍冬草)로서 자유, 평 화, 민주를 위해 온갖 고난을 이겨낸 것도 경천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애인(愛人)’은 DJ의 인본사상(人本思想)으로 연결된다고 하겠 다. 이것은 인권이요, 기본권이요, 삶의 질 향상이라고 할 수 있다. DJ 정부 ‘국민기초생활보장법’과 ‘국민개보험제도(國民皆槪保險 制度)’를 만들었다. 쉽게 말해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적어도 대 한민국 국민 중에서 굶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 진 제도고 국민개보험제도는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아 죽는 일이 없도록 국가가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고 의료비 전액을 지원하는 제도이다. 미국 같은 나라는 현재에도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다. 민간의료보험이기 때문이다. 또한 DJ는 이른바 정적(政敵)에 대해 보복을 하지 않았다. 호남 사람들이 역차별을 당한다고 볼멘소리를 할 정도로 인사에서도 호 남에 대해 특혜나 배려를 별로 하지 않았다. 동서화합과 국민 대통

109


합을 위해 오히려 영남사람을 더 많이 등용했다. 정적을 보복하지 않은 것, 인사에서 지역 편중을 하지 않은 것도 다 애인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DJ의 이런 사상은 획기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 켰고, 우리나라 최초 노벨 평화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DJ와 YS는 인사(人事) 스타일에서도 차이가 있다. DJ는 인사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 첫째, 전문가 그룹을 우선시 한다. 그리고 동진정책을 위한 인사를 했다. 동진정책이란 동서화 합을 위해 경상도 사람도 많이 쓴다는 말이다. 또 대선 때 DJP 연 합을 했기 때문에 자민련 정치인도 썼다. 그러다 보니 호남에서는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불만의 소리도 나왔었다. DJ는 이른바 가신(家臣)그룹은 내각에 쓰지 않았다. DJ는 우연하게도 나와 같은 경기고 출신을 동시에 세 명이나 기 용했다. 나, 전 경기도지사 임창열, 전 재정경제부총리 이헌재 등 세 명이다. 모두 그 분야에 탁월한 전문성과 리더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YS는 전문가 그룹을 인정하면서도 정치인이나 가신그룹을 많이 기용했다. 그리고 DJ가 동진정책을 썼던 반면에 YS는 서진정책

110


(동서화합을 위한 호남사람 기용)을 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지역 편중 인사라는 평도 받았다.

DJ와 YS는 군사독재와 맞서 싸워 투쟁한 정치인이다. 세인들은 두 사람을 정치의 거목이요, 위대한 지도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중 간 중간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영원한 정치적 동지라고도 볼 수 있 다. 그런데 DJ와 YS는 1987년 대선에서 대립하여 싸웠다. 1987년, 국민들은 6월 항쟁을 통해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를 부활시켰다. 6.29선언 후, 국민들은 군사독재를 종식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희망이 부풀어 있었다. 그 해 연말에 치 러진 대선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 등 네 명이 후보로 나 섰다. 이른바 ‘3김 1노’의 구도로 치러지게 되었다. 국민들은 절호 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며 DJ와 YS의 단일화를 열망했다. 민 주 진영의 후보가 양분됨으로써 노태우 후보가 어부지리(漁父之 利)를 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DJ와 YS의 단일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끝내 단일화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 었다.

111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고 하지만, 만약 그 당시 DJ와 YS의 단일화가 이루어졌다면 노태우 후보가 당선될 일도 없고, 민주화 도 훨씬 앞당겨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역사는 1987년 대선 당시, DJ와 YS의 단일화 실패에 대해서 어 떻게 평가를 하게 될까?

112


일이란 무엇인가?

나는 정말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왔다. 일을 즐겼고, 일을 사랑했다. 그렇다면 일이란 무엇인가? 일은 무작정 행복한 것이기만 할까? 우리 주위에는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원시사회에서 일은 일종의 즐거운 놀 이였다. 일과 놀이가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 속에 놀이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산업사회가 되면서 일이 분업화되고,

113


자기의 필요에 따라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에 따라 강제로 하게 되었다. 일이 생업의 목적이 아니라 살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쨌든 사람은 일을 떠나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일에 규정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일은 대단히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바쁘게 산다는 것에 감사한다. 나는 사무관시절부터 맡겨진 일은 몇 날 밤을 새워서라도 기필코 해결해 냈다. 내가 맡아야 할 일인데 그 일이 남에게 맡겨지면 상 사에게 건의해서 다시 찾아오기도 했다. 이것은 욕심이라기보다는 열정이라고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열정 때문에 동기들에 비해 비교적 빨리 승진했던 것 같다.

공직생활 중에서 광주직할시장으로 재임했던 기간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아픔이었던 5.18의 상흔(傷 痕)을 치유하기 위해 그 일에 밤낮 없이 매달렸다. 유족들과 부상 자들을 부둥켜안고 함께 울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걸 해결 하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는 정말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후에 모든 분들이 감사의 뜻을 전해 왔을 때, 보람은 더 할 수 없이 컸다. 일 을 통해 보람을 느낀다는 것은 사람이 존재하는 또 하나의 이유일

114


것이다. 1996년 12월, 여수수산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여 지방대학의 발 전을 위해 뛸 때도 나는 열정을 다 쏟아 붓는 마음으로 일했다. 그 결과 교육환경이 개선되고, 발전의 모습을 피부로 느낄 때면 행정 관료가 아닌 교육자로서도 어느 정도 성공을 했다는 자부심도 가 졌다. 문민정부에서 농림수산부 장관, 그리고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자 경찰개혁위원장, 사법제도개혁위원, 제2건국추진위원회 상임위 원, 행정자치부 장관 등을 맡아 열심히 일했다. 이처럼 끊임없이 사회와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나는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천성적으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일을 통해 보람을 얻 고자 하는 것이 내 인생관이다. 바쁘게 사는 것이 좋다. 물론 바쁘 게 산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삶의 보람을 느낄 수는 없다. 최선을 다 해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최고의 보람일 것이다. 나는 감히 일이란 인간의 선천적인 의무라고 말하고 싶다. 성경 에도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내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에 최 선을 다 하지 않는 공직자들 보면 안타깝고, 그 정도가 심한 경우

115


는 화가 나기도 한다. 일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을 알 아야 한다. 자기 직분에 충실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스스로를 불쌍 한 존재로 전락시키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어느 부처를 가더라도 부하직원들에게 프로 정신을 가지라 는 당부를 한다. 아마추어가 되어서는 최고의 대접을 받을 수 없다. 내가 맡은 일에 자부심을 갖고 최고에 도달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겠다는 정신이 프 로 정신이다. 프로는 자기의 성과에 대해서 당당히 요구하는 사람 이다. 공직생활에서도 훌륭하게 수행해낸 일에는 반드시 보람이 따른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자기도 모르는 잠재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잠재 된 힘을 꺼낼 수만 있다면 성공의 길은 열린 것이다. 유명한 수학자 피타고라스도 어린 시절에는 특별한 재능이 없는 아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의 부모는 피타고라스에게 여러 가지 학 문을 가르쳐 보려고 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다 가 우연히 수학을 접했는데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위대한 수학자 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숨겨진 재능은 있다. 공직자 중에서도 나는

116


다른 사람보다 항상 뒤처질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잠재된 능력을 찾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최인기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다.’ 주위사람들 중에는 나를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 그 럴까 생각해 봤더니 이것 역시 일을 좋아하고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나 아닌 다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다. 왜 만나느냐 하면 일을 하기 위해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 계는 일과의 관계이기도 하다. 직장에서 편한 곳, 한가한 곳만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이 런 사람들을 보면 속이 상한다. 일을 하게 되면 스트레스가 쌓이기 도 하지만 적당한 스트레스는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만약에 어느 직장 내에서 무위도식(無爲徒食)한다는 평판을 받 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조직에 큰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몸이 편하면 얻는 것도 그만큼 적어질 수밖에 없다. 보람과 만족이 없으면 행복도 느낄 수 없다. ‘행복’은 몸을 움직여 일하는 데서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다. 나중에 왜 그때 좀 더 노력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

117


강태공 여상(呂尙)은 하는 일마다 실패해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 도로 곤궁한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천하를 낚겠다며 낚시질로 소 일을 했다. 급기야 화가 난 마씨는 남편을 내쫓고 말았다. 아내에 게 쫓겨날 정도로 무능한 남편이었지만 나이 일흔이 넘어 주(周)나 라 문왕(文王)에게 발탁되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리고 후에 제나 라의 왕이 되었다. 남편이 이렇게 되자 옛날 부인이 찾아와 함께 살자고 했다. 그러 자 강태공은 물이 담긴 그릇을 엎지르고는 다시 주워 담으라고 했 다. 여기서 ‘엎질러진 물’이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나 역 시도 왜 후회스러운 일이 없겠는가? 어제 옳다고 행했던 일이 오 늘 아침에 일어나면 후회스러운 일이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신(神)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실수는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노력을 통해 그 실수의 횟수를 줄일 수 는 있다. 그래서 나는 송나라 때 구래공(寇來公)의 ‘육회명(六悔銘)’을 생 각하며 살아간다. 첫째, 관리가 사리(私利)를 탐하고 정도(正道)를 벗어나면 자리 를 잃을 때 후회한다.

118


둘째, 부유했을 때 검약하지 않으면 가난해져 후회한다. 셋째, 기술이나 재주를 젊었을 때 배우지 않으면 지나서 후회한 다. 넷째, 일을 보고 배우지 않으면 필요할 때 후회한다. 다섯째, 술 취해서 함부로 말하면 깨어나서 후회한다. 여섯째, 건강할 때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아파서 후회한다.

나는 ‘만년청춘’으로 살아가고 싶다. 나이가 들어도 젊은이처럼 살고 싶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마음이 늙지 않기 위해서다. 젊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젊은 늙 은이가 있고, 늙은 젊은이가 있다. 성장하지 않는 젊은이는 젊은이 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젊게 산다는 것은 단순히 돈 을 축적하고 더욱 많은 친구를 갖는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일을 찾아 나선다. 일이란 무엇인가? 나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19


3장

호모 폴리티쿠스 (Homo politicus) -정치적 인간


인간은 정치적 동물

인간은 정치를 통하여 사회생활을 이루어 가는 특질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학명(學名)으로 ‘호모 폴리티쿠스 (Homo politicus)’, 즉 ‘정치적 인간’이라고 부른다. 나에게도 그 런 특질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실제로 나는 15대 총 선에 출마하여 낙선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었다.

흔히들 정치는 사나이라면 한번쯤 해볼 만한 ‘최고의 도박(賭博)’ 이라고 말한다. 뉘앙스가 안 좋아 이 표현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123


정치인은 승부사의 기질도 있어야 하고, 마음먹은 일은 올인하는 심정으로 도전하라는 뜻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 사실 나에게는 그런 기질이 다분하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누구 에게 지는 걸 정말 싫어했다. 서중학교에 다닐 때 시골에서 올라왔 다는 이유로 텃세를 당하고, 억지로 싸움을 해야 하고, 그래서 남 몰래 샌드백을 두드리며 주먹을 단련해 나보다 덩치가 큰 상대를 굴복시키기도 했었다. 이런 기질이 승부사의 기질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관료 출신이다. 어렸을 때의 꿈이 공직자가 되는 것이었고, 그걸 목표로 정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행정고시에 합격하였다. 그 리고 공직자가 된 뒤에는 남보다 열심히 일을 했다. 그 결과 조직 에서 인정을 받고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시쳇말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공직자로서 총리만 못해봤지, 장관도 두 번이나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정치가는 제도(법)를 만들고, 공무원은 일선에서 그 제도를 시행하는 사람이 다. 오랜 동안 공직생활을 하면서 제도들에 대해 내 나름의 분석하 는 눈도 생겼다. 이런 제도는 좀 더 다르게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낀 적도 있었다. 현장 경험이 있기 때문에 효율적

124


인 제도를 만드는 데 보탬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모든 국회의원들이 국민과 국가에 대해 충성하겠다는 각오로 출 사표를 던질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마음이었다. 공직생활의 경험을 살려 의정활동을 한다면 분명 좋은 소리를 듣는 국회의원이 될 것 같았다. 국회의원이 되고 싶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공직생활을 통해 사회 와 국가에 봉사했던 것보다 더 많은 봉사를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특히 고향 선후배들은 집요할 정도로 17대 총선에 출마할 것을 권했다. 그때 나는 행자부 장관에서 물러나 호남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매일이다시피 고향 사람들이 총장실을 찾아와 17대 총선 이야기를 했다. 다시 도전하면 반드시 당선될 것이라고 장담하는 사람도 있었다. 15대 때 그토록 불리한 조건에서도 35%나 득표했는데 이제는 상 황이 아주 좋아졌다는 것이었다. 국민의 정부에서 행정자치부 장 관까지 지냈으니까 DJ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DJ의 인정을 받았으니까 이 차시에 민주당의 공천을 받자는 사람도 있 었다. 그렇지만 쉽게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125


‘정치가는 양의 털을 깎지만, 정치꾼은 양의 껍질을 벗긴다’는 격 언이 있다. 양의 털을 깎는 정치가가 될 수 있는가라고 자문(自 問)도 해 보았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대답했다. 나는 호모 폴리티쿠스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126


드라마틱한 정치 입문

나는 마침내 17대 총선 때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지인들은 내가 국회의원에 당선 된 것이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한 마디로 드라마 틱하다는 것이다.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출범했다. 노무현 대 통령은 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민주당으로서 ‘정권 재 창출’이었다. 그런데 참여정부가 출범하고 채 일 년이 안 되어 집

127


권여당(민주당) 내부에서 파열음이 일어나고 있었다. 급기야 2003년 말이 되자 민주당 내의 이른바 ‘친노(親盧)’세력들이 민주 당을 나가 ‘열린우리당’ 창당 준비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나는 호남대학교 총장이었다. 하루는 전라북도의 중견 정치인 김 아무개 국회의원이 열린우리 당에 입당할 것을 제의했다. 정치에 대한 미련이 아직 남아 있었던 터라 정치 입문에 대한 제의가 싫지는 않았지만 열린우리당에 입 당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때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 운 영이나 인사, 그리고 여과되지 않고 신중하지 못한 언행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득권을 타파한다는 데에는 찬성하지만 기존 질서를 무시하는 것 같은 서열 파괴 인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랜 공직생활 탓 으로 내 사고(思考)가 경직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조직은 질서가 엄정해야 하기 때문에 서열을 무시한 파 격 인사가 생산적이거나 진취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사에서는 서열과 능력에 따른 발탁과 혁신이 조화를 이루어야 조직에 활력 이 붙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여과되지 않은 말도 언짢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기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준 호남사람들에게 “호남사람들이 노무

128


현이 좋아서 찍었습니까? 한나라당 미워서 대신 나를 찍어준 것이 지”라는 발언을 했다. 나는 이 발언은 호남사람을 무시하는 차원을 넘어 비하(卑下)한 발언이라고 생각했다. 또 어떤 공개적인 자리에 서 “반미(反美)면 어떠냐?”라고 발언했는데, 이것은 일국의 대통 령으로서 신중하지 못한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기득권과 특권을 타파하고 상식과 원칙을 바로 세우려 했던 혁명가로 역사에 기록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당시에는 굳이 입당을 한다면 민주당에 하고 싶었다. 나 는 국민의 정부에서 호남의 정치지도자 DJ를 모신 사람이다. DJ를 모셨다고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50년 전통 민주당의 정 체성은 열린우리당이 아니라 민주당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나가고 나자 거대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하루아침 에 작은 정당이 되고 말았다. 그 작은 민주당의 대표는 조순형 의 원이었고, 사무총장은 현재 광주광역시 강운태 시장이 맡고 있었 다. 열린우리당으로부터 입당 제의를 받고 있을 무렵 당시 강운태 사 무총장으로부터 영입하겠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강 총장과는 고향 과 공직 선후배로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면서 아주 각별하게 지내 는 사이였다. 영입하겠다는 것은 곧 후보로 내세우겠다는 속뜻이

129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공정한 경선’만 할 수 있다면 입당하겠다고 했다. 강 총장도 내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후보 경선 준비를 해 나갔다. 여론조사를 해 봐도 나 의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현역 지구당위원장을 지지하는 세(勢)보다 정치신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내 세가 훨씬 컸다.

공천이 확정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광주로 내려왔는데 강 총장으 로부터 전국구 의원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전화가 왔다. 일언지 하에 거부를 했다. 내가 비례대표 하겠다고 민주당에 입당한 것은 아니었다. 영입 케이스니까 현역 지구당위원장을 무시하고 공천을 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공정한 경선만을 요구했던 것이다.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사람들과는 한 배를 탈 수 없다는 생 각이 들었다. 화가 나서 정치를 포기해 버릴 생각도 했다. 나를 지 지하는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대거 상경해 민주당 중앙당 당직자 들에게 항의를 했다.

이런 상황이 소문나자 여수수산대학교 교수들이 찾아와 출마 안 하면 총장으로 다시 와달라고 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민주당

130


의 처사가 괘씸했다. 영입하겠다면서 대학 총장을 그만 두게 하고, 고, 경선마저 안 시킨다는 것은 사람을 우롱하는 처사나 다름없었 다. 지지자들이 더욱 분노했다. 2004년 3월 19일, 민주당을 탈당했다. 그리고 사흘 후 각 언론사 에 무소속 출마 보도 자료를 발송했다. 그리고 3월 30일 후보자 등 록을 하고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무소속으로 뛰고 있는데 또 다시 열린우리당으로부터 이른바 ‘러 브콜’이 왔다. 열린우리당 옷을 입으라는 것이었다. 당시 열린우리 당의 인기는 좋았다. 열린우리당 후보로 나서면 선거운동도 훨씬 수월해질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어쩐지 열린우리당은 내키 지 않았다. 아직도 민주당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후에 내가 민주당에 입당한 것은 민주당이야말로 호남의 권익을 대변하고 정통성을 지닌 정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민주당 에 입당하여 부대표, 원내대표, 정책위 의장을 맡으면서 나는 열린 우리당의 잘못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었다.

131


긴박했던 역전 드라마

민주당으로 영입 제의를 받고 특별입당을 한 뒤 다시 탈당이라는 수순을 밟아 무소속으로 출마하기까지는 20일도 안 되었다. 그 20여 일 동안 정말 드라마 같은 일들이 벌어 졌었다. 그런데 선거 당일 개표의 과정은 참으로 긴박감 넘치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후보자는 무소속인 나를 비롯해 민주당,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자민련 등 다섯 명이었는데, 선거운동 내내 나는 여론 조사에서

132


1위를 달렸다. 지지자들은 축배를 나눌 일만 남았다고 확신을 했 다. 선거운동원들도 신이 나서 활동했다. 지역의 분위기도 나의 당 선을 점치고 있었다. 개표는 밤 8시쯤부터 시작되었다. 예측했던 대로 초반부터 내가 1위를 달렸다. 2위인 열린우리당 후보와 4,000여 표 차이가 났다. 그런데 점점 표 차가 줄어들더니 마침내는 9,000여 표 차로 역전 을 당하고 말았다. 서울에서 개표 방송을 보고 있던 아들이 제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이번에도 유권자들에게 속은 것 같으니까, 아버지 위 로나 잘 해 드리라는 전화였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나주 사무실에 있었고, 아내는 화순 사무실에 있었다. 처음에는 화순 사무실에 지지자들이 가득했는데, 역전을 당하자 한 사람 두 사람 빠져나가면서 아내와 몇 사람만 남게 되었다고 한 다. 나주 송월동에 사는 유권자가 나주 개표소에 와서 개표 부정이 라고 항의를 한 일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TV를 마당에 던져 버리 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최소한 5,000표는 이길 것이니까 걱 정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하지만 아내는 믿지 않았다. 개표방송에

133


서 지고 있는데 어떻게 믿으라는 것이냐 었다. 아내는 방송 내용만 믿고 내 말은 믿지 않았다. 나 역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밤 10시가 가까워지니까 열린우리당 후보 사진에 ‘확’이라는 도장이 찍혔다. 당선이 확실시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은 나주 개표소의 개표기 가 고장이 났기 때문이었다. 열린우리당 후보는 화순 사람이었기 때문에 계속 득표수가 올라갔고, 나주 사람인 내 표는 정지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개표기가 수리된 것은 밤 10시가 지나서였다. 그때부터 내 득표 수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역전이 되었다. 당시 열린 우리당 후보는 서중학교 4년 후배였다. 그 후배는 나의 당선이 확 실시 되자 개표가 진행 중인데 사무소로 찾아와 축하를 해 주었다. 우리는 포옹하고 서로 위로와 축하를 나누었다. 그 모습이 전파를 타고 전국에 방영되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역전 드라마였다. 개표 결과는 내가 나주에서 1등, 화순에서 2등을 했고, 열린우리 당 후보는 화순에서 1등, 나주에서 2등을 했다. 그리고 민주당 후 보는 나주와 화순에서 3등을 했다. 열린우리당 후보와의 표 차이 는 4,000표가 조금 넘었다. 5,000표 차이를 예상했는데 근접한

134


수치였다.

17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텃밭인 호남에서도 참패를 당했다. 노무 현 대통령의 탄핵 직후에 치러진 선거였는데, 열린우리당 후보들 은 호남 지역에서 압승을 했다. 광주에서는 열린우리당이 이른바 싹쓸이를 했다. 사람들은 이 때 당선된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탄돌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7대 총선에서 무소속 당선자는 나와 경북 문경 출신 신국환 의 원 단 두 명이었다. 나는 어렵게 당선되었으니까 지역과 나라를 위 해 더욱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리고 일로써 보답하겠 다는 각오로 등원을 했다.

135


국회 건교위 상임위원회를 자원한 까닭

나는 지역을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으 로 ‘건설교통위원회’를 자원했다. 쉽게 말해서 지역의 현안사업에 따른 예산을 한 푼이라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는 상임위원회이기 때문에 건교위를 자원했던 것이다.

나의 지역구인 화순과 나주는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역이다. 6,70년대만 해도 나주는 평야, 과수(果樹), 바다와의 연결 등 지역 적인 조건 때문에 잘 사는 곳이었다. 인구도 27만 명이나 돼 국회

136


의원을 두 명씩 뽑았다. 그런데 내가 출마했던 2004년에는 인구가 10만여 명으로 감소해 단독선거구 해당이 안 되어 화순과 합쳐 한 명을 뽑게 되었다. 인구가 14만여 명이었던 화순도 7만5천여 명으 로 줄었다. 산업사회가 되면서 화순과 나주는 지역세가 많이 쇠퇴하였다. 화 순과 나주를 예전의 영화로웠던 시대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 그래 서 나는 할 일이 많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일을 해야 살맛이 나는 사람이니까 지역민들이 마음껏 부려먹어도 좋다.

국회의원은 국정(國政)을 논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지역의 현안문제 해결에도 힘을 써야 한다. 대도시의 국회의원들과 농어 촌 지역의 국회의원들은 입장이 다르다. 농어촌 지역 유권자들은 지식이 많은 국회의원보다 예산을 많이 확보하는 국회의원을 원한 다. 그리고 농어촌 지역의 국회의원들은 예산 확보의 많고 적음으 로 그 능력을 평가받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나는 능력 있 는 국회의원으로 평가받아도 괜찮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다선(多選) 국회의원이라고 해서 예산을 많이 확보는 것 은 아니다. 시쳇말로 길을 알아야 하고, 요령이 있어야 한다. 나는

137


중앙부처에서 많이 일했기 때문에 그 방면에 대해서는 내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고 자부한다. 알아야 면장도 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 다. 중앙정부의 어디에 예산이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어느 부서에 사업이 있는가도 알아야 한다. 어느 시기에 예산을 편성하는가도 알아야 한다. 누구에게 이야기해야 되는가도 알아야 한다. 장관에 게 부탁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실무 핵심 간부를 설득해야 지 장관부터 찾아가면 될 일도 그르칠 수가 있다. 이런 것은 정부 에서 일했던 사람이라야 그 시스템을 잘 알 수 있다. 정부에서 오랜 동안 일했다는 것은 그만큼 두터운 인맥(人脈)을 형성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나는 그런 노하우를 십분 발휘해 지역 발전을 위해 적잖은 예산을 확보했다. 나주의 경우만 보더라도 8조5천억 원의 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나만큼 많은 예산을 확보한 국회의원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화순 사람들이 나주가 고향이라고 나주에만 신경을 쓰냐고 불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나주만을 생각할 수는 없다. 화순 발전에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그 구체적인 일들은 다음 글에서 세세히 밝히겠다.

138


늦깎이 초선 의원

17대 총선에서 출마할 때 나주와 화순 두 지역이 묶여지는 통합선거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지역 대결의 기류가 생겼다. 그렇게 되니까 화순에서는 나의 득표율이 낮을 수 밖에 없었다. 온정주의(溫情主義) 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인물본위 가 아니라 정에 끌려 투표하게 된다. 동서대결이 심화된 것도 이 온정주의 때문이다. 나는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 지역 갈등을 해소 하기 위해서는 행정구역 개편시 도(道)를 폐지하고 광역시(廣域 市)로 바꾸자는 의견을 제시한 바도 있다.

139


그런데 굳이 집안 내력을 밝히자면 화순은 나의 뿌리가 되는 지 역이다. 4대조와 5대의 선산이 화순 도곡면 앵남에 있다. 3대조 때 나주로 이주를 했고, 나는 나주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떤 분은 3대 조께서 통합선거구가 될 것이라는 선견지명을 갖고 나주로 이주하 신 것이라고 할아버지 지혜에 감탄하시는 분도 계셨다.

나의 국회 진출은 나이로 봐서 다소 늦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를 하기 전에 관료와 대학 총장으로 일했기 때문에 세월이 많이 지나 간 것이다. 나는 이순(耳順)이 되어서야 17대 국회에 초선으로 등 원했다. 3,40대에 진출한 국회의원들과 비교하면 많이 늦었다. 그 래서 나는 스스로를 ‘늦깎이 초선 의원’이라고 지칭한다. 국회의원 의 선수(選數)는 당직을 맡는다거나 국회 내에서 보직을 맡을 때 상당한 영향력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국회에서나 민주당 내어서나 비중 있는 역할을 하고있다고 자부한다. 아마도 두 번의 장관과 세번의 대학총장등 경력과 인생에 대한 경륜을 좋 게 평가해 주고있는 것 같다.

나는 초선 때 작지만 민주당의 최고위원, 정책위 의장, 원내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60년 역사와 법통을 지닌 민주정당의 정통성을

140


지켜나가는 데 일조를 했고, 재선이 되어서도 정말 열심히 일했다 고 자부한다. 2008년, 재선하여 의정활동을 하고 있을 때 이른바 ‘광우병 파 동’이 일어났다. 아시아 어느 나라도 30개월령이 지난 소를 수입하는 나라는 없 다. 광우병 발생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국제수의사협회 사무국에 서도 30개월령 이상의 소에서 광우병 위험 물질이 발생할 위험이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이명박 대통령은 캠프데이브드 별장에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위생조건의 제약 없이 30개월령 이상의 소 도 수입하겠다는 약속을 해 버렸다. 이것은 우리의 검역주권이 무시당하는 처사이고, 국민의 건강권 은 안중에도 없는 처사였다. 온 국민들은 신중하지 못한 대통령의 처사를 규탄하고 나섰다. 방송사에서도 광우병 발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었고,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 다.

국회에서는 여야합의로 ‘가축전염병예방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나를 선임하였다.

141


특별위원회에서는 가축 전염병 예방법을 개정하고, 광우병 발생 국가로부터 수입되는 쇠고기에 대해서는 별도의 검역을 거치고, 광우병 발생국에서 다시 수입하려면 국회의 심의를 얻도록 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법안을 심의하고 가결하였다. 이런 중책을 맡게 되었던 것은 농림수산부 장관을 지냈기 때문에 국회에서도 그 경력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듯 어느 곳에서든지 중책을 맡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도 행운이 었다고 생각한다.

142


국회의원의 꽃 ‘상임위원장’

나는 국회의원의 꽃은 상임위원장 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국회의원이라면 국회의장이 되고 싶은 마 음이 있을 것이다. 국회의장은 다선 의원이나 다수당의 원로들이 맡는 것이 상례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부터 국회의장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상임위원장을 생각하기 에는 재선인 나로서는 그것 역시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선수에 비해 비교적 빠르게 상임위원장을 맡는 영광을 안았다.

143


18대 국회 후반기에 들어서서 나는 농림수산식품위원회 위원장 을 맡았다. 이 역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는데 농수산부 장관의 경력을 인정받아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국회는 특별위원회를 포함하여 전문분야별 19개 상임위원회로 구성되고 이를 중심으로 모든 국회의원의 활동이 이루어진다. 국회의원과는 별도로 상임위원회 수장인 위원장에게는 이에 상 응하는 예우가 뒤따르며, 상임위원회 전체 방향을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위원장의 전문적인 자질과 능 력, 리더십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렇다 보니 늘 언론의 초점이 될 뿐만 아니라, 결정권자로서의 지역 관련 사업과 예산 확보에 유리 한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상임위원회는 법률의 제안, 개정, 제정 등을 하고, 정부를 감시 감독하며, 소관 부처에 대한 예산도 심의한다. 내가 상임위원장을 맡았을 때 농림수산식품위원회에서 심의하는 예산이 17조여 원이 었다. 상임위원장을 맡으면서 특히,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로 인해 농어업 분야에 예상되는 피해 보전 대책, 보상에 따른 법률과 예산 에 대해 심의, 지원한 일이 하여 보람으로 남는다. 18대 농림수산 식품위원회에서는 한미 FTA로 인해 경제적 약자인 농어민의 권

144


익을 보호하는 데 신경을 썼다. 소득을 보전하고, 농업경쟁력을 향 상시키고, 농어업의 기반을 강화는 데 많은 예산이 돌아가도록 힘 썼다. 농촌지역의 국회의원인 나로서는 더욱 보람이 컸다. 내가 농 림수산식품위원장을 맡으면서 2010년과 2011년 2년 연속 시민단 체로부터 우수상임위원회와 우수상임위원장 상을 수상하는 영광 을 안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가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고 생명산업인 농업이 최대 피해를 입어 자칫 국민의 생존과 국가의 존립에 위협이 될 수 있는 한미 FTA를 아무런 대책 졸속으로 처리하려 해, 여야 의원들과 함께 김황식 국무총리를 항의방문하기도 했다. 나는 ‘한-유럽연합 (EU), 한미 FTA 동시 발효로 농어업 분야에 연간 1조 원에 이르 는 피해가 예상되는데 정부가 무성의, 무책임, 무대책 등으로 일관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농업에 대한 피해 보완대책 없이 한미 정상회담 선물용으로 FTA를 졸속으로 강행처리한다면, 국민 적 공분과 농어민들의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날 나와 여야 간사들은 김황식 총리에게 피해 보전 직불제 개 선, 사료원료 무관세 적용, 축산 소득 비과세 확대, 수리시설 예산 증액, 농어업 경쟁력 강화 및 유통구조 개선 등 13가지 보완대책 과 항의 서한을 전달했다.

145


그 후 나와 여야 원내대표 3인은 한미 FTA 농어업분야 피해보전 대책 13개항 실행에 합의하였고, 이를 정부에 전달해 이행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여 관련법 개정과 예산 확보가 진행 중에 있는 것은 큰 성과이며, 밭농업직불제 최초 실시 등 우리나라 농정사(農政 史)에 남을 만한 사항들이 담겨있는 것은 큰 일의 결과요 보람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에 대해 모 언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최인기 위원장이 「여야정 협의체」에서 제안한 한미FTA 농어업 피해보전대책 13개항 끈질긴 협상 끝에 합의 이끌어 최인기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장이 10월 30일 여야정협의체에 서 제안한 한미FTA 농어업 피해보전대책 13개항을 끈질긴 협상 끝에 여야원내대표 합의를 이끌어냈다. 최인기 위원장은 예산문제를 들어 반대 입장을 고수했던 정부 측 에 “한미 FTA 비준 여부를 떠나 정부가 위기에 직면한 농어민에 최소한의 대책을 세워야한다.”고 설득하는 한편, 이명박 대통령과 전화통화에서 농림수산 분야의 적극적인 대책을 강력하게 요구, 이 같은 피해 대책을 마련했다. 최인기 위원장은 국정감사 마지막 날 김황식 국무총리를 항의 방

146


문해 한미FTA 농어업 피해보전대책 13개안에 대해 수용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최인기 위원장이 제안해 합의를 이끌어 낸 피해 보전대책 13개항의 주요내용은 피해보전직불제 등 제도개선과 밭 농업 및 수산직불제도 신설, 축산발전기금 2.5조원 및 용·배수로 예산 1,000억원 등 예산 추가 확보, 수입사료 원료 무관세·농사용 전기세 확대적용·가축 공제두수 확대·농어업용 1톤 트럭 및 4톤미 만 스키더로우더 면세유 대상 확대를 포함해 감면기간 10년 이상 법적 보장 등이 포함되어 있다. 최인기 위원장은 “설사 한미 FTA 협상이 무효화된다 하더라도 다른 FTA를 대비하여 농어업 경쟁력 강화과정에서 최소한의 농 어업 피해대책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여야 대표 간 합의한 농 어업 피해보전대책 13개항이 그대로 반영되기를 기대한다.”고 밝 혔다.

147


한미 FTA는 상위 1%를 위한 협정

한미 FTA는 대한민국의 입법권과 사법권을 침해하는 주권불가의 조약일 뿐만 아니라, 정부의 공공 정책 및 서비스마저도 국민의 이익보다는 투자자의 이익에 우선해 야 하는 소위 망국적 조약이라 할 수 있다. 한미 FTA 협정의 독소 조항인 ISD(투자자 국가 소송제)가 대표적이다. 또한, 최대피해산업인 농어업분야에 있어 개방 초기에는 소비자 에게 값싼 수입농산물 공급으로 가계에 이익이 된다는 의견도 있 으나, 한-칠레 FTA 체결 이후 칠레산 포도주의 경우 관세철폐로

148


인한 이익을 수입업자가 가져감으로써 오히려 가격이 상승한 사례 가 있으며, 뉴질랜드 키위 또한 수입 초기에는 저렴한 가격에 판매 되었으나 시장 독점이후 가격이 상승하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한미 FTA 체결로 단기적으로는 우리나라 소비자에게 이익 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는 국내 피해산업 특히 국민의 생존과 국가의 존망이 걸린 농어업의 붕괴는 결국 식 량의 대외의존도를 높이게 되어 식량 무기화 시대에 대한민국을 무방비로 노출시켜 위기에 처하게 할 수 있다. 또한 자동차 등 일 부 대기업이 영위하는 산업에만 이익이 된다는 점에서 한미 FTA는 국익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국민 대다수가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극히 소수의 부자들에게 부의 집중을 가져다주 는 빈익빈부익부(貧益貧富益富)의 협정이라는 점에서 볼 때, 대한 민국의 부(富)의 양극화를 심화시켜 사회적 갈등 양상을 부추기는 불균등한 조약이다.

대외의존도가 85%가 넘는 우리나라에서 FTA는 선택불가결한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나 국민 대다수의 이익에 기여하고 공공 의 이익이 보호되며 주권이 침해되지 않는 협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한미 FTA는 여러 독소조항들로 인해 이러한 원칙이 무

149


너져 버렸다. 주권국의 입법, 사법, 공공서비스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ISD, 의약품 가격 상승을 초래할 의약품 허가와 특허 연계제 도, 한미 FTA 협정에 규정되지 않은 사항도 제소 가능하게 한 비 위반 제소, 한번 개방된 조치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래칫조항, 다 른 나라와 FTA 체결 시 더 유리한 조건이 있는 경우 미국에 자동 으로 적용하는 최혜국 대우 등 한미 FTA 협정 곳곳에 이 같은 독 소조항이 가득하다.

2007년 참여정부 시절 협상이 마무리된 한미 FTA는 당시 미국 노동계와 의회의 반대로 비준이 되지 못하고 4년여 간을 표류하였 다. 이 기간 동안 미국 월가를 중심으로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 기가 발생해 우리가 당초 선진적인 시스템으로 여겼던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붕괴되고 재편되는 과도기를 거치고 있으며 그때의 여 진으로 유럽은 재정위기를 겪고 있고, 전 세계가 언제 붕괴될지 모 르는 경제위기에 놓여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미 FTA는 자동차 환경관련 특소세 세제 개 편, 스크린 쿼터 축소, 약값절감정책 도입 불가 관철에 이어 2008년 이명박 정부 들어 미국산 쇠고기 개방으로 미국이 요구한 4대 선결조건이 타결되고, 2010년 12월 자동차 부문 재협상으로

150


미국의 요구가 완벽히 수용됨으로써 미국의회가 전격적으로 만장 일치로 비준을 가결하였다. 4년간 비준을 끌어온 미국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 해 한미 FTA와 무관한 4대 선결조건과 우리 정부가 가장 큰 성과 로 내세웠던 자동차 분야마저 대폭 양보를 받아냄으로써 소위 이 익의 균형이 깨진 불평등한 협정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 다.

이익의 불균형, 주권국가를 무력화 할 수 있는 독소조항들로 가 득한 한미 FTA를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가 아무런 대책 없이 날 치기 강행처리한 것은 의회의 폭거를 넘어 을사늑약에 버금가는 행위로 비판받지 않을 수 없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국민들의 한미 FTA 폐지 여론에 동의 해 지금이라도 비준안을 유보하고 미국과 재협상을 하는 것이 최 선의 길일 것이나, 이러한 기대가 현실이 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 다. 한미FTA의 독소조항을 제거하는 방법은 협정문 24.5조에 따라 발효 후 우리나라가 해당 협정을 이행하기 어렵다는 내용을 미국 에 서면통보하고 180일 후에 자동으로 폐기시키는 방법이 있다.

151


이를 위해서는 내년 4월 총선에서 민주당을 비롯한 진보야당이 2/3 이상 의석수를 차지하거나, 12월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뤄내 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러나 설령 총선과 대선에서 진보야당이 승리를 이뤄낸다 하더 라도 최소 1년에서 2년간은 한미 FTA 발효로 농어업인과 중소상 공인 그리고 서민들의 피해는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민주당은 농어업인과 중소상공인 그리고 서민들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 도록 피해보전 및 복지를 강화하는 대책을 마련해 예산과 법으로 보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원내투쟁과 장외투쟁을 병행해야 하는데, 이에 대 한 반대의 목소리 또한 많다. 그러나 민주당이 장외투쟁에만 전념 할 경우 내년 예산은 물론이거니와 이미 마련한 피해보전대책 마 저도 내팽개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반드시 상기해야할 필요 가 있다. 한미 FTA 체결로 농업과 축산업 비중이 높은 전라남도와 나주 시는 무엇보다 농어업인들이 안정적인 소득을 유지할 수 있는 농 정정책 마련과 더불어 수입농산물에 적극 대응할 수 있도록 경쟁 력 강화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한미 FTA 비준 통과로 주권국가인 대한

152


민국이 위기에 놓였다.

비준안 서명이 불과 이틀(월요일 기준) 남은 시점에서 국민들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이를 철회하 거나 유보할 움직임은 전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예산안을 단독 처 리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을 뿐이다. 사는 것이 힘들어서 정 치에 무관심하다지만, 정치에 무관심해서 사는 것이 더 힘들어진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이제 한미 FTA의 존폐는 국민의 손에 넘어왔다. 내년 총선과 대 선에서 민주당 등 진보야당의 절대다수 의회진출과 정권교체 없이 는 한미 FTA로 인한 우려가 현실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끝으로 국회는 서민과 농어업인 그리고 중소상공인 등 99%의 대 다수 국민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한미 FTA 발효에 대응한 대 책을 마련하는데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153


영의정 자리도 사양한 최판서(崔判書)

2009년 8월 31일, 이날 오후 나는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부터 뜻밖에 제의를 받았다. 국 무총리로 일해 줄 수 없느냐는 제의였다. 뜻밖이기는 했지만 오래 전부터 대통령이 나를 의중에 두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감지는 했었다. 그렇지만 민주당 국회의원인 내가 이명박 정부의 총리로 일한다는 것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제의를 받고 나서는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154


2009년 초, 대통령이 영산강 포구를 순시한 적이 있다. 그때 대 통령이 버스에 타는 것을 배웅하려고 서 있는 나를 한쪽으로 부르 더니 ‘일할 줄 아는 사람은 일을 잘 하는 사람을 알아본다’고 말했 다. 그 말 속에 들어있는 의미가 무엇인가는 감지했지만 그다지 새 겨듣지는 않았다. 그 후로도 장차관 회의가 있을 때면 종종 대통령이 나를 칭찬하 더라는 말을 후배 장차관들이 전해 주었다. 아마도 대통령은 나의 행정경험과 리더십을 높이 평가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호남출 신이므로 동서화합의 권력구조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제의를 받고 솔직히 고민도 했다. 대통령은 하늘이 내린다고 하 지만, 총리는 공직자가 노력해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총리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고 한다. 그만큼 막강한 책임과 명예를 가진 자리이다. 사실 제의를 받고 쉽게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아내와 상의도 했다. 국회에서 흉 금을 털어놓고 지내는 우리 당 이낙연, 조영택 의원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9월1일 하루를 지냈다. 어느 신문에서는 그날을 ‘길었던 1박 2일’이라고 표현했는데, 내 심정을 단적으로 대변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155


결국 내가 갈 곳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내 뜻을 전했 더니, 당장 결정하지 말고 한나절만 더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런 다음 정당인으로서 당에 전후 사정을 밝히고, 역사에 남겨야 하겠 기에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정세균 국회의원을 찾아가 사실을 이 야기했다. 정 대표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며 격앙하 였고, 나중에 최고위원회 발언을 통해 야당 중진의원 빼가기를 중 단하라고 대통령에게 경고도 하였다. 내가 그런 결정을 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총리로 가려면 먼저 민주당을 탈당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나를 성원해준 전라도 사람, 나주와 화순 사람들을 배신하는 일이 된다. 이른바 ‘호남출신 관료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 받던 최인기 가 벼슬을 쫓아 신의를 저버렸다는 비난도 받게 될 것이다. 총리가 되는 것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켜왔던 명예와 신의를 지키는 일이 더 값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내가 이명박 정부의 총리로 일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는 서 로 정치적 이념과 철학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나는 ‘중도개혁주의 자’이고 대통령은 ‘신자유주의자’이다. 중도개혁주의자인 나는 정 치적으로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신봉하고, 경제적으로는 중산 층과 서민의 권익을 대변하고 경제성장에 의한 정당한 분배, 고용

156


과 복지의 조화 등을 지향하는 이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 나 신자유주의자인 대통령의 국정운영은 경쟁과 효율을 중요시하 기 때문에 기업에 유리한 기업 프렌들리 정책을 고수하여 대기업 에게는 세금을 깎아주고 서민과 농민들에게는 공공요금, 기름값, 영농비 상승을 부추겨 고통 받게 하는가 하면, 저금리, 고환율 정 책으로 대기업에게는 더 많은 이익을 주고, 서민은 고물가와 소득 감소로 더 못살게 되는 부익부빈익빈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중소기 업, 서민, 농어민 등 취약계층에 대한 특별한 배려 없는 정치철학 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은 나의 정치철학과 이념에 배치 된다. 셋째, 내가 나주와 화순에 벌여놓은 국책사업들의 마무리를 위해 서라도 통상 1년 남짓 재임기간의 국무총리로 가는 것은 전혀 도 움이 안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화순의 백신산업특구사업, 나주의 혁신도시와 영산강 살리기 등 수많은 사업들이 이제 착수단계에 있고, 앞으로 마무리에 많은 국가 예산이 소요되기 때문에 짧은 임 기의 총리로 가서는 해낼 자신이 없었다. 나는 대통령에게 ‘내가 총리로 가는 것은 나에게도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국정운영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요지로 거 절의 뜻을 전달했다.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 만,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157


9월 2일, 거절의사를 밝히고 나서 4일에 정운찬 총리가 임명장을 받았다. 이때 광주매일신문 김대원 기자가 <신숙주와 최인기>라는 제목의 시평을 썼다. 그 시평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은 병약했고 따라서 아들인 단종의 미래 를 몹시 걱정했다. 그래서 집현전 학자들에게 단종을 지켜달라는 고명(顧命)을 남겼고 당대의 엘리트였던 그들은 왕에게 굳은 약조 를 한다. DJ는 생애 마지막 불꽃이 꺼져갈 즈음, 혼신의 힘을 다해 민주주 의와 경제, 남북관계 등 3대 위기를 토로했다. 집현전 학자들은 변함없이 단종에게 충성을 바쳤으나 결국 정변 은 터지고 말았다. 야심만만한 수양대군이 1453년 계유정난을 일 으킨 것.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가 칼춤을 추면서 수양의 동생 안평대군 을 비롯, 황보 인과 김종서 등이 떼죽음을 당하는 살벌한 정국이 도래했다. 이때 집현전의 신숙주가 수양대군의 편을 들자 성삼문 등 다른 학자들은 격노했다. 조선을 움직였던 교리인 유교, 그 중에서도 핵 심 가치관인 ‘충(忠)’의 도를 어긴 그에겐 별수 없이 배신과 변절이

158


라는 딱지가 붙게 된다. 8월 31일 총리를 맡아달라는 ‘밀지(密旨)’를 접한 순간, 민주당 최인기 의원의 머리에 나주 노안이 외가인 신숙주의 이름이 떠올 랐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 단종은 귀양을 가게 되고 수양대군은 1455년 새로운 임금, 세조가 된다. 당연히 세조는 집현전 학자들에게 신숙주처럼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라고 명한다. 그러나 성삼문 등 사육신은 오히려 단종 복위를 벌이다 투옥돼 모진 고문을 받게 된다. 이 때 성삼문은 한 번도 세 조를 임금이라 부르지 않았다. 자신이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단종뿐이라는 시퍼런 논리였다. 세조는 사육신을 처형할 수밖에 없었고 이 거사를 계기로 단종의 명도 단축된다. 그러나 사육신의 휘황한 명예는 오늘까지 살아 숨 쉰다. 모든 행정관료의 꿈이자 최종 목표인 총리, 지금이 왕조시대도 아니고, 최 의원이라고 왜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대한 욕망이 없 겠는가. 자신과 가문의 영광이요, 현안이 산적한 고향 나주와 화순 에서도 환영하는 분들이 많이 않았을까? 게다가 대한민국 건국 이

159


후 첫 광주전남출신 총리라는 타이틀도 붙게 된다. 그가 밤새 잠을 못 이루자 부인은 “고사하면 다 해결될 일 아니에 요”라는 조언을 넌지시 건넨다.

계유정난에 가담, 공신이 된 신숙주는 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 을 두 번이나 지냈다. 세조는 죽음을 앞두고 “당 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신숙주”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위징은 당 태종의 ‘문화통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 사실 신숙주는 계유정난의 공적 면에서 한명회에 뒤질지 몰라도 세조에 끼친 정치적 영향력과 개인적 친분에서 누구보다 앞섰다는 것이 정설이다. 세종 역시 아들 문종에게 “집현전 학사 중 문학적 재능과 정치적 경륜을 겸비한 사람은 오로지 신숙주뿐이다. 앞날 에 반드시 그에게 국사를 맡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가 비록 세조의 왕위찬탈에는 가담했으나 ‘왕권 약화는 곧 국가존 망 위기’라는 정치이념을 배경으로 진정 왕조와 백성을 위하는 길 이 무엇인지 고민했던 인물이라는 평도 있다. ‘경국대전’ ‘동국통감’ ‘오례의’ ‘해동제국기’ 등 그가 일생동안 남 긴 많은 저서와 업적은 그의 진정성을 사후적으로 증명하는 잣대 라는 얘기다.

160


결국 관건은 ‘최인기 총리’가 3대 위기 극복 등 국민을 위해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길 수 있느냐의 여부로 모아졌다. 평소 절친한 모 의원은 고민하는 최 의원에게 “새로운 청와대 참모진의 면면을 보 니 특별한 역할이 주어지기는 힘들 것 같다”고 조언했다. 속을 터 놓고 지내는 다른 의원도 “그간 정부정책을 비판했던 논조를 어떻 게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겠느냐”고 우려했다. 보좌진 회의도 ‘뜻 밖에’ 전원 반대라는 결론이 나왔다. 1일 낮 최 의원은 총리내정 수락 후 민주당 탈당이라는 카드를 접고, 청와대 측에 이 같은 최종 입장을 전달했다. 그에게는 참으 로 길었던 1박2일이었다./김대원 기자》

이런 일이 있고 나서 2년 뒤, 2011년 9월 12일, 나주에서 ‘전라 남도 여성대회’가 열렸는데 손학규 대표와 박지원 전 원내대표가 참석했다. 청중들 앞에서 손학규 대표는 “최인기 의원은 차기 정권 에서 국무총리를 할 사람이다”라고 말했고, 박지원 전 원내대표는 “천하의 최인기가 어떻게 이명박 대통령 밑에서 총리하겠느냐? 그 래서 안 갔어!”고 말해 청중들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그 후, 지금도 내가 당수(黨首)로 있는 국회 ‘목욕탕당’ 당원인 홍 준표 전 하나라당 대표는 국회 헬스클럽에서 나를 만날 때마다 “형

161


님, 국무총리 한 번 하시고 놀고먹지, 뭐 하러 정치 오래 하시려고 그렇게 열심히 체력단련하십니까?”라고 나를 놀려대기도 한다. 나는 담백하고 솔직하며 직설적인 홍준표 의원을 속 이야기를 나 눌 수 있는 후배로 생각하며 좋아한다. 홍준표 의원이 물을 때마다 “20년 동안 습관이 돼서 하루 4km의 조깅에 중독되었고, 하루라 도 거르면 몸 컨디션이 좋이 않아 관성적으로 뛰고 있다”고 말한다. 나만의 건강비결이라고 믿고 앞으로 계속해 나갈 작정이다.

162


4.27 화순군수 재선거는 선거혁명

2011년 4월 27일, 화순군민 은 군수를 뽑기 위해 또 다시 선거를 치렀다. 그동안 화순군민은 2002년부터 2011년 4월 27일에 이르기까지 군수선거를 무려 여 섯 차례나 치렀다. 여기에다 국회의원과 지방의원을 뽑는 선거까 지 합하면 열 차례나 된다. 지방선거는 인맥, 학맥, 지연, 혈연 등의 인과관계가 얽히기 때문 에 그로 인해 파생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리고 좁 은 지역에서 보니 선거가 끝나고 나서도 반목과 분열이 오래 간다.

163


화순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그 정도가 아주 심하다. 10여년 사이에 군수선거를 여섯 차례나 치렀기 때문이다. 이 여섯 차례 치러진 선 거를 통해 이른바 ‘부부군수’ ‘형제군수’도 나왔다. 남편이 선거법 으로 당선무효가 되니까 부인이 나와서 당선이 되었다. 또 형이 구 속되니까 동생이 나와 당선되었다. 그런데 이들 군수들 가운데 임 기 4년을 채운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선거가 끝나고 나서 어김없이 고소 고발이 일어났고, 결국은 당 선무효나 구속으로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화순군민들의 마음의 상처는 커졌고, 군정(郡政)은 안정을 찾지 못했다.

현행 우리나라의 자치제도는 모든 권한이 군수에게 집중이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군수의 잦은 교체는 공무원 사회의 분열로 이 어지고, 이 파장은 사회단체 분열을 가져온다. 여기에 군민들까지 편 가르기를 하게 되어 군민들의 상처는 더욱 커지고 갈등의 골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지방자치는 주민들이 자기의 대표를 뽑아 모두가 합심하여 지역 을 발전시키는 제도이다. 그러므로 지방자치 행정은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행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선거 후 고발, 당선 무효, 구속이 반복되다 보니 군정의 정체(停滯)상태에 놓이게 된다.

164


모든 자치단체들이 발전을 위해 숨 가쁘게 경쟁을 하고 있는데, 화순은 선거 후유증으로 인해 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것이다. 군수 가 자주 바뀌다 보니 공무원들은 이번에는 어떤 군수가 오나 눈치 부터 본다. 이런 상황에서 행정의 효율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또, 군민들은 서로가 반목하고 질시한다. 자연 공무원과 군민들 사이 가 멀어지게 된다. 이것이 그동안 10여 년간 화순의 현주소였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화순을 문제점이 많은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화순군민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명예가 실추되어 화순 사람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럽다고 말하는 출향 향우들도 많다. 나 역시 국회에서 화순은 왜 바람 잘 날이 없느냐고 짓궂은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지역구 국회의원으로서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었 다.

그런데 또 다시 2011년 4.27 화순군수 재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선거를 앞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어떤 사람을 우리 당 후보로 내 세워야 하나? 어떤 사람을 당선시켜야 군민들의 상처를 치유해 주 고, 군민의 자존심과 명예를 회복시켜 줄 수 있을까? 화순출신이 라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출향인사 마음을 달래 줄 수 있을 까? 여러 가지로 고민이 되었다.

165


그래서 후보 선출부터 모든 군민과 당원이 참여하는 여론 조사와 경선 방식을 택했다. 우리 당 후보 경선에 나선 사람은 다섯 사람 이었다. 이 다섯 명의 예비후보를 놓고 1차, 2차 경선을 거쳐 홍이 식 후보를 선출했다. 홍 후보는 내가 보기에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 여기서 평범하다는 것은 재력도 많지 않고, 모난 데가 없으며, 대 중에게 욕먹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홍 후보는 20년 이상 오로지 민주당 당원으로서 한길을 걸어왔 고, 화순군 군의원과 전라남도 도의원으로서 성실하게 살아온 사 람이다. 내가 알기로 홍 후보는 재력이 넉넉지 못해 다른 사람에게 술밥을 살 처지도 못되는 사람이다. 나는 홍 후보를 당선시켜 평범 한 보통사람이라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열심히 살며 지역에 봉사하 면 군수로 당선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 주고 싶었다.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거리유세를 하면서 4.27 선거에서는 반드시 화순군민이 ‘선거혁명’을 이루어 내자고 호소했다. 유권자들을 향해 “혁명동지 여러분! 혁명거사에 동참합 시다!”라고 외쳤다. 그러면서 재선거를 하지 않게 할 사람, 군민에 게 상처를 주지 않을 사람, 군민의 실추된 자존심과 명예를 회복시 켜 주면서 군민화합과 단결을 이룰 사람을 당선시키자고 역설했다.

166


우리 당 홍이식 후보와 맞서 경쟁한 사람은 기반이 있고 나름으 로 막강한 세(勢)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홍 후보가 당선 되었다. 실로 화순에는 오랜만에 지역 국회의원과 군수 그리고 도 의원 및 군의원 다수가 같은 민주통합당 당원들이 선출됨으로써 서로가 한마음이 되어 소통하고 격의 없이 뜻을 하나로 모으는 계 기가 된 것은 화순 발전에 큰 의미가 있다. ���제 지역정치 안정으로 우리 화순이 갖는 잠재력을 하나로 모아 지역 발전의 원동력으로 극대화할 수 있는 계기를 화순군민들이 만들어 주신 점에 감사드린다. 나는 2011년 4월 27일은 화순군민들이 선거혁명을 통해 잃어 버 렸던 자존심과 명예를 되찾은 날이라고 생각한다. 4.27 재선거는 화합하는 화순, 분열과 반목이 없는 화순으로 이끌어 나가 주기를 바라는 군민들의 희망이 가져다 준 의식혁명의 결과였다고 생각한 다. 존경하는 우리 화순 군민 모두에게 화순 발전의 큰 장정에 참 여하여 앞장서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167


내가 바라본 안철수 교수

안철수 교수의 ‘등장’이라고 해야 할까, ‘출현’이라고 해야 할까. 2011년 후반기에 들어서서 안철수 교수는 우리 정치 흐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안철수 교수 본인은 정치 참여에 대한 명확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아주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 후보와의 가상 대결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이렇듯 안철수 교수가 정치 참여에 대 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것 은 정치권의 반성을 촉구하는 국민적 요구일 수도 있다.

168


어쨌든 안철수 교수의 등장은 한국 정치의 변화와 개혁의 촉진제 가 되었다. 정치권도 쇄신과 개혁을 위해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안철수 교수가 어떤 식으로 말하든 내가 봤을 때 그는 현재 대한민국 정치에 깊이 들어와 있다고 생각한다. 설령 현실 정치에 뛰어들지 않는다고 해도 안철수 교수의 존재는 우리의 정치 변화 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안철수 교수는 신당 창당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19대 총선에 출마할 생각도 없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렇지만 정치를 하 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안철수 교수는 대선 불 출마를 선언하지는 않았다. 이 점을 언제든 정치에 나설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안철수 교수가 대선에 나설 것이라고 본다. 많은 국민들은 안철수 교수가 대선에 출마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면 당당하게 나서서 국민적인 검증을 받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생각한다. 대선을 생각한다는 것은 국가와 국민을 생각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당당하게 평가받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학교 울타리 안에 서 국민의 지지도만 쳐다보는 것은 정치의 정도(正道)는 아니다.

169


나는 안철수 교수가 총선에 참여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시기적 으로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민주당 중심의 혁신통 합정당이 출범하여 총선을 치른다고 해도 당분간은 합류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2012년 상반기가 지나서야 행보를 시작하게 될 것 이라는 것이 나의 예측이다. 행보를 시작함에 있어서도 단서가 따를 것이다. 예컨대 우리 민 주당 중심의 혁신통합정당이 다수당이 되고, 이 혁신통합정당이 제대로 기반을 다졌을 때 대선 행보를 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도 저도 아니고, 여전히 기성 정치권의 변화가 미진할 때 안철수 교수는 신당 창당 등 독자적인 정치 행보를 할 수도 있 다. 더 나아가서 정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 장고(長 考)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앞으로 안철수 교수가 어떤 행보를 하든 우리의 정치 변화에 많 은 기여를 해 주기를 바라고, 또 그럴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신당 창당 형태는 지양(止揚)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신당 창당은 자칫 진보개혁세력의 분열을 가져올 수도 있다. 창당 대신 안철수 교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많이 길러내 는 ‘국민운동’, 또는 ‘안철수 운동’도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안

170


철수 교수와 같은 사람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토양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정치적으로 ‘국민적 기반’을 형성하고,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지도자로서의 검증도 받게 될 것이다. 여기 서 ‘국민적 기반’이 신당 창당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안철수 운동’ 이 정당과 ‘결합’ 또는 ‘병존(竝存)’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것이 다.

나는 안철수 교수의 등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안철수 교수가 기성정치를 타도하기 위해 등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안철 수 교수의 등장은 대한민국 정치 변화의 촉진제가 될 것이라고 본 다.

171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

지도자는 시대가 만들어 낸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지도자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어 야 하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해방 이 후 이명박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에 어울리는 지도자가 탄 생했었다. 탄생이라고 말하면 좀 어폐가 있어 보이기는 하다. 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사람을 ‘탄생’이라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등 장’이나 ‘출현’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도 같다.

172


해방 이후 이승만 대통령, 장면 총리,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 국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는 ‘자유’보다 ‘빵’이 우선시된 때였다. 다 소의 억압을 받더라도 배부르게 먹는 것이 우선이었다. 보릿고개 를 넘기기 힘들 정도로 가난했던 그 시대는 빈곤탈출이 급선무였 다. 그래서 오늘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상반되고 있는 것인 지도 모른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적으로는 독재를 했지만, 경제 적으로는 성장과 근대화 촉진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박정 희 대통령이 18년 동안 독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자유보다는 빵 을 우선시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우선 빵이 급했으므로 어느 정 도 독재가 용인되었고, 단순한 민중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최고의 지도자라고 찬양도 했다.

그 후 5공, 6공을 지나던 시대는 독재와 반독재, 민주와 비민주 가 투쟁하던 시대였으므로 국민들은 DJ와 YS라는 지도자를 요구 했다. 그리고 DJ와 YS의 정부를 지나면서 민주주의가 정착되자, 국민들은 정치의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탈정치, 탈권위주의를 요구하는 국민적 요망은 노무현 대통령 선택으로 이어진다.

173


소수자, 비주류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의도는 정치 개혁, 기존 제도와 권력의 타파, 기존 질서의 파괴 등이었다. DJ와 YS가 추구했던 민주주의와도 차별이 있었다. 굳이 명명을 하자면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주의는 ‘반권력 민주주의’, ‘민중의 권 력이 정치 핵심에 들어가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노 무현 대통령은 국민에게 실망을 주었고, 민주당에서 분당하여 창 당한 열린우리당은 지리멸렬하고 말았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탄생했다. 이명박 대통 령도 시대의 요구에 의해서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민들은 ‘정치권력’에 염증을 느끼고 ‘시장권력(市場權力)’을 요구했다. 다 시 말해서 경제를 살리는 대통령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덕 적 결함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살려라’는 요구에서 CEO 출신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했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의 신봉자인 이명박 대통령은 성장, 분배, 고용이 조화를 이루는 경제정책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2012년은 대선이 치러지는 해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는 어떤 지 도자를 요구하고 있을까. 내 나름으로 정리를 해 보았다.

174


첫째, 국민통합의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그 야말로 갈기갈기 분열이 되어 있다. 남북, 지역, 세대, 빈부, 노사 (勞使), 양극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대립하며 갈등을 빚고 있다.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을 이루어 낼 사람을 이 시대는 요구 하고 있다. 둘째, 사심(私心)이 없고, 국가와 국민에게 진심으로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심이 있고, 거짓으로 봉사하는 지도자는 국민들 로부터 신뢰를 잃게 된다. 설령 국가 안보를 튼튼히 하고, 경제를 살렸다 해도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린 지도자는 전부를 잃어 버린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공자’가 ‘자공’에게 치국(治國)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 냐고 물었을 때 ‘족병(足兵)’ ‘족식(足食)’ ‘민신(民信)’이라고 답했 다. 그러자 공자가 이 중에서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족병’이라고 답했다. 또 다시 한 가지 버릴 것은 무엇이 냐고 묻자 ‘족식’이라고 답했다. 자공은 국가의 지도자가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될 것은 ‘민신’이라고 했다. 셋째, 균형있는 경제를 살리려는 사람이다. 경제성장은 반드시 필요하다. 성장하되 분배, 고용, 복지가 조화를 이루는 성장이어야 한다. 대기업과 부자보다 중산층과 서민 그리고 농어민 등 사회적

175


약자에게 특별한 배려를 할 줄 아는 마인드가 필요하다. 동반성장 과 패자부활전(敗者復活戰)를 인정하는 것은 경제의 민주화요, 새 로운 패러다임이다. 이 시대는 이명박 정부처럼 경쟁과 효율에만 치우쳐서도 안 되고, 성장보다 분배, 고용, 복지를 우선시해서도 안 된다. 사실 경제 성장과 함께 분배, 고용, 복지도 동반 성장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경제는 조화로운 경제가 되어야 하고, 이런 경제철학을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 사람을 잘 골라 쓰는 사람이다. 국가의 지도자(대통령)는 사람을 잘 골라 쓰는 용인(用人)의 자리이다. 대통령은 직접 나서 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골라 적재적소에 부리는(用 人)’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료를 임명할 때도 ‘자기 사람’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분야에 탁월한 역량을 가진 사람, 국민이 바라는 사람을 써야 한다. 대통령이 각료를 임명하는 것은 국민의 위임을 받아 대신 행사하는 절차이다. 대통령은 사람을 쓸 때 보 수, 진보, 중도 등 이념을 초월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가장 잘못 한 일은 바로 용인이다. 다섯째, 소신과 철학을 가진 사람이다. 국가의 지도자는 역사의 식이 있어야 한다. 역사의식과 후대의 평가를 두려워 할 줄 알면서 소신을 가져야 국정철학도 정립이 될 수 있다.

176


역사학자 E. H 카(Edward Hallett Carr)는 그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은 오 늘을 알고,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역사의식이 없는 지 도자는 국가의 장래를 예견할 수 없다. 역사의식이 없는 지도자를 갖는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통합의 리더십, 국가와 국민에 대한 헌신, 경제발전, 용인, 이 모 든 것들이 소신과 철학이 없다면 실패가 된다.

2012년 대선을 앞둔 현재, 우리 사회에는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기류가 팽배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전형적인 정치인에 대해 염증 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은 기성 정치인들이 실생활과는 동 떨어져 자기들만의 권력투쟁을 하고 있고, 자기들만의 당리당략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들이 제도권 정치를 무시하고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여망을 제도권 정치에서 수 렴하기를 바라야 한다. 실천 없는 시민세력이나 실천 없는 지도자 가 국가를 경영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안철수 교수와 관련하여서도 말했지만 이 시대의 지도자가 되겠 다고 하는 사람들은 제도권 안에서 서로 경쟁해야 한다. 그것이 국

177


가와 국민을 위해 상생하고 발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에 대해 나름으로 정리를 해 보았다.

178


시련은 있어도 좌절은 없다

나에게 있어, 2010년 봄은 시련의 계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사필 귀정(事必歸正)’의 의지로 그 시련을 이겨냈다. 잘못이 없었기 때 문에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버텼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밝히기에 앞서 양해를 구하고자 하는 점이 있다. 실명을 거명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사건의 실체를 명명 백백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울러 인물에 대한 존칭을 생략하게 된 점도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179


사건의 실체적 진실 2010년 3월 25일,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담당검사 강남석)은 내가 2006년 지방선거 당시 전라남도 의회 비례대표를 공천하는 과정에서 정치자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기소를 했다. 내가 민주당 전남도당 위원장을 맡고 있던 2006년 지방 선거에 서 박부덕에게 특별당비를 종용하고 수수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 실무근이다. 그리고 이 문제가 사건화 될 때까지, 나는 박부덕이 중앙당에 3억 원의 당비를 납부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2006년 당시 민주당 전남도의원 비례대표 공천은 중앙당 대표단 회의에서 전권을 행사했으며, 전남도당 위원장은 도당 공특위가 한 도의원 비례대표 후보자에 대한 심사결과를 중앙당에 보고하는 권한밖에 없었다. 공특위의 심사에 관여할 수가 없었다. 법원심문 과정을 통해서도 내가 공천과정에서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 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중앙당의 결정에 따라 공천이 확정된 후 박부덕은 자의(自意)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민주당 중앙당의 공식 계좌에 당비 를 납부했다고 한다. 재삼 말하지만 이에 대한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180


억울한 누명 검찰은 증인의 진술 하나에만 의존하여 내가 공모한 사실이 없음 에도 불구하고 한화갑과 공범으로 기소를 했다. 기소를 당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손기정(전 민주당 전남도당 상임부위원 장)과 신중식(17대 국회의원)의 잘못된 진술이었다. 2006년 지방선거 당시 민주당 전남도당 상임부위원장을 맡고 있 던 손기정은 나주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전남도지사로 있을 때 전남도청 공무원으로 각별히 나를 보필하기도 했다. 또 신중식 은 경기고와 서울대 직계 선배로 평소 호형호제하며 지냈던 각별 한 사이였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는 증언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검찰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민주당 전남도당의 손기정 부위원장 이 공천확정 후 박부덕에게 “최인기 의원이 특별당비를 권유해 보 라고 전화를 했다”라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객관적 증거가 없는 진술 하나에 의존하여 나에게 정치자금법 위반죄를 적용했다. 단순 권유를 했더라도 정치자금법상 처벌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 고 검찰은 무리수를 둔 것이���. 또한 내가 당시 한화갑 대표와 공 모한 사실이나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없어 무죄가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한화갑과 공모하여 내가 보지도 못한 3억 원을 부정하

181


게 받은 공범으로 몰아 억지로 무리하게 기소를 했다. 당시 일부 언론에, 민주당 중앙당의 비선조직(대표-사무총장)인 특별당비 모금반이 지역을 돌며 특별당비 납부를 권유하고 있다 는 사실이 보도된 바 있다. 순천지청은 이런 사실을 인지하고도 이 에 대한 수사는 하지 않고 손기정의 진술에만 의존한 것이다. 검찰이 기소를 하던 날 나는 ‘검찰 기소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제목으로 성명(聲明)을 발표하기도 했다. 성명은 별도로 소개하겠 다. 결국 2006년 10월 19일, 검찰은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 이것은 나의 심증(心證)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시 두 사람 은 자신의 책임 전가나 개인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 각한다. 평소 주변으로부터 신뢰받지 못하였던 손기정은 나에게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자신의 형사책임을 면하게 되는 이해상반의 상황에 처해 있었을 것이다. 손기정은 오랜 당직생활을 통해 쌓아온 민주 당 중앙당과의 인맥을 통해 독자적으로 박부덕에게 특별당비를 권 유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여러 가지 정황상 책임을 모면하기 어려웠 던 손기정이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검찰의 종용에 따라 허위진술

182


을 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1심 재판부는 손기정의 진술은 믿기 어 려운 허위진술이라고 판시 하였다. 신중식은 18대 총선 공천과정(2008년 2월)에서 탈락하자 공천심 사위원이었던 내가 지역구가 겹치는 박상천 전 민주당 대표를 지 원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신중식은 검찰 진술과정에 서 나에게 불리한 허위진술을 한 것은, 나는 남자로서 그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서운한 감정 때 문이 아니었나 싶다. 1심 재판부는 신중식의 진술도 믿기 어려운 허위진술이라고 결론지었다.

순천지원 무죄 선고는 사필귀정(事必歸正) 2010년 11월 19일 오후,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지원장 정경 현)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나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내 가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당비 납부를 권유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김성수 부장판사는 판결에서 “최인기 의원이 2006년 민주당 전 남도 비례대표 공천과 관련하여, 당비 납부를 권유하거나 공천과 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이 없고, 당비 납부 사실도 모른 점, 특별당비 수수자가 민주당 중앙당인 점”을 이유로 나의 무죄를 선

183


고했다. 판결문의 요지는 별도로 소개하겠다. 이날 법원의 판결은 이명박 정부 들어 자행되고 있는 정치검찰의 공권력 남용을 통한 연이은 야당 정치인 탄압이 사법부에 의해 제 동이 걸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한명숙 전 총리에 이어 나까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음으로써 정치검찰의 기소가 얼마 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입증하게 것이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에게도 이 정도면, 힘없는 서민에게는 얼 마나 많은 누명을 씌워 범죄인으로 만들었을까. 안하무인, 무소불 위의 검찰 권력은 반드시 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항소심(2심)에서도 무죄, 재판부 ‘이유 없다’ 기각 2011년 12월 1일, 광주고등법원에서 위 사건에 대한 항소심이 열렸는데 재판부는 검찰의 항소가 ‘이유 없다’고 기각을 했다. 다 시 한 번 무죄로 판명된 것이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모 일간지에 보도된 기사를 소개한다. 최인기 의원 무죄, 검찰 항소 ‘이유 없다’ 기각 광주고등법원 “공천에 영향력 행사 않고, 금품수수 사실 없다” 판결 최인기 의원, “사필귀정” 사법정의 실현 의지 존중하고 환영

2006년 지방선거 당시 전남도 비례대표 공천과 관련, 정치자금

184


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민주당 최인기 국회의원(전남 나주 화순)이 1일 오후 광주고등법원(법원장 조용호)에서 열린 항소심 (2심) 재판에서 검찰의 항소가 ‘이유 없다’며 무죄를 선고 받았다. 광주고등법원 형사부 이창한 부장판사는 판결에서 “최인기 국회 의원이 2006년 민주당 전남도 비례대표 공천과 관련하여, 금품을 수수하거나 공천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이 없는 점”을 이 유로 최 의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최인기 국회의원이 1심(원심)에 이어 2심(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선고 받음으로써 이명박 정부 들어 자행되고 있는 정치검찰의 기 소권 남용을 통한 연이은 야당 정치인 탄압에 대한 지탄의 목소리 가 크다. 특히 한명숙 전 총리에 이어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의 명예를 훼손시킨 점에 대한 비판과 함께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검찰 권력 에 대한 제어가 필요하다는 검찰개혁 논의는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날 무죄를 선고 받은 최인기 의원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국민의 신뢰를 받고 있는 법원이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 공정한 판 단을 내림으로써 사법 정의가 살아 있음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사법부의 현명한 판단을 존중하고 환영한다”며 “40여년 넘도록 공

185


직생활을 하면서 단돈 10원도 부정한 돈을 받아본 적이 없다. 특 히 정치하면서 공천과 관련하여서는 차 한 잔도 얻어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자부한다”고 말했 다. 최 의원은 그러면서 “이번 일로 광주 전남 시도민께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스럽다. 특히 변함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신 나주, 화 순 지역주민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앞으로 더욱 겸허한 자세로 주민을 받들고 지역과 나라 발전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함은 물론 신념과 양심에 따라 소신을 가지고 정치를 해 나아가겠다”고 다짐했다.

1, 2심 재판을 마친 소회(所懷) 1, 2심 재판을 마치고 나서 마음에 품게 된 몇 가지 생각이 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과 한 번 배신한 사람은 언제든지 다시 배신하게 된다는 것을 새삼 절감했다.

자신에게 잘못이 없으면 잠시 억울함을 당해도 좌절하지 않고 당 당하고 의연해야 한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으로 참고 견디면서 당당하게 맞서 싸워야 한다. 이렇기 위해서는 정도를 걸

186


어야 한다. 스스로가 당당하지 못하면 싸울 용기도 생기지 않는 법 이다. 어떤 경우라도 옳지 않은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남자의 철칙이다. 지금은 이렇게 말을 하지만 그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심적 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한다. 당당하게 살아왔던 내가 이순(耳順)을 넘긴 나이에 검찰로부터 기소를 당하다니 스스로에 대해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이 일을 당하던 초기에는 마음이 우울해져 사기가 저하되기도 했다. 체력 마저 약해진다면 좌절해 버릴 것 같았다. 이런 고통을 내 특유의 인내와 투지로 버텼다. 체력이 떨어지면 마음도 약해진다. 그래서 체력 단련을 위해 20년간 해왔던 조깅을 강화하여 매일 같이 4km이상을 걷고 달렸다. 정치하다 보면 이런 일을 당할 수도 있 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평정을 찾아갔 는데 그 기간이 몇개월 걸렸다. 이때에도 내옆에서 늘 나를 위로하 고 격려하면서 용기를 복돋아준 아내에게 또다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또한 나에게 가까이서 성의있는 법률적 자문과 조언에 최선을 다해준 큰 사위 조민석 판사(2011년 서울지방법원 행정법 원 근무중)는 성실·정직한 법관이기도 하지만, 장인 재판 전과정에 걸쳐 상담역이었으며, 그때 그때 재판과정의 의문점과 전망, 판단 등을 정리해서 도와주고 최선을 다해 집에서 나를 극진히 보좌해

187


준 사람이다. 내 자서전을 통해 큰 사위에게 고맙다는 기록도 남기 고 싶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언제든지 다시 배신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그동안 나는 스스로를 인간관계에 있어서 주도면밀한 사람 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덕(人德)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 하나 잘못 쓰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 람만 탓할 수는 없다. 그 사람을 쓴 내 잘못도 크다고 반성도 해본 다.

2년여에 걸친 재판으로 심적인 고통도 컸지만, 한편으로는 좋은 동지를 만나 큰 위로가 되었다. 그 동지는 강경운 변호사이다. 서 울법대 후배인 강 변호사는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의 판사로 재직 했는데, 퇴직 후 순천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성실하고 남자다운 기백도 있는데, 강한 집념으로 의뢰인과 자기의 사상을 일치시켜 가면서 설득력 있는 변론을 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따뜻한 인간적 매력이 있는 사람이다. 강 변호사를 선임한 것은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 잘못 이 없기 때문에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심리적 부담이 클 때,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준 후배였고 강 변호사를 선임했기 때문에 확실하

188


게 승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인간적으로 더 욱 친밀해졌고, 앞으로 강 변호사에 법률자문도 많이 구할 생각이 다. 이 지면을 통해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189


성명(聲明)-검찰 기소에 대한 입장

2006년 5월 31일 지방선거 당시 전남도의원 비례대표 공천과 관련, 박모 씨가 민주당 중앙당 에 특별당비 3억 원을 납부한 사실과 관련하여 2010년 3월 25일 검찰이 당시 민주당 전남도당 위원장이었던 최인기 의원을 정치자 금법 위반으로 기소한 사건에 대하여 나의 입장을 밝힌다.

현행 정당법과 정치자금법상 정당은 당원으로부터 당비를 받을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2006년 5월 31일 지방선거

190


당시 특별당비 납부는 박모 씨가 민주당 비례대표 확정 후에 당의 재정사정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자진하여 민주당 중앙당 공식계좌 에 3억 원을 납부한 것이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다.

당시 비례대표 공천권한은 민주당 중앙당의 전권사항이었으며, 최인기 의원은 특별당비를 권유한 사실도 없고, 3억 원의 특별당 비가 납부된 사실조차 최근까지 알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검찰은 당시 민주당 전남도당의 손모 부위원장이 “최인기 의원 이 특별당비를 권유해 보라고 전화를 하였다”는 확인되지도 않고 근거도 없는 진술 하나에 의존하여 정치자금법 위반죄를 적용하는 것은 정치검찰의 횡포이자 공권력 남용이다.

특히 4년 전에 발생한 사건으로써 특별당비 3억 원이 민주당 중 앙당 공식계좌에 입금되었고, 최인기 의원이 당비 납부를 권유한 사실이 없다는 점을 잘 아는 검찰이 2010. 6.2지방선거를 앞두고 무리하게 야당의 중진의원을 기소한 것은 명백한 야당탄압이다.

최인기 의원은 국민의 신뢰를 상실한 검찰에서 보다는, 국민이 믿을 수 있는 법원의 법정에서 검찰의 부당한 기소에 대하여 당당

191


하게 맞서 나감으로써 진실을 밝히고 무죄를 반드시 입증하여 명 예를 회복할 것이다.

최인기 의원은 이번 일로 인해 그동안 성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과 특히 나주, 화순 지역구 주민들에게 심려를 끼쳐 드린 점에 대하여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2010년 3월 25일 국회의원 최인기

192


‘1심 선고문’ 발췌

피 고인 최인기에 대한 이 부분 공 소사실은 위 피고인이 피고인 한화갑과 공모하여 피고인 박부덕을 전라남도의회 비례대표 1순위로 추천하는데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이와 관련하여 손기정을 통해 피고인 박부덕으로 하여 금 특별당비 3억 원을 제공하게 하여 이를 기부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피고인 최인기가 피고인 박부덕의 공천이나 특별당비 납부와 관련하여 공소사실 기재와 같이 피고인 한화갑과 공모하였음을 인정할 증거가 없으므로, 아래에서는 피고

193


인 최인기가 자신의 행위로써 박부덕으로부터 정치자금을 기부 받았다고는 볼 수 있는 지에 관하여 본다. 이 부분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듯한 증거로는 증인 손기정, 신중 식의 각 법정진술, 피고인 최인기의 검찰에서의 일부 진술, 보도자 료가 있는 바, 손기정은 법정에서 최인기가 공천 전 “박부덕이 특 별당비를 낼 수 있을까”라고 물어 “학교도 두 개나 운영하고 있고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당비를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한 적이 있고, 비례대표 인준 다음 날 피고인 최인기가 전화하여 “박부덕이 광역의원 비례대표 1번으로 확정되었고, 당 재정이 어려우니 3억 원 정도의 특별당비를 중앙당 계좌로 납부하도록 권유하면 좋겠 다”는 취지로 말하였으며, 피고인 박부덕이 특별당비를 납부하겠 다고 하자 그 사실을 피고인 최인기에 보고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또한 신중식은 이 법정에서 피고인 최인기가 중앙당 공특위에서 전라남도 광역의원 비례대표를 선정과 관련하여 “박부덕의 경우 유명 사립대학교 이사장으로 재력이 풍부하고, 전남 여성계에도 알려진 인물이며, 당이 어려운데 특별당비를 낼 수 있다”라는 취지 의 설명을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먼저 신중식의 진술과 관련하여 2006년경 중앙당 조직국 차장으로서 공특위 회의 지원 업무를 담당하여 중앙당 공특위에

194


모두 배석하였던 조강열은 피고인 최인기가 중앙당 공특위에서 피 고인 박부덕의 특별당비 납부에 관하여 말한 것을 듣지 못하였다 고 진술하고 있고, 피고인 한화갑, 유덕열 역시 중앙당 공특위에서 는 비례대표 후보자에 관하여 심사한 사실이 없고, 비례대표 후보 자에 대한 심사나 인준은 대표단회의에서 이루어졌으며, 당시 피 고인 최인기가 위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고 진술한 점에 비추어 신중식의 위 진술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할 것이다. 또한 손기정의 진술과 관련하여 피고인 박부덕은 손기정이 비례 대표로 인준 전후에 걸쳐 특별당비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피 고인 최인기에 관한 언급을 한 적은 없고, 오히려 “중앙당에서 박 부덕 씨가 3억 원을 냈으면 좋겠다고 한다”, “중앙당에서 전화가 왔는데 당비를 내지 않은 사람은 빨리 내라고 한다”라고 말하였다 고 진술하고 있는 바, 위와 같은 피고인 박부덕의 진술은 수사 방 향이나 대상이 확정되지 않은 초기 단계에서부터 일관되어 신빙성 이 높고, 여기에 피고인 최인기의 직���(도당위원장으로서 중앙당 에서 맡은 직책은 없다)에 비추어 손기정이 언급한 ‘중앙당’이 피 고인 최인기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점 등을 종합하 여 보면, 피고인 최인기에게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자신의 형사책 임을 면하게 되는 이해상반의 관계가 있는 손기정의 위 진술을 그

195


대로 믿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또한, 피고인 최인기의 검찰에서의 진술 내용 중 피고인 최인기 가 손기정에게 전화하여 피고인 박부덕에게 특별당비를 권유한 사 실이 있다는 부분은 위 검찰조사 당시 피고인 최인기가 당시의 상 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덧붙인 바 있고, 위 보도자료 역시 이를 초과하는 증명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어서 위 검찰에서의 진 술이나 보도자료만으로는 피고인 최인기가 공소사실 기재와 같은 말을 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 나아가 설령 피고인 최인기가 신중식이나 손기정에게 피고인 박 부덕의 특별당비 납부에 관하여 어떠한 언급을 한 사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피고인 박부덕이 납부한 특별당비 3억 원이 중앙당 계좌 로 입금되어 서울 시장 후보의 선거비용으로 사용된 점 등을 고려 하면, 위와 같은 정도의 행위만으로 피고인 최인기가 추천과 관련 하여 위 3억 원을 취득하였거나 민주당과 사이에 위 3억 원을 피 고인 최인기가 취득한 것과 같이 평가할 수 있는 관계에 있다고 보 기도 어렵다. 결국 피고인 최인기가 이 부분 정치자금의 수령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

196


8년 연속 우수 국회의원에 선정된 보람

나는 천성적으로 일을 즐기는 사람이다. 앞에서도 누차에 걸쳐 말했지만 나는 일을 해야 살맛이 나는 사람 이다. 국회의원은 큰 틀에서 국사(國事)를 논하는 자리이지만, 지역구 의 발전에도 혼신의 힘을 다 해야 한다. 지역민들이 나를 국회의원 으로 뽑아줄 때는 나라살림도 잘 하면서 지역구에도 많은 도움이 되는 의정활동을 하라고 해서 그런 것이다. 특히, 지역구가 시골이 나 소도시인 국회의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신경을 쓰게 될

197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지역구 자치단체가 많은 일(사업)을 추진할 수 있 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일을 하려면 돈(예산)이 필요하 다. 그런데 지자체 공무원들이 중앙부처에서 예산을 확보하는 데 는 한계가 있다. 이때 지역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앞장을 서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나는 나름으로 의정활동을 잘 했다고 자부한다. 다시 말해서 다른 국회의원과 비교해서 지역구를 위해 뒤지지 않 을 만큼 예산을 끌어왔다는 것이다. 나는 나름으로 지역구를 위한 예산을 확보하는 노하우가 있다고 자부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다선(多選) 의원이라고 해서 예산을 많 이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중앙정부의 어디에 예산이 있는가를 알 아야 한다. 어느 부서에 사업이 있는가도 알아야 한다. 어느 시기 에 예산을 집행하는가도 알아야 한다. 누구에게 이야기해 되는가 도 알아야 한다. 장관에게 부탁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실 무 핵심 간부를 설득해야지 장관부터 찾아가면 될 일도 그르칠 수 가 있다. 이런 것은 정부에서 일했던 사람이라야 그 시스템을 잘 알 수 있다. 길을 알아야 하고, 요령이 있어야 한다. 나는 중앙부처에서 많이 일했기 때문에 그 방면에 대해서는 내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 정부

198


에서 오랜 동안 일했다는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오랜 세월 쌓아온 두터운 인맥(人脈)이 의정활동에 많은 보탬 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 2004년 국회의원 당선 이후 나주에는 영 산강 살리기, 공동혁신도시 건설, 영산강고대문화권 사업 등 8조 원의 국책사업들을 착수토록 하여 진행 중이며, 화순에서도 백신 산업특구로 지정되고 제2너릿재 터널 착공 등 1조 원 가까운 사업 이 착수되었고, 광주도시철도 화순 연장 건설의 필요성 문제를 재 기하는 등 큰 사업들이 진행 중이다.

국회 안에서도 나는 국가와 지역구의 발전을 위해 정말 많은 일 을 열심히 하였다고 주변에서 평가하고 부러워한다. 내가 의정활 동을 통해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곧, 나를 성원해주신 나주와 화 순 지역민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은 299명이다. 이 많은 국회의원 가운데서 나 는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연속으로 8년 동안 국정감사 우수의 원으로 선정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영예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화순군민과 나주시민의 자존심을 살려 준 일이라고 생각한다. 국정감사 우수의원은 270개 시민단체가 연대하여 구성한 NGO 모니터단에 의해서 선정된다. 이렇듯 모니터단의 엄정한 잣대에

199


의해서 선정이 되기 때문에 모든 국회의원들이 희망하는 사항이기 도 하다. 내가 정부 관계자, 동료의원, 언론, 시민단체 모니터 요원 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은 국정감사 때 폭로와 질타보다 는 불필요하거나 낡은 관행이 되어 버린 제도의 개선과 정부정책 시행상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8년 연속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선정과 관련한 기사(남도일보, 2011년 11월 17일자)를 소개한다. 최인기 의원, 8년 연속 국감 우수의원 국정감사 NGO모니터단 “경륜과 리더십 높이 평가”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장인 최인기(나주·화순) 의원이 현역 국회 의원으로는 유일하게 8년 연속(2004~2011년) 국정감사 우수의원 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와 함께 민주당 박주선(광주 동 구) 최고위원, 김효석(담곡·곡성·구례), 주승용(여수을), 이용섭(광 주 광산구을), 조영택(광주 서구갑), 김재균(광주 북구을) 의원 등 도 국감 우수의원에 선정됐다. 최인기 의원은 16일 270여 시민사회단체가 연대 구성한 국정감 사 NGO모니터단으로부터 탁월한 경륜과 리더십으로 국회농림수 산식품위원회를 원만하게 운영한 점, 위원장임에도 불구하고 제도 개선 및 정책대안 제시 등 전문성을 발휘한 점에 높은 점수를 인정

200


받아 ‘2011년도 국정감사 우수위원장’에 선정됐다. NGO모니터단은 “농림수산부 및 행자부 장관 출신인 최인기 의 원이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잘못된 법령이나 제 도의 개선을 위해 노력한 점 및 실현가능한 합리적인 정책대안을 제시하고 여야 정쟁 없이 정책 국감을 모범적으로 수행한 점을 높 이 평가했다”고 밝혔다. 최 의원은 “충실한 의정활동을 통하여 낙후된 지역의 발전을 앞 당기고, 농민과 서민, 중산층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겠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한편, 최 의원은 오는 21일 오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270여개 시민단체의 연대기구인 국정감사 NGO모니터단으로부터 ‘2011년 국회 국정감사 우수위원장’ 상패를 수여받을 예정이다.

201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 나주 유치 전말(顚末)

17대 국회에 등원한 나는 국회 건설 교통위원회를 자원했다. 지역구에 조금이라도 더 예산을 끌어오기 위해서였다.

나는 ‘광주전남 공동혁신도시 나주 유치’를 위해 건교부의 입지 선정 기준과 지침을 작성하는 일에서부터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먼저 그린벨트 지역에는 혁신도시가 들어설 수 없는 기준을 만들 었는데 그것은 장성이나 담양 등 광주 인근 지자체들을 조기에 배

202


제시키려는 의도였다. 또, 호남고속도로, KTX 등 교통편의성과 공항이 가까우며 종합 대학교와 명문고등학교가 있고, 광주시와 최소한 32km 이내로 일 전한 거리가 있을 것, 그리고 식용수가 풍부한 300만평 이상의 평 야를 확보할 수 있는 곳이라는 기준을 세우도록 관여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입지 선정 투표에서 나주가 선정될 수밖에 없는 일종의 ‘맞춤형 기준’을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민주당 소속인 박광태 광주시장, 박준영 전라남도지사를 여 러 차례 만나 광주와 전남이 상생 발전하기 위해서는 광주전남공 동혁신도시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이를 바탕으로 건 교부에서 제시한 입지 선정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나주 금천면 일대 가 객관적으로 최적지임을 내새워 주장하며 설득하였고, 결국 합 의를 얻어냈다.

한국전력 등 이전 대상 기관을 직접 찾아가 사장, 임원, 노조 관 계자 등을 만나 나주의 장점을 설명하면서 나주야말로 광주전남공 동혁신도시 최적지임을 역설했다. 이전 대상 기관들은 나의 주장 에 동의하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런 행보가 좋은 평점을 얻는 데 많은 보탬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203


공동혁신도시 입지 선정위원회를 총괄하고 있는 전남발전연구원 관계자, 대학 총장 시절 끈끈한 교분을 쌓았던 교수 출신 선정위원 들도 접촉했다. 그런 노력이 입지 선정 투표에서 좋은 결과를 가져 왔다고 생각한다. 마침내 2007년 9월에 ‘혁신도시 원주민 생계대책 지원’을 골자로 한 ‘공공기관 지방 이전에 따른 혁신도시 건설 및 지원에 관한 특 별법 일부 개정법률’이 발의되었다. 이 법률은 내가 대표 발의를 했다. 9월 정기국회에서 통과되어 2007년 10월 17일 공포되었다.

이렇게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 건설 사 업이 그동안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혁신도시 건설 사업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혁신도시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 여야 국회의원 12명 과 함께 ‘혁신도시건설촉진국회의원모임’을 결성하고 대표에 선임 되었다. 우리는 2개월마다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관련 부처 장관 을 불러 점검하고 독려했다. 특히, 논란을 빚고 있는 혁신도시 재 검토설과 관련하여 당시 정종환 국토해양부장관을 불러 강하게 질 타하고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는 답변을 얻어 내기도 했다. 정종환 국토해양부장관으로 부터 “국민 동의하에 특별법을 제정해 추진하

204


는 혁신도시 건설을 백지화, 축소, 변경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정부는 의지를 갖고 지역 경쟁력 강화 및 낙후 지역 균형발전 차 원에서 발전적 보완방안을 마련하여 차질없이 추진하겠다”는 답변 을 받아 내 혁신도시 추진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세종시 문제가 불거지면서 광주전남혁신도시로 이전하겠 다던 기관들의 입장이 모호해졌다. 2009년 현 시점에서 봤을 때, 혁신도시로 이전하기로 승인을 받은 88개 기관과 관련하여 예산도 확보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조속히 이전할 것과 정부가 주도해 기관 통폐합을 마무리 짓고, 2009년 말 이전 에 대책을 강구하라고 촉구했다. 이를 통해 일차로 한국전력으로 부터 2009년 7월 중에 국내외를 통해 청사 설계를 공모하고, 10월 안에 부지 계약을 완료하겠다는 답변을 얻어 냈다. 이렇듯 일정부분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정부의 태도를 보면 혁신도시 추진에 의지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완전히 해소 되지는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도 2009년 11월 4일, 11월 27일, 12월 2일 등 세 차례에 걸쳐 혁신도시의 차질 없는 추진을 약속했 지만 정부는 도시별, 기관별로 구체적인 로드맵도 제시하지 않고 있었다. 결국 2009년 12월 2일, 혁신도시건설촉진국회의원모임은

205


성명(聲明)을 발표하게 되었다. 성명 내용은 다소 장황하지만 역사 적인 기록이 될 터이므로 소개하고자 한다. 성 명 - 전국 10개 혁신도시 건설은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당초 계획대로 차질 없이 추진되어야 한다 정부는 최근 세종시를 수정 추진하면서 과학비즈니스벨트안을 제시하고 기업, 대학, 의료기관, 연구소 등에 분양가 대폭인하 등 ‘파격적인 인센티브’ 제공을 제시하면서 무차별적인 유치 전략을 전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국 10개 혁신도시 등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추진되는 대형 국책사업 시행지역은 상대적으로 피해를 입게 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한 축으로 추진되고 있는 기존의 전국 10개 혁신도시 및 기업도시 6곳, 첨단의료복합단지 2개, 6곳의 경 제자유구역에 기업유치가 추진되고 있으며, 특히 당초 혁신도시의 건설은 공공기업을 전국적으로 법률에 따라 분산시킴으로써 공기 업과 연관된 기업과 연구소, 대학과 관련 산업이 상호 공동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지역별 거점도시를 육성할 목적 하에 시작된 사업임 은 주지의 사실이다.

206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세종시 유치 대학, 연구소, 투자기업 등에만 토지의 저가분양을 통한 지가인하 유도, 원형지개발(조성 계획이 수립되지 않은 토지를 민간에게 분양해 자유롭게 개발하게 하는 방식), 각종 국세와 지방세 감면 혜택과 규제완화 등을 남발 해 이미 혁신도시에 유치 또는 추진 예정이었던 투자유치 기업과 기관, 대학, 의료기관, 연구소 등에 세종시로만 빨려 들어가는 우 려스러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원형지개발은 세종시의 난개발을 부추기고 사기업에 막대 한 시세차익을 안겨 줄 수 있는 등의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를 외면하고 추진하는 것은 앞서 나열한 전국 24개 공영 개발 방식의 지방계획도시들을 껍데기로 만들겠다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우리는 정부의 이 같은 부당한 역차별이 수도권과 비수도권을 대 결구도로 몰아가고 있음은 물론 국가균형발전에도 명백히 저해함 을 규탄하고, 2,500만 지방민들과 함께 절망을 넘어 분노하고 있 음을 분명히 밝혀둔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1월 4일 “혁신도시는 세종시 문제와는 별

207


개로 차질 없이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라며 혁신도시의 차질 없는 추진을 명확히 밝혔고, 11월 27일 국민과의 대화 시간을 통하여 “세종시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갈 게 이곳으로 간다는 이런 일은 정 부는 하지 않는다. 혁신도시는 당초 계획대로 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지방에 이전할 예정기관들은 이전업무는 손을 놓은 채 정부의 ‘세종시 수정’ 추진 추이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실정이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국회혁신도시건설촉진국회의원모임’은 이미 전국 10개 혁 신도시별로 상당한 공정율을 보이고 있는 혁신도시 건설사업이 자 족기능을 갖춘 지역거점도시로 차질 없이 추진될 수 있도록 정부 에 다음과 촉구하는 바이다. 아울러 혁신도시가 지역경제 활성화와 새로운 일자리 창출에 기 여할 수 있도록 이전기관들의 조속한 부지매입 및 청사설계를 촉 구하고, 정부가 앞장서서 수도권과밀화 해소 및 국가균형발전 차 원에서 혁신도시의 차질 없는 추진을 반드시 이행할 것을 거듭 촉 구한다.

Ⅰ. 이전승인이 완료되어 부지매입비를 기(旣) 확보한 이전기관 들은 연내 부지매입을 즉각 완료할 것을 촉구한다.

208


-혁신도시 추진의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가장 근원적인 대책은 한국전력, 한국도로공사, 가스공사, 한국농어촌공사 등 지방이전 선도 공공기관들이 연내 부지매입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즉각적 이면서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정부의 조속한 이행을 강력 히 촉구한다.

Ⅰ.대통령 주재 지방 이전 공공기관장 회의를 개최하여 정부의지 에 대한 신뢰성을 보여줄 것을 촉구한다. -전국 10개 혁신도시의 건설현장은 빠르게 공사가 진척됨에도 불구하고, 이전 예정기관의 이전업무는 추진되지 않거나 더딘 속 도로 인해 추진동력이 상실된 지 오래이다. 특히 정부의 ‘세종시 수정’ 건설이 구체화된 이후, 지방에서는 혁신도시를 축소, 변경시 키려 한다는 우려가 급속도로 확산되어 정부정책에 불신을 야기하 는 심각한 상황에 와 있다. -청와대는 국가정책 및 정부의지의 신뢰확보를 위해 대통령 주 재 지방 이전 공공기관장 회의를 개최하여 혁신도시의 추동력을 확보해 줄 것을 촉구한다.

209


Ⅰ.정부는 ‘수정 세종시’에 지역균형발전의 형평성에 어긋나는 무분별한 인센티브를 즉각 철회하거나, 아니면 혁신도시에도 세종 시와 동일한 인센티브를 부여할 것을 촉구한다. -정부의 형평성에 어긋나는 ‘세종시 수정’ 정책이 기업 및 공공 기관 유치의 블랙홀 기능을 하고 있어 수도권과 비수도권, 세종시 와 여타 계획도시간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정부는 수도권 과밀화와 국토균형발전의 본질을 외면하 는 ‘수정 세종시 입주 기업 및 기관, 대학, 연구소 등에 대한 특혜 부여’ 방안을 즉각 철회하거나, 아니면 전국 곳곳에 건설되는 혁신 도시가 광역경제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세종시와 동 일한 인센티브를 부여할 것을 촉구한다. 2009년 12월 2일 국회혁신도시건설촉진국회의원모임 이렇듯 여러 차례 고비를 넘어서 마침내 혁신도시 건설은 제 궤 도를 찾게 되었다. 2010년 11월에는 혁신도시로 이전하는 공공기관의 청사 신축사 업에 지역업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지역업체 의무공동도급제’ 적 용을 장관고시로 개정해 줄 것을 축구하여 관철되었다. 이로써

210


40% 이상의 지역건설업체 참여가 보장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보탬이 되리라고 본다. 아울러 혁신도시 안 에 이전해오는 기관이 특목고 설립을 가능하도록 한 장치도 마련 하였다.

혁신도시가 완공되는 2012년이면 나주 인구는 현재 9만5천 명 에서 15만 명으로 증가하게 되어 미래지향 자족형 독립신도시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지방세 역시 2005년 기준 435억 원이었는 데 800억 원으로 증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혁신도시에는 공공기관뿐만 아니라 대학, 연구소, 한전고등학교 를 비롯한 명문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들어설 것이며, 친환경 녹색 에너지도시로서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전남의 중심도시로 발돋움 하게 된다. 이제 나주는 빛과 물이 하나 되는 상생의 생명도시, 전 남발전을 선도하는 최고의 명품도시가 된다. 특히 혁신도시 안에 들어설 한국전력 31층짜리 사옥은 대전 이남에서 가장 높은 건물 로서, 지역균형발전의 상징이 될 것이다.

이 밖에도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 나주 유치에 대해서는 할 이야 기가 참으로 많다. 몇 날 며칠 낮밤을 샐 정도로 많지만 그간의 추

211


진 상황과 앞으로 추진해 나갈 상황들을 일지(日誌) 형식으로 간 략히 요약하면서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 나주 유치 전말(顚末)’에 대한 이야기는 마무리하겠다.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 일지 2006년 11월 23일 혁신도시 건설을 위한 택지개발예정지구 지정 (221만평) 2007년 1월 11일

‘혁신도시 건설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공포

2007년 3월 19일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 개발예정지구 및 사업시행자 지정

2007년 5월 31일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 개발 계획 승인

2007년 9월 20일

최인기 의원 대표 발의한 ‘혁신도시 건설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안)의 국회 통과로 이주민 재정착에 필요한 지원 대책 근거 확립

2007년 10월

혁신도시 실시 계획 승인

2007년 11월 8일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 기공식

2009년 7월

농수산물유통공사 전국 혁신도시 최초로 부지 계약

212


2009년 12월

한국전력 부지 계약

2010년 5월 24일

공공기관 지방이전 최종 승인

2010년 11월

지역건설업체 40% 이상 의무 참여 규정한 ‘지역건설 업체 의무공동도급제’ 장관고시 개정

2011년 4월 25일

우정사업정보센터 신사옥 착공

2011년 11월 2일

한국전력 신사옥 착공(김황식 국무총리와 국내 최대 공기업 한전 신사옥을 착공할 때 그동안 고생했던 일들로 감회가 매우 컸다.)

2014년 9월

혁신도시 조성 및 공공기관 이전 완료 예정

213


영산강뱃길 복원(復元)하여 영산강 살리기

나는 어렸을 때 영산강에서 멱을 감으며 놀았다. 그 시절 영산포는 홍어와 젓갈을 실어 나르는 배가 드나들던 활기찬 포구였다. 나는 그 옛날의 모습을 떠올리며 영산 강을 되살려 나주시민과 전남도민의 품에 안겨 주겠다는 다짐을 했다. 영산강 살리기 사업은 220만 영산강 유역 주민의 숙원사업 이기도 했다.

나는 17대 국회 때부터 국립나주박물관 건립을 비롯하여 영산강

214


고대문화권 사업, 강변도로 조성 사업 등의 필요성을 정부에 강조 하고 설득하여 영산강 관련 예산을 확보하면서 뱃길 복원사업의 디딤돌을 놓았다. 해방 이후 17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영산강뱃길 복원 사업을 통한 영산강 살리기의 필요성을 중앙 정치권에 주창 한 국회의원은 내가 최초였다. 특히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고조된 대운하 논란의 와중에도 정부에 ‘대운하는 불가능하지만 뱃길 복원은 가능하다’는 뜻을 밝 혔다. 민주당 당론은 ‘대운하 반대’였기 때문에 당 안에는 영산강 뱃길 복원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뱃길 복원 사업이 대운 하 사업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들 반대세력에게 ‘썩어 있는 영산강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 명하고 설득하며 우호적 여론을 확산시켜 나갔다. 또한 민주당 예결위원장으로서 2008년 정기국회에서 당시 한승 수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토해양부, 기획재정부, 농림수산식품부, 환경부, 문화관광부 등 관련 부처 장관을 직접 만나 영산강 살리기 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설득한 끝에 연차적으로 영산강 살리기 사 업에 필요한 예산 총 2조8천여억 원을 확보해 냈다.

2008년 9월 24일, 국회 예결위 회의에서 관련 부처 장관들에게

215


중앙정부가 의지를 갖고 영산강 살리기 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해 줄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질의를 했다. 질의 내용의 요지는 - 영산강은 4대강 중에서 가장 오염된 강이라는 것 - 영산강 물은 식수로 사용하지 못한지 오래 되었고, 농업용수로 사용하는 데도 문제가 많다는 것 - 치수(治水) 사업은 막대한 재원이 들어가므로 중앙정부가 관심 을 갖고 추진해야 한다는 것 - 영산강뱃길 복원 사업은 물류운송과 수위조절시설을 건설하는 등의 운하 방식이 아니라 순수하게 예전의 영산강으로 복원하여 생태계를 보호하는 방식의 환경친화적인 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 는것 - 전남도가 건의한 사항을 적극 반영하여 관련 부처에 분산되어 있는 기존계획들의 추진체계를 확립할 것 -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협력하여 민간의 공동참여를 유도하 고, 중앙정부가 집중 지원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할 것 등이다. 이와 관련하여 관련 부처로부터 긍정적이고 구체적인 답변을 얻어 냈다.

216


2009년 1월 16일, 이명박 대통령이 영산강 현지를 방문했을 때 도, 대통령에게 영산강뱃길 복원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하천을 준설하여 수질을 개선하고, 수심과 수량을 확보하여 하 천 기능을 되찾아 배가 다닐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 -영산포에 항구를 만들어 물류수송 터미널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등을 지적하자 대통령은 “정말 옳은 일”이라고 화답했다. 이명 박 대통령은 현장 순시를 마치고 버스에 오르기 전에 “영산강 하천 정비에 관한 국비 예산확보는 최인기 국회의원이 책임지고 확보해 달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2010년 12월, 나는 ‘영산포구의 옛 선창(船艙)을 복원하고 확대 하자’ ‘준설공사는 맑고 푸른 물이 흘렀던 옛날 원(原) 물길을 되찾 는데 중점을 두자’ ‘영산강 8경(景)을 조성하여 영산강을 새로운 관광의 명소로 만들자’ ‘영산강 살리기 사업 공사에 투입되는 인력 과 장비는 가급적 나주 것을 활용하자’ ‘사업 진행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민원을 신속하게 해소하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자’ 등 영 산강 살리기 사업의 5대 방향을 제시했다. 이 사업이 마무리되면 영산강은 나주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부상 할 것이며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217


2011년 12월 31일, 한 해가 저물어가는 날 영산강 옛 뱃길 복원 사업과 관련하여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이 내용은 모 언론에 보도 된 기사로 대신하겠다.

영산강 옛 뱃길 복원 영암호 통선문 확장 국비 예산 300억 확보 쾌거! - 최인기 국회의원 영암호 통선문 확장을 위한 국비 300억원 확보 - 220만 영산강유역 8개 시ㆍ군 주민의 숙원사업인 영산강 옛 뱃 길 복원 된다. - 영산강 옛 뱃길 복원 영암호 통선문 확장

최인기 국회의원(민주통합당 최고위원/나주ㆍ화순)은 전남도와 나주시민을 포함한 220만 영산강 유역 주민들의 숙원사업인「영산 강 옛 뱃길 복원을 위한 영암호 통선문 확장에 필요한 사업비 300억 원을 국비로 확보」했다고 밝혔다. 최인기 국회의원은 박준영 전남도지사와 도의원 48인, 영산강유 역 8개 시장ㆍ군수(목포시, 나주시, 담양군, 화순군, 영암군, 무안 군, 함평군, 장성군) 및 시ㆍ군의회 의원들의 영산강 옛 뱃길 복원 을 위한 영암호 통선문 확장 설치 촉구 건의를 받고, 박재완 기획

218


재정부장관, 서규용 농림수산식품부장관 등 정부예산 당국자들과 직접면담, 강력히 요청하였으며 2012년 국회 예산 심의과정에서 영암호 주변 농경지 농업용수 공급확대를 위하여 추진 중인 영산 강하류 영암호 배수갑문 확장 공사비로 정부에서 국회에 심의 요 청한 2,499억 원 중 영암호 통선문 확장 설치 예산이 반영되어 있 지 않아 최인기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장이 농림수산식품위원회 에서 여야 합의로 701억 원을 증액하여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에 넘 겼다. 최인기 위원장은 국회 예산결산위원 소속 민주통합당 오제세 의 원과 광주 출신 한나라당 이정현 의원 등에게 사업 필요성과 타당 성에 대해 직접 찾아가 설명과 설득을 진행하였으며, 이러한 노력 의 결과 여야 의원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 2012년도 영암호 통 선문 확장 공사 사업비로 300억 원의 국비 예산을 확보하는 성과 를 이루었다. 국회 예결위원회가 이런 큰 규모의 신규 증액 예산을 의결한 것 은 전례가 없는 일로서 최인기 위원장의 영산강 옛 뱃길 복원의 염 원과 집념이 이뤄낸 큰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인기의원은 2013년 말까지 영암호 통선문이 확장되게 되면 지 난 1982년 영산강 하구둑 축조 이전까지 자유롭게 선박이 통행하

219


였던 영산강의 옛 뱃길이 복원됨으로써 영산강의 단절된 물 흐름 이 개선되어 영산강 수질이 개선되고, 강의 생태계가 되살아나 영 산강 주변의 비옥한 토양이 복원될 것이며 남해바다에서 국내 최 대의 내륙 포구인 영산포까지 농산물, 소금, 홍어와 젓갈, 생선 등 을 실은 고깃배가 들어옴으로써 영산포 등대 주변에 최인기 의원 이 별도예산을 확보하여 새로이 설치된 영산포 선창을 중심으로 옛날 영산포 번영의 시대가 재현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220


영산강 고대문화권의 중심 나주

2004년, 17대 국회의원으로 첫 등원을 했다. 등원을 하면서 지역을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하겠다고 다 짐을 했다. 초선의원들은 대개가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사실 나는 나이로 봤을 때 다소 출발이 늦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 지만 의욕만은 3, 40대와 다를 바 없었다.

2005년 6월 28일, 정부는 나주를 ‘영산강유역 고대문화권 특정 지역’으로 지정했다. 이와 관련하여 총 사업비 1조 1천억 원이 넘

221


는 예산이 투입되어 42개의 개발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영산강 고대문화권사업의 대표사업은 ‘국립나주박물관’ 건립이라 고 할 수 있다. 나는 2006년부터 문광부, 기획예산처, 건교부 등 관계 부처 장관을 만나 국립나주박물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2007년, 기본 설계비 10억 원의 국비를 확보하게 되면서 국립나주박물관 건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초 국립나주박물관은 300억 원 규모의 ‘C급’ 수준으로 건립될 계획이었다. 그런데 2008년, 내가 국회 예결위 간사와 민주당 예 결위원장을 맡으면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과 김흥남 국립박물 관장을 집중 설득하여 예산을 400억 원으로 증액시켜 명실상부한 ‘A급’ 국립박물관으로 위상을 격상시켰다. 2010년 12월부터 건축에 들어간 국립나주박물관은 2012년 웅장 한 자태를 드러낼 것이다. 또한, 영산강 고대문화권사업의 일환인 ‘나주출토유물 보관 센터’ 는 2009년 5월 21일에 기공식을 갖고 2010년 10월에 완공되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지어진 이곳에는 대규모 유물 수장고, 각 종 전시실, 대회의실, 도서자료실, 학예연구실, 보존 과학실 등이 갖춰져 있다. 앞으로 나주출토유물 보관 센터는 호남지역 문화유 산 조사 및 연구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 나갈 것이다.

222


영산강 고대문화권 사업은 마한시대 영산강 유역의 역사, 문화유 적, 관광자원을 일원화함으로써 나주의 관광산업의 활성화를 통해 지역경제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뿐만 아니라, 영산 강 고대문화권 사업은 영산강 살리기 사업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영산강 고대문화권 사업은 크게 ‘문화재 정비 사업’과 ‘문화재 유 적 전승 사업’으로 나눌 수 있다. 문화재 정비 사업은 오량동 가마 유적 복원(160억 원), 영산강 복원 정비(100억 원), 동강 구석기 유적 정비(100억 원) 등이다. 그리고 문화재 유적 전승 사업은 반 남 역사공원 조성(400억 원), 복암리 고분 전시관 건립(210억 원), 영산강 역사 문화단지 조성(495억 원), 하천 생태공원조성(32억 원), 나주시 탐방로 개설(321억 원) 등 총 8개 사업이다. 이와 관련하여 나주시는 총 사업비 595억(국비 376억, 지방비 219억)을 투입하여 나주목 관아(동헌, 객사), 나주향교, 나주읍성 (동점문, 남고문, 서성문, 북망문) 등의 복원정비를 추진하고 있다.

이렇듯 다양하게 추진되고 있는 영산강 고대문화권 사업은 6,000여 명의 고용효과와 3,800억 원의 임금이 유발되어 나주지 역의 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223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 건설’, ‘영산강뱃길 복원을 통한 영산강 살리기’, ‘영산강 고대문화권 사업’은 향후 천 년의 나주 발전을 이 끌 견인차가 될 것이다. 이를 통해 목사골의 옛 영화(榮華)를 반드 시 재현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밖에도 많은 일들을 추진했지만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어 대 표적인 3개의 사업에 대해 개괄적으로 이야기하였다.

최인기국회의원이 구상하는 나주 발전 미래상 ▶ 혁신도시를 중심으로 한 첨단미래형산업도시 ▶ 되살아난 영산강을 중심으로 한 역사문화관광도시 ▶ 친환경농산물 유통 중심의 농업선진도시 ▶ 전남 중심에 위치한 사통팔달의 교통중심도시 ▶ 첨단미래산업과 역사문화관광이 공존하는 전남의 중심도시로 부각

나주시의 미래를 위한 현안사업의 남북 축 차질 없이 진행 ▶ 광주 → 남평도시개발사업 → 금천 산포 혁신도시 → 왕곡 미 래 일반산업단지조성 → 나주시내 KTX정차 → 영산포를 중심으 로 한 영산강 살리기 및 뱃길복원 → 반남 국립나주박물관 건립

224


및 고대문화권 사업 ▶ 나주발전의 남축 축을 차질없이 진행토록 함으로써 발전의 혜 택이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

225


살기 좋은 고장 1위, 주민이 행복한 화순

2004년 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지역구인 화순발전을 위한 내 나름의 구상을 해봤다. 오랫동안 고 민한 끝에 화순의 지리적 조건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활용해 관련 산업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화순은 인구 150만이 거주하는 호남 최대의 도시 광주에서 자동 차로 10분에서 30분 거리에 인접해 있는 고장이다. 예로부터 맑은 물과 푸른 숲, 청정한 공기를 자랑하는 곳으로 한국의 알프스라 불 리는 북면의 모후산과 백아산 자연휴양림, 이서면의 적벽과 안양

226


산 휴양림, 한천면 자연휴양림 등 천혜의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다. 이런 곳에 심신의 피로(疲勞)를 치유하는 의료산업을 유치하여 육 성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휴양과 관광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만 들 경우 지역발전 시너지(Synergy)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 으로 기대했다. 건강과 복지가 넘치는 고장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구상을 실행으로 옮기는 일만 남았다. 첫째, 기존의 전남대병원을 활용한 호남 의료산업의 핵심으로 만 드는 일이다. 이를 위해 전남대의생명과학융합센터를 건립하여 의 과대학(의대, 간호대)을 이전시키고, 전남대병원을 확대 발전시켜 산학연계발전 추구 둘째, 백신산업 특구를 중심으로 한 생물 의약산업의 중심으로 도약 셋째, 제 2너릿재 터널 건설, 화순~앵남간 국지도 확포장사업 등 교통 인프라 확충으로 전남 동부권의 교통 요충지로 건설 넷째, 농공단지 조성 등 기업유치를 통한 일자리 창출다섯째, 농 특산물 산지유통센터 건립 및 농협의 유통사업 강화, 읍면별 농산 물 특성화, 농촌 뉴타운 조성, 광역친환경농업단지 조성 등을 통한 살 맛 나는 농촌을 만들고 품목별로 규모는 작지만 경쟁력에서 강

227


한 농민(강소농 强小農)을 육성 여섯째, 하니움 복합문화스포츠센터 및 화순군민종합문화센터 건립을 통한 생활체육 활성화 및 주민건강복지 증진 일곱째, 나드리 복지관 및 노인전문병원 건립, 자연 휴양림 조성 등 어르신이 살기 좋은 여건 조성 여덟째, 운주사, 도곡온천, 만연산 테라피밸리 등 역사와 건강, 전통과 현대, 도농(都農)이 어우러져 끊임없이 사람들이 모여드는 생태전원문화 관광도시 건설 아홉째, 화순고, 능주고 등 명문고 육성과 교육시설 확충을 통한 교육특구 위상 확립이다. 2011년, 결과적으로 화순발전을 위한 나의 당초 구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 2009년 12월, 대통령 직속 지 역발전위원회 및 한국지방행정연구원, 동아일보가 공동 조사해 발 표한 지역생활여건 분석에서 화순군이 전국 군 단위로는 당당히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지역생활여건은 자녀교육 및 은퇴 이후 생활여건 등 주민이 느끼 는 교육, 문화, 삶의 질을 나타내는 지표로 화순군이 그만큼 살기 가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기 좋은 고장 1위의 의미는 크다. 화순은 현재 은퇴자들이 노후에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건강을 돌

228


보고, 온천․휴양림 등 언제라도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 되어가 고 있다. 당초 구상대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지역구 국회의 원으로서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229


생물의약산업과 의학(醫學)의 중심 화순

화순을 명실상부한 생물, 의약, 의료산업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것은 나의 총선 공약이다. 나는 2004년,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나서 화순군을 생물학과 의학 산업을 중점적으로 특화시 켜 육성 발전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면서 구체적인 국가예산을 확보하고, 그에 따른 인프라를 꾸준히 구축해 나갔다. 전남대 화순병원 유치, 수원에 있던 녹십자 본사 공장의 화순이 전 유치, 생물의약산업단지 조성, 생물농업 산학공동개발지원센터 설치, 전남대병원 국립 암센터 지정, 전남대 의생명과학융합센터

230


건립 등 생물 의약 분야의 인프라를 꾸준히 구축한 결과 2010년 11월 18일 정부로부터 ‘백신산업특구’로 지정 받는 성과를 거두었 다. 백신산업특구로 지정 받았다는 것은 곧 화순군 발전에 날개를 달았다는 것이 된다.

백신산업특구에는 2015년까지 총 사업비 7,668억 원이 투자되 는데 이로 인해 ‘바이오클러스터’(4,192억 원)와 ‘메디컬클러스트’ (3,476억 원)가 조성되게 된다.

바이오클러스터는 녹십자백신공장을 중심으로 한 생물의약단지 및 KTR 헬스케어 연구소(생물의약전임상연구소)건립, 프라운호 퍼 IME 한국연구소 등 연구 개발 사업을 말한다. 2010년, KTR 헬스케어 연구소(생물의약전임상연구소) 설립에 따른 예산 39억 원을 확보했다. KTR 헬스케어 연구소에서는 호남 권내 산학연(産學硏) 연계를 통해 생물자원 제품개발을 극대화해 나가게 된다. 앞으로도 생물자원 첨단화를 위한 기능물질 개발 지 원과 생물자원의 국제적 신뢰성 확보를 위해 선진국 수준의 검증 시스템 구축을 위한 지원도 필요하다고 본다. 프라운호퍼 IME 한국연구소 설립에 따른 예산 20억 원을 확보했

231


다. 프라운호퍼 IME 한국연구소에는 총 예산 372억 원이 투자되 는데 2015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 중에 있다. 프라운호퍼 IME 한 국연구소는 백신특구에 부족한 연구와 개발(R&D) 기능을 보완하 여 백신, 생명공학, 한방자원을 활용한 응용의학 분야에까지 영향 을 미쳐 화순 생물 의약 산업 전반을 활성화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메디컬클러스터는 화순 전남대병원, 전남대 의과대학을 중심으 로 의료복합단지 조성을 말한다. 화순의 백신산업특구는 아시아 최고의 백신허브를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백신산업특구 지정으로 백신연구개발 및 생산역량을 화순으로 집결하여 의약산업의 고도화 효과를 창출하자는 것이다. 백신산업 특구 조성 사업이 마무리되면 생산유발효과 2,582억 원, 부가가치 파급효과 961억 원, 고용유발효과 456억 원 등 총 4,000억 원의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주민의 소득은 증가되 고, 따라서 지역경제가 활성화될 것이며, 화순발전은 최소 10년 이상 앞당겨질 것이다.

232


보건안보의 든든한 지킴이 녹십자 화순공장

2005년 7월, 백신산업단지 결정과정에서 나는 당시 이희범 산자부 장관을 만나 녹십자 본사 화순 유치의 당 위성과 화순의 장점을 집중 설명해 결국 화순이전 유치를 이끌어 냈다. 그리고 민간사업자 선정과정에서 허영섭 녹십자 회장과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돈독했으므로 녹십자가 선정될 수 있도록 막후 역할을 했다. 허영섭 회장은 백신공장을 기존의 공장이 있는 경기도 신갈 일원 에 추가로 건립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처음에 내가 허영섭 회장에

233


게 백신공장을 건립하자고 하니까 선뜻 대답을 안 했다. 사업가 입 장에서 보면 기존의 공장이 있는 곳이 공사하기도 편리하고, 물류 면에서도 경기도에 건립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두 번 세 번 요청을 하니까 어쩌면 떼를 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집요하게 요청을 했고, 결국 경기도에 있는 기존의 공장들까지 화순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박 준영 전남지사와는 수시로 만나 협의하면서, 전남도가 예산은 물 론 행정적 지원을 적극적으로 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기획예산처, 산자부 장관을 만나 협조를 요청해 사업비 571억 원(국비, 도비, 민간자본)을 확보했다. 그리고 2007년에는 녹십자 화순공장 건립 에 따른 국비 예산 130억 원을 확보했다. 이렇게 하여 녹십자 화순공장은 국내 최대 백신산업시설로 국비 및 지방비와 민간사업자인 녹십자 등에서 총 571억 원을 투입해, 부지 3만평에 건물 5천 평 규모로 2008년 12월 완공되었다.

신종플루가 대유행을 하던 해, 녹십자 화순공장은 백신 생산을 해냈다. 화순공장에서 백신을 생산해냄으로써 국내외적으로 화순 군의 브랜드가치가 높아졌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신종플루 백신을 생산하는 곳은 녹십자 화순공장뿐이다. 뿐만 아니라 녹십자 화순

234


백신공장은 국내 유일의 신종플루 생산, 국내 최초의 독감백신 생 산 등 다양한 기초백신을 생산함으로써 백신전문공장으로도 자리 매김을 했다. 이에 따라 화순은 대한민국 보건안보를 지키는 생명, 의약 산업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독감백신을 모두 수입에 의존해왔다. 2006년 도의 경우 1천203만7천 도스(1도스는 주사 1회 분량)를 수입했다. 2천770만 달러어치를 수입한 것이다. 이제는 화순백신공장에서 독감백신을 생산하게 됨으로써 우리나라는 독감백신의 자립기반 을 마련하게 되었다. 녹십자 화순공장의 독감백신 사업 추진 현황은 다음과 같다. 2005년 7월

산자부, 사업 확정

2005년 8월

민간사업자 선정

2005년 9월

녹십자와 협약 체결

2005년 10월

(주)녹십자백신 법인 설립

2005년 10~11월

손실보상계획 열람공고 및 토지 감정평가

2006년 6월

입주대상 토지 매수

2006년 10월

백신 부지조성 공사 착공 및 부지조성 완료

2006년 12월 14일 독감백신 생산공장 기공식 2008년 12월

공장 준공 및 임상, 신규제품 허가

235


2009년 1월

원료(유정란) 생산을 위한 양계장 3개소 설치

2010년 2월

본격적인 생산제품 출시

녹십자 화순공장에는 100여 명이 넘는 화순사람이 근무하고 있 고, 연간 1,800억 원의 생산유발 효과를 거두고 있다. 특히 백신 생산에 필요한 유정란이 1일 135,000개로 화순의 양계농장에서 연간 634만개(2009년 기준)를 공급하고 소득만 35억 원에 달해 지역의 양계산업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236


통합은 시대적 요구

나는 17대 국회의원 시절부터 진보개혁 세력의 대동단결(大同團結)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참여정부 시절 민주당을 깨고 나가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던 세력들이 지리멸렬하 다가 결국 당 자체가 없어질 상황에 놓였을 때도 기득권을 버리고 민주당에 들어오라고 요구했었다. 그것은 퇴행적 보수세력인 한나 라당에 나라를 맡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4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

237


떠한가. 양극화가 심화되고, 국민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져 있다. 지금 ‘대한민국호(大韓民國號)’는 망망 한 대해에서 표류하고 있는 지경이다. 만약 민주·평화·개혁세력들 이 내년 19대 총선에서 다수의석을 차지하지 못하고, 2012년 연 말 대선에서 패배해 정권창출을 하지 못한다면 역사의 대의를 저 버릴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호(大韓民國號)’는 끝내 좌초(坐礁)하 고 말 것이다. 내년 19대 총선과 연말의 대선은 국가의 명운(命運)이 걸린 중대 한 선거이다. 이 두 선거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국운 (國運)이 활짝 펼 수도 있고, 고난의 길로 들어설 수도 있다. 이렇 듯 중대한 정치 일정이 잡혀 있기 때문에 반드시 통합(합당)이 필 요했었다.

2011년 12월 11일, 나는 민주당 전국대의원대회에서 통합(합당) 수임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위원으로 박병석 위원(국회의원/대전 서구갑위원장), 박양수 위원(前 국회의원), 이상호 위원(민주당 전 국청년위원장), 이현주 위원(대구 북갑지역위원장), 조정식 위원 (국회의원/경기 시흥시을 위원장), 최규성 위원(국회의원/전북 김 제, 완주 위원장)이다.

238


우리 민주당 통합(합당) 수임위원회는 민주당 전당대회에 보고된 민주당 통합협상위원회의 결정사항을 토대로 정당의 명칭, 강령과 당헌, 대표자 간부의 성명, 주소, 통합정당 지도부 선출 관련 주요 사항, 시도당의 소재지와 명칭 등 8가지 사항을 협의하여 결정하 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이번 통합은 민주당을 비롯하여 시민통합당, 한국노총, 시민사회 세력 등 범야권이 하나로 뭉치게 된 것이다. 범야권 통합은 시대적 요구이자 국민의 명령이다. 모두가 동의하고 공감하기 때문에 반 드시 성사될 것이다. 민주당의 잠재적 지지층들은 더 큰 민주당, 더 강한 민주당, 더 국민과 소통하는 민주당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 다. 비록 전당대회에서 이견은 있었지만 민주당 지지층들이 작은 차이를 극복���고 통합에 모두 동참할 것을 수차례 호소하였다. 민주당이 주도하는 범 야권통합은 내년 총선과 대선 승리의 원동 력이 될 것이다. 통합은 국민의 명령이자 시대의 소명이다. 그러므 로 대의(大義)를 위해 작은 차이를 극복하고 더 큰 민주당 건설과 더 큰 국민의 승리를 위해 모두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18대 국회 국정감사를 끝내고 한숨 돌리나 했더니, 또 중대한 임

239


무를 부여받았다. 일복을 타고 났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번 일은 나라의 명운(命運)이 걸린 중대사였으므로 그 어느 때보다 신경이 많이 쓰이고 몸도 고단했지만, 마음만은 더 할 수 없이 뿌듯했다.

마침내 2011년 12월 16일, 범야권은 통합을 이루어 ‘민주통합당’ 이라는 당명으로 힘찬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나는 민주통합당 의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우리 민주통합당은 내년 총선과 대 선에서 반드시 승리하여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치, 국익을 우 선으로 하는 정치를 실현해 나갈 것이다.

240


최인기 수임위원장 산파 ‘민주통합당’ 출범

특유의 설득력과 논리로 난제 풀고 통합 이뤄내 임시지도부 최고위원 선임…당무와 경선까지

역사적인 민주통합당 출범에 산파 역할을 해온 ‘나’ 대해 2011년 12월 19일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요약하여 수록한다.

민주당과 시민통합당, 한국노총이 결합하는 야권 통합신당인 ‘민 주통합당’이 새로 출범한다.

241


16일 합당을 최종 의결하는 수임기관 합동회의에서 당헌당규를 최종 확정짓고, ‘민주통합당’으로 당명을 정하고, 정당법상 모든 요건을 갖춘 범야권 통합신당이 출범하게 된 것. 최인기 민주당 합당수임기관위원장(나주 ∙ 화순 국회의원)은 “3일 제1차 합동수임기관 공동회의에 이어 13~14 일 총괄∙당헌∙강 령 3개 분과의 실무협상을 진행했으며, 여기서 합의된 내용을 15일 각 정당과 단체별로 확인 및 동의를 거쳐, 제2차 공동회의에 서 최종협상을 마무리했으며, 16일 제3차 공동회의에서 최종 의결 해 범야권 통합정당이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최 위원장은 “범야권 통합정당의 출범은 정당사상 최초로 기존 정당과 시민사회세력, 노동계가 결합한 정당이며, 상호 이질적이 며 다양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차이를 극복하고 시대적 대의이자 국민의 명령인 통합을 이루어낸 명실상부한 국민과 소통하는 정당 이 탄생한 것”이라고 범야권 통합정당(민주통합당) 출범의 의미를 부여했다. 범야권 통합은 정당사상 유례없는 기존정당과 시민사회세력, 노 동계가 참여하는 만큼 통합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으나 최인기 의원이 민주당 합당수임기관위원장을 맡아 특유 의 설득력과 논리로 일주일도 걸리지 않은 짧은 시간에 산파 역할

242


로 통합을 깔끔히 마무리 지은 것. 최 위원장은 “어려운 난제에도 통합작업이 순조롭게 진행 될 수 있었던 것은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이명박 정권을 심판하기 위한 범야권 통합은 시대적 대의(大義)이며, 국민의 명령이고, 우리 모 두의 소명이라는 생각으로 협상을 진행했기 때문”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한편, 통합정당 합당 결의 후 민주당 지도부가 사퇴함에 따라 다 음달 15일 통합 전당대회까지 최인기 위원장이 통합신당 최고의 결 기구인 임시지도부 최고위원으로 선임되어 당무와 새 지도부 경선 관리 등의 막중한 역할을 맡게 된다. / 박선옥 기자

243


4장

단상(斷想) -살며 생각하며


콤플렉스는 또 다른 힘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일본에서 ‘경영의 신(神)’ 으로 추앙받는 사람이다. 1894년에 태어나 95세에 세상을 떴으니까 아주 장수(長壽)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천성적으로 허약한 체질이었다고 한다. 이 허약한 체질 때문에 건강에 힘써 장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어록에 “나는 하늘로부터 가난한 것, 허약한 것, 못 배운 것 세 가지 은혜를 받았다. 가난 때문에 부지런해졌고, 허약한 몸 때 문에 건강에 힘썼으며, 초등학교 중퇴 학력 때문에 세상 사람들을

247


모두 스승으로 여겨 배우는 데 애썼다”라는 대목이 있다. 마쓰시타 의 가난, 허약한 몸, 초등학교 중퇴 학력 등은 아주 큰 콤플렉스라 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은혜라고 했다. 그것이 또 다른 힘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화려한 이력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학력이 화려해 웬만한 직장에는 들어가기 싫어 빈둥대며 세 월을 허송하는 사람도 있다. 그와 반대로 빈약한 학력을 극복하기 위해 남보다 몇 배 노력한 결과 성공한 예도 있다.

서양화가 안모 씨는 우리나라의 중견화가이다. 그는 국내외적으 로 수십 차례의 개인전을 열고 독특한 미술세계를 구축했다. 이 화 가도 학비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사실 예술가에게는 지 식보다는 경험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는 대학의 강의실이 아니 라 삶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출있는 시장과 같은 곳에서 부대끼 며 그림을 그려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대목에서 불이익을 당했다. 예컨대 학벌, 인 맥 등의 인과관계 속에서 피해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 는 오기가 생겼고, 그 오기를 예술적 에너지로 승화시켜 그림을 그

248


렸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키가 작다. 키가 작은 것도 콤플렉스라면 콤플렉스이다. 서중학교에 다니면서 나보다 덩치가 큰 또래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마당에 샌드백을 매달아 놓고 주먹단련을 했던 일, 공직에 들어와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에 매달렸던 것 도 어쩌면 신체적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 른다. 그런 의중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것 역시 콤플렉스가 또 다른 힘이 되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탈(脫)’이라는 새로운 화두 가 등장했다. 탈이라는 말 속에는 ‘벗어나자’ ‘거부하자’ ‘파괴하자’ 등의 의미가 담겨 있다. 관습에서 벗어나고, 보수적인 사고를 거부 하고, 이념을 파괴하자는 것이다. 지난 10.26 서울시장 재선거에 서 젊은이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야당의 후보를 뽑아준 것도 일종 의 ‘탈(脫)’이라고 할 수 있다. 기성 정치세력에 대한 거부와 탈피 였던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의 생각이 급속도로 변화했다. 이러한 시대에 콤플렉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 다.

249


학력을 예로 들었을 때, 그것이 뜻을 이루는 데 편리한 도구가 될 지는 몰라도, 인생의 전부는 될 수 없다. 빌 게이츠는 스무 살에 하 버드대를 자퇴했다고 한다. 7080시대의 스타 송창식은 고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이다. 생활 이 곤란해 대학에 가지 않았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든, 아무튼 고교졸업자로서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냈다. 그런 송창식의 아들 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겠다고 했다. 자기 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아들을 보면서 송창식이 “네가 나보다 더 낫다. 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학교공부가 별로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는데, 너는 나보다 빨리 그걸 알았으니 나보 다 낫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말처럼 콤플렉스는 ‘또 다른 은혜’이고 ‘또 다른 힘’이다.

250


경부고속철도와 지율 스님

경 부고속철도의 개통 소식을 접하면서 문득 지율 스님이 생각났다. 지금은 어디서 또 생명의 존엄함을 설 파하고 계실까 궁금하기도 하다. 지율 스님은 천성산 내원사의 비구니였다. 스님은 경부고속철도 공사로 인해 천성산에 터널이 뚫리는 것을 반대하며 목숨을 걸고 단식투쟁을 했다. 건설 관련자들은 지율 스님의 단식 때문에 공사 에 차질이 생겼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일부 언론도 건설 관련자들 에 동조하여 스님의 행동에 대해 비난조의 기사를 썼다. 지율 스님

251


의 단식으로 국책사업이 중단되었고 비용과 시간이 엄청나게 낭비 되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스님은 굳이 천성산에 터널을 뚫지 않아도 돌아가는 길이 있다고 했다. 물론 그렇게 되면 20분 정도가 더 걸리게 된다. 경제성으로 따지면 터널을 뚫는 것이 맞다. 그러나 환경을 생각한다면 20분 정도 더 달릴 수도 있다. 개발과 환경보전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환경보전만을 생각한다 면 삽질 한 번 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한 번 잘못 개발해 놓은 자 연은 원상복구가 어렵다. 개발과 환경보전은 참으로 풀기 어려운 숙제와 같다.

지율 스님은 천성산을 살려야 한다면서 도롱뇽을 앞세워 법정투 쟁도 했다. 나는 스님의 법정투쟁이 정당한가 아닌가를 따지기에 앞서 진심으로 잘 되기를 기원했다. 나는 스님이 온당하지 않은 일 을 가지고 법정 싸움을 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나는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2년 동안 재판을 했다. 그래 서 그 일이 얼마나 힘들고 몸과 마음을 쇠약하게 하는지 알고 있다. 결국 원심과 항소심에서 모두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그 시간은 두

252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법정 투쟁에서 이기려면 인내심과 투지력이 있어야 하는데 지율 스님은 어떨까 염려되기도 했다. 스님은 또 단식에도 들어갔다. 단식은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극단 적인 선택이다. 스님은 목숨을 걸고 천성산을 지켜야 한다고 호소 했다. 결국 스님은 법정투쟁에서도 단식에서도 지고 말았다. 결국 천성산에는 터널이 뚫렸다. 스님은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4대강 사업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낙동강에 나타나 강이 죽고, 생명이 다 죽는다고 호통을 쳤다. 스님은 4대강 사업으로 생명이 다 죽는다고 하는데, 이명박 정부는 ‘생명살리기’라고 응수했다. 지율 스님은 4대강 공사 현장 이곳저곳의 사진을 찍어 놓았다고 한다. 반드시 4대강을 복원할 날이 올 테니까, 복원할 때 원형(元 型)으로 쓰기 위해서라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지율 스님을 한 번 만나 뵙고 싶었다. 신념을 지키 며 꿋꿋이 살아가는 스님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253


작고 알뜰한 정부

이명박 정부는 출범하면서 ‘작고 알뜰한 정부’를 표방했다. 그리고 출범과 동시에 조직을 축소하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공무원 수를 줄이면 재정지출도 줄어 들것이다. 이명박 정 부는 작지만 알뜰하고 강한 정부, 재정지출을 줄이면서 효율적인 업무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는 정부를 표방했다. 이른바 ‘정부 슬림 화’를 추진했다. 야당 국회의원인 나로서도 환영했다.

그런데 집권 4년째 현 단계에서 봤을 때 ‘작고 알뜰한 정부’는 물

254


건너가고 말았다. 행정안전부가 2010년 말 기준으로 밝힌 공무원 수는 5년 만에 7.9%인 7만2천5백 명이 늘어나 총 공무원 수 10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슬림화는 무색해졌고 비대화가 되어 버렸다. 역대 정권들도 초기에는 ‘작은 정부’를 표방하다가 집권 말기에는 몸집을 키워버렸었다. 이명박 정부도 역시나 마찬가지였 다.

몸집이 자꾸 비대해지기 때문에 정부의 효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스위스 ‘세계경제포럼(WEF)’이 밝힌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 의 국가경쟁력은 3년 연속 하락세를 보여 22위로 추락했다. 노무 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때이던 2007년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은 11위로 비교적 우수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던 2008년 에는 13위, 2009년에는 19위, 그리고 집권 말기가 되자 20위권 밖으로 밀려나 버렸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이 발표한 국가경쟁력 순위에 서도 우리나라는 59개 국가 중 22위에 머물렀다.

사회가 분화되면서 공무원들의 역할도 다양해졌다. 그렇기 때문 에 공무원 증원은 불가피한 일일 수도 있다. 공무원 100만 명이라

255


는 현 시점에서 증원할 때 심사숙고했는가도 따져봐야 한다. 공무 원이 늘면 재정지출이 늘어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규제도 따 라서 늘게 될 것이다. 재정지출이 늘고 규제가 증가하면 시장경제 활력도 저하될 수밖 에 없다. 공무원 증원에 따른 부담은 누가 지는가. 국민과 기업이 다. 이명박 정부는 임기 1년여를 남겨놓고 있다. 이제라도 집권초기 표방했던 ‘알뜰한 정부’에 대해 점검을 해야 한다.

256


콩(菽)과 보리(麥)

‘콩’의 한자어는 ‘두(豆))’로도, 숙(菽)으로도 쓴다. 예컨대 콩과 보리를 뜻할 때는 ‘두맥(豆麥)’이라고 쓰지 않고 ‘숙맥 (菽麥)’이라고 쓴다. 한자성어에 ‘숙맥불변(菽麥不辨)’이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콩 과 보리를 분별하지 못함’이다. 분별력이 떨어져 우둔한 사람을 ‘쑥맥’이라고 하는 하는데 바로 숙맥불변에서 비롯된 말이다. 숙맥불변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말에는 ‘어로불변(魚魯不辨)’, ‘목불식정(目不識丁)’도 있다. 어로불변의 ‘어(魚)’자와 ‘노(魯)’자

257


가 비슷해서 얼른 구별(不辨)을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목불식정 은 고무래를 보고도 비슷하게 생긴 글자 ‘丁(고무래 정)’도 모른다 는 뜻이다.

춘추시대 진(晉)나라 때 대신들이 왕을 시해하고, 열네 살 소년인 ‘주(周)’를 왕위에 앉히려고 했다. 실은 주(周)에게 형이 있었다. 당 연히 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지만, 대신들은 그 형 을 왕위에 앉힐 수 없었다. 그 형이 콩과 보리도 구별 못할 정도로 우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숙맥불변(菽麥不辨)’ 즉 ‘쑥맥’ 이었다. 그래서 대신들은 이 쑥맥을 제치고 동생을 왕위에 앉히려 했던 것이다. 주는 열네 살의 소년이었지만 매우 영특하고 당찼다. 주는 왕위 에 오르라고 하는 대신들에게 말했다. “신하들이 군주를 세우는 것은 군주의 명령에 복종하겠다는 것인 데, 만약 내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복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 습니까?” 대신들은 주 앞에서 충성을 맹세했다. 이 영특하고 당찬 소년이 진나라의 도공(悼公)이다.

258


‘한비자’에 나오는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는 고사를 보면 쑥맥 들이 나라를 다스리면 엄청난 비극을 불러온다는 교훈을 주고 있 다. 초나라의 화씨가 옥돌을 발견하여 여왕에게 바쳤다. 그런데 옥돌 이 아니라 돌멩이라는 감정 평가가 나오자, 여왕은 화씨의 왼쪽 발 꿈치를 잘랐다. 화씨는 그 후, 무왕에게 다시 옥을 바쳤다. 역시 돌멩이라는 감정 평가가 나와 이번에는 오른쪽 발꿈치가 잘려 나갔다. 문왕이 즉위하자 화씨는 옥돌을 안고 사흘 동안을 통곡했다. 문 왕이 화씨를 불러 우는 까닭을 물었다. 화씨는 “발꿈치를 잘려서 우는 것이 아니라, 옥을 돌멩이라 하고, 진심을 몰라주는 것이 슬퍼서 웁니다”라고 말했다. 사연을 들은 문 왕은 화씨가 가지고 있는 옥돌을 다듬게 했다. 과연 세상에서 보기 드문 명옥(明玉)이 탄생하였다.

세상에는 콩과 보리를 구분하는 사람들도 많고, 옥을 돌멩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다. 군주나 국가의 지도자 중에 이러한 사람이 있다 면 백성은 불행해지게 된다. 숙맥불변이므로 인재를 어떻게 가려 쓸 수 있겠는가. 우매한 사람의 말을 믿고, 진실된 사람을 처벌하

259


니 어느 누가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나서겠는가.

집권당의 대표 일행이 북한으로부터 포격을 당한 연평도를 방문 했다. 그 사람들은 포격으로 인해 폐허가 된 현장을 돌아보았다. 때마침 잿더미 속에 새카맣게 그을린 보온병이 들어 있었다. 그러 자 그걸 들고 ‘포탄’이라고 했다. 보온병과 포탄을 구별 못한 것과 콩과 보리를 구별 못하는 것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260


K리그와 우리의 도덕불감증

스포츠의 기본정신은 정정당당함이다. 그리고 스포츠맨십은 ‘신사도(紳士道)’와 일맥상통한다.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 야구를 하지 않는 것은 룰에 훔치기도 하 고, 속임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국 사람들은 훔치고 속이는 것을 비겁한 행동으로 본 것이다. 야구 룰에 도루(盜壘)가 있다. 루(壘)를 훔치는 것이다. 투수와 포수는 서로 짜고 타자를 속여 헛 스윙을 유도하는 공을 던지기도 한다. 도루와 타자의 헛스윙을 유 도하는 투구는 야구의 또 하나의 재미이다. 이런 룰을 비겁하다고

261


보는 영국 사람들의 시각이 좀 지나치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운동 경기는 정정당당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프로축구 K리그가 승부조작을 했다. 선수들이 승부 조작을 한 것은 한 마디로 돈 때문이다. 돈 때문에 열광하는 팬들 앞에서 양심을 팔아버린 것이다. 그런데 연봉이 적은 선수들만 승 부조작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 고액 연봉의 국가 대표급 선수까지 승부조작에 연루되었다고 한다. 여론은 K리그를 당장 중단하고 근본대책을 강구해 새롭게 판을 짜야 한다고 강도 높은 질타를 했다. 그러자 프로축구 연맹은 수사 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연루된 선수들을 중징계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워크숍을 가졌다. 이런다고 해서 근원적인 치료가 될지 의심 스럽다.

그런데 구단들이 도박 브로커와 연결된 선수들의 명단을 공유하 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명단을 공유하면서 문제 선수를 방출했 다는 것이다. ‘고름이 살 안 된다’는 격언이 있다. 고름을 짜 내야 새살이 돋는 법이다. 그런데 그걸 미봉책으로 덮어두려고 했으니 일이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62


나는 K리그의 승부조작 사건은 도덕불감증이 만연한 우리 사회 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 후 사저(私邸) 문제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 다. 대통령은 자기는 내막을 잘 모르고 경호실장이 한 일이라고 말 했다. 그리고 경호실장이 그 일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그 렇지만 국민 대다수는 청와대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청와대의 발표대로 대통령이 몰랐을 수도 있다. 다만 내가 말하 고 싶은 것은 국민의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의 도덕불감증이 참으 로 개탄스럽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터지면 쉬쉬하면서 적당히 덮어 버리려는 행태 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이다. K리그 승부조작 사건이 터졌 을 때도 연맹은 파문 축소에 급급했다. 솔직히 시인하고, 앞으로의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는 것이 옳은 일인데 명쾌한 사과는 뒷전으 로 미뤘다. 이명박 대통령 사저 파문도 솔직히 시인하는 모습은 별로 없었다. 파문 축소에 급급한 모습만 연출했다. 그러다가 책임자 사퇴라는 수순을 밟아 덮어 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분노하던 국민들 도, 떠들어대던 언론들도, 그 일을 모두 잊어버렸다.

263


우리 사회의 도덕적 불감증이 걱정된다. 그리고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데 당당하지 못하는 태도들은 더욱 걱정된다.

264


때로는 조금은 어리석게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한자성어가 있다. 이 성어와 관련한 고사(故事)는 널리 알려진 내용이므로 굳이 이야 기하지 않겠다. 이 고사가 주는 교훈은 우직하게 보이는 사람이 큰 일을 해낸다는 것이다. 영리하고 민첩한 사람들은 임기응변에는 능하지만 진득하게 일 을 성사시키는 뒷심이 부족하다. 반대로 행동이 좀 굼뜨다 싶은 사 람은 일 처리하는 것이 다소 더디기는 하지만 끝까지 밀고 나가는 뒷심을 가지고 있다.

265


우리 사회의 도덕적 불감증이 걱정된다. 그리고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데 당당하지 못하는 태도들은 더욱 걱정된다.

영리한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영리’와 ‘지 혜’는 같은 말이기는 하지만 뉘앙스에 차이가 있다. 서양 격언에 “남의 단점을 잘 알아내는 사람은 영리한 사람이지 만, 그걸 알고서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 람이다”라고 했다. 이 격언에서는 ‘영리’와 ‘지혜’라는 말을 구분하 고 있다. 살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 어리석게 보여야 할 때가 있다. 분명 알 고 있는 사실이지만 모르는 것처럼 속아주어야 할 때도 있다. 대학교 다닐 때 어느 분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가게 주인이 너무 빈틈이 없으면 손님이 떨어지고, 쉽게 속여먹을 수 있는 가게에는 사람이 끓어, 결국에는 잘 속는 가게가 돈을 벌게 된다”라는 요지 의 이야기였다.

어떤 책을 읽으면서, 알면서도 속아 준다는 것이 정말 아름다운 행동이란 것을 알았다. 그 이야기를 기억나는 대로 소개해 볼까 한 다.

266


어느 소년이 어머니와 함께 호화여객선을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 다. 수영장도 있고, 영화관도 있고, 커다란 연회장도 있는 아주 큰 여객선이었다. 이처럼 넓은 배 안에서 어머니는 그만 아이를 잃어 버렸다.

여객 승무원에게 신고를 했지만 아이는 얼른 나타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여객선의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다가 여러 사 람이 빙 둘러서서 무엇이 재미있는지 깔깔거리고 있는 곳에 오게 되었다. 어머니는 사람들을 헤집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아들이 있었다. 한 어른과 아들이 뭔가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구경꾼들은 그걸 보면서 웃고 있었던 것이다.

어른은 금화(金貨) 한 닢과 은화(銀貨) 한 닢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아이에게 좋은 것을 고르라고 했다. 그리고 그냥 고르라고 하 는 것이 아니라, 금화가 은화보다 좋다는 것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 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영리한 아들이 금화를 선택할 것이라고 생 각했는데, 그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그걸 보면서 구경꾼들은 깔깔 대고 있었던 것이다.

267


구경꾼 누군가가 한 번 더 시켜보라고 했다. 그래서 방금 전에 했 던 것처럼 아이에게 선택권을 주었는데, 여전히 은화를 집어 들었 고, 구경꾼들은 또 깔깔거렸다. 어머니는 창피해서 얼굴이 닳아 올 랐다. 바보 같은 아들에게 화도 났다. 어머니는 아이의 팔을 잡아끌고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금화가 좋은가, 은화가 좋은가를 물 었다. 그런데 아이가 금화가 좋다고 했다. 어머니는 어처구니가 없 어서 물었다. “그런데 아까는 왜 은화를 집어 들었니?” 그러자 아들이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금화를 집어 들면 어른들 장난이 끝나잖아요.”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영리함과 지혜로움은 분명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68


경쟁과 서열(序列)의 교육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어머니를 살해하고 시신을 썩을 때까지 방치하던 고등학교 3학 년 학생이 검거된 것이다. 그 학생은 어머니의 강요를 견디다 못해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그 학생의 어머니는 평소 ‘더 좋은 성적을 받아오라’ ‘전국 1등을 해야 한다’ ‘서울대 법대에 꼭 들어가야 한다’ 등의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걸핏하면 폭력을 휘둘렀고, 성적 이 안 좋으면 밥을 안 주고 잠까지 못 자게 했다고 한다. 죽은 자는

269


는 말이 없으니까, 학생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그 학생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교육정책을 볼 때 그런 끔찍한 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 직후부터 교육정책에 대대적인 손을 보기 시 작했다. 그리고 어떤 정책은 강행(强行)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밀어붙였다. 전국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성취도 평가’라는 것도 학교 현장의 교사나 학부모들의 반대가 있었음에 도 불구하고 강행했다. 그리고 이를 반대하는 교사들에게 중징계 라는 철퇴를 내리기도 했다. 예전에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일제고사’라는 것을 봤었다. 그 때는 교사나 학생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에 와서는 왜 서열화(序列化)니 뭐니 하면서 반대하 느냐고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교육 수혜자들의 요구가 다양해졌고, 서열화 교육이 많은 폐해(弊害)를 안고 있다고 판단 되어 오래 전에 중단되었다. 그걸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 불쑥 시 작하게 된 것이다. 물론 열심히 가르치자는 데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열심히 가르치 되 경쟁과 서열교육을 지양(止揚)하자는 것이다.

270


이명박 정부는 자사고(자율형사립고) 정책과 학교선택제 정책을 강행해 왔다. 그런데 서울시의 경우 자사고는 절반 가까이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교과부는 정책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사고 를 워크아웃 시킨다느니 대입특혜를 준다느니 하면서 미봉책(彌縫 策)으로 급급하고 있다. 학교선택제도는 학교 서열화를 부추기는 잘못된 제도이다. 자사 고와 학교선택제의 정책이 폐지되지 않는 한 자사고, 또는 특목고 가 아닌 일반 인문계학교는 이류고등학교, 삼류고등학교로 전락하 고 말 것이다. 일반 인문계고등학교 학생들은 공부할 맛이 안 날것 이다. 특목고 때문에 일반 인문계고등학교 학생들은 명문대 가기 도 힘들어졌다. 명문대를 안 나오면 사회에서 루저(실패자)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경쟁교육의 상징인 학교선택제와 자사고 정책을 폐지해야 청소 년들의 학교생활이 행복해질 수 있다. 이 정책이 계속되는 한 중학 교 때부터 압박을 받아야 한다. 중학생들은 특목고에 입학하는 것 이 명문대에 가는 길이고, 명문대를 나와야만 출세할 수 있다는 등 식에 갇혀 경쟁교육과 서열교육에 아름다운 청소년시절을 묻어야 한다.

271


서울대 법대를 강요받던 고등학생이 견디다 못해 어머니를 살해 한 사건은 우리 교육에 대한 경종(警鐘)이다. 그렇다면 특목고 입 학을 강요받는 중3생은 또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경쟁교육과 서열교육의 상징인 자사고 정책을 하루빨리 폐기해 야 건강한 교육환경이 조성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272


승자독식(勝者獨食)과 패자부활(敗者復活)

다른 글에서도 어머니를 살해하고 시신을 썩을 때까지 방치하던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의 이야기를 했다. 그 학생은 어머니를 살해한 동기가 어머니로부터 받는 강박감 때 문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평소 ‘더 좋은 성적을 받아오라’ ‘전국 1등을 해야 한다’ ‘서울대 법대에 꼭 들어가야 한다’ 등의 말을 귀 에 못이 박히도록 하면서 걸핏하면 폭력을 휘둘렀고, 성적이 안 좋 으면 밥을 안 주고 잠까지 못 자게 했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라

273


고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 중 하나가 ‘일등 만능주의’이다. 어느 개그맨이 대한민국은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신랄 하게 꼬집기도 했다. 이 일등 만능주의는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사회를 병들게 하 는 암세포이고 독버섯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일류대학을 나와야 취직도 쉽게 하고, 출세도 빨리할 수 있다. 그래야 좋은 배우자와 결혼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의 아 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치열한 경쟁의 틀 속에 갇혀 버린다. 일류대 학에 가지 못하면 일찌감치 인생낙오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여성들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남보다 멋지게 살아보기 위해 미 모에 엄청난 투자를 한다. 월급을 모아 성형수술을 하는데, 심한 경우는 잘못하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수술도 마다하지 않 는다. 올림픽에서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따고도 금메달을 따지 못한 아 쉬움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일등만 알아주기 때문이다. 중계를 보 면서 동메달을 목에 걸고 정말 좋아하는 외국인 선수들의 행동이 오히려 이상해 보일 정도다. 동메달을 따놓고도 무엇이 저리도 좋

274


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나도 모르게 일등 만능주의 세태에 젖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일등 만능주의는 승자독식(勝者獨食)으로 이어진다. 승자가 모 든 것을 다 차지해 버린다. 돈과 명예와 권력도 모두 승자의 것이 된다. 패자부활(敗者復活)은 엄두도 낼 수 없다. 그러므로 사회 양 극화(兩極化)는 더욱 심화되게 된다. 이런 사회는 발전 가능성이 적다. 패자부활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희망도 없다. 모든 인간에게는 무한의 잠재력이 있다. 우선 당장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해도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면 최고가 될 수 있다. 그런 데 승자독식의 사회에서는 그런 기회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잠재 력을 가진 인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크나큰 손실 이다.

현대사회는 다양성의 사회이다. 수능시험 점수가 낮다고 해서 쓸 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적재적소에서 소임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문 대와 같은 아주 소소한 잣대로 평가하면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

275


는 것이다. 이창호, 박지성, 김연아 같은 사람들이 학교 다니면서 100점만 맞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아름다운 사회란 일등이 아니어도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이다. 빌게이츠가 대학을 중퇴���다고 실패자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 선 진국이다. 우리는 스스로 선진국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일등만 기억 하는 세태를 보면 아직도 후진국이다. 패자부활을 인정하는 사회 가 되었을 때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하게 될 것이다.

276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 선생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최경회 선생은 1532년(중종 27년), 화순읍 삼천리에서 태어났다. 그 후 1576년(명종 22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옥구현감, 장수현감, 무장현감, 영암군수, 영해부사, 담 양부사 등 내외 관직을 지냈다. 그러다가 1591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관직을 떠나 고향에서 시묘(侍墓)를 했다. 시묘 중이던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경운, 경장 두 형과 아들 홍기, 조카 홍재와 홍우 등과 의병

277


청을 설치하고 기병(起兵)하였다. 그리하여 성주성을 탈환하고, 영남 7개 읍을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1593년에 경상우도 병마절 도사로 특별 임명되었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선생은 조카 홍우를 탈출시켜 중형에게 보내고, 김천일, 고종후 의병장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이때 선생의 나이 62세였다.

전남 담양출신 소설가 설재록 씨는 <차라리 강물이 되어>라는 제 목의 소설에서 그때의 비장했던 상황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6월 29일, 싸움이 시작된 지 아흐레가 되었다. 패전은 바로 눈 앞에 다가와 있었다. 수성군의 사기는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말았 다. 급기야 진주목사 서예원이 겁을 먹고 성 밖으로 도망을 쳤다. 그를 따르던 병사들도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이윽고 성 문이 열 리고 왜적들이 개미떼처럼 쳐들어 왔다. 김천일 휘하의 장수들은 촉석루 쪽으로 물러났다. 이제 맞서 싸워본들 더 무엇이 있겠는가. 그들은 이심전심으로 자결할 것을 결심하고 있었다. 말은 없었다. 그들은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했다. 그때 최경회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278


“저 강물이 흘러 마르지 않는 한, 이 혼도 결코 죽지 않으리. 내 차라리 강물이 되어 가련한 강토를 적셔 주리라.” 촉석루에는 무섭도록 차디찬 정적이 감돌았다. 가까운 곳에서 들 려오는 조총소리와 비명소리가 이들의 간장을 갈갈이 찢어 놓았다. 이윽고 김천일이 그의 장자 상건(象乾)과 서로 부둥켜안고 남강 을 향해 몸을 던졌다. 최경회도 곧바로 김천일의 뒤를 따랐다. 고 종후, 양산숙도 몸을 던졌고 여러 장수들과 백성들도 이들의 뒤를 따랐다. 촉석루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비바람이 그치고 오랜만에 비친 햇살이 텅 빈 촉석루의 기왓장 위에서 속절없이 부서졌다. 진 주성 여기저기에 뿌려진 피가 하늘에 물든 탓일까? 서장대(西將 臺) 위에 펼쳐진 노을은 핏빛이었고 남강의 황톳물은 햇살을 받아 더욱 붉게 빛났다.》 선생은 이렇듯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1746년(영조 22년), 선 생에게는 충의공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고, 좌찬성에 추증되 었다.

2011년 10월 11일, 화순군 동면 백용리 충의사에서 선생의 호국 정신을 기리는 향사(享祀)가 거행되었다. 충의사가 완공된 것은

279


2003년이다. 그런데 문중과 행정 당국 간 협의가 원만하게 이루 어지지 않아 공식적인 향사를 거행하지 못했다. 그렇게 지내오다 가 새로 당선된 홍이식 군수가 군민화합 차원에서 공식 행사로 추 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향사는 첫 공식 행사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나는 선생의 향사에 초헌관(初獻官)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충의 사와 나의 인연은 20년 전부터 있었다. 전라남도 지사로 일하던 1991년 1월, 화순군 초도순시를 했다. 그때 충의사 건립을 약속했다. 이와 관련하여 3억 원(도비와 군 비)의 예산지원을 시작하여 충의사가 완공될 때까지 국비 32억 원 을 지원했다.

이번 선생의 향사에 참여하면서 다시 한 번 화순과는 이래저래 인연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4대조와 5대조의 선산이 화순 앵남에 있다. 화순과 나주가 통합선거구로 된 것도 인연이다. 또한 전라남도 지사 시절에 충의사 건립의 첫 삽을 뜨게 된 것도 인연이 다.

280


사마천(司馬遷)을 생각하며

사마천(司馬遷)은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역사가이다. 사마천은 정쟁(政爭)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 다. 그런데 사기(史記)를 집필하기 위해 궁형(宮刑)이라고 하는 남 성거세(男性去勢) 형을 선택한다. 궁형을 당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사기를 집필하기 위해 그 길을 선 택했던 것이다. 사기는 중국의 고전 중에서도 가장 많이 읽힌 책이다. 뿐만 아니 라, 동아시아를 비롯하여 전 세계 사학계(史學界)에 많은 영향을

281


끼친 불후의 명저(名著)이다. 사마천은 “어떤 사람의 죽음은 태산처럼 거룩하고, 어떤 사람의 죽음은 깃털처럼 가볍다”라는 좌우명으로 살았다. 그때 사마천이 만약 궁형이라는 치욕을 감수할 수 없어 죽음을 선택했더라면 그 의 죽음은 깃털처럼 가볍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차라리 죽 는 것보다 더 치욕스러운 궁형을 선택함으로써 사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세계의 역사를 보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수모 를 당하면서도 위대한 족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다. 지동설을 주장 한 코페르니쿠스, 구 소련 시절의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 중국 문 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에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수모를 당 했던 중국의 지도자 등이 이에 해당한다. 모택동을 비롯한 이른바 ‘4인방’의 힘을 등에 없고, 무소불위로 날뛰던 홍위병들은 대통령에 준하는 직위에 있던 류소기 국가주석 을 가죽허리띠로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류소기는 결국 홍위병들 의 매에 맞아 사망했다. 중국공산군을 창건한 하룡 원수도 밥을 주 지 않아 굶어죽었다. 중국 남송시대의 문천상(文天祥)은 원나라 침략군에게 포로가

282


되어 토굴 속에 갇혀 지냈다. 원나라는 문천상에게 감언이설로 회 유(懷柔)를 했지만 그는 끝내 변절하지 않고 의로운 죽음을 맞이 했다. 그는 죽기 직전 “사람은 어치파 죽기 마련이다. 일편단심으 로 역사에 남으리”라는 유서를 남겼다. 나는 이것을 ‘역사의식’이 라고 하고 싶다.

참여 정부 시절에는 유난히도 우리 사회 지도자들의 자살이 많았 다. 정치가, 대학총장, 굴지의 기업가 등이 자살을 했다. 마침내 전 직 대통령까지 자살을 선택하고 말았다. 물론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으면 그렇듯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국민들에게 상당한 영향력 을 끼칠 수 있는 지도자들은 자살이라는 선택을 쉽게 해서는 안 된 다고 생각한다. 지도자의 목숨은 자기 것이지만, 자기 마음대로 결 정해서는 안 된다. 당시의 사마천도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렇 지만 사회와 국가, 그리고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공인으로서 의 책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수모를 견뎠던 것이다. 지도자에게 있어서 ‘현실회피’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지도자 가 현실회피를 하는 것은 ‘역사의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83


‘토지’의 작가 박경리도 자신이 힘들 때면 사마천을 생각하며 글 을 썼다고 한다. 작가 박경리가 사마천을 생각하며 글을 쓴 것은 작가의 ‘역사의식’이라고 생각한다.

284


대학수학능력시험과 학교 교육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 의 교육을 보면 우왕좌왕 수시로 변하는, 그야말로 조변석개(朝變 夕改)하고 있다. 특히, 고등학교 교육은 대학의 입시 과목에 따라 요동을 친다. 서울대가 2014학년도부터 모든 계열의 응시자는 한국사를 이수 하라고 했다. 대학입시에서도 한국사를 비중 있게 다루겠다는 뜻 으로도 해석이 된다. 보나마나 학교 현장에서는 한국사 시간을 대

285


폭 늘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세계사에 대한 언급은 없다.

21세기는 글로벌시대이다.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 되었다. 앞으 로 지구촌을 살아가야 할 우리의 청소년들이 세계사에 대한 인식 이 없다면 글로벌시대에서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한국사를 공부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일이다. 그렇 다면 세계사 공부는 한국인의 정체성 형성과는 무관한 것일까. 아 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사와 세계사를 고루 공부했을 때 온전한 정 체성 형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편식(偏食)을 하면 건강을 해 친다. 공부 역시도 편중하면 폐해를 낳게 된다. 대학 입시 요강과는 무관하게 세계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필수 과목으로 지정한 고등학교도 많다. 만약 세계사가 대학입시에서 별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면 이런 학교에서 세계사 시간에 다른 과목 교과서를 펴놓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대 학수학능력시험에서 선택하지 않은 과목을 공부하는 것은 헛수고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에서 탁월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는 DJ는

286


세계사에 능통한 분이다. 나는 DJ 정부 시절 행자부 장관을 지냈 다.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러 갔을 때, 종종 세계사 강의를 듣기도 했다. 나는 DJ가 국가의 지도자로서 깊은 혜안(慧眼)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세계사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나라에서 세계사를 고교 필수과목으로 정해놓고 있다. 미 국, 중국, 일본, 유럽 등 강대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은 세계사 교육 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의 역사 교육은 자국 의 역사[國史]가 아니라 세계사를 가르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나라들은 우리보다 앞서 세계로 진출했다. 지금도 일본의 극 우 정치인과 학자들은 조선의 식민통치를 ‘진출’이라고 망언을 하 는데, 그들이 우리를 식민통치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보다 먼저 세계사를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세계사를 대학입시에서 제외시켰다는 것은 너무도 단세포적(單 細胞的)인 발상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수능시험에서 학생 들의 공부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그런다는 것이다. 물론 세계사 가 한국사를 공부하는 것보다 내용이 많아 시간도 많이 들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글로벌시대를 살아갈 우리 청소년들을 우물 안의 개구리로 만들 것인가.

287


우리는 지금 다문화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백의민족(白衣民族)’ 이라는 말조차 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우리의 청소년들이 활동할 무대는 한반도가 아니라 지구촌이다. 대학입시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학교 교육을 보면서, ‘교육백년지 대계(敎育百年之大計)’의 진리를 다시 생각해 본다.

288


낙태(落胎), 혹은 인공임신중절(人工姙娠中絶)

‘낙태(落胎)’와 ‘인공임신중절(人工姙娠中絶)’은 같은 뜻의 말이다. 그런데 낙태라고 하면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 이고, 불법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데 임신인공중절이라고 하면 합법적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70년대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던 무렵 ‘가족계획’이라는 말이 등장 했다. 이 제도의 핵심은 ‘산아제한(産兒制限)’이었다. 인위적으로 출산율을 억제하는 일이었다. 이 시절 표어도 아주 노골적이었다. ‘무턱대고 낳다 보면 거지신세 못 면한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289


‘둘도 많다’ 등 그야말로 노골적이고 선정적이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저출산(低出産) 문제가 우리 사회의 큰 과 제로 떠올랐다. 저출산으로 인해 나라의 경쟁력이 우려되기 때문 이다.

산아제한을 장려하던 그 시절 국민들은 낙태를 아주 가볍게 생각 했다. 산부인과 의사들의 불법적인 수입원이 되기도 했다. 생명의 가치가 왜곡되던 시대였다. 정부도 이에 대해 지도감독을 강화하 지 않았다. 묵인하는 태도도 없지 않았다. 낙태는 글자 그대로 잉태된 태아를 강제로 떨어뜨리는 일이다. 좀 더 확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살인이다. 이런 엄청난 일을 일말의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당사자와 산부인과 의사는 저질렀다. 그런데 2010년 들어 정부는 ‘불법 인공임신중절예방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2년여 걸쳐 종교계, 여성계, 의료계 등 여러 사회분야가 이 문제에 논의를 했고, 정부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불법 인공임신중절예방 종합계획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생명존중 차원 에서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것은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의욕만 가지고 당장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290


본다. 각자가 처한 입장도 고려해야 한다. 원하지 않은 임신으로 인공임신중절을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게 정책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 재학생이 임신한 경우에는 학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한다. 저출산을 극복하는 인프라 구축도 따라야 한 다. 현실적으로 볼 때, 정상적인 부부라 해도 출산을 꺼려 인공임신 중절을 고민하는 경우도 많다. 양육의 부담, 일과 가정을 병행해야 하는 문제 등으로 출산을 꺼려하고, 임신을 했더라도 인공중절을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정부가 다자녀 가정이나 맞벌이 가정에 대 한 지원을 해 주는 것을 보편적 복지로 인식해야 한다. 또한, 환경 이 열악한 산부인과 병원의 경영 개선을 위하여 건강보험 수가를 인상해 주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중요하다. 청소년의 임 신, 미혼모의 임신 등을 죄악시 하거나 부도덕하게 보는 편견을 버 려야 한다. 어떠한 경우든 생명은 존엄한 것이므로, 본의 아니게 임신한 경우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물론 청소년이나 미혼모들의 임신은 개인적인 삶에 저해요소로 작용할 수 있으므로 미연에 임신을 방지하는 교육도

291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이미 선진국대열에 들어섰다. 경제적인 외형확대 만 을 가지고 선진국 운운할 수는 없다. 생명이 존중되는 사회가 되었 을 때, 대한민국은 일류국가로서 진일보하게 될 것이다.

292


보편적 복지

서울시가 학교 무상급식 전면 실시를 놓고 격랑에 휩싸였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무상급식 전면실시는 복 지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며, 이로 인해 국���의 경제가 파탄되어 국가부도사태가 일어날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오세훈 전 시장은 이 문제를 놓고 주민투표를 감행했다. 여기서 감행이라 는 표현을 쓴 것은 당시, 같은 당 지도부에서조차 만류했던 일을 오 시장이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기 때문이다. 오 시장은 이 문제를 주민투표에 붙이면서 시장의 자리까지 걸었

293


다. 눈물을 흘리며 기자회견을 했다. 이 무렵 어느 네티즌은 오 시 장의 처사에 대해 “밥 달라고 우는 사람은 보았어도, 아이들 밥 못 주겠다고 우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비난조의 댓글을 올렸다.

우리에게도 정말 배고픈 시절이 있었다. 6.25 전쟁으로 나라가 폐허가 되자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것은 배고픔이었다. 미국이 지 원해 주는 구호식량으로 연명을 했다. 그 시절에 학교에 다녔던 사 람들은 옥수수죽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가축 의 사료로 쓰이던 옥수수가루를 가져와 죽을 끓여 학생들에 먹였 다. 일종의 무상급식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은 너나없이 가난했으 므로 그런 상황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요즘에도 끼니를 굶는 아이들이 있다. 이들 아이들은 방 학 때가 되면 끼니를 거르기 일쑤라고 한다. 그래서 정부는 소년소 녀 가장, 조손 가정, 한부모 가정에 대해 무상으로 급식을 했다. 그 런데 한나라당은 2010년 예산국회를 단독으로 강행처리하며 이 예산을 전액 삭감해 버렸다. 그들은 6.25 직후 배고픔을 뼈저리게 체감했던 사람들이다. 뼛속깊이 고통을 체감했던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상급식 지원 예산을 깡그리 없애 버린 것이다.

294


그래 놓고 뉴욕의 한식당 개업을 지원하기 위해 50억 원을 날치 기로 통과시켰다. 뉴욕의 이 한식당은 대통령의 부인이 주도하는 한식 세계화 추진 사업의 일환이라고 한다. 국민을 바라보는 정치 가 아니라, 청와대만 바라보는 한나라당의 정치 행태를 극단적으 로 보여 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당의 복지정책은 그야말로 갈팡질팡이다. 오 시장이 결사 항전의 자세로 무상급식 폐지를 주장하고 있을 때, 누구보다도 열 렬히 지지해서 ‘오세훈 아바타’라는 별명을 얻은 나경원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는 슬며시 복지를 내세웠다. 표를 구하기 위한 꼼수 라는 것을 모르는 국민들은 없다. 만약 당선이 되면 언제 그랬느냐 고 말 바꾸기를 할 것이라는 것도 국민들은 잘 알고 있다.

한나라당은 학생들에 대한 전면적 무상급식 실시를 사회적 약자 에 대한 지원이라고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보편적 복지를 뛰어넘는 국가정책으로 보아야 한다. 무상급식은 의무교육 과 연계된 교육의 일환이다. 아이들을 건강하게 기르는 것은, 교과 지식을 가르치는 것과 똑같이 중요한 일이다.

295


물대포

경찰은 한미 FTA 비준 반대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에게 물대포를 쏘았다. 물대포는 1960년대 미국에서 처음 사용하였는데, 우리나라에는 1980년대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명 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촛불시위 현장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물대포를 맞은 사람들은 수압이 강해 맞으면 쓰러질 정도이며, 몽 둥이로 가격당하는 것처럼 고통도 크다고 한다. 한미 FTA 비준 반대 집회 시민들에게 물대포를 쏘던 날은 체감 온도가 영하 6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물을 뒤집어 쓴 시민들은 살

296


이 에이는 듯한 통증을 느꼈을 것이다. 인권위원회가 인권 침해가 우려된다는 지적을 했다. 이 지적에 대해 경찰은 정당한 절차를 밟 았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된다고 했다. 그러다가 비난 여론이 확산되 자 앞으로는 외부 기온을 고려하겠다며 자세를 낮추었다. 외부 기 온을 고려한다는 것은 따뜻한 날씨에는 물대포를 쏘겠다는 말이 된다.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이 어떻게 국민을 무시하는 발언을 거리 낌 없이 할 수 있는 지 참으로 끔찍하다. 경찰이 이런 발언을 서슴 없이 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후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최근의 집회나 시위를 보면 폭력성이 많이 감소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의 강경진압은 여론의 동의를 얻어 낼 수 없다. 정당한 법집행을 내세워 강경진압을 일삼는 경찰은 ‘민중의 지팡 이’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민중을 때려잡는 몽둥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해방 이후, 3공, 5공, 6공을 거치면서 우리 경찰의 시위 진압장비 는 진화를 거듭해 왔다. 최근까지 시위 현장에서 맹위를 떨쳤던 CS최루탄과 최루액은 인체 유해성 때문에 사용을 중단한다고 한

297


다. 그런데 ‘파바’라는 새로운 물질이 나와 최루탄 대용으로 쓰이 게 되었다. 경찰은 시위 진압 시 살상용 무기에 가까운 위해성 물질과 장비 를 동원한 적도 있다. 촛불집회 때 사용했던 하론소화기와 쌍용자 동차 사태 때 사용했던 테이저건(전기충격기)이 대표적인 예이다. 하론가스는 몸에 닿으면 가려움증과 통증을 유발시킬 뿐만 아니라 기관지나 심장에도 심각한 해를 입힐 수 있는 독성물질이다. 테이 저건은 일시에 5만 볼트의 전류를 발생시켜 일시적으로 근육을 마 비시키기도 한다. 애민(愛民)하는 마음이 있다면 도저히 할 수 없 는 일이다.

사람 사는 동네에 왜 대립과 갈등이 없겠는가. 이 대립과 갈등이 대화로써 해결이 안 될 때 민중들은 집회와 시위라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집회와 시위의 발생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사회가 발전하면, 따라서 시민 들의 불만 표출방법도 성숙되어야 한다. 나는 우리 시민들의 의식 이 많이 성숙되었다고 본다. 촛불집회는 문화행사와 같았고, 그 현장은 고대 그리스 도시에서 시민들이 모여 다양한 활동을 하던 야외 공간인 아고라(agora)를

298


연상케 했다. 그런데 경찰은 물대포를 쏘았다. 시민의식은 발전하 는데 공권력의 의식은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질서유지를 위해 불 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항변할 지도 모른다. 어쨌든 진압에 있어서 인권침해의 우려는 없는지 깊이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99


사진으로 보는 의정활동

태풍 메기로 인한 지역구 피해 현장 (2004.8)

나주쌀 홍보 판매 (2004.9)

“나의 의정활동의 근간은 사회와 국가, 일, 사람이다. 나는 국회의원으로서 소임을 다 하기 위해 늘 그 현장으로 달려갔다.”

화순군 수매현장 (2004.10)

300

국정감사 우수의원 수상 (2005.11)


김대중 대통령 방문 (2005.12)

나주 폭설 피해 현장 (2005.12)

화순 어린이들과 함께 (2006.4)

화순 녹십자 백신공장 기공식 (2006.12)

남평읍 어버이날 어르신들과 함께 (2007.4)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및 재협상 촉구 결의대회 (2008.5)

301


사진으로 보는 의정활동

지역특산품 판촉행사 (2008.5)

언론악법 날치기 만행 규탄 농성 (국회 본회의장 앞, 2009.7)

화순 도암 노인정에서 지역 어르신들과 담소 (2009.12)

정운찬 국무총리, 박준영 전남지사와 함께 혁신도시 홍보관 방문 (2010.1)

화순군 직원 한마음대회 (2011.6)

화순군민종합문화센터 준공식 (2011.7)

302


화순 운주문화축제(2011.9)

한미 FTA 비준 반대 시위(2011.10)

한미 FTA 여야정협의체 회의 참석 (2011.10)

한미 FTA 피해보전대책 마련 촉구 김황식 총리 방문 (2011.10)

8년 연속 국정감사 우수의원상 수상 (2011.11)

시진핑 중국국가부주석 면담 (차기 중국 최고지도자)

303


5장

발언록 연설문


제268회 국회(임시회)비교섭단체 대표 연설문 / 2007년 6월 11일

중도개혁세력 대통합이 희망입니다

「민주당은 김대중 前대통령의 위업을 계승 발전시키고, 6월 항쟁의 정신을 구현하는 정통성을 지닌 유일한 정당입니다」 이 시점, 우리는 또 한 번 지난날을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6월 항 쟁 이후에도 이 나라에는 권위주의와 정치적 패권주의가 위세를 부렸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6월 항쟁으로부터 무려 10년이 더 지난 1997년 김대중 시대의 개막으로 꽃을 피웠습니다.

김대중 시대는, 일부 세력의 온갖 악의적인 선동과 폄하에도 불 구하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패러다임을 완벽하게 만들었습니다. 대북정책의 새 장을 열었으며, 분단 50년사를 경계 짓는 남북정 상회담을 성공시켰습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제정하여 복지

307


국가로 나아가는 빛나는 랜드 마크를 건축하였습니다. 이 나라 모 든 국민은 인간답게 삶을 영위할 권리와, 적어도 기회만큼은 누구 에게나 공정하게 보장되는 정의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민주당은 이와 같은 김대중 시대의 위업을 계승 발전시키는 유일 한 정당이며, 따라서 6월 항쟁의 정신을 구현하는 정통성을 지닌 유일한 정치세력임을 이 자리를 빌어 자신 있게 말씀드리고자 합 니다. 노무현 정권은 바로 이 토대 위에서 민주당이 국민과 함께 탄생시킨 정권입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6월 항쟁 정신을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잘못된 이념과 무능하기 짝이 없는 아마추어식 국정 운영, 그리 고 원칙도 기본도 없는 포퓰리즘으로 민주화 세력 전체를 곤혹스 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국가성장동력을 창출하지 못 한 채 사실상 뒷걸음질 쳤습니다. 중산층은 서민으로, 서민은 빈민 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가계 빚은 갈수록 늘어나 사상 최대치를 계속 갱신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 출범 직후부터 벌어진 배신과 분열의 줄거리를 새삼 스럽게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한나라당에 제의한 이른바 대연정을 비롯한, 뭐라고 형언할 수조차 없는 정치놀음을 떠올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308


지난 4년 반 동안 한시도 바람 잘 날 없는 우리나라의 이 현실은 바로 6월 항쟁의 정신을 망각하고 국민이 만들어 정권을 극소수 이념세력의 전리품으로 생각한 죄과이며, 따라서 당연한 결과라고 본 의원은 생각합니다.

「언론의 자유는 반드시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입니다」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지금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근간이 뿌리 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가장 소중한 기둥인 언론의 자 유가 기로에 서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았다면 노무현 정권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노무현 정권은 바로 언론이 탄생시킨 정부이며, 언론의 자유는 87년 6월 항쟁으로 우리 국민이 쟁취한 가장 역사적인 업 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정권이 언론을 옥죄고 있습니다.

끝이 없는 정권의 실정(失政)과 대통령의 자아도취적인 모습을 여과 없이 그려냈다고 해서 과거 군사정권이 하던 똑같은 짓을 하 고 있습니다. 참으로 서글프고 우스운 일입니다. 4년 내내 정치권 을 무시하고 언론을 무시하더니 이제는 아예 국민과 역사마저 무

309


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는 언론기관이나 기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 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서, 그리고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 니다.

누구보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을 노무현 대통령이 이런 저급한 횡포를 부리고 있는 데 대해 본 의원은 분노합니다. 용납될 수 없 는 일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 시대 국운을 책임진 지도자로서 그나마 명예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그 칼을 거두어들일 것을 충고 합니다. 6월 항쟁의 날에, 6월 항쟁에 빈진 정치인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 을 겸허하게 되돌아보기를 진심으로 촉구합니다.

「대통령은 선거개입을 즉각 중단하고, 법과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대통령은 다시는 선거에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국민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판정에 대해서 미흡하다고 생각하는 데, 대통령은 오히려 이를 무시하고 선관위의 결정을 정면으로 부 정하는 것은 물론 공개비난까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헌법수호 의 책임이 있는 대통령이 헌법기관을 무시하고 법률 지키기를 외

310


면하는 행위는 국기문란 행위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런 대 통령은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헌법을 무시하는 이러한 행태를 즉극 중단할 것 을 촉구합니다.

우리가 대통령의 정치 중립과 선거불개입 원칙을 금과옥조(金科 玉條)로 아로새기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선거판에 뛰어들었습니다. 대통령 후보를 모욕하고 자의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국민을 선동하 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대통령이 선거판에 무슨 바람을 일으키 고 억지를 부릴지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제부터라도 법과 원칙을 지켜 대통령 선거에 절대로 개입하지 말 것을 강력히 경고하는 바입니다.

「중도개혁세력이 정권을 담당해야 지속적인 국가발전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대통령 선거가 이제 6개월 남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나라당 혼자서 대통령 선거를 하는 듯한 이상한 현 상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현 시점에서 한나라 당 후보가 대통령에 선출될 것으로 믿는 국민이 압도적으로 많습

311


니다. 이렇게 된 것은 노무현 정권의 업보 때문입니다. 국민 통합 에 실패하고 경제를 망친 결과입니다. 그래서 냉정하게 볼 때 앞으로 10년은 더 근신하고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할 한나라당에 수구세력뿐 아니라 건전한 양식을 가진 국 민도 어쩔 수 없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라고 본 의원은 생각 합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는 이제부터입니다. 중도개혁세력은 서민과 중산층을 중심으로 하는 균형 잡힌 장기 비전과 김대중 시대에 증명된 국가운영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민 앞에 떳떳한 도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이 땅에 뿌리내렸으며, 대북 정책에 있어서는 진취적인 철학과 업적을 갖 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동안 중도개혁세력의 결집을 막았습니다. 이 정권에 실망하고 지쳐 중도개혁세력에 관심을 끊은 사람이 있으며 이럴 바에 차라리 한나라당이 낫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도개혁세력은 결국 다시 결집할 것입니다. 역사의 소명 을 스스로 걸머진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중도개혁세력은 이 나라 가 수구세력에 의해 다시 70년대로 거꾸로 가는 것을 막아낼 것입

312


니다. 민주당은 흩어진 중도개혁세력을 재결집 하는데 총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중도개혁세력이 중심이 되는 것은 세계적 추세이기도 합니다.

「민주당이 대표하는 중도개혁세력은 민주주의를 심화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경제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민주당이 대표하는 중도개혁세력은 민주주의를 심화 발전시키면 서 동시에 경제를 살려낼 것입니다. 지금 노무현 정권에 대한 좌절감 때문에 우리 사회에 일종의 경 제지상주의(經濟至上主義) 바람이 일고 있습니다만, 우리 모두는 이 현상이 내포한 위험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 을 잘못 관리하면 필경 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이것 은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경험이기도 합니다. 이 나라 정치를 송두리째 수구세력에게 넘겨주기 원치 않는 모든 세력은 중도개혁의 기치 아래 하나로 모여야 합니다. 이것이 대통 령 선거를 앞둔 이 시점에서 수구세력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부 하된 책무입니다. 이 역사적인 과업을 위해서도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313


책무를 의연하게 수행해 주기 바랍니다. 대통령의 잘못된 행태가 결국 수구세력에게 크나큰 이익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아 주기 바랍니다.

「한미 FTA 협상내용은 심각한 문제가 많습니다. 철저한 대책 마련 후 국회비준 동의를 요청해야 합니다」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여러분, 민주당은 무역 의존도가 높은 우리 나라가 경제발전과 국가안보전략 차원에서 세계 모든 국가와 FTA를 체결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한미 FTA는 몇 가지 중요한 문제점이 있어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민주당은 한미 FTA 협상이 시작된 이후 지난 1년 반 동안, 첫째, 시한에 쫓겨 서둘러서 졸속체결을 하지 말 것 둘째, 산업분야별 손익계산서를 국민에게 명확히 밝히고,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할 것 셋째, 농업분야와 같은 피해산업에 대한 피해보상은 물론 소득보 전과 관련산업 강화대책을 적극 강구할 것 등 3개 사항을 줄기차 게 요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어느 것 하나 명쾌하게 국민들을 납득시키지 못 한 상황에서 협상의 최종서명 시한인 6월 30일이 다가오고 있습니

314


다. 민주당은 따라서 피해대책이 마련되고 국민적 공감대를 이룬 후 비로소 FTA 비준동의안 찬성여부를 검토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한미 FTA 무효화 투쟁에 앞장설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한미 FTA로 농민이나 축산업 종사자는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경쟁력이 약한 중소기업, 특히 금속이나 기 계정비 업종 역시 피해가 불가피해 보입니다. 일부 농어업, 제약 (製藥)과 의료, 문화산업, 방송산업 등에서 그 피해가 만만치 않을 전망입니다. 단기간에 미국과의 격차를 따라잡기가 어렵기 때문입 니다. 정부는 국회에 비준동의안을 제출하기에 앞서 협상결과의 철저 한 공개와 공개적인 검증절차 이행, 정확한 손익계산 등에 따른 국 익옹호대책을 마련할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합니다. 위기와 기회는 공존합니다. 우리의 국익과 통일 이후 국가전략과 연계해 대승적이고도 창조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개성공단 등 북한의 생산제품에 대하여서도 반드시 한국산 인정을 받아낼 것을 정부에 촉구합니다.

315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정부가 2.13 합의 이행을 이유로 40만 톤의 대북 쌀 지원을 연기 한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입니다. 북핵 폐기를 위하여 2.13 합의 이행을 우리가 촉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쌀 지원은 그 근 본이 인도적인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인도적 지원이 아니라면 국 민이 어떻게 그것을 지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정부가 하고 있는 이른바 연계론은 한나라당식 상호 주의에 불과합니다. 상호주의로는 우리의 대북 지원의 도덕적 정 당성을 확보할 수 없으며, 인도주의의 숭고한 정신을 퇴색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6자 회담에 반 발 뒤쳐져 남북관계를 이끌어가려는 이른 바 ‘출구론’적 발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정치군사, 경제협력, 사 회인도적 문제를 각각 분리하여 남북평화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 해 나가야 합니다. 인도적 차원에서 약속한 쌀 지원을 빠른 시일 안에 실행할 것을 촉구합니다.

「국무위원은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 소신 있는 언론대책을 펴야 합니다」 본 의원은 최근 이른바 ‘취재 지원 선진화 방안’과 관련하여 이 나라 행정부 전체가 보이고 있는 졸렬한 행태를 보면서, 총리 이하

316


국무위원 여러분에게 한 마디 충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행정부가 보이고 있는 홍위병적 행태는 참으로 개탄스런 일입니다. 임진왜란 직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조 선 정부에 요구하자 의병대장 조헌이 궁궐 밖에서 사흘 동안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고 청했던 지부상소(持斧上疏)까지는 기대하지 않지만, 최소한 대통령의 잘못된 인식에 대해 언급이라도 할 수 있 는 용기조차 아예 없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본 의원도 두 번의 국무위원직을 경험한 사람입니다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무위원은 법적으로는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지만, 국민 이 임명한 것이라는 사명감과 공복의식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대통령의 지시와 방침이라 하더라도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판단되는 일에 대해서는 옳지 않다고 지적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지난 5월 22일,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 에서 이른바 ‘취재 지원 선진화 방안’에 대해 자기 의견을 말한 국 무위원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 많은 국무위원은 다 어디 로 갔습니까?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통령 말씀에 “지당하십니다” 라고 확인이나 해준다면 이는 국무외의가 아니라 조선시대 ‘어전 회의(御前會議)’ 만도 못하게 전락된 것 같아 심히 개탄스럽습니

317


다. 정부가 이 모양이니 어느 국민이 지금 대통령과 국무위원 여러분 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총리 이하 국무위원 여러분이 국정과 국무위원직을 존중하는 원모심려(遠謨深慮)의 지혜를 가질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민주당이 중도개혁세력을 결집시켜 새로운 정권을 창출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6월 항쟁 이후 네 사람의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으면서 우리는, 대통령을 선출하는 일이 국가의 진운과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너무나 잘 알게 되 었습니다. 퇴행적 이념에 사로잡힌 인물, 국민을 편 가르고 갈라놓 는 인물, 글로벌 시대에 주판과 구식 부기와 땅 파기로써 경제를 살리겠다는 시대착오를 경계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만 잘 되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의 경제지상주의나 이념에 사로잡힌 정치만능주의가 아 니라,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중도적이고 개혁적인 통합의 리더십 입니다.

존경하는 선배 동료 여러분!

318


민주당은 며칠 전 중도개혁통합신당의 통합을 선언하였습니다. 민주당, 아니 중도통합민주당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중도개혁세 력의 대통합에 앞장서겠습니다. 중도개혁세력 대통합은 역사의 요 구입니다. 중도통합민주당이 국민들에게 희망의 대안세력으로 우뚝 서고자 합니다. 이 땅의 중도개혁세력들은 모두 중도통합민주당으로 모이 십시오. 문호를 활짝 열고 환영합니다. 중도통합민주당은 국민의 여망에 따라 국민과 함께 중도개혁진영의 대통합을 통하여 대선 단일 후보를 내세우겠습니다. 한나라당 후보와 1:1로 맞서 싸워 반드시 승리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시간은 충분합니다. 도덕성과 능력, 그리고 비전을 두루 갖춘 훌 륭한 리더십은 반드시 등장할 것입니다. 민주당이 해낼 것입니다. 중도개혁세력의 결집체인 민주당은 집권 경험을 살려 역사에 대한 무한책임으로 이 시대정신에 합당한 정권 창출을 위해 진력할 것 입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주당 부대표 최인기

319


제271회 국회(임시회)민주당 원내대표 연설문 / 2008년 2월 1일

농민, 서민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에게도 희망을 주는 국민통합의 정부를 기대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회의장,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여러분, 전남 나주 화순 출신 민주당 원내대표 최인기 의원입니다. 「새 정부 경제성장 만능주의 우려스러워, 농민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적극적 배려는 국민통합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새 정부 출범 25일 전입니다. 본 의원은 요즘 이명박 당선인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지지가 매 우 크다, 이제 뭔가 우리나라의 깊은 잠재력이 분출할 것 같은 분 위기도 있다 하는 느낌을 갖고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통령 당선인과 인수위원회가 경제성장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국가의 틀을 왜곡(歪曲)시키는 것 아닌가 하는

320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또한 너무 과욕(過慾)을 부리고 있다는 염려도 갖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새 대통령과 새 정부의 경제를 살리겠다는 의지, 경 제를 살리기 위해 역주하는 당선인의 모습에 국민의 기대가 큰 것 도 사실입니다. 여기에 여야(與野)가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그러나 본 의원은 한 시대, 한 정권의 할 일이 경제 하나만은 아 니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많다는 것과, 경제를 성장시키되 기본적인 정부의 기능과 역할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 적하고자 합니다. 본 의원은 대통령선거 종료 이후 이 나라가 너무 일률적이고 일방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경제성장 말고는 다른 모든 국가적 어젠다가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국민통합 어젠다가 사라졌습니다. 약자와 소수, 서민과 빈 곤층, 농어민, 그리고 이명박 당선인에게 표를 많이 주지 않은 지 역은 새 정부의 시야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어느 신문은 복지와 노 동, 환경과 여성이라는 말 자체가 비치기조차 않는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수한 목표와 과제와 수단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그 어디에도 우리 사회를 아우를 수 있는 포부는 발견할 수 없습니

321


다. 이명박 당선인은 지난 선거에서 자신이 집권하면 호남(湖南)을 동반자로 삼겠다는 약속을 분명히 했습니다. 호남이라는 지역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소외와 편견을 해소하고, 아우르고 통합 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고 본 의원은 생각합니 다.

그래서 본 의원은 지난 한 달 동안 인수위원회의 활동을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그러나 지난 한 달 동안 국민통합 네 글자는 찾아보 기 힘들었습니다. 5년 동안 추구해야 할 국정지표와 과제를 선정 하는 인수위원회의 활동에서도 진정한 통합의 의지를 읽을 수 없 었습니다. 지역균형발전전략으로 내놓은 이른바 5 플러스 2 광역경제권 구 상만 해도 영남은 두 개로 구분하고, 호남은 하나로 묶어 차별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자원과 예산 배분이 장차 어떻게 되리라 는 것을 능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국민통합에 대한 새 정부의 의지와 철학의 빈곤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라고 본 의원은 분 석합니다. 국가를 책임지고 막 출발하는 정권이라면, 기업과 성장 말고도 국민을 결집할 의지와 양극화 해소를 위한 정책수단들을 제시하는

322


것이 도리이자 책무라고 본 의원은 생각합니다.

이명박 당선인과 인수위원회는 이제라도 그간의 활동에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새가 하나의 날개로 날 수 없듯이 세상만사가 경제 하나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쪽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나머지 다른 중요 한 의제들을 망각하거나 치지도외(置之度外)하지 않았는지 성찰 하고, 이제라도 국정운영의 양대 기둥의 하나인 국민통합의 과제 를 무겁게 재인식해야 합니다. 「효율만 앞세우는 정부조직 개편안은 갈등을 키우고 권력독점을 부를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선배 동료 여러분, 지금 우리 국회는 정부조직 개편문제를 심의하고 있습니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의지만큼은 우리는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의지를 선의(善意)로 보고 싶고, 지지를 보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본 의원은 국회에 제시된 정부조직 개편안에 중대한 독소 가 숨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23


문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강한 것은 더 힘세게 만들고 약한 것은 더 약하게 만들었습 니다. 특히 농림해양수산 부문과 중소기업을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한미 FTA, 미국산 쇠고기 문제 같은 국민적 관심사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 듯이 피하고 있습니다. 둘째, 정부구조를 지나치게 기업형(企業型)으로 만들었습니다. 정부조직 개편안대로 한다면 이 사회는 기업형사회(企業型社 會)로 될 것입니다. 모든 중요한 가치들이 경제와 시장에 예속되고 말 것입니다. 기 업이 효율적인 조직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업 이 국가의 이상형은 아니라는 점은 반드시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 다. 세 번째 문제이자, 사실은 가장 큰 문제는, 인수위가 제시한 정부 조직 개편안은 청와대와 과두각료(寡頭閣僚)의 국정독점체제(國 政獨占體制)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선인과 한나라당, 그리고 인수위원회는 작은 청와대를 강조합 니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청와대가 아니라, 힘을 움켜쥔 거대한 청와대를 발견합니다. 외형은 축소되었지만, 축소된 외형 속에 가

324


려진 권력의 집중을 알 수 있습니다. 행정부도 그렇습니다. 부처 수는 줄였지만, 부처마다 몸집은 키 웠습니다. 그 대신 총리(總理)는 무력화되었습니다. 청와대, 기획 재정부, 지식경제부가 공룡처럼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부의 한두 사람이 과두각료독주체제(寡頭閣僚獨 走體制)를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40여 년 전, 개발독재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경제와 수출 만 내세우면 모든 잘못이 사면되고, 경제를 내세우면 모든 것이 정 당화되는 시기였습니다. 경제각료 한두 사람이 대통령의 위세를 업고 내각을 위압하던 시대였습니다. 지금 40여 년 전 그 모습이 재현되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반면에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많은 부처들이 희 생당했습니다. 융합이라는 이름으로 아직 필요한 부처들을 뚝뚝 잘라 무원칙하��� 여기저기에 분배했습니다. 기초보다 당장의 돈벌 이에 급급하는 벼락치기 기업을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 니다.

우리 민주당은 정부조직 개편안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통일부(統一部)를 해체해 버린 것은 지난 정부에 대한 폄훼(貶

325


毁)에서 비롯된 것이며, 한 시대를 부정하는 것이고, 국민의 통일 의지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본 의원과 민주당은 통일부의 기능과 역할을 일부 조정하는 데에는 찬성하지만, 통일부를 폐지하는 데 에는 찬성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 둡니다. 여성가족부(女性家族部)를 불과 7, 8년 만에 폐지하는 것은 천박 한 포퓰리즘의 결과입니다. 해양수산부를 폐지하는 것도 무책임할 뿐 아니라, 해양에 대한 비전을 포기한 것으로 비난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농촌진흥청 폐지는 시대역행적 발상, 한미 FTA에 대비해서도 살려야 합니다」 농촌진흥청을 정부출연연구소로 전환하겠다는 것은 시대역행적 이고, 위기에 처해 있는 우리 농업을 생각할 때 있을 수 없는 일입 니다. 이명박 당선인과 한나라당은 기회 있을 때마다 농업을 살리 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기다리는 농민들에게 농촌진 흥청을 사실상 폐지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지금 우리 농업은 한미 FTA 등 밀려드는 개방 파고(波高)에 대 비, 기슬농업을 강화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를 떠안고 있습니다. 이 를 위해 농촌진흥청 같은 국가기관의 기능 활성화가 최우선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술농업을 포기하겠다는 이명박정부의 정책에

326


본 의원은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명박정부의 농업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고쳐지지 않는 한, 앞 으로 있을 한미 FTA 비준 동의안에 대해서도 민주당은 절대 반대 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명확히 밝혀둡니다. 한미 FTA는 반드시 농업 등 피해분야에 대한 보상과 소득보전, 경쟁력 강화 대책이 마 련된 후에 비준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명박 당선인 취임도 하기 전부터 오만(傲慢)해서는 안 돼, 민주주의 위해서라도 국회 책무를 다 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정부조직 개편안을 국회가 원안대로 승인해 주지 않으면 장관 없 이 취임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언동이요, 민 주주의와 국회에 대한 위협입니다. 우리는 새 정부를 성원하고 싶습니다. 새 대통령에게 힘을 보태 주고 싶습니다. 경제를 살리는데 정파적 이해를 초월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오직 경제 살리기 목 표만을 위해 머지않아 국정(國政)이 파행되고, 권력이 지나치게 집 중 비대화되고, 그로부터 독선과 독주가 시작될 것이 눈에 보이는 데 어떻게 원안 그대로 통과시켜 줄 수 있습니까?

327


나중에 인사청문회 일정을 단축하는 일이 있더라도, 당선인 말대 로 장관 없이 대통령이 취임하는 사태가 빚어진다 해도, 국회는 국 회의 책무를 다 해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에너지 분야 등 공공성(公共性) 큰 공기업 민영화 논의는 당장 중단되어야 합니다」 공기업 민영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본 의원은 일부 공기업에 대한 민영화 방침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 시에 지적하고 싶은 것은 민영화는 경제 살리기의 금과옥조(金科 玉條)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럽의 많은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잘 나가는 신흥발전국 가들은 국가발전 동력의 상당 부분을 공기업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특히 공공성이 우선되어야 하는 부문의 민영화 논의는 당장 중지 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한전(韓電)의 민영화 논의는 한전의 역할과 경영실적, 그 리고 경쟁여건을 비롯한 모든 점을 감안할 때, 아무런 정당성도 발 견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한전의 민영화는 공적(公的)독점을 사적 (私的)독점으로 전환하여 특정 민간기업이 전력의 공급과 가격을 독점하게 함으로써, 필경 대다수 국민에게는 엄청난 부담과 희생

328


을 안겨주고, 특정 기업에게는 역사에 없는 특혜(特惠)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에 논의가 당장 중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낙후된 광주 전남 지역에 모처럼 획기적 지역발전에 대한 큰 기대를 주고 있는, 공공기관 이전을 통한 공동혁신도시 사업은 계획대로 차질 없이 추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당(一黨) 독주는 민주주의 위기 초래, 한나라당 견제 위해 모든 민주개혁세력은 대동단합해야 합니다」 국민 여러분,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당선인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70% 가까운 국민은 당선인을 지지하지 않았 거나 투표에 불참했습니다. 이 많은 국민들은 4월 총선에서 이 나 라 민주주의에 심각한 위기가 초래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한나라당이 지방정부의 90%를 장악한데 이어, 국회 마저 개헌선(改憲線)을 넘는 의석을 확보할지도 모른다는 분석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본 의원은 이러한 사태를 막아내기 위하여 모든 민주개혁세력이 대동단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만이 정상적인 정당정치를 보장하고, 부패와 독선, 나아가 권력남용을 방지할 수 있는 길이라 고 본 의원은 확신합니다.

329


솔직히 말씀드려 골리앗 앞에서 힘없는 사람들끼리 과거를 따지 고, 족보를 따지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난 일은 지난 일입니다. 추구하는 길도 크게 다르 지 않습니다. 모든 민주개혁세력은 한나라당 식의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가 아니라 좀 더 개혁적이고 좀 더 다양한 가치들, 즉 빈부격차 완화 와 양극화의 해소, 중산층과 서민 보호, 통일과 인권과 인간 삶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중도개혁을 지향합니다. 좌파도 아니고, 평등 주의도 아닙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노무현 정권의 국정실패에 직접 책임져야 할 인물들은 스스로 떠나고 있고, 앞으로도 더 떠나야 할 것입니다. 남은 과제는 기득권을 버리는 것입니다. 총선에 대패하여 국회까지 한나라당 일색으로 내줄 상황이라면 기득권이라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의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국민들 보시기에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 까?

뭉쳐야 합니다. 한나라당의 전횡과 독주를 막아내고, 서민과 중산층을 대변하고,

330


건전한 개혁을 부단히 추구하기 위해서는 민주개혁세력이 한 덩어 리가 되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민주개혁세력이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서 하나가 된다면, 국민은 한나라당의 독주 를 견제할 수 있는 의석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도 민주개혁세력이 그렇게 분열하지 않고, 대의(大義)를 중시했다면 그토록 참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번 에도 똑같은 어리석음을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민주개혁세 력 모든 지도자들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결단을 간곡하게 촉구 하는 바입니다. 「일방적 독선과 밀어붙이기는 국민이 용납 안 해, 진심 갖고 국민을 섬기는 겸손한 정부가 되길 기대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어려운 때일수록 정도(正道)를 걸어야 합니다. 지금 이 나라 경제 가 어렵습니다. 해외경제 환경도 매우 어둡습니다. 그래서 국민 여 러분은 이명박 정부에 더 기대하고 의지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명박 당선인이 이러한 국민의 높은 기대를 이용하지 말 것을 촉구합니다. 참답게 섬기는 정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길은 국회가 정부조직 개편안부터 적절하게 손질하는데 동의해야 합니다.

331


새 정부가 책임지고 할 테니 그냥 믿고 맡겨 달라는 식의 독선과 밀어붙이기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국민도 그것은 바라지 않을 것 입니다. 준비가 있는 곳에 미래가 있고, 미래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습니 다. 이 시대 정치인 모두가 국민과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마음 으로 미래를 준비해 나가야 합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332


대정부 질문 속기록 / 2011년 본회 김황식 총리 상대 질문

“농업은 생명산업이고, 식량안보가 지켜지지 못하면 나라가 안정될 수 없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그리고 국회의장과 홍재형 국회부의장님, 그리고 선배, 동료 의 원 여러분!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 여러분! 전남 나주, 화순 출신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장 최인기입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 농업은 식량의 안보와 국민의 생명을 유지, 발전시키는 생 명산업으로서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기 때문에 국가는 정책적으로 농업을 보호, 육성하고 지속적 성장, 발전을 위 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 국민적 공감대이고, 또 여러분 이집 트의 무바라크가 실각한 것은 소련의 밀 수출의 금지로 인해서 처 음에는 빵을 달라고 외치던 시위대가 나중에는 자유를 달라고 외

333


치면서 무바라크 정권이 실각한 예에서 보듯이 바로 식량안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이명박 정부는 농업에 대해서 무 성의하고 무책임하고 농정 현안이 생겨도 대책을 제시하지 아니하 고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아니하는 이런 농정 패러다임에 대해서 한 국 농정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국회 농림수산위원장으로서 책 임을 느끼면서 이 정부에 농정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기를 강력 히 요구하기 위해서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우리 국무총리를 비롯한 이명박 대통령, 그리고 국무위원 모두의 농업에 대한 의식의 개혁을 강력히 촉구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섰 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드립니다.

국무총리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김 총리께서 특유의 성실성과 덕망을 가지시고 국정 여러 분야를 챙기고 있는 점에 대해서 나름대로 격려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만 김 총리께서는 이명박 대통령께서 후보 시절에 농업에 대해서 공 약하신 10가지 공약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334


김황식 총리 : 예, 제가 농림부로부터 보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대강 중요한 것이 어떤 것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까?

김황식 총리 : 기본적으로는 농업도 산업으로서 경쟁력 있게 해 나가기 위한 각종 사업인데 쌀 식량자급률을 높이는 문제, 유통구 조 개선 문제, 그 밖에 특수작물 등등 여러 가지로 기억을 하고 있 습니다.

아마 보고를 받으셨어도 정확한 보고를 받지 못했거나 정확히 기 억을 못 하신 것으로 제가 생각을 합니다. 대통령께서 후보 때 공 약한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우선 농가의 부채를 동결하겠다, 그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FTA는 선 대책을 세우지 아니하고 논의를 하지 않겠다, 하는 것이고, 아까 말씀했던 사안은 후순위에 있는 사항들로 제가 기억을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립니다. 이명박 대통령께서는 후보 시절에 농촌에 살아도 살맛난다, 농업 도 돈을 벌수가 있다 하는 농촌으로 바꾸겠다고 공약을 내세웠고 농민들은 사실 이명박 대통령의 그런 의지에 대해서 대단한 기대 를 걸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335


농가부채 동결법은 다름이 아니고 현재 농가가 지고 있는 농가의 부채에 대해서, 현 수준에서 동결하고 그리고 20년 분할상환 조치 를 하면서 필요한 이자는 국고에서 부담해서 지원을 하겠다, 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마는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농가부채에 대 해서 정부의 대책이 없고 어느 각료 누구도 농가부채 문제를 정부 단위에서 사회적 이슈로 제시한 적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 을 드리면서 이제 2년 남짓 못 남은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중에 농 가부채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할 수 있다고 총리께서는 생각하고 계시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국무총리 김황식 : 대통령의 공약사항에 농가부채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가부채 동결 법을 제정해야 되겠지만 그런데 실제로 농가의 악성부채가 그렇게 많지는 않기 때문에 특별법 제정을 할 정도의 필요성은 크지 않지 만 대선공약의 취지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으로서는 농지은행이 부채가 많은 농가의 농지를 매입해 주고 따라서 농가부채를 상환하는 경영회생지원 농지매매사업을 통해 서 농가부채가 경감되는 그런 효과가 발생할 수 있도록, 말하자면 농지은행을 통해서 그 사업을 실질적으로 시행하는 그런 방책을

336


강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내용은 제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고요. 지금 농가소득을 2009년도 추계로 3080만 원쯤 추계합니다. 지금 농가 가구당 지 고 있는 빚이 3200만 원이 넘습니다. 1년 내내 벌어도 진 빚을 갚 을 수 없는 수준의 농가부채는 악성 여부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대 단히,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정부의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해결하기 어렵다, 저는 기본적으로 그렇게 보고 있고 또 농 가부채 문제에 대해서 대통령이 공약을 했지만 그동안 동남권 신 공항 문제라든지 세종시 문제에 대해서는 지역별로 엄청난 저항과 사회적 이슈로 제기될 때에는 사과도 하고 또 정부가 함께 걱정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사회적 약자인 농민, 말 없는 300만 농 민의 그 목소리에 대해서는 누구도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 그 런 점에 대해서 정부의 행태를 개선할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합니다. 다음으로 FTA 체결에 있어서 정부는 4월 국회에서 FTA를 비준 까지 처리하겠다, 하는 방침을 천명하고 있습니다마는 FTA 문제 도 대통령 공약에서 보면 선 대책, 후 논의를 하겠다 하는 것이 바 로 대통령의 공약입니다. 그리고 어제 총리 답변에서도 FTA 대책 으로써 그동안 21조 원의 투융자사업 계획을 수립했었고 또 한-

337


EU 간 FTA에 있어서도 2조 원의 별도 대책을 수립했다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저는 농업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 는 전문가적 검토를 해 보면 이것은 기존 사업을 묶어서 통계를 제 시한 것에 불과하고 새로운 사업이 거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 드리고, 이제 한-EU 간 FTA가 체결이 되면 정부가 인정하듯이 연간 1900억 정도의 농가의 소득 손실이 옵니다. 또 한-EU FTA가 추진될 경우에, 한미 FTA 6700억 이와 같은 일방적인 농민의 피해를 가속화시킨다면 이것은 엄청난 농업 재앙 을 초래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사전대책 없이 체 결하는 것은, 더구나 이번 4월 국회에서 처리하려고 하는 이 방침 은 온당치 않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선 대책, 후 비준 방침은 민 주당 당론이기도 합니다마는 농림수산식품위원장인 저로서도 4월 임시국회에서의 한.EU 간 FTA 체결에 대해서는 절대로 반대합니 다. 엄청난 저항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정부에 엄중히 경고를 하면 서, 그러면 정부는 선 대책으로 무얼 할 수 있는가? 할 계획을 가 지고 있습니까, 총리?

국무총리 김황식 : 예, 의원님께서도 말씀하시다시피 2007년 그

338


리고 2010년에 21조, 2조의 대책을 세웠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의원님께서는 다른 견해로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우리 정부로서는 필요한 선 대책이었다, 따라서 결코 선 대책을 세우겠다 하는 취지 에 어긋난 것은 아니다 하는 말씀을 드리고요. 그리고 한.EU FTA 처리 문제와 관련해서는 정말 지난 2월 국회에서 문제됐다가 다시 4월 국회로 연기됐는데 다시 번역 오류 문제가 생겨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저희가 할 말이 없습니다마는 지금 여러 가지 무역 환경이 어려운 상황에서 큰 본질적인 내용에 문제가 없다고 한다 면 빠른 시일 내에 이것이 통과가 되어서 우리가 FTA의 선점 효 과를 거둘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 주시기를 바라고요. 그리고 FTA 발효 후에도 실제 발생하는 피해 상황 같은 것들은 저희들이 점검을 해 가면서 계속해서 보완을 해 나갈 방침이다, 하 는 말씀을 드립니다.

21조 원 사업과 2조 원 사업에 대해서 다시 얘기를 하셨지만 2조 원은 한-EU 간 FTA에 대비한 축산을 중심으로 한 구조조정 계획 인데 그 계획이 발표될 때에는 작년 10월이었습니다. 작년 11월 말에 발생했던 엄청난 국가적 재앙이었던 구제역, 열한 분의 생명

339


을 앗아갔으며 엄청난 재앙으로 5조 원 가까운 국가 손실을 입었 던 구제역에 대한, 축산 기반이 무너진 데에 대해서, 하나도 여기 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을 총리는 알고 계세요?

국무총리 김황식 : 예, 시기적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마는 저희가 최근에 축산업 선진화 대책을 내놓았습니다마는 그 구체적 인 내용에 대해서는 지금 검토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4월 말까지 디테일한 내용들이 나오고 계속해서 구 제역 사태에 따른 축산업 관련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에 계속해서 대책이 세워져야 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것은 별도로 계속해서 저희들이 대책을 마련하고 시행할 계획이다 하는 말씀을 드리기 때문에 지난해에 계획된 2조하고 이것은 별도다 하는 말씀을 드립 니다.

총리, 그것은 호도하는 것에 불과하고 지금 당장 축산 기반이 무 너진 상태 속에서 한.EU FTA가 다시 체결이 된다면 당장 피해를 입는 70~80%는 축산업입니다. 그것은 정부의 논리가 맞지 않습 니다. 구제역이란 엄청난 피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한 피

340


해 대책, 회생 대책 없이 또 FTA를 추진한다, 이것은 축산농민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정부에 경고하면 서 여기에 기획재정부장관도 계시지만 기본적으로 농가단위 소득 안정직불제라는 것을 조기에 실시해야 하고 또 피해보상직불제, 폐업지원제도의 운영, 배합사료의 영세율 적용 그리고 축산물 관 세의 축산발전기금에의 편입 이것은 정부가 이미 알고 있는 대책 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시행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이런 것을 시 행하지 아니하고 4월 달에 EU와 FTA를 체결한다면 저는 결코 용 인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다음으로 구제역에 대해서 그동안 엄청난 국가적 재앙으로서 건 국 이래 가장 컸던 재앙은 저는 바로 이번 구제역 사태라고 봅니다. 그리고 350만 두의 소와 돼지가 살처분되면서 매몰되던 그 목불인 견의 광경, 인간으로서 차마 볼 수 없었던 그 수많은 과정을 보면 서 피맺힌 축산인들의 절규를 보는 저는 정말로 한숨과 농업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정을 금할 수 없었던 적이 있었습니다마는 구 제역에 대해서는 결론적으로 많은 대책을 강구했었지만 제가 보기 에 이것은 계속해서 실패한 대책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 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 아는 것처럼 초동 원인규명에 실패했 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겠습니다. 초동 원인규명에 실패하니까 이

341


어서 초동에 선제적인 방역에 또 실패한 겁니다. 세 번째는, 정부가 매몰과 살처분 위주로 청정국가를 유지하려고 했었지만 결국은 호남을 제외하고 전국에 확산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이제 결과적으로 전국의 가축 소, 돼지에 대해 서 백신을 접종함으로써 백신을 접종하지 아니하는 청정국 지위도 잃었다, 엄청난 재정 손실과 청정국 지위도 갖지 못했던 두 가지를 다 잃어버린 실패한 대책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고 또 이것은 더 구나 지난해 1월에 포천과 연천에서 구제역이 발생됐고, 4월에 강 화에서 발생됐고, 11월에 안동에서 발생된 구제역이 경기도 파주 로 확대되면서 전국에 늘어나게 된 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2002년 구제역이 발생됐을 때 구제역백서를 만들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에 대해 서 작년에 세 번 발생할 때 하나도 지침대로 진행하지 못했던 그것 이 확대된 원인이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정부의 준비 부족으로 또 아마추어적인 대응방식으로 실효성을 거 두지 못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지적을 합니다. 영국에서도 엄청난 650만 마리를 살처분했었던 적이 있습니다. 영국은 곧바로 끝나면서 구제역교훈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잘 못된 점, 원인 분석, 정부가 해야 할 일, 축산농가가 해야 할 일 이

342


것을 매뉴얼로 반영해서 엄정히 대응해 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 기시키면서 총리가 주관이 돼서 이번 엄청난 구제역 사태에 대해 서 교훈적인 사안을 도출하기 위한 전문가와 농가대표로 구성된 검증위원회를 구성할 용의는 없는지 묻고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국무총리 김황식 : 구제역 발생원인 그리고 그 이후에 이루어진 모든 경과 대책의 미흡 이런 문제들을 통해서 저희들이 많은 교훈 을 얻었습니다. 이 교훈을 그야말로 실제로 활용하기 위해서 정부 로서는 지금 의원님께서 지적하시는 바와 같이 민관공동위원회를 만들어가지고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 점검을 하고 또 그 내용을 백서로 발간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민관공동위원회 구성은 4월 말로 예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서 이번 사태에서 얻은 것들을 미래에 교훈으 로 삼고자 하는 노력을 충실하게 해 나가겠습니다.

원인 규명과 또 이와 같은 재발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인력, 장 비, 전문가의 보강 이런 것에 역점을 둬 주기 바랍니다.

국무총리 김황식 : 예.

343


그리고 3월 국회에서 농협법이 개정이 된 것을 잘 아실 겁니다.

국무총리 김황식 : 예.

그때 농협이 농민이 생산한 농산물을 잘 팔아주는 농협이 되기 위해서 중앙회 사업구조를 개편하고 1 중앙회, 2 지주회사 형태로 하면서 금융은 독립시키면서 경제사업 위주의 주식회사 형태로 바 꾼 것은 잘 아시지요?

국무총리 김황식 : 예.

그 당시에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에서 통과시키면서 정부로 하여금 부족자본금에 대해서 추가 지원과 또 발생할 조세에 대해 서 조세 감면 등의 문제를 비롯해서 정부가 약속한 많은 사안들이 있습니다. 여기 후속조치에 대해서 총리께서도 그 당시 본회의에서 성의 있 게 하겠다는 답변 또 윤증현 장관도 유사한 취지의 답변을 했기 때 문에 이제 그 후속조치에 만전을 기해 줄 것을 약속할 수 있습니 까?

344


국무총리 김황식 : 예, 우선 지난번 국회에서 그야말로 우리 농업 인을 위한 농협의 개선책을 위원장으로 계시면서 그것을 주도해 주신 것에 대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경의를 표합니다. 그때 본 회의에서 제가 그 후속조치에 대해서 만전을 기하겠다 약속을 드 렸습니다. 부족자본 지원, 그밖에 조세 감면 등등의 모든 후속조치 가 약속한 대로 시행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후속조치의 추진을 위해서 농식품부에 농협중앙회 사업구조 개편지원본부를 설치했습니다. 여기에서 그 모든 후속조치 사업들 이 제대로 시행될 수 있도록 하고 또 총리로서도 정말 관심을 가지 고 수시로 확인하고 또 어떤 어려움이 없는지 도와가면서 법 개정 의 취지를 충분히 살려 나갈 수 있도록 각별히 노력을 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총리께서 농업에 대한 총리와 대통령 그리고 국무위원의 인식 개 혁을 위해서 노력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우선 농업의 발전 없이는 선진국이 될 수가 없습니다. 후진국이 공 업화를 통해서 중진국은 될 수 있겠지만 중진국에서 농업의 성장 을 동반하지 않고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세계의 발전 과 정을 보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G7 국가가 모두 농업 강국이라

345


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국무총리 김황식 : 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농업은 단순한 일차산품 생산에 그치지 아니하고 생 산.유통.가공.판매.식품 제조 등을 통틀어 보면 우리나라에서 총 GDP의 120조 원 정도에 이르는 GDP의 11% 정도에 해당하는 엄 청난 규모가 바로 농업 관련 산업입니다. 이 점도 알고 계신가요?

국무총리 김황식 : 예, 알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용구조에서 농산품 관련 연관 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17%에 해당합니다. 엄청난 고용효과도 큰 것이 바로 농업 이기 때문에 많은 선진국도 지금은 농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삼아서 진흥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또 일본, 사 르코지 불란서 대통령, 국가 어젠다가 농업을 통한 신성장동력의 확충에…… (발언시간 초과로 마이크 중단) (마이크 중단 이후 계속 발언한 부분)

346


두고 있다는 점을 총리는 아시는가요?

국무총리 김황식 : 예,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에 대해서 총리도 그와 같은 농업 구상의 의식개혁 을 위해서 국무회의와 대통령께 건의할 용의가 있는지 한번 묻고 싶습니다.

국무총리 김황식 : 대통령께서 총리에게 특별히 이 부분을 챙겨 달라는 말씀을 가끔 하십니다마는 그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농업 부분에 대해서 총리가 관심을 갖고 잘 좀 챙겨달라는 특별한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특히 농식품부하고는 자주 교류 를 하면서 여러 가지 필요한 보고도 받고 지시를 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명박 대통령께서도 농업이 새로운 성장산업으로서 발전해야 된다, 이런 생각을 가지시고 특히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이런 사업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말씀을 드리고 저도 그런 쪽에 각별히 노력을 하겠습니다. 특히 식품클러 스터를 조성한다든지 또 김치, 천일염 등 전통 발효식품을 세계적 인 상품으로 육성한다든지, 그밖에 다른 산업에 못지않게 R&D 투

347


자를 강화해서 농업이 경쟁력 있고 생산력 있는 새로운 산업이 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챙겨 나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시간이 지났지만 한 가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총리가 중심이 되어서 범정부적인 농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추진본 부를 구성해서 대통령과 총리가 챙겨 나가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 용의가 있는지, 또 해야 할 일로 저는 생각합니다. 농업이 1.2.3차, 6차 산업으로 발전하려면 총괄적인 그런 기능을 갖는 국가기구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검토하고 대통령과 상의할 용의 가 있습니까?

국무총리 김황식 : 예, 검토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농업은 생명산업이고 식량안보가 지켜지지 못하면 나라가 안정 될 수 없다고 하는 평범한 진리를 이 정부는 다시 한 번 인식해서 대통령과 국무총리 그리고 국무위원 모두가 농업을 위한 지도자로

348


서의 의식을 개혁해 줄 것을 마지막으로 부탁하면서 질의를 마치 도록 하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349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 위원장 발언 발췌 /

2011년 국정감사 마지막 날 상임위원장 최인기

개방 농정시대에 우리 농업의 경쟁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지금부터 헌법 제61조, 국회법 제127조와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의해서 농림수산식품부 등 13개 기관에 대한 2011년 도 국정감사를 계속해서 실시하겠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지난 9월 19일부터 3주 동안 농림수산식품부와 소 관기관, 자치단체 두 곳을 포함해서 15개 기관에 대해서 국정감사 를 실시한 바가 있습니다. 국정감사를 통해서 그동안 파악된 내용을 가지고 오늘은 종합감 사 성격의 감사가 진행된다는 점을 먼저 알려 드립니다. 농림수산식품위원 모두는 3주에 걸친 국정감사를 통해서 우리 농업환경이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데 인식을 함께하고, 특히 국내적으로 고령화, 이농현상, 기상이변 등 여건이 악화되면서 대 외적으로는 개방 농정시대에 우리 농업의 경쟁력을 어떻게 확보할

350


것인지에 대한 우려와 특히 생산의 위축과 소득의 감소, 그리고 다 른 변화, 부채의 증가 등 영농 상황의 악화에 대해서 앞으로도 계 속해서 악순환이 반복이 되는 데 대해서 많은 걱정을 하도록 한 점 이 공감대를 이루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15개 기관 국정감사를 통해서 농정 관련기관들의 농업 위 기에 대한 인식을 아직도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 었고, 농업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 배양과 농정 관련기관들의 책임감, 사명감, 극복 의지에 있어서 배전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는 점도 함께 공감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여건은 악화되는데 여기에 대한 대응할 수 있는 농정 관련기관 임직원 모두의 대처 의식에 철저함이 없다면 우리 농정은 지금보 다 더 악화될 수밖에 없는 그런 현실을 개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 다. 특히 지금 미국과의 FTA 추진을 미국 의회의 동향에 따라서 해 야 하는 이번 국회에서의 농림수산식품위원 모두의 책임과 사명감 은 너무나 크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종합 국정감사 를 앞두고 오늘 아침에 위원장인 저와 한나라당 강석호 간사, 또 김우남 민주당 간사와 함께 김황식 국무총리를 방문해서 그동안

351


농식품위원회에서 문제로 제기했었던 피해보전대책의 선강구에 대해서 아직도 실천되지 못하고 있는 13개 사항을 국무총리께 전 달하고, 정부의 성의 있는 검토와 추진 의지를 보여 달라고 강조 말씀을 하고 방금 돌아왔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거기에서는 특히 지금 농어업 피해보전대책의 문제는 실무적이 거나 또 예산 당국의 경제 기준의 판단으로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고, 이것은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통치 차원에서 결단이 있어 야만 해결될 수 있다는 점도 국무총리께 분명히 강조하고, 그와 같 은 내용을 대통령과 상의해서 성의 있게 처리해 줄 수 있도록 하는 점을 국무총리께 강조하고 돌아왔습니다. 김황식 총리는 우리의 요청에 대해서 13개 사항에 대해서는 관 련 부처와 예산 당국으로 하여금 심도 있게 검토하도록 하겠다는 말씀을 하셨고, 농협의 6조 원 부족자본금을 4조 원 규모로 줄이 면서 차입금으로 전환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국무총리께 문제를 함 께 제기했었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국무총리도 정부 내에서도 많 은 토론이 이루어졌었지만 오늘 농식품위 위원장과 여야 간사가 와서 요청하였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검토하도록 하겠다는 그런 답 변을 얻었다 하는 말씀을 먼저 위원 여러분께 드립니다.

352


오늘 위원들이 국정감사 때 중간과정은 많이 있었지만 쌀 문제, 거의 다 문제를 같이 제기해 줬어요. 수입 쌀을 저가 방출하고 2009년도 쌀을 싸게 방출하고, 싸게 방출하면 물가를 잡는다는 것 에 대한 그런 강박관념에 농림부장관이 그렇게 매달릴 필요가 없 습니다, 기본적으로. 싸게 방출하면 그것 자체가 국고의 손실 아닙 니까? 쌀값이 떨어지면 또 직불금으로 보충해 줘야 되잖아요, 국 고가 또 들어갑니다. 양특회계 손실, 직불금 손실, 물가 당국에 그 말씀을 해야 돼요. 이게 뭐냐, 국민의 세금인데. 어째서 농림부가 쌀값 내리는 부가 되냐, 원성이 자자합니다.

지금 한-호주 간 FTA를 또 호주가 신청을 했어요. 이것이 2008년도에 한미 간 쇠고기 위생조건 협상이 잘못되어 가지고 그 거를 기초로 해서 캐나다가 WTO에 제소하고 그 기준 때문에 우 리는 결국 캐나다에게 협상에서 수입위생조건을 통한 개방을 할 수밖에 없다, 그거를 가만히 봅니까? 호주가 또 대들었어요, 미국 것을 기준으로. 이렇게 되면 계속해서 그런 쇠고기 개방요구 압박 을 받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농림부 국정감사 때도 당초에 얘기했지만 한미 쇠고 기 위생조건 협상은 다시 해야 된다, 재협상해야 된다는 게 기본적

353


인 생각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내가 그때도 장관께 서 외교부 또 기획재정부하고 재협상 문제를 연구ㆍ검토해 달라 그렇게 부탁을 한 적이 있어요. 장관의 그때 답변은 신중하게 검토 하겠다, 그렇게 답변한 거를 내가 기억합니다.

지금 농수산물유통공사ㆍ농어촌공사 사장이 한 달 보름동안, 국 회 정기국회기간, 국정감사 기간에 공석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농 업 지원ㆍ지도ㆍ조장기관에 대해서 그만큼 이 정부가 무책임하다, 무성의하다, 무관심하다, 그거를 아주 단적으로 대표하는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장관께서는 총리와 대통령께 하루속히 공석을 메우도록 강하게 촉구를 하십시오. 저도 비공식적으로 그 런 노력을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농수산물유통공사와 농어촌공사의 업무영역에 관한 문제 인데 지금 장관 산하에 여러 기관이 있어요. 농협, 산하는 아니고 협동조합이지만 협동조합, 3개 협동조합이 있고 또 농촌진흥청, 농수산물유통공사 이렇게 있는데 유통에 대해서 어디가 전담기관 이고 최고의 기관인지가 지금 확실치가 않아요. 어디가 책임지는 것이냐, 농수산물유통공사는 수입공사지 그게…… 유통 업무의 아주 일부분밖에 안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유통업무 혁신 작년에

354


모두 발표하셨잖아요? 그러면 어딘가가 주도적으로 하면서 기관 역할을 분담하고 이래야 되는데 그 체계를 갖추는 게 좋겠어요. 기 상 관측만 하더라도 농촌진흥청, KREI 그다음에 농식품부 어디서 관측하는 것이냐? 총괄기관도 명확치가 않다, 기능도 분산되어 있 고. 해서 그런 것도 손을 보도록 해 주시고요. 농어촌공사도 농어촌공사의 사명은 농업용수 관리와 농지의 효 율적인 관리, 두 가지가 원 목적입니다. 옛날 농지개량조합의 전신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무슨 재생에너지, 뉴타운사업, 마을종 합개발사업. 마을종합개발사업은 자치단체에다 밀어주면 되는 사 업입니다. 그거를 무슨 공사에다 줘 가지고…… 효율적이지 못하 다, 나는 그렇게 보고 업무체계도 연구해서 전문화할 필요가 있습 니다. 유통공사도 한식세계화, 유통공사가 한식세계화와 무슨 업무 연 관이 깊습니까? 그런 불필요한 업무를 늘리려고 하지 말고 맡은 업무, 유통업무라도 확실한 권위 있는 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런 조치도 함께 해 주셔야 될 것이다 그런 말씀을 드립니다. 농협중앙회는 여러 위원들께서 부족자본금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장관께서 오늘 총리한테도 말씀드렸다는 얘기를 했는데 여기는 우 리가 국회 과정에서 농협 그리고 농식품부 그다음에 농수산위원회

355


여야 위원들 같이 해서 정말로 이거는 통치 차원의 결단으로 해결 할 문제지 일일이 계수로 따져 가지고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 나는 이렇게 봅니다. 국가 최고지도자의 결단에 관한 문제라고 봅니다.

중앙회장 입장에서는 이제 자기 직을 걸고, 직을 걸고 부족자본 금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보여주셔야 됩니다. 통치자에게, 여ㆍ야 당 지도부에, 국회에, 우리가 이렇게 떠들고 이렇게 하는 것도 결 국은 그거를 시정하자는 것 아닙니까? 해서 여기 있는 각종 경제 대표, 축산대표 그다음에 신용대표, 대표 여러분들도 그렇게 할 책 임이 있어요, 회장과 함께. 공식적 입장을 왜 천명을 못합니까? 농촌이 바글바글 끓어요, 구조조정사업 중단해라 여러 가지 얘기 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런 거를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공 식 기자회견을 하세요. 왜 못합니까? 정부 눈치 보려고 합니까? 정부 눈치 보면 이렇게 결과가…… 차입금으로 대체하겠습니까? 여러분도 이럴 때는 압력단체 역할을 하셔야 됩니다.

수협중앙회는 서 장관께서 수협중앙회에 대해서 특별 무슨 지도 경영능력향상팀을 만들든지 그래 줘야 될 것 같아요. 17개 금융기 관이 있습니다. 통칭 시중은행이라고 하는 것이 8개인가 그렇고

356


지방은행이 있고 특수은행이 있고 그렇더라고요. 금융감독원 분석 자료에 의하니까 직원 1인당 생산성이 가장 낮은 곳이 수협이에요. 꼴찌입니다, 꼴찌. 낮은 것도 제일 꼴찌이고 그다음에 여신의 건전 성 거기에서도 제일 꼴찌가 수협중앙회예요. 그러고 공적자금 1조 1000억을 어떻게 갚을 겁니까? 수협중앙회에도 그날 얘기를 했습 니다마는 정말 뼈를 깎는 그런 노력을 하면서 경쟁력 향상을 위해 서 노력을 해야 되는데 수협중앙회 작년이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다, 해서 그런 지도팀도 만들어서 하실 필요가 있지 않는가, 그 런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산, 여러 위원들께서 말씀 많이 하셨는데 지금 축산물 수입관세가 9800억 정도 되더라고요, 1조. 그리고 축 산에 투자되는 돈의 재원을 보니까 1조 중에서…… 축산발전기금 에서 약 6000억 정도, 일반회계에서 1000억 그리고 마사회를 비 롯해서 들어오는 돈이 한 3000억 정도 되던가요? 그렇게 해서 어 쨌든 일반회계에서 1000억 정도 들어와요. 들어오고 나머지 1조 정도, 9800억 중에서 나머지는 농업분야 농특회계를 들어가 가지 고 축산이 아닌 다른 분야에 다 쓰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FTA로 제일 죽는 게 축산인데 수입관세, 외국에서 들어오는 농산물에, 축 산물에 붙였던 그 관세를 축산경쟁력에 다 써줘야 맞다 저는 그렇

357


게 봅니다. 일반 다른 농업에 들어갈 것은 일반회계에서 부담을 해 줘야지요. 그래서 지금…… 아침에 총리께 요청한 그것 중에 여섯 번째로 FTA 이행기금 10조 원 확보하자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축산발전기금을 5조 정도 조성을 해 달라 하는 것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지금 일반회계가 부담할 것을 축산물 수입관 세에서 충당하고 그리고 그냥 농업 일반분야에 넣으면서 계속해서 농특회계로 들어가니까 농업에 어차피 쓰인다 이렇게 정책당국이, 예산당국이 얘기하는 것은 논리가 맞지 않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 니다. 해서 그런 점도 농식품위원회 여야 위원들과 힘을 합쳐서 재 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KT&G 측에서는 중앙회를 비롯한 조합들이 실질적으로 엽연초 농가에게 돌아가야 될 상당한 부분을 조합운영비, 인건비 이런 걸 로 소비하고 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답변 필요 없습니 다, 제가 너무 잘 아니까요. 그래서 그런 인식을 불식시키는 노력 을 스스로 해 주시고요. 이게 왜 기획재정부에 있느냐? 과거에 전매청, 담배와 인삼을 전 매, 정부가 독점수매.독점판매, 독점이익 했을 때 전매이익금이 우 리 내국세 총 세입 중에서 굉장히 비중이 컸습니다. 그래서 기획재

358


정부 산하로 들어간 겁니다. 해서, 지금은 민영화된 상태 속에서 기획재정부에서 굳이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인데, 이건 농림부장관이 그 주장 을 못할 이유도 없지만 그런 것을 알고 기획재정부하고 협의를 하 실 필요가 있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요. 그동안 여러 생산농가들이 저한테도 건의를 하고 그래서 대강 여 덟 가지 더라고요. 다 시간관계상 생략합니다. 아까 재단지원금을 생산비에서 빼는 것, 구매계획 예고제 실시해 달라는 것, 또 국산 사용비율을 50% 이상 해 달라는 것, 또 외국산 가공한 것도 국산 으로 표시하는 것을 고쳐 달라는 것, 이렇게 해서 제가 여덟 가지 를 서 장관께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기획재정부 장 관하고 같이 협의하셔서 KT&G 측에 그와 같은 권고를 해 달라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고요.

그동안 여러 위원들께서 우리 농정에 대한 걱정 또 건설적이고 경쟁력 향상을 위한 여러 가지 방안과 대안을 제시를 해 주셨습니 다. 서규용 장관 또 여기 계시는 차관, 농협중앙회장을 비롯한 여러 기관, 산림청장, 농진청장 모두가 여러분들이 배전의 노력을 더해

359


달라 또 농업이 위기인 점을 잘 인식해 달라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단결된 힘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심하 고 실천하고 앞장서 달라 그런 요구들을 위원들이 계속해서 반복 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여러분처럼 오랫동안 공직생활을 해 온 사람이지만 여러분 들께 그 선배로서도 말씀을 한 마디 드린다면 결국 여러분은 한국 농정사에, 지금 이 개방시대 농정사, 한ㆍEU, 한미, 한ㆍ호주, 한 중…… 지방방송 좀 김학용 위원 조금…… 지금 여기 말씀 중입니 다. 그래서 제가 옛날 재직 때 연 백서, 제가 장관 때 것 아까 갖다가 봤습니다. 여러분들 한국 농정사에서 개방 농정시대에 여러분의 역할 이것은 우리 농정사에 남는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미 FTA 통과될 때 장ㆍ차관이 누구냐, 농협회장이 누구인가, 농협자 본금 측정할 때의 회장은 누구였는가, 그거는 다 역사에 남습니다. 우리 공직자가 국민과 역사를 보고 공직에 봉직하라 그런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농업에 대해서, 이 개방시대에, 이 위기에 여러분들은 그 위치에서 무엇을 했는가, 뭘 남겼다, 후대들에게 우리 농업을 위해서. 그런 것을 찾기 위해서라 기보다도 실질적으로 역사를 위해서, 농정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360


좀더 분발하고 사명감을 가져주시기를 바랍니다. 역사가 흘러간다고 얘기합니다. 누구나 공직자 월급 받고 다닐 수 있지요. 그러나 여러분 죽 농림부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있을 때 농정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는지, 누가…… 한 국 농업에 역할을 크게 한 100인에 선정된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 지 여러분 다 알 겁니다. 한번 찾아보십시오. 이처럼 오늘의 여러분들이 이 험악한 개방시대에 최대의 위기에 처한 농업에 대해서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무슨 업적 을 남겼는가, 그것은 다 역사의 기록에 남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 분이 그런 역사의식 가지고 조금 더 분발해 주시고 최선을 다 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말씀을 드립니다. 그다음에 위원 여러분께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정부 요원으로서 차관보 때부터 장ㆍ차관 때 길지 않은 기 간 국회를 출입했고 또 짧은 의정생활을 하면서 우리 농식품위원 회 위원들처럼 이렇게 성실한 위원회를 저는 보지를 못했습니다. 자료, 조사, 출석…… 이것 보십시오. 지금 빈 자리가 몇 개 있기 는 합니다마는 꼭 고등학교 학교 수업시간 계속 하는 것처럼…… 아마 저는 이런 상임위원회를 처음 봤습니다. 제가 물론 위원장 하 니까 그렇다고도 하겠지만 제가 국회에 다닌 것이 다 합치면 이십

361


몇 년이 됩니다. 이렇게 성실하게 노력하는 위원들을 나 보지 못했 습니다. 그것은 농업에 대한 열정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질의를 마치면서 오늘 여러 가지 질의 준비했던 위원들께서 서면 으로 하신 위원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류근찬 위원, 김우남 위원, 김영록 위원, 송훈석 위원, 강석호 위 원, 정해걸 위원, 김성수 위원, 강봉균 위원, 김학용 위원, 성윤환 위원, 김효석 위원, 황영철 위원, 이영애 위원, 최인기 위원으로부 터 서면질의가 제출되었습니다. 농림수산식품부 등 13개 기관에서 는 답변서를 성실히 작성해서 1주일 이내에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 다. 서면질의와 서면답변은 국정감사 회의록에 게재하도록 하겠습니 다. 다시 한 번 위원님 여러분 지난 3주 동안 정말 수고가 많으셨고, 또 여기 계신 농식품부 서규용 장관을 비롯한 각급 기관장과 간부 여러분도 국정감사를 준비하시느라 또 당일 날 답변을 준비하시느 라 많은 수고를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수고 속에서 우리 농정의 발전과제를 찾아낸다는 보람을 가지고 실천에도 최선을 다해 주실

362


것을 여러분께 부탁 ���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국정감사 모니터단과 취재기자 여러분, 중계를 담당한 국 회방송 관계자, 또 위원회 직원, 정책연구위원, 위원 보좌관 직원 과 속기사 여러분도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이상으로 2011년도 농 림수산식품위원회 국정감사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감사종료를 선포합니다.

363


에필 로그

2012년,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에필로그


2012년,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나주 화순지역의 지속적인 발전과 2012년 민주정권 창출 이라는 역사적 소명 완수를 위하여 선봉에 서서!”

다사다난했던 2011년이 지나고 2012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를 맞는 내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가득해진다. 마음 은 벌써 나주와 화순에 가 있다. 천성적으로 일하기를 좋아한 성격 탓 때문에 마음부터 바빠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새해를 맞는 마음은 그 어느 해보다 비장한 결의로 가득 차 있다. 올해는 20년 만에 총선과 대선에 함께 치러지는 해이기

367


때문이다. 반드시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하여 민주진영의 정권창출 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완수해야 한다. 2012년, 나의 목표는 나주와 화순지역경의 지속적인 발전과 2012년 민주정권 창출이다. 나는 이 두 가지의 목표를 함께 쟁취 하기 위하여 화순과 나주 사람,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이 필요로 하 는 사람이 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포부를 밝히는 바이다.

1.고대문화수도 나주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영산강 번영시대를 열기 위하여! 2.살기 좋은 고장, 주민이 행복한 화순건설 마무리를 위하여! 3.추진 중인 대형 국책사업의 마무리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 필요! 4.지역발전을 위하여 계속 일해 달라는 주민의 여망 존중! 5.야권통합의 주역, 최인기의 역할 중앙정치권에 반드시 필요! 6.정권창출이라는 역사적 책임에 앞장서야 할 소명(召命) 다 할 각오!

368


■나주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영산강 번영시대의 개막 완수를 위하여 내 고향 나주는 농업중심 사회였던 70년대 중반까지는 인구 27만이 모여사는 농업중심도시로서의 역할이 큰 편이었다. 그러나 제조업과 지식, 정보, 서비스 사회로의 발달이 급속한 최근에는 낙 후와 침체의 늪에 빠져 인구 9만 명 이하의 소도시로 쇠퇴의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 2004년 총선에서 나주시민들께서는 나를 국회의원에 당 선시켜 주셨다. 최인기를 나주의 일꾼, 아니 나주의 큰 머슴 최인 기를 뽑아주신 것은 나주를 위하여 일해 보라고 그렇게 해 주신 것 이다. 나주시민들께서 나를 선택하신 것은 나름으로 계산한 바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오랜 공직생활과 두 차례의 장관 재직 등의 경력을 좋게 평가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역민들이 기대하신 대로 그동안 축적했던 행정업무의 흐 름을 활용하고, 그동안 다져놓았던 인맥 등을 동원하여 지역 발전 에 보탬이 되도록 내 능력껏 최선을 다 했다. 그 결과 국가사업의 유치ᆞ시행에 적시에 맞추어 혁신도시 유치 및 건설, 영산강 살리기 사업과 뱃길복원 사업의 착수 진행, 영산 강 고대문화권 사업 착공(대표사업 반남 국립나주박물관)등이 어

369


우러져 새로운 영산강 번영의 시대를 열어 가고 있다. 그동안 유치에서부터 국가예산의 확보, 법적·제도적 지원, 차질 없는 추진여건 조성 등 모든 사업의 추진 과정에서 8년 동안 기울 였던 나의 땀과 노력, 그리고 집념과 열정을 돌이켜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감회가 새롭고, 보람도 크게 느끼고 있다. 나주의 대형 국책사업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5조원의 사업 비가 투자, 소요되는 혁신도시는 2011년까지 보상, 부지정리, 도 로, 상하수도 등 기반시설 정비에 1조 5,000억 원 정도가 투자되 었다. 한국전력, 우정사업본부 등 나주로 이전예정인 공공기관의 사옥 을 2011년 말에 착공한 상황이다. 혁신도시에는 앞으로 진입도로 개설, 전체 15개 공공기관의 청사건립추진, 연관대학, 기업 연구 소 유치, 주택, 교육(초·중·고등학교), 병원 등의 건립에 막대한 국 가 예산 확보 및 투자를 통해 추진할 일들이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 다. 차질 없이 이를 마무리하는 것이 나의 소명이요, 앞으로 해야 할 일이다. 영산강 살리기 사업은 준설과 제방축조 등은 마무리 단계에 있으 나 생태공원, 전국순회 강변자전거도로, 저수능력 배가를 위한 나 주호 정비, 저류지 완성, 영산호 및 영암호 배수갑문 확장, 연락수

370


로 건설 특히 바다로 통하는 뱃길복원을 위한 통선문 설치(2012년 국가예산 300억 원 확보 쾌거-보람이 큼)등 1조원 이상의 사업이 아직도 남아 있는 상황이다. 영산강고대문화권사업도 반남에 국립나주박물관이 착공되었으 나 나주에서 목포까지 영산강 양안의 강변도로를 비롯하여 각종 유적지 발굴, 나주목관아와 4대문 정비 완성 등을 위하여 적지 않 은 국가예산 확보 등 남은 과제가 산적(山積)하다. 이들 사업을 깔 끔하게 마무리 지어 살기 좋은 고장, 살 맛 나는 도시로 만드는 것 이 나의 마지막 남은 꿈이다.

■살기 좋은 고장, 주민이 행복한 화순건설의 마무리를 위하여 전국에서 살기 좋은 고장 1위, 주민이 행복한 화순을 만들기를 위해서도 8년 동안 동분서주했다. 백신산업특구 사업의 마무리, 의생명융합센터의 완성과 전남대 학교 의과대학의 유치, 프라운호퍼 신약연구소, 생물산업단지 등 을 통한 생물의약산업의 중심으로 도약시키고 교통요충지, 문화· 관광·체육진흥 등의 사업들을 성공적으로 완수해야 할 과제가 남 아있다. 그러나 이제 착수단계에 있거나, 빈약한 화순군 재정으로서는 원

371


활한 사업 지원이 힘들기 때문에 국가예산의 집중적인 확보지원은 필수적이다. 이를 해결하는 것이 나의 임무다. 화순의 새로운 명소로 전국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하니움문화 스포츠센타의 건립에는 330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되었는데 그중 특별교부세 등 국가 예산 157억 원이 지원되었다. 화순군민의 사 랑방 종합문화센타 건립에도 120억원의 소요 사업비중 80억 원이 국가예산 지원을 통해 완공·사용 중인 사례에서 확인되었다시피 국가예산의 확보 지원은 지역발전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화순군의 예산은 내가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던 2004년 당초 예산 기준으로 1,780억 원이었던 것이 2011년에는 2.5배에 달하 는 4,118억 원으로 증가하였다. 재정이 열악한 지방세 증가보다는 국가예산의 증가가 결정적으 로 작용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역구 국회의원이 중앙에서 어떤 역할과 활동을 펼치느냐에 따라 국가예산 확보 액수 차이가 크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 큰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

■추진 중인 국책사업 마무리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 필요해 현재 나주 화순에서 추진 중인 국책(국가)사업의 차질 없는 마무 리를 위해서는 국가사업예산의 확보는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나

372


는 풍부한 중앙정부 경험을 바탕으로 두터운 고위 공직자 선후배 인맥을 적극 활용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지난 8년간 나주 화순에 추진한 사업내역 및 예산확 보 실적으로 입증했다고 생각한다. 일은 해본 사람, 일의 맥을 아 는 사람만이 해낼 수 있다. 시작한 사람이 마무리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내 나이가 많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 다. 그러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김대중 대통령은 만 73세에 대통령에 당선된 바 있다. 일에 대한 열정이나 개혁적 사고, 체력 등 모든 부분에서 나는 40~50대 젊은 사람들에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무엇보다 중앙부처 인맥 등 풍부한 경험이 바탕이 되어 전화 한 통화로 행정자치부장관(맹형규 장관)이 2011년 특별교부세 20억 원을 지역구에 지원(2011. 12. 30, 나주 10억, 화순 10억 원)하게 하였다. 농림수산식품부장관(서규용)과의 담판을 통해 나주·화순 에 349억 규모의 친환경농산물유통센터 건립을 위해 2012년도 국 가예산에 설계비를 반영 확보하였다. 보통의 국회의원은 국회예산 심의과정에서 지역구 사업 10억만 증액해도 큰 일 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야당 국회의

373


원은 그 정도가 심하다. 그러나 나는 연륜과 함께 경험, 무게, 카리 스마를 겸비한 사람이라고 정부와 국회에서 정평(定評)이 나 있는 사람이다. 2012년도 예산 정국에서도 영암호 배수갑문 확장공사에 국회에 서 300억 원 을 감 히 증 액 할 만 한 능 력 을 갖 게 된 슈 퍼 맨 (Superman)의 역할을 적극 수행하고 있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언론(남도일보2012년 1월 1일자 11면)에서도 나의 3선 도전에 대하여 “광주·전남 공동혁신도시 건설 추진을 비롯 호남고속철도 의 나주역 경유 등 굵직한 지역현안을 별 마찰 없이 추진하면서 지 역 정치권 원로로써의 모습을 보였다는데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또 최 의원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그동안 나주시·화순군의 무소속 단체장을 민주당 시장, 군수로 교체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지역정치 권의 지지 세력을 안정화하여 흩어졌던 지지기반을 탄탄한 조직으 로 재정비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김영민 기자)고 보도하고 있다.

■지역발전을 위해 계속 일해 달라는 주민의 여망 높아 그동안 국책사업의 유치, 착수, 진행과정을 지켜보았던 나주·화 순의 지역주민들은 이미 시작한 사업을 잘 마무리 해 주기를 바라 는 여망이 큰 것으로 알고 있다.

374


또한 지역의 크고 작은 현안에 대하여 제대로 잘할 수 있는 사람 이 지금 누가 있는가? 라는 의문을 표시해주시는 분들이 많은 것 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2011. 12. 29 광주방송(KBC)이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갤럽에 의뢰하여 실시한 광주·전남 국회 의원 만족도 여론조사 보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간략히 소개한다.

「 KBC광주방송이 신년기획으로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 갤럽 에 의뢰하여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광주 전남 현역 국회의원 들과 대선 후보군에 대한 만족도와 선호도를 조사했습니다. 지역 국회의원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먼저 광주 전남 20개 지역구 별 결과를 정재영 기자가 전해드립 니다. 광주는 8개 선거구 중 광산 을을 제외하고는 모두 만족도가 낮았 습니다. 전남지역은 광주보다 상대적으로 만족도가 높았으나, 국회의원 이 잘 하고 있다는 답변이 50%를 넘은 곳은 3곳이었습니다. 특히 나주ᆞ화순은 현역국회의원이 잘한다가 55.6%로, 광주와 전남 20개 지역구 가운데 가장 높은 만족도를 보였고, 광양도

375


54.2%가 잘 하고 있다고 답해 나주·화순에 이어 2번째로 많은 긍 정적인 답변을 얻었습니다. 내년 4월 총선에서 현재 국회의원이 다시 당선되는 것이 좋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 바꿔야 한다는 응답이 대부분 시·군에서 우세했습니다만 여기에서도 나주·화순과 무안·신안만이 현역의원 이 그대로 일하는 것이 좋다는 응답이 교체해야 한다는 응답보다 높았습니다. KBC정재영입니다. 」

■야권통합의 주역인 최인기의 역할 중앙정치권에 반드시 필요 2011년 12월 16일은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야권통합수 임기관 위원장으로서 60년 전통을 자랑하는 민주당과 양심적 시민 사회단체가 주축을 이룬 시민통합당 그리고 50년 동안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해 온 한국노총 등 2정당 1단체가 합친 통합을 의결한 것이다. 나주시민과 화순군민은 물론 더 나아가 국민모두의 염원을 받들 어 야권통합이라는 큰 과제를 완수한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나는 앞서 2011년 12월 11일 10,000여명의 당원이 잠실체육관 에 모인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나는 야권통합수임기관 위원장으로

376


추천·선출되었다. 민주당내에서 국민과 당원의 입장을 가장 정확 하게 반영하는 의견 제시로 당내 이견(異見)을 합리적으로 조율하 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이유로 당 지도부 등 다수 인사가 추천한 것 이다.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늘 일 잘하는 사람은 필요한 것이다. 민주통합당의 출범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지금 시대적 과제랄까 국민의 명령은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이명박 정 권을 심판하고, 2012년 반드시 정권을 탈환하여 민주정부를 출범 시키는 것이다. 내가 중앙과 지방의 정치무대에서 당과 지역을 위하여 막중한 역 할을 수행해야 할 책임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야권통합·정권탈환이라는 역사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나의 사명(使命) 다양한 세력의 서로 다른 의견을 원만하게 조정하여 국민과 당원 모두가 공감하는 통합 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협상과정 일주일동안 날마다 새벽에 퇴근했다. 야권통합이라는 소명의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인내 하고 양보했다. 진통 끝에 옥동자가 나왔다. 민주통합당이라는 새로운 당의 출범에 따라 집권 가능한 수권정

377


당으로 거듭났다. 통합 이전에 비해 당의 지지율이 10% 이상 올라 지지도 1위의 정당(2012. 1. 1조선일보, 리서치뷰 발표, 한나라당 32.7% : 민주통합당34.9%)이 되었다. 실로 오랜만에 통합민주당 이 통합을 통하여 지지율에서 한나라당에 앞선 것이다. 감회가 무 척 깊다. 이 역사적인 과정을 주도한 사람으로서 민생경제의 파탄, 민주주 의의 후퇴, 남북관계의 단절을 초래하여 국민의 불신, 불만, 불안 을 키워가는 이명박 정권을 심판하는데 앞장설 것이다. 특히 2012년 4월 총선에서 민주·개혁·진보 세력이 총 결집되어 있는 민주통합당이 국회 과반수 이상의 의석 확보로 의회권력을 탈환하고, 이를 바탕으로 12월 대통령선거에서 기필코 승리하여 농민 서민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나주·화순 주민여 러분께서 크게 도와주실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 변함없는 사랑과 지지로 오늘의 저를 키워주신 나주 시민과 화순 군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378


최인기 자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