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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 제 호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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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22 1:16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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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호

2014.3

제7호

10,000

www.laborparty.kr

기초의회가세상을바꾼다

지금 +여기노동당 ■ 전주시의회서윤근의원인터뷰 기획 특집 ■ 국경을넘어‘어글리코리안’ 쟁점토론 ■ 장기성장전략,‘청년정당’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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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이야기

“아빠 올해최저임금이…” 올해도두차례의정보고서낸전주시의회서윤근의원 ,

초등학생아들에게심부름값으로시간당천원을주기로하고같이 의정보고서를돌리던날이었다 노동청앞을지나다현수막을본아 들이지나가듯한마디를던졌다“올해최저임금이…”등골사이로 식은땀이쭉흘러내렸다 올해초 열악한재정여건아래의정보고서를꼬박꼬박발행한노동 당기초의원들이여러언론에보도됐다 서윤근의원의경우 작년에 이어올해에도두차례의정보고서를냈다 국회의원과 달리 기초의원들은 의정보고서 제작·발송비를 지원받 지못한다 자비로의정보고서를만드는판국에우편발송은엄두도 못낸다 당원들과아내 초등학교다니는아들까지동원해서집집마 다나눠주고다닌다 젊었을때는대문마다직접붙이고다녔는데지 금은무릎이시려서우체통에꽂는다며멋쩍게웃는다 “세상을바꾸고싶은욕구 년째붙들고사는그욕구가제삶을밀 어가는원동력입니다‘진보정당’이저의무기죠 당이당원들을가 장필요로할때가지금입니다 힘들기도하지만 가장힘든시기니까 더더욱저의자리에서제가할일을할겁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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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의회서윤근의원인터뷰전문은 6~10쪽 <지금+여기노동당>에서 볼수있습니다. 사진 : 정정은 편집부장

미래에서온편지제7호

발행인 이용길 편집인 이장규 위원회 김건담김성현노정박권일장석준정정은정철수

조윤호최백순홍원표

교 열 노정양솔규장석준정정은 디자인 고미숙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마포-라00403) 발행일 2014년 2월 26일 주 소 서울마포구서교동 371-12 비금빌딩 7층노동당 전 화 02) 6004-2006, 2007 팩 스 02) 6004-2001 이메일 laborzine@gmail.com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인 쇄 인천시계양구계산동 973-15 원일컴 가격 10,000원


미래에서 온 편지

‘ 미래에서 온 편지’ 는 영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작가, 미술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1891년에 낸 소설 제목

News 『News from Nowhere』 을 우리말로 의역한 것입니다. from Nowhere

nowhere는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는 뜻입니다. ‘ 유토피아’ 라는 말의 원래 의미도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고 하지요. 이제 노동당의 기관지에 ‘ 미래에서 온 편지’ 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한국 사회의 답답한 현재에 햇살을 들이는 미래의 틈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nowhere는 now+here(지금 여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미래가 되기 위해, 이 편지를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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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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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못된 것만 배웠다|<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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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모집·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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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 우리동네 진보정치② 전주시의회 서윤근 의원 끈기와 근성이 유일한 자산|노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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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국경을 넘어‘어글리 코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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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새는 바가지 캄보디아 유혈사태, 예견된 참사|나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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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도 샌다 툭하면 ‘너네 나라’ 로 돌아가라니|박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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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글리 프레스, 한국 언론|조윤호

25 ‘국익’ 의 탈을 쓴 제국주의|홍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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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기초의회가 세상을 바꾼다

32 ‘개혁’ 이라 쓰고‘꼼수’ 라고 읽는다|김민하 36

기초의회 생활정치, 무엇을 여성에게 묻고 있나?|김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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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원 100% 활용하기|화덕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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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콜트콜텍을 읽는 열두 개의 시선② 오래된 물음|이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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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진보정치 열전 4|반역과 자유를 향한 투쟁사, 최현숙(1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심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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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포럼 의료영리화에 맞서 공공의료 강화를|이장규


2014년 3월 제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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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본 농업이야기 쌀값이 커피보다 싸다고?|연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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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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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원자력연구원 노동당 입당 줄이어|김윤기

·목차

78 “노동당이 왜 필요한지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정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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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토론 장기성장전략,‘청년 정당’ 을 제안한다|장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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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진보다“대학 정문을 넘어서는 새로운 청년운동 열겠다” |노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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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진보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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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좌파 이웃 좌파⑧ 아일랜드 좌파정치(1)|장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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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 통신 벨기에 선거 시스템 들여다보기|엄형식

삶과 문화 104

무지개 칼럼“좌파 예술을 기억하라!”제2회 레드어워드 개최|양솔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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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문화예술 당원찾기 칼라TV 영상활동가 겸 음악인, 김일안

“담장을 넘어갈 사람이 필요하잖아요”|나도원 112

불온한 서재 지구적 좌파정치의 르네상스를 위한 프리즘|양솔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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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현대사 비문 없는 비석|강남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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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꿈 노동당가 <대지와 미래를 품고>|민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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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별별이야기|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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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니 칼럼 봄의 맛과 향은 냉이로부터 시작된다|이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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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입맛 우리는 서울에서 장醬을 담가 먹는다|고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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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접으며 탈핵의 정치|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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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못된 것만 배웠다 얼마 전 아프리카예술박물관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의 열악한 고용 실태가 언론에 크 게 보도됐습니다. 새해 벽두에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파업 진압에 공수부대가 투입되고 한국 업체들이 손배소송을 제기하겠다는 기사가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국내에 서의 이주노동자 탄압과 차별은 해외에서의 노동착취·탄압과 쌍을 이룹니다. 경제발전기 개 발도상국의 지위에서 각종 인종차별을 당하며 저임금으로 착취당했던 한국이 이제는‘착취하 는 자’ 의 위치에 섰습니다. 어쩌면 이렇게‘못된 것’ 만 배웠을까요.

노동당 기관지《미래에서 온 편지》3월호 특집에서는, 국경을 넘나들며 자행되는 한국 자 본의 노동탄압을 집중 조명합니다. 동남아에서 한국 기업이 행한 노동탄압에 맞서 오랫동안 연대활동을 해오신 국제연대 활동가,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싸워 온 이주노조 활동가 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한국 기업의 수익률만 걱정하는 언론의 보도 행태도 다시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라 안팎에서 외국인 노동자 탄압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노동’ 의 관점에서, 그리고‘제국주의’ 의 관점에서 분석합니다.

2014년 지방선거가 이제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기초의회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그 생생한 증언을 <지금+여기 노동당>과 3월호 <기획>에서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최근 발표된 장 기성장전략 보고서 초안에 대해 <쟁점토론> 지면에서 토론의 장도 엽니다. 많은 당원들의 관 심 바랍니다.

캘 나물이 없어서 겨우내 연재를 쉬었던 <심마니 칼럼>도 3월호부터 다시 싣습니다. 새로 운 출발은 과거와의‘단절’ 을 전제로 한다고 합니다. 못된 것은 그만 배우고, 봄의 기운을 받 아 안아서 새로운 희망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14년 2월 26일 <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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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모집 우리는 길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 사람과 자연이 공존 가능한 지구생태계, 차별과 소외 넘어 모두가 평등한 세상, …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밑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없는 길을 만들고, 스스로 길이 됩니다. 그래서 노동당의 꿈은 곧 <미래에서 온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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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합니다■ 지난 2013년 12월호의 <의원단일기> 기사 중 1970년대 주차금지 표지판 사진은 고(故) 전몽각 선 생님의 사진책『윤미네 집』 에 수록된 사진입니다. 편집팀이 출처 표기 없이 수정·게재하였습니 다. 작가 고(故) 전몽각 선생님과 저작권자 이문강 선생님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당의 공식 기 관지를 펴내면서 중대한 편집 사고를 낸 데 대해 독자 여러분께도 송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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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우리동네 진보정치②

끈기와 근성이 유일한 자산이다 전주시의회 서윤근 의원 정리 노 정 편집실장 / 촬영 정정은 편집부장

“주민을 어디서 만나냐고요? 주민이 당으로 들어오죠” 지방의원이 자기 동네에서 진보적 의제를 갖고 주민들을 만나고, 그렇게 만들어진 네트워크가 다시 탄 탄한 지지 기반이 된다면 더없이 바람직한 일이다. 지난호‘지금+여기 노동당’ 에서 소개한 장태수 대구 서구의원과 어린이도서관 <햇빛따라>가 그런 사례다. 나경채 서울 관악구의원과 <정책연구소 오늘>도 마 찬가지다.《미래에서 온 편지》 는 이제까지 지방의원과 거점공간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인터뷰·기고를 6


③ 사진설명 : ① 제301회 임시회에서 완주전주 통합과 관련해 질의 중인 서윤근 의원(사진: 전주시의회 의원 홈페이지) ② 전주시 버스 파업 해결 촉구를 위한 삼보일배 (사진 : 전북도당) ③ 전북시국회의 대표자들과 함께 기자회견에 참석한 서윤근 의원(사진 : 서윤근 의원 페이스북)

받아 싣곤 했다. 어쩌면‘지역 진보정치의 정석’ 처럼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은 선거를 채 몇 달도 남겨두지 않은 2014년 3월이다.‘총대를 메는 심정으로’뒤늦게 출마를 결의했거나 선거운동을 이제 막 시작하려는 당원들에게 이런‘정석’ 은‘이번 선거 나오지 말라’ 는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사업을 구상하고, 공간을 만들고, 몇 년 혹은 몇 십 년을 지역 주민들과 함께 아웅다웅 부대껴야 하는 거점공간이 석 달 만에 뚝딱 나올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새로운 고민을 끌어안고 끙끙대던 중에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북도당에서 사무처 장을 하다 중앙당으로 온 고승희 살림실장이 지나가듯 이런 말을 던진 것이다.“전주에 거점공간이 있느 냐구요? 서윤근 의원의 경우엔 주민들이 당으로 들어오죠. 스스로 당원이 돼서 선거운동을 같이 뛰어요.” 그날 당장 전주행 일정을 잡았고 2월 7일 오후, 전주에서 서윤근 시의원과 허옥희 부위원장을 만났다.

불과 석 달 남겨두고 선거운동 시작한 2006년 선거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진 뒤 2000년부터 군산에서 상근을 시작했다. 초창기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 다른 곳도 아닌 전북 지역에서 당무를 맡기 시작한 제1호 상근자였다. 아직도 서윤근 의원은 이를 자기 삶의 ‘프라이드’ 로 여긴다. 2006년, 지역에 상근자를 둘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총대 멘다는 심정으로’전주시의회 의원으로 출마 지금+여기 노동당 7


를 했는데 덜컥 당선이 됐다. 선거를 불과 석 달 앞두고 선거구를 급하게 바꾼 상황에서다. 밴드 활동을 함께 하던 지역 당원들과(서윤근 의원은 드럼을 친다) 2005년 말부터 일찌감치 선거 사무실을 꾸리고 있 었다. 그런데 3인 선거구로 획정된 곳에 아무도 후보로 나서지 않아, 5월 31일이 투표날인데 3월 1일에 새 선거구에서 선거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당선됐어요. 지역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상가를 계속 돌았어요. 무지하게(!) 돌았어요. 한 번 도는 데 일주일 걸리는데 세 번, 네 번, 다섯 번 가니까, 나중에 상가 쪽에서부터 제 이름이 흘러나 오기 시작했어요. 그런 후보가 없었던 거예요. 그리고 30~40대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임대아파트 쪽을 집중적으로 돌았어요. 선거는 석 달 남았고, 이른바‘선택과 집중’ 을 한 거죠.” 가장 도움이 된 것은‘지인 명 부’ 다. 2006년 선거에서 2560표를 얻어 3위로 턱걸이 당선했을 때, 그가 만든 지인 명부가 2400개였 다. 2010년 선거에서는 일곱 명의 후보자들 중에 23.7%로 가장 높은 지지를 얻어 재선에 성공했다. 재 선 때는 지인 명부 5800개를 만들 었는데 5080표를 득표해 1위로 당 선했다.‘지인 명부’조직과 득표가 거의 들어맞는 셈이다. “지인 명부를 써달라고 전화를 한 번 하고 두 번 하면 알았다, 그러고 말아요. 그런데 두 번, 세 번, 네 번 전화를 하니 정말 도와줘야겠다 싶더래요.‘도와줄게’한 마디 듣고 끝내선 안돼요. 후보에게 일단 지 인 명부를 써 주면 그때부터 책임을 져야 돼요. 유권자들에게‘나중에 서윤근 캠프에서 전화 올테니 전화 잘 받아줘라’말 한 마디라도 더 하게 되는 거죠. 이건 진보정치하고 전혀 관계없는 선거 전술이지만, 누 구에게든 절실하게 도움을 요청하고 확신을 갖고 한 명 한 명 만나야 한다고 봐요. 국회의원이나 단체장 선거가 아닌 지방의원 선거는 명부 취합이 특히나 중요해요.” 당원들하고만 만나는 게 아니다. 산악회를 비롯해 주민들과의 모임도 10여 개쯤 다닌다. 의정 활동 성 과를 공유하고 지역 현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주민들이 입당을 한다. 자기만 입당하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입당을 권유한다. 그렇게 입당한 주민들이 지금까지 150여 명에 달한다. “전주 당원들 중에 노조 조합원은 50명이 안 돼요. 전통적으로 노조나 시민단체, 운동조직이 없는 동네 기도 하고요. 전북 지역의 좌파 그룹도 대중적 진보정당 운동에 회의적인 그룹이 주류예요. 진보정당이 지 역 정치를 시작할 기반이 굉장히 취약하다 보니 생활 공간 안에서 주민들을 만나 확대 재생산을 해야 하 8


는 한계가 있는 거죠.” 이를 다만‘한계’ 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작년에 울산에서 권진회 위원장을 만났을 때 그도 정확히 같 은 대목을 지적했다. 산악회건 테니스회건 지역 모임에 당원들이 적극적으로 들어가서 주민들을 만나고 조직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산 해운대 화덕헌 구의원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당원들이 주민들과 일상적 으로 만나는 접촉면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생협이나 진보적 시민단체에 한정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진보 정당의 지방의회 입성도 힘들거니와 바람직한 진보정치라고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주당의‘아성’전주시의회에서 보낸 8년 서윤근 의원은 선거 전략이‘진보정치와 전혀 관계가 없다’ 고 말했지만, 과연 그럴까? 돈도 사람도 없 는 진보정당이 지방의회에 의원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성 정당보다 열 배, 백 배는 더 뛰어야 한다. 그리고 지방의회에 한 사람의 진보정당 의원이 입성했을 때 지역 정치가 어떻게 바뀌는지 전국의 노동당 지방의원들이 4년의 의정 활동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2006년, 초선으로 당선된 그해 행정사무감사에서 전주시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 실태조사를 보고하면 서 지역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구청 청소용역 노동자의 근로계약서에‘생리휴가를 신청하려면 증거물을 제시해야 한다’ 는 조항을 지적했더니(동석한 여성들 경악!) 공무원들마저 입이 딱 벌어졌다. 그 자리에서 용역 사장을 불러 세우고 사과를 받아냈다. 당선 이후 첫 번째 주목을 받았던 사건이다. 시내 야산에 골프연습장이 만들어지려던 것을 무산시키기도 했다. 설치 예정지역 바로 앞에는 학교가 있었다. 시 당국과 정면으로 부딪쳤고, 모씨 종친회에 불려가서 협박을 당하기도 했다. 백발의 어르신들이 긴 탁자 양쪽으로 쭉 둘러앉아“의원 생활 계속 하실 수 있겠느냐”묻는데 등골이 서늘했다고 한다. 2007년에는‘비정규직노동자 지원센터 조례’ 를 발의했지만 거푸 부결되고 유보되다가 결국 2년 만에 조례를 통과시켰다. 조례의 필요성을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까지 다 했다. 표결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조례 안에 찬성을 던지겠다고 했는데, 막상 표결에 들어가면 지는 것이다. “정확히 22개월 만에 통과됐죠. 전주시의회에서는 민주당이 여당인데, 이게 하나의 당이 아니에요. 심 지어 당이 없어 보여요. 의장단 선거를 할 때는 뭉치죠.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땐 절반은 새누리당 같고 절 반은 민주당 같아요. 그나마 의식이 깬 의원들도‘노동’하면 등을 돌려요.” 장태수 의원이 고군분투 중인 대구 서구의회와 서윤근 의원의 전북 전주시의회는 거울쌍과도 같다. 전 주시의원 서른 네 명 중에 민주당 의원이 서른 명이다. 가장 씁쓸했던 때가 초선 당시 의정평가단 조례안 을 발의했을 때다. 민주당의 패권으로 인해 개혁적인 조례나 예산이 거푸 반려되는 제왕적 구조에 균열을 내려는 의도였다. 네 개의 상임위에 맞추어 분과별로 의정평가단을 만들고 의정활동도 참관하면서 의회에 자정 기능을 부여하자는 것이었다. 이 조례안은 만장일치로 부결됐다. 어느 의원은 딱하다는 듯 이렇게 말 했다.“서 의원, 왜 스스로 족쇄를 채우려고 그래?” 2010년 재선 직후 전반기에는 도시건설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시의회 역사상 처음으로 비(非)민주당 지금+여기 노동당 9


소속으로 상임위원장에 당선된 것이다. 민주당의 독식 구조에서 불가능으로 여기던 일이 벌어져 지역 언 론에서 크게 보도했다. 원내 선거는 워낙 치열하다. 이탈표가 나올까봐 진영 별로 투표 전날에 여관을 잡 아 합숙을 할 정도다. 당시 민주당 측에서는 서윤근 의원에게 표를 던진 의원들을 당기위에 제소한다고 난리였다. “실제로 상임위원장을 해 보니, 다시 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반대하는 의안에 제 손으로 의사봉을 쳐 야 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어요. 절대 만들어져서는 안되는 조례, 절대 통과돼서는 안되는 의안인데 표 대결에 밀리니까…. 지는 데 익숙해졌어요. 예전엔 밤잠도 잘 못 자고 그랬는데 이젠 잘 자요(웃음).” 2010년 재선에 성공한 이듬해에는 전국에서 최초로 주거복지지원조례를 만들어 통과시켰다. 지역의 주 거복지센터와 함께 정말 공들여서 만들었지만 여기에도 우여곡절이 있다. 시장이 의도하고 기획한 집행부 발의 조례는 힘이 실리지만, 의원이 발의한 조례는 대개 처박히기 일쑤다. 가까스로 제정되더라도 예산이 편성되지 않는다. “싸우고 싸워서 올해에 겨우 실태조사 예산 삼천만 원을 따냈어요. 다른 지역에서는‘모범 사례’ 라며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데 답답하죠, 집행이 느리니까. 얼르고 압박하면서 이렇게 한 발짝씩 앞으로 가야 지요.”

“전주 민중의집 만들 겁니다. 이름도 지어놨어요” 올해 초, 열악한 재정 여건 아래서 의정보고서를 꼬박꼬박 발행한 기초의원들에 대해 여러 언론에서 보도한 적이 있다. 덕분에 장태수 의원을 비롯해 노동당 소속 기초의원들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졌다. 서윤 근 의원은 2013년만 두 번의 의정보고서를 만들었다. 국회의원과 달리 기초의원들은 의정보고서 제작·발 송비를 지원받지 못한다. 자비로 의정보고서를 만드는 판국에 발송은 엄두도 못 낸다. 당원들과 아내, 초 등학교 다니는 아들까지 동원해서 집집마다 나눠주고 다닌다. 젊었을 때는 대문마다 직접 붙이고 다녔는 데 지금은 무릎이 시려서 우체통에 꽂는다며 멋쩍게 웃는다. 서윤근 의원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전북도의원으로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전주판 민중의집 구상도 하 고 있다. 이름도 지어놨다. <집강소>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들이 전주를 점령하고 나서 만들었던 민 중 통치기구다. “스무 살 때부터 세상을 알게 됐고, 이 비정상적인 사회를 정상적인 사회로 바꾸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 죠. 20년째 붙들고 사는 그 욕구가 제 삶을 밀어가는 원동력입니다. 그리고 저에게는‘진보정당’ 이라는 무기가 있죠. 이 진보정당이 무럭무럭 잘 커서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해야겠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다 보 니 시의원이라는 직함을 갖게 된 것이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여전히 어디선가에서 제 역할을 찾고 있 을 것 같습니다. 당이 당원들을 가장 필요로 할 때가 지금입니다. 힘들기도 하지만, 가장 힘든 시기니까 더 더욱 저의 자리에서 제가 할 일을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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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국경을 넘어 ‘어글리 코리안’ 한국 자본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노동인권 침해 사례가 끊임없이 보고되고 있다. 한국에 들어와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고용 실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처참하다. 가난했던 시절 각종 인종차별을 당하 며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던 한국이 이제는‘착취하는 자’ 가 됐다.


(사진 : 나현필 제공)

특집 / 국경을 넘어‘어글리 코리안’

밖에서 새는 바가지

캄보디아 유혈사태, 예견된 참사 노동자들이 시위하는데 군대가 출동해 실탄을 발포한 이 유혈진압 사태에 전 세계가 경악했다. 캄보디아 정부에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국 기업이 주도해 노동조합에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현필 국제민주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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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스’ 가 다른 한국 자본의 위엄 1990년대부터 한국 자본의 해외 진출, 특히 노동집약 산업인 의류 봉제 업체들의 해외 진출이 본격화 되면서 한국 기업의 노동인권 침해 사례가 끊임없이 보고되고 있다. 인건비가 생산비의 절대적 비중을 차 지한다는 특성상, 의류 봉제 산업의 열악한 현실은 비단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한국 기업들이 보여주는 위엄은 소위‘클라스’ 가다 르다. 동남아시아 및 중남미 지역의 한국 의류 봉제 업체들을 조사할 때마다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권위주의적인 현장 통제’ 와‘노조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 다. 한국 기업의 사장을 포함한 관리자들은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노동자들, 특히 여성 노동자들 에 대한 구타와 폭언, 성추행을 일삼았다. 국제사회에서 문제가 되자 직접적인 폭력은 상당히 줄어들었지 만 노동자들을 비인격적으로 대우하는 사례는 여전히 지적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용인되는 반말과 욕 설도 다른 문화권에서는 인격 모독으로 받아들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노동자들이 해고의 위협을 불사 하고 노동조합 결성에 적극 나서는 상황도 심심치 않게 조사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노조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다. 한국 기업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노동조합을 와해하려고 시도한다. 다른 국적의 자본들은 어용 노조를 통해 노동자들을 관리하기도 하는데, 한국 기업 은 심지어 어용 노조마저도 허용하지 않 으려는 게 일반적이다. 노동조합원이나 활 동가들에 대한 해고는 물론이고 공권력과 깡패들까지 동원한 회유와 납치, 폭력 사

한국 기업은 심지어 어용 노조마저도 허용하 지 않는다. 노동조합원이나 활동가들에 대한

례들이 부지기수다. 이렇다 보니, 한국 기

해고는 물론이고 공권력과 깡패들까지 동원

업의 노동권 탄압은 국제적으로도 악명을

한 회유와 납치, 폭력 사례들이 부지기수다.

떨치고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한국 정부 작년 12월 24일부터 캄보디아의 의류업체 노동자들이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총파업에 돌입했다. 70여 개의 한국 업체를 포함해 중국, 대만, 홍콩, 일본의 의류봉제 기업들이 낮은 임금을 노리고 캄보디아 에 대거 진출해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월 9만 원이 되지 않는 최저임금으로는 치솟는 물가와 생활비 를 감당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은 월 16만 원 수준의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이는 캄보디아 정부가 주 도하는 노동자문위원회의 실태조사 작업을 통해서도 그 타당성이 입증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최저임금을 올릴 경우 자본을 철수하겠다는 업체들의 협박에 굴복한 캄보디아 정부는 월 11만 원 수준으로만 인상하 겠다고 발표했고, 이에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한 것이다. 특집 국경을 넘어‘어글리 코리안’13


캄보디아 공수부대의 유혈진압 사태로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된 공장 앞(사진 : 나현필 제공)

총파업으로 생산에 차질을 빚자 한국 업체들은 대사관을 통해 캄보디아 정부에 파업의 조속한 해결을 요구했고, 12월 30일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은 캄보디아 정부에 사태 해결을 촉구(한국은 중국에 이어 캄보디아 투자액으로는 2위에 해당하는 국가이다)한다. 1월 2일 오전, 한국 기업인 약진통상 앞을 행진하

던 시위대들은 캄보디아 최정예 특수부대인 911공수여단과 마주하게 된다. 약진통상 바로 옆에 주둔하는 911공수여단은 이미 이전부터 약진통상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확인된다. AK-47소총과 쇠파이 프, 새총으로 무장한 약 60명의 공수부대원들은 비무장 시위대를 무차별 폭행하고 10명의 시위자를 연행 했다. 캄보디아 법에 따르더라도 공수부대가 민간인을 진압하거나 체포하여 구금하는 것은 모두 불법이 다. 1월 3일, 또 다른 캄보디아 공단지역인 카나디아 공단에서는 캄보디아 헌병대와 경찰이 시위하던 노동 자들에게 실탄사격을 가해 5명의 노동자가

캄보디아 정부에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국 기업이 주도해 GMAC에서 노동조합에 손해배상 을 청구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숨지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노동자들이 시위하는데 군대가 출동해 실탄을 발포한 이 유혈진압 사태에 전 세 계가 경악했다. 캄보디아 정부에 비난이 쏟 아지는 가운데, 캄보디아 의류봉제 업체들

의 모임인 캄보디아 의류생산자협회(GMAC)가 한국 기업의 주도로 노동조합에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유혈진압 사태에 한국 기업과 정부가 책임이 있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다섯 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고, 스물 세 명이 연행된 사태를 대하는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의 태도는 가히 놀라웠다. 사태가 발생 직후, 대사관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캄보디아 군 당 국을 접촉하여 기업들을 보호하고 있고 대사관의 군대 투입 요청이 캄보디아 당국이 사태를 조기에 해결 14


며 자화자찬하는 글을 올린 것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다. 시민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이 글은 3일 만에 삭제했지만, 대사관의 어이없는 행태는 계속되었다. 대사관은 다시 홈페이지에‘해명 글’ 이라는 것을 올렸다. OECD 회원 국가의 대사관에서 낸 글이라고 는 믿기지 않는 명문이라 (이 글도 현재는 찾아보기 힘들다) 주요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기업들은 직접적으로 시설물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거나 정상적인 조업을 하지 못하게 됨에 따른 생산차질과 납품차질 및 그로 인한 claim 피해 등 다양한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많은 기업 임·직원 들이 현 상태를 사실상 무정부 상태라고 규정하며 대사관에 애로를 호소하면서 재산피해는 물론 신변 안전에도 불안감을 느낀다고 전달해 왔다.” 한국 기업들이 얼마나 큰 시설물 파괴 피해를 입 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캄보디아는 현재까지도 군 부를 기반으로 하는 훈센정권이 사실상 철권통치를 하고 있다.‘무정부 상태’ 가 가능한 나라가 아니다.

유혈사태 직후 주캄보디아대사관에서 공식 페이스북 페이 지에 올린 글(위), 대사관 홈페이지에 올라온‘해명 글’ (아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생산의 차질이 빚어지는 것 이 당연함에도, 무정부 상태 운운하면서 군대 투입을 당연한 것처럼 강변하는 것도 문제지만, 현지 조사를 통해 약진통상과 공수부대 간의 유착관계가 사실로 드러났음에도 몰랐다는 변명을 하는 것은 정말 어처 구니가 없다. “한국 대사관은 캄보디아 정부에 유혈 강경진압을 요청한 적이 없다. (중략) 노동조합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는 한국 기업이 주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최소한 한국 대사관이라면 한국 기업인들의 공장‘사수’ 로 인해 유혈사태가 재발할 수 있는 가 능성에 주목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웠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캄보디아 군대에‘특별히’부탁하 여 현지 기업을 잘 보호했다는 변명만 하고 있다. 또한 대사관의 해명과는 달리, 한국 기업들이 손해배상 청구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도 현지 조사를 통해 사실로 드러난 상황이다. “우리 기업인들이 불법적인 제3자의 시위로 신변안전을 우려하는 상황에서 대사관에서 노·사문제이 니 손을 놓고 있으라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대사관은 노동자들의 시위로 한국 기업의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대사관에서 노사문제이니 손을 놓고 있어야 하냐고 항변하고 있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캄보디아의 인권상황을 특집 국경을 넘어‘어글리 코리안’15


노동, 시민단체들이 주한 캄보디아 대사관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사진 : 참세상)

전담하는 유엔특별보고관이 따로 존재할 만큼 인권상황이 열악한 국가에 한국 기업들의 투자가 확대되고 있는데, 부당 노동행위 및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인한 한국 기업 노동자들의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한국 정 부가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궁금하다.

‘격’ 이 있는 국가를 바란다 현재 국제사회는 다국적기업에 의한 인권침해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11년 유엔은‘유 엔 기업과 인권 이행지침(UN Guiding Principles on Business and Human Rights)’ 을 발표했다. 비록 조약과 같이 구속력이 있는 형태는 아니지만, 기업에게 인권존중의 책임이 있으며 각 국가들은 기업 에 의한 인권침해를 예방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라는 지침을 유엔 차원에서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는 자 본 진출국이 아니라 수출국도 해당된다. 즉, 캄보디아 사태의 경우에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캄보디아 진출 한국 기업이 인권침해를 저지르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세울 것을 요구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하고, 대사관의 글에서처럼 OECD에서 해외에 공적원조를 제공하는 선진국이 되 었다고 자랑하지만, 한국의 기업과 정부의 행태는 정말 부끄러운 수준이다. 이번 유혈진압 사태 발생 이 후,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생산해 납품하는 거대 의류 브랜드들과 일본 대사관은 사망자가 발생한 것에 대 하여 유감을 표명하였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사람이 죽었다면 유감부터 표명하는 것이 상식이고, 그것이 국가의 격이다. 노동자들의 시체를 밟고 손해배상 운운하는 한국 자본의 모습은 한국에서도 익숙한 풍경 이지만, 해외의 공관에서 유감 표명 한마디 없이 해명 같지도 않은 글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모습은 이 사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내보인 것 같아 정말 씁쓸하다. 16


(사진 : 박진우 제공)

특집 / 국경을 넘어‘어글리 코리안’

안에서도 샌다

툭하면‘너네 나라’ 로 돌아가라니 수백 점의 아프리카 문화예술 작품과 역동적인 아프리카 전통공연을 볼 수 있어 지역에서도 손꼽히는 아프리카예술박물관. 그러나 노동자들의 고용 실태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박진우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노동조합

특집 국경을 넘어‘어글리 코리안’17


이주노동자 55만 명, 그들의 현실은? 2013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한 출입국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취업자격체류외국인1)은 총 54만9202 명이다. 같은 기준으로 한국에 체류하는 전체 외국인의 수가 158만여 명이니, 적어도 세 명 중 한 명꼴로 일을 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55만여 명에 가까운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에서 제대로 대우받는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을까? 현재 한국의 모든 이주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 산업 재해보상보험법 등의 한국 현행법규에 의거하여 한국의 노동자와 동일하게 최저임금, 산업 재해보상, 퇴직금 등의 법적 보장을 받을 수 있다. 이는 수차례 대법원 판결에도 언급된 바가 있으며, 미등록 이주노동자라도 임금 체불이나 산업 재해를 당했을 경우에 는 노동부 진정 및 소송 등을 통하여 권리 구제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

“사장님 나빠요!”한물간 유행어? 얼마 전, 방글라데시인 노동자 A 씨가 사장으로부터 폭행을 당해 이주노동조합을 찾아왔다. 폭행이 있 기 얼마 전 허리를 다친 A 씨는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장은 그런 A 씨를 병원에 보내주 기는커녕 빨리빨리 일하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던 중, 허리가 너무 아파 잠시 주저앉은 A 씨에게 사장은 발길질을 했고, 그 길로 A 씨는 회사에서 도망쳐 병원으로 갔다. 진단서를 떼었지만 너무 무서워 회사로 는 돌아갈 수 없었던 A 씨는 친구의 도움으로 노동조합을 찾았다. 친구의 통역을 통해 A 씨의 진술을 들 은 노동조합은 A 씨가 다니던 회사에 연락을 했지만, 사장은 A 씨를 방글라데시에 돌려보내겠다며 노발 대발할 뿐이었다. 노동부에 폭행으로 인한 사업장 변경 진정을 넣은 후, 회사로 돌아갈 수 없는 A 씨는 근 처 쉼터로 갔다. 사장은 A 씨가 회사로 돌아오지 않으면 사업장 이탈신고를 하겠다고 협박 전화를 하다가 실제로 이탈신고를 해버렸다. 다행히 노동조합에서 그간의 상담 내용과 진단서 등을 첨부한 추가 진정서를 넣어 이탈신고는 막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노동조합 등의 도움 없이 이주노동자 혼자 권리 구제 절차를 밟 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이 밖에도 수개월 간 임금을 체불 당하다가 사업장 변경을 하기 위해 임금을 포기하고 사업주의 사업 장 변경 싸인을 받았다는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나 미등록 신분이 드러날까 무서워 퇴직금 조사를 위한 노 동부 출석조사에도 나가지 못한다는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노동자 개인이 스스로의 권리 보 장을 위해 나서는 것이 여전히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한다.“사장님 나빠요, 너무 나빠요!”몇 년 전 어느 개그프로그램에서 나온 유행어다. 유행은 흘러갔지만, 현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1) 출입국관리법 시행령 제23조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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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이사장도 법은 나 몰라라 최근 아프리카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다. 짧은 지면이지만, 이 이야기를 가능 한 생생하게 담아보고자 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2013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주노동조합에서 일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이주노동자들과의 만남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영어도 아 닌 불어를 하는 이주노동자와 상담을 하려니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통역의 도움으로 조금씩 이야기를 그 려나가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을 찾아온 이주노동자들은 각각 부르키나파소인 8명, 짐바브웨인 4명 총 12 명이었고, 이들이 일하는 곳은 포천의 아프리카예술박물관이었다. 상담을 하면서 어쩐지 낯이 익다고 생각했는데 1월에 유명 예능프로그램에 나왔던 분들이었다. 그 정 도로 유명한 곳이면 당연히 대우도 좀 괜찮지 않을까 하던 나의 예상은 근로계약서를 검토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짐바브웨 이주노동자의 근로계약서에는 분명 1주일에 6일, 하루 8시간을 일한다고 명시되어 있 음에도 불구하고 한 달 임금은 고작 650달러. 그나마도 환율을 1달러 1,000원으로 계산해 한 달에 65만 원을 지급했다. 부르키나파소 노동자들이 2013년 12월에 받은 급여 대장을 살펴보았다. 비행기 값 10여만 원을 공제하고 나니 받은 월급은 고작 60여만 원에 불과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관련 자료를 모조리 다 찾아보기 시작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듯 포천 아프리카예술박물관의 이사장이 새누리당 사무총장이자 지역3선인 홍문종 국회의원이라는 것이었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이 이사장으로 있는 박물관에서 이렇게 법이 안 지켜지고 있다는 걸 어떻게 봐야 하는지 앞이 캄캄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직접 포천 아프리카예술박물관을 찾아가 보았다. 박물관 자체는 수백 점의 아프리카 문화예술 작품과 역동적인 아프리카 전통공연을 볼 수 있어 지역에서도 손꼽히는 유명한 관광지로 알려져 있었다. 일이 끝난 후 이주노동자들과 같이 근처 마을 에 있는 기숙사로 이동했다.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 벌어졌다.

▲부르키나파소 노동자들의 2013년 12월 급여명세서 ▶현관 바로 옆 냉골 같은 방 (사진 : 박진우 제공)

특집 국경을 넘어‘어글리 코리안’19


‘꼬리 칸’ 의 이주노동자들, 투쟁을 시작하다 흡사 영화 <설국열차>의 꼬리 칸을 연상케 하는 이들의 숙소는 연신 탄식을 불러일으킬 만큼 매우 열 악했다. 가장 먼저 찾아간 숙소는 2명의 노동자가 생활하는 곳이었다. 보일러가 돌아가고는 있지만 냉골 이라고 해도 될 만큼 매우 춥고, 방 벽면은 온통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다. 한 쪽 벽면에 비닐봉지가 꽂혀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당겼더니 바깥바람이 그대로 들어오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다른 1명의 노동자는 현관 옆 베란다에 임시숙소를 만들어 난방도 떼지 않은 채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기숙사에서는 화장실에서 거실로 물이 새고 있어 추위를 견디기 위해 꽃아 놓은 전기전열기구가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이것이 정녕 2014년 한국 이주노동자 인권의 현 주소인 것인가? 그동안 여러 이주노동자들의 기숙사를 봤지만 거의 수용소나 다름없는 이런 환경은 처음이었다. 더 이상 이 상황을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여러 이주단체들과 함께 논의를 거친 후, 2월 11일 새누리 당사 앞에서 <포천 아프리카예술박물관 전통예술공연단 및 조각가 노예노동 고발 기자회견>을 하는 것으 로 본격적인 투쟁을 시작했다. 여의도 한복판에서 아프리카 전통악기와 춤이 어우러진 기자회견은 상당히 많은 언론의 관심을 받았고 당일 실시간 검색순위에 올라갈 정도로 이슈가 되었다.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직접 국회로 찾아가 항의서한을 전달하고 홍문종 국회의원을 만나려 했지만, 결국 이 사건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그 사이 언론에서는 이 사건과 관련한 분노 여론이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인터 넷상에서 자발적으로 아프리카 이주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서명운동이 시작되면서 불과 며칠 사이에 관련 기사만 수십여 개에 달하게 되었다. 결국 여론의 큰 압박을 받은 박물관 측은 때마침 방문한 민주당 국회 의원들과 이주노동자들의 면담을 받아들였고, ▲최저임금 지급 ▲합리적인 기숙사 즉시 제공 ▲점심시간 1 시간 보장 ▲4대보험 제공 ▲한국 노동 표준근로계약 준수 등을 골자로 한 합의서가 작성되었다.

이주노동자들, 스스로 권리를 깨닫고 나서야 할 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합의서가 작성된 지 만 하루가 지났고 몇 년 동안 고통에 시달렸던 아프리카 이주노동자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과제들은 남아 있다. 최저임금법, 근로기준법, 여권법 등 현행법을 어긴 박물관장과 홍문종 이사장에게 법 위반에 관하여 분명히 책임을 묻고 그에 따른 조치를 받아내야 할 것이다. 또한 용기 있는 아프리카 이주노동자들의 제보로 시작된 이 사건의 승리를 발판으로, 또 다른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 권리를 깨닫고 나서기 시작해야 한다. 10년째 이주노동자들의 기본적인 노동권조차 보장하기 어려웠던 고용허가제도 자체의 문제점도 이주노동자 당사자들의 투쟁으로 바꿔 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언론에 드러나고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어야 문제가 해결되는 한 한국의 이주노동자 인권은 여전히 가장 낮은 곳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 각자 주변에 있는 이주노동자 들의 문제를 둘러보고 작은 것 하나부터 함께 도와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형성이 필요할 때다. 20


사진 :1월 5일 SBS <8시 뉴스> 갈무리 사진 :1월 5일 SBS <8시 뉴스> 갈무리 사진 사진:1월 :1월5일 5일SBS SBS<8시 <8시뉴스> 뉴스>갈무리 갈무리

특집 / 국경을 넘어‘어글리 코리안’

어글리 프레스, 한국 언론 ‘한국기업’말고‘자본주의’ 를 보라 경제발전기 다른 나라에서 각종 인종차별을 당하며 저임금으로 착취당했던 한국이 이제‘착취하는 자’ 의 위치에 섰다.‘한국 기업 지키기’ 가 아니라 ‘작은 제국’ 이라는 관점에서 캄보디아 사태를 다루는 뉴스를 보고 싶은 게 그토록 무리한 바람이었을까.

조윤호 <미디어오늘> 기자

특집 국경을 넘어‘어글리 코리안’21


지난 1월 3일 봉제공장 100여 곳이 밀집한 캄보디아 프놈펜의 카나디아 공단 인근에서 노동자 5명이 죽고 20명이 다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월 80달러라는 낮은 임금으로 살아가던 캄보디아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장기간 시위를 벌였다. 캄보디아 정부는 임금협상이 결렬되자 군을 동원 해 강경진압에 돌입해 노동자들을 상대로 총을 발사했다. 캄보디아 정예부대인 911 공수여단 군인들까지 동원됐다. 한국 언론도 캄보디아 유혈 사태에 주목했다. 하지만 지상파 방송과 몇몇 언론들은 유혈사태의 원인과 배경,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처한 참상에 대해 언급하기보다 국내기업의 피해 상황을 걱정하기에 바빴다.

캄보디아 노동조건에 침묵… 국내 기업 피해만 전하는 언론 SBS는 1월 4일 8시뉴스‘공장가동 중단…현지 피해 눈덩이’ 에서“유혈 시위가 우리 업체들을 겨냥한 건 아니지만, 우리 기업들의 피해가 막심하다. 공장 가동률이 10% 밑으로 떨어져서 생산 차질이 심각하 다” 고 보도했다. SBS는 5일 <8시 뉴스>‘시위 잠정 중단…한숨 돌린 한인업체’ 에서도“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로 촉발된 캄보디아 반정부 시위가 정권의 유혈 강경진압으로 잠시 수그러들었다. 공장가동을 거의 멈춰야했던 우리 봉제업체들은 노조 집행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방침” 이라며 한국 기 업 입장을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MBC와 JTBC 등도 비슷한 보도 행태를 보였다. 몇몇 신문들도 같은 태도를 보였다. 현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임금상황, 인권실태 등은 뒷전이었다. <캄보디아 시위 악화, 한국 업체들도 불똥>(중앙일보 1월 6일자), <캄보디아 반정부시위 불똥…韓봉제업 체, 바이어 이탈‘비상’ >(한국경제 1월6일자) 등 현지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의 안전과 생산 차질에만 주목 했다. 60개 한국 기업을 포함해 다국적 의류산업 사용자들로 구성된 캄보디아의류생산자협회가 캄보디아 정부의 임금협상안을 거부하면서 사태가 악화됐다는 지적이 있는데도 이러한 사실에 대한 언급은 언론에 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들 연합회가 캄보디아 정부에 시위를 진압하라고 요구했다는 현지 언론보도 내 용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세계화의 민낯 드러낸 KBS‘추적60분’ 캄보디아 유혈사태를 가장 심층적으로 보도한 매체는 KBS <추적60분>이다. <추적60분>은 8일 방송된 ‘메이드인캄보디아, 국경 넘은 봉제 산업 시험대에 서다’편에서 캄보디아 프놈펜을 찾아 피로 물든 시위 현장을 보여주고, 저임금으로 살아가야 하는 캄보디아 봉제 노동자들의 모습을 조명했다. 박봉을 아껴 시 골의 가족들에게 보내고 좁은 집에서 힘든 생활을 영위하는 봉제공들의 모습은 딱 70~80년대 한국의 공 순이, 공돌이였다. 70~80년대 한국 노동자들을 착취하며 성장한 자본이 이제 캄보디아나 베트남 등 동남 아시아로 진출한 것이다. 22


<추적60분>의 관점이 돋보였던 이유는 노동자들의 처지에 공감하며 임금인상이 대책이라고 말하지 않 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진보언론에 의해 사태의 주범으로 지목된 한국 기업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 봉 제 사장들은 시위를 이유로 바이어들이 계약을 중단하면서 재고가 잔뜩 쌓이게 됐으며, 임금으로 80달러 를 줘도 남는 게 없다고 하소연했다(물론 이 주장은 검증이 필요하다). 이들의 모습은 한국에서‘최저임금’ 올리자는 주장에 반대하는 또 다른‘을’ 인 영세자영업자들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다. <추적60분>은 세계 적 자본주의 앞에서는 이들도‘을’ 이 라는 점을 조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보도에도 한계점이

가해자를 적시하면 문제는 해결되어도‘구조’ 의

있다. 캄보디아 사태의 원인으로 전

문제가 남는다.‘구조’ 의 문제만 강조하면 가해자

세계적 자본주의와 세계화를 지목하

가 묻히면서 사태 해결이 안된다. 언론이 두 관점

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모순적

사이에서 긴장감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다.

인 상황을 다루다보면‘피해자’ 는많 은데‘가해자’ 는 보이지 않게 된다.

70-80년대 한국 상황을 떠올리면 당연히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야 하지만 임금이 올라갈 경우 투자자들이 베트남으로 공장을 옮기고, 한국 봉제 사장들은 생존의 위협에 직면한다. 흔히 언론보도를 통해‘가해자’ 를 만들면 분노의 여론이 들끓고, 즉각적인 문제 해결은 이루어진다. 하 지만‘구조’ 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반대로‘구조’ 의 문제만 강조하다보면 가해자가 묻히면서 사태 해 결은 되지 않는다. 언론이 이 두 가지 관점 사이의 묘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기술적으로 잘‘조져야’하는

2월 8일 KBS <추적 60분> 갈무리

특집 국경을 넘어‘어글리 코리안’23


로 만들어버리는 슈퍼‘갑’ 의 실체에 더 주목했 이유다. 이번 <추적60분> 보도의 경우 봉제 사장들도‘을’ 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추적60분>에서 이들은‘바이어’ 라는 이름으로 표현된다.

대한민국, 이제 누군가에게‘또 하나의 제국’ <추적60분>이 캄보디아 유혈 사태를 다루며 한국 기업과 정부가 개입됐다는 의혹을 곁가지로 다룬 것 도 아쉬운 점이다. 한국 기업들이 안전을 이유로 캄보디아에 시위 진압을 요구하고, 외교부도 한국 기업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강경 대응을 촉구했

언론은 새로운‘프레임’ 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추적60분>은 이에 대해‘사실무근’ 이라는 결론을 내

‘작은 제국’ 이 된 한국이 다른 나라의 군대에까

렸다. 추가적인 팩트가 없어서 그랬겠지

지 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전 세계적

만, 이 의혹을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취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민낯을 잘 드러낼 수 있다

급하고 넘어간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언론이 새로운‘프레 임’ 을 만들어낼 수 있다. 70-80년대 착 취당한 한국이 이제‘작은 제국’ 이 되어

다른 나라의 군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전 세계적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민낯을 잘 드 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대표적인 사례는 최근 아프리카 예술박물관에서 벌어진 노동착취다. 아 프리카 박물관은 아프리카 예술단원들을 최저임금도 주지 않은 채 부려먹고 여권을 강제로 빼앗는 등 동 물처럼 착취했다. 경제발전기 다른 나라에서 각종 인종차별을 당하며 저임금으로 착취당했던 한국이 이제 ‘착취하는 자’ 의 위치에 섰다는 것이다.‘한국 기업 지키기’ 가 아니라‘작은 제국’ 이라는 관점에서 캄보 디아 사태를 다루는 언론사를 보고 싶은 게 그토록 무리한 바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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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www.dailytech.com

특집 / 국경을 넘어‘어글리 코리안’

‘국익’ 의 탈을 쓴 제국주의 단지‘어글리’ 하기만 한가? 사람이 죽고 다쳐도, 기름이 온 바다를 다 뒤덮고 생태계가 무너져도 한국 정부의 1차적 관심은‘이익’ 이다. 그리고 그 이익은 공동체의 그 것이 아니라 자본의 이익, 바로 이윤이다.

홍원표 노동당 정책위원회

특집 국경을 넘어‘어글리 코리안’25


월 7만 원이 부른 참사 2014년 1월 3일, 캄보디아 노동자 다섯 명이 캄보디아 군경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했고, 20여명이 부상 을 입었다. 군대를 동원해 민간인을 학살한 직접적 배경은 놀랍게도 한 달 7만원에 해당하는 임금 인상 때문이었다. 지난 연말, 캄보디아 노동자들은 월 80달러에 불과한 최저임금의 두 배 인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캄보 디아 정부는 2014년 최저임금을 15달러 인상한 95달러로 결정했고, 노동자들은 불충분한 최저임금 인상 결정에 반대해 2013년 12월 24일부터 파업에 돌입했다. 노동자와 캄보디아 정부 사이에서 벌어진 최저임금 갈등의 배후에는 캄보디아 의류생산자 협회 GMAC(Garment Manufacturers Association in Cambodia)의 책임이 가장 크다. 캄보디아 의류산업의 최저임금은 아시아에서 방글라데시 다음

캄보디아 의류업체에서 한국 자본의 투자가

으로 낮고, 한국의 저임금 노동자와 마찬

차지하는 비율은 15% 수준으로 중국 다음으로

가지로 캄보디아 역시 최저임금이 곧 노

많고, 당연히 GMAC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

동자의 실질 임금이 되는 실정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캄보디아의 경제

고 있다. 한국 자본의 책임이 거론되는 이유

성장률은 연평균 7%에 달했지만, 최저임

중 하나다.

금 인상률은 평균 5%의 물가 상승률에도 못 미쳤다. 이에 캄보디아 정부가 발주한

연구용역에서조차 월 157~177달러 수준의 최저임금을 권고하였으나, GMAC의 협상 거부 및 자본 철수 등 의 협박으로 인해 결국 최저임금은 95달러로 결정되었다. 캄보디아 의류업체에서 한국 자본의 투자가 차 지하는 비율은 15% 수준으로 중국 다음으로 많고, 당연히 GMAC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한국 자 본의 책임이 거론되는 이유 중 하나다.

가진 자들의 피해자 코스프레 한국 자본의 책임이 거론되는 더 직접적인 이유는 최저임금 인상 반대라는 배경 원인뿐만 아니라, 노 동자 진압 요청이라는 직접적 원인을 제공했다는 의심 때문이다. 미국의 국제문제 전문 인터넷언론인 <글로벌포스트>지는‘한국이 노동자 시위에 대한 무력 진압을 뒤 에서 조정했다는 사실이 점점 밝혀지고 있다’ 며‘한국 대사관은 지난 몇 주 동안 한국 기업의 이익을 보 호하기 위해 뒤에서 은밀히 활동해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고 밝혔다. 또한 많은 국내 언론과 시민사회단체들은 한국의 자본과 정부가 캄보디아 법무부에 공식 서한을 발송 하는 등 캄보디아 당국에 파업 사태 해결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심지어 경찰 당국이 아닌‘국가대테러위원 26


에게 보호를 요청함으로써 이번 유혈 사태에 직접적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장’ 반면 주캄보디아 대사관과 외교부는 한국 기업과 교포의 안전 보호 협조 요청이었으며, 사태가 악화된 이후 업체에 대한 경계 강화를 요청했을 뿐 직접적인 시위진압 요청이 아니기 때문에 이번 사태에 한국 자본이나 정부의 책임은 없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지난 1월 15일 주캄보디아 대사관 공식 페이스북을 통 해‘한국 기업들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일 뿐이다’ 라고까지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의 자본들은 노조와 야당에 대해‘손해배상’ 을 청구하겠 다고 나서고 있다. 노동조합 활동을 탄압하고 저임금 노동을 강요하던 자본이, 생산 차질을 이유로 유혈 사태의 빌미를 제공해 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는데도, 한국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저임금 노동을 강요하고 유혈사태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는데도 한국 정부와 그들의‘우리 자본’ 은 자신들이 피해자라 고 주장한다.

정부와 그들의‘우리 자본’ 은 자신들 이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마치 여수 기름 유출 사고가 일어나자 제1의 피해자는 어민이 아니라 GS칼 텍스라고 했던 것과 완전히 닮은꼴이다. 사람이 죽고 다쳐도, 기름이 온 바다를 다 뒤덮고 생태계가 무너 져도, 한국 정부가 1차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언제나 한시도 양보할 수 없는‘이익’ 이다. 그리고 그 이익 은 공동체의 그것이 아니라 자본의 이익, 바로 이윤이다.

세계화하는 한국 자본의 만행 사람이 죽어가고 민주주의가 폭력에 무너지고 있는데‘우리’ 의 안위와 우리의‘손익’ 을 따져 피해자임 을 주장하는 건 굉장히 유아적이고 굉장히 추한(ugly) 일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캄보디아 사태를 두고 ‘어글리 코리아’ 를 지적한다. 그리고 조금만 더 찾아보면 이런 어글리한 사태는 비단 캄보디아 유혈 사태 에서만 보이는 건 아니다. 가장 최근의 일로는 집권 여당의 사무총장이 이사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아프리카예술재단에서 벌어진 노예 노동 사건이다. 집권여당 핵심 인사가 노동법과 인권을 어떻게‘개무시’ 했는지 보여주는 이 사건은 충분히 휘발성이 있는 사건이고, 그런 휘발성 덕분에 이주노동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다시금 생 각해 볼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사장님 때리지 마세요’ 에서 비로소 우리 사회에 알려진 이주노동자에 대한 탄압이 20년 동안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알려 주는 바로미터다. 국내에서의 이주노동자 탄압과 차별은 해외에서의 노동착취와 탄압과 쌍을 이룬다. 이번 캄보디아 사 태는 한국 자본이 지난 20여 년간 세계 곳곳에서 자행했던 노동탄압의 한 단면일 뿐이다. 캄보디아와 더불어 아시아에서 최저임금이 가장 낮은 방글라데시에서도 캄보디아 유혈사태와 똑같은 특집 국경을 넘어‘어글리 코리안’27


일이 불과 엿새 만에 반복되었다.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방글라데시 노동자가 영원무역이라는 한국 자본 의 공장 앞에서 총탄에 맞아 숨졌다. 방글라데시의 노동자 유혈사태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2010년 12월 에도 저임금에 반대하는 노동자 시위 도중 3명이 숨진 바 있고, 당시에는 한국 자본의 현지 공장 관리자 가 조업 중단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구타·감금했다는 의혹까지 일었었다. 영원무역은 유명한 의류 브랜드 인‘노스페이스’제품을 OEM으로 납품하는 회사이며, 방글라데시에 10여 개의 공장을 갖고 있다. 한국 자본의 노동착취와 탄압은 동남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며 의류업체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중소업체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90년대 후반 국제 인권단체인 휴먼라이트워치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마킬라도라 지역에서 텔레비전

한국 자본의 노동착취와 탄압은 동남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의류업체에서만 일어나 는 일도 아니며, 중소업체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수상기를 조립하는 여성노동자들은 취업을 위해 불법적이고 반인권적인 임신 테스트를 받았다. 이 테스트에는 성생활, 피임방법, 생 리주기 같은 극히 사적인 질문은 물론 심한 경우‘하체검사’ 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의 대표 자본인 삼성은 이들 기업에 하

청을 주는 최대‘갑’중 하나이다. 사실상 매매혼이나 다름없는 국제결혼을 알선하는 한국의 알선업체들 이‘조달’ 되는 이주여성을 대상으로‘알몸’임신테스트를 수행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행태다. 삼성의 국제적 노동탄압은 동남아와 중국에서도 보고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민주노총과 민주노동 당이 공동으로 수행한 한국자본의 동남아 노동탄압 실태조사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말레이시아에서 노조

해고노동자 복직을 위해 2010년 다시 파업에 돌입한 현대차 인도공장 노동자들(사진 : 국제금속노동자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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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하청업체인 중국의 HEG 공장 아동착취를 보도한 한겨레(사진 : 한겨레 캡쳐)

를 결성하고자 하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언어폭력, 협박, 해고위협 등으로 노조탈퇴를 강요해 결국 노조설 립을 무산시켰다. 태국에서는 정규직 노동자를 해고하고 하청기업으로 신규채용하는 매우‘한국적’노무 관리를 선보였고, 이 과정에서 항의하는 노동자를 해고했다. 2012년 미국의 비정부기구인 중국노동감시(China Labor Watch)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삼성전자에 휴대전화 부품과 디브이디(DVD) 플레이어를 조립 납품하는 하청업체인 중국의 HEG 공장은 14세밖에 안 된 소녀를 고용해 아동노동을 착취했다. 이 공장에서는 화학약품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안전교 육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심지어 어린 소녀들에게 폭력까지 행사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하지만 삼성전 자는 이러한 사정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다고 이 보고서는 비판했다. 2008년 현대자동차 인도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파업과 동시에 공장을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발 단은 현대차가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노동조합 활동가를 부당 징계했기 때문이다. 당시 현대차 인도 공장 의 생산직 노동자는 80%가 비정규직이었으며, 입사 4년이 넘도록 견습생, 수습생, 사내하청 등의 고용형 태를 유지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현대자동차는 인도 정부에 공권력 투입을 요청했고, 폭력적 진압 이후 196명의 노동자들이 투옥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일을 계기로 국제금속노련은 전세계 현대자동차의 노 동탄압에 대응하기 위해‘현대기아차 국제노동자 네트워크’건설을 위한 국제회의까지 개최할 정도였다. 2000년 초반에는 현대자동차에 부품을 납품하는 마킬라도라 공장의 노동착취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어 미국에서 현대차 불매 운동이 벌어진 적도 있다.

단지 어글리(ugly)한 문제인가? 자본은 언제 어디서나 더 많은 이윤을 만들어내고자 하고, 사회적 규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거나 노동 특집 국경을 넘어‘어글리 코리안’29


자들의 자주적 힘이 약한 경우 쉽게 곧 반인간적인 착취로 이어진다. 이는 한국 자본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2002년 한국에서 월드컵이 개최되었을 때 아디다스 제품을 만들다 시력을 잃은 인도의 어린 소녀 가 한국에 방문해 아디다스의 비인간적인 착취를 폭로한 적이 있다. 나이키 역시 마찬가지이며, 세계적 의 류업체인 갭(GAP)이나 최근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유니클로 역시 유사한 문제로 비난받고 있거나 받 은 바 있다. 문제는 이러한 자본의 행태가 국가 공동체의 이해관계로 둔갑해 은폐되거나 옹호받거나, 심지어 국가 정책으로 촉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고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가 계승하고 있는 자유무역협정(FTA) 정책은 자본의 이러한 성격을 더욱 촉진하고 반대로 개별 국가의 규제 능력을 제한하 는 대표적인 정책이다. 현재 한국이 체결하여 발효중인 FTA는 한미FTA를 포함해 총 9개이고, 협상이 타결 된 협정이 2개, 협상이 진행 중인 협정이 7개이다. 앞서 언급된 마킬라도라 지역의 노동탄압은 북미자유 무역협정(NAFTA)에 직접적 원인이 있다. 또한 이명박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성과 없이 끝났다고 비판받는 자원외교도 실상 국가적 차원 의 제3세계 착취에 다름 아니다. 자원외교의 이름으로 추진된 사업은 아직 산업 시설이 미비한 해당 국가 가 가진 유일한 경제발전 기회를 한국의 자본에게 종속시키겠다는 것이었고, 대부분이 그 나라 공기업의 민영화를 동반하는 일이었다. 조폐공사가 민간기업과 합작으로 확보한 우즈베키스탄의 면펄프는 국가가 휴교령까지 내려서 아이들을 동원한 아동착취 노동으로 생산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러한 자 원외교의‘제국주의적 성격’ 보다는 그 미비한‘실적’ 에 더 관심을 많이 보였다. 해외에서 벌어지는 노동탄압과 반인권적

개별 자본에 대한 비판에만 머무른다면, 국가 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확산 과 새로운 제국주의적 질서 재편을 간과할 수 있다.

행위에 대해 개별 자본에 대해 추한 행태라 고 비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개별 자본에 대한 비판에만 머무른다면, 국 가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확산과 새로운 제국주의적 질서 재편을 간 과할 수 있다. 한국은 경제적·정치적으로

더 부유한 나라에 종속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나라에 결코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 다. 한국은 이들 나라에 자본과 더불어 노동탄압도 수출하고, 핵발전도 수출하고 무기도 수출하는 국가다.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아류 제국주의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고, 캄보디아 노동자들과 연대해야만 하 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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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의회가 세상을 바꾼다 기획


기획 / 기초의회가 세상을 바꾼다

‘개혁’ 이라 쓰고 ‘꼼수’ 라고 읽는다 누가, 그리고 왜?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를 말하는가

민주당은 도대체 왜 ‘정치개혁’ 이 화두다. 거의 모든 정치세력이 정치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똑같은 정치개혁의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그 내용과 의도하는 바는 다 제각각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정치개혁이라는 껍데기 속에 자 신들의 정치적 유·불리를 분주히 계산하는 영혼을 숨겨놓았다는 것 제대로 된 정치개혁은 근본적 문제의식과 여기에 걸맞는 해

이다. 최근까지 대표적으로 회자된 정치개혁 의제는‘기초단체선거 정당

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존재가

공천 폐지’ 이다. 애초에 이 요구는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제기돼 왔으

기성 정치권에 균열을 낼 때에

며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안철수 당시 후보가 이를 요구하면서 본격적

만 모색될 수 있다.

인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됐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와 민주 당의 문재인 후보가 모두 이에 대한 찬성 입장을 밝히면서 2014년 지 방선거부터 기초단체선거의 정당공천 폐지 여부에 관심이 쏠렸으나 새누리당이 공천을 유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논란이 확대되고 있다. 대선 패배 이후 민주당은 상당히 적극적인 태도로 기초단체선거 공 천 폐지를 주장해왔다. 전 당원 투표를 통해 이를 당론으로 확정하기 까지 했다. 전국에 조직 기반을 갖고 있는 기성정당이 기초단체선거

김민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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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공천 폐지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상당한‘결단’ 으로 비춰지기 도 했다.


정당공천제의 폐단도 무시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신속하게 이뤄진 이 결단은 세 가지 차원에서 흥미롭다. 첫째는 실제로 기초의원과 기초단체 장 선거에서 정당이 공천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생기는 폐단이 상당하다는 게 사실이라는 점이다. 해당 지 역의 국회의원이 조직을 쥐고 흔들며 금전 상납 등을 통해 공천권을 통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 은 이제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때만 되면 공천 관련 시비와 잡음이 끊이지 않고 모 의원 보좌관이 잡혀 갔다느니, 꼬리를 잘랐다느니 하는 보도가 나오는 것도 그저 매 선거마다 겪는 통과의례 같다. 과거 민주 당의 주요 정치인에서 안철수 무소속 의원의 측근으로 변신한 김효석 전 의원이 새정치추진위의 지방 순 회 토론회에서‘7당 6락’ (7억 쓰면 공천되고 6억 쓰면 낙천된다)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문제제기를 한 데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둘째, 기초단체선거 정당공천을 유지해서 가장 크게 득을 보는 세력은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이다. 아무 런 이념적 지향이 없는 사람이 기초의원 선거에 출마한다고 생각해보자. 공천을 받아야 한다면 어느 당에 받는 것이 가장 유리하겠는가? 당연히 현재 집권하고 있는 여당이다. 국민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니 여당 이 됐을 것이고, 여당이라서 얻을 수 있는 금전적, 정치적 이득이 훨씬 커 보인다. 이러한 모든 매력을 거 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기초단체선거 정당공천이 유지되면 지역에서 경쟁력 있는 인물이 새누리당 공천을 받고 기초의원에 당선되고, 역으로 새누리당이 이들을 통제해 지방권력을 장악하는 악순환이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1998년 이후 민주정부 10년 간 민주·평화·개혁 세력은 지방권력을 교체하지 못해 이런 상황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는 야당으로 다시 5년(이제 4년이다)을 버텨야 하는 민주당으로서는 정말 이런 구조에서 탈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안철수 바람’ 에 묻어가기 마지막으로 꼽아볼 수 있는 것은 안철수 신당의 존재다. 안철수 무소속 의원은 신당을 창당해 지방선 거에 전면적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현재 나타나는 정당 지지율의 추이는 민주당보다 안철수 신당에 집중되는 대중적 기대감을 명확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안철수 의원 측에서는 물론 기초선거 정당공천으로 야기되는 폐단을 극복해야 한다는 당위가 더 컸겠으나, 기성 정당의 조직을 해체할 수 있는 무기로서 기 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를 주장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뒤집어 말하면 이는 민주당에게도 해당된다. 민주당의 인기가 바닥을 기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민주당 간판 달고 선거에 나가기를 바라겠는가? 오히려 안철수 신당으로 출마하거나 무소속으로 출마하 는 게 더 당선 가능성이 높을 수 있다. 특히 호남에서 안철수 신당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면 될수록 정치 자영업자 지망생들의 이런 계산은 점점 더 힘을 얻게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예 정당공천을 폐지하는 기획 기초의회가 세상을 바꾼다 33


게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된다. 하지만 호남에서 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복구되고 안철수 신당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지면 이런 고민도 사실상 없던 얘기가 되는 게 예정된 수순이다. 특히 새누리당이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를 추진할 생각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는 민주당도 다른 고민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된다. 최근 새누리당 지도부와 내부의 주류 인사들은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에 대

새누리당이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를

한 부정적 입장을 밝히며 상향식 공천 제도화, 오픈

추진할 생각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는

프라이머리 실시 제안 등을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다.

민주당도 다른 고민을 시작할 수밖에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정

없는 신세가 된다.

치개혁과 관련된 의제를 하나도 다루지 않고 구태세 력으로 찍히는 것은 안 된다는 계산일 것이다.

이제는 줄줄이‘출구전략’ 민주당 인사들 역시 이제는‘출구전략’ 을 얘기하고 있다. 최근 민주당은 소속 지자체장 및 시도당위원 장들을 참석 대상으로 한 비공개간담회를 열고 정당공천 폐지가 무산될 경우 당의 대응에 대해 격론을 벌 였다. 즉, 제도적 차원에서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가 물 건너갈 경우에도 당론의 취지를 살려 당이 자체 적으로‘무공천’조치를 취할 것이냐, 그냥 정당 공천을 할 것이냐를 놓고 토론을 했다는 것이다. 이 간담회에서 민주당 내 인사들의 전반적 의견 분포는 무공천 조치를 취하자는 명분론보다는 현실론 이 더 우세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선거에 나가고자 하는 예비후보자들이 선거법상 집단 탈당을 해야 실질 적인 무공천 조치가 취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 것이다. 당 내 일각에서는 정당공천을 유 지할 경우 시대의 흐름에 발 맞춰 기존 지자체장 및 기초의원들의‘물갈이’ 가 필요하다는 의견까지 제출 됐다고 하니 물 밑에서의 진도 는 이미 상당히 나가있는 상태 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김한길 대표가 명절 이후 국 회의원 특권 내려놓기와 상시 국회, 선거 연령 및 투표 마감시 간 조정 등의 소소한 정치개혁 안을 내놓은 것도 넓게 보면 기 초선거 정당공천 폐지에 대한 출구전략을 고려한 포석이라는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 지금까 34

정치개혁특별위원들의 의견 분포를 보도한 SBS 8시뉴스


지 정치개혁과 관련해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밖에 내놓은 것이 없는데, 이게 무산될 경우 안철수 신당 측의‘새정치’프레임에서 갈 길을 잃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자금 문제 및 국회의원의 권한 등과 관련 매번 나오는 얘기를 종합한 수준의 특권 내려놓기 제안과 여당이 받아주지 않으면 끝인 제도개혁안 등을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겠냐는 짐작이다.

대중의 냉소,‘안철수 이후’ 가 더욱 무섭다 이 외에도 다양한 정치개혁 과제가 정치권에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여야를 망라해 제출되고 있는 이 러한 정치개혁안이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개혁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인가? 당연히 냉소적인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다. 모든 해법들이 단지 주류 정치에 현상유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도의 충격을 줄 뿐 근본적 인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차원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년에 돌아온 각설이처럼 또 다시 시작된 이번 시즌의 정치개혁 타령은 결국 안철수 의원으로부터 시 작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안철수 의원의‘새정치’ 가 이러한 힘을 갖게 된 근저에는 대중의 기 성 정치에 대한 광범위한 냉소가 도사리고 있다. 대중의 냉소는 대중들이 기성 정치가 오늘날 앞다퉈 내 놓고 있는 정치개혁안과 같은 미봉적(ad hoc)인 해결책들에 질려서 더 이상 정치 그 자체를 지지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표출됐다. 거짓말쟁이 정치인 출신도 아닌데다, IT와 의학을 자유자재로 활용해 기업을 이끌 만큼 능력이 뛰어나고, 심지어 성격 이 착하기까지 한 안철수 같은 인물에게 서 대중은 오히려 희망을 보게 된 것이다.

‘안철수 유행’ 이 지나고 나면 대중들은 전보다

물론 안철수 신당의 지지율이 하락하는

훨씬 낙담하고 더욱 냉소하게 될 것이다. 결국

데에는 안철수 의원 역시 이미 모두가 질

이런 환경이 급진적 극우주의 창궐의 토양이

려버린 그 얘기를 다시 되풀이하고 있다 는 상황이 크게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된다는 점은 더 부연할 필요도 없다.

‘안철수 유행’ 이 지나고 나면 대중들은 전 보다 훨씬 낙담하고 더욱 냉소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이런 환경이 급진적 극우주의 창궐의 토양이 된다는 점은 더 부연할 필요도 없다. 즉, 근본적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개혁은 근본적 문제의식과 여기에 걸맞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존재가 기성 정치권에 균열을 낼 때에만 모색될 수 있다. 그 존재를 진보정당이라 해도 좋고 좌파정당이 라 해도 좋다. 그 역할을 노동당이 짊어질 수 있는지 고민해 볼 때다. 당장 첫 번째 시험이 코앞에 닥치고 있다. 이제 100여 일이 남았다.

기획 기초의회가 세상을 바꾼다 35


기획 / 기초의회가 세상을 바꾼다

기초의회 생활정치, 무엇을 여성에게 묻고 있나?

또 다시 선거의 계절이 돌아왔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예비후보 자등록이 시작되고, 후보자들의 이름을 내건 출판기념회가 줄을 잇는 다. 익숙한 풍경이다. 언젠가부터 선거 시기에 구호로 내걸리는‘생활 정치’ 라는 말도 더 이상 낯선 말이 아니다.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도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생활정치를 말하지만‘원조’생활정치는 누가 뭐 래도 지방선거일 터. 생활정치와 여성을 연관지어 떠올리는 일도 자연 1995년 여성연합이 세운 지방의 회선거 여성참여 목표는 20%였 지만 현실은 그 1/10 수준이었

스러운 듯하다. 여성운동 역시 지방자치제 부활과 함께‘지방자치와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 를 중점 사업으로 정하면서1) 적극적인 참가의 정치를 제기

고, 비슷한 시기 국회의원보다

했고, 그 논거로“우리사회의 민주 발전, 특히 생활정치를 구현하기 위

기초의회 여성비율이 더 낮은

해서 지방자치가 매우 소중한 제도이며, 생활의 주체자인 여성들의 적

상황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지역

극적인 참여 없이는 생활정치가 온전하게 뿌리내리기 어렵다는 것을

과 마을은 생각보다 더 보수적

절실히 깨닫고 있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이고, 여성들이 일꾼으로 참여하 는 공간인 지역사회나 마을운동 은 여전히 가부장적이다.

김은희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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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렇듯 여성운동이 정치세력화운동을 중심과제로 설정한 이유는 국제적인 흐름 영향 을 받은 측면도 있는데, 북경여성대회는 물론이지만 2000년 6월 WEDO(Women's Environment and Development Organization)에서 시작한 캠페인과도 연관된다. 이 캠페인은 모든 영역의 정책 결정에 여성 참여 증대를 목적으로 하며, 구체적으로 2003년까지 내각, 사법부와 지방정부에 여성 30%, 2005년까지 50%의 진출을 설정 하기도 했다. 또한 단지 수적인 동등뿐만 아니라 남성 중심적인 정치구조 관행·제도 와 문화의 변화를 지향하며 각국에‘리더십의 얼굴을 바꾸기 위한 수적인 목표설 정’ 을 요구하였다.


기초의회 여성참여 어디까지 왔을까 하지만 기초의회에 여성들이 발을 들이는 과정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1995년 당시 여성연합이 세운 지방의회선거 여성참여 목표는 20%였지만 현실은 그 1/10 수준이었고, 오히려 비슷한 시기 여성 국회의원 비율보다 기초의회 여성비율이 더 낮은 상황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지역과 마을은 생각보다 더 보수적이 고, 여성들이 일꾼으로 참여하는 활동 공간인 지역사회나 마을운동은 여전히 가부장적이다. 결국 기초의회 여성참여는 의도적인 여성정치할당제와 함께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2000년 정당법에 여성후보 공천할당을 규정한 이래 2005년 기초선거에도 정당공천제가 도입되면서 공직선거법 상 비례대 표 50% 여성할당 및 남녀교호순번제, 그리고 2010년 당시 지방의원에 한해 제한적으로 선출직할당을 강 제하는‘지역구여성의무공천제’ 가 마련되면서 여성지방의원이 증가할 수 있었다. 2010년 3월에 통과된 공직선거법의 내용을 보면, 매 국회의원 선거구별로 광역 또는 기초 선출직에 여성을 1인 이상 공천하도 록 하고(군 지역 제외), 이를 위반할 경우 등록무효로 하는 이행강제조치(각 시도별로 지역구 의원정수의 50% 이상을 공천하지 못한 경우는 제외)를 규정하였다. 이런저런 예외 조치를 둔 규정으로 한계가 있었지만 지역구

선출직에 여성공천할당을 강제하는 여성의무공천제가 처음으로 적용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지방선거에서 각 지역별로 어렵지 않게 여성후보자를 찾아볼 수 있게 되어 선거벽보에서도 여성들의 모습은 익숙한 풍경이 되었고, 기초의회 여성비율도 처음으로 20%를 넘어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역별로 들여다보면 한계는 여전하고 가야 할 길이 멀다. 비례대표가 있으니 여성1호라는 말 이 퇴색되어 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전라남도 함평군의회의 경우 아직도 의원 모두가 남성만으로 구성된 여성제로 의회이다. 지역구여성의무공천제 적용 대상이 아닌 지역은 예외로 하더라도, 여성기초의원이 늘 어났다고 하는 서울경기 수도권조차 의회 구성에서 여성은 단지 1명에 불과한 곳이 적지 않아서 서울의 경우 중구의회, 금천구의회, 경기지역의 경우 가평군의회, 군포시의회, 양주시의회, 여주시의회 연천군의 회, 의왕시의회에서 여성의원은 홍일점으로 존재한다. <표> 2002~2010년 시기별 기초선거 여성 후보자 및 당선자 현황 (단위 : 명)

선거시기 2002년

2006년

기초의회의원 기초의회

2010년

여성비율

여성당선자수 (총당선자수)

여성비율

222(7,450)

2.9%

77(2,485)

2.2%

지역구

391(7,995)

4.9%

110(2513)

4.4%

비례대표

750(1,025)

73.2%

327(375)

87.2%

1,141(9,020)

12.6%

437(2,888)

15.1%

552(5,823)

9.5%

274(2,512)

10.9%

729(912)

79.9%

352(376)

93.6%

1,281(6,735)

18.9%

626(2,888)

21.6%

기초의회 합계 기초의회

여성후보자수 (총후보자수)

지역구 비례대표

기초의회 합계

기획 기초의회가 세상을 바꾼다 37


<표> 2002~2010년 시기별 기초선거 여성 후보자 및 당선자 현황 (단위 : 명)

여성 기초의원들의 활동은 무엇이 다를까 지역정치 특히 풀뿌리로부터의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서는 주민들의 생활의제를 직접 다루는 기초의 회 의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기초의회는 기본적으로 각 기초 자치단체 행정부를 견제하고 조례를 발의 하는 입법 활동 외에 주민들의 민원 해결 등 지역 정치활동을 수행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데, 좀 더 들 여다보면 지역개발과 같은 사안은 물론 우리 지역의 쓰레기종량제봉투 가격, 학습준비물 없는 학교를 만 들기 위한 예산 배분,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먹거리를 가지고 급식을 할지 등 정말 구체적인 정책들을 논 의하고 결정한다.

풀뿌리로부터의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서는 주민들의 생활의제를 직접 다루는 기초의원 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여성 기초의원들의 존

기초의회 여성의원을 하나의 동일한 집 단으로 묶어서 이야기하기는 어렵겠지만 열심히 활동하는 여성 기초의원들의 존재 는 기초의회에 적지 않은 변화를 만들어

재는 이런 기초의회에 적지 않은 변화를 만들

가고 있다. 의회 논의과정 안에서‘성 평

어 가고 있다.

등’ 과 관련한 관점을 제기하는 계기를 만 드는 역할을 하고 있고, 아직 국가 차원에

서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해 여전히 개정 논의가 지속되고 있는‘여성발전기본법’ 이 각 지방의회 차원에 서는‘성 평등 기본조례’ 로 바뀌고 있다. 최근의 연구 결과를 보면, 여성지방의원의 증가와 지방자치단체 복지재정지출의 증가가 긍정적인 상관관계가 있다고 확인되기도 하고, 여성친화정책의 지역별 제도화와 여성 지방의원 비율도 다르지 않다는 분석이다. 38


여성 기초의원 개개인의 의정활동 사례에서도 친환경무상급식과 돌봄정책, 교육정책, 마을만들기와 주민참여, 작은도서관과 마을텃밭, 장애인정책, 청소노동자 처우개선 등 공공기관 비정규직문제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의회개혁까지 반짝반짝한 성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기초의회‘생활정치’ 에 여성이‘더’적합하다? ‘생활정치’ 라는 개념은 나름 사회학적인 족보를 가진 개념이다. 일상적인 생활주변 의제와 무관하지는 않지만, 그 본질은‘국가’ 나‘시장’ 과 같은 근대성의 핵심 제도에 의해 억압된 삶의 문제들을 전면에 제기 하면서 주체적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를 의미한다. 그래서 근대 정치에서 정치적 주체로 구성되 지 못하고 배제되었던 여성과 소수자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여성운동도 지방의회에의 진입을 포함해 지역 여성운동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하는 논거로 생활정치를 말하고 있지만, 어느 때는‘생활의제를 다루는 정치’ 로 또 어느 때는‘아래로부터 새로운 정치 주체를 형 성하는 생활자 정치’ 로 또 어느 때는‘일상의 정치’ 로 이해되곤 한다. ‘생활정치’ 라는 말이 지방선거에서 후보의 성별을 불문하고 정책적으로 강조되고, 거기에‘알뜰살뜰’ 한‘엄마의 마음으로’ 가 더해져 기초의원은 여성에게 더 적합하다는 주장도 없지 않다. 그리 어렵지 않게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고, 여성참여 확대에도 도움이 되겠다 싶을 수 있지만, 의도치 않게 큰 정치/중앙 정치/국회와 작은정치/지역정치/기초의회를 분 리해서 정치공간 안에서 다시 공·사 구분과 성 별 역할분담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물론 내 자식에게 좋은 먹거리를 주고 싶다는 욕구를 실천하는 어머니들의 활동은 자기 자식

내 자식에게 좋은 먹거리를 주고 싶다는 사적 관심이 무상급식이라는 공적 민주 주의에 접맥될 수 있는 가능성은 중요한 지점이다.

을 보호하는 일에서 출발했지만, 이러한 여성의 사적 관심이 무상급식이라는 공적 민주주의에 접맥될 수 있는 가능성은 중요한 지점이다. 문제는 이런 여 성적 차이를 어떻게 여성주의적인 권력 기반으로 활용하고 또 정치과정으로 끌어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Mansbridge, 1998). 보살핌의 윤리를 강조하는 모성이론가(maternal thinker)들과 시민적 페미니스트 (civic feminists)의 대립은 여전히‘미완의 논쟁’ 이고, 여성의 정치적 참여와 그를 통한 민주주의의 성숙을

함께 추구할 수 있는 정치와 권력의 전망은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지 못하다. 아직은 대안적 정치에 대한 막연한 긍정도 과도한 부정도 미뤄두고 여성주의 정치의 예민한 촉수를 세 운 채 지역에 발 딛고 더디지만 온전한 여성주의 정치를 실천하는 것이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이자 과제일 것이다.

기획 기초의회가 세상을 바꾼다 39


기획 / 기초의회가 세상을 바꾼다

구의원 100% 활용하기

구의원 월급 주는 사람은 바로 당신 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를 통해 해운대구 나선거구(좌동, 중 1동, 송정동)에서 40%가 조금 넘는 득표로 구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7월 1일부터 임기가 시작되었는데 그달 20일이 되자 첫 월급이 통장에 들어왔다. 나의 월급은 소득세, 주민세, 국민연금,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각 지역 에서 거의 아무런 기반이 없다

건강보험료, 노인 장기요양보험 등 19만 원 가량을 제외하고 311 만 원 정도다. 매월 20일이면 어김없이 통장에 꽂힌다. 물론 보

고 봐도 무방한 우리 노동당의

너스도 없고 퇴직금도 없지만 연봉으로 4000만 원 수준이니 결

입장에서 당원이 지방정치인으

코 적은 돈이 아니다. (한국고용정보원의 2011년 자료를 보니 국회의

로 뛰어드는 것보다 미래 지향

원은 1억 652만 원을 받는다. 변호사나 의사의 평균 연봉보다 많은 셈

적인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왜냐

이다.)

면 사람이 선거에 임하면 비로 소 그 하찮던‘지역’ 이 눈에 들 어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지방의회는 244개가 있다. 특별시와 광역시, 그 리고 도를 포함해 열일곱 개는 광역의회이고, 나머지 227개는 기 초의회이다. 기초의회는 시, 군, 구에 있는 지방의회를 말한다. 227개의 기초의회에 속한 지방의원은 총 2878명이다. 전국 지방 의원에게 지급되는 연간 인건비 규모는 어림잡아 1200억 정도로 추산된다. 여기에다가 전국 227개 기초의회의 운영 경비 총액이 2100억 정도이니 일 년에 전국의 지방의회를 유지하는 데 3300 억 정도의 예산을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이들 지방의

화덕헌 부산 해운대구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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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들이 활동하는 227개 지방정부의 총예산 규모 54조 286억 원 대비 0.6% 수준이다.


구의원 월급을 비롯한 활동비, 의회 운영비에 이르기까지 이 큰 돈은 어디서 나오나? 두 말 하면 잔소 리, 바로 지역 주민들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시민들이나 언론이 구의원의 정치활동에 관심을 소홀히 해서 는 안 되는 이유이다.

내 연봉은 1억 4천? 1억 4천! 의정비를 인상하려는 지방의회와 이를 저지하려는 시민 사회 사이의 논쟁은 거의 매년 되풀이되고 있 다. 심지어 의정비 인상 문제로 소송이 진행 중인 지방의회도 여럿 있다. 2013년 4월 8일《경향신문》보도 에 따르면 안전행정부에서는 아예 의정비 결정 주기를 현재 1년에서 4년으로 변경하고 공무원 보수 인상 률을 자동 적용하는 방안을 마련 중이라고 한다. 시민들뿐만 아니라 의원들 사이에서도‘적정한 의정비’ 가 얼마인지에 대해 인식의 차이가 있다. 의정 활동 자체가 워낙 재미있고 흥미로운 부분이 많아서 그런 지, 나는 솔직히 내가 받는 의정비에 대해 불만이 전혀 없다. 고미숙의 책《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 에 보면 강원도 양양 부사를 하고 돌아온 연암 박지원은 2천 냥 에 불과한 자신의 녹봉을 1만 2천 냥이라고 구라를 쳤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를 의아하게 여기니“양양의 ‘산과 바다의 빼어난 경치’ 를 누리는 안복(眼福)이 1만 냥” 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단다. 같은 셈법으로 구의 원인 내 연봉도 1억 4천만 원은 족히 될 듯하다. 해운대라는 천혜의 자연을 가까이 두고 밤낮으로 누리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해운대 자전거길을 따라 출퇴근을 하고, 관내 시찰을 명분 삼아 자전거를 타고 해수욕장으로 나가기도 한다. 지난 가을에는 일주일에 2~3일은 해수욕장에 가서 자전거를 타거나 일광 욕을 한 것 같다. 특히 해운대 일광욕의 즐거움은 필설로 다하기 어렵고 값을 매길 수도 없다. 물론 구의원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해운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그렇지만 지역의 정책과 예산을 만드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은 지역의 특색과 장점을 직접 향유해 보지 못했다면 심각한 문제다. 100명의 공무원들에게 물었더니 해운대에서 해수욕을 해본 사람 14명, 일광욕을 해본 사람 2명, 해양레저 경험자 는 3명에 불과했다. 구의원인 나부터 솔선수범해서 해운대를 좀 더 알고, 누리고, 즐겨 볼 필요가 있다는 의식이 생겼다. 해수욕장을 제대로 사용해 본 사람의 머릿속에서 해수욕장에 대한 적절한 사용법, 다시 말해 관련 시책이나 정책이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틈만 나면 바다로 나가 홀라당 벗고 일광욕을 하고, 사람들을 해수욕장으로 불러 모아서 파티도 했다. 매해 겨울, 해운대 바닷가에서 열리는 <북극곰 수 영대회>에도 나간다. 올해는 노동당 당원들과 함께“밀양 송전탑 반대!”외치며 대형 북극곰 모형을 안고 찬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공부해야 구의원 한다 사진 찍고 전시 작업하는 작가로 살다가 처음 구의원이 되고 보니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이‘숫자’ 였다. 기획 기초의회가 세상을 바꾼다 41


이라고 써진 숫자는 읽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 구의원 해운대구 예산이 3천억이 넘는데, 살아오면서‘1억’ 이 된 것이다. 게다가 구청의 모든 서류에서 숫자는 1000원 단위, 즉 0 세 개를 생략하고 표기했다. 떠듬 떠듬, 읽기조차 만만치 않았다. 차차 훈련을 하면서 숫자에는 익숙해졌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그 숫자들이 의미하는 것, 즉 회계나 통 계에 대한 지식의 결핍이었다. 정례회를 대비해 연수에 꼬박꼬박 참석했고, 예산에 대한 강의도 틈틈이 들었다. 예산안에 코 박고 머리를 쥐어뜯다 보면 틈새가 보였다. 하나하나 지적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할 때마다 지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언제부턴가‘수치에 대한 꼼꼼한 분석을 하는’의원이라는 세 간의 평가를 듣게 되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기특하고 신기한 일이다. 골머리 싸매고 공부해온 지난 시간이 그저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구정 전반을 파악하는 데 가장 자신감을 심어준 것은‘신문’ 이다. 지방정치와 행정뿐만 아니라 환경, 여성, 노동, 장애인, 자살 등등 주제에 따라 스크랩해서 모은 서류철이 150개 정도 된다. 옛 기사를 살펴보 면 어떤 패턴이 보인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거창한 담론을 꺼낼 필요도 없다. 다른 도시에서 터진 문제가 부산 해운대구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이렇게 모은 자료들은 의회 행정사무감사부 터 각종 보고회나 설명회에 이르기까지 나의 말과 생각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소재가 된다. 뿐만 아니라 비판과 지적에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안을 제시할 수가 있다. 나의‘제1보좌관’ 이기도 하다. 신문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꾸준히 책을 읽어야 한다. 해운대구 의회의 경우 도서구 입비가 있어 사무국에서 매달 도서구매 신청 을 의원들에게 받는데 도서구입 신청자가 별 로 없다. 지난 4년 간 그 예산은 거의 나 혼 자 독차지하고 쓴 예산이 되어 버렸다. 쓰레 기, 디자인, 환경, 문화, 지리, 인문, 통계, 아 파트, 감시, 기후, 건축, 도시, 부산, 요리 등 등 참으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을 수 있어 그 자체로 늘 행복했다. 흔히 정치인의 덕목 으로 “발로 뛰는” 이라는 수식어를 쓰는데, 인간과 세상을 읽는 안목을 키우려면“눈으 로 뛰는”독서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진보정당 구의원 사용설명서 2012년 행정사무감사 당시 성인지예산안을 분석, 지적하며 동료 의원들과 공무원들을 데리고 직접 남녀 화장실을 돌아보았다. 다 들 규모와 시설의 차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사진 : 화덕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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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생활 하다보면 가끔 어처구니없는 민


원이 들어오기도 한다. 씽크대 물이 안 나온다든지, 하수구가 막혔다든지 하는 민원이다. 황당하기도 하고 “나보고 어쩌라고?”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일단 무조건 현장을 찾아가 본다. 내가 해결할 수 있든 없든 주민을 만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 둘 민원을 챙기다 보니 주민들의 신뢰를 얻게 되는 것 같다. 당이나 당원들도 구의원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좋겠다. 일전에 의정일기를 통해 쓴 것처럼 당 원들의 소개로 민원인의 일을 해결하다가 중증장애인 활동보조 사업의 내막을 좀 더 소상히 알게 된 적이 있다. 이런 민원은 주민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거니와, 구의원 스스로에게도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큰 보탬이 된다. 각 지방정부의 청소행정업무의 민간위탁 같은 경우 예산상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청소노 동자들의 고용안정성과 복리라는 노동권의 측면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노동조합과의 연대와 협력이 필요하다. 아울러 청소원가계산이나 재정 등 전문적인 분야를 다룰 식견도 필요한데, 이를 의원이 혼자서 하기에는 벅찬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당내 곳곳에서 활약 중인 전문가 당원들의 지원을 받 는다면 민원 해결을 넘어 사회적 의제로 만들 수도 있다. 특히 당의 부문위원회가 기초의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다. 예컨대 2012년 행정사무감 사 당시에 성인지 예산안을 분석해서‘전혀 성인지적이지 않은’엉뚱하게 편성된 예산을 지적해 지역언론 에 보도된 적이 있다. 그때는 혼자서 타지역 구의회와 부산시 예산서를 보며 자료를 만들었지만, 당의 여 성위원회와 함께 작업했다면 더욱 기발한 아이디어를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각 시도당과 당협의 여성 당원들, 그리고 여성위원회가 의원들과 함께 성인지 예산서를 함께 살펴보거나 성인지 예산에 포함될 만 한 사업을 찾아낼 수도 있다. 의원이 기자회견장이나 농성 시위현장에 불려 다니면서도 배우는 것은 있겠지만 이왕이면 우리 당에 중요하게 여기는 정책이나 의제가 지역에서 관철 될 수 있도록 의원을 써먹어 주셨으면 한다.

누구나 구의원이 될 수 있다 기초지방의원은 읍면동 단위에 해당하는 선거구에서 뽑게 되므로 우리 동네 구의원은 평범한 이웃집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2010년 지방선거 결과 당선자 관련 통계를 보면 한나라당(1247명_43%), 민주당 (1025명_35.5%), 무소속(305명_ 10.5%), 자유선진당(117명_4%), 민주노동당(115명_3.9%), 진보신당(22명 _0.7%) 등이다.

직업별로는 정치인 550명, 농축산업 247명, 상업 183명, 건설업 86명, 회사원 83명, 교육 38명, 수산 16명, 금융 15명, 의료 11명, 운수 10명, 광공업 9명, 통신 8명, 공무원 5명, 언론 4명, 출판 2명, 종교 1명, 무직 70명, 기타 직업이 811명이나 되었다. 이밖에도 직업란에 구의원이라고 적은 사람도 739명이나 되 었는데 이는 아마도 재선 이상의 경력을 가진 경우이거나 이제 구의원이 되었으니 직업란을 구의원이라 고 채운 것인 듯하다. 기타 직업으로 분류된 811명 가운데 한 명은 사진사가 분명하고^^ 그렇다면 나머지 기획 기초의회가 세상을 바꾼다 43


로 분류되었을까? 퍽 궁금하다. 810명의 직업은 도대체 무엇이기에‘기타’ 구청장(시장, 군수)의 경우 직업별 비율이 전체 227명 중에서 정치인 79명 다음으로 공무원 출신이 72 명(31%)으로 높았다는 사실에 비하면 공무원 출신 구의원의 비율은 0.2% 수준에도 못 미친다. 공무원이 보기에도 구의원이 그만큼 하찮은 직업이라는 방증일까? 구의원을 잘 할 수 있는 직업은 일차적으로 행정 이나 회계에 대한 식견이나 소양을 갖춘 사람일 것이나 그런 전문적인 분야의 인재는 기초 지방의회에는 드물다. 그나마 실무적으로 보자면 공무원 출신이 구의원 역할을 가장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상은 전 혀 그렇지 못하다. 구의회의 남녀 성비는 3.68:1 정도로 남자가 많다. 비례 부분을 제외한 지역구의 경우 남성의원이 압도 적으로 많아 8.3:1에 이른다. 아마도 구의원의 세대별 구성비를 확인해 보면 진보적인 청년활동가들에게 어떤 시사점을 던져줄 것도 같다. 구청의 각종 위원회에서부터 시작해서 주민자치위원 그리고 지방의원 으로 차근차근 진출하는 것이야말로 장기적으로 지역사회를 바꿀 수 있는 기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명의 광역의원을 만들려면 지역에 뿌리내린 2-4명의 기초 의원이 있어야 한다. 한 명의 시장이나 군수 혹은 구청장을 세우려면 적어도 그 지역의 기초 선거구수 만큼의 구의원이 있거나 의회 절반 정도의 구의원을 확보해야 가능한 것 아닐까? 해운대구 같은 경우 7개의 기초 선거구가 있고 구의원 수는 총 17 명이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규모 있게 구청장 자리를 차지하려면 적어도 7명의 구의원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뛰어난 인물의 개인기로, 혹은 시대의 운이 좋아서 뽑히는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에게 나 당에게나 그건 사상누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역에서 안정적인 기반을 가진 정치세력이 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각 지역에서 거의 아무런 기반이 없다고 봐도 무방한 우리 노 동당의 입장에서 당원이 지방정치인으로 뛰어드는 것 보다 미래 지향적인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왜냐면 사람이 선거에 임하면 비로소 그 하찮던‘지역’ 이 눈에 들어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출마하라 사람이 동호회나 노동조합, 시민단체가 아닌 정당에 적을 두는 가장 일차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 은 바로 선거다. 데모를 잘하는 것이 참 자랑스러운 일이긴 하나 정당이 데모 동호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책을 잘 만드는 것이 참 가치있는 일이긴 하지만 정당은 정책 연구소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정당은 선 거에 참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이고 결사다. 나는 2010년에 지방선거에 출마할 때까지만 해도 당선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저 당 지지율을 조금 높이고, 함께 출마한 다른 후보를 알리려고 출마했다. 그런데 덜 컥 당선이 되었다. 지금 생각 같아서는 의원생활이 끝나더라도 내가 당에 적을 두고 있는 한 선거를 그냥 넘길 일은 없을 것 같다. 우리를 알리는 데 선거와 의회라는 공간만큼 매력적이고 실속 있는 것이 또 있겠 나 싶어서다. 만국의 노동자여, 출마하라! 44


노동르포

콜트콜텍을 읽는 열두 개의 시선 ②

…오래된 물음

기획서평 45


노동르포

콜트콜텍을 읽는 열두 개의 시선②

오래된 물음 이선옥 기록 노동자

2014년 2월7일,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오늘 아침 쌍용자동차 해고자 153명에 대한 정 리해고가 무효라는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판결 전날인 어제 늦은 밤까지 항소심 선고에 대 한 기대감과 불안함을 적은 해고자들의 글을 보면서 걱정이 됐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 밤을 보내고 있었을까?

기대도, 절망도 하지 않는 마음의 면역체계 간혹 불행이 닥칠 것 같은 예감이 들 때 최악의 상황을 사실로 만들어 놓고 대비하는 경 우가 있다. 그래야만 그 불행이 현실로 닥쳤을 때 조금 덜 아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장 기투쟁을 하는 해고자들

승소한 판결 하나에 이제 다 끝났다며 웃고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이 2년, 3년, 5년… 해를 거듭하면서 내성이 생긴다. 섣부른 기대도, 완전한 절망도 하지 않는 것. 마음의 면역체계다.

은 더 그렇다. 승소한 판결 하나에 이제 다 끝 났다며 웃고 만세를 부 르던 사람들이 2년, 3년, 5년… 해를 거듭하면서 내성이 생긴다. 섣부른

기대도, 완전한 절망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장기투쟁 노동자들이 긴 투쟁의 시간 동안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마음의 면역체계다. 쌍용차 노동자들도 그랬다. 마음껏 기뻐해도 좋을 날이지만 한 편으론 상고심에 대한 불 안감을 함께 얘기하고 있었다. 언론은 쌍차 노동자들이 승소해서 당장이라도 공장에 돌아 갈 수 있을 듯 보도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회사는 상고를 할 것이고, 대법원의 판결까지 또 몇 해를 기다려야 할 지 모르는 데다, 부당해고 확정판결을 받는다 해도 실제 46


복직이 가능할지도 알 수 없다. 복직까지는 복직이라 말할 수 없는 불안. 이건 그냥 막연한 불안이 아니다. 지난 1월 10일 파기환송심에서 패소한 콜트콜텍악기 노동자들의 법정 싸움 7년의 경험이 그 불안의 구체 적인 증거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에게 지난 7년은 공장과 거리와 법원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콜트악기 노조의 경우 지금도 50개가 넘는 소송을 진행하고 있고, 콜텍은 해고 사건 두 개에 대해 두 번째 대법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해고된 후 투쟁하면서 많은 일을 겪었지만 특히 7년 세월 동안 이들이 뼈저리게 경험한 것은 가장 공정하고 권위 있는 줄 알았던 법의 민낯이다.

널뛰는 판결, 요동치는 마음 공장이 폐업하고 쫓겨난 그들은 우선 회사의 폐업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싸움을 시작했다. 위장폐업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쉽지만 그것을 입증하는 일은 어렵다. 사법부에 고발을 하고 조사를 거쳐 판정을 받아야 입증이 가능하다. 노동자들 모두가 뻔히 알고 있고 회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해도, 실 정법을 통하지 않고 그 주장을 인정받을 방법은 없다. 원치 않아도 소송을 해야 한다. 해고당한 노동자들 이 거치는 판결 과정은 대부분 지방노동위원회 → 중앙노동위원회 → 행정법원 → 고등법원 → 대법원까 지 총 다섯 단계다. 콜텍악기 노동자들은 우선 지방노동위원회에 위장폐업으로 인한 부당한 정리해고니 이를 구제해 달라 고 신청했다. 노동위원회는 법원과 달리 소송 기간이 길지 않다. 2~3개월이 기본이고 길어도 6개월을 넘 기지 않는다. 노동자도 삶에 타격을 덜 입고, 기업도 정상적인 활동을 하라는 취지이다. 노동문제는 개인 의 생계와 생존에 바로 영향을 끼치는 특수성이 있기 때문이다. 콜텍악기 노동자들은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회사가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요청했고 이번에는 노조가 졌다. 노 조는 이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행정법원에서 정식 재판을 시작했다. 지방노동위원회에서 판결 받을 때만 해도 금방 다시 돌아가 일하게 됐다고, 이제 끝났다고 좋아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노동위원회는 이기 든 지든 크게 실효성이 없다. 이겨도 회사가 승복하지 않고 정식 재판을 청구할 것이고, 질 경우 노동자들 또한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위원회의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일 정도의 자본이라면 애초에 노동자 들을 모조리 해고하진 않았을 것이다.‘법’ 에 기대는 일은 해고 싸움의 끝이 아니라 더 길고, 어렵고, 피 말리는 싸움의 시작이었다. 근로기준법에는 해고의 제한 조항으로‘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어야 하고, 사용자는 해고를 피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여야 하며, 노동조합과 성실하게 협의해야 한다’ 고 정하고 있다. 콜트콜텍 악기의 노동자 들은 회사가 위 규정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수십 억 원씩 흑자를 냈고, 차입금도 없는 알짜배기 회사인데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일 리 만무했다. 또 나이 많은 여성조합원들에게 강제로 사 직서를 받았고, 해고에 대해 노동조합과 한 차례도 협의하지 않았다. 법조항을 들여다봐도 회사가 요건을 노동르포 47


2011년 7월, 시그네틱스와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함께 연 기자회견. 대법원에 몇 년째 계류 중인 소송에 조속한 판결을 촉구하고 나섰다.(사진 : 참세상)

갖춘 건 없었다. 법이 분명히 보장하고 있으니 당연히 이기겠지, 그게 모두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법은 노동자들의 생각만큼 단순 명쾌하지 않았다. 중앙노동위원회와 행정법원 1심은 오히려 회사의 손을 들어 줬다. 흑자인데도 위장폐업 한 것이니 다시 공장을 돌리라고 주장하는 노동자들에게“경영상 어려움도 인정 되고, 이미 회사가 폐업한 상태이니 부당해고라고 인정하더라도 노동자들에게 구제의 실익이 없다” 는이 유였다. 공장은 얼마든지 가동할 수 있

공장은 얼마든지 가동할 수 있으며 이 폐업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게 거짓말이어도 어차피 문을 닫았으니 소용없다니. 그렇다면 어떤 회사든 일단 폐업하고 해고하면 그만이다.

으며 이 폐업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데, 그게 거짓말이어도 어차피 문을 닫 았으니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구제 실 익이 없다는 이유로 정당한 사유에도 구제하지 않는다면 어떤 회사든 일단 폐업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하면 그만이

다. 의사가 수술을 잘못해서 아프니 제대로 수술하게 해 달라는 환자에게 어차피 살려 봐야 언젠가 죽을 테니 살 필요가 없다는 얘기와 같다. 노동자들은 법원의 판결 논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고등법원에 항소를 했다. 노동위원회와 행정소송을 거치며 당연하게 가졌던 기대는 사라졌다. 하 지만 항소심에서는 다시 노동자들이 이겼다.“폐업과 해고를 할 만큼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성을 갖추지 못했고, 해고는 부당하다” 는 판결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만세를 불렀다. 아직 법이 기대볼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차례 재판을 거치는 동안 마음은 솟았다가 꺼졌다가 널을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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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것은‘포기하지 않는 것’ 소송은 여러 가지로 노동자들을 괴롭힌다. 노동자들에게 국가경제 활성화나 기업 살리기라는 말은 피 부에 와 닿지 않는 추상적인 것이다. 반면 해고는 당장 일자리가 끊기고 수입이 없어지는 내 삶에 구체적 인 고통이다. 그래서 정말 엄격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사회 분위기도 살벌해졌고 법조계도 점점 경제논리에 맞춰 기업의 입장을 생각해 주는 쪽으로 바뀌었다. 실제 판결도, 피부로 느껴지는 분위기도 모두 노동자들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재판 내내 노동자들은 심 리적으로 위축됐다. 백억 원이 넘는 당기순이익을 벌어줬는데 갑자기 회사가 망했다는 말을 믿고 순순히 해고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같은 억울함으로 뭉친 조합원들을 벗어나 밖으로 한 발짝만 나가면 세상의 반응은 싸늘했다. 무능해서 해고된 사람들, 공장도 문 닫고 없는데 어쩔 수 없으니 돈이나 받고 끝내라는 사람들, 회사가 어려우면 당연히 노동자가 희생해야지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 싸워 봐야 결국 안 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일 할 때도 창문 하나 없는 공장에서 고립되었는데, 해고 된 후에는 몸은 농성장에 고립되고 마음은 세상의 싸늘한 시선에 꽁꽁 묶여 더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공장은 문을 닫아버렸고 협상해야 할 사장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과 집회를 이 어가면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포기하지 않는 것’하나였다. 어떻게든, 무엇이든 해보는 것 말고 이 해 고 문제를 풀기 위해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었다. 생계비 마련도 어려운 상황에서 소송 비용을 대는 일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소송 비용을 다 지역에서 충당했어. 100일 문화제 200일 문화제 할 때마다 맨날 내가 삥 많이 뜯었 어.(웃음) 그 때는 법률비용이 많이 들어가진 않을 때였어. 집단으로 소송이 들어간 2009년도 4월 중노위 이후부터는 소송비용이 들어가기 시작했지. 지역에서 후원 들어온 거에서 법률비를 조금씩 냈고, 금속노 조에서 소송비용을 적게 배려해 줬어. 처음엔 사건이 무조건 정리해고 딱 하나였는데 점거나 고소고발 이 런 것들 다 들어가는 거야. 최근까지도 계속 100만원씩 150만원씩 조합비에서 나가고 있어. 목돈으로 줄 (콜텍악기 장석천 사무장) 수 없으니까. 지금까지 콜트콜텍 각 1억 정도 들어갔어.”

기득권을 위한 법, 더 나빠진 제자리 2009년 콜트와 콜텍 모두 고등법원에서 부당해고라는 판결이 난 후 회사는 바로 대법원에 상고를 했 다. 공장 문을 닫은 지 3년 째 되는 해였다. 기쁨은 잠시, 대법원 판결이 언제 날지 알 수 없고 그 시간 동 안 또 어떻게 버텨야 할지 막막했다. 고등법원 판결에 대한 법률상 합치 여부만을 가리는 것이라 노동자 들에게 유리하다는 희망만이 버틸 수 있는 힘이었다. 꼬박 2년 3개월을 기다려 대법원 판결 날짜가 나왔 다. 투쟁은 어느새 햇수로 5년을 넘기고 있었다. 2012년 2월 23일. 그 날은 나도 긴장된 마음으로 법원에 노동르포 49


갔다. 콜트악기는 오전에 콜텍악기는 오후에 판결이 배정되었다. 서로 잘 될 거라며 격려하고 있었지만, 판결이 날 때까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 다는 걸 5년 동안 겪어 왔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불안이 모두를 감싸고 있었다. 슬프게도 불안은 적중했다. 오전 의 콜트 재판은 해고가 무효임을 확 정했지만 오후의 콜텍 재판은 고등법 원에서 승소한 원심을 파기하고 서울 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같은 사장, 같 기타를 만들지 않는 기타 공장(사진 : 콜트콜텍 공동행동)

은 회사, 같은 노동자에게 정 반대의 판결을 내린 것이다. 오전엔 기쁨의

오전의 콜트 재판은 해고 무효를 확정했지만, 오후의

눈물이, 오후엔 절망의 눈물이 법원 마당에 넘쳤다. 내 어깨에 무너지듯

콜텍 재판은 승소한 원심을 파기하고 서울고법으로

기대어 펑펑 울던 여성조합원의 말이

돌려보냈다. 같은 사장, 같은 회사, 같은 노동자인데

잊히지 않는다.“내가 그동안 어떻게

정반대의 판결이 나온 것이다.

버텼는데, 어떻게 버텼는데, 법이 어 떻게 이럴 수가 있어…” 이인근 콜텍 지회장은 울 틈도

없었다. 가장 울고 싶은 사람은 그였을 것이다. 그는 만날 때마다 법이 얼마나 노동자에게 불리한지, 이 나 라 사법체계를 겪으며 받은 고통에 대해 꼭 말해야 한다고 늘 얘기했다. 그는 틈만 나면 법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언젠가 농성장이 털리던 날도 첫 마디가 법 얘기였다. “법에 대해서 써줘. 이게 과연 올바른 집행인지. 고지 한 번 한 적도 없고, 계고장을 날린 적도 없고, 아 침에 와서도 어떤 집행을 한다는 설명도 없고, 사람을 짐짝 내버리듯이 들어다 버리는 집행이 과연 합법 적인 건지,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집행인 건지. 웅성웅성 하길래 나와 봤더니 집행관이‘집행하겠습니다’ 한 마디 하고, 용역이‘끌어내’하고 끝이었어. 4명이 다 하나하나 사지 들려 나왔어. 우리가 알고 있는 법 은 결코 민중을 위한 게 아니라 1% 기득권을 위한 법이야. 분통이 터져!” 법 때문에 수없이 다치고 소리 높여 성토하던 그였지만 이번엔 화를 낼 힘도 없어 보였다. 그는 이게 끝 이 아니라며 다시 시작하자고 조합원들을 다독였다. 5년 동안 장기투쟁을 하고 있는 노조의 위원장은 맘 놓고 울 수도 없었다. 나는 그 판결 자체보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들이 얼마나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는지 50


알기 때문에 눈물이 났다. 나처럼 언저리에 있는 사람마저 펑펑 울 정도로 억울한 날에도 그는 눈물을 삼 켜야 했다. 끝도 안 보이는 거대한 벽, 그 벽을 넘어야 하는데 방법을 알지 못해 고개 숙인 채 울고 있는 작은 아이. 위용 넘치는 법원 건물 앞에 선 그들은 그 작은 아이처럼 가엾고 초라했다. 그날의 판결은 2012년의 걸림돌 판결로 선정되었다. 만장일치로 선정되었을 만큼 이 판결에 대한 비판 은 컸다. 대법원이 정리해고에 대한 법 해석을 더 후퇴시켰기 때문이다. 판결문은 흑자해고를 정당하다고 인정해줬다.“기업의 전체 경영실적이 흑자를 기록하고 있더라도 일부 사업부문이 경영 악화를 겪고 있는 경우… 장래 위기에 대처할 필요가 있어 잉여인력을 감축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불합리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기업 전체가 흑자여도 일부 사업부문을 폐쇄하고 정리해고가 가능해진다면 위기를 부풀려 노동자 들을 해고할 수 있게 된다. 해고가 노동자의 삶에 미치는 충격보다 기업의 원활한 활동을 우선에 두는 경 제논리와 기업논리가 사법부의 판단 기준이 되어버렸다. 승소한 콜트악기마저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다시 해고를 했다. 법정 싸움 5년 만에 돌아온 건‘더 나빠진 제자리’ 였다.

아득한 사법투쟁, 책임지지 않는 자본가들 고등법원으로 파기 환송된 재판의 선고가 지난 1월 10일 열렸다. 투쟁은 이제 7년차에 접어들었다. 콜 텍 공장이 해고를 할 만큼 경영상 긴박한 사유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전문 기관의 감정결과까지 채택된 판 결이었지만, 그 보고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재판부는“그렇다 해도 미래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해고는 정당하다” 고 판결했고, 노동자들은 대법원에 또 상고를 했다. 대법원에서 이기고도 다시 해 고를 당한 콜트악기는 지노위, 중노위, 행정법원 1심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들의 사법투쟁 과정을 지켜보면 그저 아득하다. 절망의 끝을 알 수 없고 희망이 될 만한 근거도 뾰족 하게 없다. 노동자들은 희망과 절망의 크기를 재 볼 여력도 없다. 그냥 겪고 있을 뿐이다. 몇 년 동안 이들 을 지켜보면서 나는 농담으로라도“법대로 하라” 는 말을 쓰지 않게 되었다.‘법대로’ 라는 말은 누가 뱉느 냐에 따라 다르다. 그 말의 느낌, 그 말의 기능, 그 말의 효과, 그 말의 파장, 그 말이 심판하는 인생. 철탑 위에서, 길거리 농성장에서 노동자들이 외치는 법대로와, 그 노동자들을 끌어내고 구속시키라고 외치는 자본가의 법대로는 전혀 다르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해고자 최병승씨는 8년 동안 회사를 상대로 불법파견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 직 전환을 요구하는 소송을 벌였다. 법원은 두 차례나 그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회사는 법원의 판결이 난 후에도 판결을 이행하지 않았고, 그는 울산 현대자동차 앞 철탑에 올라 1년 가까이 고공농성을 벌였다. 농성을 마치고 내려오던 날 그는 취재진의 카메라에 대고 말했다. “…업무 방해로 집시법 위반으로 수배를 받았습니다. 책임을 다하기 위해 저는 출두할 것입니다. 제 잘 못을 인정하고 달게 처벌을 받겠습니다. 그래야 비정규직 노동자가 왜 집시법을 위반하고 업무방해를 했 는지, 하늘에 올라 296일 간 매달려 세상을 향해 외쳤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10년 간 불법파견을 저지 노동르포 51


른 정몽구 회장도 저처럼 책임을 지면 좋겠습니다. 왜 책임을 안 지는 것입니까? 그걸 단 한 줄이라도 써 주십시오…”

인격체들의 삶을 무너뜨리는 인격이 없는‘법’ 법은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가장 권위 있는 사회적 약속이다. 하지만 법은 이처럼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작동한다. 법률조항도, 법체계도, 법조인들의 의식도 모두 그렇다. 지노위, 중노위, 정식 재판 3심까지, 사실상 5심제인 판결과정은 자본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당장의 생계가 어려운 노 동자들은 긴 소송을 감당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전문법원이 없는 것도 노동자들에게 크게 불리하 다. 한국의 사법부는 개별노동자와 기업을 동등한 1대 1의 존재라 여기는 민사적인 시각으로 노동문제를 바라본다. 노동법은 시민법이 가진 구

당장의 생계가 어려운 노동자들은 긴 소송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노동전문법원이 없는 것 도 노동자들에게 크게 불리하다. 드물게 이기 더라도, 복직을 강제집행할 방법이 없다.

조적인 불평등함을 보완하는 대표적인 사회법이다. 그러나 법조인이 되는 과 정에 노동법과 근로기준법을 따로 공 부하는 체계가 없다. 헌법이 왜 기업에 게 손해를 끼치는 파업권을 노동자들 에게 보장하고 있는지 이해가 부족한

판관들은, 회사에 손해를 끼친 만큼 노동자도 똑같이 당하는 것이 공정함이라 여긴다. 이 기울어진 의식이 판결문에 담겨져 고스란히 노동자들에게 돌아온다. 드물게 노동자들이 승소한다 해도 복직에 대한 강제집행 방법이 없는 것도 문제다. 사용자는 노동자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가처분 소송을 내서 점거한 노동자를 끌어내고 재산권을 보호하는 등의 실질적인 집 행이 가능하지만, 노동자는 설사 오랜 소송 끝에 해고로 인정을 받아도 이를 강제로 집행할 방법이 없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박영호 사장이 참가하는 국제악기쇼에 원정 투쟁을 갔을 때, 현지 노동자들 모두 이 런 해고가 가능하다는 것에 먼저 놀랐다. 그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회의 상식 을 세워야 할 우리 사법부의 현실을 보면 암담하다. 콜텍 판결의 주심인 안대희 대법관은 판결 후 집권여 당의 고위관료로 자리를 옮겼다. 가진 자들끼리의 담합, 기득권을 수호하는 수단이라는 노동자들의 주장 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그 법에 한 가닥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처지가 싫다. 이런 마음고생 또한 노동자들만의 몫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인격이 없는‘법’ 이라는 것이 실제 인격체들의 삶을 이토록 무너지 게 하고 있는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을지, 묻게 된다. 해고자들이 몇 년 동안 삶을 걸고 싸워 법의 민낯을 드러냈고, 우리 앞에 이제야 겨우 이 물음 하나가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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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꾸러미밥상은 해발 500m이상의 고랭지인 전북 장수에서 노동당, 녹색당 등 진보정당 당원, 농민회, 카톨릭농민회 회원, 진보적인 개인들이 운 영하는 친환경농산물 회원제를 말합니다. 유기농으로 키운 신선한 제철농산물과 두 부, 빵, 떡, 장류 등 100여 가지로 구성되는 직거래회원제입니다. 회원들은 매주1회, 또 는 격주 1회로 농산물을 받아보게 됩니다.

▣ 기본1회 배송품목 우리콩두부, 유정란 6알, 유기농제철채소 4~6가지, 친환경가공식품 등

▣ 1년 48주(격주회원은 24주) 연중공급 품목 •기 본 : 유정란, 우리콩두부, 쌈채, 제철농산물, 가공식품 등 •채소류 : 파, 양상추, 쌈채, 시금치, 양배추, 브로콜리, 쑥, 두릅, 쑥갓, 배추, 풋고추 등 •과일류 : 사과, 배, 자두, 매실, 호두, 은행 등 •과채류 : 방울토마토, 토마토, 애호박, 오이, 옥수수, 단호박, 파프리카 등 •근채류 : 감자, 고구마, 당근, 무, 마늘, 양파, 땅콩, 생강 등 •주잡곡 : 백미, 현미, 흑미, 통밀쌀, 우리밀가루, 보리쌀, 우리콩, 수수 등 •가공식품 : 쌀빵, 장류, 수제차, 효소, 부각, 연잎밥, 두부, 떡, 미수가루, 과일즙 등 •버섯류 : 느타리버섯, 표고버섯 등 •나물류 : 고사리, 취나물, 무말랭이, 고구마줄기, 말린애호박, 시래기 등 ※ 품목은 산지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 장수꾸러미밥상 가격 매주회원 : 월4회 12만원(택배비포함) / 격주회원 : 월2회 6만원(택배비포함)

▣ 배송 매주회원은 1주일에 한 번, 격주회원은 2주에 한 번 배송되며, 수요일/금요일 중 요일을 선택해 받 아보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장수꾸러미밥상 다음카페 참조)

▣ 신청 및 문의 참여하실 분은 전화로 신청하시거나 [장수꾸러미밥상] 다음카페에서 가입서를 다운받아 이메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이름 / 연락처 / 매주·격주 선택 / 주소 / 받으실 요일) 장수친환경영농조합 전화 063) 352-6262 / 353-6262 팩스 063) 352-6263 / 노동당 담당자 010-6686-6651 (김재호) 장수꾸러미밥상카페 http://cafe.daum.net/jangsubapsang 이메일 ecojangsu@hanmail.net 계좌번호 농협 355-0002-3570-93 장수친환경영농조합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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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진보정치 열전 3

반역과 자유를 향한 투쟁사, 최현숙 (1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거칠 것 없는 새로운 도전, 예상을 뛰어넘는 방향 전환, 낮고도 당당한 그녀의 거듭된 변신에 당황하는 건 늘 우리 몫이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녀는 늘 거침없이 자기 길을 갔다. 지켜보는 우리는 그 행적의 근원들을 쫓아가기도 바빴다. 인터뷰 : 심재옥, 최혜영, 김윤희 여성위원회 정리 : 심재옥 서울 구로 당원 촬영 : 정정은 편집부장

여성 진보정치 열전 55


최현숙은 노동당 당원이 아니다. 민주노동당 여성위원장, 성소수자위원장을 지냈고 2008년 총선 당시 진보신당 후보로 종로에서 한국 정치 사상 최초의 레즈비언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던 그녀는 2012년 2월 쯤에 진보신당을 탈당했다. 그 뒤 노인들의 몸을 닦고 일상을 돌보는 일을 하는 최현숙은 이 일을 하면서 만난 여성 노인들의 생애구술사를 엮은 책,《천당과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이매진) 를 최근 발간 했다. 거칠 것 없는 새로운 도전, 예상을 뛰어넘는 방향 전환, 낮고도 당당한 그녀의 거듭된 변신에 당황하 는 건 늘 우리 몫이었다.‘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그녀는 늘 거침없 이 자기 길을 갔지만 지켜보는 우리는 그 행적의 근원들을 쫓아가기도 바빴다. 그녀의 삶이 진보정치 여성들의 궤적에서 결코 작을 수 없다. 더군다나 앞으로 이어질 삶 또한 진보정 치의 긴 흐름 속에서 얽히고 만날 것이다. 그래서 최현숙을 만나는 데 당원 여부는 중요한 변수가 아니다. 여성위원회 측의 설명에 기관지위원회에서도 동의하여 인터뷰가 성사됐다. 이번 인터뷰는 한 번으로 부족 했다. 설 연휴를 전후로 두 차례를 만나고 나서야 긴긴 인터뷰는 일단락됐다.

‘양반집 규수’ 를 원했던 아버지와의 불화 만나자마자 그녀의 책《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이야기부터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인 생의 막바지에 선 세 명의 여성 노인들의 삶은 어찌 보면 공식화되지 않은 우리 여성들의 역사이기도 했 다. 세 명의 여성 노인 중 마지막 여성은 최현숙의 엄마 안완철이다. 책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최현숙과 그 엄마의 삶이 겹쳐지고 넘나든다. 최현숙의 엄마는 남원의‘뚜루루한’양반 지주 집안의 막내딸이었다. 아버지 또한 그 시대 양반가문의 자제로 전북대 석사까지 마친, 잘 나가는 집안의 자제였다. 최현숙의 둘째 외삼촌이 당시 남원에서 자유당 국회의원을 두 번 지내고, 지역구를 서울로 옮겨 동대문에 출마하면서 부모님의 서울살이가 시작됐다. 자 유당 권력의 끄트머리를 잡고 공무원을 하던 아버지는 4.19 혁명으로 끈이 떨어져 버렸고 이후 내내 선비 며 양반 체면을 따지다 현실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다. 반면에 엄마는 부잣집 막내딸이면서도 유산 한 푼 물려받지 못한 한풀이라도 하듯, 수완 좋고 총기 넘치는 경제 활동으로 집안의 경제를 도맡아 책임졌다. 서울살이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가부장적 권위만 내세우는 아버지, 이에 맞서지도 제대로 순응하지도 못한 엄마, 그 갈등 속에서 최현숙은 유난스럽게 자아가 강한 아이로 자랐다. 첫째딸을 양반집 규수로 남보란

“아버지와의 불화가 나한테는 나를 이루는 중대한

듯 키우고 싶었던 아버지에게 싫은 건 싫다 할 소리 다하는 딸은 괘씸

근본이고… 아버지를 배반한다는 건 모든 권위와

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가뜩이나

모든 질서와 가치관에 대해 의심하는 거였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부장적 권위만 남은 아버지로서 그 권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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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하는 방법은 폭력뿐이었다. 이 에 도전한 최현숙은 어려서부터 제일 많이 맞았다. 도망도 가지 않 고 눈 부릅뜨고 할 말 다 해서 더 맞았던 최현숙은 집안에서 가장 ‘독한 년’ 이었다. 아버지와의 불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생겨난 액취 증, 최현숙은 자기만의 수렁을 깊 이깊이 파고 들어갔다.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실존적 고민으로 방황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와의 불화가 나한테는 나를 이루는 중대한 근본이고… 아버지를 배반한다는 건 모든 권 위와 모든 질서와 가치관에 대해 의심하는 거였어. 그런데 정작‘내 것’ 은 없었던 거야. 10대 초중반부 터, 아버지랑 부닥치기 시작했고, 어떤 권위도 무엇도 믿을 수가 없 는데 그럼 내 껀 뭐지? 그때부터

작년에 출간된 최현숙의 책《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이매진)

헤맸던 것 같애.”

이화여대 문리대 원서를 백지로 내고 쟁취한 것은 자기만의 수렁 속에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적극적이고 명랑한 남자아이 같았던 최현숙은 긴긴 혼란 속 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신광여중, 정신여고를 다니는 내내 실존주의 철학책을 읽었다. 틈틈이 공부도 했 다. 성적도 꽤 높았다. 세상과, 아버지와 타협하는 유일한 지점이‘공부’ 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딸이 당 연히 여대를 가야한다고 생각했고, 이대 문리대 원서를 사와서 최현숙에게 내밀었다. “내가 왜 대학을 가야 하는지도 모를뿐더러, 아버지의 결정은 더더욱 인정할 수 없었어. 시험장에 들어 가서 백지를 내고 나왔어. 나와서, 그 이야길 일기장에 써서 일부러 아버지 보라고 방바닥에 펴 놓았어. 아 버지가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일기장을 보시고는 울었대. 나는 그게 통쾌했어. 그날은 아버지가 날 못 때 린 것 같애…” 여성 진보정치 열전 57


합격자 발표 날, 아버지는‘니 마음대로 하라’ 고 했다. 대학도 안 가려고 했다. 그런데 시인이기도 했던 국어 선생님이‘인생을 왜 막바지로 사느냐? 여기라도 적을 두어라’하시며 2차대인 덕성여대 원서를 사 왔다. 그 땐 예비고사 성적만으로 장학생을 뽑았다. 선생님에게 설득 당한 최현숙이 국문과에 갈까 싶어 보니 국문과는 이미 장학생 정원이 다 차버렸단다. 할 수 없이 가정학과에 장학생으로 원서를 냈다. 이 대목에서 인터뷰를 하던 우리는 한참이나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버지의 가부장적 권위에 맞서 이 대 문리대 시험지를 멋지게 백지로 날리고 나온 여자가 가부장제의 현모양처를 키워낸다는‘가정학과’ 가 웬말이냐, 스타일 구기고 스텝 꼬여서 제발에 제가 걸려 넘어진 꼴 아니냐며 우리는 한참을 놀려댔다. “그래서 이게 내가 평생에 커밍아웃을 하지 못하는, 하기 싫은 대목이야. 하하하하” 76학번. 그때 대학 진학률은 전체 고등학교 졸업자들 중에 5퍼센트 수준이었다. 최현숙은 자기 삶을 혜택 받은 삶이라고 여겼다. 4년 내내 장학생이었고 학비에 책값에 용돈까지 나왔다. 아버지에게 경제적 으로 기대지 않고 자유로이 살려면 장학금이 끊기지 않아야 했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2등 성적을 유지했 다. 4년 내내 과대표도 하고 미팅도 하고 남들 보기에 적당히 괜찮은 상태를 유지했다. 그렇지만, 테두리 바깥으로 튕겨나가지 않았을 뿐 대학 생활은 최현숙에게 혼돈의 유예기간일 뿐이었다.

술집, 위탁모, 식모를 전전하며 대학을 졸업할 즈음, 최현숙은 대학원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처음으로 집에다 대학원 입학금만 대 58


달라고 말을 붙였더니, 아버지는“뭣하러 공부를 더 하냐?”딱 잘라 거절했다. 아버지는 최현숙이 졸업하 면 곧장 결혼을 시킬 심산이었다. 대학 4년 내내 최현숙과 데이트를 하던 남자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 대 공대 출신에 얼굴도 이쁘고 착하고‘양반 집안’ 이었던 그 남자애를 아버지는 사윗감으로 여겼다. 아버 지의 생각과 달리 최현숙은, 솔직히 말하자면 남들에게 보여주기 적당한‘악세사리’ 로 여겼을 뿐이다. 대학원 진학의 길이 막혀버린 최현숙은 그 길로 짐을 싸들고 집을 나왔다. 그 남자는 당시 최현숙과 결 혼하려고 군대 대신 창원에 있는 방위산업체에 취직해서 일하던 중이었다. 그 남자와 산 지 두 달쯤 되었 을 때 가족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최현숙의 의사와 상관없이 혼사 얘기가 오갔다. 최현숙 은 다시 그 집을 나왔다. 아버지를 배반하는 밑바닥, 소위 추락하는 것이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었다. 나 자 신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찾는 마지막 일탈의 기회와도 같았다. 술집에서 일하려고 들어간 적도 있다. 막상 일하는 시간이 되니 온몸이 바들바들 떨려서 보다 못한 술 집 주인이 내보내는 바람에 실패로 끝났지만.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운영하는 아이들 위탁소에서 2~3일 일하기도 했지만 아줌마들이 또 내보냈다. 일주일 정도를 헤매다‘식모구함’ 이라는 광고를 보고 연세대 교수 집에 입주 파출부로 들어가 한 달을 살았다. 심부름도 시키고 애들도 챙겨주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서재에서 실존주의 철학책을 훔 쳐보고 아이들의 질문에도 막힘없이 설명 을 풀어내는 최현숙을 보고 교수부부는 몹

술집에 식모살이에 이르기까지, 최현숙의 가출은 가난한 남편을 만나 금호동 산동네 에 신혼살림을 차리면서 끝이 났다. 그리고 가난의 고통이 시작됐다.

시 헷갈려 했다. 최현숙 스스로도 종국에 는‘신분 하강’ 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맹목적인 일탈의 한계에 부닥친 최현숙의 식모살이는 우 여곡절 끝에 거취를 알게 된 엄마를 통해 한 달 만에 끝나게 되었다.

지독한 가난과 결혼하다 도로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에 있는 게 너무 싫어서 작은 무역회사 영업사원으로 취직을 했다. 거기서 영업사원을 하던 남편을 만났다. 굉장히 가난했던 남편은 중학교까지만 졸업한 사람이었지만 적극적이고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학교를 안 나왔다던가 가난하다던가 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어. 눈이 맞았어. 마음이 딱 맞으니까 예전 에 4년을 사귄 사람이 내 사람이 아니었구나 싶더라고. 그 사람이랑 금호동 산동네에 살림 차리면서, 그게 내 마지막 가출이 됐어.” 착했던 남편은 굳이 부모님께 인사를 가야한다고 우겼다. 인사를 하러 집에 갔다가 남편도 맞고 최현 숙도 맞았다. 그 길로 집을 나와 여인숙을 전전하다가 월말에 월급을 받아 가마때기로 벽을 막아 놓은 가 여성 진보정치 열전 59


건물 집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내가 이제 가난하게 살 차례구나 싶었단다. 그 느낌 이 싫지도 않았다. 전에 사귀던 남자에게 이별을 통보하던 날, 남자는 충격에 빠져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 한 인간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은 최현숙에게도 평생의 멍 에였다. 마흔 일곱 살이 되던 해, 최현숙은 그 남자를 만나 진심을 다해 용서를 빌었 다고 한다. “나는 남편을 통해서 가난 속으로 구체 적으로 들어 왔구, 가난이란 게 너무 간단 해서 좋았어. 왜냐하면 이쪽은 너무 많았 거든. 일상의 가난, 가난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 사글셋방 구하러 다닐 때 남자애만 둘 있어서 집을 못 구하기도 했고, 아이가 화상을 입었을 때 치료비가 없어서 울기도 했어. 그 때는 이미 도망갈 수 없었어.” 아무리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난이었지만 가난한 일상은 고달팠다. 특히 애들로 인해 두드러지는 가난 의 고통은 기억에 새겨질 만큼 크고 아팠다. 하지만 최현숙을 더 힘들게 했던 건 최현숙의 사회활동에 대 한 남편의 줄기찬 반대였다.

“부부 싸움 주제가 맨날 국가보안법이었어” “이 사람은 아주 보통의 소시민이자 자기 가난을 극복하고 싶어 했어. 자기가 열심히 사업을 해서 우리 집안이 행복했으면 좋겠구… 그런데 84년부터 신앙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변했어. 그 전까지 는 나도 가정적이었는데, 예수한테 말리기(!) 시작한 거야. 비전향 장기수 석방운동과 송환운동이랑, 맨날 내가 그거 했잖아. 우리 집 부부 싸움 주제는 맨날 국가보안법이었어. 그러니까 변한 건 나지, 남편이 속은 거지.” 최현숙이 자아를 찾아가는 기나긴 행로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84년에 예수와의 만남이었다. 비전 향 장기수들을 만나게 된 계기도‘예수’ 다. 87년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카톨릭 정의평화위원회를 통해 비 전향 장기수들을 돕는 일에 나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비전향 장기수 문제는 사회적으로 가려진 문제였고 60


운동 진영에서도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분단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비전향 장기수들의 석방 운 동, 생활 지원, 주거 마련에서 송환까지, 최현숙은 오랜 세월‘나’ 를 찾기 위해 골몰하며 헤맸던 만큼 예수 를 통해 만나게 된 사회운동에 온 힘과 열정을 다했다. 최현숙의 사회운동은 카톨릭에서 시작되어 지역운동과 정치활동으로 점점 뻗어져 나갔다. 민중당 상 임대표를 지냈던 이우재 씨를 금천에서 만났고, 그의 부인과 함께 구로문화센터, 한우물소비자협동조합, 한우물 생협, 살 기좋은 구로여성회(살구회) 등을 함께 만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92년 민중당이 해체된 뒤 90년대 중반쯤, 민중당 지도

예수를 만나면서 카톨릭 정의평화위원회를 통해 비전향 장기수들을 돕는 일에 나섰다. 최현숙의 사회운동은 지역운동과 정치활동 으로 점점 확장되었다.

부였던 이재오, 김문수 등과 함께 이우재 씨도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으로 들어갔다. 이에 실망한 최현숙은 함께 가자는 이우재 씨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들과의 관계도 지역활동도 다 접고 목동으로 이사를 했다. 사회운동을 계속하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목동 아파트를 전세 내어 2년 정도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 생 아이들을 상대로 수학과외를 했다. 최현숙이 한창 돈을 벌던 그 즈음 민주노동당이 창당했다. 2000년 1월 31일. 생활에 여유가 생긴 최현숙은 부채감을 떨치지 못하고 제 발로 중앙당을 찾아가 민주노동당에

2002년 민주노동당 여성위원장 시절.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여성통일대회에서 북송 비전향전장기수 리인모 씨의 딸 리현옥 씨(좌) 와 함께 한 최현숙(우) (사진 :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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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했다. 창당 초기여서 그랬겠지만, 제 발로 찾아가 입당한 사람에게 당은 한동안 연락조차 없었다. “선거 막바지에 전화가 왔어. 그래서 선거운동을 함께 하고 그랬어. 당시에는 사무실에서 쥐가 나올 정 도로 상황이 열악했어. 아마 지역 사무국장도 상근이 아니었을 거야. 노회찬 씨가 지역 위원장일 때지. 그 때 내가 형편이 좋아서 한 40만원 정도를 낼테니 상근자를 쓰자고 제안했지. 멤버들은 상당히 있는데 체 계화된 당 활동을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당 활동을 하던 어느 날, 중앙당 자주통일위원회 간부가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들이 영웅적인 활동으로 생각하고 있던 비전향 장기수 지원 사업을 최현숙이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게 계 기가 되어 최현숙은 전국 최초로 당협 차원의 자주통일위원회를 만들었다. 덕분에 중앙당에서나 지역 당 협에서나‘골수 엔엘’ 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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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포럼

의료영리화에 맞서 공공의료 강화를 이장규 기관지위원회 위원장, 한의사

철도민영화에 이어 의료민영화가 논란이 되고 있다. 사실 철도와는 달리 의료민영화는 정확한 용어가 아니며‘의료영리화’ 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그 이유는 좀 뒤에 설명하겠다). 어쨌든 최근 추진되고 있는 정부의 의료영리화 정책에 대해 진보적인 보건의료단체뿐 아니 라, 대한의사협회 등 의료인들조차 강력히 반발하고 있으며 의사 총파업까지 거론되는 상 황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영역이다 보니 최근의 의료영리화 정책에 관한 올바른 이해와 진 보적인 대응 방안 등은 충분히 다뤄지지 않고 있다. 이에 최근 상황에 대한 이해 및 진보적 대응 방안에 관해 간략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의료법인의 영리자회사 허용 왜‘의료민영화’ 가 아니라‘의료영리화’ 인지부터 알아보자. 지금도 한국의 의료는 이미 민영화되어 있다. 현재 한국의 공공의료 비중은 병상 수 기준으로 10.4%로서 OECD 국가 중 압도적인 꼴찌다. 공공의료가 대부분인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민영의료의 천국인 미국 에도 한참 못 미친다(OECD 평균은 75.1%이며 미국조차 25.8%다). 그럼에도 국민의 의료비 부담 등은 한국이 미국보다 훨씬 덜하다. 민영의료 비중이 미국보다 훨씬 높음에도 부담은 덜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민영의료기관의 영리화를 억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기 때문 이다. 그 장치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는 전 국민건강보험 및 건강보험당연지정제로서, 모든 국민은 국가가 운영하는 건강보험에 가입하며 모든 의료기관은 건강보험진료기관으로 지정 되어 의무적으로 이들을 진료하고 그 진료비를 국가가 정한 대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책포럼 63


2013년 4월, 공공의료 강화와 진주의료원 폐쇄 반대를 외치며 열린 기자회견(사진 : 노동당 경남도당)

(단, 건강보험에서 지급하지 않는 비급여 항목은 개인이 전액 부담한다). 비급여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적어도

급여 항목에 대해서는 민간의 의료행위를 국가에서 통제할 수 있다. 둘째는 의료기관 개설 자격 제한 및 영리목적 부대사업 금지로서, 의료기관은 의료인 및 정부기관을 제외하면 비영리법인만이 이를 개설할 수 있다. 의료법인은 전부 비영리법인이며 병원의 수익은 그 병원 내에서만 사용해야 하고 투자자에게 배 당하는 등 외부로 이익을 가져갈 수 없다. 또한 의료법인은 병원 운영과 관련된 일부 부대사업만을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한 수익 역시 병원에만 재투자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병원이 의료행위보다 수익사업 위주 로 운영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부대사업 자체가 연구나 의료인 양성, 장례식장, 주차장 등 병원 운영 관 련 사업으로 제한되어 있거니와 그 이익을 개인이 가져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 12월 13일 발표된‘4차 투자 활성화 대책’ 에 따르면, 정부는 의료산업에의 투자를 활성화 한다는 명목으로 위의 장치 중 두 번째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려 하고 있다. 의료법인이 영리 목적의 자회 사를 설립하는 것을 허용하고, 부대사업의 범위도 대폭 확대하려 한다. 의료기기 및 의료용구 개발·판 매·임대업 등은 물론이고 건강식품·건강보조식품·화장품의 개발·판매·임대나 목욕탕, 헬스클럽, 호텔까지 포함됐다. 그리고 이 모든 부대사업을 영리자회사가 시행하면서 거기서 얻은 수익을 투자자들 이 개인적으로 가져갈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어떻게 될지는 뻔하다. 투자자들이 이익을 가져갈 수 있도록 모병원은 본래의 진료행 위만이 아니라 각종 부대사업 관련 행위까지 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건강식품·화장품 등을 취급하는 64


영리자회사가 생길 경우, 모병원의 의사들은 자회사의 수익을 위해 진료행위 외에 건강식품·화장품 등을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면서 권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권해도 안 사면 그만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각종 검사와 진찰 등을 한 후, 당신에겐 이런 문제가 있으므로 이에 맞게 이 런 건강식품이나 화장품을 쓰는 게 좋다고 의 사가 권하면 환자로서는 거부하기가 어렵다 (이를 전문용어로‘정보의 비대칭’ 이라고 한다. 의 료 분야는 그 특성상 환자가 전문적인 정보를 알

의료분야는 그 특성상 환자가 전문적인 정보 를 알기 어려워 정보를 가진 의료인이불필요 한 수요를 만들어낼 수 있기에,

일반적인

시장원리를 적용하기 어렵다.

기 어려워서 정보를 가진 의료인이 불필요한 수요 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서 의료 분야는 수요공급의 법칙 등의 일반적인 시장원리가 적용되기 어려우며, 자본주의 체제 하라도 의료 분야를 완전히 시장에 맡기는 나라는 없다). 이는 곧 의료관련 부대비용, 즉 넓은 의미의 의

료비 부담을 대폭 상승시킨다. 물론 이번 조치가 시행된다고 해서, 인터넷에 일부 떠도는 것처럼 당장 의료비가 수백만 원씩 상승하 고 미국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의료의 전면 영리화를 막는 두 가지 장치 중 첫 번째인 건강보험 당연지정 제는 유지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그래서 이번 조치가 별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당장 미국 처럼 되는 것은 아니지만, 위에서 말한 이유로 의료비 부담은 대폭 증가할 것이며 이는 결국 건강보험의 유지를 위험하게 할 것이다. 지금도 비급여 등으로 인해 국민의 의료비 부담은 매우 높다. 그런데 부담이 지금보다 더 높아질 경우 건강보험의 보장성은 지금보다 훨씬 악화될 것이며 이는 결국 건강보험의 신뢰 상실로 이어져 제도의 유지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영리법인약국 허용과 원격진료 허용 정부의‘4차 투자 활성화 대책’ 에는 이외에도 중요한 내용이 하나 더 포함되어 있다. 영리 목적의 법인 약국을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비영리법인으로 개설할 수 있는 병원과는 달리 약국은 그간 약사 개인만이 개설할 수 있었던 바, 이 규정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음으로써 이의 개정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런데 정부는 헌법불합치 해소를 명분으로 법인약국을 허용하면서 영리법인이 약국을 개설 할 수 있도록 하려 한다. 이 또한 의료법인의 영리자회사 허용과 똑같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영리 목적의 약국이 허용되면 의약품 과소비와 오남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약국에서는 의사의 처방 전이 필요한 전문의약품만이 아니라 일반의약품이나 각종 건강기능식품 등도 팔고 있기에, 영리약국에 고용된 약사들은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 이를 과도하게 권할 수밖에 없게 된다. 특히, 위에서 말한 영리자 회사 허용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영리자회사가 약국을 개설하게 되면 (정부는 이를 막겠다지만 일단 영리법인약국이 허용되면 편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건강식품이나 화장품 등을 병원에서 권

정책포럼 65


결국 병원이든 약국이든 모두가 영리 목적의 투자자, 즉 자본에 종속되어 국민건강보다는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게 될 것이다.

하고 그 병원과 연결된 약국에서 이를 판매하는 상황이 된다. 결국 병원이든 약국이든 모두가 영리 목적의 투자자, 즉 자본에 종속되어 국민건강보다는 자 본의 이익에 봉사하게 될 것이다. 정 헌

법불합치를 해소하겠다면 지금의 병원처럼 비영리법인 형식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데, 정부가 굳이 영리 법인약국을 허용하겠다는 것은 결국 의료영리화 정책의 일환일 따름이다. 한편,‘4차 투자 활성화 대책’이전에 발표되었지만, 의료를 자본의 이익에 종속시키기 위한 중요한 조 치가 또 하나 있다. 현행 의료법을 개정하여 원격진료를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현재는 의료인 간의 원격 의료만 허용될 뿐 의료인이 환자를 원격으로 진료해서 처방전을 발급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를 허용하겠다는 것이 정부 방침이고, 그 명분은 병원이 없는 곳 등에서 환자가 시간을 들여 병원에 찾 아가는 불편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국민 편의를 생각한 정책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내 용을 잘 모르는 국민들 중에는 찬성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어차피 병원에 가도 5분 진료하고 끝나는데 집 에서 편하게 큰 병원의 진료를 받을 수 있으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제대로 된 원격의료장비는 아주 비싸므로 개인이 이용하기 어렵다. 결국

올해 1월 말, 100여 개의 노동, 시민사회, 보건의료 단체들이 모여‘의료민영화(영리화) 저지와 의료공공성 강화를 위한 범국민운 동본부(준)’ 을 출범한다고 밝혔다.(사진 : 참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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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루어지는 원격진료는 영상통화 내지 컴퓨터 채팅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진찰은 단순히 영상통화나 컴퓨터 채팅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이는 필연적으로 오진의 위험성을 높인다. 초진일 경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재진일 경우에도 환자를 직접 보지 않고 환자의 말만으로 처방전을 발급하는 것은 생각보다 위험하다. 원격진료가 실제로는 거의 효과가 없으며 오진의 위험성을 높인다는 연구결과가 숱하게 많다. 게다가 환자가 실제로 편해지지도 않는다. 원격진료를 통해 처방전을 발급받더 라도 약을 사기 위해선 집을 나와서 약국을 찾아가야 한다. 또한 원격진료가 허용되면 대형병원의 원격진료에 환자들이 몰림으로써 지금의 5분 진료조차도 5초 진료가 될 위험성이 크다. 14년 전에 원격진료를 테스트해 본 적이 있는데, 그 당시 단 5명의 의사가 이틀 동안 13만 명을 진료하고 7만 8천 명에게 처방전을 발급한 사례가 있다. 진료를 했다기보다 그냥 기존 처 방전을 그대로 재발급했을 뿐이다. 결국 원격진료는 대형병원 및 이에 관련 장비를 팔아먹을 수 있는 삼 성 등 대기업의 이익만을 보장할 뿐이다.

저수가 구조 개선은 공공의료 강화로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이렇게 처방전을 그대로 재발급할 거라면 처음부터 투약일수를 길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병원에 자주 가지 않아도 되고 이에 따라 환자 수가 줄면 5분 진료도 개 선된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현재의 의료수가 구조 때문이다. 현재의 의료수가는 의 사의 전문기술료나 충분한 상담시간에 따른 가산이 거의 인정되지 않고 병원 방문 횟수가 많아야 수익이 나는 저수가 구조라서 가능하면 병원에 자주 오게 만들어야 한다. 의료수가가 과연 저수가인가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현 수가가 저수가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수익을 내기 위해 각종 과잉진료(위에서 말한 것처럼 병원에 자주 오게 하는 것도 일종의 과잉진료이다. 그 외에도 각종 불필요한 검사 등 과잉진료가 흔하다) 및 비급여가 판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의사협회에서는 이

번을 기회로 의료영리화 저지만이 아니라 의료수가 개선도 공론화시키고자 하고 있다. 사실 의사들이 이 번 조치를 반대하는 것은 의료영리화 저지라는 명분도 있지만, 자본과 대형 병원만 좋아질 뿐 동네 병원 은 심각하게 어려워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크게 작용한다. 이 자체를 무조건 나쁘게 볼 것은 아니다. 어쨌든 자본에 대항하여 의 료영리화를 저지한다는 측면에선 이

동네 병원이 어려운 근본 이유는 대부분이 민간

해관계가 같거니와 이미 말했듯이

의료기관이기 때문이다. 초기비용을 전부 민간,

의료수가가 저수가인 것도 사실이기

즉 의사 개인이 감당하면서 과잉진료나 비급여가

때문이다. 문제는 진정으로 저수가

견디기 어렵게 된 것이다.

를 극복할 방안에 대해선 제대로 이 정책포럼 67


야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네 병원이 어려워진 근본 이유는 의료기관이 대부분 민간의료기관이기 때문이다. 병원 개설에는 막 대한 초기비용이 든다. 병원 간 경쟁으로 인해 의료장비나 시설투자비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이런 초기 비용을 전부 민간, 즉 의사 개인이 감당하면서 이에 따른 각종 금융비용이나 감가상각비용 등을 민간이 전부 떠안음에 따라 현재의 수가로는 과잉진료나 비급여가 없이는 견디기 어렵게 된 것이다. 초기투자를 공공이 감당한다면 현재의 수가구조로도 저수가가 아니다. 당장 모든 초기 투자를 공공이 감당할 수는 없 겠지만, 투자의 일정 부분을 공공이 감당하면서 그에 따른 지분을 늘려나가는 방식 등 가능한 방안은 얼 마든지 있다. 재원 또한 확보 가능하다. 작년만 해도 건강보험의 흑자가 11조 원에 이르며, 전체 예산 중 공공의료 관련 예산도 외국에 비하면 매우 미흡하다.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공공의료 비중을 지 금보다 대폭 확대할 수 있으며 이것이 현 상황에 대한 진보적 대응방안의 핵심이다. 의료는 결코 영리추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 아프다는 것이 다른 누군가의 이익을 챙기 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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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본 농업 이야기

쌀값이 커피보다 싸다고? 연승우 농업 전문 기자, 서울 구로당협 부위원장

생산량도 줄고 재배면적도 줄고 대한민국 국민 1인당 연간 평균 68kg의 쌀을 소비한다. 30년 전 1983년 156kg에 비하면 반으로 줄었 다. 쌀 소비는 밀가루와 육식 위주의 식생활 변화와 다이어트 등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쌀 은 농촌지역이 도시지역에 비해 1.5배 정도 소비량이 많고 소득이 많을수록 소비량이 적다. 쌀소비가 아 무리 감소한다 하여도 한국에서의 주식은 밥이고 이것은 영원히 지속된다. 한국인의 주곡인 쌀은 소비가 감소함에 따라 생산량도 줄고 있다. 쌀 생산량의 감소는 소비감소도 원 인이지만 소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서 쌀과 밭농사를 짓는 겸업농가가 지속적으로 줄어 들고 있지만 대다수의 농가가 쌀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통계청이 2011년에 발표한〈농업통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에 의하면 경지면적은 2009년 경지 면적은 1,737천ha로 1980년 이후 감소추세이나, 농가 가구당 경지면적은 농가인구 감소로 점점 늘어나 1985년 1.11ha에서 2009년 1.45ha로 계속 증가세에 있다. 재배면적 및 생산량은 식량작물 중 벼의 재배면적은 2009년 92만 4천ha로 1971년(119만ha)에 비해 22.3% 감소했으나, 품종개량과 농업기계화 덕분에 쌀 생산량은 2009년 491만 6천t으로 1971년(399만 8천t)에 비해 23% 증가했다. 농가 소득 역시 도시 근로자에 비하면 매우 낮다. 이런 현실은 농업인구의

감소와 함께 쌀 자급률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밀 가격 다섯 배 오를 때 쌀값은 고작 두 배 인상 이런 현실 속에서 쌀값은 지난 24년 동안 2.5배 상승하였고, 이는 대체상품인 밀가루(5.2배), 라면(2.7 왼쪽에서 본 농업이야기 69


배), 국수(5.2배) 등의 상승폭보다 훨씬 낮다. 특히 유의미한 것은 자급률이 높은 쌀은 가격이 유지됐으나,

자급률이 낮은 밀은 쌀보다 2배 이상 가격이 상승했다는 사실이다. 밀의 국내 자급률이 1%인 상황에서 국 제가격 폭등이 국내가격 상승으로 곧장 이어

한국인의 주곡인 쌀은 소비가 감소함에 따라 생산량도 줄고 있다. 이런 현실 속 에서 쌀값은 다른 대체상품에 비해 훨씬 낮은 상승폭을 보인다.

진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참고로 농산물 물가를 살펴보면 2005년 농산물 소비자 물가지수를 100으로 했을 때 2009년 농산물 소비자 물가지수는 103.1로, 1999년(78.7) 에 비해 31.0% 상승했다. 그러 나 같은 기간 동안 소비자 물가는 총지수(’ 99

년 83.0, ’ 09년 112.8)가 35.9% 상승해 소비자 물가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쌀농사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 즉 정책은 별게 없다. 소득을 보전해주면 된다. 한국에서 거의 유일한 직접지불인 쌀소득보전제도는 크게 변동직불과 고정직불금이 있다. 2008년 한국사회를 뜨 겁게 만들었던 바로 쌀직불금이다. 고위공직자들이 농지법을 어겨가며 농지를 매입하고 생산자인 농가가 받을 직불금을 농가 대신 받으면서 문제가 커졌다. 문제는 직불금이 많아서가 아니라 양도세를 내지 않기 위해 직불금을 받았기 때문에 도덕적 해이는 더 큰 것이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쌀 개방과 함께 추곡수매제를 폐지시킨다. 대신에 공공비축제를 도입하고 쌀 변동직불금제도를 신설했다. 변동직불금은 국가에서 적정한 쌀 목표가격을 정해놓고 시장에서 쌀가격 이 목표가격 이하로 떨어지면 이를 보전해주는 제도이다.

쌀 목표 가격 kg당 174원 올려 지난 12월말 쌀 목표가격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농민들이 원했던 목표가격은 1kg에 2,875원이었지만

주요 농산물 소비자물가지수(왼쪽), 주요 농산물 소비자물가지수 추이(오른쪽) (자료: 통계청, <소비자물가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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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서는 2,350원으로 통과됐다. 현재 목표가격은 2,126원이다. 정부는 8년간 동결된 쌀 목표가격을 174원 올려준 것이다. 이 수치가 낯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언론보도에는 18만 8,000원으로 돼 있기 때 문이다. 18만 8,000원은 80kg(쌀 한가마니) 기준이다. 이것을 1kg로 환산하면 그리 큰돈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산지 쌀값이 80kg에 18만 원이면 목표가격 18만 8,000원에서 18만 원을 뺀 8,000원의 85% 인 6,800원을 국가에서 보존해주는 것이다. 문제는 변동직불금 계산이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고정직불금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변동직불금 산정식은 [(목표가격-산지쌀값)×0.85-고정직 불금 지급액]이다.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진 이유는 고정직불금도 소득으로 보기 때문이다. 문제는 쌀 목표가격이 18만 8,000원으로 인상되었음에도 2014년에도 변동직불금 지급 요건이 발동되 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박원석 의원의 분석에 따르면 만일 수확기 산지평균쌀값이 17만 6,062 원 이상으로 책정되면 변동직불금은 단 한푼도 지급되지 않는다. 수확기 산지평균쌀값이 17만 6,062원이면 목표가격 18만 8,000원과의 차액은 1만 4,395원이고, 차액 의 85%에 해당하는 보전금액은 1만 2,968원이 된다. 그런데 변동직불금 지급액은 먼저 고정직불금의 가 마당 단가(80만원/ha 당, 63가마/80kg 기준)를 차감한 잔액을 지급하므로, 결국 변동직불금은 한 푼도 지급되지 않는 것이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이번 수확기 산지쌀값(2013년10월~2014년1월) 은 17만 3,000원~17만 4,000원 선 에서 책정할 것으로 예상돼 지난 2012년, 2013년과 마찬가지로 그나마 편성된 변동직불금 예산은 단 한 푼도 지급되지 않고 전액 불용 처리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정부의 쌀 목표가격 18만 8,000원은 변동직불 금을 주지 않을 속셈을 감춘 액수다. 그러면서 WTO 규정 때문에 농업보조금을 늘릴 수 없다는 변명만 하 고 있다.

2020년이면 식량 자급률 위기 온다 현재의 쌀 생산량과 재배면적 감소 추세로 간다면 2020년에는 쌀 자급률은 50%를 넘기기 힘들게 된 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농업전망 2010’보고서에 따르면 현재의 농지 감소세가 계속되면 2020년에 는 농지 규모가 158만8000㏊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008년 국내 농지 면적(176만㏊)에 비해 17만 2000㏊가 줄어드는 것이다. 농촌경제연구원은 2008년 보고서에 서 2020년 농지보전 목표치로 156만

이 추세로 간다면 2020년에는 쌀 자급률은

~165만㏊를 제시했다. 현재의 국제 곡물

50%를 넘기기 힘들게 된다. 새만금, 영산강

가격과 국제 농업통상 여건이 유지될 경

등 대규모 간척지 개발로 농지가 줄어들지

우 156만㏊, 목표 식량자급률을 현재의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허수에 불과하다.

27%에서 30%로 상향 조정하면 165만㏊ 왼쪽에서 본 농업이야기 71


가 더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농식품부는 새만금, 영산강 등 대규모 간척지 개발로 농지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허수에 불과하다. 새만금과 영산강 일대에 개발되는 간척지는 논농사가 아닌 대규모 시설원 예단지와 사료용 작물단지이기에 쌀과는 상관이 없다. 물론 사료용 작물 재배단지는 식량 자급률을 높일 수는 있지만 쌀 자급률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2012년 쌀 자급률은 80%대로 떨어졌고 식량자급률도 23%로 낮아졌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자급기반을 가지고 있는 쌀은 국제시세에 영향을 받지 않아 가격 상승이 더디지만 밀과 옥수수는 국제시세에 따라 계속 상승하고 있다.

식량자급률의 핵심은 사람과 농지다 식량자급률을 높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과 농지이다. 농사는 아무리 기계화가 된다 하더라 도 사람이 직접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농지가 없다면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 재배기술을 갖고 있더 라도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지금처럼 도로를 뚫고 골프장을 짓고 신도시를 짓는다면 좁아터진 한반도에서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없다는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65세 이상이 50%를 상회하는 농촌의 고령화를 생각한다면 한국 농업의 미래는 어 둡다. 지금과 같은 도시개발을 막고 농촌고령화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는 한 한국의 식량은 중국에 의 존해야 할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

선진국은 농업을 보전하기 위한 보조를

서 쌀 직불금을 축소하는 정부의 행태는 농사

아끼지 않는데 한국은 경쟁력이 없다는

를 포기하게 만들거나 벼농사를 환금작물 농

이유로 매년 보조금이 줄고 있다. 농업 보 조금은 한국 농업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정책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로 전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OECD 국가들 중에 농업보조금이 가장 적 은 나라가 한국이다.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 에서의 농업정책은 보조금 정책이라 할 정도 로 농업을 보전하기 위한 보조를 아끼지 않지

만 한국은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로 매년 보조금이 줄고 있다. 농업보조금이 단순히 농민에게만 돌아가는 혜택이 아니라 미래세대를 위한 한국 농업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정책임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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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현장에서

왼쪽에서 본 농업이야기 73


지역에서 현장에서

대전 원자력연구원 노동당 입당 줄이어 비정규직 노동자들, 직접고용 쟁취하다 김윤기 대전시당 위원장

오늘부터 원자력연구원 노동자! 지난 1월 10일,‘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원자력비정규직지회(이하 원자력비지회)’ 와원 자력연구원(이하 연구원), 그리고 대전지방고용노동청이 노사정 합의문에 조인했다.‘한국원 자력연구원 직접고용 합의서’ 인데, 이에 따르면 원자력비지회와 연구원은‘대전노동청의 불법파견 시정명령 이행과 관련해 파견법의 취지에 따라 대상 노동자인 조합원 28명을 직 접 고용’ 하기로 한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으로‘조합원 28명 중 고용의제자(옛 파견법) 9명 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 고용의무자(현 파견법) 19명은 유기계약직으로 전환’ 하고,‘유기계 약직 대상자 19명에 대해서는 1년 단위로 최고 2년까지 고용계약 후, 평가를 거쳐 무기계약 직으로 전환한다’ 는 내용이다. 물론, 애초 요구였던‘정규직 쟁취’ 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년여 간의 짧지 않은 투쟁과 두 차례의 집단해고 사태에도 불구하고 27명의 조합원이 복직하여 현장에서 새로운 투쟁을 준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는 점, 그리고 연구원 내 800여 명으로 추정되는 비 정규직 노동자 중 불과 28명만으로 조직된 노조가 직접고용을 쟁취해 낸 것은 의미있는 성 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부서에서 더 험한 일 하는데‘파견’노동자? 원자력비지회는 2012년 8월24일 설립되었다. 조합원들은 연구원 내에서 NTD반도체 생산과 하나로 원자로의 안전에 밀접한 계통 관리, 핵연료 생산, 방사능계측기 검·교정 등 74


주요 업무를 담당해 왔다. 예를 들면, 지난 2011년 2월 20일 발생한‘하나로원자로 백색비상사태 발령’ 당시 원자로 내에 남아있던 노동자들은 모두 비정규직이었다고 한다. 길게는 연구원에서 15년 동안이나 일하며, 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부서에서 일하고 심지어 더욱 위험한 현장을 지켜왔지만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심각한 차별을 받아왔던 것이다. 노조 설립이 가시화되자 연구원 간부들은‘노조 설립은 계약해지 사유가 된다’ 며 협박했고, 연구원은 대응TFT 를 만들고, 대형로펌을 선임했다. 심지어 체육 행사나 회식 자리에도 조합원들을 제외하는 등 노조 활동을 노골적으로 탄압했다. 2012년 9월 4일, 한신엔지니어링 소속 강 인범 조합원에게 해고 예고 통보가 날아들었 다. 사규를 위반하고 시정 요구에 따르지 않았 다는 것은 핑계고, 노동조합 활동을 중단하라 는 것이다. 강 조합원은 2013년 1월 31일, 계 약 만료를 이유로 같은 부서에서 일하던 조합 원과 함께 두 번째 해고를 당하게 된다. 두 달 뒤에는 새빛연료과학동에서 일하는 코라솔 소 속 열한 명도 계약이 만료되었다며 출입을 통 제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2013년 7월 26일, 투쟁의 전환점이 마련된다. 대전노동청은‘연 구원이 하청 노동자를 직접 지휘·명령한 것이 인정된다며 8월 23일까지 73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직접 고용’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연구원은 이를 이행하지 않았고, 심지어 2013 년 10월 28일에는 나머지 15명의 조합원을 똑 같은 방식으로 해고했다. 이날 75일간의 노숙 농성에 들어가게 된다. 천막 하나 제대로 펼 수 없는 상황에서 주차장에 있는 바리게이트 를 기둥삼고, 하늘이 훤히 보이는 비닐을 지붕 삼아 농성장을 만들었다. 이미 250일 넘는 천 막농성을 진행해오던 차에 불과 1km 거리를 두고 두 개의 농성장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캠페인 중인 김윤기 위원장과 대전시당 (사진 : 대전시당)

지역에서 현장에서 75


대전시당과 원자력비지회“비정규직 NO~ NO~”공동 캠페인 몇 해 전부터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비정규직 연구원 증가가 지역의 문제로 부쩍 거론되어 오고 있었 다. 그동안 대전지역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이 청소, 시설관리 등 기관의 관리 업무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이 나선 것이었는데, 원자력비지회의 경우는 달랐다. 정규직과 같은 부서에서 연구원의 주요 업무를 담당하 던 노동자들이 나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전시당은 원자력비지회 투쟁이 갖는 상징성에 주목했으며, 이후 정부출연 연구기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라 판단했다. 대전시당은 원자력비지회에‘비정규직 NO~ NO~ 공동 캠페인’ 을 제안했다. 연구기관과 연구원 주거 밀집지역인 유성지역에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해보자는 취지였다. 우선은 충남대와 대형마트 등 번화한 지 역을 돌았다. 그러다, 당시 정연호 연구원장이 거주하던 동네로 집중했다. 캠페인은 약 석 달 동안 주 2회 가량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당직자들과 조합원의 적극적인 참여 속에서 진행되었지만, 이럴 때 원외정 당으로서 한계가 아프기도 하다. 당의 활동을 매개로 이 사안을 언론에 등장시키도 하였지만, 당이 노동자 들의 투쟁에 보편성을 확인하고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해야 하는 본연의 역할이 부족하였음을 실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캠페인 초기 당내에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당시‘고용안정이 원자력 안전’ 이라는 슬로건을 쓰기도 했는데, 마치‘고용안정이 원자력 안전’ 을 담보한다는 주장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또한,‘탈핵’ 당론에도 배치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올 수 있는 문제제기였으나, 충분한 토론과 결론을 얻지는 못 했다. 다만,‘빠른 시간 내에 탈핵사회로 가야 한다’ 는 것과‘상시적이고 지속적인 업무에 종사하는 비정 규직 노동자는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는 두 가지 원칙을 확인한다는 수준에서 일단락되었다.

‘밥’ 은 최고의 연대다 또 다른 연대는‘밥’ 이었다. 첫 자리는‘희망식당’ 이 마련해 주었다. 원자력비지회가 24차 희망식당 (2013. 4. 7)의 점주를 맡았는데, 운영자로서 특별한 기억을 남겨 주었다. 자신들이 해고를 당한 투쟁의

당사자임에도 희망식당을 통해 또 다른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고마움을 직접 표현하고 싶어 했다. 누가 뭐래도 이 투쟁 연대의 절정에는‘밥 이모’이점진 공동위원장이 있었다. 노숙농성 74일 동안 거 의 매일 농성장에 출근해서 조합원들의 식사를 담당했다. 처음에는 2~3일에 한 번씩 국이나 끓여주겠다 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집에 들어가도 한데 잠자는 조합원들이 자꾸 생각나 매일 매일 들리게 되 었단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위원장은 조합원들에게 진짜 누나, 이모가 되었다. 어느덧 조합원들과 고민을 나누고, 함께 울어주고 안아주는 29번째 조합원이 되어 있었다. 이 위원장이‘밥 이모’ 가 된 사연에는 이광오 공공연구노조 사무처장이 있었다. 사실 이 투쟁의 승리에 는 공공연구노조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는데, 28명 장정들의 식비가 걱정되었던 이 처장의 부탁으로 시작 76


농성장에서 식사 중인 조합원들(왼쪽). 조합원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이점진 공동위원장(오른쪽)(사진 : 대전시당)

된 것이었다. 공공연구노조가 원자력비지회를 자기 조직으로 삼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러한 아쉬움을 채 울 만큼 강력한 연대와 지원을 해 나가기도 했다.

조합원 절반이 노동당 당원으로 이 투쟁에 연대한 것이 어찌 당직자들뿐이었겠는가? 말 나온 김에 당원들 자랑도 하고, 고마운 마음도 전해야겠다. 지난 해 12월31일 민주노총 활동가인 당원이 페이스북에‘농성장 번개’ 를 띄웠다. 명절에라도 가족과 지내라며 조합원들을 모두 집으로 보내자는 것이다. 덕분에 농성장은 우리 차지가 되었고, 당원들 몇몇은 새해를 농성장에서 맞이하기도 했다. 이런 마음으로 농성장의 소소한 일상을 챙겨왔으니 지켜보는 조합원들의 마음도 따뜻했을 것이다. 몇 해전부터 투쟁사업장에 식수를 지원해왔던 물장수 당원은 이번에 도 나서 주었다. 긴 시간 적지 않은 양이어서, 미안하기까지 했다.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당원은‘노동법 을 함께 공부하는 활동가들’ 과 함께 농성 물품을 지원했다. 뇌출혈로 수술을 받았던 당원은 당원들이 모금 해 준 병원비를 투쟁기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슈퍼를 운영하는 당원은 라면과 술 등을 내놓았다. 1년 여의 투쟁을 지켜보며 당원들 모두가 때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때로는 절박한 마음으로 함께 했다. 이제 27명의 간접 고용 노동자들이 연구원에 직접 고용되어 현장으로 돌아갔다. 그중에 절반은 우리 당의 당원이 되었다. 무엇보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의 꿈이, 마음이 통한 덕분 일 것이다. 이제 원자력비지회는 임금 및 단체협상을 준비하고 있다. 합의문에 조인한 날로부터 연구원 안에서의 새로운 투쟁은 시작되었고, 해고와 농성으로 단련된 노동자들은 또 다른 투쟁을 담담히 시작하 고 있다. 지역에서 현장에서 77


지역에서 현장에서

“노동당이 왜 필요한지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영등포 조합원들을 만나다 정경진 서울 영등포 당원협의회 위원장

삼성전자 서비스 노동자들은 노조를 출범시키고 채 반년이 지나기도 전에‘열사’ 의 죽음 앞에 서 오열해야 했다. 영등포 서비스센터에서는 대낮에 조합원이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노동당 서 울 영등포 당협은 작년부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영등포분회 조합원들과 꾸준히 연대 투쟁을 지 속하고 있다. 정경진 영등포 당협 위원장이 조합원들을 만나 그간의 투쟁 경과를 들었다.

Q. <미래에서 온 편지> 2013년 10월호에서 위영일 지회장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삼성전 자서비스센터 노동자 절반 이상을 조직화했고 한 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 전부가 조합 원인 곳도 많다고 들었다. 대다수가 노동운동 경험이 없을 텐데 어떤 경로나 과정을 통 해서 지회에 결합하게 됐을까?

김선영 분회장(이하 김) : 처음에는 지회 결성에 대해 거리감을 느꼈다. 선배들이 창립총회

를 한다고 했을 때 노조에 가입한다기보다는 동의의 뜻으로 참석만 했다. 가입은 나중에 한 달 뒤에 했다. 그런데 부당한 처우를 계속 받다 보니 기사들이 힘이 있지 않으면 우리가 일 한 데 대한 정당한 보수를 주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들 가입하게 된 것 같다. 많을 때는 영등포센터 조합원이 60명까지 늘었지만 지금은 노조탄압이 계속되면서 조합원 이 많이 줄었다. 안형준 교선·쟁의부장(이하 안) : 총회에 참석해야 하는지 결정이 늦게 됐다. 다들 주저했

었고 총회 전날에야 김선영 셀장 외 세 분이 몇몇 셀과 미팅해서 결의했다.1) 그러니 가입신 1) 셀, 셀장, 셀원 : 셀(Cell)은 수리기사를 10~15명씩 팀을 이뤄 담당지역을 두는 단위로, 셀장을 일반적인 팀장, 셀원을 팀원이라고 보면 된다. 셀장은 20만 원의 수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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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서와 무관하게 창립 멤버라고 봐야하지 않겠는가? 다들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생소해서 거부감이 많았 다.

Q. 노동조합에 대한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안 : 센터장들이 센터 관리를 일방적으로 하고, 업무적 문제점이 많다. 영등포센터장은 소위‘덕’ 이없

다. 우리가 믿고 따를 리더 자격을 상실했다. 2년 전에 급여가 갑자기 삭감됐고, 이에 설명회를 요구했는 데, 전혀 설명을 못하고 양천센터 사장에게 설명을 요청하는 것이다. 사장이 본사 매뉴얼만 따르는‘바지 사장’ 임을 보여준 것이다. 양병주 조직부장(이하 양) : 갑자기 많게는 80~100만 원, 적게는 30~50만 원의 월급차가 생겼는데 이걸

어떻게 그냥 받아들이겠는가? 그러다‘밴드’ 를 알게 되었다. 사실‘밴드’ 는 처음에 센터장이 알려준 것이 다. 어느 날 조회에서 밴드 가입 여부를 물어보며‘가입하면 짜른다’ 고 협박한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밴드가 뭐야? 대일밴드 같은 건가?”그랬다. 다들 겁을 내는 분위기였는데 밴드를 통해 함께 할 동지들 을 많이 알게 됐고, 노조를 공개할 필요성을 느꼈다.

Q. 말도 안되는 임금체계에 위장도급까지, 너무나 뻔뻔스럽게 불법 노동탄압이 이뤄지고 있는 현장이기 도 하다. 일상적인 업무 과정에서 겪는 불합리한 구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김 : 분당 수수료란 대기시간, 이동하는 시

간은 빼고 오직 고객을 만나는 시간만 계산하 는 것이다. 또한 1년을 일하건 20년 일하건 수 수료가 같다는 점도 문제다. 숙련도가 중요한 서비스 수리에서 연차에 상관없이 신참이나 고 참 모두 같은 임금을 받는 게 말이 되나? 이것 도 2년 전 본사 입금제로 바뀌면서 건당 수수 료 체계가 무너졌다. 전에는 협력사 입금제로 우리는 관리비를 내고, 본사에 일부 입금하고,

김선영 분회장

남은 금액을 7:3 혹은 8:2로 기사와 센터가 나 눠 가졌다. 그런데 본사 입금제로 바뀌면서 수입이 전부 본사로 가고, 거기서 센터가 돈을 받아서 기사에 게 다시 주는 형태가 된 것이다. 처음에 사장은“너네 위해 바꾸는 거다, 적립도 되고 복지 등 혜택이 더 좋아질 거다” 라고 했다. 그러나 센터가 본사에서 받는 금액을 어떻게 나누는지 모르게 되었고 어떤 항목 으로 주는 지도 모르게 되어, 이번 달에 급여가 얼마가 나오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지역에서 현장에서 79


문승주 법규부장(이하 문) : 원청(삼성 본사) 말이라면 법인 줄 알았다. 그게 부당한지도 모르고 당연한 줄

알았다. 몇 달 전에만 해도 불합리하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갑의 요구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센터 는 원청 말을 자기 말처럼 인용하고 원청의 감독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원청은 센터를 중간에 끼고 직 접 관여 안 하고 발�할 대상으로 센터를 두는 전략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산업안전법, 근로기준 법, 부당노동행위 이런 것도 예전엔 몰랐다.

Q. 전자제품부터 인터넷 케이블까지, A/S 방문을 하고 나면 본사로부터 서비스 평가 전화를 곧잘 받곤 한다. 그 전화를 받는 소비자 입장에서도 굉장히 불쾌할 때가 많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아무리 불쾌 하더라도 노동자들의 불쾌감에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서비스 평가가 심리적으로, 그리고 실 질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문 : 불쾌감에 앞서 왜 평가 전화를 하는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실제 의미가 뭔지를 알아야 한다. 평가

전화 결과를 바탕으로 NCSI평가(국가고객만족도)를 결정하고 이것으로 국내 서비스 순위를 매긴다. 삼성 은 10년 연속 1등을 했는데, 사실 이건 엔지니어의 피와 땀으로 얻은 결과다. 김 : 사장은 직원이 죽든 말든 실적만 중요하다고 압박한다. 보상은 전혀 없다. 그러다 보니 최종범 열

사 사례처럼,“불만 고객이 있으면 칼로 찔러버리라” 는 말까지 사장이 하는 것이다. 점수가 나쁘면 지급율 (건당수수료율)이 떨어지는데 이게 30~100만원 정도지만, 점수가 좋아도 보상은 잘해야 일인 당 10만 원에

불과하다. 근데 사실 이것은 엔지니어가 만들어준 이익금에서 떼어주는 것 아닌가? 박성후 조직부장(이하 박) : 텔레마케터 같은 감정노동자들은 전화 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와 모멸감을

느끼겠지만, 기사들은 고객을 만나면서‘눈앞에서’직접 체험한다. 칼을 들이대거나 맥주 캔을 던지는 경 우도 있었다. 그런데 고객의 일방적 평가만으로 월급이 확 깎이니, 고객평가가 착취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 아닌가? 문 : 우리는 한철 장사라고 보면 된다. 여름 성수기에 벌어야 겨울에 따듯하다. 그러다 보니 성수기에

는 많게는 서른 집을 다니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다 보면 잘 응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2006~7년에 는 CMI(고객만족도 평가지표) 연동으로 월급이 1000만 원에서 400만 원으로 깎인 경우도 있었다. 언론은 우리 월급이 5백만 원이 넘는다고 보도하던데, 우리는 장비 때문에 차량이 필수다. 그런데 차량비며 장비 비용까지 우리가 다 부담한다. 성수기에 300~400만 원, 비수기는 100~200만 원이다. 양 : 당시에는 월급이 왜 그렇게 갑자기 줄어들었는지도 몰랐다. 성수기에는 여의도 회사나 술집 등 저

녁 12시에서 새벽 2시까지도 일하는데, 미결(해결하지 못한 접수)이 문제지 CMI는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그 런데 갑자기 2006년 여름에 연동제를 한다고 통보했고 하루아침에 월급이 확 준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이를 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월급 안 받겠다고 싸우다 결국 월급 받고 그만뒀다. 당시 싸우지 못하고 그 냥 나간 사람들이 많다. 삼성서비스는 이직률이 높아서 열 명 중에 한 명 정도 살아 남는다. 80


Q. 영등포 센터에서는 작년 9월‘백색테러’같은 조합원 폭행 사태도 벌어졌다. 폭행 사태는 보복성 인 사와 집회참가 방해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문 : 그 일은 셀장 강등과 지역 변경이 시작이었다. 전에는 적응 못한 신입 외에는 지역변경이나 인사

이동은 거의 없었다. 노조가 생긴 후 지역 변경이 되어, 비조합원은 사원에서 부장, 과장되었고, 수십 년 된 셀장-현재 서울부지회장, 분회장, 폭행피해자 등은 강등되었다. 현재 부당노동행위로 고발한 상태이다. 김선영 분회장의 경우는 지역 변경까지 되었다. 현재 영등포센터는 가전분야 조합원은 5지역으로 몰려 있 다. 5지역은 전부 조합원으로만 이뤄져 있고, 핵심 간부들이 몰려있다. 비노조 셀의 경우 물량이 제일 많 은 지역으로 몰렸다. 나 같은 경우는 지역변경 때 사장과 면담했는데 사장이“이유 없어. 거기 가서 일 잘 해봐” 라고 하더라. 이게 노조탄압이 아니면 무엇이겠냐? 박 : 영등포센터에는 노조가입 당시 저를 포함한 3명의 셀장이 있었고, 조합에서 주말근무수당과 회계

장부 공개를 사장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그 후 3명 모두 셀장에서 셀원으로 강등되었고, 당시 가해자가 노 조 탈퇴하라고 조합원 설득하며, 노조하면 일 못한다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제보가 있 는 상황에서 비조합원으로서 조합원들을 잡아야 하는 본보기로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가해자를 징 계했지만, 겨우 2개월 징계에 불과했다. 언제 또 나를 때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난다. 하지만 조합원 들이 적극 함께 싸워줬고, 격려해줬고, 그게 노조탄압이라는 것을 알게끔 해줬기 때문에 오히려 더 열심히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형사고소에서는 벌금형이 나왔고, 현재 민사소송이다. 조합에서도 가해자의 출근 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준비 중이다.

Q. 조합 결성 당시부터 노동당에서 일인시위 등을 해왔는데, 영등포당협의 경우 영등포센터의 조합원 폭행사건 이후 지역단체와 함께 공동행동이라는 이름으로 결합하고 있다. 이후 매주 문화제를 진행 하는 등 투쟁을 계속 해왔다. 시민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안 : 공동행동과 함께 하면서 매주 회의를 하고, 연대하시는 분들이 센터 앞 일인시위와 사장집 앞 일

인시위를 지금까지 하고 있다. 작년 말 최종범 열사투쟁 전에는 매주 금요일 센터 앞에서 문화제를 했고, 노동당 영등포당협에서도 현수막도 걸어주시고, 문화제 사회와 장비도 지원해주시고 많이 와주셔서 정말 고마웠다. 그 과정에서 우왕좌왕하지 않고 이렇게 함께해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에 자신감도 많이 얻 고, 거부하던 징계위원회도 열게 된 것 같다. 또 사장과 삼성에 대한 항의만이 아닌 시민들에게도 알려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문화제와 일인시위를 하면서 시민들과 주변 상인 분들에게도 왜 이렇게 할 수밖 에 없는지 알릴 수 있었다. 이해하고 격려해주시는 분도 점점 많이 생겼다.

Q : 이후 투쟁은 어떻게 진행되나? 지역에서 현장에서 81


안 : 현재 쟁의조정신청 중이다. 통

상 10일이면 쟁의권을 갖고, 현재 사측 의 교섭의지가 없어 설연휴가 지나면 쟁의권을 획득할 것이다. 남부권은 조 직력이 좋아서 파업 등 적극 투쟁하고 있으나 서울권은 조합이 있는 센터가 5 개고, 조합원수가 적은 곳도 있어서 대 체인력 동원 등을 보면서 할 예정이다.

Q. 인터뷰가 길어졌다. 마지막으로 노 동당에 바라는 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김 : 도움 주셔서 감사하다. 사실 전

에는 정당에 대해 적대감이 있었고, 노 동당의 도움에 의문을 품기도 했다. 그 런데 그 동안 많이 사그라들었다. 노동 자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정당이라는 생 각을 갖게 되었다. 박 : 추운 와중에 연대해 줘서 감사

하다. 노조 투쟁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많이 알려 주셨다. 사실 투쟁이라는 게 무서웠는데 노동당과 공동행동 덕분에 많이 배웠다. 안 : 우왕좌왕하는데 모범과 길잡이 최종범 열사투쟁(위), 영등포당협의 일인시위(아래)

가 되어 주었다. 우리 이야기를 많이 들 어 줘서 고맙고 사업장에 대한 불만뿐

만이 아니라 한국사회에 대한 부당함과 비정규직노동자가 많다는 것, 연대의식을 가르쳐주었다. 노동당이 의회에 최대한 진출해서 위상이 높아지고, 민주당 같은 위상의 정당이 되었으면 좋겠다. 양 : 당이라면 새누리, 민주당밖에 몰랐다. 노동당이“노동자를 위한 당” 이라는 건 알았지만 몸소 못 느

끼다 이번에 도움 받으며 느끼게 됐다. 노동당이 이 사회에 왜 필요한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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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토론

장기성장전략, ‘청년 정당’ 을 제안한다 장석준 부대표, 장기성장전략위원장

2013년 노동당은 새 당명과 강령, 당헌을 채택하면서 재창당했다. 그러나 한 가지 미완의 과제가 있다. 당의 장기 성장 전략이다. 2014년 2월, 전국위원회 산하 장기성 장전략위원회(위원장:장석준)에서 1월까지 토론을 진행한 결과를 바탕으로 장기성장 전략 초안을 발표했다. 이 초안은 당원 토론을 거친 뒤 2/4분기 전국위원회에서 심 의, 채택할 예정이다. 《미래에서 온 편지》 는 3월호에서 장석준 위원장의 초안 소개를 싣는 것을 시작으로 4월호에서도‘쟁점토론’지면을 통해 당의 장기성장전략에 대해 당원들의 토론의 장 을 열고자 한다. 관심 있는 모든 당부와 당원들의 관심과 활발한 논의를 기다린다.

작년에 노동당은 두 차례의 대의원대회를 통해 여러 중요한 결정을 했다. 새 당명을 정했고, 강령과 당헌을 새로 채택했다. 그런데 본래는 중요한 안건을 하 나 더 다루려 했다.‘장기 성장 전략’(이하‘장기성장전략’ )이었다. 그간 한국의 진보정당들은 지나치게 단기 실적, 즉 당장의 선거 결과에 휘둘 리는 모습을 보여 왔다. 선거에서 성적이 잘 안 나오면 당이 뿌리부터 흔들렸다. 한국 사회 변혁이라는 궁극 목표를 내다보며 뚜벅뚜벅 제 갈 길을 가는 모습과 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반성에서 재창당의 중요한 내용 중 하나로 장기성장전 략을 채택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당명, 강령, 당헌을 제정하는 것만도 워낙 막중한 과제이다 보니 장기 성장전략을 함께 작성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당원들이 내용을 토론하기에는 시 쟁점토론 83


간도 부족했다. 그래서 결국 장기성장전략은 작년 재창당 과정의 주요 의제에서는 일단 빠졌다. 하지만 연기한 것이지 폐기한 것은 아니었다. 대의원대회 이후 열린 전국위원회는 산하에 장기성장전 략위원회(위원장 : 장석준)를 설치해서 장기성장전략 입안 작업에 다시 착수하기로 했다. 장기성장전략위원 회는 작년 가을부터 올해 1월까지 진행한 토론의 결과로 <노동당 장기성장전략 ver1.0> 초안을 작성했다 (당 홈페이지 참고).

이 초안은 당원 토론을 거친 뒤 2/4분기 전국위원회(지방선거 전)에서 심의·채택할 예정이다. 모쪼록 관심 있는 모든 당부와 당원들의 관심과 활발한 논의를 기대한다. 장기성장전략위원회는 토론회가 열리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함께 할 계획이다.

당원 토론을 거쳐 차기 전국위원회에서 채택할 예정 사실 먼 미래를 내다보는 장기성장전략을 내놓다는 게 지금 우리 당 상황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당장 몇 달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부터가 힘겨운 시험이 아닌가.‘장기’성장은 고사하고 ‘단기’생존이 고민거리다. 이를 장기성장

“노동당은 <장기>적 성장 가능성의 실현을 위해 <단기>적 고난에 맞서야 한다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전략 초안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노동 당은 <장기>적 성장 가능성의 실현을 위해 <단기>적 고난에 맞서야 한다는 도전에 직 면해 있다.” 여기에서 그‘단기’ 가 어느 정도의 시간

일지는 쉽게 예측할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최소한 박근혜 대통령 임기 동안은 인고의 세월이 계속되 리라는 것이다. 박근혜 집권기 내내 한편으로는 대중의 저항이 끊임없이 이어지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대립을‘새누리당 대 반새누리당’구도로 수렴시키는 강력한 힘이 작동할 것이다. 이에 따라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에서는 2012년 총선-대선 이상으로 민주대연합의 압박이 심해질 것이다. 노동당 같은 신생 좌파정당에게는 최악의 조건이다. 적어도 2017년 무렵까지는 노동당이 과거 민주노동당처럼 빠른 속 도로 자동 성장하길 기대하기는 어렵겠다. 그러나 암담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새누리당 대 반새누리당’구도 때문에 억눌려 있던 힘들은 새로운 국면이 열리기만 한다면 대폭발을 일으킬 수도 있다. 노동당은 이런 국면이 열릴 때에 이를 주도하는 정 치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그럴 역량과 태세를 지금부터 하나하나 갖춰가야 한다. 이 점에서 앞으로 몇 년간의 시련기는 우리에게는 소중한 단련의 시간이기도 한다. 장기성장전략은 다름 아 니라 바로 이 시기에 당이 연마해야 할 과목들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런 과제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유일 진보좌파정당’ 의 위상을 획득하는 일이다. 흔히‘진지 전’ 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은 영어로는‘war of position’ 이다. 여기에서‘position’ 은‘진지’ 이기도 하 84


이기도 하다. 즉, 일상적인 정치적 경쟁과 대립에서 가장 밑바탕을 이루는 힘은 지만,‘입장’혹은‘위치’ 각 정치 세력이 선택한 입장 혹은 확보한 위상 자체로부터 나온다. 우리 당에게 그러한 입장은 곧‘좌파 정치의 독자성 견지 및 강화’ 다. 노동당은 이른바‘진보’ 정당들이 난립하는 상황에서 (일체의 민주대연합 흐름에 맞서) 독자적 좌파 정치 를 굳건히 대표함으로써 힘을 다지고 키워가야 한다. 우선은 조직 노동과 청년층에서부터 이런 노력을 인 정받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민주대연합 흐름과 우리 당 사이의 경계선이 선명해지는 방식으로든 아니면 진보 정치권이 우리 당 입장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방식으로든 노동당이 곧‘유일 진보좌파정당’ 이 되는 국면이 열릴 것이다. 이때가 노동당에게는 비약적 성장의 첫 번째 계기가 될 것이다.

시련기를 단련의 시간으로 채울 6대 수련 과목 장기성장전략 초안은 당에게 필요한 수련 과목들로 무엇을 제시하는가? 다음의 6대 핵심 전략 과제를 제안하고 있다. 첫째,‘정책 브랜드 형성’ 이다. 과거 민주노동당의“부유세, 무상의료, 무상교육”같은 정책 브랜드를 형성해 미조직 상태의 광범한 유권자에게 다가가자는 것이다. 당분간은 당력에 커다란 한계가 있을 수밖 에 없기 때문에 여러 의제를 산발적으로 제기해서는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힘들다. 중앙당부터 평당원까 지 당 전체가 한 가지 의제로 집중 실천을 벌여야 그나마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중심 의제를 선정해 전 당적 집중 실천을 펼쳐야 한다. 둘째,‘이념 정체성 형성’ 이다. 강령의 지향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활동을 통해 정책 브랜드보다는 좀 더 장기적인 시야에서 대중적 이미지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과거에도 한국의 진보정당들은 이런 이념 정 체성을 형성하는 데는 미숙했다. 그랬기 때문에 자유주의 정치 세력과의 차이를 분명히 하는 데도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노동당은 강령의“평등 / 생태 / 평화 공화국”지향을‘반거대자본(재벌) 정당 / 탈핵-에 너지 전환 정당 / 평화군축 정당’ 의 정체성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또한 <한국사회 구조변혁 플랜 ver1.0> 을 수립하고 계속 갱신함으로써 대안 정당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셋째,‘대중 조직화’ 다. 기존 대중운동의 지지를 끌어내면서 동시에 당이 직접 새로운 대중운동을 조직 하자는 것이다. 과거 진보정당의 조직적 지지 기반은 주로 기존 노동조합, 농민회 등이었다. 이들 대중운 동은 진보정당의 토대로서 여전히 중요하다. 이러한 운동의 지지를 확보하는 게 1차 목표다. 하지만 예전 처럼 이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당이 나서서 새로운 대중운동 영역(예 : 세대별 유니온이나 커뮤니티 유니 온 등)을 개척하고 이렇게 해서 성장한 신진 대중조직이 당의 또 다른 조직적 지지 기반이 되는 선순환 구

도를 만들어야 한다. 넷째,‘ ‘민중의 집’ 형 지역 거점 구축’ 이다.‘민중의 집’ 과 같은 지역 거점을 건설하자는 것은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구상이다. 장기성장전략 초안은 이 구상을 더욱 발전시키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몇 년도까지 쟁점토론 85


2013년 12월, 민주노총 침탈 항의집회에 함께 한 노동당 청년 당원(사진 : 박혜림)

몇 개의‘민중의 집’ 을 만들자는 식으로 목표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민중 의 집’모델을 만드는 일이다.‘민중의 집’ 은 지역 사회의 좌파적 재편을 추진하는 운동이어야만 한다. 노 동당의 과제는 이런 목표를 충족하는 모범 사례를 만들어‘민중의 집’운동 전반의 정치적 구심으로 부상 하는 것이다. 다섯째,‘지역사회의 변혁 성과를 통한 전 당적 도약의 계기 마련’ 이다. 한 마디로, 비례대표 국회의원 당선에 치중하던 기존 진보정당 성장 전략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비례대표 국회의원 당 선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에 더해 또 다른 성장 경로를 확보해서 좀 더 토대가 탄탄한 정당 을 만들자는 것이다. 장기성장전략 초안은 그 경로로서, 특정 지방자치단체에서 집권해 지역사회 변혁 성 과를 만들고 이에 대한 전국적 관심을 통해 당의 비약적 성장 계기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제한된 정당명 부비례대표제(물론 전면적 정당명부비례대표제가 도입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에 의존한 국회 진출 전략 은 당의 상층과 기층을 괴리시키고 상층 중심의 가분수형 성장을 초래했지만, 지역사회 변혁 성과를 통한 새 성장 경로는 당의 각 부분의 유기적 동시 성장을 북돋을 가능성이 높다. 여섯째,‘진보 청년세대 육성’ 이다. 진보 청년세대 육성에 당이 앞장서자는 것이다. 지금 우리 당뿐만 아니라 진보좌파 전체가 기성세대‘이후’ 를 책임질 청년세대의 부족으로 고통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는, 보다 효과적으로 진보 청년세대를 육성하고 세대 교체를 활기 있게 진행하는 세력이 미래의 주도권을 쥘 수밖에 없다. 노동당이 이러한 세력으로 부상해야 한다. 그래서 당 자체의 성장 역량을 확보할 뿐만 아 86


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니라“진보좌파 전체의 미래를 책임지는 정치 세력”

당장은 진보 청년세대 육성에서 시작하자 위의 6대 과제들 중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다. 지금 우리 당력으로는 이들 과제를 동시에 모두 다 제대로 추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과제들 중에서도 어느 하나를 선정해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그 래서 장기성장전략 초안은 단계별 접근법을 제안한다. 일단 2년씩 끊어서 중점 과제를 선정하고 거기에 전력투구하자는 것이다. 올해부터 내년까지 추진할 첫 번째 중점 과제로서 장기성장전략위원회가 제안하는 것은 바로‘진보 청 년세대 육성’ 이다. 다른 무엇보다 이 과제에 인력과 재정을 투입하고 또한 여타의 과제들도 이 과제와 교 차해서 추진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제안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기존 진보정당운동의 주된 지지 기반은, 세대별로 보면, 현재의 40 대-50대 초반(2000년대의 30대-40대 초반)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진보정당의 혼란 속에 이들 진보정당 지지층 역시 분열·해체 과정 을 겪었다. 진보정당 지지 기반을 복구 하기 위해서는 이들 세대의 지지층을 반드시 재결집해야 하지만, 그러자면 이미 이완된 이들 세대‘바깥’ 에서 최 초의 자극이 시작돼야 한다. 1980년대

진보정당 지지 기반을 복구하려면‘바깥’ 에서 최초의 자극이 시작돼야 한다. 그리고 진보좌파 운동의 역사에서 이러한 자극은 항상 젊은 세대 로부터 비롯됐다.

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진보좌파 운동의 역사에서 이러한 자극은 항상 젊은 세대로부터 비롯됐다. 또한 현재의 진보정치 지형을 보면,‘진보’ 정당들이 난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중에서도 다수 세력 이 낡은 사상으로 인해 불신의 대상이 돼 있다. 이 때문에 진보정당운동 전체에 기존 지지층 외의 새로운 집단이 참여하는 것이 상당 기간 지체 혹은 봉쇄돼 왔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장 왕성하게 진보 청년세대 를 조직하고 이들의 구심으로 인정받는 세력이 진보정치 전체의 새로운 구심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다. 이 런 세력만이 진보정당운동의‘미래’ 를 담보하는 대안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2013년 말 철도노조 파업 국면에서 등장한“안녕들 하십니까”대자보운동은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하 는 생생한 사례다. 이 운동은 진보운동 전반의 신선한 재생의 힘은 결국 젊은 세대에서 나올 수밖에 없음 을 실증했다. 당장 지방선거가 끝나고 난 뒤부터 진보 청년세대 육성에 당 전체가 달려들자. 이 과제를 당 초기의 승 부처로 삼자. 그렇다고 이게 청년 당원에게만 할 일을 주자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모든 당부와 당원의 일상 활동을 이 과제와 중첩해서 상상하고 실천해나갈 수 있다. 쟁점토론 87


을 건설하되, 청년층이 활발히 참여할 수 있는 공 가령‘민중의 집’운동을 예로 들어보자.‘민중의 집’ 간으로 만드는 것을 우선 고민할 수 있다. 대학가 등 청년 밀집 지역에 전략적으로‘민중의 집’ 을 건설하 는 것이다. 청년 밀집 지역의‘민중의 집’ 은 진보운동에 관심 있는 청년이면 누구나 쉽게 찾아와 함께 생 활하는 공간이 될 것이다. 과거 대학‘안에서’동아리방이 이러한

당장 지방선거가 끝나고 난 뒤부터 진보 청년세대

공간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대학

육성에 당 전체가 달려들자. 이 과제를 당 초기의

‘밖’ 에 이런 공간을 구축하자는

승부처로 삼자. 모든 당부와 당원의 일상 활동을

것이다. 당 내에서‘민중의 집’ 을

이 과제와 중첩해서 상상하고 실천해 나가자.

먼저 만들고 운영해본 경험이 있 는 당원들은‘(진보 청년세대 육 성) 사업단’ 에 참여해 청년 밀집

지역의‘민중의 집’건설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장기성장전략 초안의 제안이다. 여러 과제들을 그저 나열하기만 하는 내용은 결코 아니다. 나름대 로 당장 과감히 집중 실천할 무엇을 제안하고 있다. 이 제안에 대한 당원 여러분의 깊은 관심과 열띤 토 론, 의지에 찬 결정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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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진보다

“대학 정문을 넘어서는 새로운 청년운동 열겠다” 노동당 새 청년학생위원장을 만나다 노 정 기관지 편집실장

올해 초, 노동당 청년학생위원회가 새 위원장을 뽑는 선거를 치렀다. 진보정치의 전망이 어두운 가운데 지방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청년학생 당원들의 손으로 새로이 당선시킨 청년학생위원장 직이다.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에서 신임 청년학생위원장 김재석 당원을 만났다.

Q. 선거기간동안 김재석 당원의 당선을 지지하는 메시지들이 당 게시판을 가득 메웠습니 다. 그 글들만 읽어 보아도 김재석 당원이 이제까지 여러 공간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 였음을 알 수 있었는데요. 그간 당원으로서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5분 브리핑을 부탁드 려요.

2008년 5월 촛불이 한창이던 당시에 거리에서 입당을 했어요. 당시 진보신당의 호시절 이었죠(웃음). 2009년에는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청소년 모임을 만들었구요. 청소년 당원들 과 함께 공부도 하고 청소년 문제도 같이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잘 되진 않은 것 같아요. 그 이후에 두리반, 마리, 포이동 등 철거 농성장에서 연대투쟁을 하다가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 에게 청소년위원회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해서 2012년 초에 위원회를 출범했어요. 그때 만난 청소년들에게 입당을 많이 권했어요. 준비위 체제로 간 시간이 길었죠. 활동 경험도 없고 당 활동 경험은 더욱 없다 보니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저 자신이 더 이상 청소년 당사자가 아니기도 하고 점점‘꼰대’ 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작년에 탈퇴했구요. 청소년위원회 동지들 에게는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돕겠다고 양해를 구했고 앞으로도 그리 할 생각입니다. 청 소년위원회 탈퇴 후 제가 할 역할이 무얼까 찾다가 작년에 청학에 가입을 하고 선거에까지 청년이 진보다 89


출마하게 되었습니다.

Q. 그간의 활동 경력을 인정받아 모 대학에 NGO 전형으로 합격했 음에도 불구하고 등록금 460만 원 (!)을 마련하지 못해 등록취소가 되 는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들었습니 다. 학자금 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겪은 불상사라 언론에도 여러 차 례 보도가 됐는데요. 김재석 신임 청년학생위원장(사진 : 정정은)

그때까지만 해도 인터넷뱅킹에 대한 이해가 없었어요. 공인인증서, 엑티브엑스, … 이런 걸 19년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어 요. 대개 형편이 되는 많은 가정에서 부모님이 알아서 등록금을 마련해주시거나 대출을 받거나 하지만, 저는 모든 걸 제 스스로 진행하고 확인하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할머니는 핸드폰 문 자 메시지도 보낼 줄 모르시는데‘엑티브엑스’ 라니요. 등록금 대출을 장학재단에 신청하긴 했는데 등록금 납부일이 딱 사흘이었어요. 승인은 더디기 짝이 없 었죠. 결국 날짜를 놓쳤는데 항의해도‘짤’없더라구요. 그때 저같은 사람이 엄청 많았어요. 모든 학생과 학부모의 컴퓨터/인터넷 접근성을 전제로 한 시스템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죠.

Q. 등록취소가 된 뒤에 제주 강정에서 해군기지 공사 반대투쟁에 결합했다고요.

네. 강정에 가서 미디어팀 업무를 맡았어요. 보도자료, 반박자료 내고. 마을신문 취재도 하고. 6개월 정 도 있다가 돈이 떨어져서 서울로 다시 돌아왔어요. 돌아와서 서울 광진 당협 일을 잠시 했구요.

Q. 이번 전국을 돌면서 많은 청년 당원들과 만났고, 바쁜 와중에도 지역 간담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게시판을 통해 공유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어떤 게 있을까요?

노영수 선본과 저희 선본 양측이 모두 희망버스를 타고 밀양을 갔다가 대구 간담회까지 같이 갔거든 요. 희망버스 안에서 청년들을 정말 많이 만났습니다. 할매들이랑 산도 같이 타고 경찰들이랑 싸우고. 따 로따로 깃발 들고 왔다가, 사진 찍을 때는 당 깃발 아래 모였어요. 그리고‘왜 꼭 당이어야 하느냐’ 는 정서 를 많이 확인하면서 고민이 깊어지기도 했구요. 간담회를 돌면서 전국 어디든 갈 때마다 융숭한 대접을 90


받았습니다. 지역의 동지들께 정말 감사했어요.

Q. 역대 청년학생위원장 선거에 출마한 후보 중 유일하게‘대학생이 아닌’청년후보였고, 또한 최초로 ‘대학생이 아닌 청년학생위원장’ 으로 당선되었는데요. 이에 대해‘대학생’ 으로 과잉대표된 청년세대 운동에서 한발 나아가 대학 안팎을 아우르는 청년세대 운동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기를 기대하는 목 소리가 큽니다. 대학이라는 울타리 바깥의 미조직된 청년들과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청소년위원회엔 청소년도 많았지만 대학을 가지 못한 20대도 많았어요. 대학은 가지 않았지만 청년으 로 스스로를 호명하는 사람들이 정작‘청소년위원회’ 에 소속돼 있는 거죠. 청년운동을 하고 싶어 하는데 대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함께 하지 못하는 상황, 이런 걸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각 학교들이 들고 나오는‘깃발’ 들도 좋지만 이 시대에 중점을 둬야 될 것은 미조직된 청년들, 미조직 노동자 들, 대학을 다니든 안 다니든 고시원에서 자고 최저임금 받으며 알바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게 저의 일이라고 여깁니다. 제 개인적 배경 탓일 수도 있어요. 대학을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죠. 각 대학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청년학생운동의 역사를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대학 안팎을 아우르는 청년세대 운동이 시대의 과제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번 선거를 통해 어느 정도 물꼬를 틔웠다고 생각해요. 각 학교를 찾아다닐 생각입니다. 단순무식하게 들리겠지만 직접 가서 많이 만나고 많이 이야기 나누는

지난 1월 말 밀양희망버스에 참가한 김재석 당시 후보(사진 : 당원게시판)

청년이 진보다 91


것, 그것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해요. 학교 바깥의 청년들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더 만나기 쉬워요. 비정 규 노동, 불안정 주거 등등, 의제는 차고 넘치니까요.

Q. 현재 노동당의 많은 청년당원들이‘청년좌파’ 나‘안녕들하십니까’ ‘데모당’등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 고 있습니다. 이러한 활발한 활동이 이뤄지고 있음에도 아쉬운 점은 있습니다.‘노동당’ 이라는 정체성 을 내걸고 활동하기를 기피하거나 간과하기 마련이기에 당의 성과로 수렴되지는 않는다는 점인데요. 노동당 청년학생위원회는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청년 당원들과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청년학생위원회라는 당적 기구 자체가 이러한 다양한 활동을 수렴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라고 생각 합니다.‘안녕들’ ‘데모당’ ‘청년좌파’등등, 이 시대의 새로운 청년운동들 간에 접점이 되어야지요. 자체 적인 흐름을 따로 만든다거나 접점 그 자체가 될 수는 없겠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일하되 노동당 청년학 생위원회가 이 전체를 아우르는 소통의 통로가 되도록 만들겠습니다.

Q. 쓰리지만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 있습니다. 2012년 대선 이후 노동당 청년학생위원회는 이른바‘고사’상태에 빠져 있었는데요. 이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들이 줄곧 있었 습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한 당선자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또한, 앞으로 청년학생위원회의 정상화 를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이며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지 듣고 싶습니다.

저는 그때 청소년위원회였고, 그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는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2008년 입 당한 이래 청학 활동을 해온 건 아니지만 그 과정들은 쭉 곁에서 지켜봤지요. 지난 집행부가‘정파성’ 을 내세웠던 것은 분명히 패착입니다. 그러나 2012년 대선 이전에는 청년학생위원회가 제대로 서 있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권한대행 체제로 넘어갈 때도 있었고, 총선 보이콧 사태도 있었죠. 이제까지 청년학생 위원회가 역할과 기능을 한 적이 없었음을 인정하고 새로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Q. 마지막으로 당선소감을 통해‘당분간 청학위의 독자적인 사업은 당분간 줄이고 지방선거에 최대한 많은 역량을 쏟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학생위원회의 지방선거 돌파 전략과 그 포부를 이야기 해주세요.

당장 이번 한 달 동안은 위원회 회칙을 제대로 익히고, 집행부 구성에 힘쓸 예정입니다. 그리고 지방선 거에서 열심히 뛸 청년 후보를 발굴하고‘청년 후보단’ 을 꾸려서 후보들의 활동을 유기적으로 지원, 보조 하겠습니다. 청년 정책/공약도 당연히 만들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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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진보정당

청년이 진보다 93


먼 좌파 이웃 좌파 ⑧

아일랜드 좌파정치(1)

만년 제3세력에서 벗어나려는 한 세기의 여정 장석준 부대표

아일랜드, 우리에게 낯선 나라만은 아니다. 이 나라와 영국 사이의 오랜 악연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아일랜드의 반영 독립 투쟁을 다룬 영화 <마이클 콜 린스>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면, 우리의 항일 운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실제 로 한국 독립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아일랜드인도 있다. 무역선박회사 이륭양행을 경영하며 임시정부와 의열단을 지원한 조지 루이스 쇼가 그 사람이다.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의 최전성기이던 노무현 정부 시절에 이른바‘아일랜드 모델’ 이한 창 입에 오르내린 바 있다. 해외 자본을 끌어들여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룬 아일랜드를 따 라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데 정작 그 아일랜드는 2008년 공황의 직격탄을 맞아 지금 유럽의 가장 심각한 재정 위기 국가들 중 하나가 되어 있다. 재정 위기국들에 붙은‘PIGS’ 이라는 경멸적 호칭에서‘I’ 가 바로 아일랜드를 가리킨다. 그럼 아일랜드에서는 이런 위기에 맞서 좌파 정치 세력들이 어떠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가? 그 전에 아일랜드에는 어떤 좌파 정당들이 존재하는가? 서유럽 국가들 중에서는 흔치 않게 우리처럼 민족해방투쟁의 경험을 지닌 이 나라에서는 좌파 정치가 어떠한 역사적 궤 적을 밟아왔는가?

아일랜드 노동당의 한 세기 - 민족주의 강온파 대립의 틈바구니에서 아일랜드에도 좌파 정당이 여럿이지만 그 중에서 이제껏 좌파의 대표자 역할을 해온 정 당은 노동당(Labour Party)이다. 이 당은 영국 노동당과 마찬가지로 노동조합운동에 기반을 두고 탄생한 정당이다. 또한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 가입 정당으로서, 사회민주주의 정당 94


이라 분류할 수 있다. 노동당은 1912년에 출범했는데, 이때는 아직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이었다. 이 무렵 아일랜드에서 는 반영 민족주의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도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걸출한 노 동운동가 제임스 라킨이 이끌던 아일랜드 운수일반노동조합(ITGWU)이 그 선두에 섰다. ITGWU는 미숙 련 노동자들까지 광범하게 조직하며 총파업도 불사하는 전투적 산업노조의 전형이었다. ITGWU가 주도해서 아일랜드 노동조합회의(ITUC)가 결의해 만든 당이 노동당이다. 아니, 노총인 ITUC가 독자 정치 세력임을 표방하며 정당을 겸하기로 했다는 게 더 맞겠다. 노총이 곧 노동당이고 노동 당이 곧 노총이었다. 이런 성격을 유지하려고 처음에는 노동조합을 통한 집단 입당 외에 개별 입당은 허 용하지 않았다. 노동조합과 정당의 일체화를 꾀한 독특한 시도였다. 나중에는 물론 개별 입당을 허용하게 되지만 말이다. 이렇듯 아일랜드 노동당은 영국 노동당과 마찬가지로 노동조합 정치세력화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이 당은 영국의 형제당과는 달리 처음부터 사회주의 이념을 분명히 내세웠다. 여기에는 전설적인 사회주의자 제임스 코널리의 영향이 컸다. 코널리는 보수적인 가톨릭 문화가 지배하던 아일랜드 노동자들 사이에 혁명적 사회주의를 확산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는 국제주의 원칙에 따라 북아일랜드에서 가톨릭 노동자 들과 프로테스탄트 노동자들이 서로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가톨릭/프로테스탄트의 종파적 대립을 강조하면서 전자를 중심으로 민족 공동체를 구성하려 한 민족주의자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태도 였다. 그러면서도 코널리는 민족주의를 비판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약소민족 민족주의의 진보적 역할에 주목했다. 그래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연대를 추진했다. 코널리는 독립 아일랜드 공화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노동계급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시만 해도 민 족 해방과 탈자본주의 사회 변혁을 결합한다는 것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주장

아일랜드 노동당 창당 주역이자 전설적인 노동운동가 제임스 라킨의 동상(왼쪽), 동상의 모델이 된 제임스 라킨의 연설 모습(오른쪽)

먼 좌파 이웃 좌파 95


이었다. 이 점에서 코널리는 독창적이고 선구적인 사상가였다. 이런 입장이 실천으로 나타난 게 저 유명한 1916년 부활절 봉기다. 반영 무장 투쟁의 도화선이 된 이 사건은 코널리가 이끌던 노동당 행동대‘아일랜드 시민군’ 과 민족주의 세력인‘아일랜드 의용군’ 의 합작 품이었다. 이 무장 혁명 시도 자체는 일단 실패로 끝났다. 영화 <마이클 콜린스>는 봉기가 진압된 뒤 코널 리가 영국군에 의해 총살당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이런 희생 덕분에 노동당과 노동운동은 독립 아일랜드 공화국의 중요한 버팀목 중 하나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독립 투쟁 과정에서 노동당은 이후 한 세기 동안 지속될 숙명적인 한계에 빠지기도 했다. 아일랜드 민족주 의자들은 본래 신페인당(Sin-Fein) ′ 을 중심으로 뭉쳐 있었 다.‘신페인’ 은 게일어로‘우리 스스로’ 라는 뜻이다. 2편에 소개하겠지만, 지금도 아일랜드 의회에는 신페인당이 있다. 그러나 세기 초의 신페인당이 그대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아일랜드 민족주의-사회주의 운동에서 이 이름이 세대를 이어 계속 반복 사용된 것뿐이다. 아무튼 처음에는 신페인 당이 민족주의 단일 정당이었는데, 1920년대에 민족주의 세력이 두 적대 진영으로 나뉘고 만다. 발단은 1922년의 영국-아일랜드 협상이었다. 이 협상 으로 아일랜드는 독립과 함께 분단을 받아들여야 하는 신 세가 됐다. 프로테스탄트 인구를 다수 포함한 북아일랜드 는 영국령으로 남고 남부 지역만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독 립한다는 것이었다. 이 협상 결과를 놓고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온건-현실파와 이에 극력 반 대하는 강경-원칙파로 나뉘었다. 이 대립은 급기야 내전으 로까지 비화했다. 위에 소개한 두 영화, <마이클 콜린스>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이 비극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내전 자체는 양 쪽의 타협으로 1년만에 마무리됐다 (1922-1923). 하지만 이때의 대립이 정당 구도로 남아 지금

까지 아일랜드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강경파 민족주의자 들은 신당‘피애너 포일(Fianna Fail, 라는 ` ‘아일랜드의 전사’ 아일랜드 독립 전쟁과 내전을 다룬 켄 로치의 영 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위), 리암 니슨이 온 건파 민족주의자 마이클 콜린스 역을 맡은 영화 <마이클 콜린스>(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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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 을 창당했다.‘공화당’ 이라고도 불리는 이 당은 독립 이

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원내 제1당 지위를 유지하며 아일 랜드 정치를 주도하게 된다. 한편 온건파 민족주의자들은


▲1916년 부활절 봉기로 파괴된 더블린 시내 부활절 봉기를 기리는 벽화. 가운데가 제임스 코널리다▶

‘피네 게일(Fine Gael,‘아일랜드 겨레’ 라는 뜻)’ 이라는 정당으로 결집했다. 피네 게일은 이후 피애너 포일과 함께 양대 정당 구도를 이루며 권력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사실 이 두 당은 북 아일랜드 재통합에 대한 민족주의적 수사의 강 도가 여전히 조금 다룰 뿐, 한국의 새누리당-민 주당처럼 근본적인 이념 차이는 없다. 둘 다 보 수 우파 정당이다. 한데 문제는 이러한 양대 우파 정당의 등장 때문에 노동당의 성장이 정체돼 버렸다는 것이다. 피애너 포일과 피네 게일의 대립이 정치권을 지배하게 되자 노동당은 무대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여전히 중요한 정치 세력이기는 했다. 원내 제3당 지위 는 줄곧 유지했다. 노동조합이라는 탄탄한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아일랜드 정치는 공화당민주당이 제도 정치를 독점한 미국과는 양상이 분명 달랐다. 그러나 노동당이 마침내 양대 정당 중 하나 로 부상한 영국과도 또 달랐다. 아일랜드 노동당은 피애너 포일과 피네 게일 사이에 낀 캐스팅 보트일 뿐 이었다. 지난 세기 내내, 혼자 힘으로 집권할 수 있는 정당으로는 성장하지 못했다. 이런 만년 제3당 신세 때문에 노동당의 좌파 이념도 많이 희석됐다. 노동당은 양대 보수 정당, 그 중에 서도 자력으로 원내 과반수를 확보하기 힘든 처지였던 피네 게일과 좌우연립정부를 결성하곤 했다. 그러 다 보니 노동당의 정책도 우파 정당 피네 게일과 조율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하향 조정되기 일쑤였다.

노동당 바깥에서 불어온 좌파 혁신의 바람 노동당의 이런 정체 상태에는 아일랜드의 독특한 선거 제도도 한 몫 했다. 이 나라의 하원의원 선출 방 식은 단기이양제(Single Transferable Vote)다. 이것은 여러 명의 당선자를 내는 대선거구를 전제로 한다. 먼 좌파 이웃 좌파 97


아일랜드 노동당의 가두 행진 모습. 깃발에 장미 문양이 선명하다.

유권자들은 한 명의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게 아니라 여러 명의 후보들에 대해 1순위 선호, 2순위 선호 등 선호도를 표시한다. 일정 수 이상의 득표를 한 복수의 후보가 당선자가 되는데, 1순위 선호 투표만으로 당 선자 수를 다 채우지 못하면 2순위 그리고 그 아래 순위 선호 투표까지 개표해서 당선자를 채워간다. 이것은 일종의 비례대표제다. 그래서 미국이나 영국식 양당 구조는 피할 수 있다. 하지만‘정당명부’ 비례대표제는 아니다. 그래서 특정 지역구에 강력한 기반을 지닌 정당이 후보를 여럿 내서, 마치 일본식 중선거구제에서 자유민주당이 그랬던 것처럼, 당선자를 많이 낼 수도 있다. 소선거구제 요소가 상당히 가 미된 비례대표제인 셈이다. 이러다 보니 지역조직이 가장 강한 피애너 포일이 원내에서 쭉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반면 노동당은 일정 수 이상으로 의석을 늘리는 데 애를 먹었다. 만년 캐스팅보트인 노동당은 좌파 정치의 대표자가 되기에는 너무 무력해보였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그랬다. 그래서 아일랜드에서는 노동당 바깥의 좌파 정치세력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때마다 새 세대는 미완으로 끝난 통일 독립 아일랜드 공화국의 꿈을 다시 추구하겠다고 천명하곤 했다. 위에서 이야 기한 것처럼‘신페인당’ 이라는 이름이 수차례 부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데 흥미로운 것은 노동당 바 깥의 이러한 시도들 덕분에 노동당 역시 새로운 피를 수혈해 주기적인 침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아일랜드 좌파 정치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다음 호에서는 이에 대해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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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 통신

벨기에 선거 시스템 들여다 보기 엄형식 유럽당협 당원, 벨기에 리에쥬 거주

제가 살고 있는 벨기에는 인구 1100만 명이 경상도 면적에 모여 사는 작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정치 시스템은 여느 큰 나라 못지않게 복잡합니다. 벨기에의 정치 시스템과 이를 뒷 받침하고 있는 선거 시스템이 모범적이라거나 특정 유형을 대표하는 전형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연방제·내각제·정당투표제 등 한국의 현행 정치 시스템 및 선거 시스템과 대 조되는 면이 많은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한국은 87년 헌법에 따른 제왕적 대통령과 소선거구제의 구조적 한계가 점점 더 분명해 지고 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방식의 정치 시스템과 선거 시스템을 살펴본다면 독자 들의 정치적 상상력을 조금이나마 넓히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간단하게 벨기에 선 거 시스템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벨기에의 정치 시스템 벨기에의 선거 시스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 시스템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벨 기에는 네덜란드어의 방언 격인 플랑드르어를 사용하는 북쪽 플랑드르 지방과 불어를 사 용하는 남쪽 왈룬 지방, 상당수 주민이 불어를 사용하지만 지리적으로는 플랑드르 내부에 위치하여 플랑드르어와 불어를 공식 공용어로 사용하는 수도 브뤼셀, 그리고 1차 세계 대 전 이후 독일로부터 할양 받은 영토로서 왈룬 지역의 동쪽 끝에 자리 잡은 독일어권 지역 으로 구성된 나라입니다. 벨기에의 권력구조는 기초 단위 지자체인 꼬뮌(589개), 광역도(10개), 연방제 아래에서 실질적인 독립 정부 역할을 하는 지방(플랑드르, 왈룬, 브뤼셀), 언어에 따라 구분되어 문화· 교육·보건복지의 권한을 갖는 언어권(플랑드르어권, 불어권, 독일어권), 연방정부, 그리고 유 구라파통신 99


럽연합이라는 무려 6개의 층위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이 중 지방정 부의 구성을 따르는 언어권 정부 를 제외하면, 모두가 선거를 통해 해당 권력기관을 선출·구성합니 다. 벨기에의 정당은 1980년대에 연방제가 도입된 이후,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적 구분을 따르는 정 당들(기민당, 자유당, 사회당, 녹색 당)이 플랑드르어권과 불어권으로 벨기에를 구성하는 언어권 분포(사진 : en.wikipedia.org) 위: 네덜란드어 사용 지역, 아래: 프랑스어 사용 지역, 오른쪽: 독일어 사용 지역

분리되어 발전해 왔습니다. 가 령, 현재는 같은 사회당이라 하더

라도 플랑드르어권과 불어권의 사회당은 별도의 정당이며, 동일한 사안에 관해 다른 입장을(특히 지역문제 에 관련해서는) 갖는 경우도 많습니다. 2014년 현재, 벨기에 주요 정당은 전통적인 정당들인 사회당(불어권 PS, 플랑드르어권 sp.a), 자유당(불어권 MR, 플랑드르어권 Open-VLD), 기민당(불어권 cdH, 플랑드르어권 CD&V), 녹색당(불어권 ecolo, 플랑드르어권 Groen!)과 플랑드르어권 민족주의 정당인 NV-A 등이며, 이외

에 여러 군소정당들이 있습니다.

벨기에의 선거 시스템 벨기에의 정치 시스템이 복잡하다고 벌써 놀라시면 안 됩니다. 각각의 선거에 적용되는 선거 시스템은 더 복잡하기 때문이지요. 선거 시스템의 주요한 특징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의무투표 19세기 후반부터 선거 참여는 시민의 의무로 규정되어 왔습니다. 이는 노동자들을 비롯한 취약계층들 의 선거 참여를 목적으로 도입되었는데, 이를 통해 고용주 등에 의한 선거 불참 압력을 막을 수 있었기 때 문입니다. 해외 출장이나 와병 등 특정한 사유가 있음을 미리 고지하지 않고 선거에 불참하면 25~50 유로(4만 원~8만 원)의 벌금이, 연속 불참한 경우에는 최고 125 유로(20만 원)까지의 벌금이 부과됩니다. 또한 15

년 동안 4회의 선거에 불참하면 10년간 참정권이 유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무투표 제도에도 불구하고 투표불참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2006년만 하 100


더라도 투표율이 93퍼센트였지만, 조금씩 하락해 지난 2012년에 있었던 코뮨/도의회 선거에서는 89.7퍼센 트까지 떨어진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점점 많아지는 백지·무효표와 함께, 이러한 추세는 정치제도 전반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 정당투표 벨기에의 모든 선거는 개인이 아닌 정당에 대한 투표 로 이루어집니다. 전국 단위 정당이 없더라도, 기초지자 체인 코뮌 선거에서는 지역 정치세력이 독자적인 리스트 를 구성해 출마를 하곤 합니다. 2012년 리에쥬 시의회 선 거에 리스트를 제출했던 지역정당 VEGA는 3.6퍼센트의

리에쥬시의 녹색좌파 지역정당 VEGA (사진 : www.vega.coop)

득표와 함께 시의원 1명을 당선시켰습니다. 지금은 전자투표로 바뀌었지만, 아래의 기존 투표용지 양식을 보면 정당투표 방식을 이해할 수 있습니 다. 기본적으로 투표용지 한 장은 특정 정당에 대한 한 표로 계산합니다. 따라서 두 개 이상의 당에 동시에 기표하면 무효표가 됩니다. 반면, 특정 정당에 대해 한 표를 기표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 먼저, 정당 리스트 상단에 있는 칸에만 기표를 함으로써 정당에 대한 지지를 표시할 수 있습니다. 2) 리스트에 있는 후보자들 이름 옆 칸에 기표함으로써, 해당 정당에 대한 지지를 표시함과 동시에 특정 후보에 대한 선호를 표시할 수 있 습니다. 이때, 다른 당의 후보들과 섞지만 않는다면 특정 정당 리스트에 있는 후보자는 한 명에서부터 전 원에 이르기까지 복수로 기표할 수 있습니다. 새로 바뀐 전자투표시스템에서는, 첫 화면에서 정당을 선택하면 그 다음 화면에 해당 정당의 리스트가 표시되어 이중에서 선호하는 후보들에 기표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벨기에 기존 투표용지(사진 : www.ibz.rrn.fgov.be) ▶새로운 전자투표시스템. 해당 정당 리스트 화면에서 후 보자들에게 복수 기표를 할 수 있다.(사진 : www.7sur7.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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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스트의 순번 각급 의회에서 각 당에 배정되는 의석수는 정당투표의 결과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나 각 당의 리스 트에 있는 후보들 중 누가 의원으로 선출되는지는 복잡한 계산을 거쳐야만 알 수 있습니다. 이 계산 과정 에는 두 가지 논리가 함께 작동합니다. 먼저 리스트에 표시된 순번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정당의 리스트는 각 당마다 작성 방식이 다양 할 수 있지만, 많은 경우 당에서 전략적으로 리스트를 작성합니다. 일반적으로 앞 순번은 상징적인 인물 들, 중간 순번은 지역 및 부문을 배려한 인물들, 그리고 마지막 순번은 지명도와 인기가 높은 인물들로 구 성합니다. 리스트의 순번은 이후 당선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그 순서가 고려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습 니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벨기에 선거 시스템은 유권자들이 정당뿐만 아니라 리스트에 있는 복수의 후 보자들에게 기표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물 투표의 성격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의원에 지명되는 순 서의 결정에서는 각 후보자들이 얻은 지지표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즉, 각 후보자들이 개인적으로 얻은 지지표에다가 리스트 순번을 고려한 일종의 가중치를 부여하게 되는데(실제 계산은 무척 복잡합니 다), 그 결과 가장 많은 지지표를 얻은 순서로 의원에 지명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투표 방식은 리스트에 올라온 후보자들로 하여금, 정당투표와 동시에 자기 개인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방식의 선거운동을 하게 만듭니다. 후보자들은 정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할 때는 한 목소리를 내

2012년 코뮨 선거 당시의 사회당 홍보물. 후보자마다 다양하게 제작했다.(사진 : 엄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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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의원 자리를 두고서는 같은 정당의 후보들끼리 경쟁하는 관계가 됩니다. 그래서 자력으로도 개인 지지표를 모을 수 있는 중요 정치인들이 주로 리스트의 후반부에 배치되지만 결국 의회에 입성하게 됩니 다. 주요 정당들의 경우, 후보자 개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선거홍보물을 제작하고 선거운동을 하는 반면, 군소정당은 당 차원에서 자원을 묶어 활용하고 있습니다.

좀 더 과감한 정치적 상상력을 위하여 이렇듯 복잡한 벨기에 정치 및 선거 시스템은 오랜 시간에 걸쳐 정착해 큰 무리 없이 작동하고 있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플랑드르 지역에서는 플랑드르의 독립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정치세력이 1당 을 차지하면서 연방 수준의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다수파 구성이 점점 더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로 인해 내각제가 갖는 불안정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또한 거의 모든 주요 정치세력들이 연립정부 구성에 참여 해 왔던 역사 때문에 정당들 고유의 정치적 색깔과 책임성이 점점 옅어지고, 그에 따라 정치권 전반이 점 점 더 불신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증가 추세를 보이는 기권표와 무효표를 통해 확인됩니다. 우리의 것과 다른 방식의 정치 및 선거 시스템을 살펴보는 것이 모방할 것이냐, 비판할 것이냐의 문제 로 단순하게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에게 익숙한 현재의 시스템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 라는 단순한 진실을 환기시키고, 보다 적극적이고 과감한 정치적 상상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선거가 더 이상 정치적 지향과 정책 프로그램에 기반을 둔 경쟁이 아닌 진영과 진영 의 힘겨루기로 극단화되고 있는 한 국의 상황에서, 새로운 권력배분방 식을 위한 개헌을 포함해 보다 과감 한 상상력과 구상이 우리에게 좀 더

단순히 모방할 것이냐, 비판할 것이냐의 문제는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에게 익숙한 현재의 시스템

구체적이고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

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환기하고 보다 적극적이

할 때입니다.

고 과감한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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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칼럼

“좌파 예술을 기억하라!” 제2회 레드어워드 개최 문화예술위 주최로 성황리에 마쳐 양솔규 기획조정실 국장 / 사진 박성훈 홍보실장

노동당 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는 제2회 레드 어워드(Red Awards)가 14일(금) 저녁7시 동교동 가톨 릭 청년회관 <다리>에서 열렸다. 2013년 한 해 동안 세상을 바꾸고자 애썼던 좌파 문화예술인들을 되돌아 보고 기억하자는 취지로 열린 레드 어워드는 <화차>의 변영주 감독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축가공연에 나선 꽃다지 정윤경은“상품도 없고, 상금도 없는 변변치 않은 시상식을 2회까지 이어갈지 는 몰랐다” 면서 연이어 네 곡을 선사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두 번째 축하공연을 한 음악부문 전년도 수상자 단편선은 신중현의‘봄’ 을 열창했다. 연극 부문은 2500여 일이 넘는 시간동안 투쟁하고 있는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의 삶과 세익스피어의 ‘햄릿’ 을 결합시킨 진동젤리의 <구일만 햄릿>이 상을 받았다. 수상자들은“작품을 준비하면서 힘들기는 했지만 콜트콜텍 아저씨들 만나서 재밌게 했다” 면서“연극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해줬다” 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영화 부문은 수몰 예정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사이비>가 받았다.

특별상을 수상한 이동슈 화백(왼쪽)과 연극부문 수상을 한 진동젤리(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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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시상을 해주기로 했지만 부득이 참석하지 못한 전년도 수상자인 <두 개의 문> 김일란 감독은 변영주 사회자에 의해 내년 3회 레드 어워드 시상식의 사회로‘찜’당하기도 했다. 사진 부문과 르뽀 부문은 모두 현대차 비정규직 지회 동지들이 휩쓸었다. 사진 부문은 이상엽 작가와 홍진훤 작가 등 전문 사진작가들을 제치고 현대차 비정규직 지회 최병승 동지의 <철탑사진일기>가 받았 다. 최병승 수상자는 수상 동영상을 통해“사진 부문 수상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주변의 동지들과 저 스스로도 황당해 했다” 면서“스마트폰 사진이 예술 사진으로 승화된 것에 기쁘다” 는 재치 있는 소감으 로 폭소를 자아냈다. 변영주 감독도“스마트폰에‘발린’이상엽 작가”운운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르뽀 부문 시상을 맡은 전년도 수상자인 유채림 작가는“민중의 삶이 영원하다면 르뽀야말로 영원하지 않을까” 라며, 최병승 동지와 함께 철탑 고공농성을 벌였던 천의봉 동지의 <철탑일기>의 수상을 축하했다. 천의봉 수상자는 동영상을 통해“10년이 넘도록 안해 본 투쟁이 없지만, 못해 본 투쟁이 더 많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많이 준비를 해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 승리로 보답하겠다” 며 수상소감을 밝혔다. 미술 부문은 이윤엽 작가의 <밀양의 얼굴들>이 수상했고, 음악 부문은 가수 윤영배의 <위험한 세계>, 만 화 부문은 최규석의 <송곳>, 올해의 퍼포먼스 상은‘구럼비를 사랑하는 사람들’ 의 <구럼비를 죽이지 마라> 가 수상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수상 분야는 2회를 맞이하여 새로 마련된‘안티 레드’ 상이었다. 남 대문 경찰서 경비과정 최성영 씨와 미디어워치 변희재 씨가 후보로 올랐고, 수상의 불명예는 경비과장 최 성영 씨에게 돌아갔다. 최성영 경비과장의 불참으로 인해 대리 수상한 변영주 감독은“법을 수호한다면서 법을 지키지 않는 최성영의 총경 승진을‘저주’ 하며, 수상상품인 천연비누를 꼭 전달하겠다” 고 밝혔다. 그 러나 이후 변영주 감독은“꼭 최성영에게 비누를 주어야 하는가? 신유아 문화연대 활동가에게 선사하겠 다” 고 밝혔고, 신유아 활동가는“최성영의 비누를 내가 꼭 받아야 하는가?” 면서 이후‘최성영 비누’ 의행 방은 오리무중(?)에 빠져 버렸다. 특별상은 실천하는‘레알로망 캐리커처’이동슈 화백이 받았다. 이동슈 화백은 수상 소감을 통해“얼 마 안 남은 빨갱이들로부터 빨갱이로 인정받아 기분이 좋다” 고 밝혔다. 부대 행사로 故 이재영 정책위의장의 유고집 판매와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현장 부스가 설치됐다. 변영주 감독과 하종강 선생 등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미래에서 온 편지> 구독을 신청하기도 했다.“현장의 예술이 기억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내년에도 내년에도 기억장치로서의 레드 어워드로 찾아 뵙겠다” 면서 음악부문 수상자 윤영배 씨의 공연을 끝으로 제2회 레드 어워드를 마감했다. 삶과 문화 105


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

“담장을 넘어갈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칼라TV 영상활동가 겸 음악인, 김일안 인터뷰·정리 ·사진 : 나도원 문화예술위원장

“어릴 적엔 정말 예뻤는데….” 믿기 힘든 주장이다. 이렇게 놀라운 발언을 듣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만나자마자 우리는 허기진 몸을 두 다리로 지탱하며 먹을거리를 찾아 나서야 했다. 하루 종일 굶은 두 사람이 공히 떠올린 음식은 근사한 서양요리나 푸짐한 전통식단이 아닌, 단지 라면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소박한 소망은 오히려 서울 홍대 앞 번화가에선 이루기가 쉽지 않다. 분식집 찾기가 화려한 카페 찾기보 다 더 어려운 동네인 것이다. 아쉬운 대로 단골집에 들러 짬뽕 두 그릇을 해치우고 나서야 우리의 표정은 세상의 모든 죄악이라도 감싸 안을 수 있을 것 같은 너그러움을 되찾았다. 106


만남의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이런저런 질 문을 던지며 사진기를 꺼내들고 이렇게 저렇 게 사진을 찍어보는 중이었다. 무례하게도 ‘그대에게선 좀처럼 예쁜 얼굴사진을 얻을 수 없노라’투덜거렸지만, 다행히 이제 막 테이 블 위에 다 비워진 짬뽕 두 그릇을 올려놓은 덕분인지 그의 마음은 너그러웠다. 기껏 돌아 온 말은, 어릴 적엔 정말 예뻤고 친구들에게도 참 착한 아이로 인정받았다는 충격고백이었다. 덕분에 만남의 목적에 더욱 충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쩌다 이렇 게 되었는지, 무엇이 그를 이토록 까칠한 사내 로 만들었는지 밝혀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불 타올랐기 때문이다.

순한 소년이‘까칠이’ 가 되기까지 김일안의 어린 시절

칼라TV의 영상활동가이자 음악인인 김일안 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운수업을 하던 아버지와 가족을 따라 바다와 강이 함께 만나는 울산 태화 강 근처와 부산 해운대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말썽부리지 않고 조용하며 공부도 그럭저럭 하던 아이였 다. 어찌나 착했는지, 현재 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초등학교 반 아이들이 남녀로 갈라져 싸우고도 “일안이는 착하니까 봐주자” 며 여자 아이들로부터 금지선 안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 받을 정도였다. 집안 형편도 넉넉한 편이어서 집에 피아노가 있었고, 피아노 학원도 다닐 수 있었다. 서울 양천으로 이사해 청 소년기를 보내던 때에 가세가 기울어 피아노를 팔기 전까지는 말이다. 피아노를 대신한 것은 기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아버지가 학교 동창회에서 경매로 나온 기타를 가져오면서 그에게는 새로운 길이 열린다. 파브르와 파스퇴르를 좋아하며 곤충학자를 꿈꾼 김일안은 대학교의 관련 학과로 진학했지만 이미 삶 의 전기들이 마련되고 있었다. 지금은 그와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술과 담배와의 만남, 그리고 세상과의 싸 움이 이때에 이루어졌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글라스로 소주 일곱 잔을 마시고 누워 자면서 구토하는 아름 다운 경험을 했고, 첫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으로 친구들을 불러 모아 술을 사주던 날엔 담배와도 처음으 로 입맞춤했다. 이전까지는 학교에서 책을 읽거나 발표할 때마다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내성적이었던 성 격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었던 모양이다. 클래식 기타 동아리에 들어가 노래하는 것도 그간의 자신을 바꿔 삶과 문화 107


보기 위한 노력들 중 하나였다. 술은 의외의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학교 축제 때에 술에 취해 광장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가 깨 어나니 바로 그곳에서 광주 오월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1980년대 학번들 다수가 그렇듯이 그 역시 광 주의 사진들로부터 큰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대한 불만은 차오르고 있었으나 김일성

또한 이외수의 팬이었던 김일안은 <전

주의자들이 많은 운동권과는 어울리기 싫었다.

태일 평전>을 계기로 전향(?)했다.

청년 김일안은 일하고 술 마시고 노래하며 자신 의 젊은 날을 보냈다.

하지만 직접경험이 간접경험보다 삶에 더 영향을 미치는 법이다. 학비 를 벌기 위해 학교를 다니며 여러 막 일을 했고, 병역을 마치고서는 돈을 벌

기 위해 일본에서 1년 가까이를 보낸 적도 있다. 당시에는 부산과 경남 등지의 신발공장들이 대거 폐업하 면서 일본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나는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이 많았다. 김일안은 당초 파친꼬(Pachinko) 업장에서 일하게 해준다는 소개로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일이 잘못되어 시간만 보내다가 불법체류자 신 세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육가공 공장에 취직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갑 자기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사장이 조총련계였고, 집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이 걸려 있었 다. 김일안 역시 행여 나중에 안기부(현 국정원) 같은 곳에 끌려갈까 싶어 한 달만 일하며 대충 차비만 벌어

“담장을 넘어갈 사람들이 필요했어요”담장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일안(사진 : 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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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둘 궁리를 했지만 알고 보니 사정이 있었다. 일본에는 우리말 교육을 시키는 학교가 조총련을 중심으 로 잘 마련되어 있었고, 공장의 사장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조총련에 가입한 것이었다. 돼지껍데기를 벗 겨가며 번 돈, 100만 엔은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다. 그렇게 1년 학비와 막내 동생의 등록금을 댈 수 있었고, 기타도 2대를 장만했다. 물론 더 큰 소득은 자본주의와 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이었다. 그의 학창시절은 이렇게 흘러갔다. 세상에 대한 불만은 차오르고 있었으나 김일성주의자들이 많은 운 동권과는 어울리기 싫었다. 청년 김일안은 일하고, 술 마시고, 노래하며 자신의 젊은 날을 보내고 있었다.

처절한 기타맨, 독립영화 동네를 거쳐 칼라TV로 졸업 후에 광고기획사에 지원했으나 낙방한 김일안은 공연기획을 하고 싶어 이벤트 회사에 입사한다. ‘명동축제’ ,‘제1회 신당동떡볶이축제’ , 또는‘백화점 속옷 쇼’ 와 같은 이벤트를 만들며, 간혹 훌륭한 음 악인인 한영애와 록밴드 블랙홀(Black Hole)의 공연기획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음 악의 꿈은 커졌고, 회사를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밴드 음악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과감한 결단과 함께 서울 합정동에 지하 연습실을 마련하고 밴드를 구성했다. 그러나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수 포로 돌아가고 만다. 구성원과의 인간적, 음악적 문제가 발생했다. 게다가 IMF가 터지면서 일거리마저 없어졌다.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정리된다. “망해버렸어요.” 그런데 다른 길이 열리고 있었다. 독립영화창작집단‘파적’ 과 일하게 된 것이다. 여러 작품들로 주목받 게 될‘파적’ 에 손을 보탠 건 그에게도 좋은 경험이었다. 유명한 독립영화로 남게 될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1997) 등을 다양한 역할로 거들었다. 생계(혹은 술값)를 위한 일을 계속하면서 영화 하는 이들과 20~30번 정도의 음악작업을 했고, 한국독립영화협회의 극영화분과에도 가입했다. 한편 온라인게임‘리니 지’ 를 30분 정도 해보고 충격을 받아‘게임시대의 도래’ 를 예견한 그는 PC방에서 9개월 동안 일하며 온 종일 게임만 하고서 장편 다큐멘터리 <리니지라는 환타지>(2003)를 연출했다. 약육강식과 와전된 적자생 존 논리의 극단 세계가 게임이지 않은가. 이 작품은 EBS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지만, 자타로부터 좋은 평 가를 받진 못했다고 술회한다.‘처절한 기타맨’ 이라는 별명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김일안은‘환경영화제’ , ‘고양 어린이영화제’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 제’ ,‘인디다큐페스티벌’등 여러 영화제에서 도 일하며 차근차근 늙어가고 있었다.

촛불시위는 <칼라TV>를 일약 대표적인

그러던 어느 날, 조대희로부터 연락이 왔

현장미디어로 만들었지만, 현장 곳곳을

다. 2007년에 민주노동당 대의원대회 촬영을

누빈 김일안에게는 안타까움이 남았다.

보조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를 도와 민주노동

“담장을 넘어갈 사람들이 필요했어요.”

당 분당 직전의 두 차례 대의원대회를 생중계 삶과 문화 109


했다. 진보좌파정당에 직접 뛰어든 당원도 아니면서 더 이상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품게 된 계기였다. 그리고 2008년에 진보신당연대회의가 창당하자 입당했다. 칼라TV 활동가, 그리고 당원 김일안의 시작이었다. 총선과 촛불 국면이 이어진 2008년은 모두에게 숨이 벅찬 해였다. 촛불시위는 사회구성원들에게는 여 러 가지 생각을 품게 하는 한편, 칼라TV를 일약 대표적인 현장미디어로 만들어놓았다. 당시에 온갖 상찬 이 쏟아졌지만, 맨 앞줄에서 경찰들에게 얻어터지고 다니던 내 눈에는, 촛불시민들이‘저들’ 이 원하는 프 레임과 바리게이트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결국 도심에 고립된 걸로 보였다. 현장 곳곳을 누구 못잖게 누 비고 다닌 김일안에게도 안타까운 모습들은 자꾸 눈에 들어왔다. “담장을 넘어갈 사람들이 필요했어요.” 이후 유지와 해산 사이에서 토론을 벌인 끝에 정태인 대표 체제를 갖춘 칼라TV가 또 다시 크게 부각된 사건은 용산참사였다. 그날 새벽에 많은 사람들은 칼라TV의 중계영상을 통해 현장의 비극을 고스란히 목 격할 수 있었다. 김일안도 연일 용산 남일당 건물 근처에서 상황을 중계하고 있었는데, 참사가 벌어지던 날 잠시 눈을 붙이러 자리를 떴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현장영상은 칼라TV 박성훈PD(현 노동당 홍보실장) 의 카메라가 포착한 것이다. 그리고 이 영상은 <두 개의 문>을 만드는 데에 중요하게 쓰였다.

화내는 당원, 여전히 떠는 음악인 늘 자신이 필요한 자리를 찾아 특유의 연약한 음성으로 노래해 온 김일안은, 드디어 2013년 말에 첫 번 째 정규음반인《머리에 민들레꽃을 피운》 을 발표했다. 300만원 가까이 사전모금에 성공했고, 자립음악생 산조합으로부터 50만원을 빌렸다. 여기에 자비를 보태 모두 700만원을 들여 제작한 음반이다. 그래 놓고 서 750장 가까이를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평론가 스타일로 말하면 들국화, 시인과 촌장, 어떤 날의 아련한 감성을 녹여낸 한편, 강렬한 로커의 근성도 발휘한 작품이다. 곽푸른하늘, 빅베이비드라이버, 노컨트롤, 쿠텐버즈, 슬리핑 백 등 인디음악동 네 뮤지션들이 여럿 참여하여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미안하지만 김일안은 훌륭한 싱어라고 하기는 힘들다. 노래를 일찍 시작하지 않아서인지,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인지 발성은 불안정하고 성량은 부족하다. 하지만 좋은 곡을 쓰는 작곡가인 것만은 인정해야 한다. <그 오래된 숲에 들어가>와 <겨자씨만 한 무엇이>처럼 아름다운 곡들, 그리고 <내버려둬>와 <일렉트릭마초맨>과 같이 강렬한 곡들을 탄생시켰 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 아니에요?” 비관과 절망, 낙담으로 범벅된 노래들에 관해 물으니 김일안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내 마음대로 우리 의 부정적인 상황을 인정해야 긍정의 길을 준비할 수 있다는 말로 바꾸어 되새겼다. “힘들지만 갈 데도 없잖아요. 그나마 건강하고 통하는 사람들이 있는 당이죠.” 110


그는 가끔, 아니 자주 당과 당원 에게 화를 내고 모진 소리를 하는 사내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그 가 여전히 노동당에 남아 있다는 사 실이다. 왜 그렇게 화를 내냐고 물 었더니 정치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만 보 면 그렇지 않은 모습들을 보이기 때 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 이 말하면서 특유의 헛헛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도 꼰대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운동권에 대한 선입견을 깬 인물이 되고 싶죠.”

김일안 1집《머리에 민들레꽃을 피운》

2013년 4월 18일, 예술인소셜유 니온(준) 공동위원장 자격으로 국회 토론회 <음악생태계 정상화를 위한 저작권법 개정, 어떻게 할 것인가? - 창작자 권리보장을 중심으로>의 사회를 맡은 적이 있다. 이 토론회

그는 가끔, 아니 자주 당과 당원에게 화를 내고 모진 소리를 한다.“그래도 꼰대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 요. 운동권에 대한 선입견을 깬 인물이 되고 싶죠.”

를 공동주관한 민주통합당 최민희 의원실에서 사전에 음악공연을 하 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앞서 2013년 1월 14일에 국회 정론관에서 한‘예술인복지법 일부개정안’발의 회견에서 우리와 함께 나선 정문식의 공연이 좋은 인상을 남긴 바 있기 때문이다. 나는 김일안을 떠올렸 고, 분위기에 맞게 가급적 조용한 노래를 부탁했다. 토론회 당일, 적잖은 국회의원들과 관련 인사들 앞에 선 김일안은 몸을 돌려 등을 보인 채 노래를 시작 했다. 그러더니 간곡한 당부를 무시하고 악이란 악은 다 써버리는 <내버려둬>를 불렀다. 참석자들은 어떻 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그를 섭외한 사회자의 얼굴은 굳어졌으며, 자칭‘수전증 기타리 스트’ 인 김일안의 손과 몸만이 부들부들 요동쳤다. 그렇게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또 하나의 담장을 넘 어가고 있었다.

삶과 문화 111


불온한 서재

지구적 좌파정치의 르네상스를 위한 프리즘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장석준 / 개마고원 / 2014년 1월 / 15,000원

양솔규 기획조정실 국장

군부독재 시절에 기습 상영된‘불온한 영화’ 1989년 12월30일 KBS <명화극장>에서는 낯선 영화 한편이 방영되었다. 칠레 인 한국의 군사독재는

민연합 아옌데 정권의 등장과 미국 CIA의 사주로 벌어진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를

다른 여타 군사독

다룬 영화《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가 그것이다. 아무리 87년 민주화 이후였다

재정권과 마찬가지

하더라도 엄연히 군부독재의 주역 중 한 명인 노태우가 집권한 시기에 이런 영화

로 해외의 모든 정 보를 통제했다. 주 체사상과 ‘정통’ 맑스 레닌주의는

가 공중파로 상영되는 거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에피소드의 주 역은 패기 넘치게 기습 편성해 내보낸 KBS 노동조합이었다. 바로 다음날인 한 해 의 마지막 날에는 국회에서‘면피성’대국민 사과 연설을 하던 전두환이 초선 국

한반도 남쪽의 변

회의원이던 노무현이 던진 명패에 맞을 뻔한 수모를 겪었다. 명화극장 기습 상영

혁을 꿈꾸는 사람

은 광주학살‘원흉’전두환의 퇴장에 KBS 언론노동자들이 보내는 찬사이자 그간

들의 시각을 옭아

군부독재의 언론통제 협조에 대한 일종의 반성문이었다. 미국의 개입, 군사독재,

맸다.

민간인 학살 등 한국 현대사와 겹치는 상황 때문에 많은 시청자들의 기억에 남기 도 했지만, 이 영화는 바다 건너‘운동 세력’ 에 대한 정보에 목말라 하던 사람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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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는 신선한 한 잔의 샘물이었다. 박정희 18년 독재와 전두환 정권 7년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세력과 좌파세력에게 암흑의 시기였다. 단지 폭압과 착취 때문만이 아니다. 한국의 군사독재는 다른 여 타 군사독재정권과 마찬가지로 해외의 모든 정보를 통제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모든 우편물은 검열을 거쳤다. 좌파 서적 비슷한 거를 국내에 반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오죽하면 막스 베버(Max Weber)와 마르쿠제(Marcuse)의 책을 들고 다니 다가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우스갯소리까지 회자되겠는가? 국민이 접할 수 있는 정보는 정권이 선별해 제공하는 정보 밖에는 없었다. 외신이라고 해봤자 미국, 일 본의 통신사와 언론사 외에는 없었다. 시각은 좁아지고 시력은 떨어졌다. 보통 사 람들에게 해외여행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전국민 해외여행 자유화’ 가이 루어진 것도 89년 1월1일 이후에나 가능했다. 그 이전 시기에‘여권’ 을 가지고 있 다는 것은 대단한‘특권’ 으로 여겼다. 해외 사람들과 <손에 손잡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장소는 잠실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으로 한정되어 있던 것이다. 그나마 한 국을 알고 있는 소수의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는 아프리카 변방에 있 는 독재정권과 비슷한 나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은둔의 나라, 폐쇄적 공화국은 한반도 북쪽뿐만이 아니라 남쪽도 마찬가지였다.

혼돈의 시대에 전세계 좌파 동향을 소개하기 시작해 한반도 남쪽으로 좁혀진 시야와 시력은‘조정’ 되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화가 시작 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러한 한계는 극복되기 어려웠다. 주체사상과‘정통’맑스 1990년대 후반, 장 석준과 일군의 젊 은 활동가들은 이

레닌주의는 한반도 남쪽의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시각을 옭아맸다. 어쩌면 진 정한‘조정’ 의 계기는 87년 민주화 뿐만 아니라 91년 12월31일, 소련의 해체 이후 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소련과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는 한국의 좌파들에

러한‘정보불균형’

게(또한 전 세계 좌파들에게) 저주이면서 동시에 축복이었다. 90년대가 사상적으로

과‘정보비대칭’ 의

혼돈의 시기였는지는 몰라도,‘조정’ 은 늘‘혼돈’ 을 동반하기 마련 아닌가.

시대에 세계 좌파

계기는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좌파들의 현재성에 대해 그러나 우리는 많이

정당의 동향에 대

알지 못했다. 브라질노동자당(PT)의 활약상이 소개되고, 만델라의 석방과 ANC의

해 일찍부터 소개

집권을 뉴스를 통해 접하긴 했지만 말이다. 장석준은 이러한‘정보불균형’ 과‘정

하기 시작했다.

보비대칭’ 의 시대에 세계 좌파정당의 동향에 대해 일찍부터 소개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장석준과 일군의 젊은 활동가들은 <카피레프트 모임>을 결성하고 외국의 좌파저널 중 논쟁적인 글들을 번역해『읽을꺼리』 라는 자료집으로 묶어 냈 삶과 문화 113


는데, 『읽을꺼리』 5호는 “세계 진보정당의 이념/구조/운동”이 주제였다. (http://copyle.jinbo.net에 가면 당시 카피레프트모임의『읽을꺼리』 를 다운받을 수 있 다.) 이 자료집은 민주노동당 창당 일정을 염두에 둔 것이었는데, 이후 만들어진

민주노동당 기관지『이론과실천』에 장석준은“역사 속의 진보정당들”등의 코너 를 통해 꾸준히 세계 좌파정당들의 동향을 소개해 왔다. 2005년 공공연맹에서 《세계 진보정당 운동의 교훈과 한국 진보정당 운동의 과제》라는 자료집을 냈는 데, 그 중 상당수의 글이 장석준의 글이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좌파들 의 힘이 약화되고, 우여곡절을 겪게 되면서 세계 좌파정당들의 공시적(共時的) 실 천을 소개할만한 여유와 지면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겨레21>에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코너가 마련되었고, 여기에 실린 글을 묶어서 낸 게 바로 장석준의『레프트 사이드 스토리』이다.

변방을 향한『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의 시선 세계 좌파정당 입문서『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는 이전의 좌파정당 동향 소개와는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지리적 초점의 이동이다. 글의 개수로만 보면, 총 30개의 글 세계 좌파정당 입 문서『레프트 사이 드 스토리』 는 이전

중 16개가 유럽을 다룬 것으로, 여전히 서구중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변화가 눈에 띈다. 유럽 내에서도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으나, 유로존의 위기 한가운데 있는 남유럽 국가들의 좌파

의 좌파정당 동향

들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또한, 아이슬란드나 러시아, 덴마크 등 새로운 좌파의

소개와는 다른 점

부상에 주목한다. 심지어 스웨덴,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이른바‘사민주의의 선도

이 있다. 바로 지

국가’내에서 벌어지고 있는‘소수 좌파’ 들의 약진과 재구성에도 주목한다.

리적 초점의 이동

이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아프리카와 중동 등‘아랍의 봄’ 의 핵심 지역과 인도에

이다.

서 독재와 근본주의 모두에 반대하며 부상하고 있는 세속 좌파들에 대한 분석, 그 리고 좌파연대를 통해 지구적 반신자유주의 중심으로 부상한 남미의 베네수엘라, 브라질, 우루과이, 칠레 등에 대한 분석 등이다. 이러한 지리적 초점의 이동의 이 면에는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생-청년 세대의 불만의 표출과,‘아랍의 봄’ ,‘남유럽 점거운동’등 새로운 공세적 거리정치의 등장이 있다. 장석준은 에필로그를 통해 한국 진보좌파정치도 세계 좌파정치와 마찬가지로‘기 나긴 재구성의 과정’ 에 놓여 있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한국 정치가 마주했던 결정 적 계기들을 짚는다. 예를 들면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진보좌파의 독자적 정치 구심 결성 여부가 이후 브라질과 한국의 진보좌파 정치의 경로를 좌우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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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또한 남아공과 한국 모두 민주화 과정과 신자유주의 시기가 중첩되면서 자본 독재와 겹쳐진 민주주의가 결국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했다고 본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역사적 기회’ 들은 존재했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새로운 대안 제 시를 통해 명실상부한 제3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2007년 대선시기와, 2011년 의 글로벌‘점령 운동’ 의 설익은 한국판 버전이었던 2008년 촛불항쟁이 그러했 다. 그러나 진보좌파정치는‘민주대연합론’ 을 넘어서지 못했다.

기나긴 재구성의 과정, 조바심은 금물 새 출발은‘단절’ 이 전제돼야 한다. 그리고 단절 뒤에 는 좌파정치의 철

남은 것은‘새 출발’ 이다. 그러나 새 출발은‘재건’ 과‘복원’ 과는 다르다.‘단절’ 이 전제되어야 한다. 장석준은 단절의 과제로‘자유주의 세력 중심의 연합 흐름과의 단절’ , 그리고‘주체사상과의 단절’ 을 주장한다. 단절 뒤에는 좌파정치의 철저한 실험과 개척, 정비를 통한 혁신이 필요하다고 단언한다. 조바심은 금물이다. 우리

저한 실험과 개척,

에게 필요한 것은‘단련의 시간’ 이지‘시간 단축’ 이 아니다. 현재를 비관하되 미래

정비를 통한 혁신

를 비관하지 말자. 기나긴 시간 지평 속에서, 지구적 시야를 통해 자본주의 문명

이 필요하다고 장

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사유를 가지고 실천하자. 바로 지구 곳곳에서 우리 동료

석준은 선언한다.

들이 그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더 읽을만한 책과 자료> • 『위기 반란 대안 1』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엮음, 책세상, 2013년1월, 12,800원 • 「유럽의 경제위기와 정치 변동 : 남유럽을 중심으로」 , 김종법,『내일을 여는 역사』47호 (2012년6월) • 「북아프리카 민주화운동의 성격과 전망」 , 엄한진, 비판사회학회,『경제와사회』90호 (2011년여름) • 「유럽통합의 모순과 재정위기의 정치경제」 , 박상현, 비판사회학회,『경제와사회』97호 (2013년봄) • 「라틴아메리카의 중도좌파 붐」 , 이성형, 역사비평사,『역사비평』96호(2011년여름) • 「라틴아메리카 :‘종속’ 과‘배제’ 에서‘해방’ 의 혁명으로」 , 안태환, 문화과학사,『문화과 학』67호(2011년가을)

삶과 문화 115


우리동네 현대사

비문 없는 비석 서울역사박물관의 이우 신도비 강남욱 서울 당원, 후쿠시마 사고 이후 그린 에너지를 전공하고 있다.

<레드바이크>는 자전거 타는 노동당 당원들의 모임입니다. 노동당 기관지《미래에서 온 편지》10월호 <자전거로 충분하다> 특집 대담 자리에서 만나 지금도 매달 꾸준히 자전거를 타거나 정비학교를 엽니다. 지난 12월 초에는 행주산성을 들렀다가 서울 서촌까지 빗속을 뚫고 신나게 자전거를 탔습니다. 그 날 마지막 목적지였던 서촌 혁이네로 가던 중 서울역 사박물관을 지나다가 문득 이우 신도비가 떠올랐습니다. 하루종일 비를 쫄딱 맞은 사람들 에게“특이한 비석 하나 보고 가자” 고 제안을 했고 다 같이 자전거를 돌려 서울역사박물관 뒤뜰로 들어갔습니다.

눈엣가시 같은 망국의 황손 경희궁 옛터에 만들어진 서울역사박물관, 그 뒤뜰로 들어가 보면 특이하게도 비문이 없 는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습니다. 비석의 주인인 이우는 고종의 손자이며 운현궁의 4대 종 주였습니다. 경희궁에서 태어나 아버지 의친왕과 함께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지요. 당시 일 본은 황실령으로 대한제국의 왕세자와 왕세손들에게 만18세가 되면 육해군 장교로 임관하 도록 의무를 강제했습니다. 이우도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장교로 임관했 습니다. 일본 궁내성과 조선총독부는 망국의 왕족에게 일본인과의 정략결혼을 끈질기게 강요했 습니다. 이우는 이에 저항하고 조선인 여성과 결혼했는데 이는 꽤 예외적인 사례입니다. 이우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과 가정교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조선의 독립에 대한 확실 한 신념을 갖고 있었고 일본 육군에서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 ,“일본은 패망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미국과 소련이 가만있 116


지 않을 것이라 걱정이다”등등 입바른 소리를 공공연하게 하고 다녀 일본 권력자들에겐 눈엣가시와 같았 습니다. 생전에 일본 제국 육군에 복무했고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도 받았지만, 사실상 볼모의 처지였 음을 감안해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친일인명사전》발간 당시 이우를 명단에서 제외한 바 있습니다.

왜 이 비석에는 비문이 없나 1945년 6월 10일, 패전 일로를 달리던 일본은 이우에게 일본 전출 명령을 내립니다. 일본의 패전과 한 국의 독립이 시간 문제라 여긴 이우는 전역을 신청하고 조선 배속을 청원하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당해 결 국 7월 히로시마로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8월 6일, 자동차가 있는데도 말을 타고 출근하겠다고 고집을 피워 참모본부로 말을 타 고 출근하다가 그날 아침 히로시마 상공에 미국이 원자 폭탄“리틀 보이” 를 투하하면서 그 자리에서 피폭 을 당했습니다. 폭심지로부터 불과 71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이우는 그날 오후에 다리 밑에서 흙투성이로 발견됐고,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지만 고열로 신음하다 다음날 새벽에 사망했습니 다. 당시 이우의 수행 부관은 엉덩이에 생긴 부스럼 때문에 말 대신 자동차를 타고 미리 출근했다가 피폭

▲서울역사박물관 뒤뜰에 서 있는 이우 신도비 (사진 : 서울역사박물관)

▶생전의 이우 모습(사진 : 위키백과)

삶과 문화 117


을 면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상관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이우의 유해를 운구한 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네요. 유해는 즉시 비행기로 실려 왔고 장례식도 8월 15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일본 육군장으로 열릴 예정이 었지만, 바로 그날은 일본이 패망한 날이었지요. 가까스로 장례식은 약식으로 거행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의 신탁 통치가 시작되었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벌어졌지요. 망국의 황손을 기릴 신도비에 비문 한 줄 써넣을 상황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이우는 그래도 황손이라서 비문 없는 비석이나마 남았지만,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에게는 그나마도 없습니다. 그날 패전을 눈앞에 둔 일본땅의 한 도시에서 불안한 아침을 맞이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과 도 같은 원폭 속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조선인 노동자 2만여 명을 포함해 그날 아침의 희생자는 약 10만 명에 달했습니다.

우리의 비석에는 누가 비문을 남겨줄까 버섯구름이 삽시간에 피어오르는 동영상이나 사진을 들여다보아도 핵폭탄의 위력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2000년 전에 쓰여진 성경에서 묘사하는‘지옥불’ 은 핵폭탄이 떨어진 꼭 그 자리를 묘사하는 듯합니다.“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0~13절) 그런데 그 히로시마 원폭보다 1000배 이상, 체르노빌 사고 당시보다 열한 배 이상의 방사능이 유출되 는 사고가 지난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에서 일어났습니다. 스리마일, 체르노빌에 이어 후쿠시마가 사람 이 살 수 없는 불모의 땅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핵발전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흔히들 그렇게 말합니다.“원자력은 핵폭탄과 다르다” ,“원자력은 깨끗하 고 안전한 에너지다” ,“핵폭탄은 사람을 죽이지만 원자력은 우리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어준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그 모든 변명이 말장난에 불과함을 똑똑히 보여준 사건입니다. 핵발전소 사 고는 핵폭탄보다 엄청나게 더 많은 방사능 오염을 일으킵니다. 핵폭탄은 단시간에 많은 인명을 살상하지 만, 핵발전소 사고는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죽음을 가져다 줍니 다. 이제는 영변이나 고리1호기 등 노후 핵발전소의 위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당장 탈핵의 길로 진일보 해야만 할 것입니다. 콘센트 넘어 꿋꿋이 돌고 있는 핵발전소와 송전탑 건설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의 비석에 비문을 써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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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노동당가가 만들어졌습니다. 꽃다지 음악감독 정윤경이 당가 의뢰를 받은 때가 2013 년 가을이 막 시작될 무렵이니 꽤 오래 걸렸습니다. 말 그대로 창작의 바다에서 오랫동안 자맥질 을 하다, 산고의 고통 끝에 세상에 선보이게 됐습니다. 당가를 만들며 세운 원칙은‘당의 강령을 날 것 그대로 담는 것은 지양하자’ 와‘즐겨 부를 수 있는 당가여야 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강령을 비롯한 수십 쪽의 자료와 이재영 추모집《이재영의 눈으로 본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 ,《비판으로 세상을 사랑하다》까지 읽는 것으로도 모자라, 당 원들을 만나 조언을 들어가며 당가에 무엇을 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정윤경의 모습을 지켜보았 습니다. 노래 한 곡을 만들기 위해 들인 시간으로만 치자면 이 노래만큼 공을 들인 노래가 또 있 을까 싶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저는 결국 하지 말아야 할 한마디까지 하고 말았습니다.“너무 욕심내시는 거 아닙니까? 대충 만드시지요!”

신에 맞서 존엄성 얻어내는 시지프스가 모티브 이 노래는 시지프스가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 중 가장 현명하 고 신중한 사람이었지만, 신들의 입장에서는 감히 신들을 우습게보고 자신들의 일에 끼어들어 간섭하던 입 싸고 교활한 인간이었습니다. 신들의 일에 미주알고주알 참견하다 결국 신들의 노여움을 산 시지프스는 명계로부터‘바위 가 늘 산꼭대기에 있게 하라’ 는 명령을 받고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립니다. 그러나 바위는 산꼭대기에 이르는 순간 굴러 떨어지고, 시지프스는 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합니다. 인간의 인식을 뛰어넘는 비합리적인 신들의 세계, 우리가 부조리하다고 말하는 세계와 삶 속에서 시지 프스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란, 삶을 포기하고 자살을 함으로써 부조리로부터 도피하거나, 한쪽 눈을 질끈 감고 초월적인 존재에 의탁하여 희망이라는 위안처를 찾거나,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 반항하며 끝까지 싸우는 세 가지 뿐이었습니다. 시지프스는 반항하며 끝까지 싸워 나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대면하여 반항함으로써 그는‘부조리의 영웅’ 이

노 래 의

노동당가

대지와 미래를 품고

민정연 문화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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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인간의 존엄성을 획득합니다. 부조리를 인식하고 기꺼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의 모습은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자본과 권력이 만든 세상에 덤벼 싸우는 사람들, 꿈을 이루는 순간보다 지는 순간이 많음에도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이 모인 노동당의 모습과 닮아 있지 않나 싶습니다. 누군가는 영겁의 형벌을 수행하는 시지프스를 희망 없는‘좌절의 연속’ 으로 말하기 도 하지만, 저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세상에 반항하는 자신의‘자유’ 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노동당이 꿈꾸는 미래를 상상하며 흥겹게 <대지와 미래를 품고>는 전형적인 행진곡 스타일에서 살짝 빗겨나 있습니다. 반주 역시 전자기타의 주 도 속에 피아노 연주가 힘차면서도 우아한 고전적인 느낌을 동시에 전달합니다. 저는 전주 몇 마디를 듣 는 순간 벅찬 전율이 온몸을 감싸왔는데 당원 여러분도 그 전율을 느끼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당가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이 노래를 먼저 듣고 불러 본 당원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아주 부르기 쉽던데요. 중독성도 있고…”라는 씩씩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네, 부르기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런 데 조금 더 노래의 제 맛을 살려서 부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반적으로 행진곡을 부를 때는 딱딱 끊어서 박진감을 최대한 살려 부르지만, 이 노래는 너무 끊어 부 르기보다는 프레이즈를 살려서 즉, 호흡을 길게 갖고 자주 등장하는 붓점을 살려 부르시길 권합니다. 그 리고 지나치게 결의에 차서 결연한 마음으로 부르기보다는 노동당이 꿈꾸던 세상을 만들었을 미래를 상 상하며 흥겨운 기분으로 부른다면 노래의 제 맛이 좀 더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열어가는 사람들 무너진 길을 다시 열어 한 발 또 한 발’ 로 시작하는 노랫말에는‘노동당’ 이라는 당명 석 자도, 구체적인 강령의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많이 비어있는 노랫말이라고 느끼는 분도 있을 겁니다. 저는 오히려, 그래서 이 노래가 더 좋기도 합니다. 부르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스스로 의 구체적인 지향을 떠올리며 부른다면 더 많은 꿈과 세상을 깨쳐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채울 수 있을 여백 이 있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교가든 노동조합가든 당가든 만들 때 심혈을 기울이고 관심을 가졌던 것에 비해 일상에서는 부르지 않 고 행사가 있을 때나 부르는 게 대부분입니다. 부른다 해도‘우리끼리만’부르는 것에 멈추곤 합니다. 부 디 이번에 만들어진‘노동당가’ 는 언제 어디서든 흥얼흥얼 즐겨 부르는 노래이길 희망합니다.

자본과 권력에 덤벼 싸우는 사람들, 꿈을 이루는 순간보다 지는 순간이 많음에도 세상을 바꾸겠다 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이 모인 노동 당의 모습과 닮아 있지 않나 싶습니다.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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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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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니 칼럼

봄의 맛과 향은 냉이로부터 시작된다 이재기 충남도당·약초꾼·목공공방 일꾼

입춘이 되면 나는 까만 봉지 하나 들고 양지바른 밭둑을 헤집는 다. 겨울 끝자락에 쌓인 눈을 살며시 털어내면서 봄은 그 자태를 드 러낸다. 그것은 냉이다!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 너도나도 바구니 옆에 끼고서 / 달래 냉이 씀바귀 나물 캐오자 / 종다리도 높이 떠 노래 부른다’ 어린 시절 불렀던 노래 <봄맞이 가자>에도 나오듯, 40여 년 전 내 어릴 적 동무들은 달래며 냉이, 씀바 귀를 캐면서 봄을 맞이했다. 그렇지만 요즘 아이들 중에 달래와 냉이를 구별할 줄 아는 친구들은 몇이나 될까? 그들에게 달래와 냉이는‘너도나도 동무들과 어울려 종다리 우짖는 노래 들으며’밭둑 들녘에서 캐 오는 것이 아니라, 마트에서‘캐오는(?)’것이리라. 필요한 건 모두 마트에 있고,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믿게 된 건 오롯이 게으르고 지혜롭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다. 봄나물은 지천에 널려 있다. 심지어 독초조차 새순은 나물로 해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그 중에 가장 먼 저 봄을 안기는 나물은 냉이다. 냉이에 이어 쑥이 나오고, 삼나물(눈개승마)이 나오고, 그 다음에 달래가 나온다. 눈이 녹는 곳 어디서나 새순은 돋기 마련이기에 이를 총칭하여 봄나물이라 부른다. 2월에 냉이부 터 시작하여 6월에 감꽃이 필 때까지 봄나물 잔치는 연이어지는데 가장 왕성한 시기가 4월과 5월이다. 그 래서 이번 호와 다음 호 2회에 걸쳐 봄나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냉이 냉이는 시골집 된장국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나물이다. 그 이름도 지역 에 따라 천차만별이라‘나생이 / 나숭개 / 나싱이’등으로 불린다. 가장 먼저 봄을 알리 는 나물이거니와, 겨우내 잃었던 입맛을 돋워주기도 한다. 두해살이풀인 냉이는 겨울 끝 자락인 입춘(2월4일) 언저리에 모습을 드러낸다. 볕이 잘 드는 길가나 언덕 밭둑을 살펴 보면 갈색으로 변한 냉이 잎이 바짝 땅에 엎드려 있다. 그 뿌리는 길이가 10센티미터를 넘는 것도 있다. 그래서 겨울 냉이는 잎을 먹는다기보다 뿌리를 먹는다고들 한다. 냉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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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은 달고 상큼한 향이 강하다. 잎과 뿌리 모두 먹는 것이므로 뿌리까지 캐야 제대로 캔 것이 맞다. 봄나물 중에서 단백질 함량이 많고 칼슘, 철분, 비타민 등도 풍부하여 춘곤증 예방에 좋은 먹거리다. 냉이를 재료로 하는 흔한 요리 로는 국(된장국/조개된장국/굴된장국/해물탕), 무침(된장무침/(초)고추장무침/겉절이) 및 부침(전)을 들 수 있다. 요즘에는 냉이도 비닐하우스에서 양산하기 때문에 한 겨울에도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데 이왕이면 겨울 끝자락 들녘 에서 봄기운을 느낄 겸 야생 냉이를 직접 캐서 먹어보자. 그 향이 마트냉이보다 몇 곱절 더 할 것이다. ●냉이도 비슷한 놈들이 많다. 참냉이/황새냉이/고추냉이/싸리냉이/좁쌀냉이/나도냉이/장대냉이/미나리냉이 등 등. 그 중 상큼한 향이 강한 것이 참냉이, 매운 맛이 강한 것이 고추냉이(겨자냉이)이고 나머지는 향이 밋밋하니 잘 구분해서 캐야 한다.

쑥 쑥은 국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서 양지바른 논밭둑이나 길가에서 자란다. 그 종류가 서른 가지가 넘고 생김새가 거의 비슷하여 구별하기 쉽지 않다. 식용과 약용, 식/ 약용 모두 가능한 쑥까지 그 쓰임새도 여러 가지다. 그러나 독초는 없으므로 어린 순은 안심하고 식용할 수 있다. 쑥의 맛은 단군신화에서 보듯 쓴 맛과 향이 강하다. 이른 봄에 돋는 어린 순은 떡에 넣어 서 먹거나 된장국을 끓여 먹을 수 있는데, 이른 봄에 냉이와 쌍벽을 이루는 향채 중의 향 채라 할 만하다. 약재로 쓰는 것은 예로부터 5월 단오에 채취하여 말린 것이 가장 효과가 크다고 한다. 쑥은 식용, 약 용, 뜸용 외에 여름에 모깃불을 피워 모기를 쫓는 재료로 사용해도 좋다.

달래 달래는 식욕을 돋우고 강장제 역할을 하는데, 춘곤증 등으로 축 늘어진 심신을 강 화하기 좋은 향채이다. 약간 쓴 듯 쌉싸름한 맛이 매력인 달래는 파와 비슷한 냄새가 나 며 비타민·칼슘 등 무기질이 골고루 들어 있고, 특히 비타민C가 많다. 비타민C는 열에 약한데 달래는 주로 날것으로 먹기 때문에 조리에 의한 손실을 막을 수 있고 식초를 곁 들이면 비타민C가 파괴되는 시간이 연장되므로 달래 무침에는 식초를 치는 게 제격이 다. 달래도 요즘에는 온상 재배하여 겨울에도 구할 수 있지만 맛과 향과 영양분은 자연 산을 따라 올 수 없다. 달래의 잎과 뿌리는 강한 향미를 지니고 있는데 무침, 장아찌, 전, 된장국 등을 해 먹으면 맛이 일품이다. 특히, 구운 김에 달래간장을 쳐서 먹는 맛은 대여섯 가지 맛과 향이 섞여 어우러지면서 봄철 입맛을 돋우 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다 할 것이다.

봄동 봄동은 밭에서 겨울을 난 배추를 일컫는다. 그 맛이 달고 사각거리며 씹히는 맛이 좋아 봄에 입맛을 돋우는 겉절이나 쌈으로 먹기에 좋은 나물이다. 봄동은 품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배추든 노지에서 겨울을 나며 자라서 속이 꽉 차지 않아 결구 형 태를 취하지 못하고 잎이 옆으로 퍼진 배추를 가리킨다. 이른 봄에 나는 봄동은 다른 계절의 배추보다 비타민A·C, 베타카로틴이 풍부하다. 생 으로 먹으면 비타민이 파괴되는 걸 막을 수 있기에 주로 겉절이로 먹는 편이다. 봄동 잎 은 여름배추나 김장배추보다는 조금 두꺼운 편이지만, 아미노산이 풍부하여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나고 향이 진하 다. 선조들이 감나무에 까치밥을 남겨 놓듯, 김장배추를 수확할 때 덜 자라 속이 꽉 차지 않은 열댓 포기는 남겨뒀다 가 겨울 끝자락 이른 봄에 봄동으로 먹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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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입맛

우리는 서울에서 장醬을 담가 먹는다 고은정 삶과 먹을거리 협동조합 <끼니> 조합원

어머니로부터 첫 독립을 하던 자유의 날을 기억한다. 남동생 둘, 이모 둘, 여섯 살 위의 삼촌이 늘 한 집 에서 복작거리면서 살았기에 나 혼자 방을 쓰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참담한 날들이었다. 사생활 하나 없는 사춘기를 지나 학교를 졸업하고 난 어느 날, 드디어 내게 독립의 기회를 줄 사건이 하나 터졌다. 어머 니가 하시던 사업이 잘못되어 전쟁도 피해갔다는 광명시의 한 오지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가족의 불 행을 함께 나누며 어려움을 헤치고 나갈 궁리를 해야 하는 맏딸임에도, 나는 직장이 서울이라 절대로 따 라 갈 수 없다며 독립을 선언해 버렸다.

어머니의 식민지와 같은 밥상을 차리다 이삿짐을 꾸리며, 어머니는 쌀을 가득 채운 요강이 들어 있는 솥단지 하나와 고추장, 된장, 간장을 담 은 상자를 내 몫으로 따로 싸 주셨다. 요강이 들어 있는 솥은 밥 굶지 말고 잘 살라는 기원이 담긴 선조들 의 이삿날 풍습이라며, 이제 혼자 살게 되었으니 돈 많이 벌고 잘 살라는 기원으로 그리 해 주시는 것이라 하셨다. 요란하게 독립을 했지만, 나의 일상은 몸만 따로 나왔을 뿐 여전히 어머니에게 종속된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어머니 의 간장과 된장, 김치, 밑반찬이 일주일이 멀다 하고 아버지 와 남동생들의 손에 들려 내게로 왔다. 그때 나의 밥상은 어 머니의 식민지와 다름없었다. 두 번째 나의 독립은 결혼으로 시작되었다. 아이를 가지고 직장을 그만 둔 나는, 밑반찬을 내 손으로 만들어 먹는 것을 원칙으로 세웠다. 김치 담그기에도 도전했다. 하지만 두 번째 독립도 반 조리된 식재료를 공급받는 프랜차이즈 사업의 지 점 같은 상황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된장이나 간 장, 고추장이 없으면 밥상을 차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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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의 독립을 완성하다 이후 프리랜서로 일하게 되면서 나의 세 번째 독립은 비로소 완성되었다. 가마솥, 절구, 큰 항아리, 황 토방, 바람과 햇살이 간질이는 마당이 없다면서 포기하고 있던 전통 장류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그 도전은 어머니를 괴롭히는 수많은 질문들로 이어졌는데, 이후 그 질문들은‘도심에서 장 담가 먹기는 라면 끓이기보다 쉽다’ 는 결론을 내는 데 중요하게 기여했다. 이제 나의 네 번째 독립 선언은 탈지대두, 염산분해, 짠맛을 숨기기 위한 감미료, 우리의 미각을 교란 시키는 온갖 첨가물들로 범벅이 된 채 대량생산되는 장류들로부터의 독립으로 이어진다. 1960년대 말, 비 위생적이라며 위해식품으로 강제 분류되어‘장독대 없애기 운동’ 으로 사라진 장독대를 도심의 옥상에 다 시 일으켜 세우는 독립 운동을 하려고 한다. 공장에서 나오는 획일화된 장맛에서 벗어나 세상의 모든 어 머니의 수만큼 다양한 장맛을 다시 복원하는 일로 나의 독립 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로, 넉넉한 집에서 부족한 집으로, 맛있는 집에서 덜 맛있는 집으로 나눠 주고 나눠 먹던 우리의 장들을 매개로 도심에서 애써 외면하고 살던 사람들과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공동체성 회복을 꾀하고자 한다.

밥상과 삶의 독립 운동은 계속 된다 작년에 처음으로 마포의 한 건물 옥상에 공동의 장독대를 마련하고, 독립 가구들이 모여 서툴지만 마 음을 모아 장 담그기를 했다.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항아리에 담긴 메주와 소금물로 담근 장인데 된장 의 맛도 다르고 간장의 양도 다 달라 당황스러웠지만 전통장의 특성을 이해하고 나눔의 즐거움을 경험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HACCP 시설이 없는 동네 건물 옥상이라지만, 그 오랜 세월 동안 된장, 간장 먹고 탈난 사람은 없었다. 1970년대 마포에서 무너진 와우아파트가 옥상에 있던 장독의 무게 때문이었다는 억울한 소리도 이제 그 만했으면 한다. 우리는 올해도 마포에서 건물 옥상에 우리 동네 장독대를 만들 것이다. 작년과 맛이 달라 도 괜찮고 올해 유별나게 맛이 없어도 괜찮다. 얻어먹을 이웃이 있으니 걱정 없고 함께여서 위안까지 더 불어 얻는다. 이렇게 우리는, 올해도 동네 장독대를 통해 미약하나마 거대 자본으로부터 우리의 밥상을 지키고 우리 의 삶을 독립하기 위한 운동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가 매달 삶과 먹을거리 협동조합 <끼니> 소식을 전합니다. 먹을거 리의 생산과 가공, 유통, 소비 등 각 분야의 전문가와 언론인, 인문학 연구자 등이 필진으로 참여합 니다. 한국인의 끼니가 그 실체를 선명히 드러낼 수 있도록 왜곡된 정보와 조작된 전통을 고발하고, 궁극적으로는 한국의 노동자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끼니를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모색 합니다. 이 글은 <끼니> 공식 블로그에 동시게재 됩니다. (http://blog.naver.com/gginico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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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접으며

탈핵의 정치 박권일『88만원 세대』공동저자, 기관지위원

2014년 3월 11일은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 3주년이다. 소위‘핵 마피아’ 들과 핵 발전 찬성론자 들은“핵 발전소 사고는 핵 발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재, 즉 관리의 부실이 초래한 문제이며, ‘통제만 잘한다면’압도적으로 값싸고 깨끗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고 강변해왔다. 그러나 핵 발 전소 사고는 교량이나 건물 붕괴 같은,‘회복가능한 사고’ 가 아니다.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정도의 대형 사고는 단 한 번으로도 사실상 불가역적인, 지구적 규모의 재앙을 가져온다. 인간 사회가 완벽 하고 전능한‘신들의 사회’ 가 될 수 없다면, 유일한 대안은 탈핵일 수밖에 없다. 핵 마피아와 찬핵론자들은 또“부족한 전기는 어떻게 할 것이냐? 원시사회로 돌아가자는 건가?” 라며 눈을 부라린다. 이것이 말도 안 되는 과장임은 이미 현실로 증명됐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단계 적 가동중단에 들어간 일본의 핵발전소는 2012년 5월 모두 가동 중단했다. 그러다 여름철 전력 부족 을 이유로 몇몇 발전소를 재가동했다가 2013년 9월“원전제로”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나 찬핵론자들 이 우려한‘에너지 패닉’ 은 발생하지 않았다. 시민들과 기업이 자진해 전력 수요를 줄인 점도 작용했 지만,‘핵 발전소가 사라지면 문명 이전으로 돌아간다’ 는 식의 주장 자체가 애당초 근거 없는 협박이 었다.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언제 핵 발전소 사고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말한다. 실제로 위 험한 징후가 많이 감지된다. 1978년 첫 가동을 시작한 뒤 한국의 핵발전소는 35년간 672번 가동이 중단됐다‘국내 ( 원전가동 이후 발생한 사고·고장 현황(2013)’자료). 낡은 원전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규 원전에서도 끊임없이 가동중단 사고가 났다. 2010년 이후 2013년 4월까지 3년간 전체 가동중단 건수는 47건이었고, 가동 기간이 불과 3년 미만인 신고리 1호기, 신고리 2호기, 신월성 1호기도 각각 2~9차례 가동이 중단됐다. 그러나 한국에서 탈핵의 정치는 아직 험난하다. 박근혜 정권은 지난 1월‘2035년까지 원전 16기를 추가 증설하겠다’ 는 에너지정책을 공식발표하는‘패기’ 를 보여줬다.‘너희들이 어쩔건데?’ 라는 생각 일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후쿠시마 사고를 직접 경험한 일본조차 탈핵의 정치는 고난의 행군 중이다. 얼마 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자민당의 지지를 받은 마스조에 요이치가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된 사 실은 한국의 진보적 시민들에게도 상당한 충격과 실망으로 다가왔다. 이 선거 결과가 보여주는 함의 는 무엇일까.‘탈핵이란 가치만으로는 공고한 보수정치를 허물어뜨릴 수 없다’ 는 사실이다. 전국 최 대 노동자조직인 렌고(連合: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의 역자)의 도쿄위원회가 마스조에를 지지하고 나섰 다는 점은 단순히‘늙은 정규직 노조의 보수화’ 만이 아니라, 복지와 경제발전 등‘먹고사는 문제’ 에 대한 요구가 탈핵의 문제의식 이상 비등함을 보여준다.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128


0221

원일 제 호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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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22 1:16 AM

페이지

2

표지 이야기

“아빠 올해최저임금이…” 올해도두차례의정보고서낸전주시의회서윤근의원 ,

초등학생아들에게심부름값으로시간당천원을주기로하고같이 의정보고서를돌리던날이었다 노동청앞을지나다현수막을본아 들이지나가듯한마디를던졌다“올해최저임금이…”등골사이로 식은땀이쭉흘러내렸다 올해초 열악한재정여건아래의정보고서를꼬박꼬박발행한노동 당기초의원들이여러언론에보도됐다 서윤근의원의경우 작년에 이어올해에도두차례의정보고서를냈다 국회의원과 달리 기초의원들은 의정보고서 제작·발송비를 지원받 지못한다 자비로의정보고서를만드는판국에우편발송은엄두도 못낸다 당원들과아내 초등학교다니는아들까지동원해서집집마 다나눠주고다닌다 젊었을때는대문마다직접붙이고다녔는데지 금은무릎이시려서우체통에꽂는다며멋쩍게웃는다 “세상을바꾸고싶은욕구 년째붙들고사는그욕구가제삶을밀 어가는원동력입니다‘진보정당’이저의무기죠 당이당원들을가 장필요로할때가지금입니다 힘들기도하지만 가장힘든시기니까 더더욱저의자리에서제가할일을할겁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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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의회서윤근의원인터뷰전문은 6~10쪽 <지금+여기노동당>에서 볼수있습니다. 사진 : 정정은 편집부장

미래에서온편지제7호

발행인 이용길 편집인 이장규 위원회 김건담김성현노정박권일장석준정정은정철수

조윤호최백순홍원표

교 열 노정양솔규장석준정정은 디자인 고미숙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마포-라00403) 발행일 2014년 2월 26일 주 소 서울마포구서교동 371-12 비금빌딩 7층노동당 전 화 02) 6004-2006, 2007 팩 스 02) 6004-2001 이메일 laborzine@gmail.com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인 쇄 인천시계양구계산동 973-15 원일컴 가격 10,000원


2013.12 제4호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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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부동산 정책 잔혹사

그 많던 집은 누가 다 가졌나 기획 ■ 예술과 밥 이재영을 추모하며 ■ 정책이 살아야 진보정당이 산다

미래에서 온 편지 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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