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2013년 10월호

Page 1


순서 입니다.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 / 사진. 글. @Ahopsi 영화로 읽는 시공간 / 글. 곡주대비 광고 여기 문학이 필요한시간 - 김수영 2 / 글. 고수진 회사옆 미술관 / 글. 강세기 서울시 시민 연극 교실 참여 기록 / 글. 이범 독신자의 독서일기 / 그림. 이다솜 글.권고마 전시일정 및 포스터 독후소설 / 그림. 황은정 글. 김종소리 뼈그림 / 글. 그림. 왼손이 0,0,0 / 글.그림. Night Planet 건축이 좋아 : 솔크 연구소 / 글. 사진. aoikasa 웹디자이너 생존 매뉴얼 / 글. 그림. 김성연 여행기 / 글. 사진. 박민수 우울한 청춘 / 그림. 글. 철민 부산 오뎅 이야기 / 글. odeng 마을길 마포 2로 “와우 X 홍대” / 글. 사진. exxx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바다비 일요시극장 광고 데이비드 호크니 (David Hockney) / 글. 그림. 지인


명절이야기는 아니지만 명절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어린 시절에는 왜 고속도로에서 차가 막히는지 이 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차도 달리고 앞차도 달리 는데 왜 길이 막히는 걸까? 아주 단순한 현상이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백킬로 앞의 교통사고 나 몇 킬로 앞의 작은 브레이크 한번이 흐름을 방해 한다는 상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다들 똑같은 속도로 움직이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왜 차는 막히 고 속도는 느려지는 것인지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만은 어린 시절에는 정말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한 대의 차라고 생각해 보면 우리의 앞에는 고속도로가 놓여있고 각자의 리듬으로 이래저래 인 생을 달릴 것만 같지만 실상은 도로가 없는 곳에 놓 여진 차도 있고 도로가 있어도 비포장 길인 경우도 있고 막상 길이 휑해도 기름이 없기도 하고 이래저 래 사연이 참 많습니다. 때로는 일부러 브레이크를 밟아 다른 차를 놀래키기도 하고 길을 막기도, 들이 받기도, 받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올해 어떻게 달리고 계십니까? 길은 연결되어 있고 뒤에는 다른차도 있답니다.

편집: 이훈보 표지: 이주용, 한지인

내일이 10월, 이렇게 책이 나가고 나면 올해는 두 번 밖에 뵐 기회가 없습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

월간이리 Refresh 2013

기 바랍니다.

주관: 프로젝트 이리 지원: 서울특별시,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이달에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로 읽는 시공간 글. 곡주대비

김기덕의 뫼비우스를 통해 보는 모성/창녀 모티프 (스포일러 주의) 필자는 김기덕 감독의 팬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모 든 영화를 봤으며 대충 어떤 작품이 몇 년도에 제작 되었 고 어떤 상을 수상했는지 머리로 필모그래피를 만들 수 있는 정도의 지식은 갖고 있다. 사실 영화라는 매체 자체 에 엄청난 애정을 갖고 있다거나 혹은 모든 종류의 영화 를 다 좋아한다는 소위 말해 movie buff 들 조차도 김기 덕 감독의 작품들을 진심으로 즐기기는 힘들 것이라는 (필 자의) 편견이 있음을 밝혀두어야겠다. 김기덕 감독들의 작품들을 단순히 즐기기 힘든 이유는 홍 상수 영화들이 주는 그 묘한 ‘찌질함’ 과는 또 다른 이유

서 주인공이 영웅이라면 관객들은 그와 자신을 동일시 하

다. 정신분석학을 이용하는 영화이론을 보면 identifica-

며 영화 줄곧 뿌듯하고 ‘기특한’ 마음을 가질 것이고 주인

tion 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는 관객이 영화를 볼 때 주

공이 반 영웅이라면, 이를 테면 홍상수 감독 작품들에 등

로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

장하는 찌질한 남성들 같은, 관객들은 동일시 과정에서 좌 절감이나 자괴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론은 관객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주체성이나 독립성을 고려하지 않 는다는 점에서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일단 나 자신의 개 인 으로서 보다 ‘관객’ 으로서 영화관람이라는 행위에 참 여하고자 할 때 대부분의 관객들은 자신을 버리고 영화 속의 그 혹은 그녀가 되고 싶어 하지 않은가.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 동일시 라는 개념을 소개한 이유 는 김기덕 감독 작품들을 보고 나서 느껴지는 ‘불쾌함’ 이 나 ‘찝찝함’ 등 다소 유쾌하지 못한 감정들은 단순히 도 를 넘는 도덕적인 결함 (근친상간, 강간, 폭력, …) 을 가 진 주인공에 관객들이 동일시 하는 과정에서도 생성되지 만 그 보다 더한 영화적인 장치들, 이를 테면 시각적 / 내 러티브 적인 장치들에서 증폭될 수 있다는 논지를 설명하 기 위함이었다.


김기덕 작품들에서 가장 많이 차용되는 모성 / 창녀 모티 프는 거의 모든 김기덕 영화의 화두가 된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닐 것이다. 초기 작품인 나쁜 남자에서부터 최근 작 품인 ‘피에타’ 와 ‘뫼비우스’에 이르기까지 김기덕 작품들 의 여성 주인공들은 잔인 무도한 남성 주인공들의 어머니 이자 창녀로서 상처와 성적 욕구를 치유/충족 시키는 역할 을 한다. 사실 이러한 모성/창녀 (Madonna/Whore) 모티 프는 과거 빅토리안 문학 (Victorian literature)에서부터 효시가 되어 한 여성이 가진 양면성으로 혹은 양극화된 두 여성 캐릭터로 재현이 되어왔다. 그것을 계승 받은 것 중 에 가장 흔한 예로 느와르 영화들에 등장하는 팜프 파탈 캐릭터와 착한 아내 혹은 순수한 약혼녀 캐릭터의 병치 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이러한 모성/창녀 모델의 문제점은, 특히 페미니스트 학자 들이 지적했던 관점에서 볼 때, 여성성의 분석이 두 가지

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다시 말해, 모성 / 창녀 모티프

여성상으로 관습화 되어 결국 여성은 이 두 가지 형태로만

는 남성으로부터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성적인 이용

존재한다라는 사회적인 스테레오 타입을 생산할 수 있고,

을 정당화 해주는 장치로 쓰이며 그녀가 어머니가 되는 동

나아가서는 이러한 여성성의 이분화가 실제 여성들의 자

시에 남성은 아들이 됨으로 어느 정도의 면제 부를 주는

아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역할도 하는 것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것이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폄하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점을 상기하고 싶다. 영화를 읽는 것

김기덕 작품들은 이러한 이분화된 여성 캐릭터의 극단적 인 예를 보여준다. 그의 이번 신작 뫼비우스에서 등장하 는 주인공 고등학교 남자아이의 엄마 캐릭터는 생물학적 인 엄마임과 동시에 거리낌 없이 알몸으로 아들의 침대 로 들어가는 창녀의 면모를 보인다. 남자아이가 사랑하 는 동네 슈퍼 여인 역시 이 곳 저곳에서 더럽혀진 몸의 ( 강간, 간통으로 인해) 창녀나 다름 없는 여성이지만 그녀 는 자신에 의해 거세 당한 성폭행 범의 자위를 돕고 남자 아이의 성적 욕구를 해결해주려 헌신하는 모성적인 캐릭 터이기도 하다. 단순히 보면 오이디푸스 신드롬을 영화적인 환상으로 풀 어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 작품 들의 그녀들은 그저 아들과 이성적인 사랑을 나누는 어머 니 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필자가 이 글 을 통해서 제시해 보고자 했던 화두는 김기덕 작품 속의 창녀들은 남성의 폭력과 가학적인 성관계를 모성 적인 시 선으로 당연히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는 (혹은 ‘그래야만’

자체가 지극히 주관적인 시선에서 벗어나기 힘들거니와 오늘 필자가 언급했던 주장이나 해석이 꼭 들어 맞지 않 는 작품들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작품들이 가진 전반적 인 성향에 기반한 해석이었다는 사족 (?) 을 남기고 싶다. 독서의 계절 이라는 별로 와 닿지 않는 슬로건에 맞춰 뭐 라도 하나 읽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이 글을 빌어 창녀 / 마리아 공식을 답습하는 고전인 디킨슨의 ‘올리버 트위스 트’ (1838)와 김기덕 감독 신작 ‘뫼비우스’를 병치해서 읽 고 보는 것도 좋은 조합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 문학이 필요한 시간 김수영 II

“삶이 그래, 원치 않은 일들이 매 순간 생겨나”

10월호에는 9월호에서 예고한 대로 김수영 시인의 작품을 하나 더 보려 한다. 김수영 시인의 작품 중 애절한 사랑을 표현한 시가 있다. 바로「너를 잃고」라는 작품이다. 김수영의 작품 중 가장 서정적이고 절절하게 아프다. 추석이 지나고 거짓말처럼 아침저녁으로 스산한 바람이 부는 어느새 가을이다. 계절의 정취와 함께 느껴보고자 이 작품을 선택했다.

1950년, 그 해는 김수영에게 가장 잔인한 해였다. 1950년 4월 그는 서울 돈암동에서 ‘김현경’이라는 여성과 정식 결혼은 하지 않고 동거를 시작하였다. 그녀는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다녔고 문학이나 회화에 조예가 깊은 재원인 데다 수려한 미모까지 자랑하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6.25가 터지고, 김수영은 종로 2가에 있던 조선문학가 동맹 사무실에서 북한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끌려갔다. 그는 평안남도 순천에서 UN군의 공격으로 혼란한 틈을 타 의용군 대열로부터 탈출을 감행한다. 서울로 돌아왔지만 인민군 첩자로 낙인찍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능숙한 영어 통역 솜씨 덕분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제 14야전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마침내 그는 1952년 12월 거제도 반공포로들이 석방된 1953년 6월18일보다 앞서서 석방된다. 반공포로의 신분에 있었던 2년! 김수영은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즉, 그의 작품은 생각으로만 ‘자유’를 부르짖어 쓴 시들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 ‘김현경’에게 있었다. 의용군에 끌려가서 죽었다는 소문까지 들리는 남편 소식에 절망했는지 그의 아내 김현경은 김수영의 고등학교 친구인 ‘이종구’와 부산에서 살림을 차린다. 김수영이 왜 의용군 대열에서 이탈해 서울로 왔던가? 바로 ‘김현경’때문이었다. 피와 살이 터지는 전쟁 상황에서 젊은 남편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김현경’때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남아있는 열정적인 체취, 대화. 이 모든 것이 그를 버티게 해준 버팀목 이었다. 볼 수 없는 그녀를 떠올리며 김수영은 그의 사랑을 더 키워 왔는지도 모른다.


돌아 왔다. 그런데 그녀가 없다. 김수영은 모욕감을 참으며 내 친구와 살림을 차린 그녀를 찾아 부산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 같이 가지 않겠다.’였다. 혼자 서울로 돌아온 그는 「너를 잃고」를 쓴다. 김수영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품었다.

「너를 잃고」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 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 있는 너는 억만 개의 모욕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늬가 없이 사는 삶이 보람 있기 위하여 나는 돈을 벌지 않고 늬가 주는 모욕의 억만 배의 모욕을 사기를 좋아하고 억만 인의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 나의 생활의 원주 위에 어느 날이고 늬가 서기를 바라고 나의 애정의 원주가 진정으로 위대하여지기 바라고 그리하여 이 공허한 원주가 가장 찬란하여지는 무렵 나는 또 하나 다른 유성을 향하여 달아날 것을 알고 이 영원한 숨바꼭질 속에서 나는 또한 영원히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나는 억만무려의 모욕인 까닭에.

이 시에서 ‘늬’는 김현경이다. 2년간 전쟁과 포로 속에서 마음속으로 키워 온 김현경이다. 그의 마음속 현경은 온갖 시련을 이겨내게 만들어 주었고 자유를 품을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 넣은 여신이었다. 그런데 이제 여신은 존재하지 않고 그는 혼자다.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가까스로 끌고 돌아 왔는데 그 상처를 안아줄 그녀는 없다. 김현경은 오히려 김수영에게 모욕덩어리가 되어버렸다. 내 친구와 살림을 차린 내 여신이여. 그래서 김수영은 울부짖는다. ‘억만 걸음 떨어져 있는 너는 억만 개의 모욕이다’라고. 그는 김현경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래, 전쟁이었다. 남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서 다른 남자를 의지하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않느냐.

‘나의 생활의 원주위에 어느 날이고 늬가 서기를 바라고 나의 애정의 원주가 진정으로 위대하여지기 바라고’ 그러나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서울에 홀로 남은 김수영은 괴로웠다. 그녀를 품어주자. 그래 품을 수


있다. 결심하고 부산으로 갔는데 그것은 단지 자신의 소망이었던 것이다. 친구와 살림을 차린 사실보다 그의 손을 뿌리친 일이 더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포로수용소의 모멸감도 이겨냈지만 아내로부터 받은 모멸감은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여자는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 ‘억만 인의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 라고 결심한다. 아내가 다시 돌아온다면 김수영은 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용서하는 순간 그녀를 더 이상 사랑 할 수 없을 것이다. 모욕, 자존심의 상처는 결코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내 1954년 아내는 돌아온다. 그녀가 서울로 돌아와 김수영의 자존심은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김수영에게 여신도 아니고 그저 아들을 돌보는 ‘부실한 처’가 되어 버렸다. 그녀가 서울에 온 순간, 그녀를 더는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결국 김수영은 다른 여자를 사귄다. 그토록 괴로웠는데 결국 사랑은 또 오나보다.

‘그리하여 이 공허한 원주가 가장 찬란하여지는 무렵, 나는 또 하나 다른 유성을 향하여 달아날 것을 알고.’ 원치 않는 일들이 매 순간 생겨나는 것 그게 삶이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고, 왜 그랬지?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을 하며 후회한다. 사랑은 쉽게 날 스쳐지나가고 후회와 미련은 추억처럼 포장되어 날 더욱 씁쓸하게 한다. 심지어 지난 사랑은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다. 26살 때 열렬히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 첫 데이트 때 영화를 한 편 보았는데 굉장히 재미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내 옆에 있는 그가 ‘정말 재미있었지?’ 할 때 같이 환하게 웃으며 ‘응’이라고 대답하는 순간, 난 그 사람을 무척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다. 집과 회사가 멀어 자취하는 그에게 나는 멸치볶음이며 오이소박이며 없는 솜씨 있는 솜씨 살려가며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1년 정도 만났었는데 알고 보니 그에게는 4년 정도 사귄 여자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내게 양다리라는 참 엿 같은 기억을 남겨 주었지만 그 당시 나는 원망보다는 돌아오지 않을까 라는 어이없는 미련에 그가 더욱 그리워지고 그를 참 많이 품었었다. 공허함, 텅빈 안부, 씹으라고 있다는 문자.... 새벽 2시 자니? 참 손발 오글거리는 짓 많이 했다.

어쨌든 지금은 뭐 오징어채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놈의 오징어채. 사랑을 하면 우리 모두는 시인이 되고 예술가가 된다. 난 좀 찌질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또 누군가에게 밑반찬을 싸고 안겨주며 사랑한다고 속삭일 것이다. 그러나 애써 부정하지 않겠다. 그게 나니까.

다음시간에는 1950년대 리얼리즘 희곡의 정수, 차범석의 산불을 살펴보겠다. 지각하면 보강이다.

글, 고수진(gomin19@hanmail.net)


회사 옆 미술관

강세기

http://kangjoseph.tistory.com

정서영(I) 어떤 작업 앞에 설 때 불편함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불쾌하다기 보다 그 앞에서 아무 반응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 에 대한 거부반응이라고 하고 싶다.


보고 싶은 영화를 구했는데 생판 모르는 언어로 된 대사

가 자막 없이 줄줄 나올 때 느껴지는 그런 답답함과 당황 스러움이랄까. 정서영 작가의 전시 ‘큰 것, 작은 것, 넓적 한 것의 속도’ 앞에서 그랬다.

적어도 미술관에 발 길 움직여 그 작업 앞에서 섰을 때, 내 노력 들여 친히 말을 걸어 주면 어느정도는 읽혀줘야 볼 맛이 나는데, 이건 뭐야…

보여지기보다는 읽혀지는 요즘 미술에서 맥락을 잡지 못 할 때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넘어가거나 좀

더 읽어보거나. 영어 독해지문이 막힐 때 사전을 뒤져보

던지, 저자 직강도 들어보고 하듯이 조금 더 정서영 작가 에 대해 알아보는 편을 택했다. 정서영 작가를 더 알아보 기로 마음 먹은 이유는 좀 단순했다. 최근에 두산 갤러리 의 The Next Generation 전에서 인상깊게 본 김민애 작

가의 작업과 비슷한 이미지였다. 둘이 무슨 관계가 있는

작가와의 대화에서 느낀 바를 적어 내려봤다. 유치하고

김작가가 81년생이면 분명 직간접적으로 정 작가가 영

단서이다.

것인지 알고 싶어졌다. 나이상으로 정서영 작가가 64년, 향을 미쳤으리라는 단순한 추측으로 시작했다.

김과 정 작가와 어떤 미술적 교류가 있었는지는 인터넷

상으로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임근준 미술평론가가 유 사성을 간략하게 언급한 정도*였다. 일단 이걸로 둘이

영 관련이 없지는 않다는 걸로 성급하게 결론 내리고 정 작가에 대해 들어갔다.

*해당 문건이다. http://www.doosangallery.com/upload_file/file/8-3.pdf

게다가 한국 동시대 미술의 변곡점이라는 정 작가에 대

한 평가에도 혹했다. 그가 동시대 미술을 이해하는 유일 한 길은 아니겠지만 왠지 그를 이해하면 어떤 큰 흐름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러 문건도 찾아보고 예비군 훈련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가 일민미술관에서 하는 저자

와의 대화에도 가보고, 최근 나온 책도 사보고 했는데 여 전히 안개 속을 걷고 있는 듯하다. 아직도 지금까지 작업 속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의 시각 이 어떤 궤도를 따라 방향을 바꾸는지 증폭 또는 축소되 는지 방향을 잡을 수 없다.

부끄럽지만 이것이 정 작가 디깅 digging의 시작점이자

작업에서 유머가 느껴진다. 계속 봐도 그럴까? 나는 왜 그렇게 느꼈을까?

그는 공간을 어떻게 보는가

행간(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 또는 언어와 언어 사이 에 있는 틈?)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가 쓴 대로 따라가보고 상상해보자. 따라 해보기도 하 자.

영상, 사진 작업도 많은데 왜 대화에는 ‘조각’이라는 단 어가 많이 나오나.

조각이 아닌 것을 조각으로 우기는 건가? 아니면 조각으 로 생각하는 건가?

영상 작업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건가

조각에서 구현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미디어를 사용한 다고 했다.

조각과 그 외 미디어를 비교해보자. 조각에는 없고 그 외 미디어에서 있는 것은?

소리가 어떻게 공간감을 표현하는가.

커트머리가 잘 어울린다. 생각보다 키도 아담하다.

그의 작업을 보면서 내 느낌을 중요시 해야하는 건가

아니면 그의 시각을 이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건가?


작가는 작업 속에서 긴장관계를 일부러 설정한다.

시간이 흐르며 긴장관계를 풀어내는 방식이 달라지나? 그 긴장을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가? 그 긴장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가능하다면 긴장관계를 설정하는 이유도 알고 싶다. 작업의 이미지는 동일선상인가 아니면 변하나.

작가는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어떤 공간을 보고 그것 을 시각화 할 수 있는 사람.

인터넷상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그에 대한 글 정보는 그

의 저서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 뒷면에 그를

비평한 미술평론가들의 평문과 인터뷰 출처에서 찾아보 게 되어 반가웠다.

지난번 콜렉티브에 대해 알아보면서 작가들의 행보를

내 시선으로 그리는 것에 묘미를 느꼈다. 비록 단순히 보고 느끼는 것보다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그 시선에 대해 검증할 길이 없다는 것이 두렵기는 하지만 동시대 미술을 즐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과정 이 아닐까 한다.

3. 단행본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정서영/김

듯하다. 투 비 컨티뉴드를 외치려면 어디까지나 그것을

- 08~12년도까지 정작가의 작업과 관련 인터뷰를 수록

그래서 정서영 작가에 대한 감상은 다음달로 미뤄야 될

현진, 현실문화)

재미있게 봐주는 사람 앞에서 해야 하는 사람도 듣는 사

한 단행본이다. 이런 책 너무 사랑한다. 광택나는 빠닥빠

인한 어쩔 수 없는 일보후퇴의 투 비 컨티뉴드이다. 단순

런 단행본이 많이 나와줘야한다.

람도 감칠맛이 날 텐데, 이 것은 나의 게으름과 무지로

한 감상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인 그에 대한 이해와 내 생

닥한 수입지가 아니면 어떠랴. 부담가능한 가격대의 이

각이 덧붙여졌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져본다.

- 책 값은 알라딘이 제일 싸다.

*모든 이미지 출처 : http://kimkimgallery.blogspot.

- 이 책을 출판한 현실문화가 운영하는 일민미술관 내 ‘

kr/2013/09/blog-post.html

기둥서점’에서도 구할 수 있다. 웬만하면 후원개념으로

<관련 정보>

를 요청했을 때 현실문화와 Workroom press와 전속계

1. 일민미술관 전시 http://ilmin.org/ - 전시정보가 담겨있다.

2. 두산아트스쿨 http://www.doosanartcenter.com/ artschool/lecture_view.asp?idx=30

- 10월 5일(토)에 작가 강의가 있다. 마감되었지만 서서

라도 듣자. 나는 회사교육땜에 ㅠ

인터넷에서 사지 않고 여기서 샀겠지만 월간이리 비치 약을 맺었다며 매몰차게 뺀지를 놨기 때문에 소심한 보

이콧을 벌였다. 그 직원은 알바라고 믿고 싶다. 어쨌든

앞으로도 당분간은 기둥서점에서 책 구매를 거부할 생각 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동시대 미술책은 정말 많다. 언젠 가는 이용해 줄 거다.


서울시 시민연극교실 참여기록

연출가. 이범

7. 다시 한 번 이 글은 서울시가 주최하는 <시민연극교실> 중 <시민과 배우가 함께하는 연극의 탄생> 파트에 배우 강사로 참여하는 나의 기록이다. 9월 3일부터 11월 26일까지 시민청 바스락 홀에서 매주 화요일 저녁, 한예종 연극원에 계시는 김석만 교수님의 강의가 진행되고, 강의의 마지막 날에는 참여하는 시민 분들의 장면발표 가 예정되어 있다. 참여하는 배우 강사들은 매주 진행되는 강의 희곡의 한 장면을 시연하고, 5~6 명의 조로 편성된 시민분들이 마지막 강의에 발표할 장면을 지도하고 돕는다. 이 글은 시민과 배우가 만나, 연극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함께하는 일련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기도 하고, 평소에 연극이나 희곡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분들에게 작은 호기심이나마 유도해볼까 라는 의도를 담고 있다. 유독 그 반대의 경우가 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8. 첫 번째 강의_9.3_<연극이란 무엇인가, 비극의 탄생> 첫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배우 강사들을 위한 두 번의 워크샵이 있었다. 그리고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시민의 모집도 있었다. 정원 60명 정도를 모집할 예정이었는데, 세 배에 가까운 분들이 지원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쨌든 현재는 10개의 조로 편성되어, 각 조마다 세부 모임을 갖고 있는 상태다. 지난 호에는 여기까지의 과정을 적었다. 그 동안 이 프로그램과 관련된 두 개의 온라인 카페가 개설되었다. 소개해 둔다. ①http://cafe.daum.net/2013theater

---->주로 참여 배우강사의 온라인 카페

②http://cafe.naver.com/theartinsideme

---->주로 참여 시민분들의 온라인 카페

9월 3일, 10일에는 고대 그리스 연극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졌다. 3일에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프스 왕> 을 중심으로, 10일에는 이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을 중심으로, 극장의 탄생, 축제_디오뉘소스 축제, 배우의 탄생, 드라마의 탄생, 연극이론- 시학 등에 관한 강의가 이어졌다. 17일에는 추석 관계로 강의를 쉬고, 24 일에는 <햄릿>을 중심으로 한 강의가 있을 예정인데, <월간 이리>의 마감일자 관계로 이번호에는 9월10 일까지의 강의까지만 적을 수 있을 것 같다.

9. 아득한 시간 이다. 검색어에 소포클레스를 치면 B.C 496~406 이라는 시간을 만날 수 있다. 자그마치 2,500년 전이라는 얘기인데... 다시 한 번 아.득.하.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프스 왕>은 여러분이 금새 떠올릴 수 있는 몇 가지 이미지들, 바로 그 작품이다. 워낙에 뛰어난 구성의 작품이라 이건 뭐.... 최근의 뉴스를 떠올린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고 사는 사람의 이야기가 버젓이 공연되는 시대에 왜 우리 영화는 안되느냐고 의, 버젓이 앞에 내용이, 맞다, 이 희곡의 내용이다. 그렇다, 무덤에 있는 자들은 이런 경우에나 인용되는 법이지. 그런데, 한 편으로 씁쓸한 이 기분은 뭘까? 첫 강의에서 책임강사는 이 작품의 뛰어남에 대해_내 해석에 의하면_이런 비유를 했다. 이 작품을 100번 만 필사해보면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아득한 시절은, 멀지 않은, 재밌는 의문도 남긴다. 지금처럼 복사기나 프린터가 발전되지 않았던 시절에도 대본은 필요했을 것 아닌가? 영화든, 연극이든, 방송이든. 그 때는 대본을 서로 돌려봤나?


월간 이리 2011년 3월호를 꺼내본다. 당시에 나는 그래도 좀 진중한 연극 얘기를 써보려고, 참 많은 연극을 보러 다녔었다. 거기에는 <오이디푸스 왕> 공연에 대한 몇 개의 구절들이 있고, 또 거기에는 그 때는 담지 않았던 이야기의 구절도 있다. 초록 검색 창을 보니, “국립 극단은 정부가 지원하는 공공 공연예술 단체이다. 1950년 국립극장의 설립과 함께 전속 극단으로 창설되었고, 2010년 재단법인으로 다시 출범하였다“ 그랬다. 2010년은 국립극단의 법인화 문제가 연극계에서는 중요한 이야기였다. 여기서 그 제반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고, 하기도 어렵다. 다만, 2011 년 그곳에는, 내가 평소에 주목하던 국립극단의 배우 한명이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이디푸스 배역으로 서 있었다. 오래 전 그의 대학원 논문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원로 배우의 발성을 중심으로 한, 무대 발성법의 이야기였다. 그는 그 당시 종신고용제에 해당하는 자신의 일자리를 잃은 셈이다. 인터넷에서는 벌써 그가 귀농을 선택했다는 기사도 보였다. 그리고 새롭게 설립된 국립극단의 창단 공연 무대에 서 있다. 물론 이것은 인물과 어떤 배역이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는 것으로 보였던 나의 감상이다. 소포클레스의 이 희곡은 이러한 구절로 끝난다, .....So while we wait to see that final day, we cannot call a mortal being happy before he’s passed beyond life free from pain.

10. 다시 첫 번째 강의_9.3_<연극이란 무엇인가, 비극의 탄생> 9월3일과 10일에 진행된 그리스 고대 연극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방대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생길 것은 이미 거기서 다 생겼기 때문이랄까. 그 방대한 내용 중에서 중요한 요소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책임강사의 정리 된 프리젠테이션으로 진행되었다. 사실 9월 3일의 첫 강의 풍경은 좀 산만했다. 그도 그럴것이 처음으로 100명이 넘는 인원이 한 자리에 모였고, 시민분들에게는 강의 자료와 출석부 등이 나누어지고, 그러니까 그야말로 첫 수업의 분위기였다. 배우강사들이 모두 소개되었고, 커리큘럼의 소개, 소개, 소개의 시간이 이어졌다. 그리고 배우들의 첫 번째 시연이 이루어졌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프스 왕> 중에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와 오이디프스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_굉장한 장면이다_ 극의 초반 이야기는 줄거리 형식으로 들려주고, 준비한 장면에 이르러 본격적인 연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날 각 팀에 배정된 시민들과의 짧은 만남이 있었다. 이에 비해 9월 10일 두 번째 강의는 역시나 차분한 분위기 속에 이루어졌다. 지난 시간 강의의 짧은 복습과 그리스 고대 연극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들,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 중 아버지와 아들이 나누는 마지막 장면의 대화가 시연으로 보여졌고, 강의 뒤에 모임을 준비한 팀들은 자연스럽게 배우 강사와 시민이 어울리는 자리를 만들었다. 강의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8번 글의 온라인 카페에서 확인하실 수 있고, 다만 이 두 번의 강의를 통해 나도 좀 더 공부하고 알아봐야 할 것들이 생겼기에, 그 지점에 대한 스케치를 담긴다.

11.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오이디프스는 ‘퉁퉁 부은 발’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신탁을 믿고, 아들의 복사뼈에 못을 박아서 산중에 버린 탓이겠지. 이번 강의에서는 재밌는 이야기를 접했는데, oida [나는 안다] + pou [어디], 그는 작품에서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이름은 ‘나는 어디인지 안다’를 풍긴다 라는 내용이다. -<오이디푸스 왕>의 주제는 결국 ‘gnothi seauton’ 라는 경구에 닿아 있는데, 이 경구가 새겨져 있다는 델포이 신전, 증말 가보고 싶구나.


-위의 그림은 에피다브로스 극장의 평면도이다. ① 21계단(위), 34계단(아래) 21:34= 1.619/ 34:55= 1.618 의 비율 ② 의자 높이, 폭이 31~32 cm 차이 ③ 객석 밑에 토관 매설 ④ 바깥 객석 타원, 안 객석은 원. ⑤ 타원 중심 두 개와 원 중심 하나= 공명 3각형 이라는 구조를 통해 완벽한 공명을 가진다고 한다. 책임강사가 직접 저 곳에 서서, 시연해 보셨다니 믿을 수 밖에. 보다 어렸을 때, 어떤 중견연출가가 해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만 명 이상의 관객 앞에서, 이 웅장한 희곡을 공연했던 그리스의 배우들은 틀림없이 동양인과는 다른 울림통과 발성 기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라는. -연극을 나타내는 우리말은 짓, 노릇, 굿 등이라고 한다. 그래서 오늘도 노릇하게 고기를 구우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연극인들의 풍경을 자주 볼 수 있다라는 여담도^^ -그리스 희곡의 코러스에 대한 유쾌한 사용은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그의 영화 마이티 아프로디테 에서는 특히 재미지다. -9월 10일 강의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도 언급된다. 카타르시스 라는 지극히 유명한 개념을 담고 있는 책이고, 이 책의 2권(?)은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 중에는 <Lysistratē> 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것이 www.lysistrataproject.org 라는 여성인권 운동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전쟁에만 미쳐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들에게 전쟁을 중지시키기 위해 여성들이 섹스 스트라이크를 일으키는 내용이라는 이 희곡은 이번 주에 읽어볼 예정. 굉장하다고 하니까.



독신자의 독서일기: 인간의 조건 지금 그 시절을 되돌아볼 때 나를 가장 놀라게 하는 건 내가 뱃일을 버텨냈다는 게 아니라 틈만 나 면 배 위에서 잠이 들었다는 사실이다.(40쪽) 여느 날처럼 그동안 나온 신간 목록을 일일이 살피던 참이었다. ‘인간의 조건’이라는 제목은 이 책이 어 떤 책인지 아무 정보도 전달해주지 못했다. 저자도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제목을 클릭해 서점의 도서 정 보 페이지를 살펴본 이유는 전적으로 부제 때문이었다. 두 개의 구로 이루어진 부제에서 앞의 구 ‘꽃게 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가 대번에 눈길을 끌었다. 그리 인상적이지 않은 뒤의 구까지 읽고 나자 이 책이 논픽션, 정확히 말하면 르포르타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전국을 떠돌며 닥치는 대로 일했고 일하는 틈틈이 영원히 출판되지 못할 게 분명한 시와 소설 들을 썼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고시원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그동안 겪어본 직업이 꽤 여러 가지였 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1차, 2차, 3차 산업, 더 세밀하게는 농업, 어업, 축산업, 제조업, 서비스 업계에서 모두 일해본다면 그때는 책을 한 권 써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렇게 했다. 책 앞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 글 중 일부다. 매우 인상적이었고 놀라웠다. 나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이런 현장 체험형 논픽션을 쓸 수 있는 저자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슷한 책으로 한겨레신문 기자 들이 쓴 『4천원 인생』이라는 책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잡지에 실은 글을 묶은 것이고, 저자들은 기 자로서 월급을 받았으며 돌아갈 사무실도 있었다. 기자들 스스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논픽션, 그중에서도 르포르타주를 특히 좋아했고 지금도 그렇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 심했을 때 르포르타주를 만드는 편집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저자도 출판사도 “거의 모든 예술 영역 중 유일하게 젊은 여성의 환심을 사는 데 실패하는, 그런 장르”(11쪽)의 책을 내기란 쉽지 않다. 유명 저 자가 아닌 이상 이런 장르에서 출판사가 집필 비용을 일정 부분 지원해주는 경우는 드물다. 저자는 책이 나오리라는 기약도 없이 몇 달 동안 글을 쓸 각오를 해야 하고 그동안의 생계를 감당해야 한다. 글을 완 성하고 다행히 출판사와 계약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출판사가 저자에게 시간당 최저 임금보다 많은 이 익을 보장해줄 가능성은 매우 적다. 그럴 수 있을 만큼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저자에게 최 저 임금은 보장해주는 편집자가 되고 싶었다.

이틀발이 · 진도, 꽃게잡이 빈민의 호텔 · 서울, 편의점과 주유소 과자의 집의 기록 · 아산, 돼지 농장 면죄부 · 춘천, 비닐하우스 T. G. I. F. · 당진, 자동차 부품 공장 퀴닝Queening 모두 다섯 곳에서 일한 기록을 담았고 마지막 6부에 짧은 픽션이 있다. 각각의 일터에서 일한 시기를 밝


혀놓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아마도 시간 순으로 배치한 것이겠지만, 내가 담당 편집자였어도 꽃게잡이 배 이야기를 무조건 첫 번째에 놓았을 것이다. 르포르타주를 읽는 독자들은 당신과 나처럼 대개 사회적 으로 전형적이고 동질적이다. 위험하고 고된 현장의 이야기에 쉽게 매혹된다. 르포르타주는 어떤 삶의 현장을 저자가 직접 체험하고 쓴 글이다. 자료 조사와 인터뷰 위주인 일반적인 논픽션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조지 오웰은 총알이 날아다니는 지붕 위에 엎드려 있는 동안 자신은 그저 배가 고팠고 집에 가고 싶었다고 썼다. 르포르타주 작가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더해 바로 거기 있는 자기 자신의 행동과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난 일까지 함께 기록한다. 그러려면 어떤 상황에 놓여 있 는 자기 자신을 대상화할 줄 아는 지적 능력이 필요하다. 외부 환경과 자기 사이의 상호 작용과, 바로 그 순간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외부인이 관찰하듯 기록하고 분석할 줄 아는 능력. 나는 이런 자기 객관화의 능력이 지식과 다른 ‘지성’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독자가 르포르타주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지식과 경험과 안목의 범위만큼, 즉 작가의 지성의 범 위만큼 이다. 독자는 작가를 통해서 낯선 삶과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작가는 독자와 그들을 이 어주는 전달자이자 매개자, 거름망 같은 존재다. 이 거름망의 존재감이 르포르타주의 질을 결정하는 가 장 핵심적인 기준이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아야 한다. 이야기는 작가, 즉 저자를 통해서 전달되지만 독자가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저자의 존재가 독서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저자가 자기를 드 러내고 싶은 욕심을 얼마나 잘 제어하는가가 중요하다. 통찰과 허세의 차이는 아주 얇다. 독자는 저자 자 체가 궁금하지 않다. 그가 전해주는 낯선 삶과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우리가 모르는 세계와 한 인 간이 어떤 식으로 상호 작용하는지를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들여다보고 싶을 뿐이다. 간접 체험의 한계는 분명하다. 5부의 자동차 부품 공장 이야기를 읽으면서 결국 내가 떠올린 것은 2004 년 겨울에 일했던 울산의 자동차 부품 공장의 모습이었다. 녹색 페인트가 칠해진 바닥, 난방도 냉방도 없 는 커다란 공간, 그 공간을 꽉 채운 소음들, 컨베이어 벨트, 파키스탄에서 온 이주 노동자, 비슷한 나이 의 동료들. 2005년 새해 아침을 나는 공장에서 야간조로 일하던 중에 맞았다. 부품을 실은 빠레트를 쌓 으러 밖에 나갔을 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공장 사람들에게 입시 준비에 실패해 입대 전까지 돈을 벌러 왔다고 거짓말했다. 나는 스스로가 주야 맞교대의 세계를 체험하러 온 외부인이라고 믿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동생, 아저씨, 형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인상적인 이유는 그들의 이야기가 함 께 노동하는 자에게만 들려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흔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와 달리 그들은 동료에게 자신의 삶을 들려주었다. 동료가 됨으로써만 들을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나는 14,800원으 로 전해 들었다. “두 번째 온 아저씨도 조선족이었는데 나이가 한 50대 초반 정도 돼 보였어. 먼저 사장이랑 쭉 얘기 를 했지. 사장이 하실 수 있겠냐고 물으니까, 그 북한 말투 있잖아? 그 말투로, ‘아, 그까이 꺼 가뿐 하지요’ 그러는 거야. 그래서 곧바로 나랑 일을 시작했지. 새로 도착한 나무를 트럭에서 내리는 데 통 나무가 엄청 무겁거든. 내가 무거운데 옮길 수 있겠냐고 물으니까 또 ‘아, 그까이 꺼 가뿐하지요’ 그 러는 거야. 그리곤 잠바를 벗드라고. 그런데 갑자가 왼팔을 딱 잡더니 쑥 하고 뽑아버리는 거야. 그 때 진짜 놀랐다. 왼팔이 어깨 바로 아래서 잘렸어. 긴팔 옷을 입고 있으니까 의수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지. 그 팔로 나무를 붙들려고 하는데, 나무가 두꺼워서 두 팔로 감싸지 않으면 안 되거든. 나도 그때서야 정신이 들어서 막 말렸지. 그래도 막무가내야. 이 정도는 가뿐하다면서. 아이고 안 된다고, 나무 떨어뜨리면 크게 다친다고 말렸지. 결국엔 사장을 불렀어. 사장도 깜짝 놀랐어. 둘이서 뜯어말 렸지. 이런 팔로 일 못한다고. 그래도 자기는 할 수 있대. 나중엔 막 울면서 매달려서 10만 원인가 쥐여 주고 돌려보냈어. 나 진짜 아직까지 그 아저씨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그까이 꺼 가 뿐하지요, 어깨밖에 없는 팔로, 그까이 꺼 가뿐하지요, 그까이 꺼 가뿐하지요.” 259쪽 이런 책을 만들 수 있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 좋은 책이다.

<끝>





- 이 달의 선정 도서 『헤이 웨잇...』, 제이슨, 김대중 역, 새만화책, 2002

인생은 하나의 사건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 다른 사건들에 비해 큰 영향을 끼칠 수는 있다. 이를 테면

의해 빚어진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왠지 친구의 죽음 때문에 그가 공장에서 일하게 된 것만 같다.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과 같은 사건이 그렇다. 친구의 죽음은 그의 탓이 아니었다. 주인공 욘은 어린 시절, “공장 같이 지 겨운 데에서는 일하지 않을 거”라는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그의 영향이 없 었던 것도 아니었다.

친구의 말에 “물론”이라고 답한다. 사람에게 사건이란 결국 사람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가 사고로 목 숨을 잃는다. 후에, 어른이 된 그는 어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린 시절의 다짐과는 달리, 공장에서 일 하게 된다.

죽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면 그는 누군가에게

그가 공장에서 일하게 된 것은 수많은 사건들에

영향을 끼친다.

- 우주를 가로질러 눈을 뜨자 사람들의 다리가 보였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은 미식거렸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 다.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회사!’

번뜩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10월 6일, 일요일.’ 안도의 한숨.

‘근데 여긴 어디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 뒷주머니를 살폈다. ‘지갑은 있고… 가방은?’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그러고 보니 나 밖에서 잔 건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대학 시절에도 안 하던 짓을 나이 서른셋 먹고 하다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그날이 쉬는 날이란 점이었다.

전날. 나는 후배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후배는 나보다 세 살 어린 여자애였다. ‘애’라는 호칭을 붙이기엔 좀 그런 나이지만…… 게다가 이젠 유부녀……


어쨌든 후배는 대학에서 만난 사람들 중 ‘진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군대를 다녀온 뒤

복학해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졸업 때까지 늘 함께 붙어 다녔다. 후배는 학교에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붙어 다니니 주변에서는 둘이 사귀냐고 묻고 했다. 사람들의

말처럼 그런 사이는 아니었지만 먼 미래에는 연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평생 함께 살 기에 좋은 사람이었다. 한번은 농담 삼아 “지금 연애하는 대신, 나중에 결혼하자”고 말한 적이 있는데, 후배는 웃으며 좋다고 대답했었다.

하지만 삶이 늘 그렇듯, 생각대로 되진 않았다. 졸업 후엔 1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했고, 그렇게 1

년, 2년, 6년이 흘러, 후배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고, 나는 그 결혼식에 참석해 후배의 행복을 기원하게 되었다.

나는 뷔페를 먹으며 술을 마셨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동기, 후배, 선배들 사이에서 맥주를 따서 마

시고, 소주를 까 홀짝이면서 학교에서 만난 또 다른 진짜 친구, 나보다 아홉 살이나 어려진 선배를 생 각했다.

‘아홉 살이나 어린데 선배라고 하는 게 맞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재밌어서 혼자 낄낄거렸다. 후배에게 알려주면 후배도 재밌어할 것 같았다. 하

지만 후배는 보험회사에 다닌다는 놈팽이와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뱅뱅 돌고 있었다. 그것도 우스꽝 스러운 한복을 입고서.

‘선배가 그때 죽지 않고, 그래서 나랑 후배랑 같이 학교를 다니고, 지금 여기서 나랑 같이 후배를 비

아냥거리며 소주를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은 그렇게 흘렀고, 종이컵 안으로 맥주가, 소주가 흘러들어갔다가 미끄러지듯 내 목을 타고 내

려갔다. 그리곤 필름이 싹둑.

그 이후의 듬성듬성 남은 기억의 파편들이 떠올랐다. 버스에 올라타는 학교 사람들.

서울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소리치는 내 모습. 불 꺼진 대전역.

흔들리는 네온사인들.

쉬었다 가라며 붙잡는 아줌마. ‘대전역이구나.’

의자에 멍하니 앉아서 어쩔까 생각했다. 생각하다 보니 배가 고팠다.

역 앞 분식집에 들어가 라면에 김밥 한 줄을 주문했다. 물을 떠다 마시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할머니가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전국노래자랑인가?’

할머니 다음엔 젊은 남자가 무대에 올랐다. 김밥이 나오고, 익숙한 멜로디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노래 뭐였더라?’

전국노래자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멜로디였다. 간주가 끝나고 남자의 입에서 영어가 흘러나왔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전국노래자랑에서 비틀즈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애당초 전국노래자

랑을 잘 보지 않으니까 그런 것이겠지만, 어쨌든 무척 생소해 보였다. 그리고 라면이 나왔다. 국물을 떠먹는데 의문이 들었다.

‘저 남자는 왜 저기서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를 부르는 거지?’


면발을 후루룩 빨아들이고, 김밥을 질겅질겅 씹으며 계속 생각을 이어갔다.

‘후배는 자기가 보험쟁이랑 결혼하게 될 거란 걸 알았을까? 나는 샐러리맨이 될 거란 걸 알았나? 선

배는 자기가 죽을 걸 알았을까……’ 선배는 물에 빠져 죽었다.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익사가 선배와 어울리는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우습지만 그게 처음으로 든

생각이었다. 그리고 전혀 슬프지 않았다.

‘어차피 누구든 죽는 것인데, 선배는 조금 일찍 죽었을 뿐이었으니까.’ 뭐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태풍이 몰아치는 날에 레프팅을 한다는 것부터가 미친 짓이었다. 배가 뒤집혔고, 후배 둘이 물에 빠

져 허우적거렸다. 뭍에 있던 선배는 그 둘을 구해보겠다고 물에 들어갔다. 셋은 물에서 나오지 못했다.

내가 그곳에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선배를 붙잡고 들어가지 말라고 말릴 수 있었을까? 당신

이 죽으면 난 누구랑 제대로 된 대화를 하느냐고 물을 수 있었을까?

나는 선배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선배랑 별로 친하지도 않던 사람들이 잔뜩 모여서 선배에 대

해 이러쿵저러쿵 늘어놓는 말들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 꼴을 보면 성질이 나서 다 뒤집어 엎어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개판으로 만들어놓으면 선배의 장례식이 꽤 멋진 이벤트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선배가 재밌어 할진 모르겠지만, 그걸 바라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내 방식으로 정의하는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투명한 유리로 된 원통형의 물건이 있다고 해보자.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꽃병’이라고 부

른다. 하지만 난 그것을 ‘꽃병’이라 부르는 게 싫다. 왜냐면 그것에 꽃이 꽂혀있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까. 만약 내가 그것에 펜과 연필들을 모아 넣어둔다면 그것은 내게 ‘필통’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것에 펜과 연필을 넣어둔다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꽃병’이라 부를 것이다. 그리고 ‘꽃병’에 왜 펜과 연필을 넣어 두었냐고 할 것이다.

보통은 ‘꽃병’과 같은 사람들이지만, 보험팔이랑 결혼한 후배와 물에 빠져 죽은 선배만큼은 ‘필통’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스스로 세상의 모든 것을 정의하고자 하는 사람들. 둘은 내 정의를 이해하고 받아 들였으며, 나 역시 그들의 정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것이 어떤 뚜렷한 형태로 유지되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우린 희미하게 서로에게 연결되어져 있는 선을 쥐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 고, 위로가 되는 일이기도 했다.

라면 국물까지 싹 비우고 일어섰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와 자켓을 벗었다. 후배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하지만 후배는 필리핀에서 놈팽이 녀석과 코끼리 위에 올라타 꺅꺅 소리를 질러대고 있을 것 이었다.

나는 외로웠다. 친구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진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두 명 모두 만날 수 없었다.

후배라는 년은 보험쟁이와 코끼리를 타느라 바쁘고, 선배라는 새끼는 사람 구하겠다고 나서서 목숨 을 잃었다.

문득 선배의 무덤을 찾아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구하려고 뛰어든 덕분에 어디 현충원에 묻혔

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동기 중 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선배 무덤이 어디냐?” “뭐라고?”

“선배 무덤이 어디냐고.” “너 지금 어디야?”


묻는 말에 대답은 않고 딴 걸 묻는 동기 놈 때문에 짜증이 났다. “대전이야. 선배 무덤 어디냐고.”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어젠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거야? 지선이 결혼하는 게 그렇게 싫었냐?” “싫긴 뭐가 싫어. 선배 무덤 어디냐고. 그거나 알려줘.” “어휴. 이 새끼 진짜. 선배면 창수 선배 말하는 거지?”

“씨발. 그럼 창수 선배 말고 죽은 선배가 또 있냐? 짜증나게 왜 이래?” “왜 욕은 하고 그래? 대전이야 대전.” “대전?”

“대전 현충원이라고.”

나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이 났다. “미친놈. 갑자기 왜 이렇게 웃어?”

나는 동기의 말에 답하는 대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배를 부여잡고 쭈그려 앉아서 계속해서 웃어

댔다.

입대 전날. 당시 선배는 학교 근처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계절 학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선배를 만나 기 위해 학교에 갔다. 선배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린 선배의 작은 고시원 방에서 소주를 나눠 마셨다. 선배는 군대에서 있었던 웃긴 이야기들을 늘

어놓았다. 시간이 흐르고, 막차 시각이 다가왔다. “선배, 저 이제 갈게요.” “그래. 가.”

주섬주섬 짐을 챙겨 자리에 일어나는데 선배가 내 어깨를 잡았다. “빨리 갔다 와라. 지겹게 혼자 학교 어떻게 다니냐?”

“그러게요. 빨리 갔다 올 테니까, 선배는 졸업이나 하지 마세요.” “걱정 마. 평생 졸업할 일 없을 것 같으니까.”

선배는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난 선배의 손을 꽉 쥐었다. 선배는 웃었고, 나는 울상을 지

었다. 그렇게 고시원을 나섰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선배는 그날의 농담처럼 정말로 평생 졸업할 일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후배와 친구가 되었고, 졸업을 했다. 죽어도 평범한 샐러리맨은 되지 않겠다던 나는 지 극히 평범한 샐러리맨이 되었고, 죽어도 평범한 남자와 결혼하지 않겠다던 후배는 평범하다 못해 놈 팽이 같은 보험쟁이와 결혼을 했다.

대전 현충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도 자꾸만 웃음이 났다. 모든 일들이 마치 그날 하루를 위해서 일어난 것 같았다. 선배를 만난 것도, 선배가 죽은 것도, 후배를 만난 것도, 후배가 대전에서 결혼한 것도, 전부 다 내가 대전 현충원에 가기 위해서 벌어진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서 현충원 입구 매점에 들어가 하얀 국화 한 송이를 샀다. 그리고 무작정 현충원을 돌

아다녔다. 한참을 돌았는데 선배의 무덤은 보이지 않았다. 국가 유공자 구역도, 일반인 구역도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선배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동기 녀석이 잘못 알려준 것인지, 아님 내가 찾지 못 하는 것인지. 어쨌든 별로 상관없었다.

나가는 길에 매점에 들려 국화를 환불해달라고 했다. 매점 아줌마는 단호하게 안 된다며 거절했다.

나는 국화를 국화 다발 위에 가만히 올려두고, 맥주 한 캔을 사들고 밖으로 나와 걸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어느새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는 게 보였다. 나는 뒷짐을 지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자이 구루우 데에 바 옴……”



<0,0,0>

야행성Night Planet

twitter : @hitchhiker_j

“가끔 궁금하다. 우리는 똑같은 집을 원해서 똑같은 집에 사는건지. 똑같은 집만 만드니까 똑같은 집에 사는건지.”


<일곱번째 집(2008-2009)>

일곱 번째 집은 지하철역 근처의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지은 지 얼마 안된 건물이었는데

재개발 예정지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바로 함께 살던 집을 떠난 건 아니고 한동 안은 여섯 번째 집에 살았다.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오니 현실적인 문제들이 밀려들었다. 장례식에 찾아와 준 분들

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아빠의 유품들을 정리하는 사적인 일부터 납골공원에 5년치 관리비를 미리 납부한다 던지 주민센터에 사망신고를 하고, 국민연금관리공단과 보험회사에 각각 보험금을 신청 하는 공식적인 일까지. 빠진 서류가 없는지 꼼꼼히 챙기고, 많은 서류에 싸인을 했다. 어느 하루 는 날을 잡아 엄마, 언니, 나 세 식구에 고모, 그리고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분까지 다섯이 꽃가 게 뒷마당에 모여 아빠의 옷가지들을 태웠다. 모든 옷을 가지고 나와 태운 건 아니었으니 그저 상 징적인 의식이었는데, 그 순간이 너무도 허망해서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서 조용히 흐느끼기만 했 다. 불꽃이 탁! 하고 소리를 낼 때마다 언니가 힘을 줘 내 손을 꽉 잡던 느낌이 생생하다. 그 순 간을 돌아보면 꼭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고 담담하다. 오히려 서류 업무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분과 어떤 관계세요?” 라고 묻던 주민센터 직원의 무심한 표정이랄지, 보험금 이 너무 적어서 느껴지던 실망감, 한달 안에 사망신고를 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한다는 종류의 현실적인 문제들이 지나치게 사무적이라 감당이 안됐다. 시스템은 감정이 없고, 세상은 나의 슬픔 에 관심이 없었다.

이사를 한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동네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30년 가까이 장 사를 하며 한 동네에 자리를 잡고 산다는 건 딱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좋았다. 요즘은 옆집 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르는 게 문제라고들 하지만,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긴밀하게 연결된 전통적인 지역 공동체도 그 나름의 단점은 있다. 이 집단은 보수적일 수 밖에 없어서 부모와 자녀 로 구성되어 겉보기에 결점 없는 완전한 가족만이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다. 남편 잃은 여자의 화 장이 너무 짙은 게 문제가 됐고, 미용실에 갔다고, 차를 바꿨다고 수근 거렸다. 아빠가 돌아가셨 다고, 남편이 죽었다고, 매일 24시간이 슬픈 것도 아닌데, 동네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과 마주치는 모든 순간에 슬퍼보이기를 바랬다. 너무 슬퍼도 안 되고, 완전한 극복도 아닌 적당한 수준의 슬픔.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적당하다’는 말의 정도를 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동네를 떠나 일곱 번째 집으로 이사를 했다. 꽃가게에서는 차로 20분 거리였고,

지하철 역과 가까웠다. 역세권에 살아본 건 처음이었는데, 동네 전봇대에 붙은 신축 빌라 분양 전 단이나 신문에 난 아파트 광고마다 왜 그렇게 ‘초역세권’이라 강조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건 마치 동네 바깥에 있는 공영 주차장을 이용하던 사람이 차고가 있는 집으로 이사한 것과 같다. 집 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산림욕장과 도서관이 있고, 집 뒤쪽으로 5분만 걸어가면 종합병원 가 는 길 위로 활성화 된 재래시장이 있어 여러모로 살기 괜찮은 동네였다.

일곱번째 집은 아파트였지만 일반적인 아파트처럼 단지형은 아니었고, 단독 건물의 한동

짜리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고만고만한 붉은 벽돌의 다세대 주택들이 있는 동네에 혼자만 지상에 주차장을 가진 덩치 큰 건물이었다. 뒤쪽에 시장과 주택들, 그리고 이 건물까지 묶여서 재개발 계 획이 있었기 때문에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끼리는 한달에 한번씩 옆 집 부부가 하는 갈비집에 모여 회의를 했다. 엄마는 재개발을 염두하고 투자 개념으로 집을 산 터였고, 다른 사람들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재개발이 된 후에 추가금을 못내서 새 아파트를 차지하지 못할 사람은 없었으니 재개발에 대해 날선 감정이 있을 리 없었고, 사람들끼리 사이가 무척 좋았다. 같은 욕망을 공유하고,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목표점에 도달하면 무언 가 얻을 것이 있는 사람들의 결속력이란 생각보다 엄청나다.

유학 준비를 하고 있던 언니는 계획대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엄마와 넓은 집에서 둘

이 살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집이 커지면서 각 방들의 크기는 넓어졌지만 방의 배치나 구조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아빠가 지었던 첫번째 집에서 이사를 나온 후 아파트, 다세대 주택, 빌라 등 6개의 집을 거쳐오는 동안 집의 유형은 달라지는데 평면에서는 변한 게 없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왼쪽으로 거실이 있고, 거실 창 밖에 어떤 풍경이 있는지와 상관 없이 전창이 있다. 길 건너 인도에 서서 집을 올려다 보면 거실 벽에 걸린 시계로 시간 확인도 가능할 정도로 집안이 다 들여다 보였기 때문에 항상 커텐을 쳐두거나 집안에서도 옷을 갖춰 입고 있어야 했다. 현관 오른 쪽으로는 내방. 길고 커서 책상을 벽에 붙이지 않고 사장님 방처럼 앞을 보게 배치했다. 전에 살 던 집에서 쓰던 소파는 창문 아래 두었다. 집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정면에 고양이 발 욕조가 있 는 욕실, 왼쪽에 화장실이 딸린 안방이 있었고, 오른쪽으로 주방과 작은 방 하나가 더 있어서 내 침실로 썼다. 넓은 집에 살아보기 전까진 집은 넓으면 무조건 좋은 거라 생각 했었는데, 가사 일을 전담하는 사람이 없이 둘이 살기에 이 집은 지나치게 넓었다.

미국에 있는 언니는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며 자기

앞가림을 하기에 바빴고, 무너지는 엄마는 온전히 내 몫이었 다. 남편을 잃은데 갱년기까지 겹쳐 수면제 없이는 잠들지 못하던 엄마가 생기를 찾기 시작했던 게 일곱번째 집으로 이 사 오기 조금 전이었다. 낯설었던 건 욕망이 없는 듯 살아온


“시간이 멈춰 있던 방. 봄에 들어가 가을이 되어서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엄마가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해 행복해 질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생각해 보면 엄 마처럼 젊고 예쁜 사람이 여자로서의 행복을 포기하고 혼자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그렇게 사시 라 요구할 권리도 내게는 없는 거였는데, 단지 그 행복이 더이상 내가 아니라는 데서 오는 상실감 때문에 힘들었던 것 같다. 우리끼리 잘 이겨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엄마한테는 또 다시 남편 이 필요한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꼬박 6개월을 방 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뭘 했는지 물어봐 야 아무것도 한 게 없어 대답할 말이 없다. 사람이 일생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멍하니 있을 수 있 는 시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아마 나는 그 시기에 다 써버렸을 거다. 이러고 있으면 안돼라 고 생각하는 날도 있기는 했지만 그 상황을 스스로 깨고 나오기에는 무기력하고 여력이 없어 아무 것도 시작할 수가 없었다. 밤새 영화를 보다가 소파에서 잠을 잤다. 엄마가 집에서 나가면 방에서 나와 뭔가를 집어 먹고, 엄마가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기 전에 방으로 들어갔다. 한 집에서도 마주 치는 일 없이 지냈고, 가끔 마주치는 시간은 서로를 미워하는데 썼다. 그렇게 가시가 잔뜩 돋아서 서로를 찌르고 찔리던 와중에 미국에 있는 언니가 조카를 낳았다. 나는 엄마와 상의 없이 1년짜리 비행기표를 샀고 2009년 겨울. 미국으로 갔다.


건축이 좋아 #2 aoikasa “나는 연구소에 피카소를 초대하고 싶습니다.” (Jonas Salk, 솔크연구소의 건축주이자 소아마비 백신 개발자)

솔크씨가 내 사무실을 방문하여 생물학 연구실을 짓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곳에 피카소를 초대하고 싶다고 했을 때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이루어진 만남의 장소를 떠올렸다. 한편 과학실험실은 ‘ 헤아릴 수 없는 것’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다. 솔크박사는 빛 속에서 확장을 향해 일하는 사람을 ‘ 생물학적 엔지니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연구소에 있기를 원한 생물학자는 헤아릴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희망을 헤아릴 수 있을 때 희망이 무엇인지 안다.’ 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언제나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남을 것이다. 또한 이런 식의 생각을 지속하면 헤아릴 수 없는 것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결국 그 것의 꼬리조차 잡을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가정하기보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생각할 때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Louis.I.Kahn 처음과 끝. 솔크 생물학 연구소. 샌디에고 해안, 라 호야(La Jolla) 에는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는, 그러나 너무나도 특별한 건축물 하나가 있다.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I. Kahn)의 1965년 작, ‘솔크생물학연구소(Salk Institute of Biology)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건축관련 공부를 해 본 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 건물, 20세기 현대 건축사에서 끝없이 회자되는 이 건물은 나에게는 ‘ 건축’이라는 세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건축이론과 역사’라는 세계에 들어서게 되는 ‘시작’이자 ‘끝’인 바로 그런곳이었다. 솔크생물학 연구소는 그야말로 할 얘기가 너무나도 많은 건물이다. 건축가 루이스 칸에 대한 이야기, 건축주 솔크박사와 루이스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루이스 바라간이 칸에게 외부공간디자인에 대해 해 주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서비스받는 공간과 서비스되어지는 공간이라는 건축적 개념에 대한 이야기… 등등등. 현대건축사 및 이론 책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많은 이야기들은 이 건물이 얼마나 ‘중요한’ 건물인지를 알려준다.


kasa

첫만남 첫만남

처음 내가 솔크생물학연구소를 만난 건, 대학 2학년때 책아저씨에게 처음 샀던 루이스칸의 ‘침묵과 빛’ 처음책을 내가 솔크생물학연구소를 만난 건, 대학 2학년때 책아저씨에게 처음 샀던 루이스칸의 ‘침묵과 빛’이라는 이라는 통해서였다. 그 책 속에 쓰여진 루이스 칸의 말들은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무나도 책을 통해서였다. 그 책 속에 쓰여진 루이스 칸의 말들은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무나도 멋지게

멋지게 느껴졌고, 책 속의 사진들은 내 머리 속에 강한 잔상을 남겼다. 그리고 실제의 솔크생물학연구소를 느껴졌고, 책 속의 사진들은 내 머리 속에 강한 잔상을 남겼다. 그리고 실제의 솔크생물학연구소를 만난 건

만난 건 2001년 1월, 새로운 세기의 시작에 모두가 환호하던 그 때였다. 1년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2001년 1월, 새로운 세기의 시작에 모두가 환호하던 그 때였다. 1년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떠난 1

돈으로 떠난 1 달간의 미국여행. 여행의 끝에서 만난 솔크생물학연구소는 사진 그 한모습 장을그대로, 보며 늘 상상하던 달간의 미국여행. 그 여행의 끝에서그만난 솔크생물학연구소는 사진 한 장을 보며 늘 상상하던 아니 그대로, 그 이상이었다. 그 모습 아니 그 이상이었다.

Salk Institute of Biological Studies

을‘

Beach & Cliff Pacific Ocean

hn

이다.

는‘

그런

사실 첫 만남에서의 솔크연구소는 내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명확하게 말하면 내가 준비가 덜 되었던 거겠지만,) 휴일에

사실 첫 만남에서의 솔크연구소는 내게 그다지 친절하지 찾아가서 연구소의 핵심공간인 오픈스페이스에 들어갈 수

않았다. (명확하게 말하면 내가 준비가 덜 되었던 없었고, 그래서 난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건축책에 늘 등장하던

거겠지만,) 휴일에 찾아가서 연구소의 핵심공간인 그 풍경은 볼 수 없었다. 대신 난 솔크를 옆에서, 뒤에서 바라보며 첫 만남을 마무리하여야했다. 오픈스페이스에 들어갈 수 없었고, 그래서 난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건축책에 늘 등장하던 그 풍경은 볼 수 옆에서, 뒤에서 바라보다보니 책에서 보던 고정된 이미지가 아닌 없었다. 대신 보였다. 난 솔크를 옆에서, 뒤에서 바라보며 진짜 솔크가 콘크리트 기둥 사이로 내리쬐던 강렬한 첫 샌디에고의 햇빛, 빛과 그림자의 콘트라스트로 생겨나던 공간의 만남을 마무리하여야했다. 리듬감, 그리고 강렬한 햇빛에 의해 한결 부드러워진 노출

콘크리트와 티크 목재, 무섭게도 파란 하늘이 만들어내던 하늘을

옆에서, 뒤에서 바라보다보니 책에서 보던 고정된 이미지가 향한 풍경들. 새삼 이 건물이 어떻게 하늘과 바람과 해에

아닌반응하고 진짜 솔크가 보였다. 콘크리트 사이로 내리쬐던 있는지가 느껴지며... 비로소기둥 루이스 칸의 말들이

강렬한 샌디에고의 햇빛, 빛과 그림자의 콘트라스트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생겨나던 공간의 리듬감, 그리고 강렬한 햇빛에 의해 한결 부드러워진 노출콘크리트와 티크 목재, 무섭게도 파란 하늘이 만들어내던 하늘을 향한 풍경들. 새삼 이 건물이 어떻게 하늘과 바람과 해에 반응하고 있는지가 느껴지며... 비로소 루이스 칸의 말들이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Structure is the giver of Light. Jan.2001 / La Jolla, CA, USA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솔크연구소, 연구소 바로 저 너머에는 바다가 있는 듯 하지만... 사실 그 사이에는 괘나 가파른 절벽이 있다.

그 끝엔 너. 솔크연구소의 오픈스페이스 끝엔 바로 이 곳이...

솔크, 거꾸로 보기 하늘을 향해, 바다를 향해 열린 연구실

두번째 만남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2008년 6월, New York에서의 1년간의 공부를 마친 후 마지막 여정으로 선택한 곳은 역시나 내겐 ‘시작’의 장소인 그 곳, 바로 솔크생물학연구소였다. 첫 만남에서의 어리바리함을 버리고 이 번에는 ‘평일’에가서 ‘건축투어’까지 하며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연구실 내부도 구경하고, 서비스하는 공간, 즉 설비층도 구경하면서 그야말로 솔크 연구소를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두번째 만남 그러나 솔크가 주는 감동은 그 이후였다. 건축투어가 끝나고… 솔크 연구소 중정에 가만히 앉아 있던 그 시간.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2008년 6월, New York에서의 1년간의 공부를 마친 후 마지막 여정으로 선택한 곳은 루이스 칸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My Architect에서 보던 그 풍경 안에 들어가 그저 조용히 시간을 흘려 역시나 내겐 ‘시작’의 장소인 그 곳, 바로 솔크생물학연구소였다. 첫 만남에서의 어리바리함을 버리고 이 번에는 ‘평일’에 보냈다. 저 끝에 분명 태평양 바다가 있는데, 바다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중정 가운데의 물길을 통해 가서 ‘건축투어’까지 하며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연구실 내부도 구경하고, 서비스하는 공간, 즉 설비층도 구경하면서 흐르는 물밖에 이 곳에서 볼 수 있는 건 없다. 심지어 그 물의 끝에 있는 작은 수공간 마저 보이지 않는다. 나무 그야말로 솔크 연구소를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한 그루 없는 이 곳에서 그저 들려오는 건 바람소리, 그리고 가끔 이 곳을 지나는 연구원들의 걸음소리밖에 없다. 그러나 솔크가 주는 감동은 그 이후였다. 건축투어가 끝나고… 솔크 연구소 중정에 가만히 앉아 있던 그 시간. 루이스

칸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My Architect에서 보던 그 풍경 안에 들어가 그저 조용히 시간을 흘려 보냈다. 저 끝에

분명 태평양 바다가 있는데, 바다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중정 가운데의 물길을 통해 흐르는 물밖에 이 곳에서 볼 수 있는 건 없다. 심지어 그 물의 끝에 있는 작은 수공간 마저 보이지 않는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이 곳에서 그저 들려오는 건 바람소리, 그리고 가끔 이 곳을 지나는 연구원들의 걸음소리밖에 없다.


존재와 존재

사람이 있어 채워지는 솔크연구소.

연구는 생각보다 외로운 일이다.

솔크연구소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용기 있는 자들의 장소이다.

그 외로움 가운데, 함께 같은 길을 걷는 이들이 있다는 건 꽤나 위로가 되는 일.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테라스 공간.

나무를 심지 말라는 루이스 바라간의 조언에 따라 이 공간에는 나무 한 그루 없다는 건 유명한 일화. 그러나 왜 바다조차 보이지 않게 하였을까. 하는 의문은 솔크연구소에서 나와 바다쪽으로 이동하면서 오히려 조금씩 풀렸다. 솔크연구소는 바다에 직접 접한 것이 아니라 서쪽 해안과 맞닿은 언덕 위에 있기에 바다와 연구소 사이에는 바위절벽같은 언덕이 있다. 이 곳에서 사람들은 행글라이더도 즐기고, 해수욕도 즐기곤 하는데… 아마도 루이스 칸은 연구소와 바다 나무를 심지 이 말라는 루이스 바라간의 조언에 이 싶다. 공간에는 한 그루 없다는 유명한 일화. 그러나 왜 바다조차 사이의 공간은 숨겨두고 싶었던 게 따라 아닐까 마치나무 연구소 바로 끝에 건 바다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 보이지 않게 하였을까. 하는 의문은 솔크연구소에서 나와 바다쪽으로 이동하면서 오히려 조금씩 풀렸다. 솔크연구소는 위해, 그 사이공간은 숨겨버린 것이다. 그렇게 이 공간은 철저히 의도된 대로 ‘비워져 있다.’ 바다에 직접 접한 것이 아니라 서쪽 해안과 맞닿은 언덕 위에 있기에 바다와 연구소 사이에는 바위절벽같은 언덕이 있다. 이 곳에서 사람들은 행글라이더도 즐기고, 해수욕도 즐기곤 하는데… 아마도 루이스 칸은 연구소와 바다 사이의 이

공간은 숨겨두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마치 연구소 바로 끝에 바다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 그 사이공간은 숨겨버린 것이다. 그렇게 이 공간은 철저히 의도된 대로 ‘비워져 있다.’


우리 시대의 기념비성 루이스 칸의 건축은 기념비적이다. ‘기념비적(monumental)’ 혹은 ‘기념비성(Monumentality)’처럼 현대 건축에서 우리에게 ‘오해’되는 말이 많지 않을까 싶지만… 루이스칸 건축이 기념비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쉽게 기념비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지배의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독특한 형태로 혹은 엄청난 크기나 높이로 주변을 압도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루이스칸 건축이 보여주는 기념비적 성격, 즉 기념비성은 공간의 기념비성이다. 재료의 순수함과 공간과 장소의 합일로 만들어내는 절대 과하거나 압도하지 않지만 저절로 그 앞에 서면 겸허해지는 바로 그러한 기념비성이 아닐까. 루이스칸의 솔크 생물학 연구소는 완전히 비어 있기에 완전히 채워진다. 그 곳에서 마지막 본 풍경. 솔크 생물학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연구자인 듯한 두 사람이 커피를 들고 그 길 끝에 서 있던 풍경. 솔크는 그들이 있음으로 인해 분명 완성되는 듯 했다. 그래서 난 건축잡지와 건축책에 자주 등장하는 ‘완전히 비워진’ 솔크의 오픈 스페이스 사진보다… 사람이 있어 ‘완벽해진’ 이 사진이 더 좋다. 건축주였던 솔크박사는 루이스칸에게 ‘연구소에 피카소를 초대하고 싶소’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과연 피카소가 이 곳에 초대되었다면 마음에 들어했을까? 피카소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겐 마치 ‘처음과 끝’ 같은 장소였다.


웹디자이너 별볼일

없는

생존매뉴얼 스펙으로 너이자디웹 일볼별

는없

얼뉴매존생 로으펙스


Chapter 4

예전 다니던 회사에서 외근을 나갔다 복귀하는 길에 택시를 탄 적이 있다.

{화술}의 생존매뉴얼

“아저씨 신사동 앙드레김 부티끄 가주세요.”

별 볼 일 없는 스펙으로

백이면 백, 택시 기사들은 그곳을 알고 있었다.

신사동에서 앙드레김 부티크는 랜드마크격인 곳이라

“앙드레 김 참 이상한 사람이었는데. 그죠 손님?” 두껍게 내려앉은 적막을 깨고 택시기사가 무심코 잘 다니던 4년제 대학을 때려치우고 서울로 상경해

툭 던진 한마디였다.

발 빠르게 2년제 디자인 과를 졸업.

“왜 이상하다고 생각하세요? 기사님?”

막상 졸업하고 나니 받아주는데도 불러주는데도 없다.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기사 아저씨와 농담이나

그때부터 이 악물고 익힌 갖가지 처세술과 생존법을 이용해

섞자는 속셈으로 말을 되받아쳤다.

처음 취직한 회사에서 2년여 만에 팀장으로 승진했다.

“생긴 것도 특이하고, 옷도 매일 똑같은 것만 입고

앞으로 수주에 걸쳐 별 볼 일 없는 스펙으로 몸 건강히

무엇보다 말투, 그 말투가 진짜 이상하죠.”

살아남는 방법을 쓸 예정이다.

기사 아저씨는 평소 같았으면 자신의 말에 별다른

거의 모든 텍스트가 주관적 경험에 의거한 것이기에 관점에

저항없이 맞장구 쳐주는 손님을 만났겠지만 애석하게도

따라 비판적 지점들이 상당 부분 형성될 여지가 크다.

나는 앙선생님을 무척이나 존경한다.

국내의 많고 많은 웹디자이너 중 하나의 개별적 사례로

개그프로그램에서 앙드레김을 희화하는 장면이

봐주시면 감사하겠다.

나오면 곧바로 텔레비전을 꺼버릴 정도다. 그래서인지 기사 아저씨의 말을 수긍하기 힘들어 다음과 같이 되받아쳤다. “저는 그 말투 퍽 듣기 좋던데요. 딱 봐도 디자이너 같잖아요.” “.........................” 내 말을 들은 기사 아저씨는 백미러로 나를 한 번 훔치시더니 그 뒤로 한참이나 말이 없으셨다.

디자이너스런 말투. 내가 앙선생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정체성이 대변 되는 말투라니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엘레강스하고, 퐌타스틱하며, 유리위로 흐르는 옥구슬 같으며...” 앙선생님이 구사하는 수사법의 세계에는 실로 다양한 은유와 대유로 가득하다. 사실, 일상어에서 선생님이 구사하는 만큼의 비유적 표현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말하는 이가 비유적 용법들을 다소 많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당신은 정확하게 본 것이다.

사용한다는 것은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상대에게 보다

나는 혈액형을 믿지 않지만 믿는다.

현현히 전달하고 싶어하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디자이너 이야기하다가 무슨 씻나락 까먹는

앙선생님은 일반인보다 단지, 조금 더 명확하게

소리냐며 옆집에서 누가 문을 드르륵 열고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내게 소리칠지도 모른다.

선생님의 말투에서 다소 과장된 부분들을 제거하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인즉슨, 원래부터 유기체의

그의 옷만큼이나 순수한 타인에게 닿고 싶은 열정이

속성이 혈액형에 맞게 분리되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남을 것이다. 그것은 폄훼되거나 놀림감이 되기에는

사회적으로 관습화된 의미들을 거꾸로 습득해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이다.

나간다고 믿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A형에 대한 편견이 형성되어 있으면

가끔 디자이너 생활을 하다 보면 어떨 땐 온종일

그런 것을 무시하며 살다가도 가끔, 내가 소극적인 것을

디자인 대신 말만 하다 하루를 다보내는 경우가 있다.

발견할 때 “피 때문일까?”라고 자문할 때가 있다.

디자이너는 크게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첫째, 디자이너.

동일한 맥락으로 디자이너와 기획자라는 직업에

둘째, 기획자.

원초적으로 그러한 성격이 부여되어 있다기보단,

셋째, 클라이언트.

사회가 부여한 편견과 선입견들을 한 개인이

당연하게도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이해의 정도가 제각각이다.

사후적으로 체득해 나간다는 편이 적어도 내게는 더

그중에는 기획자 마인드를 가진 디자이너나, 디자이너를

설득력 있는 것 같다.

잘 이해하는 기획자도 있긴 하다.

디자이너 사이에 형성된 선입견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그렇지만 대부분의 디자이너나 기획자들은 자신이

주로 이미지를 다루는 디자이너의 모습에서

속한 집단의 관습적 말투에 물들어 있는 경우가

감수성은 풍부하지만, 논리나 이성적인 측면은

많으며 나 또한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취약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디자이너와 기획자, 두 집단을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뜨겁던 지지난 여름 구여친과 추상미술 전시를 본 적이 있다.

선입견이 있을 것이다. 언뜻 디자이너는 감성적이고

추상미술 전시가 으레 그렇듯 “회화는 보이지 않는 것을

독단적이며 나르시시즘이 강할 것 같고 기획자는

표현해야 한다”는 파울클레의 테제아래 그날도 충실히

이성적이며 논리를 앞세우지만, 감성적인 측면에는

그 모호함을 관중들 앞에 드러내놓고 있었다.

다소 취약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작품들을 감상하다 마크 로스코가 그린 두 개의 색 면이 맞닿아 있는 작품 앞에 나와 구여친의 발걸음이 멈춰섰다.


나는 속으로 “느낌 괜찮은데”라고 생각했지만

다들 자기가 속한 분야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예술과는 거리가 있던 구여친이 도무지 이해하지

힘들 텐데 타인의 분야에 대한 깊은 맥락까지 이해하며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서 있어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살아가기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닐 것이다.

순간 창작하는 사람의 사명감이랄까, 누가 시키지도

그렇기에 전문가가 비전문가에게 전문적인 화두를

않았는데 구여친에게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전문가들의

던질 때는 자신의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 때보다

견해에 대한 장광설을 펼쳐놓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내 앞의 사람과 전문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내 이야기를 듣자 구여친은 더더욱 본전 생각난다는

나누기 위해 갖춰야할 최소한의 준비라고 생각한다.

표정으로 “그러면 뭐해 내가 느껴지지가 않는데,

실무 디자인을 하다 보면 서로 다른 이해도를 가진

밥이나 먹으러 가자! 라고 말했다.

그룹 간의 견해차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어있다.

“....................”

간단히 실무 디자인의 순서에 대해 말해 보면, 디자인 컨셉 회의를 거쳐 디자이너가 표현할

그렇다.

시각적 이미지가 기획자와 충분히 공유되는 것이 우선이다.

모더니즘 회화는 예술성에 대한 과도한 강조로

그다음 와이어 프레임이라고 하는 디자인 해야 할

너무 심오하고 추상적으로 변해 대중으로부터

대상의 뼈대가 그려진 문서를 기획자가 설계한다.

분리되었다.

와이어 프레임 단계에서는 디자인에 삽입될

그것은 일종의 미로 같은 것인데 전문적인 비평가의

내용적 측면과 강조될 부분들이 주로 표시된다.

도움 없이는 본질에 닿기조차 어려운 것이다.

그것을 시각적으로 어떻게 가공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독창성에 대한 과도한 추구가 예술을 닫힌 공간으로

디자이너의 몫이다.

끌고 가버린 셈이다. 더는 구여친에게 닫힌 공간을 우리 함께 열어보자! 라고 말하기도 귀찮은 형국이었던지라 미술관 앞의 밥집으로 조용히 향했다. 그리곤 구여친의 투털거림을 반찬삼아 꾸역꾸역 식도로 뜨거운 국물을 쏟아 부었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 확실히 깨달은 바가 하나 있다. 그것은 하품나올 정도로 당연한 것인데,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분야가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에게는 과학적 담론이 있을 것이고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도 그들만의 전문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가수의 언어적 용법이 있을 것이고 화가의 언어적 용법 또한 있을 것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가공의 범위가 항상 말썽이다.

이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디자인에 있어

가끔 디자이너는 창의라는 명목하에 기획자의

말로 쉽게 표현이 어려운 감각적인 부분들을 기획자에게

정성스런 기획을 사정없이 뭉개며 자신만의 성을

명확히 묘사하기 위한 비유들을 찾는 것이다.

축조 해 나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괜히 젠체하고 싶어 서체의 유래가 어떻다느니

순간, 소리는 나지 않지만 조용한 분노를 발산하는

얀치홀트는 알고 있느냐 라든지 하는 전문분야의

기획자의 그림자가 내 모니터위로 드리운다.

이야기를 해봤자 서로 간의 장벽만 높아질 뿐이다.

“김 팀장님 잠깐 커피 한 잔 하시죠.”

오히려 그때 필요한 것은 내가 서 있는 공간으로

“......................네에.”

타인을 초대할 수 있는 쉽게 쓰인 초대장 한 통이 아닐까.

커피 한 잔. 나는 그 말이 그렇게도 무서웠다.

내 경우 엘레강스하고 아름답고 유리에 옥구슬이

아무도 없는 옥상, 그다지 친하지 않은 기획자와

떼구르르 굴러가는 다소 과장된 비유들이 가끔은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내 모습이 나뒹구는 깨진

타인에게 보내는 초대장을 대신하기도 했다.

유리 조각에 비친다.

커피의 바닥이 보일 때쯤 기획자는 싱긋 웃으며

그 뒤로 한참이나 우리는 자신의 서운함을 타인에게

“그럼 지금 디자인으로 가보죠, 대신 클라이언트가

토로하기 시작했다.

싫어하면 바로 바꾸기에요”라고 말한다.

기획자의 말을 요약하자면, 자신이 제작한

“감사합니다. 그렇게 할께요.”

와이어프레임은 혼자만의 결정이 아니며 클라이언트와 시장조사를 종합한 아주 믿을만한 자료라는 것이다.

사실, 기획자가 진정 디자이너의 말에 설득되었다고

그런 믿음직한 자료가 창의라는 명목하에 디자이너에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참히 재해석되는 것이 가슴 아팠던 것이다.

자신과는 다른 이해의 차원에 서 있던 디자이너가

이런 일은 디자이너를 하다 보면 일주일에

진심을 담은 언어를 사용해 연결되고 싶어하는 모습에서

두세 번씩은 겪게 되는 일이라 별로 놀랍지 않지만

마음의 동요가 일어났다고 나는 믿고싶다.

지루하다는 표정을 기획자에게 들키지 않도록

가끔은 이럴 때도 있는 걸 보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디자이너가 끝없이 내뱉어대는 비유들을

우선 내 경우 내 디자인에 대한 의도를 이야기

느끼함으로 단박에 처벌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하기에 앞서 기획자가 만든 와이어프레임을 칭찬하는

그것은 타인에 대한 열정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끝)

일부터 시작한다. “디자인 하려고 피피티를 딱 열었는데

<5부 분노의 생존매뉴얼 계속>

와이어프레임에 쓰인 폰트나 컬러가 기획자가 사용한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어요.” 기획자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띤다. “제가 어렸을 때 사생대회에서 상도 받고....” “아....네”

블로그 clichecliche.blog.me

커피가 다 식었을 때쯤 자신이 디자인한 의도를 기획자에게 신중히 이야기해 보자.

이메일 clichecliche@naver.com


여행기


글. 사진. 박민수



우울한 청춘

글. 그림. 철민


부산오뎅 이야기 ( 제시와 셀린느 )

나는 가끔 부산을 간다. 부산뿐만 아니라 경조사 같은 일이 있으면 전국 어디든 웬만하면 가려고 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무조건 가는 건 아니고 상대방과의 친밀도를 봐서 가야 할 것인가 안가야 할 것 인가 축의금 혹은 부의금만 낼 것인가 그날의 다른 스케줄과 겹치진 않는가 아님 못 가서 정말 미안하다는 아쉬움 에 눈물 흘리고 있다며 화상통화를 하면 눈물도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철저한 연기 톤으로 어떡하든 생각하 고 있다는 느낌을 주려 한다. 이 모든 게 어릴 적 얘기하던 공부보다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회생활을 잘 해야한다. 라는 어떤 가르침에 의한 것도 아니고 아님 나중에 나의 경조사에 오게 하기 위한 GIVE & TAKE도 아니고 그냥 단순한 습관인 것 같다. 시간과 경비,정신적 에너지의 소비 이런 게 아깝다기보단 어떤 장소에 가기 위해서 1~2시간 잠을 못 자서 그날의 바이오리듬이 깨지는 것 말곤 아직까진 괜찮은듯하다. 버스 기차 택시 전철 모든 이동수단에서 잠을 잘 자는 나이기 에 모자란 잠은 어디서든 보충하면 되니까. 기차 안에서 자면 되니까 불평 불만하면 안되고 하지 말라면 하지 말고 까라면 까고 밥 먹으라면 먹고 더 먹으라면 배불러도 더 먹고 공부하라면 책1~20분보다가책상에서 잠이 들더라도 일단 책상에 앉고 하던 주입식 교육의 피해자증후군이라고 하면 너무 비겁한가?


암튼 경조사 말고도 일년에 고정적으로 설날 추석 어버이날 아버지 생신 어머니생신 5번은 무조건 부산에 내려 간다. 이번 추석에도 어김없이 내려갔다. 최소 일년에 5번은 기차를 타고 가다 보니 기차를 타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도 하 고 핸드폰을 꼼지락거리기도 하고 잠도 자고 옆 사람과 비좁은 칸에 앉아 있다 보니 행여나 뒤척이다가 옆 사람에게 피해 줄까 봐. 자라처럼 웅크리고 있기도 하고 자다 깨다 하다 보면 부산에 도착을 한다. 하지만 그날은 나의 기차 속 루틴과 같은 행동을 약간 수정해야 할 사정이 생겼다. 내 옆에는 여태 내가 어릴 적부터 탔 던 비둘기호 통일호 새마을호 우등고속버스 KTX 통틀어 역대 급 미모의 여인이 앉아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순간 비포선 라이즈의 제시(에단호크 역)로 빙의한다. 나는 비포선라이즈의 제시로 그녀는 그녀의 의도와 상관없이 셀린느(쥴리델피 역)로 임명을 한다. 이제 주변상황만 스텐바이하면 된다. 하지만 떠드는 노부부가 없다. 심지어 혼자 타고 갈 때면 그렇게 울던 갓난아기들 도 그날따라 조용하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감독 겸 주연으로 가는 거다. 가슴 콩당 시나리오를 짠다. 음...계란 하나 드실래요?사이다 드실래요? 커피 드실래요? 맛밤 하나 드실래요? 쵸코칩 쿠키 드실래요? 맥반석 메추리 알 드실래요? 아..고민이다 이건 왠지 많이 본 듯한 레퍼토리다. 오뎅 좋아하세요? 어디가세요? 서울어디 사세요? 도저히 첫 대사를 뭐로 날려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곤 신중하자고 다짐을 한다. 시간은 많다 두 시간 반이나 남았다. 자칫 첫 대사를 잘못 읊었다가 부산가는 내내 어색하게 갈수도 있다. 독침에 맞은 것처럼 뭐에 홀린 것처럼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촌철살인의 대사에 대한 생각과 첫마디를 꺼낼 적당한 타이밍을 생각한다. 내가 생각한 장소는 대구...대구 정도면 부산까지 30분, 얘기가 잘 풀리면 약간 아쉬운 시간일수도 있고 잘 안 풀리면 화장 실 몇 번 왔다갔다하고 전화 받는 척 어쩌고 하면 뻘쭘한 시간 보내기 딱 좋은 지점이라고 결정을 한다. 책 읽는 남자의 풍모를 풍기기 위해 좌석 앞 그물망에 코레일 측에서 공수해놓은 책들을 독파한다. Candy crush를 너무 하고 싶었지만 참는다. 대구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생리현상이 발생 할까봐. 미리 한번 다녀온다 책을 갑자기 봐서 그렇 나 잠이 온다 대전쯤 왔나?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잠깐 자기로 한다. 배우들도 잠 못자가면서 쪽 대본 받고 하다 보면 피곤해서 발 연기하지 않는가? 드라마 발 연기는 있어도 영화 발 연기는 없다는 나의 연출철학... 대구까지 자는거야. 스르륵. 눈을 감으면서 생각을한다. 그래! “저는 홍대에서 부산오뎅집을 하는 사람입니다 오뎅 좋아하세요?” 셀린느 입장에서 얼마나 신선한 대화 내용인가ㅎㅎ 잠깐이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톡톡 내 어깨를 친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녀가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걸 인지하고 옷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눈 을 뜬다. 고객님 종착역에 다 왔습니다 나의 셀린느는 어딜 가고 객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내 옆에 우두커니 서있다.


마을길 마포 2로 “와우 X 홍대” - 약 40분 (1.6km)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마포구에는 2개의 산이 있습니다. 하나는 홍익대 뒷편에 숨어있는 오늘 소개해 드릴 ‘ 와우산’. 다른 하나는 마을 공동체로 유명한 ‘성미산’ 입니다. ‘와우산’은 홍익대를 다니는 혹은 인근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곳이면서도 홍대 앞을 방문 하는 다른 지역의 분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입니다. 보통 산 입구라고 이야기 할 만한 곳이 거의 주택 가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꼭 올라가 보아야할 만큼 도드라지게 솟아있지도 않기 때문 입니다. 가려진 동네의 언덕인 셈이죠. 홍대 앞을 다닐 때 이런 생각 해보셨습니까? ‘대체 왜 이쪽은 오르막이 이렇게 많은거야?’하고 말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홍익대학교는 산 중턱에 있는 것입니다. 실제 산 입구는 저 밑의 지하철역 즈음이 아니었을까 싶 습니다. 구불구불하고 나무가 잔뜩한 길은 일찍이 사라지고 산은 콘크리트에 가려 있습니다. 딛는 곳이 어딘 지도 모르고 다니는 셈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와우산과 와우산 공원 그리고 잘 알려지지는 않은 홍익대 안뜰을 소개합니다. 어느곳이나 여 러분들이 다니지 못할 곳은 없습니다. 언제든 편하게 다니시기 좋은 곳들입니다. 다만 이번 길에는 산길이 조 금 포함되어 있으니 저녁은 피하시고 낮이나 오후에 즐기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흔적을 찾기 어려운 얕은 산이라 하더라도 산은 산이니 구두는 피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두번째 마을길은 마포 2로 “와우 X 홍대” 입니다. 와우공원과 잠깐의 산길, 홍대 안뜰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걸으신후 바로 쉬실 수 있게 오늘 길의 종점은 홍대 정문 앞입니다.


출발: 산울림 소극장 앞 3거리 마을길 마포 2로의 시작점은 <산울림 소극장> 앞입니다. 버스 273번 7011번, 마을버스 8번 9번이 지나가는 곳입니다. 홍익대학교 정문을 바라보시고 왼편 신촌방향으로 주욱 걸어오셔도 됩니다.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내리셔서 기찻길 고기 골목을 지나오시거나 홍대앞 역에 대리셔서 산울림소극장 방면으로 오시면 됩니다. 산울림 소극장 앞 3거리를 가만히 보고 계시면 오른 쪽 윗편으로 드물게 차가 나오고 들어가는 것을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아주 수상한 느낌을 주는, 어지간해서는 갈일이 없을 것 만 같은 길이 하나 있습니다. 예전 쌈지 스페이스가 있던 골목길입니다. 오늘은 그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앞의 횡단보도를 지나 공구 철물이 써있는 간판 옆 윗길로 주욱 올라 갑니다. <와우 공원>이라는 표지석이 나타날 때 까지 걸으시면 됩니다. <와우 공원> 표지석을 찾으셨다면 한가지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위의 공원을 보시고 가실지 아니면 오른편 길을 따라 바로 올라가실지 결정하셔야 합니다. 오늘은 <와우 공원>을 들렀다 가도록 하겠습니다. <와우 공원>은 지역민들의 쉼터로 높지 않은 곳에 농구장과 베드민턴장이 구비된 지역민들의 소중한 공간입니다. 저도 이곳에서 몇바퀴 뛰어보기도 하고 철봉도하고 노래도 불러보았습니다. 기왕 올라가신다면 한바퀴 정도는 돌아보시면서 주변의 무엇들이 있는지 크게 둘러보시면 재미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공원의 트랙을 따라 한바퀴를 도시면 처음 올라왔던 계단 오른쪽으로 배드민턴 장 입구와 작은 길이 보이실 겁니다. 그쪽으로 오른편으로 오른편으로 걸어 나가시면 처음 <와우공원> 표지석을 보고 오른편으로 바로 올라가는 길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와우산의 정상은 군 부대가 상주해 있기 때문에 끝까지 갈 수 없지만 사실상 공원에 다녀오시면 와우산을 다녀오신 것과 같습니다. 이제는 아스팔트 길을 따라 잠시 걷습니다. 홍대 아래 거리와는 사뭇 다른 길의 상쾌한 공기와 함께 조금 걷다보면 오른 편에 홍익대학교의 또다른 후문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마을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인근에 사는 학생들이 등교할 때 이용하기도 하는 그런 곳입니다. 한편으로는 홍익대학교가 와우산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 할 수 있는 곳이기도합니다. 홍익대학교 쪽으로 가지 않고 조금 더 올라가면 바로 내리막이 나옵니다. 이제 오르막은 끝났다고 보면 됩니다. 이정도 길이면 산이라고 하기에도 조금은 부끄러운 것 같지만 있다가 잠깐 산길이 나옵니다. 길을 따라가다 오른편에 놀이터가 보이면 놀이터 옆의 산길로 들어갑니다. 그 길을 따라 하산을 하시면 됩니다. 하산 중간에 정자도 있으니 잠깐 쉬실 수도 있습니다. 길이 외길이어서 따로 길을 잃을 일은 없지만 이 구간이 포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구두를 신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계단이 나오고 큰 건물이 보이면 이제 와우산은 끝난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오른편의 홍익대학교로 들어갈 겁니다. 홍익대학교는 앞서 말했듯 산의 중턱에 있는 학교 입니다. 주변의 풍경을 찬찬히 즐기시면서 지나치시면 재미있습니다. 원래 홍대는 오늘 보실 대부분의 나무가 없는 곳이었는데 어느해인가 조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학교를 다니던 사람들은 반발이 심했는데 시간이 지나 보니 나름대로 운치와 편안한 마음을 주는 공간이 된 것 같습니다. 그냥 그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럼 다시 홍대 정문으로 내려 오실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째 오늘은 오른쪽으로만 빙빙도는 길이 되었습니다. 우파도 아닌데 말입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산울림 소극장 -> 철물점길 -> 와우공원 -> 배드민턴 장 옆길 -> 오르막 -> 놀이터 옆길 -> 하산 -> 홍익대 후문 -> 홍익대 내부 -> 홍익대 정문


무엇이 들어있을까요?

이달에도 재미있는 것들을 준비했습니다. PDF를 보시면서 누르셔도 되고 스마트 폰으로 찍으셔도 됩니다. 여전히 월간이리 내 원고의 일부분이나 필진 이름, 블로그 주소등을 누르시는 경우 해당 페이지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시’ 바다비 일요 시극장 2013.10.27 http://cafe.daum.net/badabie


데이비드 호크니 (David Hockney) 우리는 태양빛을 소화하지 못합니다. 비타민 D를 만들어내긴 하지만요. 햇빛을 받아서 단백질을 합성해 내거나 하진 않죠. 식물은 다릅니다. 태양빛을 받아 그들 방식의 소화를 해냅니다. 그리고 우린 그 식물을 먹거나 또 그 식물을 먹은 동물을 먹어 소화할 수 있습니다. 먹이 사슬 이야기를 하 자는 것이 아니고요. 남이 소화한 것을 먹는 것에 대해 말해보자는 건데요. 때로 남의 그림을 보는 것으로 실제를 더 잘 보게 되는 때에 대한 겁니다. 남의 그림을 보는 것으로, 그가 소화해낸 것을 통 해 실제를 더 잘 받아들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건 어떻게 그린 걸까, 무얼 그린 걸까. 왜 그린 걸까? 하며 나라면 어떻게 표현했을지 생각합니 다. 실제로 그려보기도 하구요. 그런 과정에서 표면적으로는 형태를 표현하는 법, 기법에 대한 이 해가 높아집니다. 기법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작가에게 온전히 속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표현 이란 것이 사실은 재료와 그 기법의 한계에 의한 것일 수도 있음과, 그 한계에 대한 적응 내지 극복 의 과정을 깨닫기도 합니다. 본 것을 평면으로 옮김에 있어서의 많은 우여곡절은 그림 그리는 이들에게 지금도 계속 되는 것입 니다만, 사진이 넘쳐나고, 인쇄가 손쉽고, 직접 투사가 가능하며, 컴퓨터상에서의 이미지 복제와 수정이 간편해진 지금은 우리는 다른 것을 걱정해야합니다. ‘이미지들은 우리가 과거에 생각했던 현실의 정직한 묘사일까,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미치지 못할 만큼 생생하고 사실적이라고 여겨왔던 사진이 실은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하고 세계를 선명하게 바라보는 우리의 능력을 감퇴시킨 것은 아닐까?’ 데이비드 호크니 저 ‘명화의 비밀’ 196p 많은 시각예술가들이 그렇지만 데이비드 호크니를 이야기 할 때엔 특히나 더욱 바라보는 방식, 그 려진 방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작업요소로 삼는 작가임을 말해야합니다. 호크니는 1999년부터 서양미술사에 있어 광학기술이 그림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여 2001년 자신의 저서 ‘명화의 비밀 Secret Knowledge : Rediscobering the lost techniques of the Old Masters’에서 밝혔습니다. 그 것은 놀라운 것으로 앵그르, 카라바조, 벨라스케스 등의 대가들이. 그리고 많은 다른 화가들이 15 세기 초부터 광학을 이용하여 그들의 그림에서 인물과 사물의 형태와 양감, 색채의 표현의 정확성 을 높였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무엇을 그렸느냐, 그들이 본 것을 그렸다. 그러면 그 어떻게 보았 는지, 보는 방법에 대해 묻게 되죠. 신고전주의의 대가 앵그르가 그린 인물 드로잉이 무척 작은데 도 완벽하리만치 정교한 것을 본 호크니는 어떻게 이렇게 그렸을까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는 결국 많은 화가들이 거울과 렌즈, 강한 조명과 암막을 이용하여 대상을 평면에 투영했고 그것을 손으로 복사했다는 것을 밝힙니다.


사진기술이 없던 시절 실제 같은 그림을 그토록 놀랍게 그려낸 화가들에 대한 경이로 꽉 차있던 사람들은 그들이 광학을 이용했다는 것에서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일종의 꼼수를 부렸으 니까요. 그렇다더라도 광학기술을 도입하여 그린 화가들의 그림이라고 평준화를 이루지는 않습 니다, 그림은 여전히 본 바를 손으로 그리는 것이라 잘 보고 잘 그리는 화가만이 뛰어난 화면을 만 들어냈습니다. 광학기술에 의존해 가능했던 실제 같은 그림은 그 기법에 의한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대표적 인 것이 바로 ‘카메라의 눈은 하나, 인간의 눈은 둘’입니다. 호크니의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그림은 그의 1960년대와 1970년 초반대의 것으로 주로 로스엔 젤레스의 수영장의 풍경과 인물을 찍은 사진을 기반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크니 와의 대화를 기록한 마틴 게이퍼드의 저술 ‘다시, 그림이다 Conversations with David Hockney by Martin Gayford’에 의하면 호크니 역시 자신의 당시 그림들을 좋아하지만 한계를 느끼고 새 로운 방식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 것은 카메라 렌즈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서였 습니다. ‘우리는 사진이 궁극적으로는 실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카메라는 기하학적으로 대상 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는 기하학적으로 보지만 또 한 심리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내가 저 벽에 걸린 요하네스 브람스의 사진을 본다면, 그 순간 브람 스는 문보다 훨씬 더 크게 보일 겁니다. (중략)’ 마틴 게이퍼드 저 ‘다시, 그림이다’에서 호크니의 발언 중 53p 호크니는 보는 방식을 연구하며 새롭게 그리기 위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으며 그에 기반하여 작업 도 계속해서 바뀌고 있습니다. 최근의 실험으론 야외에서 그린 대규모 풍경작업을 들 수 있으며, 현재 한국에 그 작품이 와있는 상태인데요.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Bigger Trees Near Warter’가 전시중입니다. 그림은 12.19m × 4.57m 사이즈의 대작으 로, 대략 50호 크기의 캔버스 50점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과천 미술관의 넓은 공간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워낙 큰지라 양팔을 벌린 디귿자 형태로 설치되었습니다. 전시장에는 그림과 함께 A Bigger Picutre라는 60분짜리 영상을 볼 수 있어 영상을 통해 지금 전시중인 그 거대한 회화작품이 영국의 테이트 모던에 기증되었으며, 야외에서 제작된 가장 큰 그림으로 꼽을 수 있다는 것과, 호크니의 작업 방식, 작업에 대한 생각, 생활과 같은 것 볼 수 있습니다. 호크니가 그 작업을 위해 그린 다양 한 드로잉을 함께 볼 수 있었더라면 무척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아 아쉬움이 큽니다만, 뛰어난 그 림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은, 소화시키고 더 잘-새롭게 보게 되는 면에서 무척 즐거운 일입니다.

글. 그림 지인 freshdrawing.blogspot.com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