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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5월의 아카데미는? 2. 소식지를 보내며 | 휘소식 편집팀 3. 펜과 칼 ‘누가 죄를 물을 것인가’ | 정덕재 4. 데이트 하실래요 ‘심지어 신학 박사, 교회 누나 최은영 회원’ 5. 책 읽어주는 남자 ‘김유신님께 봄볕을 기리며……’ <미생> | 노현승 6. 세상의 모든 책 ‘살아남은 사람들이 외치는 분노’ <정도전을 위한 변명> | 조현희 7. 경계에서 책 읽기 ‘글자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의 홍수’ <타이거! 타이거!> | 오세섭 8. 송덕호의 交信 | 송덕호 9. 둔지미에서

| 강명숙


5월의 아카데미 월

6

7

8

9

10

클래식강좌

‘잃어버린 시간을

고전읽기모임

청소년동아리활동

대전생협 3층

찾아서’

10:30

14:30

10:30

‘일리아스’

소극장, 10시

강사 : 신명식 ‘베토벤 음악과 영화’

과학지렛대 14:30 노은 가까이愛

15

16

17

작은강좌

13

14

‘잃어버린 시간을

고전읽기모임

청소년동아리활동

문제적 인간 시리즈,

찾아서’

10:30

14:30

차일혁

10:30

‘일리아스’

19:30 강사:박현주

과학지렛대 14:30 노은 가까이愛 동치미 19:30 ‘식탁위의 한국사’

20

21

22

23

24

49회 희망의 인문강좌

에퀴녹스

‘잃어버린 시간을

고전읽기모임

청소년동아리활동

‘태초에 오덕이

19:30

찾아서’

10:30

14:30

있었다’

‘전도서를 위한 장미’

10:30

‘일리아스’

19시

동아시아 사상사

강사: 굽시니스트

과학지렛대

세미나 16시

14:30

‘도련님의 시대’

노은 가까이愛

29

30

31

작은강좌

27

28

‘잃어버린 시간을

고전읽기모임

청소년동아리활동

문제적 인간 시리즈,

찾아서’

10:30

14:30

이재유

10:30

‘오뒷세이아’

19:30 강사:김모세

과학지렛대 14:30 노은 가까이愛


소식을 보내며

선지자의 기도 휘소식 편집팀 왜 나에게 악하고 거짓된 일들을 보게 하십니까?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 일들을 그저 보고만 계십니까? 이 나라에는 어디에나 탄압과 폭력이 가득 차 있고, 싸움과 불화가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 의 율법은 힘을 못 쓰고, 국가의 법은 효력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저 악인들이 이 땅의 의인들을 붙잡아 자 기들의 폭력 밑에 가두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 하박국 1장 3절, 4절 지난 일요일 설교시간에 읽은 성서의 한 구절입니다. 악인이 잘 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현실에 선지자 는 절망합니다. 하박국의 절규가 이천년을 지난 지금 여기에서 들립니다, ‘아이들을 살려 달라’고 ‘이게 나라냐’고. 이 울부짖음 앞에서 말과 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지식운동을 표방하는 아카데미의 활동에 무력감을 느끼는 한 주였습니다. 아카데미가 읽는 책이, 준비하는 강좌가, 발표하는 글이 겨자씨만큼이라도 세상을 움직일 수 있을까요? 술자리에서 누군가 물었습니다. ‘니들이 하는 짓거리가 무슨 의미가 있냐?’ 차마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오랜만에 휘소식를 보냅니다. 형식도 달라졌고 내용도 달라졌습니다. 귀한 시간 쪼개 글을 보내주신 정덕재 회원님, 조현희 회원님, 오세섭 회원님, 송덕호 운영위원장님, 노현승 대표님 그리고 인터뷰에 응해주신 최은 영 회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칼럼 ‘펜과 칼’은 이전 ‘뭐이슈’의 새 이름입니다. 너무 정형화되고 고리타분한 이름이라는 지적도 있 었지만 펜을 칼처럼 날카롭게 벼리겠습니다. ‘데이트 하실래요’는 아시다시피 아카데미 회원님들과의 만남 입니다. 매달 동치미가 읽은 책은 ‘세상의 모든 책’, 에퀴녹스가 읽은 책은 ‘경계에서 책 읽기’란 이름 으로 회원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둔지미에서’는 아카데미 두 명의 활동가가 번갈아 쓰는 칼럼으 로 사무국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사연들과 깨알 같은 자랑질, 찌질한 하소연을 전달하겠습니다. 새롭게 시작 하는 휘소식의 모양에 대한 회원님들의 질타와 격려 기다리겠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의 한탄에 신은 정의와 올곧음의 승리를 약속하며 믿음을 지 키라고 대답합니다. 정말일까요? 악인이 고꾸라지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날이 올까요? 모르겠습니다. 그 러나 믿고 싶습니다. 그런 날이 올지 안 올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책을 읽고 토론하며 글을 쓰면서 함께 모여 공부하겠습니다. 강철 같은 세상에 조금씩 균열을 내겠습니다. 그냥 체념하고 냉소하기에는 아이들이, 우리 스스로가 너무 불쌍하니까요.


펜과 칼

누가 죄를 물을 것인가 정덕재 (시인·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 책임작가)

세월호 침몰사고가 우리사회 전체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절망과 슬픔은 많 은 사람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있다. 재난대응의 시스템 부재와 정부의 무능력에 대한 분 노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후진국형 재난을 통해 컨트롤 타워가 없는 미성숙한 우리 사회의 민낯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실종자 가족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도덕적 무뇌아 수준의 어처구니없는 상황 도 발생했다. 이러한 일들은 단순한 시행착오나 해프닝이 아니라 부실한 사회안전망과 근본적 인식 수준의 총합이기에 더욱 혼란스럽고 충격적이다. 고등학생을 소재로 글을 연재하고 있는 필자가 가장 걱정하고 두려 운 것은 우리사회 구성원 간에 신뢰가 끝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 신뢰의 균열을 망치로 내려친 것 이미 한국사회는 신뢰에 상당한 금이 가 있는 상황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봐도 불신사회를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끊임없이 금융사고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금융시장과 소비자의 불안을 키우는 기만행위는 계속되고 있다. 국가를 보위해야 할 국정원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위태롭게 만드는 일을 자행했다. 독립 성에 의문을 갖게 하는 정치검찰의 행태도 불신의 한 축이다. 비정규직과 소상공인을 벼랑으로 몰고 있는 대 기업 착취도 예외는 아니다. 소비생활과 관련한 허위와 안전 불감증은 우리의 일상적 생활과 붙어있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세월호가 빚은 대형 사고는 균열이 간 유리창을 망치로 내리친 것이라 고 할 수 있다. 신뢰와 투명사회의 관계를 고찰한 한병철 교수는 그의 저작 <투명사회>에서 투명성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 위기를 이렇게 진단한다. “투명사회는 불신과 의심의 사회, 신뢰가 줄어들기에 통제에 기대려는 사회다. 투 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취약해졌다는 것. 진실성이나 정직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점점 더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설명한다. 신뢰와 가치지향이 사회구성에 중요한 요소라면, 우리는 이 기회에 국가의 역할을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녹색평론> 7-8 월호에 실린 천주교 주교회의 강우일 의장이 쓴 글은 국가의 존재를 반추하게 한다.


“현대의 국가들이 건국되고 국가로서의 면모를 확립해나가는 과정에서 다수가 모인 패권적 집단이 그 집단 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이해 집단이나 개인들을 희생시키거나 억압하는 일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반성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나 민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이 항상 정당성을 갖 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공감대의 형성, 정의 의 실현이라는 가치의 지향,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 소통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지상의 평화를 위하여’ 일부)

세월호 사건 부실국가의 총체 보여줘 세월호 침몰사고는 원칙과 가치가 무너진 사회와 왜곡된 구조를 기반으로 한 부실국가의 총체를 보여준 결 과다. 깊은 슬픔과 고통은 계속 이어지고, 분노는 쉽게 진정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한병철 교수가 지적한 분노는 남다른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강력한 의미에서의 분노는 감정적 상태 이상의 것이다. 분노는 기존의 상태를 중단하고 새로운 상태를 시 작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렇게 해서 분노는 미래를 만들어낸다.” 아직은 이번 분노가 어떤 미래를 만들어낼 지 예측하기에는 이르다. 그보다 먼저 치유하고 위로하고 구조해 야 할 절박한 문제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깜깜한 바다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 모두도 길을 잃었 다, 우리는 지금 혼돈과 미궁 속을 헤매고 있다. 분명한 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책임이라는 점이다. 단죄는 필요하다. 다만 죄룰 물을 수 있는, 자격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지는 의문이다. 모두에게 묻는다. “이 땅 에서 공범이 아닌 자는 손을 들어라”

* <굿모닝충청>에 실렸던 칼럼을 일부 수정하여 재수록함을 밝힌다


데이트 하실래요

심지어 신학 박사, 교회 누나 최은영 회원

“아카데미 활동은 오래하셨어요?” “작은 모임은 어떻게 진행하세요?” “활동가로 일하시면서 행복하세요?” 질문하는 시간보다 대답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새롭게 공간을 마련하고 의욕적으로 단체 활동을 하는 최은 영 회원은 아카데미 두 활동가에게 끊임없이 질문했다. 중년의 초보 활동가 셋이 모여 은퇴자들을 위한 프로 그램,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흥동에 위치한 ‘아임 아시 아’에서 인터뷰, 아니 활동가 워크숍(?)을 가졌다.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최은영입니다. 대구에서 1999년 경 대전에 와 지금은 노은에 살고 있습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 부했습니다. 대전 지역 여러 대학에서 강의도 합니다. 지금은 대전여성신학자협의회 공동대표로 성서대전과 함께 대전역 앞에서 ‘인문학 카페 판’이란 공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성으로 신학을 전공하셨는데 모태 신앙의 영향인가요? 저희 아버님은 교회 사역이 아닌 학교 교목으로 계셨어요. 저와 제 오빠는 부모님과 다른 교회에 나갔습니 다. 부모님의 영향은 별로 받지 않았어요. 보통 목회자 자녀라는 분위기가 있는데 그런 것은 모르고 자랐습 니다. 교회와 부모님으로부터는 자유롭게 자란 셈이죠. 학문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몰랐죠. 계명대 신학과가 빨갱이 신학과란 걸.(웃음) 제가 다닐 때만 해도 독보적이었죠. 운동권도 많았고 교수님들도 진보적인 말씀을 많이 하셨고요. 여성신학에 대한 강좌를 한 학기 들었는데 강의해주신 선생님의 영향으로 여성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 다. 성서 안에 숨겨져 있는 여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여기까지 왔네요. 저에게 여성, 성서, 다문화, 평화 이 네 가지가 하나의 모토인 셈이죠. 평생을 제가 함께 가져가야 할 것들이죠.

활동하시는 대전여성신학자협의회는 어떤 단체이며 회원 가입 기준이 있나요? 한국여신학자협의회의 지회형태로 2000년에 창립했고 저는 2001년부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교회 여성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초교파적인 단체로 여성신학과 교회 개혁과 제도 개선 에 관심이 많고요. 교회 내 의식개혁에 힘쓰고 있습니다. 맥락은 아카데미와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잠시 정체기도 있었지만 이제 활동할 공간도 있으니 앞으로 집중할 예정입니다. 단체 이름에 ‘신학자’란 이름이 있어서……, (웃음) 이름 때문 에 고민이 많았어요. 우리 단체가 진짜 신학자만 모인 것이냐? 그 것은 아니거든요. 회의과정에서 ‘함께하는 기독여성’ ‘행동하는 기독여성’ 등 다른 이름도 나왔고요. (웃음) 하지만 처음 단체를 만드신 분들의 뜻과 전통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정회원은 신학을 전공한 여성이고요 준회원은 여성, 남성, 전공에 관계없이 저희 단체의 취지에 동의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열려있습 니다.


아카데미는 어떻게 아시고 가입하셨나요? 페이스북에 김모세 선생님이 친구신청을 했어요. 일단 친구수락을 하고 어떻게 신청을 했나 물어보니 친구 신청 한적 없다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김모세 선생님이 실수로 메일 주소록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친 구신청을 한 거죠. (웃음) 그 이후 페이스북에서 모세 선생님이 올리는 아카데미 프로그램과 활동을 보고 아 카데미에 가입했습니다. 좋은 프로그램이 많고 특히 SNS에 관한 강좌는 꼭 듣고 싶은데 저희 일정과 자주 겹치고 해서 아쉽게도 참여를 못하고 있네요. 아카데미도 한 번 찾아가고 싶은데 선뜻 용기가 안 나네요. (웃음)

마지막으로 작년에 집필하신 『성서에서 만나 는 다문화 이야기』 홍보 좀 하시죠. (웃음) (웃음) 성서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이 이주 경험을 사 실에서 착안했습니다. 이주자로써 그들의 경험을 독백 과 대화 형식으로 12명의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아주 쉽게 청소년 인권 교제용으로 읽을 수 있도록, 그런 바람으로 출간했습니다. 앞으로 이 책을 주제로 강좌를 생각중입니다. 집에 가지고 있는 게 없어서 못 가지고 나왔네요. (웃음)

교회 누나! 최은영 회원님을 만난 순간 떠오른 단어 다. 화사한 미소와 겸손한 목소리에 묻어있는 활동에 대한 열정과 소녀 같은 호기심이 좋았다. 여성, 성서, 다문화, 평화를 주제로 강의하시는 최은영 회원님의 목 소리를 아카데미에서 꼭 듣고 싶다.


책 읽어주는 남자 자타공인 책벌레 노현승 대표님이 책 한 권을 선택해 아카데미 회원분께 편지와 함께 선물합니다. 다음 달 뉴스레터엔 책 선물 받은 분의 답장이 올라옵니다. 이번 달 책은 윤태호의『미생』이고 받는 사람은 '김유신 회원'입니다.

나무에게 이곳은 하늘을 볼 수 없네. 볕도 비치지 않아. 열흘이 넘도록 습기 머금은 눈은 멈추지 않아. 양극화란 얘 기는 기후에도 낯설지 않아. 세상도 지구도 이렇게 한 통속이 된 건지 말이야. 친구! 이렇게 글로 말 전하는 게 얼마만인지. 하하. 월평사랑 소식지에 흔적들 남기는 것 같아 기분이 좋네. 아 그때쯤이겠네. 1997년. 응 답하지 않아도 돼 1997! IMF의 칼바람이 우리 일터에도 불었지. 정리해고 대상자였고…… 대들어서 화를 면 하기는 했지만, 나를 보고 주변 사람들이 잘렸으면 더 많고 좋은 일을 할 수도 있을 거라고 했지. 후후.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순진했지. 모멸감, 수치심을 느꼈던 것 같아. 그래서 같이 대들자고 하려했는데…… 참 착 한 사람들은 순순히 그만두었어. 정말. 세상도 일터도 그렇게 순진의 한 단락은 끝났어. 오늘은 싸락눈이 날려. 아마 구룡포 항 둔덕에는 매화가 피어있을지도 몰라. 홍매화가 말이야. 보고 싶다. 아직 살지 않은 우리. 그러고 보면 한집은 났을까? 미생. 살아남지 않은 우리. 안녕이와 장그래, 오상식 만화 속의 그들이 보고 싶어지네. 오부장은 잘 살고 있을까? 안녕이는 직장생활 잘하고 말이야. 장그래는 여기저 기 일터를 전전하고 있지나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보기라도 한다면 소주라도 한잔해야 할 텐데. 나무. 그래! 책 권하는 이가 나고

책은 아직 완전히 살지 못하는 우

리, [미생]이야. 느낌 어떤지 전해주었으면 좋겠어. 이곳 포항에도 봄볕 이 들게 말이야. 양극화는 싫다고, 물린다고 같이 말했으면 좋겠어. 그 리고 샛바람, 갈바람, 하늬바람 방향 따라 국수 간을 조절하는 구룡포 구의 할머니와 이웃들도 따듯하게 같이 살 수 있는 궁리도 해봤으면 좋 겠어.


세상의 모든 책

살아남은 사람들이 외치는 분노 조유식,『정도전을 위한 변명』

조현희 (아카데미 회원, 교사)

고려 말 권문세족들은 양민의 토지를 빼앗아 산과 강을 경계로 할 정도였다. 부자는 땅이 더욱 불어나고 가 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원과 결탁했던 특권세력의 횡포 속에서 왕은 무능력했다. 혁명가 정도전 은 질문했다.

‘백성들에게 왕조는 무엇인가? 이 낡은 왕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6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 정도전이 꿈꾸었던 국가는 실현되었는가? 자본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온갖 규 제를 완화하며 국민들의 기본권도 보장하지 않는 무능한 정부, 책임감 없는 부패한 관료들, 결국은 소중한 목숨을 내놓은 아이들과 부모들의 비통한 절규 앞에서 나는 진심으로 분노한다.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나는 이 난폭한 자본주의와 국가주의 안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삼월 어느 날 드라마 ‘정도전’을 보았다.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위로는 부모를 잘 섬기고 아래로는 처자 를 잘 먹여 살리고 풍년에는 배가 부르고 흉년에는 굶어죽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라는 수수께끼 를 던진다. 이성계는 ‘井’이라는 글자 앞에서 고민한다. 이어 정전제(井田制)를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라가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눠줄 때 우물 정 자의 형상으로 분배한다. 총 9개의 필지 중 8필지는 개인 에게 하나씩 나누어주고 나머지 한 필지는 8명이 공동으로 경작하여 나라에 조세로 낸다. 백성들은 모두 자 기 땅을 갖게 되니 열심히 일을 하여 배불리 먹게 되고 흉년이 들어도 공동으로 경작하는 필지의 소출만 조 세로 내면 되기 때문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된다” 이 장면을 보고 정도전의 철학이 궁금하던 차에 조유식의 『정도전 을 위한 변명』을 만났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 면은 ‘(10년 동안) 유배지에서 민 초들과 만나며 民이 나라의 근본이 라는 공자나 맹자의 가르침을 피부 로 실감하고, 정치란 결국 벼슬아 치들의 입신양명을 위한 것이 아니 라 농사짓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어 야 함을 가슴 깊이 깨우친’ 정도 전의 이상이었다.(129쪽) 이상을 현 실화하기 위해 싸웠던 삶과 죽음을 기록한 이 책은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고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여전히 국가의 존재의미를 되묻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정도전의 계민수전(計民受田) 방식은 진보적인 개혁안 정도전의 사상과 정치적 실천은 여러 대목에서 눈에 볼 수 있다. 우선 전제개혁안과 국가의 기능에 대한 생 각이다. ‘정도전의 개혁안은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해 나라 안의 모든 농민에게 식구 수대로 분배하는 이른바 ’계민수전(計民受田)‘ 방식으로 철저한 개혁을 지향했다.’(192쪽) 그의 이러한 전제개혁안은 기득 권 세력에 의해 타협적으로 하향 조정되었다. 그러나 이후 정약용의 ‘여전제’나 미군정 시기 일본인 지주 와 친일 한국인 지주들의 땅을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라는 요구와도 비슷한 맥락인 진보적인 개혁안이었다.


정도전의 민본주의는 권력과 세금의 기원을 백성에게서 찾았던 부분에서 알 수 있다. ‘통치자는 법을 가지 고 그들을 다스려서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평화롭게 해주어야만 민생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 은 농사를 지으면서 병행할 수 없는 것이므로 백성은 10분의 1을 세금으로 바쳐서 통치자를 봉양한다. 통치 자가 백성으로부터 수취하는 것이 큰 만큼 자리를 봉양해주는 백성에 대한 보답 역시 중한 것이다.’(262쪽) ‘남의 음식을 먹는 자는 남을 책임져야하고, 남의 옷을 입는 자는 남의 근심을 품어야 한다.’(304쪽) 라는 그의 생각은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와 개념과 유사하다. 무릇 군주와 관료들은 백성의 노 동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니 책임지고 백성의 근심을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권력이 가진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다수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는 지금,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해야 할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인은 남의 음식을 먹는 자, 백성의 근심 헤아려야

둘째 정도전의 사상 중 눈에 띄는 부분은 재상 중심의 신권 강화다. ‘자질이 일정치 않은 세습 군주가 전 권을 행사하는 왕권 중심주의보다는 천하 인재 가운데 선발된 재상이 국정의 중심이 되는 재상중심주의가 왕 조 국가에서 가장 합리적인 정치제도라고 믿었다.’(280쪽), ‘임금이 신하만 못하면 신하에게 전권을 맡기 는 것이 좋다’ (285쪽)와 같이 정도전이 구상했던 재상중심의 정치는 전제군주 시대에서 상당히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근대 유럽에서 발생한 입헌군주제와 많은 부분 닮아있다. ‘정도전은 자신의 저술에서 ‘충(忠)’이라는 개념을 거의 쓰지 않았다. 대신 ‘정(正)’이라는 개념이 그 의 저술 곳곳에서 나타난다. 정이란 권력을 바로잡는다는 것이요, 임금을 바로잡는다는 것이다. 재상 이하 백 관들의 책무는 임금에 대한 무조건 충성이 아니라, 임금이 옳은 정치를 하도록 임금을 도와 정치를 바로잡는 데 있다.’(286쪽)에서 알 수 있듯이 정도전은 군주와 신하는 서로 돕고 견제하는 권력의 균형을 통해 올바 른 정치를 지향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모든 조직에서도 통할 수 있는 대등하고 민주주 의적인 관계이다. 실제로 정도전과 이성계는 군주와 신하라는 절대적인 상하관계 보다는 일종의 역할 분담의 대등한 관계였다. 정도전이 구상했던 재상중심의 나라가 현실화되었다면 조선시대 무능한 군주에 의해 나라 가 거덜 나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정도전은 국제정세를 조망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그리하여 시기적절하게 사대와 자주사이를 줄타기하 며 조선의 정체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은 전근대적인 미신과 신앙으로부터 자유 로웠으며 특히 소외된 사람들, 즉 여성, 노비, 서자 등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평등의식과 측은지심 은 지금 내놓아도 당당할 정도로 발전된 인식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우리 역사에도 이토록 위대한 사상가이자 정치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그는 늘 가 슴 속에 이상을 간직하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인정하며 다른 정치노선을 가진 자들과 연합했다. 때로는 친원파 이인임과, 보수파 최영, 정몽주 등과 손잡고 당면한 문제의식들을 하나하나 해결해갔다. 조금만 결이 달라도 선을 긋고 갈라서는 우리 진보세력들이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실패는 지혜와 성심의 부족, 진실에 눈 떠 일상에서 실천해야 이방원이 주도한 왕자의 난으로 상식과 합리가 지배하는 역동적인 민주주의를 구현하고자 했던 정도전의 사 상과 철학이 함께 묻히게 된 점이 너무나 아쉽고 안타깝다. 그가 자신의 철학을 설파하고 백성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무기(이를테면 문자, 정보 기기 등)가 있었다면, 자신의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규합해 정치 세력 화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면 조선은 어떤 모습으로 발달할 수 있었을까? 깨달은 자가 깨닫지 못한 다수 민중을 안타깝게 여겨 더 많이 베풀고 더 나은 물질적인 조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의 애민사 상을 민중이 세상의 주인임을 자각하고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돕는 진보적인 사상의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면 우리 역사는 더 진전할 수 있었을까?

정도전은 자신의 실패를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착함과 의로움이 현실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다. 인의의 편에 서 있다고 무조건 승리하는 것이 아니 다. 그 진정성에 부족함이 있고 그 노력에 용의주도함이 없으면 정의의 깃발을 들더라도 백전백패다. 의로운 자가 곤궁하고 선한 자가 화를 입는다면, 그것은 시대를 잘못 만났거나 세상에 정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지혜와 성심이 부족했을 따름이다.’(134쪽) 우리 모두는 늘 실패하는 것 같다. 정도전 의 말을 빌자면 그것은 정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지혜와 성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분노 를 잊지 않고, 진실에 눈 감지 않고, 지혜와 성심을 찾고 발전시키기 위해 공부하고 일상에서 진보를 실천하 는 것이 이 잔인한 4월에 허망하게 죽어간 단원고 아이들 뒤에 살아남은 우리들의 몫이리라.


경계에서 책 읽기

글자 사이에서 뿜어져나오는 아드레날린의 홍수 - 앨프래드 버스터 『타이거! 타이거!』

오세섭 (아카데미 회원, 독립영화 감독) 앨프리드 베스터의 1956년作 <타이거! 타이거!> 는 흉포한 소설이다. 주인공 걸리버 포일의 성격 이 흉포하며, 그의 행동이나 이 소설의 전개방식 또한 그러하다. 이 작품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SF버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설정 면에서는 비슷하지만 훨씬 더 거칠고 미쳐 날뛰듯이 사납 다. 때는 서기 2300년 대. 우주에 표류 중이던 걸 리버 포일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구조 신호 를 무시하고 지나간 우주선 ‘보가’호에게 복수 를 결심한다. 그리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복수 의 대상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상대방도 만만치 않다. 그들은 포일의 복수를 저지하기 위해서, 그 리고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포일을 막아선다. 이 것은 사실 개인 대 개인의 복수와 대결을 떠나 개 인 대 집단, 더 나가서는 지구와 다른 행성 간의 전쟁과도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는 몇 가지 반전이 운명처럼 포일을 기다리고 있다.


망나니 포일의 복수 분투기? 성장기? 한 남자의 복수가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는 점에서 무척 매력적이고 근사한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걸리버 포일의 복수와 그 과정은 무자비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사정 따윈 안중에 없다. 이 소설이 매력적이라면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일 것이다. 별 볼일 없고, 망나니 같던 포일이 복수를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복수에 최적화 되어 닥치는 대로 파괴하며 엄청난 스케일로 화려 한 복수극을 완성시켜 나갈 때, 종이와 글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양의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온다. 작품 속 포일이 사는 시대는 자본주의와 빈부 격차의 끝을 보여주고 있는데, 걸리버 포일은 최상위 지배층이 구축해 놓은 그들만의 시스템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파괴해 버린다. 마초, 야만인이자 온갖 것의 파괴자인 걸리버 포 일이 자신만을 위해, 복수의 피를 맛보기 위해 포효한다. 이렇게 팔딱거리는 불량스러움은 소설을 빛나게 만 든다. 개인이 사회와 집단, 세계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나는 리 마빈이 출연했던 영화 <포인트 블랭크>를 떠올 렸다. 극 중 리 마빈 또한 복수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개자식이었다. (이 영화는 1999년에 멜 깁슨 주연 의 <페이 백>으로 리메이크되었다.) 이렇게 견고해보이던 그들만의 시스템에 흠집이 나고, 작은 구멍이 큰 구 멍으로 바뀌면서 결국엔 파국으로 치닫는다는 건 무척이나 매력적인 일이다. 개인이 조직과 맞서서 싸워 이 기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점점 복잡한 시스템의 현대사회에서는 그 근원과 상층부를 알기 어려우며, 양파껍질 벗겨지듯 또 다른 진실과 음모가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존트는 아무나 하나? 그렇다고 개인과 조직의 대결만이 이 소설의 장점은 아니다. ‘존트(순간이동)’에 대한 설정 같은 설정은 무척이나 재미있다. 아마도 2008년에 나온 영화 <점퍼>는 이 소설의 ‘존트’가 중요한 아이템이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59년에 나온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타이탄의 미녀>를 보면 ‘현현’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아마도 ‘존트’와 비슷한 개념이지 않을까 싶다. 그 외에도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지하 감옥에 서 우주의 행성까지 광포한 주인공의 캐릭터와 비슷하게, 이야기의 스케일과 진행, 내러티브의 구조 또한 거 칠고 산만하고 광포하다. 여러분이 만약 이런 점을 허락한다면 분명 매력적인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거친 남자의 울퉁불퉁한 팔뚝을 생각해보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몹시 기분 잡치게 만드는 쓰레기 소설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긴 걸리버 포일이라면 그런 평가를 받아도 전혀 개의치 않을 것 같지만.


교신

싸울 수 있을까 송덕호 (아카데미 회원)

참회처럼, 울적하고 나른한 죄악처럼. 자기들과의 눈부신 동맹관계를, 그 과오를 다시금 범하도록 한 죄악처럼.

교신을 쓰기 위해 며칠 자료를 찾고 뒤적이며 연애타령에 지나지 않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의 이 치를 이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100자,1000자 글의 분량이 늘어날수록 밀려오는 깊은 슬픔은 무엇인가? 도저 히 글을 쓸 수가 없다. 아니 글이 공중에 붕 떠있는 것 같다. 그리고 글 쓰는 걸 중단하기로 했다. 그리고 숨쉬기조차도 버거운 이 하늘 아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는다. 세월호의 참상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 무력감을 어떻게 토로하여야 하 는가! 바닷물이 밀려올 때 느꼈을 그 공포를 같이 손잡으며 노래로 이겨낼 수 있었을까? 손마디가 부러지도 록 붙잡고 싶었을 것이고, 한 줌 공기를 마시고 싶었으리라! 세월호가 바다로 침몰한지 며칠이 지날 때까지 난 무심했다. 그냥 사고인줄만 알았다. 살아서 돌아올 수 있 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무심함이 분노로 바뀌고 그리고 14일, 깊은 슬픔에 빠져있다. 아무렇 지도 않게 보던 세월호의 현장사진이 희생자들의 스마트폰 기록사진과 동영상으로 바뀌고 난 후부터 먹은 걸 게워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마 볼 수가 없다. 국가와 자본의 연결고리 앞에서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 거대한 탐욕의 시대를 꿰뚫을 비수가 내 앞에 는 없다. 단지 이 글을 쓰며 나의 감정을 기록할 수밖에 없다. 세상이 진보할 것이라는 헛된 망상은 개한테 줘버릴 것이다. 지금의 감정도 슬픔도 점점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리라. 마지막 남은 숨 방울로 뱉어 낸 그 한마디. 살고 싶어요!


둔지미에서

지워야할, 아직 지우지 못한 이름들 강명숙 (아카데미 활동가) 신진도행 오후 3시30분. 일요일 오후 태안시외버스터미널 매점에서 생수 한 병을 사며 신진도가 어떤 곳이냐고 물었다. 주먹처럼 툭 튀어나온 지형, 가고 오는데 걸리는 시간, 주변볼거리 등을 스마트폰으로 검색한 뒤였다. “뭐…… 그냥 항이죠.” 몇 시간을 숨 가쁘게 달려온 차들이 뿜어내는 입김은 오후의 나른함에 긴장감을 덧씌워 주었다. 낯선 공간 에 홀로 놓여있다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차표는 내릴 때 내세요.” 선불, 직선코스에 길들여진 도시인이 향수에 젖기라도 하듯 의자에 깊숙이 몸을 눕혔다. 이윽고 시야를 불 쑥 침범하는 마늘밭. 이른 봄 지푸라기 사이로 싹이 돋아나는 마늘밭이 참 좋았던 기억이 났다. 가지런히 올 라온 잎들과 작지만 알싸한 봄마늘의 맛은 여린 찔레줄기만큼 상큼했다.


그녀가 그랬다. 아이들의 질문에 스스럼없이 대꾸하는 그녀는 사진보다 훨씬 귀엽고 소녀같은 모습이었다. 모진 바람에 당당하게 살아낼 줄 아는 작은 거인 그녀는 총회가 있던 날 제일 먼저 도착해 서가에 꽂힌 책 들을 찬찬히 살피고 총회자료집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총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뜬 까닭을 안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아카데미를 탈퇴하고 싶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고 그녀와 20여분 남짓 통화한 게 마지막이었다. 아카데미에 뼈아픈 충고를 남겨준 짧지만 깊은 인연이었다. 떫은 감으로 인한 속쓰림에 생가지가 효험을 발휘하듯 기억에서 오는 울렁증을 다스려줄 바닷바람이 절실했 다. 다행히 버스는 속력을 내고 있었고 내 눈은 이미 종점을 확인하고 있었다. 심심한 여행객의 걸음걸이로 내려선 곳은 안흥외항. 어항에 묶여있는 작은 배들과 곳곳이 파헤쳐진 공사현장, 그리고 낚시꾼들의 손에 들 린 짐들을 보는 순간, 내륙인의 허접한 상상력은 가뭇없이 증발해버렸다. 30여분을 배회하다 길을 바꿔 도착한 곳은 연포해변. 여름 피서지의 축제를 숨기고픈 고운 백사장은 뜨거 운 여름 부산 해운대의 모습과 조금은 닮아있었다.

그의 주소지도 부산이었다. 대전에 뿌리를 두고 있거나 지인의 반강제적인 권유로 회원이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총회를 앞두고 참석여부를 묻는 음성통화에서 그와 첫 인사를 나눴다. 부산에 갈 일이 생기면 꼭 한 번 찾아가 뵙겠노라 약속 아닌 부탁을 드렸었다. 몇 주 후 아카데미를 탈퇴하고 싶으니 절차를 알려달라는 메시지와 함께 아카데미에 그동안 서운했던 점을 보내왔다. 물리적 거리가 심리적 거리를 동반하는 이유는 관심과 배려의 결핍에서 온다. 실수나 착오를 핑계 로 쉽게 항변할 수 없었다. 아쉽지만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를 건네야 했다. 연포해수욕장의 일몰은 뒤에서 소리 없이 내려왔다. 뭔지 모를 갈증에 다시 자리를 떠야했다. 얼마 안가 갈 음해변에 당도하였을 때 ‘아!’ 하는 묵음의 탄식이 심장을 뻐근하게 조여 왔다. 뜨겁고 싱싱했던 선홍빛의 해가 차가운 어둠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그곳에 그분이 서 계셨다. 백발홍안의 청년, 참교육자이자 실천가였던 그 분이 그렇게 찬 바닷가를 버티고 계셨다. 당당하게 늘 그랬던 것처럼. 무엇인가 울컥 올라오다가 목구멍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낯선 곳으로의 반나절 여행, 그 곳에서 묻어 버리거나 게워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 을까. 매주 문자공지를 보내면서 지워야할, 아직 지우지 못한 이름들에서 매번 멈칫거리기를 반복한다. 선택 과 해제는 내 의지가 아니라 습관이 되었고 수신자 없는 스팸문자는 지금도 전송중이다. 오늘도 나는 일몰의 추를 달고 멀미를 하고 있다.


대전시민아카데미 휘소식 vol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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