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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News from Nowhere ‘미래에서 온 편지’ 는 영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작가, 미술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1891년에 낸 소설 제목 『News from Nowhere』 을 우리말로 의역한 것입니다. nowhere는‘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는 뜻입니다. ‘유토피아’ 라는 말의 원래 의미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고 하지요. 이제 노동당의 기관지에‘미래에서 온 편지’ 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한국 사회의 답답한 현재에 햇살을 들이는 미래의 틈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nowhere는 now+here(지금 여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미래가 되기 위해, 이 편지를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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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사 미래에서 편지가 왔어요|이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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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에세이

흐르는 강물처럼|이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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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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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에 바란다 노동당의 길, 그 위에 청소년도 함께 하기를|정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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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에 바란다 정규직 노동자가 ‘노동당’ 을 맞이하는 자세|김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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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에 바란다 중년의 사랑|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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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에 바란다 거대담론 넘어서는 평화정당 되기를|김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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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노동당|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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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 편지(便紙), 이제는 헤어져야 할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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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에게‘편지’ 를 쓰기 위해|홍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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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예수 믿으세요! 감리교회 김홍도 목사님께|이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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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사장이 고용해!|홍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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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동당은 당신의 노동당과 다르다|홍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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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그러시면 멀미나요|김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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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 미래(未來), 아직 오지 않은 세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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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동 없는 세상? 몫 없는 자들의 목소리 모아내야|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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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있는 삶’ 은 노동을 껴안는 시간|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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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없는 세상|나동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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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핵 없는 세상을 만드는가|이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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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Y는 가라, 진짜 하늘 보인다|온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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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진보정치 열전 우리들의 왕언니 김혜경 (2부)

“생활정치가 왜 중요하냐구? 그게 진보이기 때문이야” |심재옥 63

노동르포 철탑 296일을 기억하며

‘희망’ 이란 우리의 기억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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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70

의원단 일기 제주 생명평화행진과 함께 한 여름휴가

구럼비야 보고싶다|나경채 75 76

지역에서 현장에서

대전편

“이제 끝인가 싶으면 연대의 손길 이어져요”|김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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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ON에서 PARTY하기|장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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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진보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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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좌파 이웃 좌파 ②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장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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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 통신 프랑스 좌파정치, 사회적 경제를 품다|엄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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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포럼 무상교통은 가능하다, 정말로|김상철

삶과 문화 102

불온한 영화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라고!|김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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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서재 저항의 터전, 래디컬 스페이스를 찾아서|양솔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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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꿈 한결이|민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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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읽기 가히, 펜은 칼보다 강하였더라|<미래에서 온 편지> 준비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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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다운 당원들의 유쾌한 청각생활을 지지하는 이 달의 음원 다운로딩 가이드|장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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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착한(?) 놈들 전성시대|김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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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칼럼 어느 멋진 날‘당연한 결혼식’ |이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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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니 칼럼“진짜로 산삼 캐봤냐구요?” |이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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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밥 머건?” |조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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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접으며

증세라는 이름의 정치신학|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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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사

미래에서 편지가 왔어요 오랜 기다림 끝에 기관지를 창간합니다. 노동당은 강령과 당헌을 새로 제정하고 당명도 결정했습 니다. 제대로 된 진보정치를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재창당의 결의입니다. 그리고, 이제‘노동당’ 의 이름으로 창간하는 기관지의 제호는‘미래에서 온 편지’ 입니다. 편지에는 안부편지, 연애편지, 위문편지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래에서 온 편지를 읽고 또 쓰겠다고 말합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는 미래세대가 우리세대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미래세 계가 행복한 세상이 되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벗어날 수 없는 책임을 전제로 합니다. 오 늘 새롭게 출발하는 노동당이 그 책임을 다한다면 미래세대는 우리에게 감사의 편지를 쓸 것이고, 반대로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미래세대는 우리에게 원망의 편지를 쓸 것입니다. 미래세대가 우리에게 쓴 편지를 우리가 지금 읽을 수 있다면 이는 참으로 엄중하고도 무서운 메시지입니다. 지난 8일 상징적인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울산에서는 고압송천탑에 올라 불법파견철폐를 외치며 296일 동안 고공농성을 하던 두 명의 비정규노동자들이 성과없이 농성을 해제하고 내려왔 습니다. 비정규노동자들의 희망이 자본의 높은 벽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고 죽음같던 고통의 4계절을 까치집처럼 아득하게 매달려있던 농성장은 순식간에 철거되어 버렸습니다.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크레인으로, 철탑으로, 종탑으로 조명탑으로, 굴뚝으로, 다리난간 위로 기어오르고 있 습니다. 노동이 극단적으로 배제된 우리 사회의 노동자들의 절규입니다. 그날 울산석유화학공단이 있는 남구 고사동의 수은주는 40.0도를 기록했습니다. 울산기상대가 관 측을 시작한 이래 최고기록이었고, 남부지방 대부분이 체온을 웃도는 고온현상이 이어졌는데 양산 에서는 열사병으로 돌아가신 분까지 있었습니다. 그날 아침신문 1면은 지구온난화로 얼음이 반쯤 녹은 북극대륙을 헤매다가 굶어죽은 북극곰의 처참한 모습이 차지했습니다. 평등, 생태, 평화공화국 건설의 깃발로 새롭게 출발하는 노동당의 과제와 책임을 극명하게 보여주 는 이 시대 인간과 자연의 일그러진 자화상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강령은 이같은 인간과 자연의 공멸의 위기의 주범인 자본주의 체계를 극복하고 사회주의의 대전환을 위하여 탄생하였다고 선언 하고 있습니다. 노동당의 기관지‘미래에서 온 편지’ 는 당과 세상이 소통하고 현재와 미래가 소통하기 위하여 창간합니다. 이를 통하여 당의 정책과 사업이 세상으로 나아가고 노동자 민중들의 삶과 희 망이 당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노동당은 이를 씨줄과 날 줄로 엮어 희망의 편지로 배달하겠습니다.

미래에서 편지왔어요! 이용길 노동당 대표 4


구독자 모집 오늘 우리의 한 걸음이 길을 엽니다. 미래가 됩니다. 우리는 길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 사람과 자연이 공존 가능한 지구생태계, 차별과 소외 넘어 모두가 평등한 세상, …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밑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없는 길을 만들고, 스스로 길이 됩니다. 그래서 노동당의 꿈은 곧 <미래에서 온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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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엽 포토 에세이

흐르는 강물처럼

수년 전 진보신당 시절 가장 중점을 두었던 사업 중 하 나가 4대강 기록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 사업의 부당 성을 지적한 사람은 많았지만, 결국 강은 파괴되고 ‘보’ 라고 불리우는 거대 댐이 들어섰다. 몇 년이 채 흐 르지 않아 강은 썩고 세금은 강탈당했음이 하늘 아래 명명백백히 드러났다.‘결국 복원이냐? 생태의 자정을 기다릴 것이냐?’ 만이 남았다. 만물과 사회의 이치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은 물 이 모여 중력의 힘을 받아 흐르기 시작하면 실개천이 내가 되고 거대한 강이 된다. 물만 아니라 사람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이제 이름을 노동당으로 바꾼 나의 당 은 실개천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런 개천들이 모여들 어 내가 되고 미래에는 큰 강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편지를 받아보고 싶다.

사진 글 이상엽/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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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에세이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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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의 탄생 교황을 선출하는 것 같네요. 6차 투표 결과 169표를 득표한 노동당으로 당명이 확정되었음을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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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1일 서울 관악구청 대강당에서 열린 임시당대회 결과 진보신당의 새 이름‘노동당’ 이 탄생했다. 앞서 6월 23일 열렸던 정기당대회에서 당명을 결정하지 못하고 강령만 통과시킨 채 끝난 반쪽의 재창당이 비 로소 마무리되는 순간이다. 현장발의된‘사회민주당’ 을 포함하여 아홉 개의 당명 후보를 놓고 여섯 차례에 걸쳐 표결이 진행됐다. 투표 횟수만도 서른아홉 번에 달했다. 첫 투표에서 새 당명이 정해지지 않을 시 최소득표 후보를 제외하는 방식 으로 2/3 이상 찬성 당명이 나올 때까지 재투표가 진행됐다. 혹자는 이날 당명 결정방식을 두고 우스개삼아‘문 잠그고 개 풀어’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덕우 의장의 표현대로‘교황 추대 방식’ 이라 바꾸 어 말해도 무리가 없겠다. 당원과 대의원들은 지지하는 당명을 발의하 고, 영상부터 소품까지 꼼꼼히 준비하고, 체감온도 30도의 더위 속에서 진행된 서른아홉 번의 투표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날 당원과 대 의원들이 보여준 열정은 그 자체로 가장 사랑받고 가장 고귀한 교황을 추대하는 마음과 닮았다.

이제 우리의 주어는 노동당이다. 주어에 걸맞는 문장을 어떻게 채우 고 지켜나갈지 지난한 과제가 우리 앞에 있다. 마냥 발걸음이 가벼 웁기도 어려운 2013년의 한국사회에서, 노동당의 앞날을 축복하며 네 사람의 당원이 편지를 보내왔다.‘이런 노동당’ 을 말하는 4인4색 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사진 : 박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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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의 탄생

노동당에 바란다

노동당의 길, 그 위에 청소년도 함께 하기를 정재환_서울 관악구당원협의회

독일 분데스탁(연방의회)의 연단으로 한 여성이 천천히 나아간다. 적당히 가벼우면서도 중후한 발 걸음으로 연단 앞에 선 그녀는 빼곡하게 채워진 의석들을 천천히 훑어본다. 이윽고 그녀는 차분하게 말문을 연다. 그녀의 확신에 찬 목소리는 회의장을 가득 채웠고, 그녀는 거침없이 정책에 대한 자신 의 생각을 설명해간다. 그녀가 발언을 마치자 회의장 곳곳에서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의 이름 앞엔 언제나 빼놓을 수 없는 수식어가 붙는다.“19세의 최연소 연방의원”2002년에 열 린 제15대 연방하원 선거에서 안나 뤼어만은 19세의 나이로 녹색당의 비례대표 의원에 당선되었다. 독일의 안나 뤼어만, 그리고 한국 청소년들의 현실 안나 뤼어만이 기성정치인 못지않은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청소 년의 정치참여에 긍정적인 독일의 태도가 있다. 그녀는 10살에 독일 녹색당에 가입하여, 헤센주 녹 색당의 청소년 대변인 등 당직을 맡으며 8~9년 동안 정치활동을 해온‘경력자’ 였다. 19살이라는 젊 은 나이에 약 10년 동안 정치활동을 해올 수 있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청소년들의 정치활동을 특이 한 것으로 보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녀는 고등학교 재학시절, 정치 과목을 전공하며‘유럽 연합’ 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형성할 수 있었고 당선 이후, 독일 연방의회 내의 유럽연합의 전문가로 손꼽히며 그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청소년의 정치활동을 독려하고 정치교육이 자연스러운 독일 사 회의 분위기가 안나 뤼어만이 성장할 수 있었던 기반인 셈이다. 안나 뤼어만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독일의 풍경은 한국에서는 낯설기만 하다. 청소년의 사회참 여를‘선동’ 으로 낙인찍고, 정치교육은 쉬쉬한 채 입시경쟁교육의 과열을 조장함으로써‘한국판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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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뤼어만’ 을 흉내조차 내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한국이‘청소년이라면 정치참여에서 멀어 지는 것’ 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에 휩싸인 사이, 안나 뤼어만은 재선까지 성공하여 또 다 시 연방의회의 연단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성숙’ 한 청소년은 통치의 대상? 독일과 한국의 대비되는 풍경의 결정적 원인은 바로 청소년과 정치를 바라보는 인식에 있다. 청소 년에게‘미성숙’ 이라는 굴레를 씌우고 청소년의 정치적 행위를 위험하거나 무책임한 것으로 단정 짓 는 것이다. 또 정치를‘나쁜 것’ 이라 정의하면서, 청소년의 순수성을 해치는 매개로 단정짓는다. 두 가지 모두 결과적으로 청소년들의 정치에 대한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자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정치는 나쁜 것이니까 청소년으로부터 격리’혹은‘청소년은 미성숙하니까 정치로부터 격리’ 하자 는 셈이다. 각각 인식의 논리적 결함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정치로부터 청소년을 격리시키려는 결론이 청 소년을 통치의 대상만으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일방통행적인 정책수립과 권위적인 집행으로 청소년 정책들을 수립·시행하게 되고, 당사자들에게 정책에 대한 동의 이전에 맹목적으로 수용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이는 정책 자체의 성공성과도 연결되어있다. 셧다운제 정책처럼 청소년 과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청소년의 삶이 정책에 반영되지 않게 되고, 따라서 당사자 들의 현실과도 맞지 않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에도 어려운 채 정책이 효과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지금 여기의 동반자다 내가 바라는 노동당의 모습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기존의 사회가 청소년의 정치참여를 억압하 고‘미성숙한 미래세대’ 로 바라보고 있을 때 노동당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그들과는 달리 청소년 을 현재의 동반자로 바라보아야한다. 열악하다 못해 암담한 한국의 청소년 정치참여 현실에서 우리 당은‘청소년 정치참여 보장의 깃발’ 을 더욱 확실하게 들어야한다. 구체적 실천으로‘선거권·피선거권 연령 하향 조정’ 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선거권 연령은 세계적인 추세에 비추어 과도하게 높으며, 피선거권 연령은 근거가 미약하다. 국가인권위원 회의 자료에 따르면 세계의 92.7%가 18세 이하의 선거권 연령을 채택하고 있으며 OECD국가 중 한 국만 유일하게 19세로 가장 높은 선거권 연령을 채택했다. 세계적 추세 외에도 50년 동안 1살 낮춰진 선거권 연령이 지금 사회 현실을 제대로 반영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노동자와 소수자들이 포함된 정치야말로 진정으로 민중에 의한 민주정치이고, 진보정치의 기초 아닐까. 우리당의 눈앞에 무엇이 놓일지 아직은 잘 모르지���, 우리당이 가는 그 길에 청소년도 함께 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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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의 탄생

노동당에 바란다

정규직 노동자가‘노동당’ 을 맞이하는 자세

김용화_울산시당 부위원장,

금속노조 기아차지부 판매지회 교육위원

작년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울산학습원에서 진행강사를 하면서 알게 된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어느 활동가. 그는 뒤풀이에서 소개팅 자리에서 비정규직이라는 말에 거절당한 아픈 경험을 얘기했다. ‘차팔이’ 가 아닌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1995년 겨울 스물 일곱에 자동차영업을 시작했다. 마흔 다섯까지 할 줄 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결혼하는 수단으로만 생각했다. 양가에도 기아자동차에 입사했다고만 했지 업무가‘판매’ 라는 것은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지금의 비정규직과 마찬가지로 당시 자동차 판 매노동자는 사회적인 눈높이로는 미래를 얘기할 직장이 아니었다. 실제로 서른다섯이 넘게 다니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다. 일터는 곧 전쟁터였다. 우리의 운명은 차 잘 팔아서 관리자로 영전하든지 아 니면 목돈 챙겨 이 바닥을 떠나든지 그렇지 않으면 2년 내에 도태되어 다른 길을 찾아나서는 것 외엔 없었다. 우리는‘차팔이’ 가 아닌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청춘을 내던지며 싸웠다. 이마 에 새긴‘자영업’ 이라는 낙인과‘성공’ 이라는 허울을 걷어내고‘노동’ 을 아로새겼다. 많은 동지들이 해고와 복직을 반복했다. 그리고 새천년이 되고 몇 년이 지나서야 인간으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판매현장에서 정년을 얘기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노동권을 얘기할 자유를 일상에서 가지 게 되었다. 노동 내에 분절이 생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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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자본은 두 개의 전선을 펼쳤다. 이른바 플랜B를 진행시키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잘 알 지 못했고, 늦게 알았지만 전투력에 여력이 없음을 핑계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자본은 직영 영업 점이 아닌 위탁 판매 대리점을 무분별하게 확장시켰고, 조직노동은 침묵했다. 그 사이 자본은 그 곳 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다시 노동이 아닌‘자영업’ 이라는 낙인과‘성공’ 의 허울 속으로 가두어 버렸 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우리는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지금 그들은 우리 조합원들에게 경쟁자로, 우리 고용과 생존을 위협하는 최대 변수로 둔갑하고 말 았다, 동지가 아닌. 어느 순간 노동이 계륵이 되었다. 우리 당의 당명개정에 있어서도 노동은 조조의 눈에 비친 닭 갈비뼈와 똑같았다. 노동은 계륵이 아니다. 노동은 징검다리다. 어린 시절 물이 불어난 개울을 건너지 못해 학교에 가 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형들은 큰 돌을 들고 와서 징검다리를 놓았고 우리는 협동하여 손을 잡고 끌어주며 두려움을 안겨 준 개울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단일한 노동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 노동 내에 분절이 생겼다. 그러나‘노동’ 의 문제가 우리가 발딛고 사는 이 사회의 뿌리라고 한다면, 그 문제는 우회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되찾음과 배풂의 노동으로 노동은 통일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미조직 비정규 노동은 빼앗긴 노동권을 되찾아 와야 하고, 조직 노동은 자신의 단체 협약을 산업 전반으로 그 효력을 확장하는 베풂으로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야 할 때다. 노동은 처음부터‘없음’ 이 아니라‘가짐’ 이었다 ‘노동’ 이라는 말이 이제는‘가졌다’ 는 멸시의 뜻으로 사용되는 오늘. 이웃을 돌아보지 못한 잘못 에 대해 무거운 성찰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노동은 애초‘없음’ 이 아닌‘가짐’ 이다. 원 래 우리가 만들었으나 빼앗긴 우리 것을 되찾으려는 열망. 그것이 바로 노동이고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우리의 제1과제이다.‘노동당’ 이 반갑고 벅찬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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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의 탄생

노동당에 바란다

중년의 사랑

김재호_전북 장수당원협의회

나는 한상미 씨의 남편이다. 상미씨는 마음이 선하고 정직하며 꾸준한 사람이다. 반듯하고 원칙적 이며, 뒤끝 없는 시크함을 가졌다. 상미 씨 앞에서 나는 항상 죄인이다. 당협활동, 도당, 농업위, 농민 회, 영농조합, 게다가 늦어지고 있는 농민의집 일까지 하다보면 농사일은 밀리기 일쑤다. 아이들 밥 은 대충 챙기게 되며, 건조대에 말린 빨래조차 옷장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쌓이게 된다. 직장생활로 바쁜 상미 씨는 남편에게 참았던 한마디를 내뱉는다.“난, 당신이 필요해서 함께 사는 거야........”많 은 의미를 함축한 말이다. 나는 침묵 모드.‘……’중년이 되어본 사람은 안다. 콩깍지 씌인 사랑은 유효기간이 얼마나 될까. 잠깐동안 민주노동당을 사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진 보신당이 창당했고, 나에겐 그 당이 필요했다. 지금은 노동당으로 바뀐 당, 난 지금도 그 당이 필요하 다. 가슴 떨리게 다가오는 당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사랑한다는 얘기는 예전처럼 못하겠다. 부족하 지만 함께 채워나갈 당이 나에겐 필요하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제대로 된 당이 필요하다는 데 일면 동의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당을 만드는 게 혁명보다 쉬울까? 나는 그게 더 어려운 거 같다. 진보정당 하는 사람들, 참 많이 부족한 사람들이 다. 부족하고 기댈 데가 없으니 진보정당 하는 거 아닌가. 부족하고 못난 사람들이 만나서 부대끼고, 싸우며, 미워하고, 정들고, 함께 꾸려가는 거 아닌가. 난, 그게 진보정당이라고 생각한다. 귀농을 한 뒤로, 화려한 이야기 펼쳐내는 근본주의자들을 만나기는 쉬워도, 제대로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더라.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난, 그들이 필요하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 모두가 운동의 주체다. 녹색사회노동당, 노동당, 좌파당, 무지개사회당을 제안했던 이 들, 50여개의 당명을 제안했던 그룹과 당원들 모두가 노동당의 주체다. 노동당의 그림은 함께 그려가는 거다. 당대회 참가해서 보니, 앞으로 싸울 일도 많지만 그래도, 함 께 좋은 그림 만들어 볼 수도 있겠다 싶다. 노동당이 한발 더 전진하느냐, 후퇴하느냐는 온전히 구성 원 모두의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신뢰를 만들어 함께 손잡고 행복하게 당활동 했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서로 노력하자. 그리고 서로에게 좀 더 따스하자. “난, 당신이 필요해서 함께 사는 거야…” “나도, 당신이 필요해…”우리에게 사랑한다는 말까지는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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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의 탄생

노동당에 바란다

거대담론 넘어서는 평화정당 되기를 김수경_여성위원회 지난 당대회에서 나는 평화노동당을 지지했다. 예전에 진보신당이 추구하는 4대 가치는 평등·평 화·생태·연대였건만 유독‘평화’ 의 가치는 당내에서 제대로 된 주장과 실천으로 제기된 적이 없다. 그동안 평화 관련 의제는 거대담론으로만 제기되곤 했다. 전쟁반대, 핵반대, 세계인권평화... 그러 나 우리에겐 이보다 더욱 미시적으로 일상을 강제하는 폭력성에 대항하는 감수성이 필요하다. 당 대 회 즈음. 태안군에서 해병대캠프에 참가 했던 고등학생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상명하 복’ 과‘불패의 정신무장’ 을 강요하며 파도 속으로 아이들을 던져 버렸다. 해병대캠프, 국토기행, 극 기훈련캠프… 청소년들이 성장기에 종종 체험하는 군사주의 교육과정이다. 그렇지만 어떤 정치·사 회 단체도 군사주의에서 시작된 왜곡된 교육과정을 지적하지 않고 이번 사건을 단순한 안전사고로 규정해 버린 듯하다. 우리당의 정치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노동당에서는 노동자들이 누려야 할 노동권, 시민으로서의 권리, 평화로운 노동현장과 지역사회 공동체를 이룰 권리가 함께 토론장에 등장하기를 바란다. 동시에, 노동현장과 학교, 가정, 지역사회 의 공동체와 문화 등에서 일어나는 온갖 폭력과 인권유린에 맞서야 하며, 강정에서 밀양까지, 군사기 지와 원전을 막아내는 운동을 전당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들의 상상력과 감수성이 넘치며 산 만하게 춤을 추듯 어울리는 정당이 되는 것, 정당 스스로가 재생산의 교육기관이 되어 당원 하나하나 가 가족, 동료, 이웃들에게 익숙하고 친근하며 믿음직한 주체들이 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내가 노동당원으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캠프가 아니라 사람을 살 리는 캠프다. 질풍노도의 사춘기에 입문했거나 이미 진행 중인 아이들과 함께, 우리에게 평화란 무엇 인지, 노동자에게 평화란 무엇인지 몸으로 겪어보는 정치캠프. 그렇게 당이 스스로 재생산구조를 만 들 때 어머니와 딸이 함께‘노동당의 당원’ 이 되는 날이 앞당겨질지도 모른다. 영국의 Greenham Common 지역 여성들로부터 시작됐던 반전평화운동을 나도 내 딸과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정당. 그 당의 이름이 평화노동당이건 노동당이건 상관없다. 지인들은 당명이 바뀌어서 좋다고 한다. 어디에서건 내가 바라는 정치운동이 이루어지기를. 앞으로 내가 사랑할 이름은‘노동 당’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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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의 탄생

세계의 노동당 진보신당이 노동당으로 다시 태어난다. 세계 곳곳에 이름은 같아도 그 활동양상은 제각각인 여 러 노동당들이 존재한다. 로고도 천차만별. 다른 나라 다른 노동당들을 둘러보자. 의외로 무작정 시뻘겋게만 만들지도 않은 여러 문양의 로고도 눈여겨 살피자. 우리의 깃발은 앞으로 어떤 모습 이면 좋을지 마음 속으로 그려보면서. <미래에서 온 편지>

영국 노동당 1900년에 창당. 모태는 노동 조합회의(TUC)의 노동자대표위원회(우리의 민주노 총 정치위원회 격). 무상공공의료체계인 국민보건서 비스(NHS)를 도입하는 등 역사적 성과를 남겼으나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에 경도된‘제3의 길’노 선을 걸어서 비난도 많이 받았다. 현재는 야당이며 에드 밀리밴드 대표를 중심으로‘제3의 길’ 을 대체 할 새 노선을 모색 중. 당원은 18만 명.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영국 노동당처럼 노동조합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1901년 출범. 그래서 현재 3 만 5천 명의 개별 입당 당원 외에 노동조합 조합원 들이 집단 입당해 있다. 1980년대에 영국 노동당보 다도 먼저‘제3의 길’입장을 추구한 전력이 있지만, 2007년 총선으로 집권한 케빈 러드의 노동당 정부 는 전통 케인스주의 정책으로 경제 위기에 대응했다. 현재도 집권당이며 총선을 몇 달 앞두고 있다.

스위스 노동당 1944년에 스위스 공산당이 재창당한 당. 프랑스 좌파전선, 독일 좌파당, 그리스 급 진좌파연합 등이 속한 유럽의회 내의‘유럽연합좌 파-북유럽녹색좌파’그룹에 가입해 있다. 2007년 전까지 연방의회 내에 의석이 있었으나 현재는 원외 정당.

브라질 노동자당 군부독재 치하의 브라질 사회를 뒤흔들었 던 노동자 총파업의 열기 속에 1980년에 창당. 총파업 지도자인 룰라와 그 동지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좌파 정파들이 결합해 당을 만들었다. 2002 년 룰라의 대선 승리로 집권해 지금까지 10년째 여 당. 몇 달 전 시작된 대중교통 인상 및 월드컵 개최 반대 시위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놓고 현재 시험에 처해 있다. 당원은 140만 명(브라질 인구는 1억 9천 만 명).

노르웨이 노동당 1887년에 창당. 1919년-1923년에 공산 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에 가입한 적 이 있지만, 이후 줄곧 사회민주주의 노 선을 걸어왔다. 현재 이 당 소속의 옌스 스톨렌베르 그 총리가 사회주의좌파당, 중도당과 함께‘적색-녹 색 연립정부’ 를 이끌고 있다. 당원은 5만 5천 명(노 르웨이 인구는 500만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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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노동당 뉴질랜드노동당

싱가포르 노동자당

이외에도 아일랜드 노동당, 네덜란드 노동당, 뉴질랜 드 노동당, 크로아티아 노동당, 이스라엘 노동당, 홍 콩 노동당, 싱가포르 노동자당 등이 있다.


특집1 편지(便紙), 이제는 헤어져야 할 당신에게

작별의 편지를 씁니다. 떨리는 손으로 한 자 한 자 꼭꼭 눌러 씁니다. 2013년 왜곡된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얼굴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편지를 씁니다. 사람 귀한 줄 모르는 사장님, 핵무기 들고 어깃장 놓는 꼬마 군주, 신(神)을 팔아 혹세무민하는 목사님, … 오늘을 허물어뜨리는 사람들과 작별해야 내일로 가는 출구가 열립니다. 이제는 당신들과 헤어지고 싶습니다.


특집 1 / 편지(便紙), 이제는 헤어져야 할 당신에게

‘이건희’ 에게 ‘편지’ 를 쓰기 위해 그에게 삼성에 맞선 모든 투쟁들의 정당성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요. 혹은 삼성 자본의 폭압적인 무노조 경영과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그간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을 죽여왔는지 설명해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홍명교_사회진보연대 조직국장, 노동당 종로구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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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라는 자본가에게‘편지’ 를 쓰기 위해 ‘편지’ 는 우정의 양식이라고 합니다. 폴 세잔과 에밀 졸라는 30여 년간 서신을 교환하며 그들의 우정을 이어 나갔고, 발터 벤야민은 1933년부터 지속된 십수년간의 망명기간 동안 오랜 친구인 숄렘 과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신들의 우애로운 토론을 이어 나갔습니다.“가을엔 편지를 하겠 어요 /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라는 어느 옛 유행가의 노랫말처럼 편지는 누구라도 대상 이 되어 교환할 수 있는 인류 마지막 교통의 창구일지도 모릅니다. 헌데 저는 지금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에게 어떤 편지를 쓰고자 합니다. 상대가 이건희라는 사실과 이것이‘편지’ 라는 것을 생각하니, 도 저히 양립할 수 없는 내용과 형식이 조 우하는 것 같아 그 생경함을 견딜 수가

저는 지금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에게 어떤 편지를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에게 일말

쓰고자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그들에게

의‘예의’ 를 갖추어 설득이라도 해야

일말의‘예의’ 를 갖추어 일종의 제언과 설득이라

하는 걸까요?

도 해야 하는 걸까요?

삼성 자본의 폭압적이고 잔인무도한 경영지침은 오늘날 이 땅의 노동자에게 너무나도 큰 시련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설사 한때‘대학생들이 가장 가고 싶은 기업 1위’ 가 삼성이 었고‘가장 존경하는 기업인 1위’ 가 이건희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부정할 수 없��� 사실입니다.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물론 그 진실을 세계에 폭로하고 마땅히 대면하고 싸워야 할 책무가 있습 니다. 저는 오늘 그 책임에 따라 이건희씨에게‘편지’ 를 쓰고자 합니다. 그러나 여기엔 일말의 우정 이나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출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그에게 어떤 부탁이나 청원도 하고 싶지 않습 니다. 그렇게‘말’ 을 꺼냈을 때 돌아오는 현실의 압도적 차이를 견뎌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할 수 있는 모든 공력을 다해, 우정의 양식으로서‘편지’ 가 아닌, 적대와 선전포고의 편지를 쓰고자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가 편지를 시작하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에게 삼성에 맞선 모든 투쟁들의 정당성을 일일이 설명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혹은 삼성 자본의 폭압적인 무노조 경영과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그간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을 죽여왔는지 설명해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는 모든 사실 관계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먼지 한 점 같은 우리들, 하나 둘씩 죽어나가는 노동자들을 거추장스러 운 존재인양 느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헌법이 보장한 권리를 철저하게 짓밟으면서까지 무소불 위의 권력을 휘둘러 올 수는 없기 때문이죠. 우리는 과학적인 분석과 현란한 수사를 곁들여 얼마든지 친절하게 안내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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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비참해지는 우리 운동의 맨얼굴을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삼성 자본에 맞서 싸울 준비가 얼마 나 되어있는지, 정말 그렇게 당당하게 선전포고를 던지고 전장에 나설 수 있는지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간 삼성 자본에 맞서 싸워온 당당한 전사들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길을 걷지 않을 때 홀로 서서 모든 것을 걸고 맞서 싸웠고 투쟁의 역사를 만들어왔습니다. 삼성전자 반도 체 공장에서 일했던 50여 명의 젊은 노동자들은 백혈병에 걸려 죽거나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삼성전 자의 반도체 납품업체 QTS에서 일하다가 유방암에 걸린 55년생 김○순 씨와 63년생 김○정 씨는 고유해성 화학물질을 사용함에도 제품의 보안을 위해 창문을 여는 것이 금지된 공 우리는 그간 삼성 자본에 맞서 싸워온 당당한 전사 들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길을 걷지 않을 때 홀로 모든 것을 걸고 투쟁의 역사를 만들어온 노동 자들이 있습니다.

정에서 무수한 야간근무와 휴일근무를 버티며 일했습니다. 최근 두 명의 노동자 가 과로로 사망한 삼성전자 납품업체 아 모텍 역시 12시간 맞교대와 상습적인 휴 일근무로 노동권은 무시되기 일쑤였습니 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기

마련. 노동자에 대한 삼성자본의 이런 참극은 비단 국내만의 일이 아닙니다. 이런 끔찍한 노동조건과 어마어마한 노동력의 양을 고수한 채 중국에서는 열 여섯도 되지 않은 어린이들을 인턴이라는 명목 으로 일을 시키고 있고, 인도네시아에서도 직업학교 학생들이 견습생 신분으로 생산현장에 투입되 고 있습니다.

끔찍한 현실 앞, 막강한 적과 빈약한 주체 이런 끔찍한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때때로 개별적으로, 때로는 인권운동단체나 세간 의 연대를 구하며 싸워왔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언론의 싸늘한 외면과 삼성 자 본의 모르쇠로 일관한 대응이었습니다. 빈약해지는 자신의 역량과 조건 속에서도 그때마다 사회운 동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것을 하려 노력해왔습니다. 바람 잘날 없이 고군분투 투쟁했고, 만화책 이나 영화까지 만들어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고,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은 수년에 걸쳐 잉 여의 신세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삼성 X파일을 공개했던 노회찬 전 의원은 의원직을 상실하기도 했 지요. 삼성 자본의 막강한 예산 투입으로 이뤄지는 각종 대중매체의 선전, 언론에 대한 통제 등이 큰 걸림돌이 되고 있긴 하지만, 삼성과 이건희 일가의 부도덕성과 잔인무도함은 사회적으로 점점 널리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 속에서도 어딘가 가장 주요한 위치에서 전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의구심 은 있었습니다. 삼성맨이었던 한 사무직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만들려다 사내에서 철저한 부당노동 행위에 시달렸던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삼성중공업 조선 현장에서는 민주노조 건설의 부푼 꿈이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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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초대 임원 선출 투표를 위해 투표소 앞에 줄을 선 조합원들(사진 : 참세상 김용욱)

산되었고, 삼성의‘무노조 경영 방침’ 이라는 것이 얼마나 초헌법적인 전략 속에서 이루어지는 무소 불위의 노무 관리 전략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삼성에서 직간접적으로 일하고 있는 이른바 삼성맨, 삼성 노동자 자신이 집단적이고 조직된 모습으로 투쟁의 대열에 나서는 것을 우리는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출범, 하늘이 내린 기회! 지금도 삼성의 하청공장에서, 하루 12시간이 넘게 일하며 청춘과 노동력을 바치고 있는 수많은 노 동자들의 충혈된 눈, 닳아가는 손가락, 구부정해진 허리를 생각하면 이따금 공식석상의 연단에 올라 가 마이크를 잡고 첨단 경영의 ABC를 이야기하는 이건희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저는 부러 그 분노를 잊거나 다스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분노가 온전히 삼성 노동자들 자신의 것 이 되어 집단적인 연대의 힘으로 피어오르길 바랍니다. 얼마 전‘삼성맨’ 이라 불리던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뭉쳐 조직된 노동자의 싸움을 시작했습니 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창립 총회가 열리던 그날의 풍경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 금껏 들었던 어떤 함성과 박수 소리보다 우렁차고 혼신을 다한 소리가 총회가 진행되던 4시간 내내 강당 안을 가득 채웠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연대했던 많은 활동가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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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가슴 벅차다. 이런 함성 정말 몇 년만에 들어보는지 모르겠다!”그만큼 노동자 운동의 침체와 패배감이 극심했기 때문이겠죠. 이번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금속노조에 집단으로 가입한 후 벌이고 있는 투쟁은 노동조합운 동에 만연한 이런 무기력감을 해소하고 삼성자본에 맞선 새로운 싸움의 장에 나설 수 있는 절호의 기 회입니다.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는 남한 노동자운동에‘하늘이 주신 기회’ 인지도 모릅니다. 자본에 맞선 모든 운동들 중 조직된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투쟁만큼 위력적인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 에 사회운동 전반은 이 투쟁에 대한 엄호와 연대에 함께 나서야 합니다. 그것은 누구의 기회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빛날 오늘이 지금, 여기에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광범위하게 조직되어 안착하는 것은 단지 개별 사업장의 문제를 뛰어넘습니다. 그것은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완벽하게 깨뜨린 첫 번째 사례가 될 것며, 나아가서 삼 성의 여러 사업장에서 노동조합 건설의 봇물을 터뜨릴 수 있는 촉발지점이 될 것 입니다. 또한 극심 한 재앙을 낳고 있는 삼성전자 공장과 하루 15시간 노동까지 자행되고 있는 2, 3차 하청공장 노동자 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을 것입니다. 만화책과 영화를 통해 현실을 알리는 공중전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투쟁의 주체이자 삼성 자본 성장의 일등공신인 노동자들이 잃어버린 자존감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움직임을 시작해야 합니다. 가련한 존재, 부도덕한 기업을 뛰쳐나갈 용기조차 없는 위 약한 존재로서의‘삼성맨’ 이 아닌, 자 신이 일해 온 일터에서 버티며 나름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투쟁에서 당장 빛나는 것

의 싸움을 지속해오고 있는 그/녀들

은 우리가 아니지만,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빛나

의 투쟁을 집단적인 것으로 묶어낼

는 나날로 기록될 오늘이 지금-여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운동’말입니다. 언제까지나 공중전만 할 순 없는 노릇입니다. 그 때문에 저는 우리가 이건희에게 선전포고의‘편지’ 를‘제

대로 쓰기 위해’직접적인 주체들을 조직하고 엄호하기 위한 일을 지금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 다. 솔직히 여전히 우리는 삼성 자본에 맞설 준비가 덜 되어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보다 잘 맞서기 위해선 진보정당도, 노동자운동도 자신의 주체적 역량을 끈끈하게 쌓아야 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아직 이건희씨에게‘선전포고’ 의 편지를 쓸 준비가 되어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재 삼성 자본에 맞선 위력적이고 대중적인 운동으로서의 소중한 경험을 치열하게 맞이하려면 지금 뭐 든 해야 합니다. 이번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건설과 투쟁은 삼성에게도 당황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얼마 전 일본에서 열렸던 삼성전자 최고경영진들의 회의에서 이 문제가 심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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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뤄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삼성의 무노조 시대가 종언을 고했음을, 착취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 쟁의 막이 올랐음을 선언하고,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 자고 제안하며, 이건희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를 쓰고자 합니다.

이건희씨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 이건희씨, 얼마 전 영국의 가디언지와 프랑스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지는 당신이 장악한 한국 사회가 얼마나 끔찍한 풍경을 그리고 있는지 생생하게 묘사한 바 있 습니다. 영예로운 기업인이 아닌 모국에게‘국제적 수치’ 를 안겨주고 있는 한낱 쓰레기 자본가에 불과한 당신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 삼성의 노동자들이 당 신 일가의 족벌적이며 봉건적인, 신자유주의적이며 경악스러운, 착취와 억압의 시 스템을 무너뜨리기 위한 본격적인 싸움의 대열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당신과 삼 성이 그간 우리 사회의 헌법과 상식을 무시하며 자행해온 무수한 범죄에 대한 대 가를 톡톡히 묻겠습니다. 당신이 좋아한다는 장난감 자동차들을 아무도 모르게 땅에 묻어두시기 바랍니다. 수 천 년을 선고해도 모자랄 무기징역의 형벌이 당신 과 당신의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특집1 편지(便紙), 이제는 헤어져야 할 당신에게 25


특집 1 / 편지(便紙), 이제는 헤어져야 할 당신에게

목사님, 예수 믿으세요! 감리교회 김홍도 목사님께 목사님은 돈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지만 실상 성경은 돈을 가장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목사님은 동성애가 죄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차별없는 사랑의 관계를 설파하셨습니다. 어 쩌면 제가 믿는 하나님과 목사님이 믿는 하나님은 전혀 다른 하나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효성_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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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워요. 김홍도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목사님께서 졸업한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재학중인 이효성이라 고 합니다. 목사님께서는 저를 잘 모르겠지만 저는 목사님을 너무도 잘 안답니다. 사실 목사님은 기 독교인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알 정도로 꽤 유명한 분이에요. 목사님 때문에 개신교 중 하나의 교파 인 감리교를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기도 했고요. 그래서 전 목사님이 정말… 부끄러워요. 당황하셨나요? 당황할 필요 없어요. 저는 목사님이 정말 진심으로 부끄러워요. 솔직히 지금은 분노의 감정마저 메말랐어요. 목사님은 제게, 그리고 사람들에 게 이미 목사가 아니에요. 목사님은 교회 크기만 1등이 아니라 불륜, 교회 돈 유용, 사기, 교회세습, 각종망언 등 부끄러운 목사에서도 랭킹 1위를 달리고 있거든요. 이 후배가 몇 가지만 적어볼게요. 왜 목사님이 결코 목사일 수 없는지.

다원주의 신학자는 출교시키고, 불륜에 공금횡령까지 1992년 5월 7일, 목사님은 다원주의적 신학을 문제 삼으면서 감리교신학대학교 변선환 학장님과 홍정수 교수님을 종교 재판하여 출교처분했죠. 이 두 분의 관심은 다양한 종교가 어떻게 하면 보다 평화적으로 대화하며 상생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목사님은 패권적이고 호전적인 근본주의 신학을 끌고 와서 이 분들을 파면시키고 감리교회 교단권력을 폭력적인 힘으로 점거했어요. 1999년, 목사님은 교회 신도 배OO씨와 불륜관계에 있기도 했죠. 하지만 그 일을 무마하기 위해 교회돈 1억을 빼돌려 고소사건에 대한 합의금으로 썼죠. 불륜사건에 대한 위증으로 2000년 6월에는 벌금형을 받기도 했고요. 물론 빼돌린 돈은 1억이 아니라 수십억이라는 것, 그리고 그 돈들을 개인적 으로 관리하면서 합의금뿐만 아니라 아들 교회의 개척자금으로도 사용했지요. 교회의 허가 없이 남 양주 양지리 땅 1500평을 16억원에 아들 이름으로 계약했지요. 부인 명의로 강원도 인제에 2층별장 을 짓고, 사위 학비 대준 것도 다 교회 돈으로 한 거라면서요. 1996년 감독선거에서는 역시 교회돈으 로 수억 원의 금권선거를 치루셨고요.1) 목사님께서 그러셨죠. 굶어죽을 상황에서도 십일조는 꼭 해야 한다고요. 그땐 그 말이 말인지 똥 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어이가 없었는데 이제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네요. 목사님 주머 니에 돈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 그러신 거 맞죠?‘성도들은 굶어죽기를 각오하고 나 김홍도의 주머니 를 두둑하게 채워야 하느니라.’

쓰나미도 허리케인도 하나님의 심판? … 오, 주여! 1) 감리교회에서 감독이란, 각 시도를 대표하는 목사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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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쓰고 싶은데 목사님 이름으로 잠깐만 인터넷을 훑어봐도 워낙 사건사고가 많아서 간단히 추리기가 힘드네요. 이번엔 목사님이 한 망언들을 정말 간략히 훑어볼께요. 2005년 1월 2일 새해 첫 주일 예배에서 목사님은 당시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난 쓰나미로 많은 사 람들이 죽은 사건을 두고 교회를 안 다녀서 하나님이 내린 심판이라고 하셨죠. 같은 해 9월 설교시간 에는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일어난 카트리나 허리케인 참사가 동성애에 대한 심판이라고 했고요. 또 광우병 쇠고기 수입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에서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한해에 몇 천 몇 만인데 몇 십 년 후 한두 명 걸릴까 말까한 것 때문에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것이 옳���가라고 했고, 2010년 10월에는 박원순 시장을 겨냥하여, 사탄마귀에 속하는 사람이 서울시장이 되면 안 된다고 하셨지요. 뿐만 아닙니다. 2013년 2월 20일자 국민일보에서 목사님은 박근혜 대통령을 두고 하나님이 세운 사람이라고 하면서 칭송한 뒤에, 대한민국은 종북·반미·좌파들과의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데 이것 은 사탄과 싸우는 영적 전쟁라고 하면서 여당에 반대하는 이들을 사탄으로 매도하였지요. 또 앞선 망 언에서 보듯 폭력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요. 특히 기독교계의 차별금지법 반대운동은 악독한 종교권력이 어떻게 사회정의를 후퇴시키고 사회 적 약자를 탄압하는지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새누리당을 무조건 비호하고, 친일세력을 옹호하며, 노동운동과 진보정치 운동을 사탄의 활동으로 규정하고 탄압하였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일수 록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는 거라고 하면서 신자유주의 경체제제, 자본주의 질서를 추종하고 독려 했지요. 뿐만 아니라 폐쇄적인 근본주의로 타종교를, 다른 가치를 탄압하고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정 당화하여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아들에서 동생까지 교회세습, 혼자 욕먹기 억울하시죠? 특히 목사님이 북한 세습정권을‘사탄’ 이라고 몰아붙일 때마다 저는 실소를 금치 못하게 됩니다. “목사도 사람인지라 후임으로 온 목사가 너무 잘하면 질투가 나는데 아들이나 사위가 하면 흐뭇한 마음이 들어 나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기억하시나요? 2012년 9월 조선일보에다 전면광고를 내어 교회비리의 온상인 세습을 옹호하셨던 것 말입니다. 얼마 전 제정된 감리교‘세습방지법’ 이 너무나 못마땅하지 않던가요. 목사님께서는 이미 2008년에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어서 안전하게 세습을 했는데, 동생 김국도 목사는 그게 아니었어요. 동생이 세습 못할까봐 걱정되어 이런 말을 한 게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동생 걱정은 붙들어 매셔도 좋을 것 같아요. 아들에게 바로 교회를 넘기지 않고 그 사이에 어떤 목사를 한 달 동안 끼워넣었다가 빼는 소위‘징검다리 편법세습’ 이라는 놀라운 응용력을 보여 주었으니까요. 아직까지 교단에서는 이에 대해 해석 중이지만 뭐, 목사님과 목사님의 형제들이 언제 그런 것에 연연했던가요?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쭉 힘과 돈을 믿고 밀어붙이겠죠. 축하드려 요. 이로써 감리교회의 삼총사인 첫째형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 본인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 그리고 동생 임마누엘교회 김국도 목사가 나란히‘세습의 그랜드슬램’ 을 달성했군요.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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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억울한가요? 맞아요. 목사님은 억울해요. 왜냐하면 목사님만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한국교회 수많은 목사들이 그러하죠. 일부의 목사가 아닌 대부분의 목사들이요. 목사님 같은 사람이 많으니 덜 외로워서 좋으신가요? 목사님 같은 분들 때문에 상처받고 떠나가는 교인들이 너무나도 많 답니다. 교인들만 상처받나요? 목사님같이 돈과 권력을 섬기는 목사들 때문에 한국사회 수많은 사람 들이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소위 목사라 하는 것들이 잘못된 종교권력으로 사회를 망치는 일에 앞장 서고 있다는 거죠.

저기… 제가 믿는 하나님과 목사님의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일까요? 목사님, 목사님은 신앙인인가요? 예수님은 당시의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먹고 함께 살면서 이들 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도모했던 혁명가였습니다. 예수님은 억압당하고 있던 당시의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다가가 내가 대신 구원해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할 것 이라고 말하면서 구원의 주체를 그들 자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는 어떻게 참된 나로서 살아 갈 것인가에 대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자, 즉 사랑의 혁명을 일으키자고 말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혁명흐름에서 폭력적인 로마사회는 분명히 맞서 싸워 극복해야

동생은 재벌세습 뺨치는‘징검다리 편법세습’ …

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수많은 팔

이로써 감리교회의 삼총사가 나란히‘세습의 그랜

레스타인 민중들은 사랑의 힘이 곧 정

드슬램’ 을 달성했군요. 축하드립니다.

의의 힘임을 알고 이 땅을 사랑과 정의 가 넘치는 땅으로 만들기 위해 움직이 기 시작했어요. 이를 두려워한 로마제국은 흉악한 정치범들에게 내리는 최고의 형인 십자가 사형을 예수에게 내렸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예수의 육체를 죽였을지언정 평화의 하나님나라를 꿈꾸는 예 수의 의지, 정신은 죽일 수 없었습니다. 이 정신을‘부활신앙(예수의 사랑과 정의는 죽지않고 우리를 통해 영원히 산다)’ 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사랑과 정의가 불의와 억압을 이 땅에서 반드시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이러한 가치를 따라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신앙인은 많이 있습니다. 저도 그중에 하나고 요. 하지만 목사님의 행보는 예수님의 길과 정반대인 것 같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목사를 사칭하고 다니니 참으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은 돈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지만 실상 성 경은 돈을 가장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목사님은 동성애가 죄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차별없는 사랑의 관계를 설파하셨습니다. 어쩌면 제가 믿는 하나님과 목사님이 믿는 하나님은 전혀 다른 하나님인지 도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소송이 끊이지 않아 어떡하나요? 2013년 6월, 사문서 위조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조사 중이죠? 더운데 고생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일이 잘 해결되어서 꼭 죄값을 치르길 바랍니다.

특집1 편지(便紙), 이제는 헤어져야 할 당신에게 29


특집 1 / 편지(便紙), 이제는 헤어져야 할 당신에게

진짜 사장이 고용해!

진짜 사장, 정몽구 회장에게 노동당원이 드리는 편지

‘유기적’ 으로 노동자에게 일 시킨 사람이 진짜 사장이고, 현행법상 불법 파견을 사용한 사장에게 직접 고용 책임이 있으니까, 진짜 사장님이신 정몽구 회장님이 현대자동차 사 내하청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홍원표_노동당 정책위원회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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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됐습니다 296일이라 합니다. 최병승, 천의봉 조합원이 허공에 매달려 대법원 판결대로 사내하청 노동자들 의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던 날이 296일이라 합니다. 하루 평균 4천대를 만든다는 현대자동차는 그동 안 120만대의 자동차를 만들고, 대당 2천만원씩만 잡아도 얼추 24조원을 벌었습니다. 두 조합원이 목숨을 걸고 법원판결 이행을 요구하는 동안, 모르쇠로 일관하신 회장님은 참 많은 돈을 버셨습니다. 10년이나 됐습니다. 노동부가 현대자동차 모든 사내하청(127개 업체)과 모든 공정(9,234개)이 불 법파견이라고 판정했던 것이 10년 전 일입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현대자동차의 수익이 수십조 쌓여가는 동안에도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은 쳇바퀴를 돌아, 아직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3년이 지났습니다. 대법원은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이 사실상 불법파견이니 해당 노동자를 정규직 으로 전환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법원 판결 이후 3년 동안 현대자동차가 한 일이라는 건 하청노동 자를‘촉탁계약직’ 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비정규직으로 만들거나 일부만 신규 채용하는‘눈 가리고 아웅’식의 꼼수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우리나라 대표 자동차 회사인데, 살짝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 었습니다.

자동차회사 회장님의‘유기적인’자동차 인재론 ‘자동차는 2만 개의 부품이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이 부품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만 자동차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구 하나라도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고장난 차처럼 경영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뭐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디 신문에선가, 책인 가에서는 자동차 회사 회장님이라서 그런지 이걸‘자동차 인재론’ 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하청과 원청의 관계는 도급관계입니다. 도급이란 게 쉽게 이야기하면, 일감을 받아와서 납품을 해 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걸 말합니다. 원 청업체는 납품만 받으면 됐지, 그 과정 에 대해서는 관여할 바 아닙니다. 당연

원·하청 노동자 가리지 않고‘유기적으로’일을 시

히 하청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원

키셨지요. 그래서 법원도‘유기적으로’불법파견한

청회사가 지휘감독하거나 이래라 저래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책임도‘유기적으로’

라 할 수 없습니다.

져야 합니다.

그런데 자동차 만드는 사내하청의 경우 원청 노동자와 하청 노동자가 컨 베이어벨트를 맞대고 서서 같은 일을 하기 때문에 당연히 원청의 지휘감독에 따라 일할 수밖에 없습 니다. 회장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동차 만드는 노동자들이‘유기적으로 움직여야’자동차가 제대 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니까, 현대자동차가 원·하청 노동자 가리지 않고‘유기적으로’일을 시킨 겁 니다. 여기까지는 법원의 생각이 회장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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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유기적’ 으로 일을 시키면, 하청회사는 전혀 독립적이지 않고, 따라서 도급관계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현대자동차가 직접 고용한 것도 아닙니다. 원청회사가 직접 고용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급도 아니면 이는 사실 하청업체가 노동자를 파견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현행 파견법은 제조업 파견을 불법으로 봅니다. 그래서 법원은 현대자동차가‘유기적’ 으로 불법 파 견을 사용한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책임도‘유기적’ 으로 져야 합니다. ‘세계 5위 자동차 그룹’ 인 현대자동차의 위상에 걸맞는 유기적 책임에 대해 고민이 깊으셨을 겁 니다. 고민은 깊고 생각할 건 많은데, 희망버스니 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니 주위가 어수선해 일단 철조망 치고 용역들 앞세워 사색의 공간을 만드셨을 거라 지레 짐작해 봅니다. 철조망과 용역으 로 둘러 쌓인 회장님의‘유기적’사색이 조금은 외롭고, 안타까워 보였습니다. 아는 게 미천하긴 하 지만, 그래도 노동당 당원이라고 몇 마디 주워들은 풍월이 있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는 게 편 지를 쓰게 된 주된 이유입니다.

노동권부터‘글로벌 스탠다드’맞추셔야죠 국제노동기구(ILO)라는 곳이 있습니다. 흔히들 UN이라고 부르는 국제연합에 소속된 전문기구 로, 노동 문제를 다룹니다. 회원국의 정부와 고용주, 노동자 대표가 모두 참여하는 기구인데다 1969 년에는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하니 믿을만한 곳이라 생각됩니다. ILO에서는 현대자동차의 불법파 견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면‘진정한 사용자가 누구인지, 노동자에게 주어진 권리가 무엇인지, 이를 보장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판명하는 것이 주요한 관건’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유기적’ 으로 노동자에게 일 시킨 사람이 진짜 사장이고, 현행법상 불법 파견을 사용한 사장에게 직접 고용 책임이 있으니까, 진짜 사장님이신 정몽구 회장님이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해 야 한다는 말입니다. 국제 ‘노동’ 기구라 노동자한테 유리 국제노동기구(ILO)도, 국제표준화기구(ISO)도‘유기

한 이야기만 한다고 생각하실지도 모

적으로 ‘ 노동자에게 일 시킨 사람이 진짜 사장이라고

르겠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도 한번

말합니다. ’ 바지사장 ‘ 내세워 눈가리고 아웅하지 말

찾아 봤습니다. 국제표준화기구라는

라고 합니다.

곳이 있는데, 이곳은 ILO와 달리 비정 부 국제기구입니다. 주로 하는 일은 기업하는 사람들이 나라마다 다른 기

준 때문에 혼란스러울까봐 산업이나 통상의 규격을 조정하고 통일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각 나라 마다 다른 날짜와 시간 표기, 무게나 부피 재는 방법, 컴퓨터 문자코드 같은 걸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 해서 수출입하는 데 혼돈을 줄여주는 곳입니다. 이 국제표준화기구(ISO)에서 얼마전‘ISO 26000’ 이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이번에 만들어진 ISO 26000은 기업의‘사회적 책임’ 에 관한 국제적 표준 권고안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하자면, 이 정도는 해야‘글로벌 스탠다드’ 라 할 수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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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 이중 간접고용과 관련된 내용을 보면,‘법적으로 고용관계로 인정되는 관계를 위장하여 고용주에 게 법으로 부과되는 의무를 회피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조직의 파트너, 공급업체 또는 하청업체의 불공정, 착취 또는 악용되는 노동관행으로 혜택을 보아서는 안된다’ 고 명시하고 있습니다.‘바지 사 장’내세워서 눈 가리고 아웅 하지 말고, 하청업체 노동자들 괴롭혀서 돈 버는 치사한 짓도 하지 말라 는 것 같습니다. 아울러 철조망으로 만든 사색의 공간에 너무 오래 머무르시면‘법으로 부과되는 의 무를 회피’ 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뿌리뻗고 버티면 어려울 것 없다?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라는 말을 좋아하신다 들었습니다. 찾아보니‘부지런하면 세상 에 어려울 것이 없다’ 는 뜻이라고 나옵니다. 70년대 중반 한국 최초의 자체 자동차 모델인‘포니’ 로 시작해 35년 만에 세계 5위 자동차 그룹으로 성장한 현대자동차의 뚝심을 보여주는 듯 하여 잘 어울 린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원래는 이 말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 꾀부리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 에서 한 말이고 안중근 의사도 좋아했 다 하니 노동당원 치고 심히 게으른 저 로서는 가슴에 새겨야 할 말인 것도 같

혹시나, 현대자동차 대법원 판결도‘일근천하무난사

습니다.

(一根天下無難事: 뿌리 뻗고 버티면 어려울 것 없다)’

그렇지만, 왠지‘하면 된다’ 의 유식 한 버전 같아 군생활이 힘들었던 저로

정신으로 모르쇠 하면 해결될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 닌지 심히 우려되기도 합니다.

서는 살짝 거부감이 들기도 합니다. 게 다가 이 말이 몇 년 전 비자금 문제로 구속됐다가, 사회공헌기금 출연 약속으로 풀려나왔던 일과 겹쳐지면서‘(돈으로) 밀어붙이면 된다’ 처럼 들리는 것도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래서 혹시나, 현대자동차 대법원 판결도‘일근천하무난사(一根天下無難事: 뿌리 뻗고 버티면 어려울 것 없다)’정신으로 모르쇠 하면 해결될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닌지 심히 우려되기도 합니다. 혹시 그런 생각이라면 서둘러 바꾸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최근에 삼성전자서비스에 노동조합이 생겼다는 소식 들으셨을 겁니다. 서비스업이라고 관심이 없으셨을 수도 있겠지만, 핵심은 제조업이냐 서비스업이냐가 아닙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조합 역시 간접고용/불법파견 문제가 핵심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케이블 방송 설치하는 C&M이나 티브 로드 노동조합 역시 마찬가집니다. 최병승, 천의봉 동지가 내려왔다고 해서 희망버스가 끝났다고 생 각하시면 큰일 나십니다. 그들 모두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에 합류하고 있고, 점점 더 커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서둘러 대법원의 판결대로 이행하고 사내하청 노동자들과 성실하게 교섭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일 겝니다.

특집1 편지(便紙), 이제는 헤어져야 할 당신에게 33


특집 1 / 편지(便紙), 이제는 헤어져야 할 당신에게

나의 노동당은 당신의 노동당과 다르다 북한의 청년 군주, 김정은에게 보내는 편지 당신이 지배하는 나라는 사상의 자유를 추구할 수 없습니다. 수령-당-대중의 이른바 전 일적 체계 속에서, 수령을 정점으로 아래를 향해 일방적으로 주체성이 설정되어 있습니 다. 이런 답답한 체제에서 어떻게 사상의 자유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홍기표_서울시당 서대문당원협의회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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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김정은 씨에게 편지를 쓰게 되어 감개무량(?)하다고 해야 할 것 같군요. 김정은 씨의 공식 직 함은 조선노동당 제1서기,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입니다. 방위(=단기사병) 출 신인 내가 어떤 나라의 최고 군 사령관에게 편지를 쓰게 되다니,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김정은 노동당 제1서기에게 의례적인 인사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김정은 씨가 북한 의 인민들을 봉건시대 농노처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라오스에서 탈북자 9명이 다시 북 한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이 보도된 바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십대의 소년, 소녀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분노했습니다. ‘탈북자’ 라는 말이 왜 존재할까요? 북한에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잘 알겠 지만, 북한 사람들은 외국으로 이민 갈 자유가 없습니다. 내 친구들 중에는 짜증날 때마다 입버릇처 럼“이민 가야겠다” 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이민 갈 자유가 있다’ 는 것이 북한사람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큰 행복일까요? 봉건시대 농노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신체의 자유, 즉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죽으 나 사나 땅에 붙어서 일해야 하는‘영주의 재산’ 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 북한 주민의 신세가 이 농 노들의 신세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곳을 향해 뛰쳐나갈 자유가 없는 곳. 그곳이 바로 북한입니다. 인간을 국가에 잡아 둘 권리를 갖고 있는 권력이라면, 그 권력은 반드시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사상의 자유 없는 당신의 노동당 김정은 씨, 당신이 사는 나라에는 사상의 자유도 없습니다. 사상의 자유란 무엇입니까? 밤에 무슨 야한 생각할 자유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상의 자유란 현재 국가권력을 비판하고 새로 대안 권력 을 창조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합니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바로 사상의 자유인 것입니 다. 그러나 당신이 지배하는 나라는 사상의 자유를 추구할 수 없습니다. 수령-당-대중의 이른바 전일 적 체계 속에서, 수령을 정점으로 아래를 향해 일방적으로 주체성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런 답답한 체제에서 어떻게 사상의 자유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TV에서는 온통 지겨운 체제선전만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권력을 비판하는 언론이나 책을 접할 수 없습니다. 자유로운 인터넷도 봉쇄되어 있습니다. 국제전화도 막혀 있습니다. 김정은 씨의 노동 당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상의 자유를 주기는커녕, 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1당 체제 아래서‘사상의 자유’ 란 원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노동당 규약’ 이 헌법보다 상위 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김정은 씨! 당신은 노동당 규약이 헌법보다 위에 있어서 행복할지 모르겠습 니다만, 나의 노동당은 절대 이런 체제를 꿈꾸지 않습니다. 나는 북한을‘자유라고는 개뿔도 없는 나라’ 라고 규정합니다. 나는 남한에 앉아서 툭하면 신자유 주의를 반대한다고 떠들고 있지만, 사실 북한을 보며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습니다. 내 선배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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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눈물로 얻어낸 자유! 저는 그 소중함을 휴전선 너머 당신의 노동당을 보며 절감하고 있습니다. 만약 21세기에 체 게바라가 있다면 북한 해방을 위해 벌써 총 들고 휴전선을 넘어갔을 것입니다.

‘조국은 하나’ 라는 말 이제는 폐기처리해야 김정은 씨. 당신의 노동당 때문에 내가 싫어하는 노래가 있습니다.‘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라는 노래입니다. 요즘 남한에서 유행하는 방식으로 말하면, 단언컨대‘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라는 슬로 건은 박정희 시대의 낡은 추억일 뿐입니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모두 뭣도 모르고 그 노래를 계 속 불렀지만, 박정희는 7.4 남북공동선언 몇 달 뒤에 10월 유신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정당들이 통일을 강령에 넣고 있지만, 내가 볼 때는 모두 쓸데없는 짓입니다. 장 기에 걸쳐 안정된 평화체제를 위해선‘조국은 하나다’ 라는 말부터 쓰레기통에 던져야 합니다. 진보 적 통일이건, 보수적 통일이건, 당신의 노동당은 나의 노동당과 절대 통일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어찌보면 대단히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이십대의 나이로 국가 권력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남한의 군사정권은 쿠데타를 하든가 하다못해 부정선거라도 했습니다. 쿠데타나 부정선거는 사실 자기도 목숨 걸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독재권력을 상속받았습 니다. 혹자는 남한에서도 재벌들이 부의 세습을 한다고‘물타기’ 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정치권 력의 상속 문제는‘부의 세습’ 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입니다. 비교대상이 안됩니다. 정치권 력의 상속이란 국가체제의 문제이고 그 나라가 어떤 역사적 단계에 와 있는지를 상징합니다. 당신의 권력상속 자체가 당신이 지배하는 당과 국가의 역사를 100년 전으로 되돌려 놓은 짓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아버지를 잘 만났다고 보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잘 만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엄청난 권력을 물려받기는 했지만, 결국 당신은 인터넷도 안 되는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물론 당 신 혼자는 자유롭게 인터넷을 하겠지만, 온 나라 사람들은 다 불행하게 해놓고 자기 혼자 하는 인터 넷이 정말 행복할까요?

20대의 당신은 무엇을 했던가 내가 당신에게 실망한 것 중에는 인간적인 것도 있습니다. 역사책을 찾아보면 20대에 왕이 된 사 람들 중에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세종대왕은 23살 때 임금이 되었고, 공민왕도 22살에 왕이 되었 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권력이기 이전에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들은 민주주 의가 없던 시절에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이 아직 때 묻지 않은 나이에 권력을 잡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한 인간의 일생에서 20대라는 나이처럼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시절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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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상엽)

이가 들수록 조금씩 속물이 되어갑니다. 저의 경우에도 나이를 먹을수록 신체의 모든 부분이 퇴화되 고 있지만 입만 계속해서 발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이십대라는 고매한 시절, 한 국가의 권력을 잡았다는 사실에 한 줄기 기대를 걸어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금방 기대를 접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20대의 나이에 어떤 아름다운 꿈을 꾸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바닷가에 미사일이나 쏘고, 지하에서 핵실험이나 하는 것이 스무 살 때 추구해야 할 인간의 이상입니까?

당신의 노동당과 나의 노동당은 다르다 김정은 씨. 나의 노동당은 당신의 노동당 때문에 많은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최근에 노동당 이름 으로 내걸었던 현수막들이 찢겨 나갔습니다. 진보신당 시절과 내용상 같은 현수막인데 단지 당명이 ‘노동당’ 으로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테러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저는 현수막 테러에 대해 당신의 책임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노동당이 나의 노동당보다 훨씬 유명하기 때문에, 대중들은 나의 노동당을 보며 당신의 노동당을 연상하는 것입니다. 저는 당신의 계급장을 미워합니다. 당신은 노동당 제1서기,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조선인민군 총 사령관입니다. 이제 그 더러운 계급장을 떼어버리고 실현 가능성은 없어도 고상한 가치를 꿈꿀 줄 아 는 20대의 청년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런 요청이 수용되지 않는 한 나는 당신의 노동당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나는 어쩌면 나의 노동 당이 당신의 노동당 때문에 입은 정신적, 물질적, 정치적, 역사적 피해를 모두 청구할지 모릅니다. 현 수막 값을 포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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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 / 편지(便紙), 이제는 헤어져야 할 당신에게

자꾸 그러시면 멀미나요

좌클릭 우클릭, 방향타 잃은 민주당 김한길 대표님께 여러분은 너무나 많은 것들에 대한 기회주의적 대응을 고수해왔습니다. 그 결과는 여러 분 뿐만 아니라 진보정치를 뚝심있게 해보겠다고 주장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여러분이 입으로 떠든 거짓말을 사람들은 진보적 주장으로 오인하게 됐기 때문이죠.

김민하_<미디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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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민주당 대표님. 건강하신지요? 이 글을 쓰는 날이 마침 대표님 취임 100일이 되는 날입니 다. 넓은 의미의 동업자(?)적 입장에서 축하를 드려야 온당하겠으나, 대표님이 처한 상황을 생각하니 그런 축하를 마음 편하게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짜증을 절로 일으키는 무더운 날씨에 뙤약볕을 쬐고 앉아 장외투쟁을 벌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님은 소설가 출신으로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치인 의 인생을 시작하셨지요. 당시 여·야에서 모두 러브콜을 받으셨지만 굳이 김대중 당시 총재의 새정 치국민회의를 선택한 것은 선친인 고 김철 전 통일사회당 당수의 영향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정 치인이 되신 뒤에는 청와대국정기획수 석과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시고 방송 분야의 전문성을 발휘하며 선거에서 미디어 전략 등을 총괄해 1997년과 2002년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평 가를 받기도 하셨습니다. 2007년 열린

정치라는 게 그렇지요. 정치의 여정은 도전과 응전으 로 점철돼 있고, 언제나 선택의 갈림길에 설 것을 강 요당하며, 선택에는 항상 대가가 따릅니다.

우리당을 탈당해 대통합민주신당을 만 드는 데 기여를 하는 바람에 소위 친노 인사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사람이 됐고, 그 영향으로 당 대표가 된 지금도 계파 갈등의 우여곡절에서 자유롭지 못한 신세이신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정치라는 게 그렇지요. 정치의 여정은 도전과 응전으로 점철돼 있고, 언제나 선택의 갈림길에 설 것을 강요당하며, 선택에는 항상 대가가 따릅니다. 온건하고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듣던 대표님이 지 금 광장에 서 있어야만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겠지요. 온건하고 합리적인 사람이 갑자기 과격한 사람이 됐기 때문이 아니라 과격하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내몰린 결과로 보는 것이 올바른 관점이겠습니다.

의석이 127개나 되는 거대야당의 장외투쟁을 바라보며 이렇듯 의석이 127개나 되는 민주당이 장외에 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은 오늘날 민주당이 처한 정치 적 딜레마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외투쟁은 정치적 선택의 결과이지만 뒤집어 말하면 민주당은 이제 장외투쟁을 선택하는 것 말고는 정국을 풀 방법을 스스로 모색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원인을 찾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지난 과정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대표님이 초선의원으로 미디어 관련 참모를 맡아 활약한 바로 그 해의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정치 세력은 권영길 당시 후보의 선전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진보정치를 선택 하기보다 정권 교체의 당위를 선택했습니다. 2002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국민들은 진보정치의 성장보다는 당장의 기성 정치를 개혁하는 일에 열망을 표현하기를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기회가 두 번 있은 셈이지만 여러분이 선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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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국가 권력의 폐단을 쫓아낸 자리에 공정한 경쟁의 탈을 쓴 전면적 시장원리를 도입하고 노동자 와 서민을 파탄지경으로 몰아넣는 것이었습니다. 소위‘안철수 현상’ 이라는 것은 민주당 정권이 세상을 더 살기 좋게 만들지 못한 것에 관한 반발 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받은 분에 넘치는 지지도 근본적인 성격을 놓고 보 면 안철수 현상과 유사한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이런 일련의 현상들은 여러분의 정당이 집권을 하는 데 별로 기대할 게 없다는 어떤 감상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선거 땐 좌클릭, 선거 끝나면 우클릭 물론 민주당 나름대로 변화하려는 노력을 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래서 지난 총선과 대선은 진 보정치세력에게 시련의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당은 전격적인 좌클릭 행보를 통 해 총선에서 진보정당과 적극적인 선거연합을 했고 대선에서는 공격적인 단일화 필요성 제기로 안 철수 후보와 진보정당 후보들을 사실상 주저앉히는 데도 성공했습니다. 2012년 대통령 선거는 그동안 여 러분이 오매불망 간절히 원한 보수 세 진보정치를 향해 밀물처럼 몰려온 여러분은 진보정치

력과의 1대 1���도를 만드는 데 사실상

의 모든 것을 박살내고 다시 썰물처럼 속절없이 빠져

성공한 선거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진

나갔습니다.

보정당 소속 후보를 선택했을 수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문재인 민주당 후보에 투표했노라는 고백을 제 주위

에서는 아직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패배했습니다. 동시에 1997년, 2002년, 2007년의 대통령 선거를 통해 가까스로 지켜온 진보정치의 소중한 유산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선거가 끝나자 자칭 진보정당들이 헌납한 정치적 신념을 여러분은 헌신짝 버리듯 내동댕이쳐버렸 지요. 대표님이 이끄는 민주당 지도부는 선거 패배의 이유를 과도한 좌클릭에서 찾으며 당헌, 강령, 주요 정강 정책을 좀더 온건하게 수정하기도 했습니다. 진보정치를 향해 밀물처럼 몰려온 여러분은 진보정치의 모든 것을 박살내고 다시 썰물처럼 속절없이 빠져 나갔습니다. 민주당이 무엇을 하려는 정당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주변에서 나오는 이유는 여러분의 이런 행위들 때문입니다. 좌우를 떠나 당장의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해놓고 정작 그 시기가 지나면 이도 저도 아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행위 말입 니다. 말로는 대중의 급진적인 그 어떤 요구도 수용할 듯 하지만 실제로는 득표에 해가 되지 않는 선 에서 최대한 그런 요구들을 무력화하려는 그런 잔머리 때문에 민주당이 오늘날의 곤궁을 겪게 된 것 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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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유리지갑 퍼포먼스’ 가 아쉬운 까닭 며칠 전 정부가 내놓은 세법개정안에 관한 여러분의 반응을 보고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정부가 내놓은 세법개정안에 민주당은 월급쟁이가 봉이냐며 유리지갑 퍼포먼스까지 벌이며 반발했 습니다. 저 역시 정부의 세법개정안은 환영할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지만, 월급쟁이가 봉이냐고 되묻는 게 올바른 문제의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왜냐하면 월급쟁이들의 조세 부담이 늘어나는 이유는 정부의 세법개정안에 소득공제에 해당하는 인적공제 항목과 특별공제 항목 일부를 세액공제로 전환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소득 공제는 고소득자들에 유리하고 세액공제는 저소득자들에 유리하다는 상식을 고려하면 정부 개정안 의 이런 방향 자체는 문제삼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더군다나 여러분이 제기하는 반발의 근거가 된 월급쟁이의 유리지갑론은 이번 정부 안에 따르면 소득 상위 28%, 연봉 3450만원 이상 받는 노동자들이 1년에 14만원을 추가 부담하는 계산에 근거합 니다. 숫자로 따지면 44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법으로 고소득자들한 테서 더 많은 세수를 확보할 수 있고 이렇게 확보된 세수는 근로장려세제 등 저소득층 세금 경감에 투입돼 조세를 통한 소득재분배에 기여하게 된다는 정부의 설명을 월급쟁이 유리지갑론을 통해 반 박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머리가 아프니 좀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야기를 해볼까요? 민주당은 지난 총선과 대선에서 보편적 복지를 도입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편적 복지국가를 건설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걷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소득 상위 28%에 해당하는 노동자가 1년에 14만원보다 많은 세금을 내게 될 가능성이 과연 없다고 말할 수 있 을까요? 한쪽에서는 보편적 복지에 기초한 복지국가 건설을 말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월급쟁이들 이 왜 세금을 더 내야 하냐며 반발하는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직접세와 조세의 누진 기능 강화를 적극적으로 시행하지 않고 서민층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세제개편을 밀어붙였다고 반발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민주당이 내놓고 있는 정치적 주장 과 과거에 실제로 정권을 잡았을 때 실행한 정책의 차이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지금까지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그 주장을 여러 분이 하는 것은 또 다른 모순입니다. 여러분이 국가의 통치를 책임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도 간접세 인상이나 법인세 인하를 검토한 바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의 경제부총리였고 민주당에서 국 회의원도 한 강봉균 전 장관은 부가가치세를 현행 10%에서 12%로 인상해야 한다는 주장을 작년에 하신 바 있고, 참여정부의 김진표 당시 경제부총리는 법인세 인하를 밀어 붙인 바 있지요. 우리는 오 늘날 민주당이 내놓고 있는 정치적 주장과 실제로 정권을 잡았을 때 실행한 정책의 차이에 대한 합리 적 설명을 지금까지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특집1 편지(便紙), 이제는 헤어져야 할 당신에게 41


중도적 보수정당으로서 포지션 명확히 했으면 세금에 관한 것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너무나 많은 것들에 대한 기회주의적 대응을 고수해왔 습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뿐만 아니라 진보정치를 뚝심있게 해보겠다고 주장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여러분이 입으로 떠든 거짓말을 사람들은 진보적 주장으로 오인하게 됐기 때 문이죠. 김한길 대표님은 당 대표 경선 때‘새로운 민주당’ 의 슬로건을 걸고 당선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당내 개혁에 누구보다도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민주당이 좀 더 급진 적인 정당이 돼야 한다거나 노동자들 의 투쟁을 더 적극적으로 엄호해야 한 차라리 그렇다면 민주당이 자신들의 지향을 명확히

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게

하고 다시 태어나는 게 옳지 않을까요? ...잘 안되겠

제대로 되면 좋죠. 그렇지만 여러분의

죠? 알면서 이렇게 물어봐 미안합니다.

그런 시도는 대부분 민중을 기만하는 일로 귀결돼왔습니다. 차라리 그렇다 면 민주당이 자신들의 지향을 명확히

하고 다시 태어나는 게 옳지 않을까요? 중도적 보수정당으로서 포지션을 명확히 하고 진보정치는 여 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점을 솔직하게 고백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잘 안 되겠죠? 알면서 이렇게 물어봐 미안합니다. 여러분을 비롯해 촐싹대는 자칭 일부 진보정치 인들 덕분에 진보정치라는 단어를 이제 우리는 쓸 수도 없게 됐습니다. 우리 당의 이름이‘노동당’ 인 것도 아마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혹여 이 편지를 보게 되신다면 우리의 이름을 꼭 기 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날이 더우니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우리들은 여러분이 잠시 겪는 이 고생을 사 시사철 항시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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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 미래(未來), 아직 오지 않은 세상에 대하여

흔히 진보를 신선놀음에 비유하곤 한다. 넌 너무 이상적이야, 당신들의 꿈은 도무지 실현 가능성이 없어, … 하지만 진보의 힘은 실현 가능성이 아니라 그것을 꿈꾸는 용기다. 상상력은 진보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며, 그것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미래에서 온 편지>가‘다른 미래’ 의 청사진을 그려보았다. 다섯 장의 그림을 포개어보자. 당신이 꿈꾸는 미래도 함께.


특집2 / 미래(未來), 아직 오지 않은 세상에 대하여

조중동 없는 세상? 몫 없는 자들의 목소리 모아내야 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 조중동 없는 세상이란 게 실제로 조중동을 탄압해서 폐간시키자 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 2000년대 초반, 안티조선 활동이 활발 할 때 안티조선운동 참여자들은‘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 라는 표 현을 썼었다.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조중동의 언로독점이 지나치게 한때는‘조선일보 제 몫 찾

심하니, 극우 내지는 시장맹신주의에 가까운 그들에게 합당한 몫을

아주기’운동을 했지만 10

찾아주자는 취지였다.

여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

하지만 10여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차라리 조중동

면 차라리 조중동을 없애자

을 없애자고 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역설적인 생각이 든다.

고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

없애자고 한다고 실제로 강제폐간을 시킬 수는 없으니, 그들의 영향

는 생각이 든다.

력을 무력화시킬 실질적인 노력이 지금보다는 더 낫게 진행되지 않 았을까라는 (어쩌면 공상일 수도 있는) 생각 때문이다. 조중동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맹목적인 보수와 시장의 옹호 로 일관하고 있다. 그들이야 원래 그랬다고 하나, 문제는 조중동이 아닌 다른 언론들이다. 이른바 '민주개혁' 정권에서 보수 정권으로의 교체와 보수의 재집권을 거치면서, 언론을 비롯한 사회 전 분야에서 보수-개혁 간 대립이 극심해졌고 그 과정에서 이른바‘개혁적 언론’ 의 상당수도 진영논리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 사회의 진 정한 모순들을 드러내고 의제화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정치 적 입장 내지 정권에 대한 태도가 언론의 주된 논조를 이루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 마디로‘여당지’ 와‘야당지’ 만 남고 언론은 사라

이장규_창원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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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버린 것이며, 그 과정에서 노동문제를 위시한 우리 사회의 사회경


제적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 문제는‘개혁적 언론’ 에서조차 기획기사로 가끔 다뤄지는 수준을 벗어나 지 못했다. 사회경제적 의제나 인권 문제는 결코 자신의 개혁성을 증명하기 위한‘양념’ 이 아니라 우 리 사회의 핵심적인 모순임에도. 조중동에게서 줄어든 몫은 그럼 누구의 것인가 조중동에게 제 몫을 찾아준다고 했을 때, 그들에게서 줄어든 몫은 정치적 반대 진영이 가져갈 몫 이 아니다. 그 몫은 그동안 한 번도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알릴 수 없었던‘몫없는 자들의 몫’ 이었 다. 저임금 노동자를 비롯한 몫없는 자들의 존재는 흔히 유령처럼 잊혀지지만, 그들은 결코 말할 수 없는 자가 아니다. 그들 또한 자신의 말을 갖고 있으며 단지 우리 사회와 우리의 언론환경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진영논리에 매몰된 많은 개혁적 자유주의자들은 이들의 몫을 자신 들의 몫이라 강변했다.그 결과로, 지금에 이르러서는 광의의 언론환경은 예전보다 더 악화된 듯하 다. 조중동보다 더 심각한 극우언론 내지 극우사이트들이 인터넷 상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하고 있거 니와, 이는 단순히 조중동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 려, 그들은 진영논리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감정 적 비난과 조롱으로 무장한 야당 지지 사이트들이 나 팟캐스트의 후예들이다. 단지 정치적 입장만 반대일 뿐, 친새누리당 인터넷언론과 친민주당 인 터넷언론의 행태는 사실상 비슷하며 서로가 서로 를 존재근거로 하고 있다.

비판은 무기를 대체할 수 없으며 실질적 힘은 실질적 힘에 의해서만 극복된다. 조중동 없는 세상은 가능하다. 조중동에 대한 반대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우리 편이 될 때 가능하다.

하지만 조롱이나 진영논리로는 결코 조중동의 힘을 약화시키지 못한다. 아니 감정적인 비난이 아닐 때조차 그러하다. 맑스가 일찍이 말했듯이, 비 판은 무기를 대체할 수 없으며 실질적 힘은 실질적 힘에 의해서만 극복된다. 조중동과 보수의 논리를 아무리 비판해본들, 그들도 바보는 아닌 이상 나름의 대응논리를 만들어 내거니와 그들의 논리는 현 존 체제의 경험에 근거해 있기에 상당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몫을 꿈꿀 수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조직해야 그럼 조중동 없는 세상은 불가능하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조중동에 대한 반대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우리 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현존 체제 하에서 자신의 몫을 나름대로 찾을 수 있는 이들 즉 조중동의 몫을 대신 차지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이들이 아니라, 더 이상 이 체제 하에서 자신의 몫을 꿈꿀 수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조직하는 것만이 조중동의 영향력을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다.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다양한 미디어들이 꾸려지고 각자의 주변에서부터 확산되어야 한 다. 비판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이라도 무기를 실제로 만들어내는 것이 핵심이다. 물론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지금은 당연한 듯이 보이는 많은 것들은 과거에 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던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미래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미래의 누군 가는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미래에서 온 편지는 사실은 현재 우리의 실천의 기록이다.

특집2 미래(未來), 아직 오지 않은 세상에 대하여 45


특집2 / 미래(未來), 아직 오지 않은 세상에 대하여

‘저녁있는 삶’ 은 노동을 껴안는 시간 ‘저녁 있는 삶’ 이라는 말이 세간에 화제가 된 바 있다. 정치적 구 호를 넘어서서 야근과 특근을 밥 먹듯이 하는 지금의 노동자들에게 는 새로운 삶의 희망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표현이었다. 그만큼 사람 들의 환호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환호가 지나간 자리에서 떠올려 보니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노동 이외의 시간은 여가다? 예전에 편의점에서 심야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새벽 4시까 지 근무였는데 낮보다 높은 시급도 시급이거니와, 첫 수업에 들어가 기 전에 최소 4시간 정도는 잘 수 있으리라 여겼다. 결과는, 한 학기 를 망쳐버린 것으로 끝났다. 하루가 24시간이라고 해서 8시간씩 칼 로 쪼개듯이 자고, 일하고, 놀고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저녁은 공백으로, 빈 시간으로 존재한 적이 없다. 돈이든 신경이든 체력이든,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쓰도 록 만드는 고갈의 시간이다.

삶의 대부분은 자기 위한 시간과 놀기 위한 시간과 일하기 위한 시간 을 위해 쓰여진다. 마찬가지로 최소 4시간은 가능할 것 같던 수면 시 간은 하루에 2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저녁 있는 삶’ 의 그 저녁은, 그저 일을 하지 않는 시 간이라는 의미 외에는 참 모호한 정의다. 우리는 노동을 하지 않으 면 나머지 시간은 자연스럽게 여가가 되고 그러면 삶이 뽀송뽀송 윤 이 날 것이라 생각하지만, 정작 노동 외의 시간 역시 노동하는 시간 만큼이나 각박하고 때로는 피하고 싶은 시간들이다. 시쳇말로‘노는 것도 배워야 한다’ 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저녁을 앗아간 게 비단 공장이나 사무실의 노동만이 아니라 는 것이다. 우리의 저녁은 언제나 공백으로서,‘빈 시간’ 으로서 존재 한 적이 없다. 돈이��� 신경이든 체력이든,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쓰 도록 만드는 고갈의 시간이라면 노동의 자리를 대신한들 여전히 팍

김상철_노동당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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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한 저녁인 셈이다.


나만의 저녁있는 삶은 다른 누군가의 저녁없는 삶 탓에 가능한 것 출발은‘나’ 만의 저녁 있는 삶이 아니라,‘우리’ 의 저녁 있는 삶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더라 도 그것이‘나’ 만의 저녁 있는 삶이라면 그것은 누군가의 저녁 없음으로 인해 온전해지지 못한다. 그 래서 우리의 저녁있는 삶은 개인의 시간을 넘어서는 우리의 시간을 위한 고민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밤시간 노동을 다른 노동자와 나누는 식의 소위‘일자리 나누기’ 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는‘괜찮은 시간제 일자리’ 라는 말 장난으로 정규직 노동자의 야근과 특근을 대체할 비정

고액 연봉을 받는‘노동 귀족’ 의벌

규직 노동자를 양산하려고 한다. 나의 저녁시간을 위

이를 비난하지 말자. 밤과 휴일을

해서 누군가의 저녁시간을 뺏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반납해야 가능한‘노예 노동’ 의결

이렇게 일을 나누면 임금도 나눠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다. 해법은 기본임금의 인상이다.

하지만 고액연봉을 받는 소위‘노동 귀족’ 들의 벌이 가 밤과 휴일을 반납해야 가능한‘노예노동’ 의 결과라

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당장 저녁있는 삶은‘소크라테스의 삶이냐 돼지의 삶이냐’ 의 양자택일이 되고 만다. 따라서 기본임금 인상이 필수적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통상임금 역시 낮은 기본급으로 유지되는 잘못된 임금구조 탓이 아닌가. 분명히 말하건대 우리의 저녁있는 삶은, 일하지 않는 시간이 라는 앙상한 빈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저녁은 목적 자체가 되어버린 노동을, 생계 유지라 는 애초의 그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며 이윤을 위한 노동과 자기 성취를 위한 작업을 분리하는 것이어 야 한다. 단순히 잉여로서의 시간은 너무나 쉽게 이윤의 재생산을 위한 소비로 귀결되거나 혹은 좀더 효과적으로 착취당하기 위한 준비시간이 되기 쉽다. 제도적 개선보다 더 중요한 건‘새로운 일상 만들기’ 무엇을 해야 할까?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법제화를 하거나, 혹은 기본급을 높이기 위한 싸움이 필 요할까?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빠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우리의 저녁을 새롭게 만드는 일상의 과정이다. 그래서 마을이나 공동체, 이런 것 하자는 말이 아니다. 좀 더 구체적일 필요 가 있다. 개인이 공동체를 위해, 마을을 위해 기여하는 방식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해법이 나오지 않 는다. 그렇다면 노동은 이윤을 위한 착취가 되고 여가는 선의의 착취가 되고 만다. 오히려 구체적으 로 관계의 회복, 친밀함의 구성이 필요하다. 노동에 귀속되지 않는 학습모임이나 동아리 활동이나, 혹은 마음맞는 사람끼리 장기투쟁사업장을 지지하기 위한 소규모 지원그룹을 구성할 수도 있다. 최 근 등장한 마을 촛불과 같이, 큰 광장의 의제를 동네 작은 광장들로 가져오는 것 역시 가능할 것이다. 이런 것이 전부냐고? 그렇다. 노동 중독의 사회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저녁의 시간은, 나름 대안적이라고 해봤자 고작 이런 앙상한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저 녁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일상의 상상력이다. 노동을 적대하기는 매우 쉽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삶을 선택하는 것 역시, 녹녹하진 않지만 가능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나와 너의 시간, 즉 우리의 시간이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저녁있는 삶은 노동을 부정하는 시간이 아니라 노동을 껴안는 시간이어야 하며, 결국은 노동을 넘어서는 시간이어야 한다.

특집2 미래(未來), 아직 오지 않은 세상에 대하여 47


특집2 / 미래(未來), 아직 오지 않은 세상에 대하여

DMZ 없는 세상 비정규직 없는 세상에 대한 염원은 비정규직이 만연한 현실로부 터 나온다. 마찬가지로 DMZ(Demilitarized Zone), 무장이 허용되 지 않는 지역이라는 것도 무장이 과도한 현실로부터 나온다. DMZ 가 사라진 세상은 당연히 보편적으로 무장이 필요없는 세상을 뜻한 다. 그런 의미에서 DMZ 없는 세상이란 곧 평화를 염원하는 상징이 기도 하다.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요소, 전쟁은 언제나 0순위 인류 최대의 공포는 인류 그

20년 후의 미래로부터 평화를 호소하는 편지가 온다면, 그 편지

자체가 되어버렸다. 특히 군

는 어떤 어조로 쓰여 있을까? 두 가지 설정이 있다. 우선 편지가 유

사화는 그 사회가 얼마나 망

쾌하고 긍정적인 언어로 채워져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앞으로 20

가져 있는지를 나타내는 척

년은 지난한 평화주의 확산이 어느 정도 결실을 본 것이리라. 다른

도이자, 고통의 징후이며,

식으로 생각해볼까? 영화 같은 설정을 상상해보았다. 20년 후 벌어

그 결과다.

질 어떤 거대한 파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미래로부터 사람이 오 는 건 아니고 대신 편지가 온다. 비관적 지성이 직관적으로 말을 한 다. 인류의 미래는 밝지 않다고. 디스토피아적 전망은 차고 넘친다. 편지가 전한다. 암울한 세계를 미연에 막아 달라고. 최근 부쩍 암울한 미래상을 그린 재난영화가 많이 나온다.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요소에 전쟁은 언제나 0순위다. 최근에는 환경재 앙이 영화의 주 배경으로 등장한다. 전쟁과 같이 인간이 직접적인 행위자인 경우는 물론 지구 온난화나 새로운 빙하기 같은 대규모 자 연재해조차 대부분 인간이 초래한 것들이다. 인류 최대의 공포는 인 류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외적 조건에 의한 대재앙 이후 얼마 되지 않은 인류가 살아남은 세상은 고도로 군사화

나동혁_마포구 당원, <전쟁없는 세상>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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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있고, 무장폭력이 만연한 사회다. 이것이 말해주는 진실은 단 순하다. 군사화는 그 사회가 얼마나 망가져 있는가를 나타내는 척도


이자 고통의 징후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결과이기도 하다. 군사화된 폭력에 익숙해진 한반도 사람들은 한반도 긴장을 얘기할 때마다 평화의 소중함을 말한다. 천안함, 연평도, 연예사병, NLL, 개성공단, DMZ 평화공원 등등 평화와 군대를 키워드로 한 뉴스들도 넘쳐난다. 미국의 아시아 전략 재편 속에 진행되고 있는 강정해군기지 건설, 무인기 드론을 이용한 미국의 대규모 살상, 일본 의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 등 국제적 뉴스들도 잊 을 만하면 등장한다. 그러나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무 고한 희생을 보자. 사설 해병대캠프에서 다섯 명 의 청소년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세계에서 양심 에 따른 병역거부로 인해 수감된 사람 중 90%가

사설 해병대 캠프에서 다섯 명의 청소년들 이 목숨을 잃었다. 전세계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인해 수감된 사람 중 90%가 한국인이다. 해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군 에서 사망하거나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한국인이다. 예비군과 민방위는 물론 학교와 직 장 가릴 것 없이 온갖 군사안보교육이 행해진다. 해마다 군에서 사망하는 수백 명의 사람들, 군 정신 병원에 입원한 또 다른 수백 명의 사람들까지도. 수많은 지표가 한국사회 군사화의 심각성을 말해준 다. 군기교육 중 열사병으로 사망한 사병 때문에 250만 명이 시위에 동참했고 이로 인해 국방부 장 관이 경질된 대만과 비교해 보면 한국인들이 얼마나 군사화된 폭력에 익숙하고 둔감한지 알 수 있다. 자기분열적 현실, 그 위에 평화운동이 있다 이 둘 사이의 간극, 그러니까 평화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일상적으로 군사화 된 사회를 갈망하는 자기분열적인 현실 위에 평화운동이 서 있다. 무력강화와 군사주의를 해결책으로 내세우는 평화는 근본적인 자기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군사주의는 최소한의 민주주의와 인권마저 구차하게 여 기기 때문이다. 유지비용이 많 이 들고 구성원의 정신세계를 황폐하게 만들며 일상적인 각 종 차별과 폭력을 수반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사회구 성의 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들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고 도로 군사화된 사회는 어떤 미 래의 징후다. 이 둘 사이의 긴 장을 탈군사주의로 돌려세울 수 있느냐에 따라 20년 후 미 (사진출처 : 병역거부 아카이브)

래가 달라질 것이다.

특집2 미래(未來), 아직 오지 않은 세상에 대하여 49


특집2 / 미래(未來), 아직 오지 않은 세상에 대하여

누가 핵 없는 세상을 만드는가 탈핵 운동의 현주소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에 몸담고 있어서 그런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수많은 의제들 중에서‘탈핵 에너 지 전환’ 에 특히 관심이 간다. 나날이 핵발전 단지가 확장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도 후쿠시마 사고 이후‘위험경관’ 이 새롭게 재구성되 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핵발전소, 핵폐기장, 송전탑 그리고 핵폐 기물 재처리로 이어지는, 거대 기계화된 테크놀로지의 경관에 갇혀 있다. 핵발전에 내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핵발전소 앞에서 모 든 권리가 배제되는 우리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다. 대규모 촛 우리는 여전히 핵발전소-핵

불집회가 대중운동을 평가하는 일정한 기준이라 치면, 만족할 만한

폐기장-송전탑-핵폐기물

탈핵 촛불집회는 없었다. 이게 바로 탈핵 운동의 현주소다. 아직 갈

재처리로 이어지는 테크놀

길이 멀고 험하다.

로지의 경관에 갇혀있다. 핵 발전소 앞에서 모든 권리가

노동당의 녹색정치,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배제되는 우리는 호모 사케

당성이 약하긴 하지만 진보신당과 녹색당에 각기 당적을 가지고

르(Homo Sacer)다.

있는 나에겐 진보신당이‘노동당’ 으로 당명을 바꾼 데 불만이 없지 않다.‘녹색좌파’ 를 꿈꾸는 이라면 대부분 그렇겠지만,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당의 이름보다는 당의 활동이 더 중요한 문제 아니겠 냐, 이렇게 위무하고 노동당의‘녹색정치’그리고 당면 과제인 탈핵 을 생각해본다. 더 이상‘구성의 시대’ 에 지나치게 빠져들어‘투쟁 의 시대’ 를 놓치는 오류를 범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녹색정치를 정당만이 독점할 수 없고, 녹색정치가 녹색당만의 고

이정필_서대문 당원,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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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 영역일 수 없다. 그렇다면‘노동당의 녹색정치’ 는‘진보신당의 녹색정치’ 의 유산을 어떻게 물려받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이 필요


하다. 실제 진보신당의 탈핵운동은 겉에서 보기에는 할 만큼 했다. 취약한 당세에 비해 선방했다는 의미다.‘탈핵 노동시간 단축법 3종 세트’ 라는 참신한 발상을 제시했고,‘탈핵희망버스’ 를 주도하기 도 했다.‘핵 없는 사회를 위한 공동행동’ 이라는 거대한 공룡의 뒷걸음질을 잠깐이라도 멈추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민주당이 탈핵 판 에 발을 담그면서 탈핵 전선은 전반적으로 기술 적, 경제적 합리성으로 치우치게 된다. 이제 더 이상 노동당의 탈핵운동은 부상하지 않는다. 서울광장에서 열린 후쿠시마 2주기 행사에서

녹색정치를 정당만이 독점할 수 없고, 녹색 정치가 녹색당만의 고유한 영역일 수 없다. 그렇다면‘노동당의 녹색정치’ 는‘진보신 당의 녹색정치’ 의 유산을 어떻게 물려받을 것인가.

보여줬던 진보신당의 상징적 퍼포먼스가 한낱 꿈으로 남아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복마전의 실태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 는‘원전 비리’ 나 탈핵의 법적 근거를 담당할‘탈핵기본법’어느 것 하나 노동당의 몫은 아니다. 지 금과 같은 상황에서의 비리 처벌은 핵발전의 정상화나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핵심은‘원전 비리’ 가 아니라‘원전 카르텔’ 이다. 원내 의석이 없는 노동당은 탈핵법 통과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없 다. 핵심은 의원수가 아니라 사회적 힘이다. 노동당의 탈핵 전략은‘재생에너지 동맹’ 이다 원전 카르텔에 맞설 세력은‘노동’ 에 숨어 있다. 태양광, 풍력 등 재생가능에너지를 연구, 제조, 설치, 보수하는 노동자 집단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노동에 탈핵 주력군이 있음에도 아직까지 진보신 당, 노동당은 시야를 넓히지 못했다. 조직화되어 있지 않고 실태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재생에너지 노동 현장을 이제라 도 찾아 나서자. 노동 당의 탈핵 전략은 ‘재생에너지 동맹’ 인 것이다. 여기에 에너 지 협동조합까지 가 세하면‘탈핵 동맹’ 의 토대가 구축된다. 노동당답게 가자. 물론‘원전 제로’ (사진 : 박성훈)

사회가 전부는 아니 다. 이미‘태양 자본

주의’ 의 시대가 도래했다. 태양은 우리에게 약과 독의 양명성을 지닌 새로운 파르마콘(pharmakon) 이다. 시공간과 신체의 감각기관을 장악한 자본주의 스펙터클에 벗어나‘태양 사회주의’ 와‘자전거 사회주의’ 를 이끌어갈 노동당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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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 / 미래(未來), 아직 오지 않은 세상에 대하여

SKY는 가라, 진짜 하늘 보인다 공부가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공부를 하다 보면 문득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러고 있나 하 는 생각이 종종 든다. 그럴때면 어김없이 기운이 빠져 그만둘까 하다 가도 암울한 내 미래를 생각하면서 다시 공부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 잡는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에 계속 떠오르기 때문에 공부를 하겠다고 대학원까지 왔지만 공부가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물론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무엇인가 를 배우고, 타인과 의견을 나누며,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즐거운 일이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공부가 주는 즐 거움을 누린다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역설적이게도 계속 해서 미래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미래를 생각하는 일 은 아름다운 꿈과 희망의 세계를 상상한다기보다 생존 경쟁에서 탈 한국사회에서 공부가 주는

락하지 않을 나를 간신히 떠올려야 하는 비극이다. 공부를 한다는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은 매

것은 더 성숙한 미래의 나를 그리는 일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를 위

우 어려운 일이다. 역설적이

해 지금의 삶을 희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도 계속해서 미래를 생각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입시가 끝나도 대학 서열의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 서열화된 대학 질서는 이 비극의 핵심 장치라고 할 만하다. 대학 은 거의 모든 청소년들의 미래를 규정하고 있다. 이들은 서열이 더 높은 대학에 다니는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며‘치열하게’공부한다. 이들에게 공부는 더 높은 대학에 진학하는 도구일 뿐이다. 공부의 즐거움을 알아가고 많은 경험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느끼기에도 벅 찬 시절에, 경쟁과 적대 속에서 남들을 이기고 성공할 미래를 생각 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온일상_서울대 석사과정, 관악구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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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서열의 영향력은 대학 입시에서 끝나지 않는다.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매겨진 등급은 대학 입시가 지나서도 공부를 여전히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만든다. 대학 입시에서 실패한 사람들은 그 실패를 만회하는 수단으로, 대학 입시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등급에서 기대할 수 있는 직장보다 더 좋은 직장에 성공적으로 진 입하는 수단으로 공부의 의미를 규정한다. 대학 입시는 끝났지만 경쟁은 끝나지 않았고, 더 나은 미 래를 생각하며 공부해야 한다. 공부란 그저 더 높은 서열에 올라가는 사다리로 취급될 뿐이다. 이기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위한 공부 되려면 이 피폐한 현실은 어떤 성숙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배움도, 성찰도, 감정도, 서열 앞에서는 모두 무의미해진다. SKY 대학이 있어서 생기는 서열 때문에 좋은 배움과 가르침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 나마 SKY 대학이 있기 때문에 인문학같은‘순 SKY 대학이 사라진다는 것은 말 그대로

수’학문이 존속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묻는 이

세 개의 대학이 없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도 있다.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지만, 순수 학문

서열화된 대학체계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

을 소수만 할 수 있는 현실을 만든 것 또한 이

미하며 나아가, 더 잘 팔리는 인간이 되려

‘좋은’대학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경쟁

는 경쟁이 무의미해짐을 의미한다.

에서 살아남는 것이 지상 목표이기 때문에 배움 이 아닌 영달을 위한 공부를 하는 세상, 순수 학 문이 위기인 세상을 만든 주체는 결국 서열화

된 대학 체제 그리고 이 체제를 구축한 사회다. 그렇기 때문에 SKY 대학이 사라진 세상이 올 때 비로소 우리는 더 높은 등급을 받을 미래의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위한 공부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서야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고통이 아닌 즐 거움으로 다가오게 된다. SKY 대학이 사라진다는 것은 말 그대로 세 개의 대학이 없어진다는 의미 가 아니다. 이것은 서열화된 대학 체계가 무 너지는 것을 뜻하며 나아가 더 잘 팔리는 인 간이 되려는 경쟁이 무의미해짐을 의미한 다. 공부가 더 나은 미래를 쟁취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즐거움을 위한 것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SKY 없는 세상이‘하늘’ 을 보여줄 것 내가 더 잘 나가려고,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려고, 이 악물고 고통을 참아가며 성공 한 미래를 위해 공부하는 그런 세상은 사라 지고, 누구나 문득 맑은 하늘을 보며 오늘은 공부하기 참 좋은 날씨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한다. 공부를 할 때 느끼는 기분이 맑은 하늘을 보며 느끼는 충만한 감정과 같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SKY 없는 세상이 우리에게 그 맑은‘하늘’ 을 보여 줄 것이다.

특집2 미래(未來), 아직 오지 않은 세상에 대하여 53


여성 진보정치 열전 1

우리들의 왕언니 김혜경 (2부)

생활정치가 왜 중요하냐구? 그게 진보이기 때문이야 개미마을 부랑자들과 함께 자립공동체를 일구는 게 꿈이었던 스무 살의 김혜경은 외국 종교단체의 후원으로 지역사회 조직가훈련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빈민운동 조직가로 거듭났다. 강의실과 창신동 산동네를 오가 며 교육과 현장생활이 동시에 진행되던 그 시절, 빈민촌 집단이주에 반 대하여 부녀자들의 이주반대 투쟁을 조직했다. 그 엄혹한 군부독재 시절 에 엄마들 700여명이 서울시청으로 몰려가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단계적 철거와 가수용 시설 요구가 받아들여졌고 개발이 끝난 뒤에는 98%의 주민들이 재정착하기에 이르렀다. 1969년의 일이다. 인터뷰 정리_심재옥 (여성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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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가을 진보신당비상 대책위원장 시절 (사진: 노동당)


각서를 받고 결혼하다 창신동 이주 반대투쟁의 승리로 만들어진 시민아파트에 김혜경도 세 들어 5년을 살았다. 이때 지 금의 남편을 만났다. 시민아파트 관리사무소로 파견 나온 서울시 공무원이었던 남편은 김혜경을 보 고 첫눈에 반해서 졸졸 따라다녔다. 김혜경이 주민들을 만나러 가면 자기도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 서 그 자리에 쫓아오곤 했다. “내가 자기 어머니를 닮아서 깜짝 놀랐대. 한 번은 차를 마시러 동대문 근처 다방을 갔는데 나한테 반한 이유가 뭐냐, 물었더니 내가 담배를 잘 펴서라나. 그 시대에는 담배 피는 여자가 드물었거든.” 이럴수가. 빈민 조직화를 위해 미스터 화이트로부터 혹독하게 배운 담배가 결국 남편까지‘조직’ 한 게 아닌가! 빈민운동에 몰두해있던 김혜경에게 결혼이 관심사일 리가 없었건만, 종국에는 김혜경 도 온화한 성품에 합리적이면서도 남자다웠던 남편에게 마음이 움직였다. “결혼하기 전에 각서를 받았어. 하도 귀찮게 따라다니길래‘난 결혼 안한다, 활동하려고 여기 왔 으니 평생 이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정 결혼하고 싶으면 각서를 써라’그랬지.” ‘당신이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하겠다면 끝까지 보장한다. 각자의 일에 대해서 절대 간섭하지 않는 다’ 고 쓴 각서는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없다. 하지만 남편은 50년 넘도록 약 속을 지켰다. 그뿐만이 아니다. 각서에 없던 가사일도 함께 나누었다. 아침이면 시키지 않아도 요강 을 비웠고 김혜경의 귀가가 늦는 날엔 밥을 해서 아이들을 챙겨 먹였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사라 야, 너는 느이 남편을 예수님으로 알고 살아라”했을 정도였으니, 70년대 여느 집에서 볼 수 있던 예 사 부부와는 완연히 다른 결혼생활이었던 셈이다. 그 시절 청계천에서 가톨릭청년회 학생들을 훈련시키던 김혜경에게 시련이 닥쳤다. 함께 일하던 박 형식 목사 등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김혜경만 홀로 남은 것. 군부는 무고한 활동가들을 간 첩으로 몰았지만, 가톨릭계의 반발이 두려워 차마 김혜경까지 잡아들이지는 못했다. 혼자 남은 김혜경 은 성당과 논의 끝에 활동 근거지를 낙골(지금의 난곡)로 옮겼다. 첫 아이 미정이를 업고 매일 버스를 세 번씩 갈아타며 창신동에서 출퇴근을 하다가 73년 6월, 아예 난곡 산동네 꼭대기로 이사를 했다. 국수모임, 100원짜리로 만든 생활공동체 낙골로 이사를 와보니 창신동이나 낙골이나 가난하긴 매한가지다. 주민들 중 태반이 점심 을 굶었다. 애를 업고 다니며 주민들을 만나던 김혜경도 처음엔 판판이 점심을 굶다가 생각 국수모임에서 관악산 개울가에 소풍을 갔다. 솥단지 걸어 밥 끓여먹고 춤추며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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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 라면을 하나씩 품에 넣고 다녔다. 점심 먹 겠다는 사람을 만나면 그걸 꺼내어 함께 끓여


먹었다. 그러다‘남들은 돈 모으는 계를 하는데 우린 배고프니까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국수라도 삶아 먹자’ 며 사람들에게 국수모임을 제안했다. “산동네 맨 꼭대기에 사는 엄마들 열 다섯 명이 모여 한 달에 회비 100원씩을 모았어. 김치 넣고 굵은 막국수를 끓여 둘러앉으니 자기 안의 쌓인 얘기들이 밀려 나오기 시작하는 거야. 국수 먹으면서 자연스레 남편 얘기도 나오고 부부싸움 얘기, 어떻게 살지 막막한 고민까지 나누게 됐지. 나중엔 친 해져서 빨랫감 이고 관악산 개울가에 소풍도 갔어. 빨래 마를 동안에 솥단지 걸고 밥도 끓여 먹고, 춤 추고 노래 부르고 신나게 놀았지.” 점심 한 끼를 해결하려고 모이기 시작한 국수모임이 나날이 생활나눔과 생활정치의 중심이 되어 갔다. 산꼭대기로 올라갈수록 비누며 밀가루며 생 필품이 아랫동네보다 더 비쌌다. 100원씩을 모아 생필품 공동구매를 시작했다. 겨울철에는 동사무

“한 번은 신발공장 다니던 아줌마가 본

소를 찾아가 미끄러운 비탈길에 모래주머니를 쌓

드와 신나에 중독돼서 쓰러졌는데 해

아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산동네에 가로등이 설

고가 된 거야. 그때 노동청 찾아가서

치되고, 우체통이 세워졌고, 하수구 개선 등 생활

전국 최초로‘직업병 판정’ 이란 걸 따

상의 불편을 해결하는데도 앞장섰다.

냈어.”

“한 번은 신발공장 다니던 아줌마가 본드와 신 나에 중독돼서 쓰러졌는데 해고가 된 거야. 그때 노 동청 찾아가서 전국 최초로‘직업병 판정’ 이란 걸 따냈어. 또 어떤 아줌마는 임신 막달에 남편한테 맞아서 유산을 당할 뻔 했는데 병원비가 없어서 동네를 돌면서 9만원의 돈을 모으기도 했고.” 서서히 동네가 바뀌기 시작했다. 가난에 허덕이던 난곡 산동네가 가난과 불편, 고통과 눈물까지도 함께 나누고 해결해 가는 빈민들의 공동체로 탈바꿈했다. 창신동‘미스김’ 에서 난곡의‘사라 아줌 마’ 가 된 김혜경이 그 중심에 있었다. 달동네에 의료생협과 병원을 세우다 난곡 국수모임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인 74년 9월 15일, 서울의대 카톨릭학생회가 성당의 소개로 의료봉사를 나오기 시작했다. 내년이면 40주년이 된다는 이 진료는 난곡 주민들에게 획기적인 사건 이었다. 아파도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했던 주민들은 일주일 100원을 내고 진료를 받았고 100원도 없는 사람은 상담 후 무료진료를 받기도 했다. 100원씩 모은 돈은 당시 비쌌던 결핵 환자들의 약을 사서 간호사 수녀들과 함께 결핵환자 집을 순회하며 약을 나눠주는데 쓰였다. “1년쯤 지나니 영등포며 도봉까지도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몰려 들었어. 서울대 선생님이 좋은 약 들고 오고, 서울대병원에서 연계치료까지도 받을 수 있다고 하니깐 멀-쩡한 사람들이 좋은 옷 빼입 고 진료 받으러 오기 시작한 거야. 주민들 사이에 위화감과 갈등이 생겨났지.” 고민에 빠진 난곡 주민들과 김혜경은 대책을 찾던 끝에 협동조합을 생각해냈다. 그해 겨울부터 협 동조합 회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35개 통을 10개 지역으로 나누어서 회원들을 모집했다. 6개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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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100원의 조합비를 내는 118세대가 모였고 마침내 76년 3월 13일, 김혜경의 집 안마당에서‘난곡 희망의료협동조합’ (이하 난협) 창립 총회를 열었다. 여름방학 때 아이들 300명을 모아 여름학교도 개설했다. 봄 가을로 어머니 수련회를 열어 협동조 합 교육도 했다. 10개 지역별로 장미, 백합, 국화, 매화, 코스모스 등 꽃 이름의 반을 만들고 엄마들이 반 대표를 맡았다. 한 달에 한 번씩 각 반 대표들이 참여하는 운영위원회의 대표와 보조대표도 모두 엄마들이었고 철저하게 주민들이 중심이 되는 조직체계와 운영원칙을 고수했다. 5인 가족 이상 월수 입 3만원 이하 세대부터 회원을 받았는데 10시간의 협동조합 교육을 받지 않으면 회원으로 가입시키지 않았다. 이렇게 철 저한 운영원칙 때문에 난협은 단결도 잘 되었고 83년에 이르러서는 3만명의 주민 들 중 1만여명이 가입했을 정도로 확고히 자리 잡아 나갔다. ‘100원짜리 인생들’ 이 만들어낸 난곡 희망의료협동조합. 협동조합의 개념도 없던 시절에 의료생협을 만들어 빈민들 의 의료구제를 스스로 해낸 것도 놀라운 79년 이화여대 여성문제연구소에서 주관한 빈민지역 여성리더십 교육에 난곡 주민들과 함께 참여했다.

데, 이들은 또 한 번 놀라운 일을 벌였다. 10주년이 되던 해인 86년 4월 20일 총회 에서 병원 설립을 결의한 것이다.

난곡 뿐만 아니라 구로와 영등포 등지의 가난한 사람들, 검사나 수술 같이 의료장비가 필요한 진 료를 위해서도 병원 설립이 꼭 필요했다. 초기 자금 1억 2천만원의 모금에 나서자‘가난한 사람들이 10년 동안 돈을 모아서 병원을 만든다는 건 기적’ 이라며 이리저리 줄을 대어 돈을 만들어 준 신부님 도 있었다. 부산에서 바느질로 평생 모은 돈 500만원을 보내주신 분도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7,000 만원의 돈을 모았다. 신림1동 시장 상가건물 110평짜리를 임대하고 성모병원에서 보내준 의료장비, 치과의자, 검사기계 등으로 병원을 꾸렸다. 88년 8월 29일,‘가난한 사람들에 의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병원’요셉의원은 그렇게 설립되었다. 그러나 요셉의원과 의료생협은 1년쯤 지나 89년 7월 국민의료보험이 시작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조합비와 의료보험료를 이중으로 내게 된 주민들은 혼란스러워 했고 의료보험체제 하에서의 운영 방법을 잘 몰랐던 난협은 결국 요셉의원 운영에서 손을 떼기에 이르렀다. 주민들이 운영에 참여하고, 의사에서 주방 노동자까지 모두 50만원의 같은 월급을 받았으며, 병 원장도 예외없이 순번을 정해 청소하고 가꿨던‘빈민들의 병원’ 이 시대 변화의 혼란 속에서 안타깝 게 사라지고 말았다. 김혜경은 동네를 만들고, 동네는 김혜경의 아이들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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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가로 훈련받던 때와는 달리 김혜경은 난곡 주민들의 삶 속으로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동네를 만들었고, 동네는 김혜경의 아이들을 키웠다. 막내를 낳았을 때는 동네 사람들이 포대기며 분유를 사 들고 왔다. 의료봉사를 나갔다 돌아오면 옆집 아줌마가 아이를 업고 돌봐주고 있었다. 김혜경의 집 안마당은 늘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막내를 유치원에 보낼 때엔 함께 놀던 골목 친구 넷을 공짜 로 받는다는 조건을 붙여 9,000원의 보육비를 내었다. 너나 없이 가난한 이웃들은 김혜경을 통해 서로 돕고 기대며 살아가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가난 에 굴복하기보다 가난을 극복할 협동의 힘을 일깨워준 김혜경에 대해 난곡 주민들의 사랑과 존경이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혜경에 대한 난곡 주민들의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케 할 이야기 한 토막이 있다. 진보신 당 창당 직후인 2008년 총선 당시 신장식 후보가 관악을에 출마했을 때였다. 이미 난곡은 재개발되 어 난곡 주민들은 신림6동 임대아파트에 모여 살았는데, 신장식 후보가 그 지���에 유세를 간 시간이 매우 늦어 집집마다 불이 죄다 꺼져있었다. 후보가 유세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데, 그날 지 원 나온 김혜경 고문이 선뜻 마이크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저 사라예요”

“안녕하세요, 저 사라예요”단 세 마디 에 이 집 저 집 불이 켜지기 시작하더

유세차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진 단 세 마디에 놀

니 거짓말같이 불빛이 번져나갔다. 오

랍게도 이 집 저 집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시커먼

밤중에 잠자던 사람들을 이름 하나만

어둠 속에서 거짓말같이 다다다다 불빛이 번져나

으로 불러 모았다.

갔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사람, 이미 신발 끌고 유세차 앞으로 나온 사람,‘누구? 누가 왔다고?’묻 는 사람, 삽시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김혜경은 주민들과 일일이 손을 맞잡아 안부를 묻고 신장식 후보를 소개했다고 한다. 그 긴 세월이 지난 뒤에도 오밤중에 잠자던 사람들을 이름 하나만으로 불러 모으는 힘, 그런 힘을 이 시대 어느 정치인이 갖고 있을까. 선거비용은 단돈 80원, 야쿠르트 한 병 값 91년 3월, 기초의원 선거가 30년 만에 부활했다. 주민들의 남다른 사랑과 존경을 받던 김혜경이 후보로 거론된 것은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사자가 한사코 거부하는데도 빈민운동 진영에서는 김혜경을 공동후보로 추대했다. 당시 평화방송 해고기자 복직을 요구하며 단식 중이었 던 김혜경은 그 소식을 듣고 상황이 끝난 후에도 항의의 뜻으로 단식을 풀지 않았다. “단식 10일째 날, 김상열이가 카메라 들고 오더니 나 드러누워 있는데 사진을 막 찍는 거야. 카메 라는 피해야지, 밖으로 나가서 담벼락에 산발한 채 서 있는데 그걸 찍어서 선거포스터에 넣어 버렸 어. 9일 단식하고 접으려는데 갑자기 구의원 하라고 떠밀어대니까 뿔딱지가 나서 계속 단식을 했 지.” 후보등록도 난지협이 대신 했고 플래카드도 길거리에 쭈욱 걸렸다. 마지막 절차인 기호 뽑기는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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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 본인만이 할 수 있는데 김혜경이 단식 한다고 누워있으니 주민들이 찾아오고 난리가 났다.“우 리가 동장 만나려면 힘들어 죽겄는데 우리 의원 하나 있으면 다 되잖냐.”대중정치란 게 본인이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하기 싫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닌 모양이다. 김혜경은 할 수 없이 단식 11일만에 일어나 기호를 뽑으러 갔다. 기호도 하필 1번을 뽑았다. 선거운동이랄 것도 별로 없었다. 지역에 김혜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어 특별히 알리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다만, 난곡에서는 세례명‘김사라’ 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후보사진이 길거리에 붙은 뒤 에야‘김사라’ 가‘김혜경’ 이었음을 주민들이 새롭게 알게 된 정도랄까. 동네를 유세 돌다가 목이 말 라 사먹은 야쿠르트 한 개 값, 80원이 김혜경이 선거에서 쓴 비용의 전부였다. “난 별로 인사도 안 다녔어. 인력시장에 나오는 아저씨들은 좀체 못 만나니까 새벽시장만 다녔어. 그 시절엔‘새벽부터 고양이랑 여자 만나면 재수 없다’ 는 미신이 있어서 안 가려고 했는데, 아저씨들 이 불 쬐다 말고 우루루루 달려들어서‘우리 집사람한테 얘기 잘 듣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더라구. 그리고 우리 애들이 다 학교 다닐 때였잖아.‘너네 엄마 사진 붙었더라. 우리 엄마 아빠한 테 다 찍으라고 얘기할게’이러는 거지. 그래서 나 모르던 조합원들도 다들 날 찍었대.” 뿔 여섯 개 달린 운동권 아줌마, 구의원 되다 여섯 명이 출마한 선거에서 김혜경은 70%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마을금고 이사장과 함께 당선이 되었다. 관악구의원 40명 중에 유일한 여성이었다. 처음에 공무원들은‘뿔 여섯 개 달린 운동권 아줌마가 들어왔다'고 수군거렸고 의원들은 툭 하면 ‘여자가 집에서 살림이나 하지’빈정거렸다. 술자리에 합석할라치면 술 한 잔 따르라며 저질스런 희 롱도 걸었다. 작심하고 의회에서 신상발언을 나섰다. “여기는 주민들을 대변해서 심부름을 하러 나온 자리다. 남성이라고 의원되고 여성이라고 의원되 지 말라는 거 아니다. 관악구 60만 주민 중에 반은 여성이다. 나 혼자 지금 30만 명을 대표해서 나온 거다. 누가 더 역할이 막중한 거냐? 더 이상 신상 얘기 안했으면 좋겠다. 나보다 힘 센 사람 있으 “여기는 주민들을 대변해서 심부름 하러

면 나와 봐라.”통쾌하게‘마초’의원들에게 한

나온 자리다. 관악구 60만 주민 중에 반

방 먹인 셈이다. 그날 이후로 실없는 희롱은 꼬

은 여성이다. 나 혼자 지금 30만 명을 대

리를 감췄다.

표해서 나온 거다. 나보다 힘쎈 사람 있으 면 나와 봐라”

의원이 되고 나니 힘이 생겼다. 예전엔 동사 무소 찾아가도 민원 해결이 안됐는데 구의원이 생기니까 동네가 빨리 빨리 돌아가고 삐까번쩍 해졌다.

“주민들이 무슨 일만 있으면 와서 상담하고, 구청에서도 더 이상 산동네라고 무시하지 못하게 됐 지. 구의원도 권력이라고 다들 뻐기고 다니는데 난 집집마다 찾아가 인사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의정 보고를 했어. 항상 주민들 오시라고 해서 이러저러한 내용으로 의회 열린다, 의견 달라, 구정질문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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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구의원 사무실 개소식. 전국 지방의원 중 여성의원은 41명, 남성의원은 1,200명에 달했다. 사진 좌 측부터 양천구 신우경, 서초구 허명화 의원. 관악구에서 여성의원은 김혜경 달랑 하나였다.

떤 거 하면 좋을지 일일이 물어봤지.” 공약이었던 마을회관과 공부방은 당선되자마자 해결했다. 구립어린이집 서른 한 군데에 모조리 감사가 들어갔고, 비리가 발견된 열 한 개 위탁업체와 뇌물로 밍크코트를 받은 보건사회과장을 날리 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산동네의 숙원사업이었던 정화조 문제를 해결한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산동네에선‘나의 살던 고향은’노래 몇 번 들리는 듯 싶어 나가보면 정화조 차가 그냥 가버리고 없어. 이러니 비만 오면 똥 덩어리가 산 위에서부터 그냥 내려온다고. 관악구에 정화조 업체가 한 개 뿐이었는데 정화조 업체를 여섯 개로 만들었지. 산동네에서 정화조 차를 수시로 볼 수 있게 된 건 획 기적인 변화였어.” 그 뿐 아니라 김혜경은 관악구 정보공개조례도 만들었고, 부천의 최순영 의원, 인천의 홍미영 의원 과 함께 전국 최초로 학교급식조례도 제정했다. 지금 실시되는 무상급식의 뿌리가 된 바로 그 조례다. 진보정치의 길 위에서 소속정당도 없던 시절, 김혜경은 관악구의원으로 재선출되어 8년을 일했다. 그 와중에 국민승리 21이 출범했고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이던 권영길 위원장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본격적인 정치 개입에 고민이 많았지만 주민들과 논의해서 합류하기로 하고 국민승리 21 여성위원장을 맡았다. 그 후 권영길 후보 부인과 함께 각 지역 강연을 다녔다. 그 때 일은 나도 기억난다. 내가 공공연맹 여성국장이던 시절, 여성조합원 강좌에 두 분을 모신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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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다. 그 때 두 분 모두 고운 개량 한복을 입고 오셔서 여성정치에 대해 강의를 하셨는데‘하수도 뚜껑 하나도 정치 아닌 것이 없다'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노동운동 밖에 몰랐던 내겐 그저 환멸로 만 느껴졌던‘정치’ 라는 것에 대해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을 처음 봤기 때문에, 나는 아마도 작 은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민주노동당이 창당한 뒤 김혜경은 최순영 의원과 함께 부대표를 맡았다. 70년대 YH 사건으로 유 신을 끝장낸 여성노동자와 30년간 빈민운동에 앞장섰던 여성활동가가 나란히 손잡고 진보진영의 지 도자가 된 것이다. “부대표 시절 중앙위에서 밤새워 싸워서 만든 게 광역의원 비례대표 중 1, 3, 5번을 여성에게 주고 30% 여성할당제 하자는 거였어. 덕분에 후보를 열 명 넘게 내서 아홉 명을 당선시켰지. 지방자치위 원장 맡았을 때 한나라당 여성위원회 초청으로 강연 가서 이 얘길 했더니 다들 박수치고 난리가 났 어. 부러우면 민주노동당으로 오라고 했지.” 2004년에는 민주노동당 대표로 선출되어‘씩씩한 언니들의 정당’ 의 맏언니가 되었다. 판을 바꾸 자고 대표가 된 김혜경은, 그러나 진보정치가 가장 화려하게 꽃피던 시기이면서 가장 첨예한 정파갈 등이 시작되던 시기의 당 상황 때문에 너무나 고통스런 좌절들을 연속으로 맛봐야만 했다. 결국 김혜경은 2005년 10월 25일 울산북구 보궐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당 대표를 사퇴했다. 당 시 울산 북구는 전국 유일하게 민주노동당이 여당인 지역이었고 그런 만큼 정파적 이해로 첨예하게 갈등하던 지역이었다. 그 후에도 갈등은 점점 더 심화되어 2008년 당이 분당할 시점에서는 김혜경 은 오히려‘올 게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긴긴 인터뷰 말미에 진보정치 전반이 어려움을 "덩치만 키운다고 진보가 아니야. 약 하고 작더라도 옳은 방향으로 꾸준히 가는 것이 중요하지, 작다고 기운 빠 질 필요 없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진보정치 1세대로서 재창당을 앞두고 있는 진보신 당의 그간 활동에 대한 평가를 부탁드려 봤다. “평가를 하기엔 너무 가슴 아픈 일들이 많지. 뜻 만 같으면 합쳐도 된다? 뜻이 같더라도 국면 국면 에서 어떤‘행위’ 를 했는가가 중요하다고 봐. 물리

적으로 더하기 빼기만 할 것이 아니라, 기준을 잊지 말아야 해. 덩치만 키운다고 진보가 아니야. 약하 고 작더라도 옳은 방향으로 꾸준히 가는 것이 중요하지, 작다고 기운 없어하고 그럴 필요 없어. 우리 가 가는 길 명확히 알고 자부심 갖고 끈기있게 가는 게 중요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지역으로 내 려가자. 허공에 날아다니는 정치는 하지 말자고. 생활정치가 중요한 까닭은 그게 진보이기 때문이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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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이란 우리의기억을 포기하지 않는것

철탑 296일을 기억하며 사진 : 이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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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이란 우리의기억을 포기하지않는것

이혜정_기록노동자/한국비정규노동센터 편집국장 열차는 9시 40분 출발이었다. 아이들의 목소리로 인해 열차 안은 북적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서울에서 출발해 대전을 거쳐 동대구역서 한번 내려야 했다. 새로 갈아탄 열차는‘하양’ 이라는 낯선 이름 하나를 거쳐‘영천’ ,‘서경주’ ,‘경주’ 를 지나 우리를‘태화강’ 에 내려줄 것이었다. 동대구역에 서 지체하는 시간을 제하더라도 여섯 시간여를 꼬박 달려야 했다. 삼삼오오 열차를 올라타는 사람들은 신이 나 있었다. 낯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자꾸 말을 걸었 다. 여행의 목적지와 여행의 이유가 같아서일까. 사람들은 금방 친해졌다. 첫 칸부터 차례로 자리를 잡고 앉아보니 딱 1량이 가득 찼다. 희망버스 기획단에서는 앉은 사람들에게 검은 봉지를 하나씩 건 네주었다. 봉지 안으로 계란 두 개와 은박지에 꼬깃하게 싼 소금, 김밥 한 줄, 그리고 목 메이지 말라 고 사이다 한 캔이 빼꼼히 보였다. 열차 안은 계란냄새를 풍기며 조금 더 소란스러워졌다. ‘희망’ 이라는 이름을 가진 열차 희망버스는 서울에서 21대가 출발하고 지역에서는 42대가 출발해 총 2000여명이 울산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사회자가 이야기했다. 사회자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였다. 그는 두 사람이 지나기 어 려운 좁은 통로에 서서 자꾸만 멋쩍은 듯 웃고 있었다. 한 사람씩 나와 자기 소개를 했다.‘철도민영 화 반대’뱃지를 가슴에 단 철도노동조합 조합원들, 아이들에게 노동현실을 보여주고 싶어서 열차에 탔노라던 두 아이의 어머니, 해고노동자, 만화가, 신부 등 각자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 기를 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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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가 가까워졌다. 누군가 이야기했다.

천천히 그리고 간절히 우리는 계절의 가장 뜨거

“곧 철탑이 왼편으로 지나갈 거예요.”

운 부분을 지나고 있었다. 한껏 달아있는 철탑과

그때야 기억이 났다. 지난번 철탑을 찾았을 때, 바로 곁을 지나쳐간 무엇. 뜨거운 햇빛 그 한

멀리서도 바라보이는 검어진 얼굴들은 이 나라 가장 뜨거운 열섬이었다.

가운데 달아있던 철탑과 철탑의 허리를 가로지 른 붉은 천의 모습을, 순식간에 놓쳐버린 그 선 명하고 가까운 느낌을. 나는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곧이어 나타난 태화강 물줄기를 한없이 바라보았 다. 천의봉 씨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를 실은 열차가 곧 지나간다고, 모두 창에 붙어 인사하리라고.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경주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인사를 준비했다. 가지고 있던 핑크빛 스카프와 피켓 등을 창에 붙여놓 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고공의 그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어했다. 누군가 소리쳤다. “보인다!” 열차는 속도를 늦추었다. 그리고 기적을 울리기 시작했다. 철도노조 조합원들의 연대의 기적소리 였다. 철탑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것보다 훨씬, 그들은 가까이 지나갔다. 철길 쪽 난간에 팔을 걸친 채 사진을 찍고 있는 천의봉 씨가 보였다. 최병승 씨도 열차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최선 을 다해 그들에게 인사했다. 목소리가 그곳까지 전해질리 만무하지만 마음만은 전해지리라 생각하 면서. 천천히 그리고 간절히 우리는 계절의 가장 뜨거운 부분을 지나고 있었다. 한껏 달아있는 철탑 과 멀리서도 바라보이는 검어진 얼굴들은 이 나라 가장 뜨거운 열섬이었다. 7월 20일,‘희망버스’폭력사태의 진실 희망열차는 4시 30분을 넘겨 태화강역에 도착했다. 버스는 우리를 정문에서 1km 떨어진 곳에 내 려놓았다. 공장 담을 따라 경찰 버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져있었다. 길에는 깃발을 든 사람들이 한쪽방향 도로 전부를 메우고 행진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니 정문에서 1 차 집결한 뒤, 철탑으로 행진하는 길이라 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이었다. 볕이 그대로 땅으로 쏟아 졌다. 달구어진 아스팔트에서 오르는 열기까지 더해져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거리가 나왔다. 오 른쪽으로 철탑이 보였다. 방송차량은 행진대오를 그 자리에 앉혔다. 집회가 시작되었다. 자꾸만 어 딘가에서 뿌연 연기가 날아오는 것을 알아차린 건 한참만이었다. 집회가 끝이 나고, 방송차량은 대오를 대기하도록 했다. 경찰들의 진입로를 차단시키기 위해서였 다. 우리는 바닥에 주저앉아 잠시 땀을 식혔다. 그러는 와중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연기는 계속 해서 날아왔다. 처음에 옅게 흩어지던 연기는 점점 두터워졌다. 이상한 느낌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둘 주차장을 가로질러 철탑으로 이동했다. 그 밑에 당도해서 목격한 장면은 실로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짙은 색의 하얀 연기는 주차장 입구, 그러니까 명촌문 앞 공장 담벼락에서 쉴 새 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밧줄 하나가 내 앞에 길게 놓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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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돌을 맞거나, 발뒤꿈치 뼈가 빠지고

다. 마스크를 한 사람들은 줄지어 서서 구령을 붙

왼쪽 새끼손가락이 탈골된 사람들이 속속

였다. 밧줄에 묶인 채 철조망이 딸려왔다. 경찰이

엠뷸런스로 실려갔다. 귀 옆이 잘리고 오른

공장 입구를 막으려고 둘러놓은 철조망 벽이었다.

손 울대가 15센티미터 찢어지는 등 중상자

저편으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갔다.

만 십여 명이었다.

그 틈바구니 안에는 한 남성이 기절한 채 누워있었 다. 얼굴 어딘가가 찢어진 것 같았다. 철조망을 뜯 어내는 동안 용역들의 커터칼이나 끝이 뾰족한 죽

창, 쇠파이프, 그리고 낫 등에 부상당한 사람들이 계속 발생했다. 모인 사람들 틈을 비집고 엠뷸런스 한 대가 들어왔다. 그 차가 떠나도 다음 차가 계속해서 들어왔 다. 눈에 돌을 맞거나, 발뒤꿈치 뼈가 빠지고 왼쪽 새끼손가락이 탈골되거나 한 사람들이 속속 엠뷸 런스에 실려갔다. 귀 옆이 잘리고 오른손 울대가 15센티미터 찢어지는 등 중상자만 십여명이었다. 모 두 비정규지회 조합원이거나 희망버스 탑승객들이었다. 나는 상황실 천막에 가방을 두고 그 난리통 속에 섞여들었다. 몇 줄의 대열을 헤치고 들어가자 뿌 연 연기로 시아가 흐려졌다. 연기의 정체는 다름 아닌 소화기액이었다. 바닥은 소화기액과 물대포로 뒤범벅된 흙탕이었다. 흠뻑 젖은 사람들의 머리칼엔 하얀 소화기액이 내려앉아있었다. 신분을 확인 할 수 없는 사람들이 흐린 시야 저 멀리에서 소화액을 사람 얼굴에 바로 뿌리는 것을 보았다. 맞은 사 람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다시 시야가 막혔다. 매캐하고 텁텁한 가루들이 기관지로 넘어갔다. 여기저기서 콜록대는 소리가 들렸다. 맨 앞 대열엔 만장을 든 사람들이 서 있었다. 1대오 전진, 하면 방패를 때리고 일사분란하게 대열을 바꾸었다. 강한 물줄기가 오른편에서 내 몸을 때렸다. 어푸어푸 거리다가 물을 먹었다. 물은 미지근하고 매우 짰다. 또 다시 물대포가 등을 때렸다. 나는 물의 정체를 의심하며 한껏 몸을 숙였다. 사람들은 맞거나 다치거나 쓰러졌다. 경찰은 이런 사람들을 무더기 연행 했다. 중부서와 동부서에 모두 6명이 불법 연행되었다. 이 모든 것이 희망버스 폭력사태의 전말이다. 까치발로 기다리던 희망버스, 편지도 못 읽고 대치 상황이 끝나고 문화제가 시작되었다. 철탑에서는 내내 최병승 씨의 얼굴만 보였다. 무슨 일 이 있는 건지 걱정이 되어 곁의 사람에게 물어보니 천의봉 씨가 갑자기 몸져누웠다는 이야기를 했다. 최병승 씨는 홀로 발언에 나와‘의봉이’ 의 이야기를 대신 전했다. 의봉이가 희망버스를 내내 기다렸 는데, 갑자기 다리에 통증이 생겨 일어나질 못한다고. 준비한 편지가 있었는데 그 편지도 읽지 못하 게 되었다고. 그리고 그는 말을 이었다. “두 눈 딱 감고 희망버스가 끝나면 내려갈까 했습니다. 저의 나약함을 숨기며 날씨 핑계, 건강 핑 계, 투쟁상황의 막막함 등 수많은 이유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당위를 덮치는 인간적인 이유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러나 쉽게 포기가 되지 않았다고 힘들 게 이야기를 이었다. 박정식 열사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때, 기억하기 싫은 것들을 잊기 위해 어떤 날 은 하루 종일 잠만 잤노라 했다. 그의 그런 어느 날 중 하루에 나는 그에게 인터뷰를 시도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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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내게 돌아온 문자엔 그런 글이 꼭꼭 찍혀있었다. 나는 자꾸만 그 글이 떠올랐다. 왜 그가 죄인이 되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문득 세상에 대한 원망이 불쑥 올라왔다. 희망버스가 도착하기 며칠 전인 7월 16일, 나는 울산으로 내려갔었다. 해고자들과 철탑을 취재하 기 위해서였다. 그날 오후 내내 잠잠하던 천막이 밤이 깊어지고 선선해지자 부산해졌다. 덕분에 천의 봉 씨와는 멀리서 잠깐 인사를 나누었다. 낮 동안 얼굴을 못 봐서 걱정했다고 했더니 옆의 해고자가 말을 거들었다. “한 낮에 저 안은 오븐이에요, 오븐.” 다음 날, 전화인터뷰 도중 천의봉 씨는 그만 목이 메었다. 어머니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내려가면 집에 가서 엄마가 해주시는 집 밥 먹고 싶어요.”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차라리 추운 게 낫다고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는 자주 끊어졌고, 한숨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크 게 들려왔다. 텐트 안은 바람도 불지 않기 때문에 그냥 밖에 나와 있는 게 낫다면서. 그 날은 박정식 열사가 세상을 떠난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천의봉 씨는 박정식 열사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그냥 막연하게 안부전화를 한번 해볼까 했단다. 그러다 못했는데“마지막 목소리도 못 들어보고 보냈다” 며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그 날, 현대차 울산공장 비정규직지회 사무실 앞에서 서른다섯의 열사의 추모제가 열렸다. 퇴근하고 온 노동자와 4시간 파업하고 온 노동자들이 열사의 영정 앞에 모여 앉았 다. 사진 속 청년은 웃고 있었다. 그가 너무 환하고 싱그러워서, 무엇보다 젊은 그여서 눈물이 났다. 박정식 열사는 서른다섯이었다. 그리고 천의봉 씨는 이제, 서른둘이다. 청년들이 죽거나 죽음을 각 오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토록 아까운 젊음들이. 전야 2010년 7월, 최병승 씨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대표하여‘현대차의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고, 2년 이상 근무한 자는 정규직으로 봐야 한다’ 는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 판결로부터 촉발된 2010년 CTS공장 점거파업은 25일 만에 끝이 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개처럼 두들겨 맞으며 끌려나왔다. 그리고 이후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징계, 혹은 해고 통보를 받았다. 문자 혹은 등기로 전달받은 사 유들은 대부분 비슷했다.‘무단결근’ ,‘불법 라인점거’ ,‘지시 불이행’등이었다.‘법을 지키라’ 는너 무도 당연한 요구였는데 현대차는 이 모든 것을 묵살하리라는 의지를 재차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선심 쓰듯 3000명 신규채용 안을 내놓았다. 전체 16,000명의 비정규직 노동자 가운데 3,000명을 회사에서 엄선해 정규직 채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불법을 저지른 것을 무마하면서 나머지 13,000명을 정규직화 해야 하는 비용도 절감하고, 엄선 과정에서 노동조합원들을 배제시킬 수도 있 다. 그것을 막으려 오른 철탑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서른여덟의 형이 이제 막 서른을 넘긴 동생에게 제안했다. 딱 한 달만 해보자고. 15만 볼트의 고압전류가 사람의 피를 마르게 한다지만 그들에겐 문 제가 되지 않았다. 나 홀로 정규직이 되고자 10년을 싸워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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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7일 오전, 울산 현대차 철탑에서 내일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나는 울산으로 내려갔다. 철탑에서의 마지막 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철탑에 도 착한 시간은 새벽 12시 30분쯤이었다. 어둡고 휑한 주차장엔 지역에서 연대온 이들과 비정규지회 조합원들이 자리를 펴놓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라도 그들이 내려와서 다행이라고. 새벽 4시가 다 된 시간, 철탑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탑 위 살림살이를 정리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얼굴 하나가 빼꼼히 아래를 내다봤다. 천의봉 씨인지, 최병승 씨인지 몰라 대뜸 누구냐고 소리쳤더니 옆에 있던 해고자 한 사람이 조용히 대답해주었다. “의봉이에요.” 철탑에서의 마지막 밤인데 마음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뭐, 시원섭섭합니다.” 그는 마지막 날까지도 이놈의 모기 때문에 죽겠다는 소리를 했다. 스프레이를 뿌려도 안 뿌린 부 위만 골라 문다고, 정말 고역이라고. 그런 날들이 어디 하루 이틀이었을까. 올려다보기만 해도 뜨거 웠던 철탑. 그 곳에서 내려온다니 정말 다행한 일 아닌가. 다시 지상으로 다음날 아침, 많은 이들이 철탑을 찾았다. 기자들로 간밤 텅 비었던 공터는 빽빽하게 메워졌다. 국 회의원들도 하나 둘 얼굴을 보였다. 무대 위에 플랭카드가 열리고 국회의원들을 비롯한 여럿이 그 앞 에 섰다. 12시 30분을 넘어가는 시간, 정말 뜨거운 날이었다. 그늘이 없는 곳에 30분만 서있어도 살 갗이 붉어졌다. 아래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숨이 턱턱 막혔다. 오늘 그들이 내려온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크레인이 올라가고 두 사람이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 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깨알만했던 얼굴들에 눈코입이 생기고, 표정이 생기고, 흔들리는 눈동자가 생기고, 동생을 토닥이는 웃음이 생겼다. 서로들 눈을 맞추고 표정을 읽고 그리고 비로소 웃는 것. 그 렇게 그들은 다시 지상으로 돌아왔다. 단상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천의봉 씨는 울 고 있었다. 296일 동안 견뎌낸 저 뜨겁고 차 가운 것들을 온통 토해내듯 울었다.

단상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천의봉 씨는 울 고있었다. 296일 동안 견뎌낸 저 뜨겁고 차가운 것들을 온통 토해내듯 울었다. 햇살을 거를 수 도 없이 피부에 고스란히 받으면서 검고 두터워 졌을 그 새카만 몸으로. 그의 다리가 후들거렸

다. 오래 다리 근육을 쓰지 못해 앙상한 두 다리로 고공에서 내려왔던 홍종인 유성기업 아산지회 지 회장이 생각났다. 낯도 설고, 옷도 잘 차려입은 국회의원들이 그를 부축했다. 그러나 그와 296일을 함께 하며 밥을 해다 올리고, 얼음물을 올려주고, 그들의 손발이 되어 일했던 해고자는 그 광경을 보 지 못했다. 그는 천의봉 씨의 울음을 보고서 부엌으로 가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장면의 너 머에 있던 또 한 사람, 2010년 CTS 공장 파업 당시,“노동자는 하나다” 를 외치며 제 몸에 불을 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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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기로에 놓였던 황인화 씨. 낯선 이들이 천의봉 씨를 곁에서 부축하고 사진을 찍는 동안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 서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건강이 괜찮은지 내내 걱정했던 그였다. 무대 위에서 어색한 웃음을 짓는 이들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현대차 불법파견 문제가 금년에는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올라간 철탑이었는데 정몽구 회장 이 정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니 밀려오는 것은‘두려움’ 이었다고 최병승 씨는 말을 꺼냈다. 하늘에 서 바라본 한국사회는 정말“개 같은 세상” 이었다고. 그러나 이 지긋지긋한 땅을 밟고 다시 싸워보겠 다고. 우리가 왜 296일 동안 저 철탑 위에 매달려있어야 했는지 세상 사람들이 조금은 알아줬으면 좋 겠다 했다. 그의 목소리는 크고 당당했다. 울지 않겠다 하더니 정말 울지 않았다. 형이 이야기할 때 동 생은 곁에서 계속 울고 있었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이 얼마나 고난의 연속 이었는지 그는 잘 알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부둥켜 안았다. 고공의 좁은 틈바구니에서 시간 과의 전쟁을 함께 치러낸 사람들, 곁에서 뒤척이는 소리, 아파하는 소리, 우는 소리 같은 것들을 서로 는 기억하고 있을 사람들. 그들의 몸과 마음은 아주 예민하게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주차장 을 돌면서 고마운 이들과 인사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안쓰러움과 다행스러움 이 교차되어서였을 것이다. 그들이 경찰서로 떠난 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였다 다들 흩어졌다. 그날 울산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도시였다. 40도의 열기 속에서 남은 사람들은 철탑위의 살림들과 밑의 살림들, 그리고 천막, 밥을 해먹었던 냄비나 식기 같은 것들을 정리했다. 황인화 씨도 소나기처럼 땀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천막을 걷고 있었다. 그에게 인사했더니 웃으면서 꾸벅 인사를 했다. 저녁이 되면 이들은 아쉬움이나 고단 함, 미련, 이런 것들을 텅 빈 이곳에 그대 로 둔 채 하나 둘 철탑 밑을 빠져나갈 것이 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달래면 서, 함께 싸워온 사람들과 수고했다며 소 주 한 잔 기울일지도 모르겠다. 아래로 쳐 진 어깨를 서로 두드리면서 힘내자고, 힘 내자고. 296일 동안 두 비정규직 노동자가 살았던 철탑은 다시 전기가 돌고, 사람의 흔적들을 차차 지워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워지지 않는 것은 하루하루를 메우던 사람들의 그 길고 모진 시간들이었 다. 누군가 그것들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 것에는‘희망’ 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에 그 모든 장면들 이‘희망’ 으로 남겨지기를. 우리 모두 그 기억들을 포기하지 않기를.

7월 20일 철탑이 있는 울산으로 전국의 희망버스들이 모 였다. 그들은 밤 늦도록 철탑 아래 공터(주차장)에서 함께 문화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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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단 일기

구럼비야 보고싶다 제주 생명평화행진과 함께 한 여름휴가 나경채_서울 관악구의회 의원

당협 당원들이랑 휴가갈 곳을 물색하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을 반대하는‘강정 생명평화 대행진’ 이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7월 29일부터 8월 4일까지 진행되는 전체 일정에는 함께 하게 어려워서 8월 1일부터 인천에서 크루즈를 타고 제주도까지 가는‘강정 평화 크루스’일정에 함께 했다. 인천 여안 여객항에 서 이봉화 부대표와 기타맨 당원을 만나 배에 올랐다. 제주도까지 14시간, 떠오르는 태양이 뿜어내는 빛이 잔물결 이는 수면 위에 황금빛으로 어른거리는 장관이 우리를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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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를 연상케 하는 문정현 신부 (사진: 나경채) ◀ 해군기지 공사현장을 포위한 참여자들 (사진: 나경채)

“이제 바다만 갈라지면 되는데 강정바다가 안 갈라진다” 제주항에 내리니 현수막을 들고 우리를 맞이하는 두 분이 보였다. 문정현, 문규현 신부님이었다. 하얀 머리에 길고 하얀 수염, 진갈색의 피부에 튼튼해 보이는 지팡이를 짚은 문정현 신부님의 모습은 마치 구약성서에 나오는 모세를 연상���게 했다.“신부님, 모세 같으세요.”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지 만 친근하게 농담을 걸었다.“으응. 이제 바다만 갈라지면 되는데 강정 바다가 안 갈라진다.”신부님 은 센스있게 받아주셨다. 우리가 오기 전에 이미 제주 전역을 동진팀과 서진팀으로 나눠 행진을 시작했다. 우리는 서진팀에 합류했다. 이제부터 본격 행진 시작! 걷기 시작한 지 30분만에 이 행진이 무척 힘들겠다는 예감이 들 었다. 30도가 넘는 온도에 높은 습도는 피부를 랩으로 싼 듯 답답했고, 바람을 전혀 느낄 수 없게 했 다. 순식간에 땀과 소금기가 온몸을 점령했다. 행진대열을 이끄는 방송차량에서 흘러나오는 평화의 노래들과 사회자의 구호만이 몸에서 보내는 신호를 잊게 했다. 하천에 도착해 점심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하고, 가장 더운 두 시를 넘기고 오후 행진이 시작됐다. 가는 도중 깜짝 손님이 나타났는데 무려 영화감독‘올리버 스톤’ 이었다. 방송국 카메라 노동자들이 갑자기 나타나 행렬의 앞과 뒤를 스케치하더니 그 뒤편에서 체구가 좋은 외국인이 나타났다. 행진 대 열 앞에서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땡볕 아래 사람들을 세워두고 갑작스런 연설을 하는 것은 아 니라고 판단한 듯 곧 자취를 감췄다. 다시 구호와 노래와 대화가 이어지는 행진이 계속 됐다. 행진 중에 가장 많이 들은 노래는 조약골 이 작곡하고 문정현 신부가 작사했다는‘평화가 무엇이냐’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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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원직복직하는 것이 평화 두꺼비 맹꽁이 도롱뇽이 서식처 잃지 않는 것이 평화 가고 싶은 곳을 장애인도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평화 이 땅을 일궈온 농민들이 (더이상) 빼앗기지 않는 것이 평화 성매매 성폭력 성차별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 군대와 전쟁이 없는 세상 신나게 노래 부르는 것이 평화 5년째 이어지는 싸움에도 연대와 후원 끊이지 않아 5시 30분까지 걸은 뒤에 제주시에서 번화가인 노형동의 노형 성당으로 입성했다. 여기가 제주도 에서 보내는 첫 숙박지인 셈이다. 300여 명이 먹을 저녁이 신속하게 준비됐다. 이 음식들은 강정마 을에서 모두 준비한 것이었다. 비용이 걱정되어 혹시 마을 사람들이 갹출한 것이냐고 물으니 현물을 내놓기도 하지만 대부분 이곳저곳에서 후원한 것으로 해결하고 있다고 한다. 다행이었다. 이 싸움이 시작된 지 5년이 넘었지만 강정의 평화를 한반도의 평화로, 세계의 평화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 는 사람들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이것이 거장‘올리버 스톤’ 을 제주도까지 불러온 힘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둘째 날은 성당을 나와 동진팀과 합류해 제주시청에서 집회를 갖고 탑동 광장 평화 문화제로 마무 리하는 일정이었다. 합류 이틀째부터 미리 준비한‘노동당’깃발을 들고 다녔다. 은평 당협에서 온 김지애, 고선주 당원을 만났다. 두 사람은 은평 당협 소식지 편집위원으로서 강정에서 만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있었다. 서진팀과 동진팀은 제주시청으로 향하는 어느 사거리에서 조우했는데 저 멀리서 평화를 외치며 다가오는 수 백 명의 행렬이 하나가 되는 장면은 참 인상 깊었다. 거의 500명은 됐다. 점심시간에는 제주도당의 요청으로 중산간 지역에 있는 헤라CC라는 골프장의 중식집회를 함께 했다. 제주도의 유력인사들이 많이 다닌다는 이 골프장은 경영난을 겪다가 운영 주체가 바뀌었다. 새 로운 경영진은 체불된 임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골프장의 노동자들을 모두 계약직으로 바꾸었다.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제주도당을 비롯해 민주노총 제주본부가 이 투쟁에 함께 하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골프장에 발을 디딘 이유가 노동자 투쟁에 연대하기 위해서라는 점이 묘하게 좋았다. 이봉화 부대표는 마이크를 잡고 이 골프장 경영진에게 노동조합의 단체협상 요구에 조속히 응할 것 을 주문했다. 그것이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정신이며 회사의 경영에도 유리할 것이라는 경고를 잊지 않 았다. 이 골프장을 오가는 고객들에게는 회사가 노동조합과의 협상장에 나올 수 있게 사회적 압력을 형성해 달라고 당부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들의 회원권이 재산가치 없는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고도 곁들였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끝까지 투쟁해 달라고 했다. 노동당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도 했다. 조합원들의 눈에는 힘이 있었고, 그들 의 서툰 팔뚝질에는 결기가 있었다. 중산간의 맑고 시원한 공기는 이 투쟁의 승리를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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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해군기지 반대와 ‘절대적 평화’지켜내야 다시 대열에 합류해 제주시청으로 향했다. 제주시청 앞에서 행진을 함께 하고 있는 정당이 소개됐 다. 민주당을 대표해서 발언한 장하나 의원의 말이 문제였다. 장하나 의원은 작년부터 잘 알려진 사 실을 다시 확인했다. 강정 해군기지가 핵 항모를 정박할 수 있는 시설로 설계됐다는 점 말이다. 한국 은 핵 항모를 보유하지 않으니 이 기지는 반드시 미군기지화 될 수밖에 없다. 의원은 일본 고베처럼 우리도 강정 해군기지에 드나들게 되는 모든 선박에‘비핵증명서’ 를 요구하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주장은 강정 해군기지가 완공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핵 항모가 드나드는 미군기지가 될 것이라 는 우려는‘비핵증명서 의무화’ 가 아니라‘강정에 절대적인 평화’ 와‘해군기지 반대’ 의 주장으로 이 어져야 했다. 제주 해군기지 논의를 본격화 한 주체가 민주당의 전신인 노무현과 유시민의 열린우리 당이었다. 친노를 계승한 민주당의 한계가 뚜렷해지는 순간이었다. 둘째 날 행진의 마지막 지점인 탑동 광장에 도착했다. 탑동 광장을 들어가기 직전 단비가 내렸다. 제주는 내륙과 달리 몇 달째 기록적인 가뭄으로 야단도 아니었는데 생명 평화의 행진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비가 내리니 모두 사기가 높아졌다. 올리버 스톤 감독이 드디어 연단에 서서 발언했다.

나는 베트남전에서 보병으로 근무했습니다. 이 전쟁의 패배로 미국이 아시아에서 물러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 탄 전쟁을 통해 다시 아시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은 나름의 현명한 전략을 세웠습니다. 세계에 미국의 군사 기지 를 세우고 이것을 통해 미국의 힘을 늘렸습니 다. 강정에 건설하는 해군기지는 중국에서 가 연설하는 올리버 스톤 감독

장 가까운 미군기지가 될 것이며, 나중에 미군 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기지가 될 것입니다. 저

는 오랫동안 살면서 이제는 더 이상의 전쟁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 습니다. 미국은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야 엄청난 규모의 국방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최전선에 서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이야기하는데 평화를 건 설할 수 있는 힘은 환경에서 나옵니다. 제주의 물과 바다는 가장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오키 나와에서 있던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쟁이 발발하면 이곳이 최전선이 될 것입니다. 전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여러분들의 싸움은 절대 잊혀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외롭 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인 이슈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미국에 더욱 널리 알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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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럼비야, 보고싶다 마이크를 잡은 강동균 강정마을 회장의 말은 해일처럼 강하게 우리들의 마음에 구럼비의 추억을 심어줬다. “구럼비 바위에 갈 수 있던 마지막 날, 해안가에 갔다가 구럼비 바위를 향해 큰 절을 했습니다. 구 럼비야, 다시 보지 못할 것 같구나. 너무 너무 미안하다아~ 그런데 어느 순간에 문득, 강정에 모여든 사람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구럼비 바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구럼비들아, 반갑다아~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큰절을 해야겠습니다.” 넙죽 큰절을 하는 회장님의 몸짓은 평화로 웠다. 감동이었다. 마지막 날인 8월 4일은 참여자들이 해군기 지 공사 현장을 인간띠잇기로 포위하는 퍼포 먼스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 풍물패가 앞 장서고 마을 전체를 눈에 넣으며 골목골목을 돌았다. 어디선가 기타소리와 정체를 알 수 없 는 악기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노래하는 소리 가 들린다.‘평화가 무엇이냐’ 를 부르는 사람 들 중 조약골을 발견했다. 우리들은 손에 손을 잡고 공사 현장에 높게 쳐진 펜스를 에워쌌다. 인간띠잇기가 완성되었다. 우리들이 점령한 길에는 크고 노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구 럼비야 보고싶다.’ 경험하지 않은 일을 추억할 수 없다. 그러나 제주에서 평화를 외치며 구럼비를 추억할 수 있게 됐다. 내년에는 더 많은 당원들과 구럼비 가 돼 제주에 가고 싶다.

▶ 연설하는 강동균 회장님(위) ▶ 제주도에 도착하던 날 일행을 반기던 일출(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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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현장에서 대전 편

오랜시간 삶의 현장에서 진보정치의 밀알을 묵묵히 뿌리며 함께 성장해온 노동당 활동가들이 있다. <미래에서 온 편지>가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실어나른다. 창간호에서 대전시당을 찾아갔다.


지역에서 현장에서

이제 끝인가 싶으면 연대의 손길 이어져요

희망식당 대전점‘울림’

김윤기 대전시당 위원장, 희망식당 대전점 운영자

진짜 우연이었어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바로 얼마 전 딱 한번 술자리를 함께 한 노동자한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뜸들일 사이도 없이 제안은 돌직구로 날아왔다.‘민주당도 들락거리는 희망 식당을 진보신당이 그냥 두고보면 되겠냐?’ 는 것이다. 그 사람은 희망식당 1호점을 운영 했는데, 대전점을 열자고 했다. 제안과 수락은 간단했지만 준비는 만만치 않았다. 먼저 처음에는 대통령 선거 전까 지 딱 10번, 그것도 하루 점주들에 게 주방도 맡길 요량이어서 일손이 크게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 다. 그래서 당의 일이라면 늘 열성 인 이점진 당원과 정은희 당원에게

딱 한번 술자리를 함께 한 노동자한테서 연 락이 왔다. 뜸들일 사이도 없이 제안은 돌직 구로 날아왔다.“민주당도 들락거리는 희망식 당을 진보신당이 그냥 두고보면 되겠냐?”

가벼운 마음으로 부탁할 수 있었다. 그 양반들, 그때 쉽게 대답한 죄로 지금까지 약 30 차례의 일요일을 고스란히 희망식당에 반납했다. 그 다음은 식당을 찾아야 했다. 일요일에 쉬는 식당을 찾아야 했고, 임대료도 비싸지 않아야 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영업장을 내놓고 맡길 수 있을 만큼 담력 있는 사장님을 찾 아야했다. 마지막 조건이 쉽지 않았다. 여러 곳을 수소문하다 결국 자리를 잡게 된 곳은 ‘마포식당(대전시 동구 삼성동 소재)’ 이었다. 이점진 당원의 친구가 운영하는 곳인데, 마 침 일요일에 쉬기도 하고, 희망식당의 취지에 공감하기도 했다. 임대료도 한사코 받지 않 겠다는 것을 억지로 수도와 가스, 전기 사용료 등 실사용료를 받는 정도로 타협했다. 그렇게 2012년 9월 23일 문을 열었다. 첫날 점주는 당연히‘진보신당 대전시당’ 이었지 만, 다음 점주가 없었다. 당원들의 활동이 적지 않은‘민들레의료생협’ 이 점주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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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점 준비 중인 일일 점주들

고 한 정도였다. 딱 2주만 준비된 상태 로 그것도 바로 다음 주조차 준비되지 못한 상태로 일단 시작했다. 어떻게든 10번만 하자는 생각으로 주변을 찾다 보니 길이 생겼다. 그동안 좋은 관계를 쌓아 온 단체와 노동조합이 참여했고, 그 짧은 시간 동안 희망식당의 취지와 운영 방식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생겨 났다. 중간에 약속이 어긋나서 점주 없 이 운영한 주도 있었다. 그래도 지역 매체에 보도된 뒤 그 기사를 보고 찾아오는 손님도 생겨났다. 한 살림 가을걷이 행사 음식을 만들면서 제법 큰 수익을 내기도 했다. 대전이주노동자연대와 함께 했을 때는 베트남에서 이주한 여성들이 직접 음식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 그 사이 희망식당의 점주로 참여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생겼고, 희망식당은 계획된 10번을 모두 채우고도 자연스럽게 2013년으로 이 어졌다.

우연이 모여 인연을 만들고 이미 준비된 점주들과 입소문을 탄 터라, 1월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설 연휴 전까지는 순항에 순 항을 거듭했다. 올해 두 번째 점주인 도시공사노동조합은 도형남 위원장이 조합원들에게 하나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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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형 초대 메일을 보내, 중간에 음식이 동 나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날 동지들이 준비 한 성대한 뒤풀이와 따뜻한 마음도 감동이었다. 도 위원장은 이날 이후 희망식당의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변의 노동조합들에 참여를 권하고 실제로 성사시키고 있다. 가끔 주방에 들고 오는 아이스크림 과 시원한 맥주는 어디까지나 덤이다. 어느날은 오직 희망식당이 보고 싶어 서울에서 내려 온 학생이 있어서 우리를 모두 놀라게 했다. 대전이 전국에서 네 번째로 문을 연 희망식당인데 지금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그리고 희망식당 대전점에 큰 힘을 보탠 것은‘당 농업위원회’ 였다. 작년 11월 이 후로 유정란, 쌀, 각종 채소에 음료수까지 다양한 식재료들을 공수받았다. 대전 활동가들의 후원도 끊이지 않았다. 점주로 참여한 단체가 음식 재료를 후원하기도 하고, 각종 김치와 밑반찬들도 큰 도 움이 됐다. 고맙다는 인사도 못 전했는데, 이 지면을 빌어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그렇게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진짜 시련은 그 뒤에 찾아왔다. 첫 시련은 장소였다. 애초 자 리 잡은 식당의 주인이 바뀌었는데, 임대료 문제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처음에도 장소 문제로 고생 을 한터라 막막하기만 했는데, 점주를 맡은 적 있는 당원이 해결해줬다. 지금 희망식당으로 쓰고 있 는‘뱃고동낙지쭈꾸미(대전시 서구 만년동 소재)’ 의 배짱 좋은 사장님이 단번에 승낙을 해주셨다. 우 리도 그 호의에 보답하려고 빈 그릇 수납 상 태까지 모조리 사진으로 찍어 원래대로 돌려 놓는 등 최선을 다했다. 지금까지 꽉 찬 넉 달 을 이곳에서 운영하고도 별 일이 생기지 않았 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다음은 짐작할만 한 문제인데 더 이상 점주를 확보하기 어려워 졌다는 사실이다. 열다섯 번을 운영하고 나니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일일점주 그리고 당원들과 함께 ▼일일점주들의 귀여운 코스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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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를 원하는 단체가 더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만두기는 아쉽고,‘이제 그만해야 되나 보다’ 라는 말 이 입 안을 맴돌고 있었다. 이때 나서 준 사람들이 숨어 있던 당원들과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김소연 선거운동본부를 함께 한 동지들이었다. 이 동지들이 한 달을 채워주는 사이에 희망식당은 제 궤도에 진입하기 시작했고, 나머지 시간은 근심을 묻어두고 즐겁고 보람 있게 지낼 수 있었다.

고맙고 반가운 마음들이 모이는 공간, 바로 우리 노동당의 자리다 요즘‘희망식당의 순항 비결’ 을 묻는 질문도 많이 듣는다. 처음에 희망식당의 힘을‘쉬운 연대’ 라 고 이야기했다. 언제나 어디에서라도 먹어야 하는 밥 한 끼인데, 여기에‘연대’ 라는 의미까지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족과 함께 좋은 일 한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렇 다고 했다. 거기에 하나 더 붙였다.‘희망식당은 고마운 사람들을 만들어준다’ 고 말이다. 현장에서 싸우는 분들에게 희망식당은 존재 그 자체가 위로고, 고마움이다. 꼭 지원되는 투쟁 기금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자신들의 힘겨운 싸움을 응원하는 마음을 지켜주는 공간이 있기 때문에 잠시라도 흐뭇해 질 수 있다.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과 칭찬은 밥하느라 고생하는 사람들의 피로를 싹 씻어준다. 다시 찾아와주니 더 고맙다.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내 초대에 응해주니 운영자와 점주들도 기쁘다. 또 단위 노동조합을 넘는 만남을 제공하고 주선하는 자리로서도 그 의미가 작지 않 다. 이런 고맙고 반가움의 선순환이 희망

서른 한 차례 문을 열었고, 그동안 스물 여덟 개

식당을 유지하는 힘이다.

단체와 개인이 점주로 참여했다. 약 1800만원

지난 6월 30일을 마지막으로 총 31 차 례 문을 연 희망식당은 휴가에 들어갔다.

의 수익금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16개 노 동조합에 전달했다.

9월 첫 주 다시 문을 연다. 이 틈에 결산해 보니 그동안 28개 단체와 개인이 점주로 참여했고, 약 1800만원의 수익금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16개 노동조합에 전달했다. 희망식 당을 하면서 칭찬도 많이도 들었다. 과분한 일이다. 어쨌든 기쁜 마음으로 모범당원상도 받았고, 당 원 아닌 분들도 함께 기뻐했다. 희망식당을 하지 않았으면 알 수 없었을 보람과 칭찬을 받으니 보상 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여전히 희망식당에 촘촘한 계획은 의미가 없다. 더 진화하고 발전하려면 계획을 세우기보 다 그때그때 관심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는 것에 만족한다. 이마저도 재미와 보람이 사라졌다고 생각되면 그 날로 문을 닫을 생각이다. 우리는 소소한 일상에서도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 때문에 고 통 받고 심지어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는 싸움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지지하는 여러 가지 방 법들 중에 희망식당이 의미 있기를 바란다. 그런 일을 하고 있는 희망식당 대전점에 우리 당과 당원 들이 자리하고 있으니 이것으로도 충분한 일 아닌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우 고 연대하는 사람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이 바로 노동당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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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ON에서 PARTY하기 장주영(라흐쉬나) _대전시당 당원

아나키스트, 중도 보수, 중도 좌파, NL 모두 모인 청년유니온 청년유니온에도 우리 당원들이 꽤 많다. 그 중 누군가는 열혈 조합원이고, 누군 가는 페이퍼 조합원이고, 누군가는 애물단지 조합원이기도 하다. 당원 조합원들은 서로 당원인 걸 알고 있고 또 느슨하게 연결돼 있는 편이다. 조합원들이 모인 자리 에서 우리는 같은 당원들이니까 당연히 잘해봐야 하지 않겠어, 라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들은 솔직히 부담스럽다. 그냥 자신이 당원으로서, 조합원으로서 두 조직이 공 유하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으면 그것에 따라 활동하면 된다. 청년유니온은, 그 중에서도 대전청년유니온(이하 대전청유)은 꽤 특이한 곳이다. 처음 청유 중앙 조직을 준비한 사람들은커녕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청년유 니온이라는 이름 하나만 보고 처음 만나 시작한 조직이다. 정치 성향도 아나키스트, 중도 보수, 중도 좌파, NL 등등 매우 다양했다. 대전에서는 서로 상대방의 정치 성 향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정치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생겼고, 어 떤 사람이 어떤 주장을 했을 때 그게 대전청유가 청년노동조합으로서 알맞은 일인 가 아닌가로 판단하지, 그 사람이 어떤 정치적 견해를 가졌는가 또는 어떤 정파에 속한 사람인가로 판단하지 않았다. 공통의 목표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시각의 다양 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공유할 수 있었다. 진보 좌파라면 무조건 연대해야 하나 요즈음 대전청유는 오해를 받고 있다. 좌파도 아닌데 거기서 어떻게 활동해, 라 는 오해다. 2011년 8월 이후로 위원장을 연임하고 있는 나는 무척 씁쓸하다. 어쩌다 보니 주로 활동하는 조합원들이 우리 당원이고, 활동하다보니 집행부 중 과반을 차 지하고 있다. 청유 활동을 하면서 정치적 견해 차이 때문에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특 별히 감싸온 일은 없었다. 조합원들의 의견을 대전청유 안에서, 청유 안에서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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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청년유니온 창립총회날 ▶대전청년유니온의 거리캠페인 활동

조심스럽게 더 많이 듣고 서로 조율 하고 함께 사업을 의논해왔다. 그런 데 그동안의 노력이 송두리째 부정당 하는 기분이다.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짐작 은 간다. 작년에 대전 소재 대학의 한 동아리가 대전청유하고 함께 뭔가를 하고 싶다고 연락해왔다. 동아리에 관한 소개와 무얼 하고 싶은지 간략 하게 정리한 걸 가지고 와서 얘기하자고 했다. 그런데 하고 싶은 활동을 보고 얘기를 나눠봐도 이 사 람들이 학내에서 어떤 목표로 무슨 일을 하고 싶은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한미 FTA를 반대하는 등 진보적인 성격이니 당연히 연대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한 뒤 급기야 우리가 그 학교에 선이 없으니 자기들이 필드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 말에 운동으로 딜하지 말라고 하며 얘기를 끝맺었다. 그런데 이 얘기가 다른 당, 다른 정파라서 그랬다, 선배들의 은원이 우리까지 이어지면 안 된다 하 는 괴상한 말들로 퍼져 돌아다녔다. 그 동아리 대표가 특정 정파라는 사실은 한참 뒤 서울의 한 행사 에서 마주치며 알게 됐고, 어느 당 소속인지는 더더욱 알지도 못했다. 그때 화를 내고 일을 함께 하지 않은 이유는 그 사람들이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자기 학교 학생들을 대상화시켰기 때문이지, 정 파나 당적 문제가 아니었다. 노동당 당원이 모여 노동당이랑 상관없는 조직 운동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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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민감한 상황을 맞을 때마다 당적이 있다는 사실이 참 부담스럽다. 지난 국회의원 총선 거 때는 그래도 청유가 청년노동조합인데 공식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서는 안되며 당연히 진보정당 을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노동당 당원이라서 그렇게 생각한다고 치부할 수 있지만, 적어도 각 정당들이 청년과 노동 문제에 어떤 시각과 행보를 보였는지 청유가 제대로 평가하고 나서야 정치 논쟁이 가능하다 여겼다. 그래서 각 정당 평가를 요구했지만, 아직도 결과를 받아보지 못했다. 그때 정치논쟁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으니, 아마 다음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올해 초, 대전시당 위원장과 대전청유 위원장 겸직을 금지한다는 결정이 나왔을 때는 정말 모든 일을 다 그만두고 싶었다. 차라리 각 정당들에 관한 청유의 분석이라도 놓고 지향하는 바가 어떻게 다르니 그 당은 왜 안 되는지를 얘기했으면 나 특정 당색으로 청년유니온이 비춰질까봐 우 려된다니… 내가 만약 노동당이 아니라 민주 당 시당위원장이어도 공식적으로 이런 결정 을 내릴 수 있을까?

았을 텐데, 특정 당색으로 청유가 비춰지는 상 황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논의가 시작됐기 때문 이다. 그 말은 자기 소신에 따라 활동하는 대전 조합원들을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리는 의견이 기도 해서 매우 화가 났고, 한편으로는 솔직히 내가 만약 민주당 시당위원장이나 최고위원이

어도 공식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속상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동안 활동하며 살펴본 바로는 우리 당원인 조합원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청유를 청년 ‘단체’ 보다는 청년 ‘노동조합’ 으로 여기는 경향이 크고, 그런 경향에 따라 활동들을 한다. 노동조합 이 자신의 삶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다가, 생활 속의 노동권 문제에 더욱 민감해지고, 나 아닌 다른 사 람들의 노동권이 침해되지 않게 지켜내려면 해야 할 일들을 고민하고 실제로 시도하고 있다. 이런 다 양한 경험들이 당 안에서 어떻게 공유되고 청년과 노동 정책으로 만들어져야 할지는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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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진보정당 일찍 진보정당이 만들어져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나라들이 있다. 지금 우리 상황에서 보다 풍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사례는 무엇일까? 창간준비호에 이어 세계의 진보정당들을 찾아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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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진보정당 먼 좌파 이웃 좌파 ②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 우리의 새 당명이‘노동당’ 이다 보 니 전 세계 좌파정당 가운데‘노동’ 을 앞에 내세운 정당들에 관심이 가 지 않을 수 없다. 흔히 가장 먼저 떠 올리는 것은 영국 노동당이다. 그런 데 영국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영어 권 나라들(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 드, 아일랜드 등)에서 좌파 제1정당 의 명칭이‘노동당(Labour Party)’ 이다. 영어권 바깥에서는 노르웨이 와 네덜란드가 눈에 들어온다. 이들 나라의 사회민주주의 정당 역시 이 름이‘노동당’ 이다. 현재 브라질의 집권당인 노동자당(PT)도‘노동당’ 과 일맥상통하는 당명이라 하겠다.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의 반자본주의 강령 흔히 복지국가의 모범이라 일컫는 스웨덴에도‘노동 당’ 이 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도 역시 노동당이 좌파의 대표 정당이다. 이것은 스웨덴 복지국가 건설의 주역이 사회민주당이라는 우리의 상식과 어긋난다. 어찌 된 일일 까? 사실‘사회민주당’ 과‘노동당’ 은 같은 당이다. 사회 민주당의 본래 명칭이‘사회민주노동당’ 이다. 평소에는 줄여서‘사회민주당’ 이라 하기도 하고‘노동(자)당’ 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념을 강조할 때는 주로‘사회민주당’ 이 라 하고 핵심 지지 기반을 부각할 때에는‘노동당’ 이라 즐겨 부르는 것이다. 이게 뿌리 깊은 관행이 되어 있다. 스웨덴의 노동당, 즉 사회민주당은 지난 세기에 거의 50년 가까이 연속 장기 집권하면서 전 세계에서 최초로 복지국가의 기틀을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국내에도 그 역사를 깊이 있게 소개하는 책들이 나와 있다. 대표적으 로, 잉바르 카를손 외,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윤도형 옮김, 논형, 2009) / 홍기빈,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

적 유토피아>(책세상, 2011) / 신정완, <복지자본주의냐 민 주적 사회주의냐 : 임노동자기금논쟁과 스웨덴 사회민주 주의>(사회평론, 2012) / 하수정, <올로프 팔메 : 스웨덴이 사랑한 정치인>(후마니타스, 2013) 등이 있다. 이 책들만 봐 도 스웨덴 좌파 정치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다만 사회민주당의 강령과 최근 상황에

장석준_노동당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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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2001년에 채택된 이 당의 현 강령


•2010년 총선에서 패한 사회민주당의 비 운의 여성 대표 모나 살린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전임 대표 유홀트와 신임 대표 뢰프벤 (가운데 콧수염 기른 이가 유홀트, 오른쪽의 꽃다발 든 이가 뢰 프벤) •스웨덴 사회민주당 이론가 군나르 뮈르달 •사회민주당 이론가 에른스트 비그포르스 <사진설명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

은 사회민주주의 정당 강령치고는 꽤 선명한 어조로 현대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현대 사회의 수많은 모순들의 근저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대립과 충돌이 있다고 강령은 주장한다.“이러한 모순 들 속에는 민주주의의 힘과 자본의 힘 사이의 갈등, 민중의 이해와 자본의 이해 사이의 갈등이 선명 한 형태로 존재한다.”신자유주의가 자본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제압하려 한다면, 사회민주당의 지향 은 그 반대다. 즉, 민중의 힘으로 자본을 제압해야 한다는 것이다.“사회의 모든 권력은 사회를 함께 구성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경제적 이해는 민주주의를 제한할 권리를 지니지 못한다. 반 면 민주주의는 언제나 경제에 조건을 부여하고 시장에 한계를 설정할 권리를 지닌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는 구분돼야 한다” 그럼 이러한‘경제 민주화’ 는 어떤 구체적인 수단을 통해 가능한가? 사회민주당 강령은 이 물음에 답하면서 독특한 철학을 제시한다.‘시장’ 과‘자본주의’ 를 엄격히 구별하면서, 시장 경제는 인정하 지만 자본주의는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는 구분되어야 한다. 시장 경제 는 재화와 용역이 교환의 중재자인 화폐를 통해 소유자를 바꾸는 분배 체계다. 반면 자본주의는 자본 이 최우선의 규범으로서 보상을 받는 권력 체계다.” ‘시장 = 자본주의’ 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분명한 연관 관계도 있다. 시장이 사회 및 경제의 다른 영역들을 지배하려 들 때 그것은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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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적으로 자본주의 지배 질서를 낳는다. 따라서 사회민주당의 경제 정책은 무엇보다 이러한 시장의 확장을 제한하는 것이어야 한다.“사 회민주당이 지향하는 경제에서 시장 경제는 경제 생활의 단지 일부일 뿐이다. 사적 이윤의 요구가 다 른 모든 이해를 지배해서도 안 되며 사회 발전의 방향을 결정해서도 안 된다. 시장이 사회 공공재와 공동체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져서도 안 된다.”흥미로운 입장이다. 논쟁의 여지도 많지만, 우리 노동 당 강령이 주창하는“자본주의 극복” 과 관련해 함께 토론해볼 만한 주장이다.

사회민주당의 위기와 전화위복 그런데 안타깝게도 최근 스웨덴 사회민주당이 보여준 모습은 이 당의 강령이 표방하는 단호한 입 장과는 좀 거리가 멀다. 2010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은 우파 연정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하기 위해 여 성 대표 모나 살린을 앞세워 야심차게 선거에 임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패배였다. 그래서 지금도 스 웨덴에서는 온건당, 중도당, 자유인민당, 기독교민주당 등 우파 4당 연립정부가 집권하고 있다. 이 우파 연정의 복지 축소 기조 때문에 지난 5 월에는 스톡홀름 인근에서 빈민층의 폭동이 사회민주당 강령은 이 물음에 답하면서 독특

일어나기도 했다.

한 철학을 제시한다.‘시장’ 과‘자본주의’ 를

한편 총선에서 패배한 사회민주당 안에서

엄격히 구별하면서, 시장 경제는 인정하지만

는 선거 평가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

자본주의는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졌다. 특히 당 내 좌파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당이 신자유주의에 흔들려 강령의 이 념과 원칙으로부터 이탈한 것을 패인으로 지

목했다. 이 분위기를 등에 업고 새 대표로 선출된 인물이 부대표이던 호칸 유홀트다. 그는“시장 경 제는 지지하지만 자본주의는 반대한다” 는 당 강령 내용을 새삼 강조하면서, 아동 빈곤 철폐, 청년 실 업 축소, 공공부문 임금 인상, 노후 연금 인상, 사유화된 전력과 철도의 원상회복을 핵심 정책으로 제 시했다. 모처럼 사회민주당이 활력을 되찾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때 언론이 유홀트 대표의 배우자 가 주거수당을 과다 청구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 문제로 당이 다시 침체 상태에 빠지자 유홀트 대표는 결국 자진 사퇴했다. 자칫하면 당의 위기가 장기화할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러나 새 대표 뢰프벤의 등장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뢰프벤은 당 대표가 되기 전까지 12년간 금 속노조 위원장을 맡았던 고참 노동운동가다. 사회민주당이‘노동당’ 이라는 별칭을 애호할 정도로 노 동자 정당임을 강조하지만, 놀랍게도 124년 역사 동안 이 당에는 노동운동 출신 대표가 한 명도 없었 다. 뢰프벤이 처음이다. 그렇다고 뢰프벤이 유홀트처럼 당 내 좌파인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금속 노조 시절부터 실용주의자로 유명했다. 심지어는 대재벌인 발렌베리 가문과도 막역한 사이다. 당 대 표가 되고 나서도 이민 규제에 찬성하는 등 현실에 영합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럼에도 최초의 노동조 합 출신 당 대표라는 사실이 던져주는 효과는 작지 않았다. 덕분에 당 지지율은 다시 30% 이상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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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높아졌다. 뢰프벤은 국내 정책의 실용주의를 국제 정책의 새로운 비전으로 보완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는 노 동조합 지도자의 경력을 살려, 전 지구적인 자본-노동 간 협약을 맺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전 세계 노동자의 임금 및 노동 조건 기준을 정하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의 지향을 지 구화할 수 있으며 이민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지난 세기 중반에 스웨덴 사회민주당이 마주했던 갈림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회민주당의 두 가지 비전 1960년대를 전후해 스웨덴의 국내 복지 체계가 완비되자 사회민주당 안에서는 다음 단계의 원대 한 목표로 두 가지 비전이 등장했다. 하나는 소비 영역의 민주화라 할 수 있는 복지국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생산 영역의 민주화를 추구하자는 것이었 다. 즉, 노동자가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주도하는 체제로 전환하자는 것이었다. 이 방향의 주창자

1960년대를 전후해 스웨덴의 국내 복지

는 당의 대표적 이론가 에른스트 비그포르스였

체계가 완비되자 사회민주당 안에서는 다

고, 이게 정책으로 나타난 게 1970년대에 루돌프

음 단계의 원대한 목표로 두 가지 비전이

메이드네르가 금속노조의 위촉을 받아 제출한 임

등장했다.

금노동자기금 구상이었다(위에 소개한 신정완의 책과 함께,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책세상, 2011] 참고). 아쉽게도 이 구상은 자본의 거센 반발 때문에 불발로 끝나 버렸다. 다른 한 방향은 일국 차원의 복지국가를 이제는 전 세계로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이 입장의 대표 자는 당의 또 다른 주요 이론가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1974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공동 수상) 인 군나르 뮈르달이었다. 뮈르달은 1960년에 낸“복지국가를 넘어서 : 경제 계획과 그 국제적 의미” 라는 인상적 제목의 저서에서 이런 비전을 과감히 제시했다. 하지만 뮈르달의 구상 역시 임금노동자 기금 구상과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추진되지 못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뮈르달이 염원한 복지국가의 지구화가 아니라 금융화된 자본의 지구화가 관철되었다. 하지만 이제 신자유주의의 황혼이 완연해 지자 뢰프벤은 이 불발된 전망을 되살리려 하는 것이다. 현재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우파 연정의 인기 하락에 힘입어 내년 총선 승리의 꿈에 부풀어 있다. 2010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과 함께‘적색-녹색 연합’ 을 결성했던 좌파당, 녹색당의 지지율을 사회 민주당 지지율에 더하면 우파 연정 참여 정당들의 지지율 총합을 적게는 6%, 많게는 10% 차이로 앞 서는 추세다. 이 상승세가 계속 유지돼 스웨덴에 다시 좌파 정부가 들어설 수 있을까? 새 좌파 정부 는 뢰프벤의 전 지구적 케인스주의 구상을 과연 진지하게 추진할까? 193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스 웨덴이 다시 한 번 사회민주주의 갱생의 진원지로 나서게 될까? 이런 물음들 때문에 우리는, 스웨덴 이 우리의 새 교과서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서 좀처럼 눈을 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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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진보정당 구라파 통신

프랑스 좌파정치, 사회적 경제를 품다 사회적 경제 개념은 1970년대 프랑 스에서 협동조합(cooperative), 상 호공제조합(mutual), 민간단체 (association)의 연합조직들이 공동 의 정체성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 기 시작했습니다.

들어가며 최근 들어 한국에서도 종종 쓰이고 있는 사회적 경제 ` (economie sociale)라는 개념은 1970년대 프랑스에서 사 용되기 시작하여 1980년대 이후 점차 유럽 및 유럽 바깥 지역으로 확산된 개념입니다. 19세기에도 같은 개념이 비 슷한 용법으로 사용된 적이 있고, 오늘날 사용되는 개념 도 당시의 용법에 영감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보면 현재 사용되는 사회적 경제 개념은 1970 년대 프랑스라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특정한 주체, 즉 협 동조합(cooperative), 상호공제조합(mutual), 민간단체 (association)의 연합조직들이 함께 공동의 정체성을 지 칭하는 표현으로 제안하고 사용하기 시작한 것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는 60년대 말과 70년대 초 정당성의 위 기와 경제적 위기가 중첩됐던 서구사회에서, 이에 대한 해법으로 시민사회의 역동성을 표현하는‘프랑스적’방 식이 등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사회적 경제라는 개념이‘1970년대 프 랑스’ 라는 역사적인 맥락을 벗어나, 점차 유럽 및 유럽 바 깥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일종의 보편성을 갖는 개념으로

엄형식_유럽당협 당원, 벨기에 리에쥬대학 사회적경제센터 박사 과정 연구원, 국제노동자협동조합 /사회적협동조합연맹(CICOPA) 통계조사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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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돼 왔다는 점입니다. 사회적 경제 개념은 이를 수용 한 나라와 지역에 따라 각각의 맥락에 맞는 재해석의 과 정을 거치면서 점점 다양한 해석을 덧붙여 왔습니다. 이 를 통해 보다 보편적인 성격을 갖게 됐으며, 오늘날에는 시민사회, 제3섹터 등 유사한 개념들과 함께 시민사회의


▲좌파당 2013년 당대회 연단에 선 당대표 멜랑숑(출처: 페이스북)

공산당 36차 당대회 모습▶ (출처 : 프랑스공산당 사이트)

역동성을 지칭하는 하나의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국과 같이 사회적 경제 개념을 뒤늦게 수입하는 나라들에서는 개념을 둘러싼 많은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개념이 형성되고 발전한 구체적인 맥락에 대한 이해가 생략된 채 마치 사회적 경제가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적인 의미를 갖는 실체인 것처럼 이해되는 순간, 원래의 맥락에서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면서 개념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개념은 현실을 새롭게 주조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개념이 점차 보편성을 획득하면서 겪게 되는 숙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 다. 하지만 현재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경제 개념의 수용과정은 문제적입니다. 전파와 수용의 속도가 과도하게 빠르고, 개념과 그 맥락에 대한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근거 없이 범람하는 가운데, 사람들 의 현실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공공정책이 개념을 너무 쉽게 채택하고 소비하기 때문입니다. 진보좌파 진영 역시 이러한 현상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가령, 사회적 경제 개념과 관련해 진보좌파 진영에서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 경제 개 념이 변혁적/해방적 성격을 가질 수 있는가? 아니면 양의 탈을 쓴 신자유주의의 도구일 뿐인가? 이 물음들에 대해 개념이 스스로 대답해 줄 수는 없을 것이고, 어딘가 정답이 실체로 존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 질문을 화두로 사회적 경제라는 개념과 그 맥락을 이해하고, 한국사회에 적합한 재해석 을 시도하는 것이 오히려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러한 취지에서 이 글에서는 사회적 경제 개념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겠습니다. 또 당사자 들과 사회 일반이 이 개념을 통해 지칭되는 구체적인 실천들을 사회적 실체로 인정하고 있는 프랑스 에서, 좌파정치 세력이 사회적 경제 운동의 변혁적/해방적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 간 단하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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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좌파정치 세력과 사회적 경제 오늘날 프랑스 좌파정치 세력은 주요하게 사회당, 녹색당, 좌파당, 공산당1) 그리고 원내외 10여 개 군소 정당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좌우파 모두 이합집산이 잦은 프랑스 정치상황에서, 좌 파정치 세력의 사회적 경제에 대한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역사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이 를 위해, 사회적 경제 개념이 등장하고 발전한 70년대부터 90년대 초반, 다원주의 좌파 연립정부를 통해 주요한 사회정책의 수단으로 사회적 경제가 상당한 수준의 제도적 발전을 이룬 90년대 후반, 그리고 경제위기 이후 오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대항물로 좌파 전반으로부터 사회적 경제가 주목을 받고 있는 최근의 시기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970-80년대 : 두 번째 좌파와 사회적 경제 ` 사회적 경제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발전시킨 주체들과 프랑스에서 두 번째 좌파(deuxieme gauche)로 불렸던 경향은 서로 긴밀하게 관련돼 발전해왔습니다. 두 번째 좌파는 프랑스 좌파의 전 통적 국가주의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면서 시민사회의 능력과 역할을 중시했습니다. 거시경제 정책 에서는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를 지향하면서도 특정한 이념적 노선보다는 구체적 사안에 대한 실 천적 태도를 강조하며, 주요하게 분권주의, 자주관리, 개인의 자율성, 휴머니즘 등을 강조했습니다. 이 경향은 소련에 종속적이었던 공산당과는 분명한 거리를 뒀습니다. 동시에 인도차이나와 알제리 식민지 독립전쟁에서 제국주의의 입장을 벗 연합사회당이 현실정치에서 실패를 거듭하면 서, 두 번째 좌파 경향의 상당수는 70년대 중 반 미테랑이 새롭게 재편한 사회당에 합류하 게 됩니다.

어나지 못했던 사회당(SFIO)의 노선에 반발 한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층과 지식인층, 카 톨릭 청년운동, 카톨릭계 노총이었다가 전 환한 CFDT2), 민간단체 활동가 등을 주요한 토대로 했습니다. 두 번째 좌파는 1950년대 후반에 정치적 경향으로 형성됐고, 1959년

` PSU)을 통해 단일한 정당질서를 갖추게 됩니다. 연합사회당(Parti Socialiste Unifie, 연합사회당은 두 번째 좌파라 할 수 있는 경향이 다수였지만 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를 비롯한 다

1) 좌파당과 공산당은 현재‘좌파전선’ 이라는 이름으로 선거를 포함한 주요한 정치현안을 함께 대응하 고 있습니다. 2) CFDT(Confederation fran aise democratique du travail)는 CGT와 더불어 프랑스 주요 노조총 `` ` 연맹 중 가장 규모가 큰 노조총연맹입니다. 1919년 프랑스카톨릭노동자총연맹(CFTC)으로 설립됐으 며, 이후 1964년 프랑스민주노동총연맹(CFDT)로 개칭했습니다. 현재 조합원 수로는 가장 큰 총연맹 (86만명)이고, 노사협의기구 대의원 수에서는 CGT에 이은 두 번째 규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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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 좌파들도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68운동 과정에서 기존 정치정당 중에서는 유일하게 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지지를 천명했으며, 이후 68운동의 영향을 받은 세대들과 많은 교감을 나눈 정당이었습 니다. 그러나 연합사회당이 현실정치에서 실패를 거듭하면서, 두 번째 좌파 경향의 상당수는 70년대 중반 미테랑이 새롭게 재편한 사회당에 합류하게 됩니다. 국가와 시장의 압도적 우위 속에서 시민사회의 존재 자체가 주목받지 못하고 시민사회에 기반을 둔 사회운동이 간신히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에, 두 번째 좌파는 이러한 사회운동에 일정한 토대를 두 면서 시민사회의 능력과 역할을 이념적으로 지지하는 주요한 정치세력이었습니다. 특히 1981년 프 랑스 사회당 집권 후, 두 번째 좌파 경향은 사회당 정부 내부에서 사회적 경제 개념을 제도적으로 인 정하고, 이를 공식적으로 다루는 정부부처 및 관련한 지원기금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한 두 번째 좌파 경향의 지도자 중 하나인 자크 들로르가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이 되 면서, 사회적 경제 개념이 프랑스를 넘어서서 유럽 전반으로 확산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 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들 경향의 지도자였던 미셀 로까르와 자크 들로르가 정계에서 은퇴했습니 다. 이후 정치적 그룹으로서 두 번째 좌파는 실질적으로 소멸하게 되고 사회적 경제에 대해 공공연히 우호적 입장을 보이는 사회당 내부 그룹은 구심을 잃게 됩니다. 1990년대 후반 : 녹색당과 다원주의 좌파 연립정부 90년대 중반 이후 사회적 경제에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정치세력은 녹색당입니다. 두 번 째 좌파와 유사한 정치적 지향을 공유한 68운동 세대 및 이들을 토대로 형성된 프랑스 녹색당은 다 양한 풀뿌리 사회운동과 생태주의 운동을 바탕으로 발전 해 왔습니다. 사회적 경제 운동 역시 자연스럽게 녹색당 운동의 토대가 되는 동시에, 녹색당도 사회적 경제를 가 장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정당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사회적 경제에 대한 녹색당의 적극적인 태도는 녹색당이 참여했던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지속된 조스팽 수상 주도의 다원주의 좌파(gauche plurielle) 연립정부가 사 회적 경제를 적극적으로 제도화하고 지원하도록 만들었 습니다. 이 시기 다원주의 좌파 정부는 반소외법을 제정했습니 다. 이를 통해 불안정한 지위에 있었던 일련의 노동통합 관련 활동들을 제도 안으로 안정적으로 편입시키고, 공익 협동조합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비영리협동조합 지위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행정부에 사회적 경제 담당 국무비서실을 설치했고, 고용연대부장관의 주도로 사회적 경제 현황과 과제를 진단하는 조사 작업을 수행하

녹색당 크리스틴 부샤르 릴 광역시의원. 연대경제를 위한 지방정부네트워크 대 표를 맡고 있다. (출처 : 지역신문발전위 원회 프랑스 사회적경제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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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등 사회적 경제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한편 다원주의 좌파 선거연합을 통해 치 러진 2000년대 초반 일련의 지방선거를 통해 녹색당은 각급 지방정부 연립여당에 참여하게 됐습니 다. 이는 지방정부 수준에서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8년 이후 : 사회적 경제에 대한 변혁적/해방적 해석의 확산 70-80년대 두 번째 좌파가 시민사회 부문 자체의 활성화에, 90년대 녹색당을 포함한 다원주의 좌파 연립정부가 사회적 경제의 사회정책적 역할에 보다 초점을 기울였다면,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좌파정치 세력들은 사회적 경제에 대해 좀 더 급진적인 성격의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금융자본주의 체제의 오작동을 공공연하게 확인한 경제위기 이후, 사회적 경제는 유럽에서 좌우 파 모두가‘새로운 대안’ 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으로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경제위기로 인해 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거나 해외이전 하게 됐습니다. 이로 인해 일자리를 잃는 노동 자들이 해당 기업을 인수해 노동자협동조합으로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좌파정치 세력 들은 사회적 경제에 대해 좀 더 급진적 인 성격의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전환하려는 시도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고, 지 역의 경제활동과 산업토대의 붕괴를 우려하는 다 양한 지역사회 주체들이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사 건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2000년대 초반 아르헨티나 경제위기에서

자본가들이 버린 수천 개의 기업을 노동자 자주관리를 통해 협동조합으로 전환한 경험이 인상적으 로 소개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에서 증가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기업인수 및 협동조합화는 좌파정치 세력 전반, 특히 사회당내 좌파 및 좌파당, 공산당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좌파진영의 사회 적 경제 재평가를 추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012년 집권한 프랑스 사회당 정부는 당내 좌파진영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각각 사회적 경제부 장관과 산업재건부 장관을 맡으면서, 기업을 노동자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것을 촉진하는 제도3), 사회적 경제 관련법의 도입, 사회적 경제 조직들을 위한 정책금융기관 설립 등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좌파당과 공산당 또한 최근 각각 당내에 별도 위원회를 구성해 사회적 경 제에 대한 당의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이를 통해 기업을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것과 구체적인 대안 경제 실험으로서 사회적 경제가 갖는 변혁적/해방적 성격에 주목할 것을 천명했습니다. 지금까지 사 회적 경제는 노동통합 등 신자유주의 정책들에서 파생된 문제를 치유하는 성격의 사회정책과 관련 해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공공서비스 및 주요 생산부문의 국유화 또는 재국유화 와 관련한 사회적 경제의 역할, 지역중심 순환경제와 생태적 전환을 위한 기본 토대로서 사회적 경제

3) 기업이 매각을 검토할 경우 노동자들에게 우선적으로 구매의사를 묻도록 하는 조항을 의무화하고, 일상적으로 기업의 경영 상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노동자들이 상시적으로 경영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보장하는 내용 등이 이 제도에 포함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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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정치권력을 잡기 이전이라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 대안” 으로서 사회적 경제를 보다 급진적인 방식으로 해석하고 개입할 것을 좌파당과 공산당은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좌파당은 기존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적 경제 해석과 선을 긋기 위해 자신들은 ` ‘해방적 사회적 경제(economie sociale` emancipatrice)’ 라는 해석으로 접근할 것을 밝히고 있습니 다. 물론 이러한 해석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미 사회적 경제 현장과 녹색당에서 사회적 경 제를 사회정책의 도구가 아닌‘그 자체로 자본주의와 구분되는 하나의 온전한 대안경제’ 라는 접근을 해왔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최근의 현상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순치돼 온 사회적 경제 개념을 변혁적 /해방적으로 재해석해 사회적 경제가 가지고 있는 해방적 에너지를 복구할 수 있는 전기가 되고 있 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며 사회적 경제 현장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초심이었던 변혁적/해방적 해석과, 주어진 현 실에 대한 실천적 판단의 복잡한 갈림길에 매순간 마주 설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경우 자신의 활동 을 충분히 성찰하지 못하고 장기적 전망을 돌아볼 시간을 갖지 못한 채, 하루하루 실무적으로 주어진 일에 치여 살아가고 점점 더 관성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사회적 경제 현장의 활동가들이 어느 정당보다 많이 참여하고 있고, 또한 강령과 정책에서도 사회 적 경제에 대한 열린 해석을 가지고 있는 정당으로서 노동당은, 현장과 괴리되지 않으면서도 이미 주 어진 조건이 얽맨‘현실’ 에 갇히지 않는, 사회적 경제의 변혁적/해방적 해석자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 빠르 고 간단한 답을 추구하는 것은 중 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당 강 령의 정신에 입각해, 자신의 활동 을 성찰하고 해석하는 현장 활동가 들과 성실하고 진지하게 정보와 자 료를 다루는 연구자들 및 정책가들 이 생산적인 대화와 토론을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으로써 한국 사회 상황에 어울리는 해방적 성격 의 사회적 경제에 대한 전망을 만 들어낼 수 있는 장을 조직하는 것 이 당이 구체적으로 수행해야 할 과제라 할 것입니다.

2012년 프랑스노협연맹 총회에서 연설하는 베누아 아몽 사회적경제부 장관 (출처 : 프랑스노협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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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엽 사진전

변 경 2008 ~ 2012

지리적 변경 ·심상적 변경·노동의 변경 사진중심 류가헌 (02-720-2010)

2013. 10. 1 ~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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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포럼

무상교통은 가능하다? 정말로! 김상철_노동당 정책위원

올해 5월 폴란드의 좌파 정당인‘노동당August 80’ 은 무상교통 도입을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대중교통을 운영하는 회사들이 요금 을 인상하고 시민들은 그보다 싼 자가용을 이용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자, 아예 무상교통을 실시 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실제로 폴란드의 조리Zory 주의 경우에는 2014년부터 무상교통을 실시하기로 했다. 계속 폴란드‘노동당-August 80’ 의 무상교통 캠페인

교통요금이 오르자 가족 구성원이 많은 중산층 이하 가구에게 큰 부담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결국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게 되면 또 다시 요 금이 오르는 악순환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보 도에 따르면 전체 주민보다는 우선적으로 절반 정도 되는 주민들이 혜택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 다. 지난 5월 전라남도의 도서지역인 신안군에서

대중교통이 너무 비싸면 가족 구성 원이 많은 중산층 이하 가구에게 큰 부담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결국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게 되면 또 다시 요금이 오르는 악순환이 반복 된다.

는 작은 행사가 있었다. 압해도에 버스공영제가 도입된 것을 알리는 자리였다. 신안군의 경우에 는 2007년 임자도를 시작으로 올해까지 14개 읍과 면에 65세 이상 무료, 일반 1000원, 학생 500원의 요금을 받는 공영버스 제도를 도입했 다. 신안군과 같이 운행거리가 길고 승객 수가 적은 지역의 경우에는 버스노선이 계속 줄어들 거나 운행 간격이 넓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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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과 지역 버스업체가 협약을 통해서 절충안을 내놓은 것이다. 충청남도 서천군은 지난 5월에‘희망택시’ 라는 공영택시서비스를 시작했다. 도로 여건과 승객 부 족 등을 이유로 농어촌 버스가 다니지 않아, 3~40분을 이웃 마을로 걸어가서 타야 할 정도로 대중 교통이 열악했던 곳이다. 운행 방식은 202대의 택시를 마을별로 전담택시로 지정하고, 주일에 3~4 일간 장날을 중심으로 주민들을 읍내까지 데려다 주는 형태다. 읍내로 가는 데는 버스요금인 1100원 만 내면 되고 마을에서 면 소재지까지 가는 경우에는 한 대당 100원만 내면 된다. 나머지 비용은 군 이 지원하는 것으로 했다. 지난 7월에 공개된 운행 실적을 보면 6월 한 달 동안 1회당 2.53명씩, 1237 명의 주민이 이용했으며 군이 부담한 비용은 293만 원 정도로 나타났다. 새롭게 재창당한 노동당은 하반기 중점 정책사업으로‘무상교통’ 을 잡고 이를 위한 정책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이런 저런 당 행사나 외부 행사를 오가며 무상교통과 관련하여 말을 꺼내면‘그게 되 냐?’ 는 반응에서부터‘당장은 힘들겠지만 할 만하다’ 는 반응까지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질문 중 가장 많은 것은‘왜 하필 무상교통이냐?’ 는 질문이었다. 이 글은 구체적인 정책 얼 개보다는 무상교통 정책이 가지고 있는 함의를 짚어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무상교통은 필요한 사업임과 동시에‘되는 사업’ 이고, 바로 지금 고민해야 하는 정책이라는 데 공감을 바라는 마음이다.

대중적이고 급진적인 정책으로서 대중교통 최근 들어 생활권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사전적으로 보면 걸어서 10분 거리에 닿는 동심원이 라고 볼 수 있다. 경전철 10개 노선을 발표한 서울시가 경전철이 필요하다며 내걸었던 교통복지의 근거로‘걸어서 10분 거리에 지하철역 1개’ 가 포함되었을 정도로, 생활권이라는 기준은 공공정책 안 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런데 이 말이 갖는 함정이 있다. 이 말에는 한 사람의 생활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에 대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버스나 지하철은 타

한 질문이 빠져 있다. 통상의 생활권 개념은 사실

기 싫으면 타지 않아도 되는 선택재가 아

상‘주거’생활권에 가깝다. 자고 먹는 집에서의

니라 사회활동을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거리를 중심으로 그려진 동심원인 셈이다. 하지

하는 필수재다.

만 우리 생활은 주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하여 직장에도 나가야 하고 배우기 위해 서 학교도 가야 한다. 또한 여가 시간을 즐기기 위해 다른 지역에 있는 문화시설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공간을 중심에 놓지 않고 사람을 중심에 놓게 되면 좀 더 복합적인 생활권의 그림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한 사람이 먹고 자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활동을 하기 위한 범위로 생활권을 고려한다면 반드시 수반되는 사항이 이동에 대한 것이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데 과거와 같이, 혹은 전통적인 생활권 개념과 같이 도보만 이용하면 좋겠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그런 상황이 일반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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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다. 오히려 장시간의 이동을 통해서 직장에 가고 학교에 가고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 한 사람이 갖고 있는 복합적인 생활권들을 묶어 주는 것이 바로 대중교통이다. 우리가 매일 이용 하는 버스나 지하철은 타기 싫으면 타지 않아도 되는 선택재가 아니라 사회활동을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재다. 또한 버스나 지하철의 노선은 한 개의 노선에 복수의 사업자가 경쟁할 수 있 는 것도 아니고, 요금 구조가 있기는 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일반적인 사회생활이 불 가능하다는 점에서 공공재의 성격도 강하게 띠고 있다. 무엇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일 텐데 이 경우 자가용 이용과 대중교통 이용 간에 비용의 측면에서 차이가 크다. 때문에 대중교통이 싫다고 쉽게 자가용을 이용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대중교통 정책은 계층 간에 상이한 영향을 주는 복 지재이기도 하다. 대중교통은 한 사람이 사회적 존재로 생활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그런데도 대중교통은 영리를 추구하는 사업자에 의해 독점되고 있고, 교통정책을 주도하는 행정에 의해서도 가장 심하게 왜곡되 는 갈등의 장으로 남아 있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경전철의 경우만 놓고 보더라도, 시민들의 발이어야 하는 대중교통수단 이 민간기업의 이윤 추구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전철을 이용하지도 않는 시민들의 막대 한 세금으로 지원해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민들에게 필수적인 교통 서비스를 공급하겠다고 도 입된 경전철은 높은 요금과 낮은 실효성으로 시민들의 외면을 받는다. 또 민간사업자의 이윤을 보장 해주기 위해 세금을 사용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대중교통의 주요한 특징 중 어느 하나도 충족하지 못

무상교통을 주장하는 브라질 사회단체인‘Movimento Passe Livre’가 제안하여 촉발된 소위‘브라질의 봄’ . 몇몇 도시의 버스, 철도 등의 요금인상이 시위를 촉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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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무엇보다 노동당은 대중교통이 부의 효과적인 재분배와 함께 공간 정의와 연관된다는 점에 주목 해야 한다. 알다시피 교통수단과 같이 계층 분리가 심한 공공서비스는 찾아보기 힘들다. 예를 들어 의료서비스의 경우 경제적 차이로 서비스 질이 크게 차이가 나지만, 교통수단과 같이 소유-비소유 의 문제로 나타나진 않는다. 또한 자가용과 같이 주차장이나 도로 등 배타성을 지닌 도시시설을 요구 하지도 않는다.

대중교통을 둘러싼 두 개의 함정: 수익자 부담과 재정 건전성 하지만 대중교통 정책은 사회정책으로 적절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동안 교통정책을 살펴보면 서 확인한 함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혜택을 받는 사람이 부담해야 한다는 수익자 부담 원칙과, 적 자는 나쁘다는 재정 건전성에 대한 신뢰가 그것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아마 지역에서 버스나 지하철의 요금이 오른다고 하면 첫 번째 반응은‘서민부담이 가중된다’ 는 논리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지방정부나 지방의회에서 논의되는 과정을 가만히 보면 한 가지 논리로 귀착된다. 도대체‘원가’ 가 얼마냐는 것이다. 왜 그럴까? 다른 사회서비스와 다르게 대중교통은 개별화된 비용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버스를 이용하는 사 람과 이용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뿐만 아니라 버스를 하루에 2번만 이용하는 사람과 10번 이상 이용 하는 사람과 같이 개인적 차이가 발생한다. 이렇게 개인화된 소비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요금은 곧 ‘비용에 걸맞는 대가를 지불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결국 버스나 지하철을 운영하 는 데 운송원가는 얼마이고 현재 요금에 비춰보면 얼마를 더 싸게 타고 있다는 식의 간단한 계산식이 나오는데, 대부분의 요금 갈등이 이런 식으로 수렴되고 만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수익자 부담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기본적인 생활에 부가되는 것이어야 타 당하다.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되는데 타는 경우,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데 이용하는 경우가 있어야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과 비교해서 부가적인 편익을 가지는 것에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교통은 그렇지 않다. 앞에서도 봤지 만 한 사람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단순히 생존을 중심에 놓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보편적인 사회

대중교통을 바라본다면 왜 장애인들이 그토록

적 권리인 이동권과 닿아 있다. 여기에 수

이동권 투쟁에 애써왔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

익자 부담이라는 원칙이 끼어드는 것은 논

다.

리적 모순이다.

다시 말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보편 적인 사회적 권리인 이동권과 닿아 있다. 여기 에 수익자 부담이라는 원칙이 끼어드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그런데도 대중교통과 관련된 이슈에 는 끊임없이 수익자 부담이라는 함정이 도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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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이 바로 재정 적자와 관련된 것이다. 공영버스를 운영하고 지하철 공사를 운영하는 데 드 는 비용이 발생하는데, 이것은 버스나 지하철을 운영해 거두는 수입으로 상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는 주장이다. 그러니까 이런 비용만 줄일 수 있다면 대중교통을 운영하는 것이 지방정부여도 좋고 민간사업자 여도 좋다는 주장으로 나갈 수 있다. 실제로 민자사업으로 할 경우, 직접 운영하는 경우와 비교했을 때 재정지출이 줄어들 수도 있다.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런 접근법에도 문제가 있다. 만약 지방정부가 직접 대중교통을 운영해서 매달 100원의 재정지원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래서 이 지방정부는 대중교통을 민간사업자에게 넘겨서 운영하도록 했고, 이로 인해 매달 80원의 재정지 원이 발생하는 것으로 줄었다. 이런 상황은 거의 없지만, 민자사업을 비판하는 것이 단순히 비용적인 측면이라고 한다면 역으로 앞의 예시처럼 재정지원이 줄어드는 경우에는 민자사업이라도 받아들여 야 한다는 논리적인 결과가 나온다. 대중교통 체계는 생각보다 단순한 운영원리를 가지고 있다. 버스의 경우에는 노선과 버스가 있을 뿐이고, 지하철의 경우에도 노선과 지하철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비용은 노선을 운영하는 시스템과 버스나 지하철을 운행하는 데 따르는 것이다. 경영학적으로 보면, 대중교통이라는 사업은 경영적 혁 신을 바탕으로 비용을 줄이거나 이익을 늘리는 데 명확한 한계가 있다(기껏해야 지하철 무인운전과 같이 부분적인 기술혁신이나 역무인원을 줄이는 인력 감축이 전부다). 따라서 민간사업자가 운영해 서 발생하는 20원의 편익은 단순히 결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통상적으로 노동자의 감축을 통해서, 혹은 요금인상을 통해서 비용을 외부화하는 것이 수익 창출의 대부분인 것은 대중교통이 가 지고 있는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당연한 결과 이다. 대중교통에 대한 재정지원이 비용으로 고려

20원의 편익 때문에 대중교통에 대한 정

되고 사회적비용이 재무적 득실로 치부되는

책결정 권한의 일부를 민간사업자에게 제공

순간 대중교통 정책은 사실상 사회서비스라

해야 된다. 또한 사회적 이유로 제공되는 환

기보다 사유화된 서비스로 전락한다.

승할인이나 무임승차와 같은 사회서비스가 민간사업의 적자 보장이라는 재무적인 요소 로 탈바꿈되어 비용이 되어 버린다.

대중교통을 운영하는 데 가능한 재정적 상황은‘적절함’ 만 있을 뿐이다. 즉, 대중교통에 대한 재 정지원의 규모가 어느 선에서 적절하냐가 쟁점이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소위 사회적 비용에 대한 합 의가 따라야 한다. 그런데 대중교통에 대한 재정지원이 비용으로 고려되고, 사회적 비용이 재무적 득 실로 고려되는 순간 대중교통 정책은 사실상 사회 서비스라기보다는 사유화된 서비스로 전락한다. 우리는 이런 인식의 전환을 쉽게 접해 왔다. 이를테면 쓰레기 수거를 생각해보자. 적어도 90년대 중반까지 쓰레기 수거는 일반적인 사회 서비스였고 공공재정을 바탕으로 시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정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쓴 만큼 비용을 부담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그것을 환경적인 요인 에서건 비용적인 요인에서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반면 무상급식의 경우에는 그 반대의 상황이

정첵 포럼 99


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양육의 범위에 있었다. 보리밥을 먹건 쌀밥을 먹건 그것 은 그 집의 문제였고, 설사 굶더라도 안타까운 일일지언정 부양자의 책임을 넘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학교에서의 급식은 교육의 하나로 국가나 지방정부가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 이 되었다. 대중교통 역시 마찬가지다. 가난하고 몸이 불편할 때만 교통이 권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 람에게 이동이라는 것은 당연히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가 될 필요가 있다.

무상교통은 가능하다 유럽에서, 특히 독일권에서 무상교통 정책을 전파하는 데 영향을 미친 벨기에의 헤셀hesselt의 경우에는 1996년부터 무상교통을 실시했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승객 수가 매년 800~900%씩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상교통의 혜택을 받는 헤셀 주민들의 주민증은‘황금카드’ 로 묘사될 정 도로 높이 평가된다. 이렇게 늘어난 대중교통 이용자들은 대부분 자가용 이용자였다. 유럽과 남미에서 점차적으로 무상교통 정책을 시행하거나 추진하는 나라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 때 무상교통은 단순히 복지정책을 넘어서, 석유 에너지 사용을 축소하고 도시의 공기 질을 향상시키 고자 하는 환경정책, 중심부의 도로 혼잡을 막아서 도시 공간을 좀 더 인간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공 간정책의 의미로 확장된다. 노동당은 이미 2010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무상교통 과 관련된 공약을 내놓은 바 있다. 현재 민간기업이 독 점하고 있는 교통카드를 공영화하여 그에 따른 수익금 으로‘반값 요금제’ 를 도입하자는 것이 골자였다. 전국 적으로 시행 중인 버스준공영제의 경우에는 막대한 재 정지출에도 불구하고 연례적인 요금인상이 진행 중이 다. 반면 도시나 농촌의 열악한 지역은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노선들이 폐지되고 있다. 시쳇말로 버스가 없어 서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지역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형 편이다. 좀 더 넓혀 보자면 공항철도 민영화의 문제, KTX 민 영화의 문제 등 대중교통의 공공성을 둘러싼 갈등이 여 전하다. 전주버스 파업이나 삼화고속 파업에서 볼 수 있 듯이 대중교통 사업장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노사구조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으 로 얻어낸 저상버스 도입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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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무상교통 실시 후 대중교통 이용 자 수 및 증가율


그런데 이윤을 추구하는 민간사업자는 운영수입을 보장받으면서도, 역사 내 임대사업을 독점하 고 역세권 개발까지 추진한다. 비리를 저리른 버스업체 사장은 이름만 바꿔서 계속 업체를 운영하면 서 지방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있고, 노동자들을 노예부리듯 한다. 가난할수록 먼 곳의 직장에 다 니며‘거리에 비례해서’더욱 많은 요금을 내고 있다. 현재 준공영제는 민간사업자 중심의 사유화된 대중교통 체계에 재정보조금만 제공해서 서비스를 유지하는 형태다. 기왕에 들어가는 돈이라면, 그것도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제공되는 돈이라면 차라 리 완전공영제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것이 처음이다. 그렇게 해서 사장들이 가져가던 수십억의 이윤(서울의 경우)을 학생할인 등 요금할인을 위한 비용으로 쓸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다음이다. 어차피 도로건설로 쓰이는 교통시설특별회계(교통 에너지 환경세의 80%로 조성되며, 15조원 가량 이 도로건설에 쓰인다)와, 각 지방정부별로 관리하는 교통유발부담금(도시교통정비촉진법에 의해 부과되며 백화점과 같이 교통수요를 유발시키는 시설물에 부과되는데, 이 역시 대부분 도로건설에 쓰인다)을 활용해 단계적인 무상교통을 실시해보면 어떨까. 우선 교통이 불편한 지역에 다니는 마을 버스나 농어촌 버스 등부터 무상교통으로 전환하고 점차적으로 대상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 지막이다.

1000억 원 이상 교통시설특별회계 지출내역 현황(2010)

무상교통은 꿈이나 몽상이 아니다. 실현되지 않는 현재이며, 하지 않은 가능성이다. 우리가 무상 교통을 핵심적인 의제로 삼고 다양한 정치운동을 고려한다면,‘무상’자체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로빈 훗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중교통 정책이 위치한 사회정책의 맥 락과 이를 통해서 확산해야 할 사회 비전을 고민해야 한다. 무상교통은 노동당이 바라는 사회를 위한 첫 번째 진지가 되어야 한다.

정첵 포럼 101


불온한 영화

(사진 : CJ엔터테인먼트)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라고! 봉준호의 <설국열차>

김민하_<미디어스> 기자

짧은 리뷰를 요구한 다른 매체에서는 영화 <설국열차>를‘지적인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 라고 평했다. 영상의 스펙터클이나 스 토리의 완성도를 부각시키려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많은 상징적 장면을 삽입해 관객들이 영화를 본 후 겪는 경험들을 통해 새로운 재미를 느끼게 하는 영화가 있 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명백하게 뒤의 경우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측면에서 영화가 성공을 거둔다면 그는 큰 어려움 없이 할리우드에 진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혁명 드라마로서의 설국열차 영화 <설국열차>는 지적으로 다룰 수 있는 온갖 요소들로 가득하다. 열차의 존재 자체가 그렇다. 열차의 외부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다. 열차는 그 자체로 하 나의 사회를 이룬다. 영화 <설국열차>는 지적으로 다룰 수 있는 온갖 요소들로 가득하다. 열차의 존재 자체가 그렇다. 열차 외부가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된 상황에서 열차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를 이룬다. 열차에 탑승한 대부분의 승객 은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지만 유독 꼬리 칸에 탄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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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할 것을 강요받는다. <설국열차>는 이 꼬리 칸에 탄 사람들이 체제에 저항하 는 과정을 다뤘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혁명을 주제로 한 드라마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물론 <설국열차>가 전제하는 혁명의 세계관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그것 과는 차이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노동계급이 임노동을 통해 재화를 생산하 고 지배계급이 이에 대한 착취를 통해 체제를 유지하지만, <설국열차>의 세계에 는 노동계급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국열차>에 등장하는 생산수단 은 열차 그 자체인데, 거의 무한히 작동할 수 있는 신성한 엔진, 얼어붙은 세계를 달리는 열차라는 환경, 자동화된 설비가 전통적인 노동계급의 역할을 대신한다. 즉, 꼬리 칸의 사람들은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체제에 기여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이 죽지 않을 만큼의 노동력을 보존하기 위해 미력하나마 약간의 복지를 제공했던 것과는 다른 상황인 셈이다.

공리주의적 세계는 전체주의로 전화하고 즉,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열차는 일종의 공리주의적 세계다. 그리고 꼬리 칸의 사람들은 이런 체제에서‘배제된 자들’ 이다. 총리는 시종일관 이들에게“윌포드 님에게 감사하라!” 고 말하며 자기 자리를 지킬 것을 강요한다. 열차의 지배자인 윌포드는 이들이 체제의 균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그러니까 공리주의 교리로 말하자면 이들의 숫자가‘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 서 이들을 사회의 일부로 감당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즉, 윌포드가 길리엄과 내통해 꼬리 칸 사람들의 개체 수를 조절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과 벌레로 단백질 블록을 만들어 배급하는 것은 공리주의에 기초한 해결책인 셈이다.‘정치’ 의사 전적 의미 중에 한정된 재화를 배분하는 과정에 대한 것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방법은‘윌포드의 정치’ 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열차는 일종의 공 리주의적 세계다. 체제의 균형을 해 치지 않고‘최대 다수의 최대 행 복’ 이라는 원칙 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지배자는 이들을 사회의 일 부분으로 받아들 인다.

그런데 통치에 대한 이런 공리주의적 접근은 파시스트의 통치술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기도 하다. 공리주의 자체가 어떤 전체주의적 기획의 맹아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의 진지한 공리주의자들은 공리주 의가 자유주의적 발상에 기반하고 있으며 공리주의 그 자체가 전체주의의 비극 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나름대로 증명하고 있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 만 어떤 공리주의자가 전체주의자로 전향하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공리주의적으로 설계된 어떤 사회가 전체주의로 전화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총리의 존재와 총리가 지휘하는 살육자들의 존재를 상기해보자. 도끼를 든 살육 자들은 총기를 휴대하고 안전장구를 갖추고 있는 군대, 즉 국가기구에 속한 자들 이 아니다. 살육자들은 제각각의 장비를 갖추고 있으며 검은 마스크를 통해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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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정체를 감추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자는 (물론 총리가 최고 책임자 이지만) 정복을 착용한 일본인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로 다가올 것인 지는 매우 명백하다. 즉, 살육자들의 존재는 국가가 공인하지 않았지만 특정 정치세력에 복속된 사적 폭력을 의미하며, 역사적 사건에서 이것을 찾을 수 있는 예는‘검은셔츠단’ 이다. 그들이 살육을 저지르기 전 생선의 배를 갈라 피를 나누는 의식을 진행하는 것 역시, 어떤 비이성적 신념의 존재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파시스트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최소한 <설국열차>에서 공리주의적으로 설계된 사회는 파시즘과 필연적으로 마주친다.

윌포드라는 신, 커티스라는 민중, 남궁민수라는 지식인 파시스트에 대한 은유는 작품 곳곳에서 나타난다.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유치원 칸’ 을 생각해보자. 유치원 칸 구성원들의 과장된 몸짓은 어딘가 1950년대의 미국을 연상시킨다. 1950년대의 미국은 경제적 번영과 전쟁의 상흔 이 공존하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회적 조건 속에서 매카시즘이 만연했던 시기도 1950년대다. 유치원 칸은 어린이들에게 윌포드의 자비와 탁월함, 엔진의 신성함으로 상징되는 열차의 이데올로기를 반복적으로 주입함으로써 체제를 유 윌포드와 커티스 의 대결구도는 신과 인간의 대 결구도인 동시에 독재자와 민중의 구도이기도 하다. 여기서 민중이란 인민주의적 봉기 를 실행하는 민 중이다.

지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윌포드는 체제의 모든 매커니즘을 꿰뚫고 있다는 점에서 신적인 위상을 가진다. 시스템에 속해있는 주체로서는 시스템의 전체 매커니즘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 능하다. 커티스가 인도하는 꼬리 칸의 반란자들은 길리엄을 열차의 지도자로 만 드는 것 말고는 다른 구상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윌포드와 커티스의 대결구 도는 신과 인간의 대결구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사회를 구성하는 권력 관계에 준한다는 점에서 양자의 관계는 독재자와 민중의 구도로 치환된다. 물론 여기서 민중이란 인민주의적 봉기를 실행하는 그 민중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남궁민수와 그의 딸 요나의 역할이야말로 의미심장하다. 민수와 요나는 체제의 본질에 대한 지식과 직관을 갖추고 있다. 문을 열 수 있는 능력과 문 너머를 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들의 존재는 열차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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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안에서 지식인이자 예언자, 선지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수와 요나는 인민주의적 봉기를 일으킨 커티스와 (동기가 무엇이든) 행동을 함 께 하면서도 자신들의 구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준비를 차곡차곡 해나간다. 윌포 드의 문 앞에 이르러서야 이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정치적 지향을 말하기 시작한 다. 열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는 이들의 주장을 사실상 거부하는 커티스의 선택은 지식인과 인민주의적 대중들의 갈등을 보여준다.

문을 열고 암흑 속으로 돌진하라! 열차의 지배자가 바뀐다 한들 공리주의적 질서가 지배하는 체제에서 꼬리 칸 거 주민들의 처지가 극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통치자의 입장에 서는 열차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제1의 목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커티스는 이런 방식의 체제의 유혹에 무방비한 상태로 윌포드의 논리 속으로 끌려 들어간 다. 그에게 이를 넘어설 수 있는 통찰을 주는 것은 요나의 특이한 능력이다. 요나 는 체제에 대한 직관력을 활용해 기차의 엔진이 사실은 무한정 작동할 수 없으 며, 마모된 부품은 꼬리 칸 어린이들의 노동과 이에 대한 착취로 대체된다는 사 실을 폭로한다. 커티스가 이러한 체제의 진실을 깨닫게 된 대가로 치르는 것은 한쪽 팔의 절단인 데, 이는 슬라보이 지제크가 말하는, 결여를 내포한 체제와 주체의 전형을 보여주 는 것처럼 보인다. 즉, 자신의 결여를 인정하는 것으로 우리는 진실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기차 밖으로 나가는 것에 동의하는 커티스의 모습에서 우리는 묘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혁명은 이렇게 완수되는 것이다. 열차를 하나의 현실적 질서로 본다면 이 질서를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요소는 오 히려 기차 외부에 어떤 사회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기 전까지 승객들은 외부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고 이는 곧 외부에 대 외부로 향하는 문 은 그야말로 벽이 라는 환상으로 작 용하게 된다. 외 부가 존재하지 않 는 완벽한 질서로 서의 열차는 자신 의 항상성을 위해 내부의 수많은 문 제를 은폐한다.

한 인식 자체를 제거하는 효과를 거두는 장치로 활용된다. 따라서 외부로 향하는 문은 그야말로 벽이라는 환상으로 작용하게 되며,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질서로서의 열차는 자신의 항상성을 위해 열차 내부의 수많은 문제를 은폐한다. 즉, 진실에 대한 외면과 망각을 통해서만 열차는 완벽한 공리주의적 사회로 현존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취해야 하는 행동은 이미 벽이 되어버린 문에 본래의 의미를 부여해 문을 여는 것이며, 외부로 당당하게 나아가 새로운 희망을 찾는 것이다. 문밖에 천국이 있을지 지옥이 있을지 체제 내부의 사람으로 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환상을 횡단하는 것으로 역사가 이끌려 온 것도 사실이다. 즉, 열차 밖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행위는 암흑 속으로의 돌진 에 준하는 것이 된다. 사회는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진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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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서재

저항의 터전, 래디컬 스페이스를 찾아서 래디컬 스페이스 마거릿 콘 / 삼천리 / 2013년 7월 / 18,000원 양솔규_중앙당 기획국장

이탈리아에 건설된 저항의 터전들 항시 바쁜 진보정당 당원에게‘필독서’ 가 늘어난다는 것은 재앙이기만 한 일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필독서’ 가 전설의‘무림비서(武林秘 ‘민중적 공론장’ 은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맑스 와 그람시는 공 장이라고 말하는 반면, 이 책의 저 자 마거릿 콘은 공장 바깥에 민 중적 공론장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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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 라면 얘기는 달라지겠다. 정치학자 마거릿 콘이 쓴『래디컬 스페이스』 는 20세로 넘어가는 시기, 이탈리아에서 건설된‘저항의 터전’ 에 대한 이야 기이다.‘협동조합’ 과‘노동회의소’우리말로‘민중의 집’ 이라고 번역되는 ‘민중회관’그리고 수많은‘상조회’ 들이 그것이다. 저자는‘장소’ 는 정치에 있어 중요한 분석대상이며,‘장소’ 가 사회통제 뿐 아니라, 역으로 변혁적 정치에도 이바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버마스가 분석한 위계와 배제의 원리가 관철되는‘부르주아 공론장’ 과는 달리‘프롤 레타리아적·민중적 공론장’ 은 집단적 통제권을 향해 자신의 분파들을 통 합하면서 저항의 터전을 만들어 나간다.


그렇다면‘민중적 공론장’ 은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맑스와 그람시는 공장 을 저항의 근거지로, 반란자의 생산지로 특권화시킨다. 반대로 마거릿 콘은 ‘공장’ 은 경영진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며, 노 동자들을 고립시키고 통제하는 정교한 시스템이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은‘공장의 벽’바깥에‘민중적 공론장’즉 선술집과 민중회관, 클 럽, 협동조합, 노동회의소를 만들었고, 이곳에서 현장의 경험을 나누고, 그 곳에서 동지를 얻으며 새로운 이념을 수용해야만 했다.

노동자 ‘들’ 에서 하나의‘계급’ 으로 나아가다 당시의 이탈리아는 농업 비율이 높았으며, 공장노동보다는 수공업 비율이 높았다. 초기에 저항의 주체도 소수의 공업 노동자가 아니라 수공업자들이 나 토지 없는 농민들이었다. 제프 일리도『The Left』 에서“계급형성의 논 리가 마르크스의 예상을 따르지 않았” 으며“농민층 자체가 사라지는 데 한 세기가 걸렸” 다고 지적 한다. 붉은 벨트(Red Belt)의 핵심지역인 에 밀리아-로마냐 지역과 포강 유역은 대부분 농 업 지대였고 이탈리아 사회주의는 농업 프롤 레타리아트를 성공적 으로 조직했다. 우리는 여기서‘공장평 의회’운동이 실패로 빅토르 오르타가 지은 브뤼셀 민중회관

돌아간 후 옥중에서 자 신의 개념을 발전시킨

그람시를 떠올릴 수 있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양 한 하위 집단으로 구성된‘대항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역사적 블록’ 을 만들 어야 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공장으로 한정되지 않고,‘붉은 하위문화’ 를 발전시킬 수 있는‘만남의 네트워크와 공간’ 이 필요하다.‘협동조합’ 과‘민중회관’ , ‘노동회의소’ 는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면서“부자와 빈자의 권력관계를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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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시켜 나갔다.“그들은 공장에서는 생산과정의 투입 요소에 불과했으나 ‘협동조합’ 과‘민중회관’ 에서는 주체로서 세상을 창조” 했던 것이다. 다양 한 노동자 ‘들’ 이 아니라 스스로 노동자로 상상하는, 하나의‘계급’ 으로 형 성해 나갔던 것이다. 이를 토대로 그들은 수많은 자치시를 통제하기에 이르 렀다.‘지방자치주의 사회주의’ 가 꽃피운 것이다.

파시즘의 역설-‘붉은 2년’ 은 왜 패배했나 그러나 파시즘은 역설적으로‘붉은’에밀리오 로마냐와 토스카나와 같은 지역을 토대로 커 나갔다. 저자는 이를“급진적인 정치 개혁이 반대 세력의 격렬한 반응” 을 불러일으켰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러한‘급진적 정치개혁’ 은 충분한 것이었을까? 제프 일리는『The 대항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역사적 블록을 만들려면 ‘붉은 하위문화’ 를 키워나갈 만 남의 네트워크와 공간이 필요하다. 협동조합, 민중회 관, 노동회의소가 이러한 역할을 수행했다.

Left』 에서“강력하고 위협적이지만 실천되지 않은 이탈리아 사회당의 최대 강령주의” 와 독일(베를린)과는 달리 수도(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근거지(붉 은 벨트)를 지닌 이탈리아 사회주의의 취약성을 지적한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성공적인 계급형성의‘진지’ 로 기능한‘민중 회관’ ,‘협동조합’ ,‘노동회의소’ 는 승리의 필요조건이었을지언정, 충분조 건은 아니지 않았을까?‘진지전’ 만큼이나 진지하게‘기동전’ 을 실천할 결 단의‘용기’ 가 좌파의‘고갱이’ 였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에게 결여된 것 은 아니었을까? 제프 일리 말대로“1919~21년 당시 기층반란자들의 열정 과 희망은 늘 기존 좌파조직들의 능력을 줄곧 앞질렀” 고 이러한 사회주의자 들의 머뭇거림이‘붉은 2년’ 을 패배로 이끈 건 아니었나? 어쨌든, 무솔리니 는 먼저‘결단’ 했고, 1922년 이탈리아 파시스트 조직인‘검은셔츠단’ 은수 도 로마로 진격한다. 파시스트들은 노동자들의‘진지’ 를 철저하게 부순다. 토리노 금속 노동조 합 지도자 피에트로 페레로는 노동회의소를 찾아갔다가 파시스트들에게 죽 임을 당했고 건물은 불탔으며, 그의 동료 마리오 몬타냐나는 망명길에 올랐 다. 훗날 그는 파르티잔으로 싸웠고 노동회의소를 재건했다. 진지는 파괴되었으나‘응축된 화석’ 은 반파시즘 투쟁의 네트워크를 제공했 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첫 번째 선거(1946년)에서 전체 75석 중 이탈리 아 사회당은 21석, 공산당은 19석을 얻었다. 파시즘 이전 민중 권력이 강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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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붉은 벨트’지역은 현재도 협동조합과 민주주의적 관행이 강력한 지 역이다.

후퇴하는 대중운동의 뒤안길에서 우리의‘민중의 집’운동은 후퇴하는 대중운동의 뒤안길에서 시작하고 있 다.‘공세’ 보다는‘방어’ 의 수단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탈리아‘민중회관’ 은‘공세기’ 인 1980년대 도시산업선교회의‘성문 밖 교회’또는 마산의‘가톨릭 여성회관’ 이 더 어울려 보인다. 과거는 투명한 데 미래는 그렇지 못하고, 목적의식적인 것은 늘 어렵다.‘민중을 위한’ 에 머물기보다‘민중에 의한’ 으로 나아가고,‘있는 것을 있는’것에 머물지 않 고‘다른 것을 품는’데까지 나아가는 데 이 역저가 큰 공헌을 할 것이라 확 신한다. 비교적 짧은 분량이지만 수많은 정치이론과 생생한 이탈리아 투쟁의 역사 는 우리의 실천에 구체성을 부여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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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굳건히 하고 들으세요, 아기가 생겼어요” 2000년 어느 겨울 날, 내가 알던 한 가수가 전화로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언니, 마음을 굳건히 하고 들어. 내가 앞으로 열심히 할게”한동안 방황하던 이 친구의 결기 넘치는 서두에 예감이 좋지 않았다.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는지, 가수 정혜윤이 임신했단다. 순간 눈앞이 까마득해지고 뒷골이 땡 겨왔다. 꽃다지에서 함께 활동하던 동료들의 임신 소식을 세 번 접했다. 정혜윤이 두 번, 조성일이 한 번. 그 세 번의 소식을 전하는 가수들의 목소리는 달뜬 소리가 아니었다. 서로 짠 것도 아닐텐데 매번“마음을 굳건히 하고 들으세요” 로 시작 하여“아기가 생겼어요”하고서는 긴 한숨. 돌이켜보면 참 미안하게도 흔쾌히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주지를 못했다. 무거워지는 마음 애써 추스르며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축, 축하한다.”마지못해 축하의 말을 건네었다. 남들은 결혼을 하고 아기를 갖게 되면 가족과 동료들의 아낌없는 축하를 받 는다던데 꽃다지 가수들은 그런 축하를 받지 못했다. 당사자나 동료들이나 먼 저 드는 생각은‘앞으로 꽃다지 활동은 어떻게 하나?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 까? 활동을 지속한다면 어떻게 아기를 기를 수 있을까?’걱정이었다. 육아 자 체의 문제와 더불어 육아비용, 게다가 신입 가수는 들어오지 않는 상황 등등이 ���물려 이 막중한‘사태’ 를 감당할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걱정은 커 져만 갔다. 당시 정혜윤이 임신했다는 소식은 난생 처음 접하는 상황이었기에 더욱 당 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1999년에 입단하여 이제 막 노래의 맛을 알게 된 시 기라서 본인은 더욱 힘들었을 게다. 점점 어두워져만 가는 정혜윤의 얼굴을 보 며 어느날 회의를 했다. “같이 기르자!”공동육아를 결의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아기를 갖게 되었는데 무슨 걱정이 그리 많

노 래 의

한결이 110

민정연_문화기획자


아?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온전히 기뻐해. 활동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공동육아 하자! 어떻 게 할지는… 듣도 보도 못했으니 구체적인 건 잘 모르겠지만, 막상 닥치면 같이 헤쳐 나갈 수 있을 거 야.” 정작 이렇게 제안한 나조차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 가지였으나 그렇게 결의라도 하고 나니 무언가 미래가 있을 것만 같았다. 임신 8개월이던 한여름, 땡볕 아래서 공연을 마치고 출산휴가에 들어가는 정혜윤에게 1년간의 육 아휴직을 약속했다. 그러나 미처 3인조 꽃다지의 그림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결국 그녀에게 SOS를 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결이(정혜윤의 첫 아이 이름이다)는 생후 7개월 때부터 엄마와 함 께 출근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복귀 이후 첫 공연이 3·8 여성대회였다. 머리도 못 가누는 한결이를 내가 공연 내내 업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여성 노동자들이 다들 한마디씩 한다.“아니, 왜 그러고 있어요?”갓난아기 를 처음 업어본 내가 행여 아기 목이 젖혀져 다칠까봐 허리를 90도 각도로 구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다는데도 공연 내내 그러고 있었다. 꽃다지는 육아전문가로, 한결이는 미운 다섯 살로 성장하고 그 정도로 꽃다지 사람들은 육아에 무지했지만, 어느덧 똥기저귀를 척척 가는 육아전문가가 되었 다. 하루 종일 잠만 자던 천사 같은 아가도 뒤뚱뒤뚱 사무실을 휘젓고 다니며 온갖 일을 참견하기 시 작했다. 심지어 신입가수가 노래하는 소리를 한참 듣더니“왜 저렇게 못해?” 라는 지청구까지 늘어놓 았다. 한결이가 미운 다섯 살 어린이로 성장하는 하루하루를 보는 건 고행이자 기쁨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건강하고 예쁜 한결이의 낮 시간만 함께했을 뿐이다. 밤새 칭얼대거나 아파서 낑낑대는 한결 이의 밤 시간은 엄마인 정혜윤 혼자의 몫이었으니 어쩌면 우리는 기쁜 순간만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 른다. 둘째를 낳은 후 복귀한 정혜윤이 내민 첫 노래가 바로 <한 결이>다. 꽃다지에서 누군가를 특정하여 만든 노래는 주로 추 모곡이다. 예외적인 두 곡이 모두 한결이가 주인공이다. 한결 이로 인해 꽃다지가 즐거웠고 힘을 얻었던 추억을 담은 노래 가 조성일의 <아이야>라면, <한결이>는 정혜윤과 한결이가 함께 출근하며 겪는 하루 일과를 그대로 보여주는 자전적 노

한결이는 생후 7개월 때부터 엄마와 함께 출근 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정혜윤 의 복귀 이후 첫 공연이 3·8 여성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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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다. 무대에서 노래하면서도 엄마의 걱정스런 시선은 딸을 찾아 헤맨다. 딸은 숫제 무대로 뛰어들어 엄마의 노래에 맞춰 천진난만하게 춤을 춘다. 걸음마도 못 떼던 갓난아기가 천방지축 어린이로 성장 하는 과정이 경쾌한 리듬을 타고 고스란히 전달된다. 엄마로서 정혜윤의 삶이 녹아난 노래여서 처음 듣는 순간부터 좋았다.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널 닮은 세상 있지만’ 이 노래를 듣고 정혜윤에게 물었다.“마지막 가사 틀린 거 아냐?‘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널 닮은 세상 있지만 우리 함께 걸어가는 이 길이 더 소중한 일이 아닐까’ 가 아니라‘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널 닮은 세상 있으니’ 로 수정해야 말이 되는 거 같은데…”그녀는 아니라고 했다. 미래를 위해 지금 의 힘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함께 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그처럼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함께 하고 있음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 설명에 마음이 짠했던 기억이 난다. 미래의 행복이라는 미사여구를 담보로 현재의 고통에 대해 귀 막고 눈 가리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면서. 노래 <한결이>는 거창한 주의주장을 한마디도 담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이 노래 한 구절 한 구절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무덤덤하게 읊조리는 하루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여성노동자의 육아의 어려움, 이를 전적으로 개인에게 책임지우는 한국의 양육환경, 그리고 여전히 여성에게 너무 가혹한 가부장제와 여성노동자의 노동권 등 꽤 묵직한 주제들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육아의 경험이 전혀 없는 나조차도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희미한 미소와 함께 눈물이 날 때가 많 다. 꽃다지는 그나마 아이와 함께 출퇴근하면서 육아와 활동을 병행할 수 있었지만, 출산과 함께 활 동을 접은 주변의 많은 여성 활동가들을 떠올리게 된다. 여느 직장에 다니는 여성 노동자들 역시 별 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2010년 여름 콘서트에서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관객들 중 몇몇이 훌쩍훌쩍 울었다. 심 지어 40대 남자관객도 울었다. 말은 안했지만 자기 아내가 굉장히 힘들었겠다는 생각에 새삼스레 눈 물이 나더란다. 다시 추억에 잠겨 이 노래를 들어본다. 고개도 못 가누던 아가가 노래하는 엄마가 자랑스럽다고 말할 줄 아는 열세살 어린이가 되었으니 고단했을 세월을 의연하게 버틴 두 모녀에게 고마워진다. 그 리고 딸과 엄마가 함께 만들고 싶은 현재와 미래는 무엇일지 생각해본다.‘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널 닮은 세상’ 을 지금 바로 만들고 싶어지는 노래, <한결이>다. 종일 잠만 자던 천사같은 아기가 미운 다섯 살 아이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고행이자 기쁨이었다. 그 하루하루가 노래 <한결이>에 그대로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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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이

정혜윤 작사/작곡

1. 늦은 아침 단잠 빠진 너를 깨우며 일어나 출근하자 눈을 뜨라고 꿈결인가 생시인가 눈꼽찬 눈을 뜨며 어리둥절 세수하러 끌려가는 너 늦은 식사 허둥지둥 입엔 한가득 가득 어서 씹어 빨리 씹어 그래도 꼭꼭 씹어 카시트에 꽁꽁 묶여 답답해 짜증내지만 짜증낸다 쥐어박는 날 위해 웃는 너 걸음마도 떼기 전에 우린 함께 이 길을 걸었지 세상은 걸음 멈춰 있지만 우린 노래 불렀지 2. 아둥바둥 허둥지둥 연습실 도착해 모든 방이 자기 세상 여기 기웃 저기 기웃 노느라 정신 팔려 실수 연발하지만 모든 노래 따라 불러 작은 꼬마 가수 더운 여름 추운 겨울 거리거리에서 무대에 선 나를 기다리는 너의 모습 잘 있을까 걱정돼서 자꾸 쳐다보지만 노래 따라 흥에 겨워 춤추고 있는 너 하루하루 네가 커갈수록 많은 세상을 보았지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마음을 함께 나눴지 3. 늦은 저녁 꾸벅꾸벅 조는 널 깨우며 일어나 집에 가자 눈을 뜨라고 잠에 취해 울어버린 너를 감싸 안으니 어린 마음 힘이 들까 마음이 찡하네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널 닮은 세상 있지만 우리 함께 걸어가는 이 길이 더 소중한 일이 아닐까

엄마가 노래하면 한결이는 숫제 무대로 뛰어들어 천진난만하게 춤을 추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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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읽기

가히, 펜은 칼보다 강하였더라 용역보다 무서운‘깡패언론’

<미래에서 온 편지> 준비팀

지난 7월 20일, 송전탑에서 농성중인 현대차 비정규직 노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자살한 노조간

동자 천의봉, 최병승을 응원하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이

부를 추모하기 위해 들었던‘만장’ 은

에 관한 대법원 판결 이행을 촉구하기 위해 시민과 노동자들

일부 언론을 거치면서 죽봉과 쇠파이

이 울산으로 향했다. 한진중공업의 김진숙을 크레인에서 내

프로 둔갑했다.

려오게 만들었던‘희망버스’ 가 다시 출발한 것이다. 현대자동차 사측도 움직였다. 사측 용역들은 희망버스 참가자들을 향해 폭력을 휘둘렀다. 용 역과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충돌하면서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커터 칼과 낫, 소화기를 들 고 있는 용역들의 사진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용역들의 물대포는 현장을 포착하려 는 기자들의 카메라도 겨냥했다. ‘펜’ 으로 폭력을 휘두른 언론들 그런데 폭력을 휘두른 건 현대차 용역만이 아니다. 언론은‘펜이 칼보다 강하다’ 는 사실을 보 여주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한국경제, 세계일보 등의 언론은 희망버스 참가자들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조선일보는 7월 22일자 1면에 경찰을 향해‘죽봉’ 을 휘두르는 희망버스 참가자들의 사진을 실 었다. 그리고 <한진重 흔들었던 시위꾼들, 이번엔 현대차에서‘죽봉 폭력시위’ >라는 제목을 달았 다. 10면에서는‘또 등장한 죽봉’ ,‘폭력버스’ ,‘시위꾼에 습격당한 울산 현대차’ 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쓰며 희망버스의 폭력성을 부각시켰다. 중앙일보는 7월 23일 16면에 희망버스 참가자들 이‘조직적인 죽봉시위’ 를 했다고 전했다. 동아일보는 7월 23일자 10면에서 경찰관과 현대차 직 원들이 시위꾼들에게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고 전했다. 조중동 기자들 눈에는 죽봉으로 보이던 것이 한국경제 기자 눈에는 쇠파이프로 보였나보다. 한국경제는 7월 22일자 33면에서 2500명의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쇠파이프를 휘둘러 폭력사태가 벌어졌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들의 보도에는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들고 있던 것이‘만장’ 이었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없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며칠 전 자살한 노조 간부를 추모하기 위해 들고 있던 만장은 언론 을 거치면서 죽봉과 쇠파이프로 둔갑했다. 또한 이들의 보도에는 사측이 행사한 폭력이 없다. 집 회 장소로 향하는 이들을 가로막은 용역과 그들이 쏘아댄 물대포와 소화기에 관한 이야기도 없다. 114


조선일보 7월 22일자 1면의 헤드라인“한진重 흔들었던 시위꾼들, 이번엔 현대車서‘죽봉 폭력시위’ ”

세계일보 7월 22일자 10면 헤드라인 “희망버스 타고가 술판…‘난장버스’ 로”

‘폭력버스’ 와‘술판’ 이 있지만‘정몽구’ 는 없다. 이들 언론의 보도에는‘왜’ 가 없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천의봉, 최병승이 왜 300일 가까이 되는 시간을 위험천만한 송전탑 위에서 보 냈는지, 대법원에서 현대차의 불법파견을 인정했는데도 왜 현대차가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지 않 는지 말하지 않는다. 현대차 노동자들의 처절한 싸움에 대해 언론은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이들 언론은 희망버스 행사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악의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무플 로 일관하다 악플을 쏟아낸 셈이다. 세계일보는 7월 22일자 10면에서 희망버스를‘난장버스’ 와 ‘술판’ 으로 규정했다. 그들의 보도엔 이 사태의 원인인 현대차와 정몽구 회장이 없다. 본질엔 눈 감은 채 현상에만 주목한다. 살인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건 자체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묘사하는 언론은 좋은 언론이 아니 다. 좋은 언론은 빈곤이나 증오 등 그 사건을 부른 동기와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언론이다. 희망버스를 왜곡 보도한 언론들에게는 이러한 고민이 없다. ‘깡패언론’ 과 싸워야 한다 사측 용역들은 카메라를 향해 물대포를 쏘았다. 기자들에게 물대포를 쏘고 소화기를 뿌렸다. 무엇이 두려워서 그랬을까. 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언론이 이번 사태의 원인이 정몽구와 현 대차 사측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 현대차 사측이 얼마나 폭력적인 집단인지 보도하는 것이다. 펜 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꾼다. 언론의 진실보도로 더 많은 사람 과연 펜은 칼보다 강했다. 이들 언론 은 희망버스 행사가 끝나자 기다렸다 는 듯 악의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무 플로 일관하다 악플을 쏟아낸 셈이다.

들이 희망버스의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것, 이것이 현대차 사 측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따라서 희망버스는 용역깡패 보다 더 무서운‘깡패언론’ 과 싸워야한다. 삶과 문화 115


소리다운 당원들의 유쾌한 청각생활을 지지하는 이 달의 음원 다운로딩 가이드 장석원 음악블로그 <Rubber SOUNDZ> 주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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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돌스Goo Goo Dolls,『Magnetic』 후The Who의 로저 달트리가“록은 죽었다” 고 노래한 것이 벌써 41년 전 이야기다. 그러나 구구돌스의 새 앨범을 들으면 41년 전의 사망선 고가 무색하게도 록은 여전히 젊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레이건이 대통령이던 1985년에 데뷔했고, 이제는 멤버들 모두 40대 후반이 된 밴드의 음악이 이토록 생생하다는 사실은 록이 지닌 마법적 활력을 보 여주는 증거다. 사실 모든 늙어버린 대중음악 장르들이‘꼰대’ 들의 유 희로 전락한 것과 달리 록은 여전히 가능성의 음악이다. 예를 들어 펑 크 이후 가장 혁명적이라고 지칭된 힙합조차도 20년 만에 조로해버린 마당에 두 세대를 경과한 록은 그래도 거리, 축제, 청년의 문법을 완전 히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음반시장의 급격한 위축 속에서 라디오헤드 Radiohead 같은 거물밴드들조차 소수화 전략을 통해 차별성과 정체 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구구돌스의 새 앨범이 보여주는 솔직한 대중성이 차라리 반가운 것은 이 음악에 거리와 축제와 청년의 냄새가 깊게 배어있기 때문이다. ● 강력하게 밀어주고 싶은 트랙 : 첫 곡 <Rebel Beat>부터 다섯 번째 곡 <Come to Me>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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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The National,『Trouble Will Find Me』 내셔널의 사운드는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이 컨트리를 연주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면 된다. 참으로 괴악한 상상이겠지만 딱 그렇다. 조이 디비전의 세 기말 정서가 아메리카나*의 리듬을 얹고 흘러온다. 전작『High Violet』 이비 평과 판매 모든 면에서 성공작이었던 만큼 새 앨범에 대한 밴드의 부담감도 그만큼 비례했을 것이다. 그 부담이 3년이라는 제작기간으로 드러났는데 결 과는 밴드의 정체성과 앨범의 완성도,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다. 이 코너 가 다운로드를 전제로 한 소개지만 내셔널의 경우 CD를 구입하는 것도 나 쁘지 않다. CD의 소책자에는 수록곡의 노랫말과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이 함께 들어있다. 패키지의 디자인도 밴드의 음악을 형상화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물리적 음반이 단순히 음악을 매개하는 도구가 아니라 총체성의 캔 버스라는 밴드의 주장이 읽혀진다. ✽아메리카나 : 90년대 이후, 포크, 블루스, 컨트리 같은 장르를 펑크, 얼터 너티브와 같은 현대적인 시도와 융합하려는 운동 ● 강력하게 밀어주고 싶은 트랙 :‘I Should Live in Salt’ , ‘Fireproof’ ,‘Don't Swallow the C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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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음집,『스튜디오 지브리의 노래』 신작 애니메이션『바람이 분다風立ちぬ』 가 군국주의 논란에 휩싸여 국내 개봉 여부가 오락가락하는 마당에 뜬금없이 스튜디오 지브리 역대작품의 주제가를 모은 앨범이 국내발매했다. 일본에서는 2008년에 나왔다. 그래서 최신작인 『코쿠리코 언덕에서』 와 『바람이 분다風立ちぬ』 는 들어있지 않다. CD 2장 분량, 26곡이 들어있는 디럭스 세트다. 수록곡 중 가장 유명한 곡은 뭐니 해도 지브 리의 주제가나 다름없는 <이웃집 토토로>지만 음악으로서의 절정은『마녀배달 부 키키』 에 삽입된 아라이 유미

의 두곡이다. 소녀마법사의 성장을 통

해 동화적 페미니즘을 보여준 본편과 1970년대 일본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정 점인 아라이 유미 대표곡의 조합은 절대적이다. 반파시즘투사『붉은 돼지』 의 끝자락을 장식한 카토 토키코加藤登紀子의 ‘ < 때로는 옛 이야기를>도 이제는 세월에 맞서 싸우고 있는 어제의 투사들과 함께 듣고 싶은 노래다. 전공투 세 대의 후일담에 해당하는 곡으로 꼭 가사의 의미를 만끽하면서 들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내일을 무모하게 찾아 헤매며/누구나 희망을 내맡겼지/흔들리던 시대의 뜨거운 바람을 맞으며/온 몸으로 시간을 느꼈었지...” ● 강력하게 밀어주고 싶은 트랙: <루즈의 전언>, <따스함에 안겨진다면>, <때로는 옛 이야기를>, <아시아의 이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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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칼럼

어느멋진날‘당연한결혼식’ 김조광수-김승환 결혼식 D-30 카운트다운 파티를 가다 이봉화_노동당 부대표

8월 8일, 김조광수-김승환 커플의 결혼식 D-30 카운트다운 파티에 간다고 하 니“그분들 아직 결혼 안 했어요?” 하는 지인들이 꽤 있다. 지난 5월 한국 최초의 동 성결혼 발표가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탓이 아닐까 싶다. 카운트다운 파티는 뭐지? 결혼식을 한달 앞두고 기자회견을 통해 1,134명의 결혼식 하객명단을 발표하 고, 이 결혼식을 성대한 축제로 만들겠으며 동시에 성소수자의 가족구성권을 합법 화하는 출발점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자리다. 또한 이 결혼식을 함께 준비 하는 사람들의 힘을 모으는 자리이기도 했다. 즉, 진보진영에 익숙한 용어로 표현 하자면‘투쟁선포식’ 이라 할 수 있겠다. 카운트다운 파티는 서울 서교동에 자리한 인문카페 <창비>에서 열렸다. 행사장 에 들어서니 낯익은 얼굴들이 많이 보인다. 노동당 성정치위원회는 일찌감치 결혼 식 준비위원회에 결합했다. 정의당과 민주당을 비롯한 정당과 영화계 인사들도 보 이고, 쌍용차와 콜트콜텍의 조합원들도 함께 했다. 결혼식 전체의 기획과 진행은 문화연대가 맡았다. 14개 대학의 성소수자 단체들이 모여 김김 커플의 결혼을 지 지하기 위해‘이 결혼 찬성일세’ 라는 모임도 만들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풍물패 의 사물놀이로 파티가 시작되고 우주히피, 신나는섬, 오소영 님의 축하공연이 이 어지니, 결혼식 당일의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가 더욱 높아진다. “날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 맞아?” 카운트다운파티의 하이라이트는 김김 커플과 사회자(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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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사무국장)의 토크쇼. 두 사람은 시종일관 유쾌하게 사회자에 질문에 답했다. 김승환 대표(레인보우컴퍼티)는 결혼 준비과정에서‘김조광수 감독이 결혼하자 는 게 날 사랑해서인지 다른 목적 때문인지 살짝 삐지기도 했다’ 고 말해 파티장에 폭소가 터졌다. 김김커플은 결혼식 축의금으로‘성소수자인권재단(가칭)’ 과 성소 수자 커뮤니티‘신나는 센터(가칭)’ 를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김조광수 감독이 여기에만 너무 몰입돼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는 얘기다. 모두 즐 겁게 웃긴 했으되 막상 LGBT 센터 설립이 본격화되면 저항 또한 만만찮을 것이 다. 올해 성북구의 인권교육단체가 주민참여예산위원회에 제출한 청소년 성소수 자 지원센터 설립 사업계획이 보수적인 기독교단체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힌 사 례에서 볼 수 있듯이, 성소수자 운동 이 지역적으로 확산되려면 탄탄한 준 비와 연대가 필요하다. 사회자가“이 질문은 정말 하기 싫 지만, 동성결혼을 꿈꾸는 분들을 대 신해서 묻겠다. 가족들의 반대는 없 었나?” 라는 질문을 던졌다. 김승환 대표는 부모님이 결혼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자식이 동성애자라는 사실 이 결혼 발표로 인해 전사회적으로 알려지고 지인들에게 무수한 질문을 받는 과정 자체가 그 분들에게도 커밍아웃의 과정인 것 같다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옆에서 김조광수 감독은 자신의 나이가 많아 서(일찍 죽을까봐!) 김승환 대표의 부모님이 걱정하신다고 농을 던진다. 상속 문제 를 잘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동성결혼 합법화(동성 간 파트너십 법률 제정)가 빨리 이뤄져야겠다고 사회자가 덧붙이기까지 하니 파티장이 웃음바다가 됐다. 현재 김조광수 감독과 김승환 대표의 결혼식 날짜는 9월 7일로 확정되었지만, 장소 섭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울광장, 서울시청 시민청, 청계천 광통교 등을 섭외했지만, 다른 행사가 잡혀있다, 신청기한을 넘겼다, 전례가 없다는 등의 이유 로 허가가 나지 않았다. 한국 최초의 공개적인 동성결혼식이 차질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관계당국의 전향적인 조치를 기대한다. 노동당 당원들 그리고 동성결혼 합법화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이 당연한 결혼식 에 많이 참여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한국사회에서 동성결혼 찬반 논란은 김조광 수와 김승환 두 사람의 용기에서 비롯되었지만, 성소수자 파트너십의 사회적 인 정, 법제화를 위한 투쟁은 이제야 시작되고 있다. 노동당이 그 길에 기꺼이 함께 한 다. 축의금이 LGBT센터 건립 기금으로 쓰이니 열렬한 참여도 기대한다. 축의금 계좌 : 국민은행 408802-01-280403 김승환(당연한결혼식축의금)

무지개 칼럼 123


심마니칼럼

“진짜로 산삼 캐봤냐구요?” 산삼에 관한 다섯 가지 Q&A 이재기_충남도당·약초꾼·목공공방 일꾼

내가 전업으로 약초를 채취하게 된 것은 2007년부터다. 철에 따라 산삼부터 열매, 버섯까지 내가 먹고 사는 만큼의 재화를 얻기 위해 채취한다. 내 직업을 심마니 또는 약초꾼 이라고 소개하면 흔히 사람들은“그럼, 산삼도 캐봤어요?” 라고 묻는다. 참으로 우문이다. 산삼을 캐서 먹고 살아가니 ‘심마니’ 라고 하는데 그 심마니한테 산삼을 캐봤냐고 묻는 다니...... 하지만, 그 우문에 담긴 진리가 하나 있다. 한반도에서 태 어나 자란 사람들한테‘산삼’ 은 아직도 귀하고 비싸며 영험한 약초, 즉 산삼에 대 한 신비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이 제철이기도 하고 약초의 으뜸이 기도 한‘산삼’ 에서부터 약초이야기를 시작해보기로 한다.

Q. 산삼은 정말 몸에 좋은가? A. 그렇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몸의 어느 부위에나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산삼은 면역력을 증강시켜주는 약효가 특출하다. 그렇기에 어린이와 노약자가 먹는 것이 좋다. 건장한 청소년이나 장년층은 먹으나마나 별 차이를 느끼지 못 할 수 있다. 단, 허약한 체질의 성인이나 성장기 어린이의 경우 산삼을 먹고 몇 년간은 잔병을 치르지 않는다. 한 마디로 산삼은 기를 보충해준다고 생각하 면 된다. Q. 산삼은 비싼가? A. 그렇다. 그렇지만 모든 산삼이 다 비싼 것만은 아니다. 장뇌삼(사람이 밭이 아 닌 산에서 기른 삼)은 한 뿌리에 1~10만 원 정도, 야생삼(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자연상태로 생장한 삼)은 한 뿌리에 5만원에서 비싸면 5000만 원도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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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한다. 산삼 가격은 산삼의 나이와 무게에 따라 매겨지는데, 10년짜리는 한 뿌리에 10만 원 정도, 15년짜리는 30만 원 정도, 20년짜리는 100만 원 정도, 25년짜리는 300만 원 정도, 30년 이상짜리는 그 상태에 따라 몇 천만 원까지 거래되기도 한다. 산삼 한 뿌리의 가격은 위와 같지만 실제 거래가격은 그보다 높을 수밖에 없 는데, 그 이유는 산삼의 거래단위 때문이다. 산삼은 어른이 한 번에 먹을 양, 즉 1냥(37.5g)으로 거래되기 때문에 보통 10년근 기준으로 1냥에 4~5뿌리 정 도면 40~50만원어치가 되는 것이다. 물론 어린이의 경우는 반냥이면 충분하 기에 1냥을 사서 자녀 2명에게 나눠 먹이면 된다. Q. 산삼은 정말 귀한가? A. 그렇다. 그렇지만 반드시 귀하지만은 않기도 하다. 20년짜리 이상의 산삼은 정말 귀하지만 그 이하짜리는 꼭 그렇지도 않다. 산삼을 캐도 캐도 계속 나오 는 것은 인삼재배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요즘의 산삼은 인삼밭에서 동물에 의 해 퍼지거나 심마니들이 씨앗을 뿌리고 다니기 때문에 멸종되지 않고 매년 채 취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삼농사를 지은 지 오래된 지역(금산,강화,풍기,괴산) 에서는 밭 근처 야산에서도 손쉽게 산삼을 캘 수 있다. 독자의 기억을 더듬어 20~30년 전 쯤에 인삼을 재배한 곳을 알고 있다면 올 추석 때 한 번쯤 그곳 을 배회하여도 좋을 것이다. Q. 인삼과 장뇌삼과 산삼의 차이는 무엇인가? A. 첫 번째 차이는 농약의 잔류 여부다. 인삼은 밀식재배라서 세균성 병해를 입을 수밖에 없으므로 살균제와 제초제를 뿌리지 않을 수 없다. 홍삼도 인삼을 가공 한 것이므로 마찬가지! 장뇌삼은 농약을 치지 않는 것이 기본이나 장담할 수만 은 없다. 특히 중국산 장뇌삼은 농약으로 키운다고 보면 된다. 두 번째 차이점 은 종자의 야생성에 있는데, 장뇌삼은 인삼의 씨나 묘근을 심어 기른 것으로 아직 산삼의 성질과 성분을 충분히 갖췄다고 볼 수 없는‘이행기’ 에 있는 인 삼이다. 결론은 인삼→장뇌삼→야생산삼으로 산삼의 야생성에 따라 약효와 가 격 등이 차이를 보인다. Q. 산삼은 어떻게 먹는가? A. 당연히 입으로 먹는다. 어떻게? 꼭꼭 씹어서. 산삼은 날 것 그대로 물에 흔들 듯 씻어 잘근잘근 씹어 먹는 것이 가장 좋다. 다만 소화기관을 비워놓은 상태 에서 먹는 것이 가장 좋기에 저녁을 굶고 새벽에 일어나 공복에 먹어야 좋다. 그 다음으로 달여 먹는 것이 좋고(삼계탕 포함), 술로 먹는 것은 그 다음이다.

당원의 일상 125


제주에서•2

? ?? ?

당체 뭔 얘긴지 알아먹어야 맞장구를 칠 텐데

제주에 내려온 지 1년이 좀 지나간다. 그동안 얼굴도 많이 탔고 나의 말속엔 제 주 사투리 특유의 억양이 조금씩 베어 나기도 한다. 선배누나가 두어 해 먼저 제 주에 내려와 살고 있었는데 제주에 내려와 처음 반갑게 만난 자리에서 피식 웃 음이 나왔다. 이유는 누나의 어색한 제주 사투리 때문이었다. 현지인들의 사투 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어 신기하거나 궁금했을 뿐 우습지는 않았는데 이주민들 이 쓰는 사투리는 약간 어설픈 영어 같다고 해야 하나, 자꾸 웃음이 나왔다. 나이 지긋하게 드신 어르신들이 제대로 이야기를 꺼내시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술술 뭔 이야기를 한참 건네시 는데 그러다 반응이 없는 나를 돌아서 빤히 바라보시고는 또 뭐라 물으신다. 아, 이거야 당체 뭔 얘길 하시는지 알아먹어야 맞장구는 아니어도 성의껏 대답이라 도 해드릴 텐데 난감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면 난 무조건 두 번 세 번 다시 물어보고 확인을 하는데 그때서야 무슨 얘기를 건네신지 알게 된다. 물론 그것도 어르신들이 표준말로 고쳐 말씀해주셔야 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들으면 화를 내시는 듯도 해서 내가 뭘 잘못했나 당황하곤 했는데, 대부 분 나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셔서 이것저것 물어보시는 거였다. 젊은 사람이 서 울 생활을 접고서 혼자도 아닌 가족 전부를 데리고 와서 이곳에 터를 잡았으니, 동네 어르신들은 여러 모로 궁금한 게 많으셨나보다. 밥 머건, 같이 가자고 핸, … 제주 사투리를 잘 듣다 보면 말의 끝에‘ㄴ’ 을 붙여서 여러 가지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있다.‘ㄴ’ 이 붙어서 어떨 땐 물어보는 문장이 되고‘ㄴ’ 이 붙어서 어떨 땐 한 문장을 끝나 게 해서 다음 문장으로 이어지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조성일_민중가수 조성일은 14년동안 <희망의 노래 꽃다지>에서 노래를 불렀다. 지금은 제주에 살며 솔로앨범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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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머건.” “같이 가자고 핸 그래서 갔지.” “밥 머건”이건 밥을 먹었느냐고 상대방에게 물어 보는 얘기다. 반면“같이 가자고 핸”이 경우에는 상대방에게 묻는 게 아니라“같이 가자고 하더라구”정도의 의미를 지닌 문장이 다. 헌데 잘 들어 보면 이것도 상대방에게 자기 얘기를 확인시키려는 질문 아닌 질문의 역 할을 하는 것 같다. 고작 1년 남짓 살고서 넘겨짚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거칠어 보이기도 하고 구수해 보이기도 하고 전혀 다른 나라 언어 같아 묘한 매력을 보이는 제주 사투리가 정겹다. 또 하나 신기한 건 언어라는 게 남자보단 여자가, 여자보단 어린아이들이 더 빨리 익히게 되는 것 같다. 이주하고 몇 달이 지났을까, 아내가 어느 날부터 낯선 억양으로 나에게 얘 기를 건넨다. 뭔가 싶었더니 어느새 제주 사투리 특유의 억양이 몸에 밴 것이다. 제주 사 투리 특징 중 하나가 이런 게 있다. 문장마다‘~이’ 라는 말이 붙는다. 예를 들면“밖에 나 갔는데 이~, 날이 너무 더워서 이~, 땀이 많이 나더라.” ,“잘 놀다가 와, 이~.”뭔가를 계 속 확인하는 듯한 이 말투는 묘한 마력이 있어서 금방이고 따라하게 만든다. 바다와 바람과 사람이 만든 숱한 상처에도 버텨온 사람들 페이스북을 하다보면 서울 사람들 중에 제주 출신이라면서 내가 올리는 사진과 글에 반응 을 올려주는 분들이 많다. 주변에 의외로 제주 출신이 많았음을 여기 오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그냥 봐선 어떤 사람이 제주가 고향인지 알기 어렵다. 왜냐면 요즘 제주 주민들은 표준어와 제주 사투리를 둘다 아주 능통하게 구사하기 때문이다. 제주 사투리를 듣다 보면 여러 지역의 사투리가 섞여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쩔 땐 함경도 사투리 같기도 하고, 어쩔 땐 강원도 사투리 같기도 하고, 어쩔 땐 충청도 사투리 같기도 한데, 어쩔 땐 또 전라도 사투리 같기도 한 말들이 제주 사투리에 비빕밥 마냥 버 무려져서는 나온다. 오랜 한반도의 역사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오랜 세월부터 제주는 육지 사람들에게 피난처의 역할을 해왔고 그만큼 상처를 많이 받은 곳이기도 하 다. 가까이는 6.25 전쟁부터, 4.3학살과 현재 일어나고 있는 강정 해군기지 문제까지. 바다와 바람과 사람이 만들어 낸 숱한 상처들을 끈질기게 이겨내고 버텨온 제주민들과 아 직은 낯선 이주민인 나의 동거는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하나씩 느끼고 다가서면서.

당원의 일상 127


편지를 접으며

증세라는 이름의 정치신학

8월 8일 박근혜 정부의 세제개편안이 발표되자‘지옥문’ 이 열렸다. 연소득 3450만원 을 기점으로 세금이 올라간다는 이야기에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증세다” “증세 아 니다”논란 속에 민주당은“(서민과 중산층에 대한) 세금폭탄” 이란 표현을 전면에 걸고 투쟁에 나섰다. 결국 4일 만에 대통령이“원점 재검토” 하겠다고 물러섰고 새누리당은 3450만원이란 기준선을 5000만원으로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세제개편안 발표 며칠 뒤부터 민주당에 대한 비판도 거세졌다. 3450만원부터 7000 만원 소득 구간에게 월 1만 원 정도 더 내는 게 어떻게 세금폭탄이냐는 것. 보편증세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없이 정치논리로 선동에 나서고 있다는 소리였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민주당 논리에 동조하는 시민들에 대한‘계몽의 논리’ 이기도 했다. 복 지 전문가들은 대체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증세를 통해 복지공약을 이행하는 방향 자 체는 옳다. 다만 법인세나 금융거래세 등 고소득층에 과세하고 나서 중산층에게 동참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 ‘증세’ 는 늘 현대정치의 볼드모트였다. <해리 포터>에 나오는“이름을 말해선 안되는 마왕”말이다. 세금 올리겠다는데 기분 좋을 사람 없다. 새누리당이 한사코“증세가 아 니라 세금 정상화” 라는 억지를 부리는 것은 그래서다. 서민과 중산층이라는 개념 자체 가 모호하다보니 혼란이 더 가중된 면도 있다. 새누리당은 3450만원을 상위 28%에 속 한다고 했지만 한국인의 주관적 중산층 기준은 그보다 훨씬 높다. 1인당 국내총생산으 로 따지면 지난해 1인당 GDP가 한화로 약 2500만 원 정도이니까 단순한 계산으로는 중 간소득 4인 가족의 수입이 1억 원이 된다. 그런데 이 정도면 한국에서는 고소득자로 인 식된다. 그만큼 한국사회의 빈부격차가 극심하다는 의미다. 세금은 정치적 혹은 경제적 주제라기보다 지극히 계급적이고 정치신학적인 주제다. 산전수전 겪은 정치인들도 세금 문제 잘못 건드렸다 한 방에 날아갔다. 논의가‘증세 대 감세’ 의 프레임에 갇혀서는 결국 논의가“세금폭탄이다!” “얼마면 돼?” 로 귀결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의 선동과 새누리당의“5000만 원”운운이 정확히 그 결과물이다. 이는 바 로 오늘날 보수정치의 한계이기도 하다. 핵심은‘증세 대 감세’ 가 아니라‘누구를 위한 어떤 세금’ 이냐다. 조세의 형평성과 목적을 체감할 수 없을 때 조세저항은 더욱 맹목이 된다.‘보편적 증세는 복지를 위해 필요한 것’ 이라는 당위만으로는 부족하다. 복지 담론 만 넘쳐나는 반면 효능감은 현저히 떨어지는 한국사회이기에 더욱 그렇다. 복지라는 추 상을 생활세계의 언어를 통해 정치적 비전으로 번역하는 진보정치가 절실한 이유다.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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